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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 : 시대별 개관 4 (조선) 본문
한국의 역사 5 : 시대별 개관 4 (조선)
시대별 개관 4 : 조선
조선
조선(朝鮮)시대는 근세에 해당된다.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중기·후기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전기
1388년 고려의 무신으로서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왕·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혁명파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과전법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어 정몽주가 제거되자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한국의 역사 (연표) | |||||||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
환인 환웅 | ||||||
시 대 구 분 ‥ 원 삼 국 | 삼 국 | 남 북 국 | 후 삼 국 |
고조선 | ||||||
진국 | |||||||
삼한 | 옥 저 |
동 예 |
부 여 | ||||
진 한 |
변 한 |
마 한 | |||||
가 야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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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 려 | |||||||
신 라 | |||||||
발 해 | |||||||
후 백 제 |
태 봉 | ||||||
고려 | |||||||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삼별초의 항쟁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
조선 | |||||||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
대한제국 |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 |||||||
군정기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1398년, 1400년)이 발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특히 사병을 혁파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양민으로 복귀시키는 등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북방 지역인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시켰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였던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하고 국가의 의례서인《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또한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들인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중기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 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는데,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 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 (인조반정).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전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후기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영조의 강력한 탕평정치로 인해 왕권이 강화되고 붕당정치의 힘은 약화되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으며,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이와 전후하여 서양의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되었고,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東學)이 창시되었으나 모두 박해를 당하였다.
말기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의 어린 둘째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1876년 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이후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1884년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반영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파병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이에 고종은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였던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을미의병). 한편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근대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시기로 분류된다.
대한제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존속한 제국이다.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진 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 개혁인 광무 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구본신참' 성격의 점진적인 개혁으로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독립협회도 수구파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더욱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1904년 2월,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에게 '한반도내에 영토,시설 등 군사적 이용을 협조할것'을 강요하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고, 나아가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고문정치).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는데,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제국이 전략적인 승리를 얻게되어 한반도에 영향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어서 1905년 11월, 일본은 일방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통감정치).
이에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 늑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으며, 다시 의병이 조직되어 무장 항전을 벌였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통감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군대를 강제로 해산(軍隊害刪)하였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가담하여 의병 운동의 양상은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의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일제(日帝)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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