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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41 : 후진타오 시대 1 (팔영팔치, 티베트 반중국 시위사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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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41 : 후진타오 시대 1 (팔영팔치, 티베트 반중국 시위사태)

두바퀴인생 2010. 7. 5. 08:53

 

 

 

중국의 역사 141 : 후진타오 시대 1 (팔영팔치,티베트 반중국 시위사태)

 

후진타오 시대

후진타오
호금도

(중국어 간체: 胡锦涛, 정체: 胡錦濤)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제6대 주석
임기 2003년 3월 15일~
전임: 장쩌민(5대)

임기 2002년 11월 15일~
전임: 장쩌민(7대)

임기 2004년 9월 19일~
전임: 장쩌민(5대)

출생일 1942년 12월 21일(1942-12-21) (67)
출생지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 장쑤 성 타이저우 장옌
정당 중국공산당
배우자 류융칭

후진타오(호금도, 胡錦濤, 1942년 12월 21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다. 칭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으며,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일체의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아 혁명의 광풍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대학교 졸업 이후 수력발전소에서 근무를 시작, 관리로서의 길을 걸었다.

 

중국 내 자본가를 잇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켜 ‘붉은 자본가’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 내에서 이른바 제2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던 천산 고속도로의 공사를 마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정책과 업적

팔영팔치

2006년 3월, 중국 인민들이 해야 할 여덟 가지의 일과 해서는 안 될 여덟 가지의 일을 고시로 표현한 팔영팔치를 제시하여, 경제성장 이후 불거진 양극화 문제와 개인주의의 확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국심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사회주의 영욕관의 슬로건이 내걸린 난징역

 

팔영팔치

 

팔영팔치( 八榮八恥,  여덟 가지의 영예로운 일과 여덟 가지의 수치스러운 일)는 중국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사회주의 영욕관(榮辱觀)의 수립을 역설하면서 밝힌, 중국 인민들이 해야 할 여덟 가지와 해서는 안 될 여덟 가지이다. 2006년 3월 4일 정치자문기구인 인민정치협상회의 대표단회의에서 칠언 대구의 고시(古詩) 형식으로 내용을 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어(간체) 한국어 번역
以热爱祖国为荣、以危害祖国为耻 조국에 대한 사랑은 영예, 조국에 대한 위해는 수치
以服务人民为荣、以背离人民为耻 인민을 위한 봉사는 영예, 인민에 대한 배신은 수치
以崇尚科学为荣、以愚昧无知为耻 과학의 숭상은 영예, 우매와 무지는 수치
以辛勤劳动为荣、以好逸恶劳为耻 근면한 노동은 영예, 편한 것을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은 수치
以团结互助为荣、以损人利己为耻 단결과 상호부조는 영예,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기만을 위하는 것은 수치
以诚实守信为荣、以见利忘义为耻 성실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영예, 이익을 좇아 의를 잊는 것은 수치
以遵纪守法为荣、以违法乱纪为耻 규율과 법을 지키는 것은 영예, 법을 어기고 규율을 혼란하게 하는 것은 수치
以艰苦奋斗为荣、以骄奢淫逸为耻 각고분투하는 것은 영예, 교만과 사치 그리고 음란방탕한 것은 수치

 

팔영팔치는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가 현 중국의 중대한 문제인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발판으로 중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후 주석의 사회주의 영욕관에 대하여 중국의 정치인과 학자들이 대대적인 환영을 밝혀 앞으로의 중국식 사회주의 운영에 주된 근간이 될 것으로 중국의 대내외 언론들이 평가하고 있다.

과학적 발전관

과학적 발전관이라 함은 인간을 근본으로, 전면적으로 조화가 이루어진,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적 발전관이 제기된 것의 배경에는, 종래의 경제성장 지상주의에 의한 심각화된 격차와 환경파괴의 문제 등이 있다고 여겨진다. 과학적 발전관은 후진타오 지도부가 일관하여 들고 있고 중요한 전략 사상이고, 후진타오 자신에 의해 2004년에 처음으로 제기되었다고 여겨진다. 경제성장 일변도를 관철하였던 덩샤오핑, 장쩌민 시대로부터 궤도 수정을 도모하는 움직임이 주목되고 있다. 2007년의 중국공산당 제17회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이 당의 중요한 전략 사상으로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와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조화로운 사회 건설

