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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45 : 역사란 무엇인가? 본문
중국의 역사 145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역사(歷史)는 오랜 역사,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또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이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역사 연구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연속된 사건들을 검증하고 분석하며 종종 인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역사학은 고고학, 사회학 등의 주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역사라는 개념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어원
영어의 역사에 해당하는 단어인 “history”는 고대 그리스어의 ἱστορία(historia)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wid-tor-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어근은 영어의 wit, wise, wisdom, vision, idea, 산스크리트어의 베다(veda), 슬라브어의 videti, vedati 등에 남아있다. (wid-tor-와 weid 앞에 붙은 별표는 이것이 확정된 정설이 아닌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어 ἱστορία(historia)는 “조사와 탐문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Περί Τά Ζωα Ιστορία》(Peri Ta Zoa Istória, 라틴어 역어: Historia Animalium)에서 사용하였다.
이 낱말은 현자(賢者), 증언자, 혹은 판관을 뜻하는 ἵστωρ(hístōr)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호메로스의 시, 헤라클레이토스, 아테네 젊은이들의 선서, 보이오티아의 비문(법적인 의미로 "판관", "증인" 혹은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사하다"는 뜻의 historeîn은 이오니아 그리스어의 파생어로서, 고전기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퍼져서 나중에는 헬레니즘 문명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맥락은 16세기 말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사"에 대해 쓸 때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는 historia를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썼다.(반면 과학은 추론, 시는 환상에 따른 것이다)
1390년 영어에도 이 낱말이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중세 영어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뜻했다. 그러다가 15세기 말에 이르면 "과거 사건의 기록"으로 의미가 좁아진다. 독일어, 프랑스어, 다른 게르만어나 로망스어에서도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의미하는 데 같은 낱말이 쓰인다. 형용사 'historical'은 1661년에, 'historic'은 1669년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연구자"를 뜻하는 'historian'은 1531년에 등장한다. 모든 유럽 언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명사들은 용례상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과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둘 다 의미하고 있다. 영어에서 후자의 의미로는 대문자를 써서 "History"라고 쓰거나, "역사서술 (historiography)"라고 쓰기도 한다.
한자어 역사(歷史)는 근대 이후의 'history'에 대한 번역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의미하는 '史(사)'는 원래는 '기록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하였다.
역사 서술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된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 된다.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참 과거"를 참칭하는 가짜 주장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역사 연구는 인문학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과학으로 보기도 한다. 역사는 두 학문 영역의 방법론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를 두 범주 중 한 곳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 학계에서 역사는 점차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20세기에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세계사 연구에서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거나 말로 전하며,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연구하여 역사적 의문에 해답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 역사가들은 기념물, 비문, 그림 같은 자료들도 이용했다. 일반적으로 사료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글로 쓴 기록, 구전(口傳),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들(유물, 유적). 역사가는 대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참고한다. 그러나 글로 쓴 기록은 선사와 역사의 구분이 된다.
고고학은 땅에 묻힌 유적지나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역사 연구에 유용한 분야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혼자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고고학적 발견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 자료가 쓰인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사학과는 별개의 방법론과 접근법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고고학은 텍스트 사료의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역사 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은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종종 현존하는 텍스트 사료와는 상반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의 역사상의 아나폴리스(18세기 동부 해안의 한 마을)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마크 리오니(Mark Leone)는 당시 기록 자료에서 보이는 "자유" 이데올로기 불구하고, 이때의 모든 역사적 환경의 연구를 통해 노예 소유와 부의 불평등을 밝혀서 텍스트 자료와 발굴 자료 사이에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연대기, 문화, 지역, 주제 등 다양한 기준이 있다. 이런 구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가령 "1800~1945년 과도기 시대의 국제 여성 운동"같은 경우 처럼 서로 겹치기도 한다. 현대 학문이 전문화 추세를 보이기는 하나, 역사가들은 매우 특정한 것과 매우 일반적인 것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역사 연구 분야의 하나인 "큰 역사"(Big history)는 이러한 전문화에 반대하여 보편적인 양상이나 추세를 탐구한다. 역사는 종종 어떤 실용적인 혹은 이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며, 단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하기도 한다.
고대의 인류 문명사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많은 사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류 역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로 여겨진다. 고대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판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기원전 4000년 전후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고대 문명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 예컨대 세계의 7대 기적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경이심을 자아내고 있다.
- 인더스 문명
- 황하 문명
- 이집트 문명
- 메소포타미아 문명
- 히타이트 문명
- 고대 그리스 문명
- 고대 로마 문명
- 페르시아 제국
-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 페니키아
- 카르타고
- 폴리네시아 문명
- 아스텍 문명
- 잉카 문명
- 한국의 역사
역사의 시대적 구분
선사 시대
역사 시대
대륙별 역사
지리학과의 관계
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종종 지리학의 도움을 받는다. 날씨의 패천, 물의 공급, 그리고 지표면의 생태 등은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성공적인 문명화를 이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의 지리학의 봐야 한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 세워졌다. 강물은 매년 범람하였고, 그 강둑에 흙이 쌓였다. 비옥한 토양은 농부들이 도시 사람들이 먹기에 충분한 곡식을 기를 수 있게 하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문명화를 돕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세계사
세계의 역사, 혹은 세계사(世界史)는 선사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구상 모든 인류의 경험과 활동을 기록한 역사이다.[1] 넓은 의미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같은 원인에서부터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진화 과정 전체를 다루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는 생활 양식에 따라 선사 시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와 같이 시기를 구분하며, 지역과 문화에 따라 서양사, 유럽사, 중동의 역사와 같이 구분하기도 하고, 한국사, 일본의 역사, 미국의 역사와 같이 나라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세계사는 이러한 시기와 지역 및 나라별 역사에 대하여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적인 연관성을 지닌 세계의 역사"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선사시대
선사 시대는 문자 기록이 있기 전 인류의 역사이다. 문자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당시 사용하였던 도구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선사 시대는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같은 석기 시대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지역의 청동기 시대 및 초기 철기 시대를 포함한다.
