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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7 : 마오쩌둥 시대 6 (문화대혁명 2) 본문
중국의 역사 137 : 마오쩌둥 시대 6 (문화대혁명 2)
문화대혁명 2
린뱌오의 득세와 몰락
마오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린뱌오는 1968년 이래 중국 지도부의 가장 유력한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몇차례 마오의 암살기도가 벌어진 후 1971년 9월 린뱌오가 탄 비행기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과 전 세계는 깜짝 놀랐다. 1968년과 1971년 사이에 린뱌오와 관련된 사건들을 정확하고 타당성있게 검증하는 것은 현재에도 사안의 민감성때문에 불가능하다. 린의 득세와 몰락 그리고 죽음은 아직까지 역사가들의 주된 이슈이고, 아직도 확실히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당내 권력 이동
1969년 4월 1일, 중국공산당의 9차 중앙위원회에서 린은 가장 큰 승리자였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제2인자가 되었다. 또한 국방부장을 오래 지낸 그는 군부에 대한 영향력도 다른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린의 가장 큰 잠재적 경쟁자이었던 류샤오치는 이미 숙청되었고, 저우언라이는 이미 고령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제9차 중앙위원회는 린뱌오가 제출한 정치보고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보고는 류샤오치 및 다른 "반혁명세력"에 대한 규탄과, 지속적으로 마오 어록을 인용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두 번째 어젠다는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에 맞춰 당을 새롭게 건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안에서 마오의 이름은 린뱌오와 연결되어 언급되었다. 즉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 의 식의 호칭이다.
세 번째로 새롭게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은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셩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정치국은 문화 대혁명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사들로 대부분 채워졌다. 저우언라이는 정치국에 남았지만, 서열은 5명중 4위로서 위상이 축소되어 있었다.
린의 권력기반 확장시도
당시는 린의 최전성기였으며,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마오에 이어 2인자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린은 좀 더 확실한 안전판을 두고 싶어했다. 즉, 마오의 후계자로 확정된 이후, 린은 류샤오치의 실각으로 폐지된 국가주석 직을 복원하려고 노력하였다. 린은 마오를 주석에 두고 자신은 부주석 자리를 가지려고 한 것이다.
1970년 8월 23일, 중국공산당의 제9차 중앙위원회의 제2차 전체회의는 1959년에 뒤이어 다시 루산에서 열렸다. 천보다가 첫 번째 연설자로 나서 간접적으로 스스로를 높이려는 의도로 마오를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발언을 하였다. 동시에 천은 국가주석제를 복원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천의 제안을 크게 비판했고,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하였다.
천의 상무위원직 해임은 린뱌오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제9차 중앙위원회가 끝난 후에도, 린은 계속적으로 당직과 정무직에서 승진을 요구하였다. 마오는 린의 의도가 최고 권력을 차지하고 자신을 축출하려는 것으로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오는 천보다가 제의한 국가주석직 신설도 의심의 눈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즉, 주석인 마오의 사후에 부주석인 린이 자동적으로 승계를 하겠다는 의도로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마오의 안전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린뱌오의 쿠데타 기도
린의 당과 정부안에서의 권력확장 시도에 대한 마오의 거부는 린을 심리적으로 좌절시켰다. 더욱이 린의 권력기반은 당기관에서 이 날로부터 축소되기 시작하였고, 그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다.
“ | 새로운 권력투쟁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혁명활동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다른 무리가 이를 낚아챌 것이다. | ” |
—린뱌오 |
린의 지지자들은 마오를 축출하기 위해 아직 린뱌오의 손에 남아있는 군권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린의 아들이자 공군의 고위 지휘관이었던 린리궈와 다른 고위 음모자들은 상하이에서 마오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이를 "571공정"이라고 이름 붙였다(발음은 "우치이"로, 무장봉기를 뜻하는 武起義와 같다). 이 음모에 린뱌오가 얼마나 간여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수정주의 해석자들은 이 계획은 린뱌오 보다는 린의 아들이 대부분 꾸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음모는 대체로 공군을 동원한 폭격과 병력동원으로 이뤄어졌다. 이 계획이 성공했을 때, 린뱌오는 모든 정적을 체포하고, 최고 지도자로 등극할 예정이었다.
