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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42 : 후진타오 시대 2 본문
중국의 역사 142 :
후진타오 시대 2 (쓰촨성 대지진, 베이징 올림픽, 신장위구르 자치구 소요사태)
쓰촨성 대지진
쓰촨성 대지진 (중국어: 汶川大地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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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촨 성 지진 진앙지 | |
날짜 | 2008년 5월 12일 |
규모 | 리히터 규모 7.8 |
깊이 | 19 km (11.8 마일) |
진앙 | 중국 쓰촨 성 31°05′02″N 103°16′01″E / 31.084°N 103.267°E / 31.084; 103.267 |
피해 지역 | ![]() |
인명 피해 | 사망-69,227명 중상-374,653 실종-17,923명 2008년 10월 22일 기준 |
총 피해액 | 1500억 위안(중국 국무원 잠정 집계액) |
쓰촨 성 대지진(四川省 大地震, 사천성 대지진) 또는 원촨 대지진 (汶川 大地震, 문천 대지진)은 2008년 5월 12일 오후 2시 28분(중국 표준시, UTC+8), 중국 쓰촨 성(四川省) 지방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8.0의 큰 지진을 말한다. 미국 지질조사국에서 처음으로 보도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현지에 인민해방군 파병을 지시하였다. 사망 약 6만9천명, 부상자 약 37만4천명, 행방불명자 약 1만8천명, 재산피해자의 누계 약 4616만명, 붕괴된 가옥 약 21만6천동의 피해를 야기했다. 특히 학교 건물의 붕괴로 인해 교사와 학생에게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지방간부의 독직과 날림 공사이 관계가 문제화되었다. 원자바오 총리는 지진 당일에 현지에 들어가 구원활동의 진두지휘를 집행함과 함께, 매스컴에서는 연일 인민해방군들에 의한 구원활동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또한, 전국에서 자원봉사자가 달려들고 성금도 많이 기부되었다.
지진 상세
진앙은 청두로부터 북서쪽으로 90 km 떨어진 아바 티베트족·창족 자치주의 원촨 현(汶川县)이었고, 주 진동은 2008년 5월 12일 14:28:04.1 CST (06:28:04.1 UTC)에 발생했다. 지진 규모에 대한 초기 보고는 7.5에서 8.0까지의 범위에 있었고, 주 진동이 있은 후 24시간 동안 지진 규모 5.0에서 6.0까지의 여진이 이어졌다. 청두의 사무실 직원들은 "약 2~3분 동안 계속되는 진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무실 밖으로 뛰쳐 나갔다고 보고했다.
피해
쓰촨 성 베이촨 현에서만 5,0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으며, 두장옌, 더양, 스팡 등에서도 각각 수백명씩 사망하였다. 청두는 도시 기능이 마비되었고, 베이징과 상하이 등에서도 휴대폰이 불통 되었다. USGS는 "이번 지진은 2007년 9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7.8의 강진 이후 가장 강력하다"고 밝혔다
구출되어 목숨을 건진 10만여 명에 달하는 부상자들도 의약품과 의료 기구 부족으로 인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집을 잃고 임시 대피소로 피난해온 이재민들도 식량과 식수 부족, 위생 문제들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지역 | 집계된 사망자 수 | |
---|---|---|
쓰촨 성 | 미엔양 | 21,963 |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 | 20,256 | |
더양 | 17,120 | |
광위엔 | 4,821 | |
청두 | 4,276 | |
난충 | 30 | |
예안 | 28 | |
수이닝 | 27 | |
지양 | 20 | |
메이산 | 10 | |
바중 | 10 | |
가오즈 티베트족 자치주 | 9 | |
러산 | 8 | |
네이장 | 7 | |
다저우 | 4 | |
량산 이족 자치주 | 3 | |
지공 | 2 | |
루저우 | 1 | |
광안 | 1 | |
간쑤 성 | 365 | |
산시 성 | 122 | |
충칭 | 18 | |
허난 성 | 2 | |
구이저우 성 | 1 | |
후베이 성 | 1 | |
후난 성 | 1 | |
윈난 성 | 1 | |
총 사망자 수: | ≥69,130 |
구호 활동
중국 정부는 지진 발생 후 군 병력을 포함해 10만여 명의 구조대원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을 현지로 급파해 구호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도 지원금과 구호 인력을 지진 피해 지역으로 보내오고 있다. 당초, 중국 정부는 외국으로부터의 인적 지원의 접수를 거부하였으나, 5월 15일, 일본의 국제긴급원조대의 접수를 표명하였다. 이 원조대의 활동의 모습은 중국에서도 방영되어, 대일 이미지의 호전에도 기여하였다고 보여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5월 17일에 소방방재청 소속 119 구조대원 44명을 쓰촨 성 스팡 현으로 파견해 22일까지 구조 활동과 사체 발굴 작업을 지원했다. 기업과 시민단체에서는 구호물품이나 구조활동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을 지진 피해 지역에 제공하고 성금을 모금하고 있으며, 21일에는 민간 의료단체에서 파견한 의료진 17명이 안 현의 이재민 구호소에서 의료 봉사 활동에 착수했다.