현생 인류는 100,000-50,000 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서 발현하여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지구는 제6빙하기 전의 온난기로 아프리카 대륙에는 이미 나일 강이 있었고 현재의 사하라 사막 등 아프리카의 사막은 녹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5] 인류는 마지막 빙하기 무렵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에까지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빙하기가 끝나는 기원전 12,000년 경에는 빙하가 덮지 않은 지구상 모든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유랑하였다.
신석기 시대에 들어 농업이 시작되면서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움집과 같은 거주지가 생기고 이들이 모인 촌락이 형성되었다. 신석기인들은 장례와 같이 공동체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 인류는 금속을 사용하게 되었고 강력한 권력을 갖춘 지배 집단이 형성되었다. 또한 인류 최초의 도시, 국가, 문자, 도서관, 상업, 종교, 신화, 철학과 같은 지금까지도 인류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들이 생겨났다.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의 주요 도구는 뗀석기와 같은 석기였다. 뗀석기는 먼저 원석을 일차적으로 다음어 거북등 모양의 석핵을 만든 후 석핵의 모퉁이를 가격하여 석편을 떼어내 사용하는 방식으로 매우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구석기 유물은 프랑스의 르발루아 근교에서 처음 발견되어 흔히 르발루아 방식의 석기로도 불린다.
구석기 후기에는 석기 제작과정이 보다 정교하게 발전하여 정과 모루를 이용한 돌날 방식의 석기를 제작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발견된 약 28,940년 전 구석기 후기 시대 유물로 흑연으로 만들어진 구멍뚫린 돌구슬과 같이 구석기 후게에는 여러 가지 장신구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 이 시기에 인류가 이미 정교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명한 동굴 벽화인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 역시 구석기 시대의 것이다.
한편, 레스퓌그의 비너스와 같이 가슴, 엉덩이, 생식기 등이 과장된 여성상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다산숭배를 보여준다.
한반도에서는 약 7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구석기인 유골로는 평양에서 발견된 역포인, 1983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발견된 흥수 아이 등이 있다.
중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 이후 신석기 사용이 있기 전까지의 석기 시대를 중석기 시대라 한다. 부싯돌과 같은 돌을 사용하여 구석기 시대에 비해 단단한 도구를 제작하였다. 유럽에서는 대략 소빙하기가 끝난 후 신석기가 시작되는 기원전 500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인류는 개와 같은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였으며 불을 사용하였다. 북유럽의 경우 중석기 시대는 기원전 4000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중석기 시대부터 인류는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전의 석기 시대와 구분되는 신석기 시대의 특징은 돌을 갈아 만든 마제석기였다는 점이다. 돌을 갈아 더 날카롭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석기에 손잡이 부분과 날부분의 구분이 명확해 지고 각 종 장식을 넣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 문화에도 커다란 발전이 있어 농사를 시작하였고 매장과 같은 장례문화가 생겨났다. 이집트 카룬 호에서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 문화적인 발전은 이전의 인류 역사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흔히 신석기 혁명이라 불린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고 움집을 만들고 촌락을 이루었다. 기원전 5,000년 전부터 기원전 4,000년 사이 번성한 이집트의 파이윰A 문화의 경우 당시 사용한 토기와 움집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보리, 밀, 아마와 같은 작물이 재배되었고 양과 나귀가 가축으로 길러졌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1950년 평안남도 온천군 궁상리 패총 유적이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100여 곳이 발견되었으며 대표적인 유물로는 마제 석기 이외에 빗살무늬 토기, 즐문토기 등이 있다. 1998년 남강댐 수몰지역의 유적 조사에서 부산시립직할박물관의 남강유적조사발굴단은 토기를 잇대어 관으로 사용한 옹관묘를 발굴하여 신석기 시대에 옹관을 이용한 매장 풍습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농업
농업은 신석기 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로 고든 차일드는 이시기의 경제 문화적 변화를 신석기 혁명이라 이름 붙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는 약 기원전 9,500년 경부터, 인도에서는 약 기원전 6,000년 경부터, 고대 이집트에서는 약 기원전 5,000년 경부터, 그리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2,500년 경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
한반도에서도 신석기 시대부터 농업이 시작되어 조, 피, 수수등을 재배하였다. 당시 유물로는 평양에서 발견된 탄화된 조를 비롯하여 돌로 만든 보습, 낫, 괭이 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농업으로 인류는 강을 중심으로한 촌락을 형성하여 정착 생활 문화를 이루었고 이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인류는 국가의 성립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드나 부족단위의 생활을 이루고 있었다.