마오를 암살하기 위한 기도가 1971년 9월 8일부터 9월 10일 사이에 있었다. 이러한 음모는 실행되기 이전에 지역 공안당국이 눈치채고 있었다. 공안 당국은 린뱌오측이 거사를 위한 요원들을 군부대에서 훈련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오는 이때 남부 중국을 방문중이었는데, 마오가 습격당했다는 여러 설과 보도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마오가 전용 열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오던 중 위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마오가 탄 열차가 다리를 지날때 폭파하려고 했으나, 정보기관이 미리 감지하여 마오가 일정을 바꾸어 무사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 수많은 병력이 마오를 경호하기 위해 10-20m 간격으로 배치되어 철로를 지켰다. 또한 이 병력중에도 암살자가 섞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아래, 모든 병력의 시선은 바깥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이런 설들은 서로 모순되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1971년 9월 11일 이후 린뱌오과 린의 부하들은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수가 홍콩으로 도피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실패하였고, 약 20명의 육군 장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1971년 9월 13일, 린뱌오와 부인 예췬, 그리고 아들 린리궈와 몇 명의 보좌관들이 비행기로 소련으로 도피하려고 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몽골에서 추락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같은 날 정치국은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린뱌오의 혐의에 관한 여러 건을 토의했다. 9월 30일에 린뱌오의 사망이 베이징에서 확인되었는데, 이 때문에 10월 1일의 국경절(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의 행사는 취소되었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가랑 유력한 설은 연료가 부족했거나 혹은 갑작스러운 엔진고장이라는 것이다. 또한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소련측이 이 비행기에 탄 탑승자의 유해를 수거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린의 쿠데타 기도는 실패했고, 그것으로 그는 정치적으로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잃는 파멸적인 운명을 맞았다.
사인방의 대두와 몰락
저우와 덩에 대한 사인방의 적의
자신의 가장 친밀한 수하였다고 생각했던 린뱌오의 배신과 몰락 때문에 마오는 후계문제와 당의 앞날에 관해 깊이 근심하게 되었다. 적당한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1972년 9월 상하이의 젊은 당간부였던 왕훙원이 베이징의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승진하여 다음해에 공산당의 부주석에 올랐고, 마오의 잠재적 후계자로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같은해에 저우언라이의 건의로, 이전에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다시 중앙에 진출하여 부총리에 올라, 정부의 일일 업무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린뱌오의 죽음와 마오의 건강 악화 때문에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들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장칭은 문화 대혁명의 초반에 방향을 이끌었던 주역이었지만, 린뱌오의 사후 장칭이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그녀는 정치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그리고 정치적으로 친밀했던 왕훙원과 연합하였다. 이 4명은 후에 "사인방( 四人幫)" (4사람의 불량배)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미디어와 선전망을 장악하였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집행하는 경제정책에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1973년 말, 사인방은 "비림비공"(批林批孔,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함) 운동을 개시하였다. 이것은 겉으로 내건 목표로는 중국 문화에서 유교적 영향을 제거하고, 린뱌오의 반역행위를 비판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저우언라이를 겨눈 운동이었다.
사인방은 저우를 《포스트-마오》 이후 후계구도에서 가장 큰 잠재적 위협으로 보았다. 이 운동에서 저우언라이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았지만, 사인방은 역사적 인물인 주나라의 주공(周公)을 자주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저우(周)씨 였던 저우언라이를 은유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대중은 대체로 쓸데없고 파괴적인 정치적 운동에 식상하게 되었고, 이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저우언라이를 실각시키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하였다.
사인방은 미디어를 장악했지만, 덩샤오핑이 경제 정책의 집행을 통해 실세로 떠오르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덩은 당의 분파운동에 대해 명백히 반대했으며, 그는 당의 단합이 효과적인 생산활동의 전제 조건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오는 덩의 정책이 "우파의 복권운동"이라고 칭했다.
문화 대혁명 전체의 명성이 덩의 정책때문에 금이 갈 위기에 처하자, 마오는 1975년 12월 덩에게 자아비판서를 쓰도록 하였다. 이것은 사인방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마오의 사망, 사인방의 체포 및 문화 대혁명의 종말
1월 8일, 저우언라이는 방광암으로 사망하였다. 다음날 베이징의 인민영웅비 앞에서는 이를 추모하는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1월 15일, 저우의 장례식이 열렸고, 저우에 대한 폭넓은 인민들의 존경심 때문에 추모열기는 전국을 휩쓸었다.