2005년 3월의 전인대 이후, 후진타오 지도부는 "조화로운 사회 건설"의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경제성장의 이면에, 빈부의 격차, 치안, 실업, 부패 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생활고 및 토지수용이나 독직 등 당국에의 불만으로부터 중국 가지에서 데모와 폭동이 빈발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사태의 약화를 염려하며, "조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중요과제로서 제기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부의 재분배 시스템을 확립하고, 빈부의 격차의 해소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이해에도 저촉하기 때문에, 그 실현에는 곤란이 뒤따르고 있다. [

주요사건

2008 베이징 올림픽

 

외교

대한민국과의 동물외교

그는 임기 동안 대한민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는데 그 중 2005년APEC 정상회담을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방문하였고 노무현 대통령(당시)에게 시베리아 호랑이 1쌍을 기증하였다. 하지만 번식을 추진하던 중에 암컷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에 방한을 하여 이명박 대통령에게 따오기 1쌍을 기증하기도 했다. 현재 경상남도에서 번식을 추진하여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북한 방문

그는 두 차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바가 있는데 한 번은 중국과 북조선이 합작하여 만든 유리 공장을 방문했다.

경력

후진타오 주석(왼쪽)과 부인 류융칭 여사

 

 

티베트 역사, 독립운동, 반중국 시위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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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et-claims.jpg
            티베트 망명정부가 주장하는 티베트의 영역
중국 정부가 정한 티베트 영역
티베트 자치구
인도악사이 친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지역
중국티베트 자치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지역
그 외의 티베트 문화 영향권

1912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제정한 설산사자기로, 현재는 티베트 망명 정부가 티베트의 기로 사용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 독립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티베트( 중국어: 西藏 시짱[*])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고원 지역으로, 토착 티베트인들의 고향이다. 평균 고도는 약 4,900m이며, 지구상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일부(시짱 자치구)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일부가 인도에 포함되기도 하며, 중화민국(타이완)에서는 공식적인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기도 한다. 티베트의 주권과 관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는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된 시기와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된 것이 국제법상 효력이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이견이 있다.

개요

티베트는 중국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티베트 신화

티베트 신화는 진화론과 과거 티베트 지역의 상당부분이 바다였음을 알고 있었던 듯한, 관찰할 만한 신비로운 성격을 띠고 있다.

'먼 옛날 이 설역 고원은 바다였다.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니 거품이 일어나고 이 거품들이 쌓이고 쌓이자 육지를 형성하였다 …(중략)… 시간이 또 흘러 남해 바닷가 보따낙가산 관음보살은 변종으로 나타난 원숭이를 보고 그를 대륙으로 보내어 살게 했다. 원숭이는 불도를 지키며 얄룽계곡의 한 동굴에 살게 되었는데, 남자(수컷)원숭이는 '투' 였고, 여자(암컷)원숭이는 '초' 였다. …(나찰녀가 나타나 원숭이와 결혼한 내용. 중략)… 그 후 나찰녀와 원숭이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진 여섯 자식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점차 털이 줄고 꼬리가 짧아지면서 일어나 사람처럼 변하였고, 결국 사람이 되었다.

역사

선사시대

1만여 년 전부터 티베트 지역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2] 중국어와 고대 티베트미얀마어군은 티베트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고 중국인들은 황하에서 을 재배하기 시작한 기원전 4,000년경에 분리되었다고 추측된다. 티베트인들은 약 500년경에 미얀마와 분리되었다.

 

철기시대의 구릉지 마을과 매장지가 티베트 고원에서 발굴되었는데, 티베트의 고대 문서를 따라 샹슝(Zhang Zhung, 象雄)문화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뵌(Bön) 지역 문화의 기원으로 알려졌다.