종교
신석시 시대에 출현한 대표적인 문화 중 하나는 종교이다. 기원전 5,000년 경의 이집트 분묘에서는 매장된 시신과 함께 토기, 장신구와 같은 유물과 개의 뼈가 발견되어 당시 이미 내세 사상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당시 일반적인 숭배 대상은 태양이었으며 이러한 태양 숭배는 이집트, 인도, 중국, 한반도 등 지역에서 두루 발견된다. 또한, 모성 숭배와 하늘을 아버지에 견주어 숭배하는 사상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기원전 2,500년 경 아카드 제국과 같은 문명이 출현하였다. 중국에서는 상나라 시대에 이르러 청동기의 제작이 보편화 되었으며,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3세기 무렵,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청동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 제작을 위한 야금술의 발명은 기원전 4,000년 무렵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우르와 같은 당시 도시 국가의 유적에서 비소와 구리의 합금으로 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후 보다 견고한 주석과 구리의 합금이 쓰이게 되었다. 성경, 사기 등 많은 기록에서 당시 청동기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 | 블레셋 사람 진영에서 가드 사람인 골리앗이 나왔는데 그 신장은 여섯 큐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청동 투구를 썼고 몸에는 사슬갑옷을 입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가 청동 5,000 세켈이었다.다리에는 청동 각반을 찼고 어깨에는 청동 단창을 맸다. | ” |
— 사무엘상 17:4~6, 구약성서 |
문명
청동기 시대는 인류의 초기 문명이 출현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지금까지 인류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 도시, 정치, 법률, 문자, 철학과 같은 것들이 출현하였다. 당시의 주요 문명으로는 고대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인더스 문명, 중국의 상나라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무역
청동기는 유라시아 대초원을 통해 교역되었고 이때 이미 비단길의 원형이 되는 교역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 북부에서 사용된 비소가 함유된 청동기가 발굴되어 이 지역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청동기가 교역되었음을 알게 해 준다.
철기 시대
최초의 철기는 운석등에서 발견된 철을 이용한 것으로 기원전 3,000년에서 2,000년 사이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야금술을 이용하여 철광석에서 철을 분리한 철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500년 경 아나톨리아 지역에 등장한 히타이트이다. 철기 제작 기술은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기마 민족이었던 스키타이 문화로 전파되어 전 세계에 파급되었다.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에는 기원전 4세기경 철기가 전파되었다.
고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지역에 따라 독특한 문화를 가진 문명을 이룬 인류는 문자를 발명하고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과의 교역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여 지도의 제작과 지리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졌다. 한편,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인간에 대한 성찰은 철학, 종교, 윤리와 같은 문화를 낳았다. 고대 시기의 국가들은 문명에 따라 도시 국가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제국을 이루기도 하였다. 국가의 지배를 위해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웃 지역과의 충돌로 국가간 전쟁이 일어났다. 고대 시기의 시작과 끝은 각 문화마다 그 시기가 다르다.
최초의 문명
“ | 옛날 옛적 지위가 낮은 작은 신들은 노동을 하고, 큰 신들은 그들을 지켜 보며 쉬고 있었다. 홍수를 방지하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해 작은 신들은 강과 수로의 흙을 파내야 했다. 노동이 점점 힘들어지자 신들은 점점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 지혜의 신 엔키는 지하수의 여신 남무에게 진흙에 신들의 피를 섞어 신들의 노역을 대신할 사람들 만들게 했다. | ” |
— 수메르의 인간창조신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에서 재인용[36] |
가장 오래된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난 수메르 문명이다. 이들은 기원전 3,200년 경부터 도시 국가를 이루었으며, 설형문자를 이용하여 문서를 만들고 이를 보관할 도서관을 세웠다. 전쟁을 통해 영향력이 강해진 키시나 우르크, 라가시 등은 이웃도시를 지배라는 우두머리 도시가 되었다. 우르의 제왕 우르 남무는 자와 저울과 같은 도량형을 통일 시키고 학교를 건설했으며, 백과사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우르 남무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법전의 편찬으로 이 법은 훗날 함무라비 법전으로 계승되었다.
주요 고대 문명
메소포타미아 이외에 잘 알려진 주요 고대 문명으로는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제국,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의 상나라, 마야 문명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전 세계에 걸쳐 고대 문명이 존재하였다.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조선 이래 삼국 시대까지의 고대 국가들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기원전 3,100년 경 히에라콘폴리스 통치자들은 상 이집트를 장악하고 나일 강 북부의 하 이집트를 정복햇다. 마지막 정복자였던 나르메르 왕은 자신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팔래트를 제작하였다. 그의 후계자 메네스는 멤피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이집트 최초의 왕조를 세웠다.
이후 3,000년간 고대 이집트는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었으며 수많은 왕조가 세워지고 사라졌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독특한 상형문자와 제3왕조 시기의 거대한 피라미드 및 스핑크스를 건설하였다. 이집트의 왕조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도시별로 분열되어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로 편입될 때까지 나일 강 유역을 비롯하여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인더스 문명
인더스 문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철기 유물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의 문명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3,000년 경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대의 기록으로는 인장과 조각난 문자 몇 개가 전부이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으로는 하라파와 모헨조다로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성곽을 갖춘 도시 국가였으며 인더스 강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방으로 곧게 뻗은 도로와 벽돌로 만들어진 배수시설을 갖춘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 유적에서는 거대한 목욕탕과 곡식 창고가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동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했고 금, 상아 등으로 제작된 장신구를 사용했다. 이로 보아 인더스 문명은 농업과 상업에 근간을 둔 고도의 도시 문명이었다.
황하 문명
황하 유역은 신석기 시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지역이다. 황하 문명은 중국의 고대 국가의 시초인 하나라에서부터 상나라시기까지의 문명이다. 청나라 말 기원전 1,2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나라의 갑골문자가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나라의 실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갑골문자는 거북의 등을 구워 갈라진 모양을 보고 점괘를 적은 것으로 왕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람의 머리를 바쳐야 하는지 등을 물었다. 1950년에는 상나라 제6대 왕인 중정이 수도로 삼았던 상성이 발굴되어 당시의 청동기 유물과 무덤 유적이 드러났다. 또한 갑골문자의 기록으로 이때 이미 정전제와 같은 토지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대 문화
고대 시대에 발생한 많은 문화 요소들은 오늘날까지 인류의 생활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탈레스이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통해 정교하게 발전하였으며 이후 유럽과 아랍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인 유가, 묵가, 한비자 등의 사상은 이후 중국과 인근 아시아 지역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유라시아 전역에 전파되었다.