사인방은 이것이 정치적인 파고로 변모하지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미디어를 통해 추모열기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검은 옷이나 하얀 조화 및 다른 조문행위에 대해 제한을 가했다. 그 자신도 심하게 와병중이었던 마오를 제외한 모든 중국의 고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덩샤오핑은 공식적으로 저우의 추모사를 낭독했다.
2월, 사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인 부총리 덩샤오핑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저우의 죽음 이후 마오는 사인방중에서 총리를 선발하지 않고,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하였다.
4월 5일은 중국의 전통 명절인 청명절이었고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추모를 행하는 날이었다. 군중들은 3월 말부터 톈안먼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은 전횡을 일삼는 사인방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점차 많은 군중이 여기에 가담하였고, 사인방을 규탄하는 포스터나 격문이 발표되었다. 4월 5일, 수십만의 인파가 텐안먼 광장에 집결하였고, 이 군중은 비폭력 항의 시위로 변하였다. 사인방은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공안이 이를 해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텐안먼의 시위대는 덩샤오핑의 지도 하에서 "소수의 우파 반혁명 분자"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국적인 미디어를 통해 이를 규탄하였다. 4월 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장춘차오는 개인적으로 덩을 공격했고, 덩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가택연금되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은 사망하였다. 문화 대혁명 동안 형성된 마오의 이미지는 대중과 항상 함께한 이상적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마오의 죽음은 중국 사회주의의 상실을 상징화하는 것이었다. 중앙위원회의 통지문으로 9월 9일 오후 그의 죽음이 발표되었을때, 모든 사람이 슬픔에 잠겼고 추모열기에 쉽쌓였다. 거리에서는 통곡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쪽지를 넘겼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화궈펑을 당의 새로운 주석으로 등극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이 사건 이전에는, 화는 정치적 기술이나 야망이 부족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져 있어서, 사인방이 마오를 계승하는데 별로 위협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젠잉과 같은 유력한 군지도자와 비록 몰락했지만 당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덩샤오핑,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지지아래서 화궈펑은 사인방의 체포를 명령하였다. 10월 10일, 8341 특수연대는 사인방 전원을 체포하였다. 역사적으로는 이것을 문화 대혁명 시대의 종말로 간주한다.
4인방 재판 광경
이후 상황 전개와 덩샤오핑의 집권
화궈펑은 공식적으로 사인방을 비판하고, 그들을 체포하였지만, 그도 마오의 이름을 빌어 마오 시대의 정책을 옹호하였다. 그는 "양개범시"(兩個凡是)(마오쩌둥이 '결정한 것'과 '지시한 것' 두 가지는 무엇이든 옳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마오 주석이 행한 정책은 모두 옳고, 이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마오의 위상는 그가 죽고나서도 누구도 감히 비판하기 힘든 신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화궈펑의 목표도 문혁으로 야기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실용적이었던 덩과는 달리 화는 1950년대 소련의 통제경제를 모델로 한 정치경제 구조를 선호하였다.
화궈펑의 정무에는 재야에 있던 덩샤오핑의 도움이 필수적임은 명백해졌다. 비록 사인방에 의해 당에서 축출되었지만, 덩샤오핑은 당내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10월 10일, 덩샤오핑은 개인적으로 화궈펑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을 복권, 복직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예젠잉은 덩이 정무원에 복직되지 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화궈펑을 닦달했다는 설이 있다. 증가하는 압력하에서 1977년 7월 화궈펑은 덩을 다시 정무원으로 복직시켜 부총리에 임명하였고, 당직도 복원시켜주었다.