5월 24일 현재 중국 정부는 구조작업 위주의 구호 활동에서 재건과 복구작업에 비중을 두기 시작하고 있으며, 사실상 거주 기능을 상실한 베이촨 현의 경우에는 피해 복구를 포기하고 인근 지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예정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피해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여 복구 작업 완료에 수 년이 소요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지진으로 매몰된 방사능 물질의 회수도 아직 완료되지 않고 있어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이외에도 지진으로 형성된 자연호수가 범람 혹은 붕괴 위험에 놓여 있어 추가 재해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인민해방군 폭파반을 동원해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으며, 피해 예상 지역의 주민들을 안전지대로 피신시키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08년 베이징 올림픽 | |
개최 도시 | 중국 베이징 |
---|---|
참가국 | 204 |
참가 선수 | 11,528 |
경기 | 28 종목 |
개회식 | 2008년 8월 8일 |
폐회식 | 2008년 8월 24일 |
공식 개회 선언 | 후진타오 국가주석 |
선수의 선서 | 장이닝 |
심판의 선서 | 황리핑 |
올림픽 성화 점화 | 리닝 |
주 경기장 | 베이징 국립 경기장 |
2008년 하계 올림픽(중국어 간체: 2008年夏季奥林匹克运动会, 정체: 2008年夏季奧林匹克運動會,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2008년 8월 8일부터 8월 24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던 29번째 하계 올림픽이다. 한국어로는 베이징을 한국식으로 음차하여 북경 올림픽이라고도 부른다. 축구, 요트, 10킬로미터 마라톤 수영(신규 종목)은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 행해졌다. 마장마술 경기는 홍콩에서 행해지는데 이로써 2008년 올림픽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이어 두 개의 국가 올림픽 위원회(NOC)가 주최하는 사상 두 번째 올림픽이 되었다. 서울올림픽 이후로는 20년 만에 아시아에서 개최된 대회이기도 하며, 도쿄올림픽, 서울올림픽 이후 세번째 아시아에서 열리는 대회이기도 하다. 200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티베트에서의 탄압, 성화 봉송을 둘러싼 갈등, 각지에서의 폭동과 테러 등이 문제화 되었으나, 개회식에서는 후쿠다 일본 총리, 부시 미국 대통령, 푸틴 러시아 총리,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수뇌가 참석하여, 외교적으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대회 기간 중에는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고, 중국은 금메달의 수에서, 미국의 36개를 넘어서는 51개를 획득하여, 각국별 금메달 획득 수에서 처음으로 1위가 되었고, 24일에 무사히 폐막하였다. 한편으로는 개회식의 과도한 연출과 엄격한 경비태세 등이 논의를 불렀고, 또한 기자 폭행을 포함한 미디어 규제, 데모에 대한 과잉규제, 인권활동가의 구속, 티베트와 신장에서의 탄압 등이 문제되었다.
개최지 선정
베이징은 2001년 7월 13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2회 국제 올림픽 위원회 총회에서 토론토, 파리, 이스탄불, 오사카를 제치고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 | (heading omitted...) And now the result of the vote is... The games of The 29th Olympiad in 2008 are awarded to the city of 'Beijing'.