청동기 시대 초기부터 있어온 동서양의 교류는 비단길과 같은 무역로를 통해 지속되었다. 이러한 교역로는 한반도의 신라에서 중동까지 연결된 세계적인 것이었다.
중세
역사에서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 시기 유럽에서 자신들과 고대 사이의 역사를 암흑기로 인식하는 입장에서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쓰이는 중세라는 표현은 오늘날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중세는 근대 이전의 시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의미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요한 호이징아는 오히려 르네상스를 《중세의 가을》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양의 역사에서 중세를 구분하는 것은 서양 중심의 역사 구분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각 지역 별 역사에서 중세는 대략 다음의 시기를 뜻한다.
- 유럽: 로마 제국의 멸망 ~ 16세기
- 아랍: 이슬람의 출현 - 오스만 제국의 비잔틴 함락과 전성기
- 중국: 당나라 후기 - 명나라의 시기
- 한국: 고려시대
- 일본: 가마쿠라 시대(1192년 - 1333년), 남북조 동란기(1336년 - 1392년), 무로마치 시대(1338년 - 1573년)의 기간[54]
- 인도: 10세기 말 이슬람의 침입 - 무굴 제국에 유럽의 개입이 시작된 17세기 무렵
중세 유럽
유럽의 중세는 어느 한 시점에 급작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유럽 중세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는 훈족의 침입,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공인,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성립 등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럽 중세의 시작을 로마 제국의 붕괴로부터 보고 있다.
이슬람 제국
이슬람의 확산은 중세 아랍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성사(聖使) 무하마드에 의해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에 확산된 이슬람은 무하마드가 사망하던 632년무렵 이미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퍼져 나갔다.[57] 이 후 이슬람 제국은 661년 성립된 우마미야 왕조와 750년 성립된 아바스 왕조를 거치면서 중동,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고대에서부터 교류와 갈등을 겪으면서 역사적으로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세 국가 모두 자국의 역사 인식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어 공통의 역사 인식을 도출하고 있지는 못하다.
중국의 역사에서 중세는 당나라 후기에서 명나라 말에 이르는 시기이며, 한국의 경우 고려 시대를 중세로 파악한다. 한편, 일본의 역사에서는 가마쿠라 시대에서 무로마치 바쿠 시대까지를 중세로 파악한다.
근대
근대라는 시대 구분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는 17세기 이후 일어난 구체제의 붕괴와 산업혁명을 통해 형성된 민족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의 형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일련의 흐름이다. 한편으로는 시민사회의 형성과 민주주의의 발전 등이 근대의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제3세계에 대하여 이러한 서양의 근대 특성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각 시기의 정권이 얼마나 이러한 기준에 도달하였는지"를 보는 것이고, 그 결과 근대의 각 요소인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분리하여 민주주의를 경제성장의 대립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보다 경제성장을 우선시 하는 것이 "근대화"라는 몰역사적 근대 인식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는 비판이 있다.[61] 이에 따라 식민지 역시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연관된 세계로 파악하여 식민지 근대를 이룬다는 시각이 있다.
한편, 이와 같은 근대의 기준과 달리 중세 이후 역사를 구분하기 위해 근세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를 근세로 본다. 일본의 경우 16세기 이후 19세기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를 근세로 보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및 에도 시대에 해당한다.
서양의 초기 근대 사회
15세기 이후 영국의 산업발전과 고전경제학의 성립, 그리고 산업혁명은 서양의 근대가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와 더불어 대항해 시대이후 서양의 지리 인식 확장과 아메리카 식민지 및 인도의 유럽 경제 편입은 이후 제국주의 팽창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프랑스 대혁명은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국민국가가 출현하였다.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의 명예 혁명이후 유럽에서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제국주의의 세계분할
산업혁명이후 자본주의의 발달로 역사상 유래 없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게 된 유럽의 각국은 세계 각 지역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갔으며 19세기 무렵에는 세계의 대부분이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 등 이른바 열강에 의해 분할되었다.
현대
현대는 오늘날의 세계와 같은 시대를 가리키는 역사 개념으로 20세기이후 지금에 이르는 시기를 현대로 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로는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과 붕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대공황, 식민지들의 독립과 제3세계의 형성, 국제 연합의 결성, 산업화, 우주 탐사 등이다.
제1차 세계대전
“ | 만일 불타는 꿈속에서 / 그가 실려가는 마차 뒤를 따라 걸을 수 있다면 / ……/ 독가스 찬 폐 속에서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는 피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 …… / 친구여 영광의 이야기를 졸라대는 아이들에게 / 그렇게 진심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못할 테지 / 그 오래된 거짓말 말일세 / "조국을 위해 몸바치는 것은 고귀한 영예라고." | ” |
— 윌프레드 오언, 《고귀한 영예》, 인류이야기 현대편 1 에서 재인용 |
사라예보 사건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범슬라브주의, 범게르만주의와 같은 민족주의가 작용하여 전 세계적인 전쟁으로 번졌다. 1차 대전은 전 지구상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난 세계대전이었으며 총력전, 참호전, 대량 학살이 일어난 전쟁이었다.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었고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다.