이것으로 덩은 화궈펑에 뒤이은 제2의 실력자가 되었다. 8월 제11차 중앙위원회가 베이징에서 열려,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화궈펑, 예젠잉, 덩샤오핑, 리셴녠, 왕동싱이 이 서열순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 5월, 덩은 자신의 피후견인인 후야오방을 더 승진시킬 기회를 잡았다. 후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기고하면서 마오쩌둥의 어록을 인용하여 덩의 이론을 치켜세웠다. 이 기고문이 발표된 후, 후와 덩의 지지는 확산되었다. 7월 1일, 덩은 대약진운동에 관한 마오의 자아비판서를 공개하였다. 덩은 지지기반을 넓혀가다가 1978년 9월부터 공개적으로 화궈펑의 "양개범시" 정책을 비판하였다.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위원회의 제3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덩은 "사상의 해방"이 바람직하며, 당과 국가는 "실사구시"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화궈펑은 자아비판을 하고, "양개범시"는 자신의 과오였다고 말했다. 예전에 마오의 추종자였던 왕동싱도 비판받았다. 이 총회에서 청명절에 열렸던 텐안먼 사건도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또한 유배중 사망한 류샤오치의 뒤늦은 국장도 치러졌다. 권력의 세계는 무상한 것이라, 덩은 자신을 다시 복권시켜준 화궈펑을 비판하면서 몰아냈다.
1980년에 열린 제11차 중앙위원회의 제5차 전체회의에서는 문혁기간에 숙청된 펑전, 허룽 및 다른 고위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 행해졌다. 후야오방은 당총서기가 되었고, 또다른 덩의 피후견자인 자오쯔양도 중앙위원회에 들어왔다. 이 해 9월 화궈펑은 사임하고, 총리직은 자오쯔양이 계승하였다. 덩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로서 실용적인 개혁파 지도자로의 권력이동은 완성되었다.
문화 대혁명 영향
문화 대혁명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중국인민들 대부분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경제활동이 "혁명" 활동이 우선이라는 논리 앞에 정지되었다.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홍위병들이 베이징으로 몰려왔다 그런데 이 비용은 모두 정부가 부담했고, 홍위병의 우선적 수송은 철도망을 마비시켰다. 홍위병은 여러 역사적 건물, 공예품, 미술품, 서적을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한편 마오쩌둥 어록은 전인민의 "성경"이 되어 누구나 휴대하여야만 했으며 1967년 12월까지 3억 5천만부가 인쇄되었다.
교육의 파괴
10년 동안 계속된 문화 대혁명 기간동안 교육이 마비되었다. 이 당시에 대입시험은 취소되었으며, 사인방이 몰락하고도 한참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농촌의 노동교화소로 가야만 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로 중국을 떠나 망명하였다. 문혁기간동안 도시의 젊은이들은 농촌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되었고, 그곳에서 모든 정규 교육을 포기한채 공산당의 선전교육만을 받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진학이나 더 이상의 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학력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교육수준에 머물렀다. 현재 50~60대의 대부분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중국 홍위병 출신들이며 이들이 오늘날 중공의 지도층에 포진하고 있다.
많은 생존자들이나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능력이나 기술이 있는 사람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덩샤오핑 지지자나 서방측 목격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부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세대를 산출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지역별로 다양하게 나타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맹율은 측정되지 않았다. 전장 구의 몇 개 현에서는 문혁 이후 20년이 지난 이후에도 문맹율이 41%나 되었다. 중국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어떠한 문맹 문제도 부인해왔다. 이 결과는 자격있는 교사들이 문혁기간 동안 제거되어 빚어진 결과이다. 많은 지역에서는 교사가 없어서 선발된 몇몇 학생들이 다음세대를 교육하는 것을 책임졌다.
전통 도덕의 붕괴
“ | 부모는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오 주석만큼은 아니다. | ” |
—"비림비공" 운동 당시, 슬로건 중의 하나 |
마오쩌둥의 사상은 전통 도덕과 관습을 제치고 중국에서 모든 것들을 이끄는 중심논리가 되었다. 홍위병의 권한은 군, 공안, 그리고 사법기관을 넘어섰다. 중국의 전통 예술과 사상은 무시되었고, 그 자리에 마오쩌둥 사상이 차지하게 되었다.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또는 구타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문혁 지도부는 사람들이 문화적 전통들을 비판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것은 "비림비공" 운동때 더욱 강조되었다.
당파적 전쟁
문혁은 또한 공산당 내에서 여러 당파의 내부 권력투쟁을 야기하였다. 이중 많은 것들은 당지도자의 권력투쟁과는 상관없이 지역 당파주의와 사소한 경쟁심이 "혁명"에 관계없이 빚어낸 것이다. 정치적 혼란 때문에, 지방 정부는 존재하더라도 집행력과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당파에 속한 이들은 백주의 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농촌지역에서는 정치적 암살이 흔히 일어났다.