(전략...) 그럼 이제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2008년에 열리는 제29회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는 '베이징'입니다. |
” |
개최지 투표결과 | ||||||
---|---|---|---|---|---|---|
후보 도시 | NOC | 1차 투표 | 2차 투표 | |||
베이징 | ![]() |
44 | 56 | |||
토론토 | ![]() |
20 | 22 | |||
파리 | ![]() |
15 | 18 | |||
이스탄불 | ![]() |
17 | 9 | |||
오사카 | ![]() |
6 |
대회 준비
경기장
베이징 올림픽은 베이징 내 31개의 경기장과 다른 중국 도시의 6개 경기장에서 치러졌다. 축구 예선전은 상하이, 선양, 친황다오, 톈진에서 나누어 치러졌으며, 승마 경기는 홍콩, 요트 경기는 칭다오에서 치러졌다.
참가국 에피소드
아시아에서 열리는 하계 올림픽 중 유일하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전한 대회이기도 하다.
교통
올림픽을 대비해 베이징 지하철을 대규모 확충하고, 2007년 1월에 베이징 지하철 5호선을, 2008년 7월 19일에 베이징 지하철 8호선, 베이징 지하철 10호선, 베이징 지하철 공항선을 개통하여 8개 노선을 보유, 올림픽 경기장과 공항, 베이징의 주요 관광지들을 이었다.
마케팅
베이징 올림픽의 마스코트는 푸와이고, 각각 이름은 "베이베이", "징징", "환환", "잉잉", "니니"이다. 마케팅으로 이용된 다섯 캐릭터의 이름에서 앞글자를 따서 읽으면 "베이징 환잉니(중국어: 北京欢迎你)"이며 "베이징이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뜻이 된다. 또한 '베이징 환잉니'는 이번 베이징 올림픽 주제가 제목이기도 한다.
통역 언어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어가 올림픽 사상 최초로 올림픽 대회 공식 통역 언어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통역 언어란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올림픽 관련 행사 전반에 관해서 영어나 프랑스어 등 IOC 공식 사용언어 외에 통역 서비스가 제공되는 언어를 지칭한다. 주요 순위 선수들의 인터뷰와 올림픽 위원회의 기자 회견을 실시간으로 한국어 통역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다만 지금의 통역 언어 지위를 다음 대회에서도 누릴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2004년 대회까지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러시아어, 일본어까지 그 지위를 누렸다.
경기 종목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28종 경기 종목에서 총 302개의 금메달(남자 165메달, 여자 127메달, 혼성 10메달)이 있었다.
28종의 경기 종목이다. 괄호 안에는 각 경기 종목에 걸려 있는 금메달 수를 나타내었다.
대회 정보
올림픽 개회식
처음에는 2008년을 뜻하는 2008명이 나와서 드럼을 치며 빛을 내 카운트 다운을 했고, 중간에 56명의 어린이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 민족의 각각 전통 의상을 입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 56명의 어린이들은 모두 한족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개회식 동안 베이징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불꽃놀이를 전 세계에 생중계된 텔레비젼 방송으로 내보냈으나, 모두 사전에 CG로 제작된 화면이었다는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입장 순서
개회식 때의 국가별 입장 순서는 중국에서 쓰이는 간체자로 표기한 국가명의 첫 글자의 획수에 따랐다. 이에 따라 항상 처음으로 들어오는 그리스 다음의 나라는 첫 글자가 2획인 기니(중국어: 几内亚)였고, 개최국인 중국은 마지막에 입장하였다. 한편, 중국 차례 전에 입장한 나라는 간체자 총 획수가 16획인 잠비아이다.
첫 글자가 12획인 대한민국(중국어: 韩国)의 순서는 당초에 177번째로, 역시 첫 글자가 12획인 북한(중국어: 朝鲜)이 178번째로 결정됨에 따라 북한과 연달아 입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 측의 끈질긴 순서 변경 요구를 받아들인 조직위원회가 북한의 순서를 몬테네그로 다음에 오도록 재조정했고, 원래 36번째로 입장할 예정이었던 브루나이가 불참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은 176번째, 북한은 180번째로 입장하게 되었다.