소비에트 연방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연방이 세워졌다. 이 후 소비에트 연방은 20세기 말 붕괴될 때까지 서양의 자본주의 체제와 양립하는 양대 세력 중 하나로 존재하였다.
대공황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가 일어난 검은 목요일이후 자본주의 세계는 유래 없는 공황을 맞이하였다. 미국에서는 대 공황에 대한 대처로 케인즈주의와 함께 관세를 최대 48%까지 올리는 스무트-홀리 관세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서 자유 방임 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를 대체하여 케인즈의 이론에 따른 뉴딜 정책과 같은 수정 자본주의가 대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붕괴된 세계 경제는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사상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독일 나치의 지지율과 실업률 사이에는 상당한 상관 관계가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어 전 세계적인 전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일본제국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계대전에 합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에서는 베를린 함락, 태평양에서는 원자 폭탄의 투하와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 추축국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패망하였고 세계는 국제 연합을 결성했다.
제3세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하였다. 이들 국가중 상당수는 냉전 시기 비동맹주의를 고수하였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국과 떨어진 다른 세계라는 의미의 제3세계로 불렸다. 제3세계라는 용어는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한 오늘날에도 남북문제와 같은 경제 관계에서 여전히 관용적으로 사용된다.
국제 연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전지구적인 전쟁의 위험을 줄이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제 연합을 결성했다. 최초 회원국은 51개 국이었으며 현재 193개 국이 가입되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E.H. CARR (1892~1982): 영국의 정치가, 역사학자.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였다. 1916년 외무성에 들어간 적이 있고, 그 후에는 웨일스대학 국제정치학 교수(1936~1946)를 지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정보성 외교부장(1939~1940), 런던 타임스 논설위원(1941~1945)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 《새로운 사회 The New Society》(1951)에서 소비에트형과는 다른, 자유와 평등을 기조로 하는 사회주의의 실현을 시사하는 한편, 아시아의 민주주의운동을 유럽인들도 이해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밖에도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1961) 《칼 마르크스 Karl Marx》(1934) 《위기(危機)의 20년 Twenty Years’ Crisis》(1939) 《서구세계에서의 소비에트의 충격 The Soviet Impact on the Western World》 (1947) 《볼셰비키 혁명 The Bolshevik Revolution》등 많은 저작이 있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내용은 1961년에 있었던 케임브리지대학의 연속강연에서 발표된 것으로서 후에BBC방송이나 주간지 리스너(Listner)를 통해서도 일반에게 보급된 바 있다. 단행본으로서는 먼저 1961년에 맥밀란사에서 출간되었다.
1.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는 "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되는 역사인식론이 금세기에 크로체(Benedetto Croce)나 콜링우드(Robin G. Collingwood)에 의해 피력되었었다.
즉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contemporary history)다" "모든 역사적 판단을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 이기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며, 사건은 다만 그 속에서 메아리 칠 따름이다."라는 글들에서 보듯이 역사랑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E.H. 카는 그러나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는 평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의 관계에 있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오,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고 하는 끈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하다, 사실을 못 가진 역사가는 뿌리를 박지 못한 무능한 존재이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이란 생명없는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의 첫째 해답인 것이다.
2. 사회와 개인은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필요한 보충관계에 있다. 역사가도 하나의 개인이다. 딴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하나의 사회현상이며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사회의 대변인이다. 바로 이러한 자격으로 역사가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문제에 접근하는 입장부터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 동시에 그 입장 자체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의 다음과 같은 언급들은 의미심장하다. 즉,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
요컨대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호과정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3. 역사가들이 연구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의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카는 역사를 과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과학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에 대한 카의 반론은 이렇다.
첫째, 역사는 특수와 개별을 취급하고 과학은 일반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취급한다. 고로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즉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화라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이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즉, 어떤 한 경우의 사건에서 얻어낸 교훈을 딴 대목의 사건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셋째, 역사는 예언할 수 없다. 그러나 소위 과학적인 법칙이란 것도 하나의 경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역사가에게는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비록 個別的인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 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역사는 불가피하게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 분야도 어느 정도까지는 지각하는 주체(인간)와 지각되는 객체(자연력)간의 상호관계와 의존관계를 내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내포한다. 그러나 역사와 종교와의 관계에서, 진지한 역사가라면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을 수는 있겠지만 낮시간을 연장시킨다거나 하는 구약성서식의 신을 믿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 역사와 도덕과의 관계에서, 역사가는 과학자와는 달리, 취급하는 자료의 성질상 도덕적 판단의 문제 속에 들어가게 되지만, 이것이 곧 역사가 가치라고 하는 초역사적인 규준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많은 원인의 복합체를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기가 작성한 여러 원인의 목록을 앞에 놓고서는, 그것을 질서지여야 하겠다. 제 원인의 상호관계를 결정할 수 있도록 거기에 상하관계를 설정해야 하겠다. 혹은 "결국에 가서는""궁극적으로는" 어떤 원인과 어떤 종류의 원인을 최종 원인, 즉 모든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지어야 하겠다는 직업적인 강박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다.
결국 역사란 역사적 의의라는 견지에서 행하여지는 선택과정이다. 역사가는 다수의 인과연쇄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의의있는 것들을, 아니 그것들만을 빼내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의의에 대한 규준이 되는 것은 자신의 합리적 설명과 해석의 원형 속에 인과연쇄를 맞추어 넣는 역사가의 능력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과거의 기록이 보존되기 시작한 것은 미래 세대의 복지를 위한 것이었다. 훌륭한 역사가들은 역시 미래라는 것을 뼈속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다. 역사가는 왜냐라고 묻는 동시에 어디로라고 묻는 법이다.