대중은 자발적으로 이러한 당파에 가담했고, 다른 당파에 대한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런 당파 투쟁을 야기한 사상적 차이는 사실 모호하거나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지역적 권한을 장악하는 것이 대중이 참여한 당파투쟁의 유일한 동기였다.
문화 유적과 전통 유산의 파괴
문혁 기간 동안 건물, 공예, 서적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 공예품들은 각 가정에서 탈취되거나 혹은 즉석에서 파괴되었다.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산출하기 어렵다. 서양의 목격자들은 중국의 수천년의 역사 유물이 단 10년간의 문혁기간동안 파괴되었다고 추산한다. 또한 이런 파괴는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역사가들은 문화 대혁명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비유하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박해도 이 기간동안 심화되었다. 종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 동안 중국의 전통 문화의 지위도 크게 손상되었다. 많은 전통 문화, 예를 들어 점술, 종이 공예, 풍수지리, 중국 전통의례, 음력, 중국고전학(한문), 그리고 음력 원단(1월 1일) 등의 위상이 중국에서 약화되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홍콩이나 타이완과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후에 대륙에서 복원되기도 하였다.
소수민족 문화의 핍박
문혁은 특히 소수민족의 전통 문화에 파괴적이었다. 티벳에서는 티벳인 홍위병도 참여하여 6,000개의 수도원이 파괴되었다. 내몽고에서는 수 십년전 해체된 "내몽고 인민당"의 분리주의자로 지목된 79만명의 인물이 박해받았다. 그중 22,900명은 학살로 사망하고, 120,00명은 불구가 되었다.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위구르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코란이 불살라지고, 무슬림 이맘이 물감을 뒤집어 쓴 채 조리돌림 되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조선어로 수업하는 민족학교들이 파괴되었고 족보는(홍위병의 강요도 있었지만, 반혁명세력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 하여 자발적으로) 불살라졌으며, 민족주의자로 지목된 인사들은 핍박 및 학대를 당했다. 윈난 성 에서는 다이 족의 왕의 궁전이 불살라졌다. 또한 1975년 샤덴 사건에서는 인민해방군이 회족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는데 희생자 수는 1,600명에 이른다고 한다.
핍박과 가혹 행위
문혁 기간 동안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은 인권을 유린당했다. 자본주의의 "첩자", "주구(走狗)", "수정주의자"로 몰린 인사는 감금, 강간, 심문, 고문 등을 당하는 것이 예사였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수십만명 또는 그 이상의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거나 또는 중노동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수백만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어떤 사람은 구타와 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은 홍위병의 구타 때문에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목숨을 건졌으나, 불구가 되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였다.
광시 성의 어떤 지역에서는 이런 폭력이 극단적으로 변하여 "계급투쟁"과 "정치혁명"의 이름으로 식인행위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당의 고위 역사가들조차도 문혁 기간동안 어떤 곳에서는 "반혁명세력"을 학살 후 소화기관과 살점을 익혀먹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피해자 수의 추정치
문혁 기간 동안 벌어진 사상자의 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966년~1969년의 문화 대혁명의 혼란이 극도에 달했을 시기에, 50만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인방의 재판에서 중국의 법원은 문혁기간중 729,511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중 34,8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죽음이 보고 되지 않았고, 경찰이나 지방 당국이 숨겼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또한 중국 당국은 이를 위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왔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농촌에서만 360만명이 박해받았고, 그중 750,00명에서 150만명이 사망하고, 비슷한 숫자가 부상당했다고 추정된다. 영국에서 활약하는 중국 작가 장룽(중국어 정체: 張戎, 병음: Zhāngróng, 영어식 표기로는 Jung Chang) 쓴 '마오의 전기(In Mao: The Unknown Story)' 에서는 문혁기간중 300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
주요 희생자
- 라오서 : 유명 작가, 핍박을 받고 자살.
- 슝스리 : 철학자, 베이징 대학 교수, 핍박을 받고 절식하여 자살.
- 리리싼 : 정치가, 192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비판의 대상이 되자 음독 자살.
- 톈한 :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 핍박을 받고 병사.
- 허룽 : 군인, 원수. 홍위병에 의한 구타 및 폭행 중 병사.