티베트 왕국(토번)

티베트민족과 한족의 마찰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서역 개척 무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티베트의 기록된 역사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중국 사서로 보면, 「신당서」엔 4세기 첸뽀(贊普, 토번 왕을 이르는 명칭) 라토토리넨쩬(拉托托日年贊)이 '줘떠투두' 로 기록되어 있다).[5] 티베트의 역사는 야루짱부강 계곡의 일부를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첸캄포(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40년 당 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文成公主, 625~680)와 혼인하였다. 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간쑤 지방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였다. 670년 ~ 692년에는 당과 대비천 전투(669년)를 통해 타림 분지와 인접한 신장카슈가르시를 점령하고, 승풍령 전투(678년)에 승리해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나 692년 중국 왕조 당나라의 장수 왕효걸이 이끄는 군대에 서역을 빼앗겼다. 당은 이 기세를 몰아 토번을 압박하고자 했으나 토번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가르친링(대비천, 승풍령 전투 승리시의 지휘관)에 의해 소라한산에서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아랍, 동부 투르크와 동맹을 맺었다. 747년에는 당나라의 장군인 고선지의 원정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티베트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750년까지 티베트인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대부분 잃었다. 고선지751년 탈라스 강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칼룩스의 연합군에 패하였고,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티베트의 세력이 회복되었다. 티베트는 북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고, 763년 안사의 난 때에는 당나라가 토번에 매년 바치던 공납을 중단한 것을 빌미삼아 그 당시의 첸뽀 치쏭데쩬(赤松德贊)이 다짜뤼공(達札樂宮)을 동정원수로 임명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잠시 장악하기도 하였다.

 

 

820년경의 세계. 티베트는 중국(노랑색) 남쪽의 짙은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821년 또는 822년에는 티베트와 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두 나라의 국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양국 언어로 기록된 이 조약은 라싸조캉사원 앞의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 티베트는 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왕국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티베트는 토번(吐蕃)이라 불렸고, 티베트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200년간 9대의 왕이 다스렸다.

몽골과 청나라 이후

이후 티베트는 13 ~ 14세기에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정권은 완전한 독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13년에는 몽골몽장 조약을 체결하면서 두 나라가 협동하여 한인의 공화정권인 중화민국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몽골에는 러시아, 티베트에는 영국이 무기, 차관을 제공하는 등 외부의 지원이 있었으나,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몽골과 티베트를 독립국으로서 인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티베트는, 신해혁명의 소식이 알려진 1913년, 라싸를 점거하였던 청나라 군대가 격렬한 시가전 끝에 물러났으나, 그 이후에도 중국국민당 등의 중화민국의 역대정권과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유지되었으며, 티베트 달라이 라마 정부의 실효적 지배영역내에서는 어떠한 중국의 기관도 설치가 승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국국민당의 사절단은 의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8년에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라싸에 계속 머물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영국령 인도로부터 이주해 온 영국군에 의해 갼세, 라싸와 카무 지방 각지에 통신기지가 건설되었다. 이 기지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무력점거하기까지 영국군의 무선기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하지만 티베트의 오랜 정치, 종교 합일의 농노 제도하에 국민들이 점점 고통받으며 불만을 갖기 시작하였다.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은 독립국으로서 존재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였으나, 북경정권의 시대에는 군벌의 혼전, 남경국민정부 시대에는 대일전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에 대하여 압력은 행사하였으나 본격적인 군사적 침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의 승리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티베트의 전 지역을 목표로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군사행동을 시작하여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1951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중국에 의해서 점령, 통치되고 있으며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인에 대한 장기적출과 학살로써 티베트를 지배하였고, 1960년대에는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시짱자치구(서장자치구, 西藏自治區)가 설립되어 티베트인들에 대한 자치가 허용되었다. 티베트의 중국 귀속 이후로 망명을 떠난 티베트인들의 일부는 동화정책에 따라 티베트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 한인의 이민을 실시하여 한족의 인구 비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포탈라 궁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행하였고, 2005년에는 티베트로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티베트 독립운동

 

티베트 독립운동( - 獨立運動, 중국어: 西藏独立运动/西藏獨立運動, 영어: Tibetan independence movement)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아래에 있는 티베트 혹은 티베트 자치구에 독립된 국가인 티베트를 세우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티베트에서 망명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부터 수년 후, 티베트는 그 지배하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9년 3월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사에서 대규모의 민족운동이 발생하였고, 이어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에 망명하여 중국정부와 대립상태에 있다. 중국의 티베트인 집단거주지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데모가 발생하였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 달라이 라마는 중국정부에 대하여 고도의 자치, 즉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사항을 티베트인 자신들이 관할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독립요구를 고집하고 있지는 않다. 2008년 3월, 티베트의 라사에서 승려들과 당국 간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희생자를 낳았다. 이에 대한 항의활동이 세계 각국에서의 베이징 올림픽 성화 릴레이에 영향을 주었다. 달라이 라마는 올림픽 개최를 지지하는 한편, 중국정부에 대화를 요청하였다. 2008년 5월부터 특사와 중국정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으나, 큰 진전은 보이지 못했다. 2009년 3월에는 티베트 독립운동으로부터 50년이 되어, 긴강이 고조되어 당국은 경비를 강화하였다.