5. 19.세기의 사상가들은 흔히 역사의 진보에는 확실한, 명백히 규정 할 수 있는 목표가 있다는 생각을 자명한 이치로 삼아 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념은 부당하고 무용하다. 진보를 믿는 것은 결코 어떠한 자동적인 불가피한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즉, 전진과정에 있어서만 비로소 규정될 수 있고 그 유효성도 달성과정에 있어서만 비로소 증명될 수 있는 그러한 목표를 향한 무한한 진보-즉 필요성이나 상징에 따른 한계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역사는 과거의 제사건과 점차적으로 우리들 앞에 출현하게 될 미래의 제 목적과의 대화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역사가가 직면한 난관은 인간 본성의 한 반영이다. 갓 태어난 유아기라든가 아주 고령인 경우는 아마 다르겠지만, 인간이란 결코 완전히 환경에 휘말려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환경에 순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인간은 또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주인도 아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주제의 관계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고, 군림하는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기브 앤드 테이크의 평등한 관계이다.
역사가가 실제로 생각하고 쓰고 할 때의 자기 자신의 작업태도를 조금만 반성해 보면 알 일이지만,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서 자신의 사실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사실에 따라서 자신의 해석은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쪽을 다른 쪽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가는 사실의 일시적 선택과 일시적 해석으로(이 해석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일시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출발하는 것이다. 일이 진척됨에 따라 해석도, 사실의 선택과 정리도, 그 상호작용을 통하여 거의 무의식적인 미묘한 변화를 입게 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므로, 이 상호작용은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도 없고 열매도 맺지 않는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없고 의미도 없다. 이러하여 '역사란 무엇이가?'에 대한 나의 최초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겠다. 역사란 역사사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 기록
역사 기록은 승자의 역사 기록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역사 기록
그러나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던 역사는 우리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강대국 사이에 껴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찌그러 들은 상처뿐인 역사 그 모습은 본래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중국보다 강하고 넓은 국토를 7,000년 동안이나 유지해오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뛰어난 민족이 우리 민족이었다.
중국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우리의 자취를 없애 버리고 실제 보다 보태고 늘리고 과장 왜곡해서 쓰여졌다. 일본의 역사는 허구와 날조의 역사이다.시조라는 신무서부터 허구의 인물과 통일된 국가가 아닌 소국의 역사를 이리저리 밀고 땡기고 엿가락 처럼 느리고 줄여서 쓴 그야말로 소설같은 역사다. 반대로 우리 역사는 실제 보다 축소되고 왜곡해서 쓰여졌다. 그래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역사는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고 과장할 것도 없는 바로 진실 그대로의 역사다.
무릇 역사라는 것이 승리자의 역사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승리자가 자기를 미화하고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역사를 조작해 왔다는 것이다.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이라는 말이 있드시 난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위대한 나라(왕조)를 하나 세우거나 정권을 잡는 것이요 실패하면 명분이 어떻든 만고의 역적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이다. 고대에서부터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이 센나라는 주변의 힘없는 나라를 무력으로 짓밟고 빼았아 왔다. 전쟁에서 이기면 상국이요 주인이 되는 것이고, 힘이 없어 전쟁에 지면 그나라에 복종해야 하는 노예나 복속국이 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기는 동물의 사회나 우리 인간들 사회나 다를게 없었다. 그래서 우리 한웅천왕이나 단군조선 시대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했었다. 그래서 항상 주변 제후국 들을 지휘하고 통솔하여왔다. 그런데 그저변엔 우리의 지배내지 지도 이념이 있었다. 후세의 지나족들의 힘에의한 약육강식인 일방적인 군주 중심의 전제주의와는 달랐다.
그것이 바로 홍익인간 사상이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바로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다스리는 사람이나 일반백성이나 역할만 다를뿐 똑 같다는 것이다.바로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없다는 평등 인권사상이 9,000년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다.힘있다고 남을 괴롭히거나 빼앗는 것이 아니고 약한사람은 보호해주고 위기에 처한사람은 구출해주어 위기를 벗어나게 하는등 나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사회 바로 그것이었다.지도 이념이 그러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왕을 잘 따랐고 주변국들도 이의 없이 지도 통솔을 잘 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한인시대 3,301년 과 한웅천왕의 배달국 1,565년 단군조선의 2096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유지 할수 있었던 것이다. 진시왕 이후 중국의 대부분의 역대 왕조들이 300년도 안돼 멸망 해 버린 것과 비교하면 확연히 들어나는 것이다. 힘으로 백성을 제압해서 하는 전제 정치와 근본 이념이 백성을 위하는 홍익인간 사상하고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던것이다.