대회 일정
2008년 하계 올림픽 대회 일정은 다음과 같다.[11]
● | 개회식 | 경기 | 결승 | 갈라 쇼 | ● | 폐회식 |
8월 | 6일 | 7일 | 8일 | 9일 | 10일 | 11일 | 12일 | 13일 | 14일 | 15일 | 16일 | 17일 | 18일 | 19일 | 20일 | 21일 | 22일 | 23일 | 24일 | 계 |
---|---|---|---|---|---|---|---|---|---|---|---|---|---|---|---|---|---|---|---|---|
개회식/폐회식 | ● | ● | ||||||||||||||||||
양궁 | 1 | 1 | 1 | 1 | 4 | |||||||||||||||
육상 | 2 | 4 | 6 | 6 | 5 | 3 | 6 | 7 | 7 | 1 | 47 | |||||||||
배드민턴 | 1 | 2 | 2 | 5 | ||||||||||||||||
야구 | • | 1 | ||||||||||||||||||
농구 | ● | ● | 2 | |||||||||||||||||
복싱 | 5 | 6 | 11 | |||||||||||||||||
카누 | 2 | 2 | 6 | 6 | 16 | |||||||||||||||
사이클 | 1 | 1 | 2 | 1 | 3 | 1 | 2 | 3 | 2 | 1 | 1 | 18 | ||||||||
다이빙 | 1 | 1 | 1 | 1 | 1 | 1 | 1 | 1 | 8 | |||||||||||
승마 | 2 | 1 | 1 | 1 | 1 | 6 | ||||||||||||||
펜싱 | 1 | 1 | 1 | 1 | 2 | 1 | 1 | 1 | 1 | 10 | ||||||||||
필드하키 | 1 | 1 | 2 | |||||||||||||||||
축구 | 1 | 1 | 2 | |||||||||||||||||
체조 | 1 | 1 | 1 | 1 | 4 | 4 | 4 | 1 | 1 | 18 | ||||||||||
핸드볼 | 1 | 1 | 2 | |||||||||||||||||
유도 | 2 | 2 | 2 | 2 | 2 | 2 | 2 | 14 | ||||||||||||
근대 5종 | 1 | 1 | 2 | |||||||||||||||||
조정 | 7 | 7 | 14 | |||||||||||||||||
요트 | 2 | 1 | 2 | 2 | 2 | 2 | 11 | |||||||||||||
사격 | 2 | 2 | 2 | 2 | 1 | 2 | 1 | 2 | 1 | 15 | ||||||||||
소프트볼 | 1 | 1 | ||||||||||||||||||
수영 | 4 | 4 | 4 | 4 | 4 | 4 | 4 | 4 | 1 | 1 | 34 | |||||||||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 1 | 1 | 2 | |||||||||||||||||
탁구 | 1 | 1 | 1 | 1 | 4 | |||||||||||||||
태권도 | 2 | 2 | 2 | 2 | 8 | |||||||||||||||
테니스 | 2 | 2 | 4 | |||||||||||||||||
트라이애슬론 | 1 | 1 | 2 | |||||||||||||||||
배구 | 1 | 1 | 1 | 1 | 4 | |||||||||||||||
수구 | 1 | 1 | 2 | |||||||||||||||||
역도 | 1 | 2 | 2 | 2 | 2 | 2 | 1 | 1 | 1 | 1 | 15 | |||||||||
레슬링 | 2 | 2 | 3 | 2 | 2 | 2 | 2 | 3 | 18 | |||||||||||
8월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302 |
참가국
NOCs에 소속된 205개 국가 중 브루나이를 제외한 204개 국가가 참여했다. 중국과 미국은 각각 639명과 596명으로 구성된 거대한 팀을 이끌고 대회에 참가하여 메달 경쟁에 나섰다.