현재 상황

망명중인 달라이 라마미국 국회유럽 의회를 포함한 많은 국제적 장소에서 연설을 해왔다. 그는 1987년에 독립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으며, 티베트의 완전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를 보장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지난 40여 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내왔지만, 티베트 망명정부의 공식 인정을 얻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운동은 다음과 같다:

  • 자유 티벳 운동 : 1987년에서 1989년 사이에 티베트 내부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중국 정부는 이를 적발하여 10명의 승려를 구금하였고, 2004년 현재에도 3명이 구금된 상태에 있다.
  • 티베트 청년 의회 : 티베트 망명정부가 위치한 인도다람살라에 위치한 70,000명의 회원을 보유했다고 주장한다.
  •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 : 미국 인디애나주에 위치하였으며 1995년에 공식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다양한 국제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 국제 티베트 원조 기구 : 2004년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조직으로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 조직의 유럽 지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08년 티베트 반중국 시위

티베트인들이 주장하는 티베트의 범위(주황색)
 
 

중국에서 정한 티베트 자치구의 범위

 

 

 

2008년 티베트 반중국 시위( - 反中國示威)는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이 되는 2008년 3월 10일 티베트 승려(수도승) 등 600여 명이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1]로 시작하여 3월 15일라사 도심 라모기아 사원 인근에서 몇명의 티베트 반정부 시위대가 중국 공안(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그 후 불어나기 시작한 시위대는 도로변에 있는 건물과 경찰 차량, 정부 청사에 돌을 던지며 불을 질렀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들을 공격하며 도시 일대를 큰 혼란에 빠트렸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시위대로 인한 공식 사망자 수는 13명(3월 17일 현재)이었으나,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는 시위 과정에서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3월 15일 밤, 중국인민해방군이 탱크와 장갑차로 라사 시내에 진입하였고 중국 당국은 공안 2000여명을 투입해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했고 60여명을 연행하였다. 중국 외교 당국은 지난 며칠간 소수의 승려들이 라사에서 어느 정도의 소요를 일으켰으며 지방 정부와 사원의 노력으로 상황이 안정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 8월 8일 개최되는 베이징 올림픽까지 위협하는 이번 소요 사태에 대해 중국 정부는 질서 회복을 위해 '인민 전쟁'을 선언하는 한편 티베트 망명 정부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지지 세력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중국 정부의 대응에 대하여 인권 단체들은 이번 시위가 1989년 대대적인 중국 정부에 대한 항거 이후 가장 큰 큐모라고 전했다.

 

한편, 중국 정부가 라사 일원에 계엄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들은 라사로 들어갈 수 없었으나 현재는 외국 기자는 물론 관광객까지 라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종교

종교는 티베트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존중되는 문화의 한부분이다. 티베트의 주요 종교불교이며, 그리스도교 등의 다른 종교는 극소수로 존재한다.

티베트 불교

불교는 인도로부터 전래되어 7세기에 국교의 자리로 차지하였다. 이 불교가 티베트의 특유의 문화인 티베트 불교로 발전한다. 티베트 불교는 바하라야나(Varjrayana)의 독특한 형식을 따른다. 티베트의 불교는 티베트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네팔, 부탄, 라다크 등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진다. 티베트인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아주 작은 의문조차 품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통치 이후 열렬한 종교 활동에 의문을 품은 중국 정부에 의해 불교는 정치화되었다.[11]

언어

티베트인들이 쓰는 언어는 티베트 문자로 되어 있는 티베트어이다. 티베트 문자는 부탄의 공용어인 종카어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티베트 고원과 부탄에서도 사용되고, 네팔의 일부와 인도 북부의 시킴 지역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시노-티베트어족(Sino-Tibetan)의 티베트미얀마어군에 분류된다. 티베트말에는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티베트와 다른 히말라야의 언어들은 종종 불분명하다. 티베트어의 다양한 방언을 고려하면, 티베트어족은 티베트 고원에 걸쳐 약 6백만 명이 사용하며, 약 15만 명의 망명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티베트 문자는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에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