- 주덕해 : 조선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장(州長). 문혁기간중 박해당해 병사.
이 외에도 각계에서 많은 명사가 홍위병의 학대와 핍박에 의해 사망하거나, 그로 인한 병사, 혹은 이를 견디다 못한 자살을 하였다.
평가
대부분의 서방과 중국의 학자들은 문화 대혁명을 미증유의 재난이며 중국사의 비극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입장에 따라 비판의 측면은 약간 다르며, 최근에는 중국에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자 문혁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문혁에 관한 중국공산당의 공식평가
중국에서는 모든 역사 사건에 대해 중국 공산당의 입장이 역사해석의 기준이 되는 불문율이 있다. 그리하여 문화 대혁명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평가는 현재 중국의 공식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사인방의 몰락 이후 집권한 새 정부가 당면한 과제중의 하나는 어떻게 문혁을 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이 사건을 중국의 복잡한 역사지형에서 다룰 것인가였다.
1981년 6월 27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건국이래의 몇가지 역사적 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중국어 간체: 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 정체: 建國以來黨的若幹歷史問題的決議)》 를 발표하여 건국 이후 발생한 여러 사건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 문건은 "문혁의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무에게 있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잘못된 지도하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은 다시 린뱌오 및 장칭 등의 반동세력 등에게 포섭되어 당과 인민에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범했다"고 밝혔다. 이 문건은 현재 중국 역사 해석의 주된 뼈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건은 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문혁의 지도자 마오"와 "혁명의 영웅 마오"를 분리했고, 마오의 개인적 과오를 마오의 사상과도 분리하였다. 그것은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절대적으로 기여했고, 마오의 사상이 곧 당의 지도 이념이기 때문이었다.
마오를 부정하는 것은 곧 공산당 자신의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분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에서 스탈린 사후 일어났던 격하운동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에 있어 마오와 마오 사상의 존재는 부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건은 마오 사상에 근거한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공산주의 건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문혁의 총책임자인 마오를 옹호하기 위해 린뱌오나 사인방을 희생양 삼아 실제보다 많은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
중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의 사상은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에 맞게 해석되어, 현재 중국공산당의 이념인 "중국 특색의 공산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문혁에 관한 "뉴레프트"의 긍정적 시각
최근에는 중국공산당 내에서 문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좌파(新左派)" 또는 영문으로는 "뉴레프트(New Left)"라고 불리는 일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문혁 기간동안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이것이 이후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후의 역사적 노정을 볼때 마오가 문혁기간동안 자본주의 지향적인 특권관료제의 폐해를 우려한 것은 옳았다고 주장한다. 마오쩌둥은 이들과 싸우기 위해 문화 대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또한 문혁 기간동안에 보장되었던 언론과 결사의 자유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개방 정책으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자 중국의 많은 빈농과 노동자는 문화 대혁명과 마오시대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가오모보와 같은 빈농 출신 작가는 문화 대혁명이 농촌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작품에 서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보 등의 어떤 작가들은 문혁이 기억할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외의 반응
문화 대혁명에 대한 해외의 반응은 당시 소속 정파에 따라 다양했다.
유럽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에서는 "낡은 것을 타파하자"고 외치는 문화 대혁명에 대한 호의적 시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68년의 68혁명 기간 동안 학생들이 홍위병을 본따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시위에 나서기도 하였다. 또한 장폴 사르트르와 같은 지식인들도 스스로 마오주의자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문화 대혁명이 야기한 파괴와 혼란이 대부분 알려져서 호의적 평가보다는 부정적 평가가 우세하게 되었다.
일본
일본에서는 문화계가 나서 "문화 대혁명 반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비롯하여 아베 고보, 미시마 유키오 등의 수백명의 저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이에 대해 항의운동을 벌이고, 중국 당국이 중국의 역대 문화 유산을 보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당시 고조되고 있던 학생 운동 세력(전공투 참조)은 문화 대혁명에 영향을 받아 과격화되었다.
홍콩
홍콩에서는 문화 대혁명에 영향받아 1967년 봉기와 친공산 세력의 정치 운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과격행위는 홍콩인들이 한 세대 동안 친공산세력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하는 결과를 빚었다.