무릇 인류사가 전쟁을 통해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전쟁을 빼고 역사를 논할수가 없다. 전쟁이라 하면 나와 적이 있다. 따라서 적과 우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역사서를 읽을 때는 항상 그 관념 하에 이해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를 왜하느냐 하며는 우리 역사서 중에 가장 정통 역사서요 보배라고 떠받들어지는 삼국사기를 언급하기 위해서다. 삼국사기는 아와 비아가 없다. 저자 김부식은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린지도 모르고 있다. 오히려 적을 올리고 우리를 비하하고 있다. 아무리 김부식이 신라의 후손이고 신라 중심의 사고로 썼다고 하여도 고구려 역사서를 저술한다면 고구려와 중국이 전쟁을 할 때는 고구려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되는데 거꾸로 중국편에 서서 역사를 쓰고 있다.중국이 우리고 고구려가 적인것 같은 인상을 짙게 받는다. 고.수 대전은 동양 전투사상 가장큰 전쟁이다. 침략군 수나라 오랑캐 병사의 수가 113만명에 후방보급등 지원부대 병력을 합치면 5백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전쟁이었다. 물론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났지만 김부식의 기술을 보면 아주 답답하다. 적군의 괴수를 수양제께서 운운하며 깍듯이 높이고 양광의 어거지 출정사를 서너페이지나 자세히 기술하고,양광의 지휘하는 모습과 수나라 장수들의 이름과 활동 내용은 줄줄이 소개 하면서 우리 고구려 장수의 이름은 고사하고 우리군의 전투 내용은 간간히 짧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무찌른 우리의 용맹스럽고 자랑스런 장수들의 이름은 을지문덕 한명만 나올 뿐이다. 우리 군사들은 전투에 임함에 있어서 일당백의 정신으로 싸운다.그 래서 10분의 1밖에 안되는 군사로 100만대군을 무찌른 것이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역사에 길이 빛날 전투인가? 이런 승전보를 우리편에 서서 기술해야지 중국편에 서서그리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 역사서가 아니고 차라리 중국역사서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김부식은 애당초 삼국사기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다른 역사서도 많았을텐데 괜시리 사대주의로 온통 싸발른 머리로 삼국사기를 써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쪼그라 들어 한쪽구석에 쳐박혀서 제나라 역사가 어땠는지도 모른체 헤매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한 나라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지나족들은 우리나라를 쳐들어 올 때 항상 있지도 않은 기자와 한사군을 내세워 저희 땅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게다 저들의 간사한 사가들과 무식한 왕들이 만들어낸 엉터리 역사를 내세워 그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의 어떤 분쟁 에 대비해서라도 철저하게 역사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중국 과 일본의 역사들이 상당부분 조작되어있다.
역사를 보는 눈, 그리고 읽는 마음
역사공부를 하면서 들어본 가장 황당한 말은 '역사는 고정불변이며 따라서 암기과목'이라는 말이다. 아마 연대, 인명, 지명 등 외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나오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수학도 암기과목이다. 구구단부터 시작해서 외워야 할 정리와 공식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농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학도 역사도 암기과목이 아니다.
영속적 가치 분별하는 안목
과거는 불변이다. 하지만 그걸 인식하는 사람의 '눈'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러니 시대마다 새롭게 역사를 써야 한다. 예를 들면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역사학은 철저히 정치사 위주였다. 왕, 귀족, 장군이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과 더불어 역사의 경제적 국면이 주목을 받게 됨으로써 사회경제사가 '탄생'했다.
20세기에는 더욱 눈부신 변화가 있었다. 1960년대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흑인 민권 운동과 여권 운동 때문에 과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등장했다. 기존의 역사 연구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던 흑인 노예사와 여성사가 새롭게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이다.
꽤 오래 전 일이다. 철도청에서 추억관광 상품으로 증기기관차를 운행하려 했으나 국내에 한 대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중국에서 중고 기관차를 수입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디젤과 전기 열차가 일반화한 요즘에는 증기기관차가 아련한 옛 시절을 일깨워주는 추억상품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던 19세기 유럽의 문인들에게 시커먼 연기를 뿜고 괴성을 지르며 들판을 가로지르는 증기기관차는 '녹색의 정원'에 난입한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같은 사물에 대한 관점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현대 국가 상당수가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공화주의'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미국에서 공화당은 보수 정당에 속한다. 하지만 왕권신수설이 공공연히 주장되던 17세기 유럽에서 공화주의란 국왕 살해를 획책하던 반역자들의 급진 과격사상이었다. 왕이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되던 그 시절에 공화주의는 끔찍한 신성모독이기도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전통적 관념은 사회보장제도의 등장으로 옛 말이 됐다. 18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민주주의란 '폭도 지배(mob-rule)'와 동의어였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 이후 2,000년 넘도록 경멸적인 용어였던 민주주의는 바야흐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정치 형태로 자리 잡았다. 급진 사상이었던 공산주의가 소련 멸망 후 보수 이념으로 전락한 것은 역사의 얄궂은 아이러니다.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아닐 수 없다.
국사ㆍ세계사 홀대하는 교육
역사 공부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가 종종 엇갈린다는 것을 배운다. 이를 통해 영속적이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안목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발표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필수였던 국사과목이 선택으로 변경됐다. 오죽하면 개그맨 장동혁이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에서 "국사가 무슨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이야?"라고 빈정댈 정도다. 국사가 찬밥 취급이라면, 세계사는 아예 쉰 밥 취급이다.
혹시 이런 정책 결정의 배후에 우리 국민의 눈이 밝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요사이 일부에서 우리 역사의 정체성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 우리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과 비하가 우려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 중에서는 특히 조선의 역사에 대한 비판과 폄하가 심한 것 같다. 이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만큼 가장 열심히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술하여 사료가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조선을 두고 그들은 형편없는 국가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이며 중국에 심각하게 종속된 나라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 매도의 현상은 그간 무조건 찬란한 역사라고 일방적으로 호도한 역사교육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을 폄하하는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설사 그들의 주장대로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 나가서 우리의 선조가 조선을 살아왔다는 사실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나라 역사이든 간에 영욕은 있다. 현재 지금 잘 나가는 나라라도 한때는 보잘 것 없는 나라였을 때도 있었고 지금 보잘 것 없는 나라도 한때는 매우 강대한 제국이었을 때가 있었다. 역사는 이렇게 순환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아도 과연 한족의 역사는 어떠했는가. 그들 역시 분열과 통일 그리고 피침과 피지배가 점철된 역사였다. 중국이 마치 자신의 역사인 냥 떠드는 원나라의 역사는 몽골의 역사일 뿐이다. 영국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앵글로색슨족의 국가이지만 앵글로색슨족은 침략자일뿐이다. 원주민인 켈트족은 쫓겨나 북방의 스코틀랜드에서 영연방의 일원으로 존재할 뿐이다. 또한 로마의 침공이 있을 때까지 원시생활을 면하지 못하였고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이 있기까지 제대로 된 국가를 형성하지도 못한 지역이었다.