[숨기기]참가국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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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달 집계
순위![]() |
국가![]() |
![]() ![]() |
![]() ![]() |
![]() ![]() |
합계![]() |
1 | ![]() |
51 | 21 | 28 | 100 |
2 | ![]() |
36 | 38 | 36 | 110 |
3 | ![]() |
23 | 21 | 28 | 72 |
4 | ![]() |
19 | 13 | 15 | 47 |
5 | ![]() |
16 | 10 | 15 | 41 |
6 | ![]() |
14 | 15 | 17 | 46 |
7 | ![]() |
13 | 10 | 8 | 31 |
8 | ![]() |
9 | 6 | 10 | 25 |
9 | ![]() |
8 | 10 | 10 | 28 |
10 | ![]() |
7 | 16 | 17 | 40 |
합계 | 302 | 303 | 353 | 958 |
---|
비판
폐막식 일본해 표기 논란
8월 24일 베이징 올림픽주경기장인 궈자티위창에서 열린 폐막식 1부 '서곡' 앞 부분에 나온 영상 세계지도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가 동해가 아닌 일본해로 표기했다. 이 장면이 TV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전달되고 네티즌들이 방송 화면을 캡처한 관련 사진은 포털사이트를 타고 급속히 퍼져나가 논란이 되었다.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8월 26일 정례브리핑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현한 것이 단순한 실수인지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지를 묻는 질문에 " 일본해는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명칭 " 이라면서 " 올림픽 폐막식에서 등장한 이 지도는 유관 부처가 대다수 국가의 생각을 참조해서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 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외교 채널이 중국에 일본해 표기의 부당성을 지적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데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는 즉답을 회피했다.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베이징올림픽조직위원회(BOCOG)에 일본해 표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병기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 면서 당국자간 면담도 요청했다고 밝혔으나 중국은 아직도 입장을 바꾸지않고 이 책임에 대해 회피하는태도를 보였다.
신장위구르 자치구 소요사태
2009년 7월 우루무치 소요사태
2009년 7월 우루무치 소요사태는 2009년 7월 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 시에서 위구르족들이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발생한 소요사태이다. 약 1,000여명 이상의 위구르족들이 참가했다고 전해지며, 몇몇 소식통은 3천여명까지도 추산하고 있다. 현재까지 중국정부 기관에 의해 보고된 사망자수는 197명이다. 하지만, 사망자수가 400명에서 840명까지에 이른다는 언론보도도 있다. 진압과정에서의 실탄 발포를 중국 정부가 부인하는 가운데, 7월 8일에 처음으로 총상 사망자가 있다는 중국 의료진의 증언이 나왔다.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東-獨立運動, 중국어: 新疆独立运动/新疆獨立運動, 영어: East Turkestan independence movement)은 현재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로 있는 동투르키스탄에서 위구르인들이 벌이는 독립운동이다.
이 지역은 인종-민족-종교적으로 중국과 전혀 이질적인 곳이며, 오랜 옛날부터 독립적 혹은 자치적으로 정치-경제적 독자성을 지켜온 나라이며, 문화적-언어적으로도 중국 문화권에 동화되기에는 극도로 어려운 곳이었다. 다만, 중국 청나라에 의해 이 지역이 정복되어 중국 문화권에 편입되었지만, 약 2~3세기 지속된 반자치적 부족단위의 유목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것이 청나라가 붕괴되고, 중화민국이 수립됨으로써 새로운 독립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지게 되나, 수차례에 걸친 군벌의 침략과 중화민국의 재정복 시도 및 정정불안으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중국공산당군의 침략이 있었고, 소련과 중국의 포위 속에서 독립을 지켜내지 못한다.
현재는 중국의 한 자치구로서 중국 전체 면적의 1/6을 차지하며, 막대한 지하자원과 천혜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향후 분리독립 가능성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되고 있으며, 구소련 이슬람 공화국들의 독립으로 이 지역 인근에 유사한 민족적-문화적-종교적 기원을 갖는 독자적 정치체들이 등장함으로써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원리주의운동이 이 자치구에 파급되는 것을 강력히 경계하고 있다. 이 자치구에는 1990년대 이래로 심각한 폭동이 많이 발생하였고, 특히 1997년 2월에는 우루무치에서 연쇄버스폭발사건이 발생한 이외에 카자흐스탄 국경에 가까운 이닝 시에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된 충돌이 있었다. 현재는 붕괴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서 군사 훈련을 받았던 위구르족 청년도 다수 있다고 전해져, 9·11 테러 이후, 이 지역에서도 이것을 계기로 단속이 강화되고 있다. 2002년 8월, 미국도 이러한 과격 그룹을 테러 조직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2008년 봄 이후, 베이징 올림픽을 표적으로 한 것으로 생각되는 독립활동이 활발화되어, 올림픽 개막 직전인 8월 4일에는 카스 지구에서 국경경비의 무장경찰이 피습당했다. 2009년 7월, 광둥성에서 일어난 위구르족 구차사건에 반발하여, 우루무치 시 등에서 위그루족에 의한 대규모 폭동이 발발하여, 이 충돌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의 G8확대수뇌회의에 출석 예정이었던 후진타오 주석은 급거 귀국하였다. 배경에는 한족 인구의 증가, 경제 격차, 차별 등이 있다.