중화민국
중화민국(타이완 정부)의 장제스는 문화 대혁명이 중국의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1966년 11월에 이에 맞선 "중화문명부흥운동(中華文化復興運動)"을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 주로 반공 교육의 소재로 이용되어 공산주의의 잔인성에 대한 증거로서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진보적 언론인이었던 리영희는 저서 《9억인과의 대화》를 통해 당시 서구의 문화 대혁명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소개하고 중국의 전통적 지배계급에 대한 인민대중노선, 인텔리의 개인적·집단적 권위주의에 대한 민중적 생활가치의 존중 운동에 대해서 평가하였다. 이는 한국의 진보 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최근에 리영희는 냉전하에서 제한된 정보 때문에 자신은 문혁과 홍위병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책을 펴낼)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 외교와 내치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홍위병은 대자보를 통해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난하면서 심지어는 월경을 하여 북조선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홍위병은 북조선에 반(反)김일성 봉기가 일어났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이에 반발한 북조선 정부와 김일성은 혈맹관계였던 북중관계를 파기하고 친소노선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김일성 자신도 문화 대혁명을 모방한 운동을 펼쳐 이후 당과 정부에 대해 절대권력을 확립하였고 주체사상이 북조선의 공식 지도이념이 되었다.
기타
최근까지 전 세계적으로 "마오주의 정당"으로 자칭하는 정치세력이 남아있고, 페루와 네팔에서는 정부를 위협하는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특히 네팔에서는 최근에 이들이 집권당으로 떠올랐다(네팔공산당). 또한 이들은 "혁명적 국제주의자 운동(Revolutionary Internationalist Movement)"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느슨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다.
저우언라이
![]() 저우언라이(194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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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46년 10월 1일~1976년 1월 8일 |
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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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54년 9월 27일~1976년 1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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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8년 3월 5일 |
출생지 | ![]() |
사망일 | 1976년 1월 8일 |
사망지 | ![]() |
정당 | 중국공산당 |
저우언라이(주은래, 중국어 간체: 周恩来, 정체: 周恩來, 병음: Zhōu Ēnlái, 1898년 3월 5일 ~ 1976년 1월 8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혁명가, 정치지도자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2인자임에도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마오쩌둥을 성실하게 보좌하여 애국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생애
자라난 배경
1898년 3월 5일 중국 장쑤 성 화이안의 가난한 관료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관리였으나, 봉급은 매우 적었고,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계속 낙방하여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서기같은 하찮은 직업에 종사하였다. 태어난 지 한 살 정도 되었을 때 후사가 없이 사망한 친할아버지의 동생의 양자로 입양되어 어릴 적부터 양어머니로부터 전통적인 고전교육을 받았다.
10살 이전에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그는 고향 화이안을 떠나 만주의 선양에 살고 있던 삼촌에게 갔다. 12살부터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자유와 평등과 같은 서양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신해혁명이 터져 청조는 붕괴하고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1913년 15세 때 중국 톈진의 난카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917년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의 칸다구 고등 예비학교(호세이 대학 부속학교)에서 공부하고 메이지 대학에 들어갔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침략적 압력이 중국에 가해지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하고 1919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5·4 운동에 참가하다 1920년에 체포되었다.
학생운동
5.4운동을 주도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저우는 이후 텐진의 난카이 대학의 문학전공으로 적을 두었으나, 수업에 참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군벌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텐진학생연합"의 조직자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저우는 이 조직의 기관지인 《텐진학생연합회보》의 편집인이 되어 활동했다. 1919년 9월, 12명의 남학생과 8명의 여학생으로 "각오사"(觉悟社)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서 후에 부인이 되는 덩잉차오를 만났다. 저우는 남학생으로만 조직된 "텐진학생연합"과 여학생으로만 조직된 "애국연합"을 통합하는 조직책이었다.
1920년 경찰이 인쇄소를 덮치고 "각오사"의 회원을 체포하였다. 저우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이끌었고, 이후 다른 28명과 함께 그도 체포되었다. 이후 경범죄로서 풀려났다. 코민테른은 그를 공산당에 가입시켜 모스크바로 유학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당시에는 공산주의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다. 그가 프랑스로 떠난 이후 덩잉차오가 "각오사"를 맡았다.