또한 서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현재가 있기 위하여 과연 그 과정이 정당하였는가를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유럽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후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든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의 유럽은 고대 잉카와 아메리카 인디언 수천만을 학살한 후 얻은 부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과연 그러한 역사가 정당한 것일까.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서구가 현재의 모습이었을까. 미국, 영국 스페인 등이 히틀러의 유태인학살은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왜 자신들이 아메리카에서 행한 학살에 대하여는 아무 말이 없는 것인가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역사 기술에 비판적인 몇몇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가 많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라고 주장한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가지 관점에서 과연 그들의 주장이 일방적인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첫째로 우선 정확하고 객관적 역사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싶다. 나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란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를 기술하는 것이므로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료의 불확실성, 과거에 대한 몰이해가 역사를 제대로 기술하는데 최고의 걸림돌이다. 이러한 걸림돌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료의 경우 그러한 객관성을 확보하기란 더욱 힘들다. 이미 각자의 입장에서 아전인수격으로 기술하여 놓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를 구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국가의 역사서를 보고 다른 나라의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두 번째는 과연 역사를 완벽하게, 그리고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하는 점이다. 현재와 같이 모든 나라가 민족주의 내지는 국가주의를 고양시키고 있는 이상 역사를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가르치는 나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역사란 어차피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관점에서 국가의 목표에 맞게 역사를 각색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즉 감추고 싶은 것은 감추고 또한 부풀리고 싶은 것은 부풀리는 것이 역사이다. 이러한 현상에서 어느 나라든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미래의 분열된 중국을 우려하여 과거의 역사를 하나의 중국 속에 가두어 두려는 집권층의 의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일본의 고대사 왜곡 그리고 현대사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 역시 국가주의를 고양시키려는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국가라는 단위가 존재하는 한 국가는 끝없이 역사를 왜곡시키고 왜곡된 역사관을 국민에게 주입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국가에서 일정한 역사왜곡 또는 역사를 부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점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찬란했던 과거의 역사를 통해 자긍심을 고취시켜 자기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조선말의 역사를 보면 그 참담한 상황에 대하여 실망과 허탈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역사를 통해 다시는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훈을 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자조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은 없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는 반복된다. 한 때 태양이 지지 않았다는 영국도 이제는 그 영광을 잃어버렸고, 가장 넓은 제국을 다스렸던 원나라도 사라졌으며, 로마제국도 사라졌다. 이러한 역사의 부침은 인류가 존재하는 계속 발생되는 현상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쉽게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왕조의 흥망성쇠는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천하를 통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내부모순으로 여러 나라로 쪼개져 다투는 현상이 되풀이되어 왔다. 현재 통일되어 있는 중국도 미래에 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중국의 현 집권세력도 이러한 미래상황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역사도 그러하다. 지금 또는 과거의 우리 모습이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렇게 되리라는 법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으로 우리의 앞날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아직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이 중국에 사대한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미국에 대하여 사대하는 것은 국가의 안위와 존립을 위하여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모습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자세인가 하는 점을 되묻고 싶다. 혹자는 미국에 대한 태도와 중국의 사대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식에서 다를지는 몰라도 내용에 있어 다름은 없다. 결국 사대의 문제점을 인식하였다면 우리는 미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돌아보았어야 한다.
나는 우리 역사가 결코 위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우리의 과거 역사가 화려했다고 해도 그것을 반갑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개선시켜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픈 과거는 우리에게 보약이 될 수 있다. 아픈 과거를 돌아봄으로서 그러한 우를 범하지 않을 방도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과거에만 얽매여 산다면 미래는 없다. 과거를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과거에 얽매어 현재에 살고 있는 자신의 비하로 이어진다면 그의 앞날을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나는 우리 역사의 폄하는 또 다른 사대주의 컴플렉스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나라의 역사가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에 비하여 보잘것없는 것인가에 대하여 되묻고 싶다. 역사상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었고 수많은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그 중에서 현재 자기 고유의 말과 글을 쓰며 수 천년동안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이만큼의 성장을 해온 국가가 몇이나 되는가 돌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 사대에 익숙해져 너무도 큰 것만을 보는 것 같다. 이제는 아래도 내려다 볼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간 나름대로 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에는 밝음이 있다면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함 이면에는 그늘이 있고, 웃음 뒤에는 피눈물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우리가 위대한 역사라고 하는 중국과 로마의 역사 뒤에는 수많은 민초들과 피지배자들의 눈물이 있었고, 서양의 화려함 뒤에는 식민의 역사를 껴않고 살아야하는 수많은 식민지국민들을 약탈한 결과이다. 지금도 이러한 상황에는 변화가 없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과거 역사처럼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강자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 앞으로 세계화를 살아가야 할 현시대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어쨌든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지금의 보다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역사를 배우는 것이지 자기를 비하하기 위하여 역사를 배우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자기 역사의 비하는 또 다른 사대주의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에 매몰되어 미래를 잃어버린다면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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