발생 원인
중화인민공화국에는 56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이 중 하나가 위구르족이다. 위구르족은 오랜 시절 동안 소수민족 탄압을 겪어 오면서 분리독립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은 위구르자치구를 지정했다. 그러나 분리독립에 대한 주장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시위 중 중화인민공화국이 시위를 무력 진압한 것이다. 이번 유혈 사태는 중국 내에서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시위이기도 하다.
7월 5일 이후
7월 7일 오전 11시에 약 500명의 위구르족들이 연행자 1400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후 오후 1시에 300여명의 한족들이 위구르족 상점들을 부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시켰다. 그러나 잠시후인 오후 3시에 3000명의 한족이 각목, 쇠파이프 등을 들고 반위구르 시위에 나서 경찰저지선을 돌파해 위구르족 주거구역 침입을 시도했다. 한족 시위대는 "우리를 보호하기위해 시위를 시작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위구르 정부측은 "당국을 믿고 일단 귀가하라"며 해산을 촉구했다.
7월 8일 오전 북부의 우루무치 사범대학 인근에 한족 700~800명이 모여 각목, 칼,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도로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였다. 이에 남부의 위구르족들도 한족 시위대의 습격으로부터 집과 상점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채 각 마을에 대기하고 있다. 또한 오후 12에는 30~40여명의 위구르족이 중국 정부의 편파적인 사건 처리에 항의하는 기습 시위를 벌였다.
중국 정부는 우루무치에 2만여명이 넘는 경찰력을 동원하고 요소요소에 지프차, 트럭 등을 배치해 시내는 사실상 계엄상태이며, 현재도 경찰력과 군병력이 추가로 배치되고 있다. 이에 위협을 느껴 우루무치를 떠나는 위구르족들이 점점 늘고 있다.
7월 13일 13시 55분경에 중국 경찰이 흉기와 곤봉을 휘두르는 위구르인 3명에게 발포, 2명을 사살하고 1명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경찰측은 경고사격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거세게 저항하자 합법적으로 발포했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중국 정부가 처음으로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인정한 것이다. 이로 인해 7월 5일 진압과정에서의 실탄 발포 의혹이 또다시 제기되고 있다.
7월 18일 중국 정부는 위구르인 12명을 사살했다고 처음으로 시인했다.
언론 통제
시위 이후 우루무치는 일부 장소에서만 인터넷과 국제전화를 쓸 수 있게 통제되고 있다. 또한 카슈가르 등 위구르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도 인터넷 접속이 차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트위터와 유튜브는 중국 전역에서 접속이 차단되어있다.
7월 7일 중국외신기자클럽(FCCC)은 신장지역 시위 취재에 나선 외국 방송기자들이 몇시간 동안 구금되고 장비를 압수당하는가 하면 카메라가 파손되기도 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당일 정례 브리핑에서 "외신기자들이 의도적으로 중국의 법률과 규정을 어기겠다고 하면 그 누구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며 "일부 외신기자들이 규정을 어긴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의 법률과 규정을 존중해달라"고 말했다. 또한 친 대변인은 신장지역의 인터넷을 차단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외부의 분리주의 세력이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시위를 선동하며 사회불안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각국의 반응
- 터키
7월 8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가 유엔 안보리의 의제로 채택되도록 제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7월 9일 니하트 에르군 터키 산업장관은 위구르 유혈 사태와 관련해 중국산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자고 자국민에게 촉구했다. 터키 국민은 터키 정부가 여전히 중국 눈치를 본다며 더 세게 항의할 것을 촉구했다. 앙카라 주재 중국 대사관과 이스탄불 주재 중국 영사관 앞에서는 위구르인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터키인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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