청년기
프랑스 유학시절
1920년 저우와 196명의 다른 중국인 학생들은 상하이를 떠나 마르세이유로 출발했다. 이것은 "근공검학"(勤工俭学) 이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에 의한것으로 "중불 교육위원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여 파리로 가서 프로그램에 의해 일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주도한 위원회의 부패로 말미암아 그들은 급료를 받지 못했고, 저우는 중국신문에 교육위원회와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파리시절 덩샤오핑과 알게되어 교유하게 되었다.
저우는 그동안 영국을 여행하고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학기가 안맞아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중국공산당의 산하 학생조직에 가입했고, 1922년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이후 프랑스, 독일, 벨기에등을 여행하면서 중국유학생들을 공산당 산하단체인 "사회주의청년단"에 모집하고 그들을 선발하여 모스크바에 유학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의 활동은 당에서 인정받아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자 국민당과 함께 통일전선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1924년 홍콩을 통해 광저우로 돌아왔다.
제1차 국공합작 시절
1924년 1월 쑨원은 공식적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연대를 선언했고, 중국각지에 할거하던 군벌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장교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당시 열강에 의해 고립되었던 소련과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어 고립을 탈피할 기회로 보고 무기와 자금, 군사고문단을 지원했다. 10월에 저우는 이 학교의 정치부 부주임으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교장은 후에 저우와 대결하는 장제스였다.
저우는 곧 국민당 우파가 국공합작을 극렬히 반대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특히 국민당 자체가 군벌의 연합체라는 것을 깨닫고 이들의 배신에서 공산당의 생존을 위해서는 자체 병력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그는 황푸군관학교에서 부교장을 맡고 있던 다른 공산당원 네룽전과 함께 생도들을 포섭하여 중국공산당원에 가입시켰다.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직후, 천츙밍이라는 군벌이 광저우를 점령하였다. 저우는 생도들을 이끌고 천에 대한 토벌에 나서 승리했다. 그래서 황푸군관학교의 군법회의 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 저우는 여세를 몰아 다시 승리하고 산터우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산터우와 인근지역에 대한 특별행정관에 임명되었다. 이 직위를 이용하여 그는 비밀리에 공산당의 세포조직을 심었다. 이해 8월 덩잉차오와 5년간의 원거리 연애를 청산하고 결혼하였다.
국공 합작의 실패
쑨원의 사후, 국민당은 장제스,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의 삼두정치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곧 좌파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었고, 장제스는 이를 기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당의 우파를 통합하여 자신의 지휘아래 두었다. 1926년 3월 18일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고문 미하일 보로딘이 상하이에 있는 동안 장은 당에 있던 좌익을 추방하고 당권을 장악할 음모를 꾸몄다. 장은 국민당군의 군함 중산함의 함장과 선원이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는 구실을 들어 이들을 모두 체포했고, 더 나아가 네룽전을 포함한 황포군관학교의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다.
비상사태와 통행금지가 선포되었고, 산터우에서 돌아온 저우도 48시간 동안 체포구금되었다. 저우는 풀려나면서 장을 대면하였고, 장에게 저우는 "국공합작의 단결을 방해하는 일이다"라고 비난했으나, 장은 일부 공산당 과격세력의 음모를 분쇄한 것일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상해로부터 돌아온 보로딘은 장을 신뢰했고, 저우가 성급했다고 힐난했다. 장의 요구에 의해 보로딘은 국민당적을 가지고 있는 공산당원의 명부를 장에게 넘겼다. 이 명부에 빠졌던 당원은 저우가 비밀리에 모집한 당원들이었다. 장은 모든 공산당원 장교들을 해임하였고, 공산당에 동정적이었던 국민당 거두 왕징웨이도 유럽으로 보내버려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저우도 다른 공산당원 장교와 마찬가지로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상하이에서 옌안으로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자 그는 상하이로 와서 선동가로 변신했다. 그는 1926년 상하이에 대한 국민당의 공세가 시작되자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주도하여 국민당군이 상하이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 수 있도록 원조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시의 주도권이 공산당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시를 점령하자 범죄조직인 청방과 삼합회를 동원하여 백색테러를 주도, 자신을 원조했던 노동자들을 체포처형하였다(4.12사건 참조). 이를 기화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각지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일어났다.
저우는 1927년 8월 1일 허룽과 함께 난창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홍군이 있던 장시 소비에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우는 교조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28인의 볼셰비키" 그룹대신 농촌혁명을 우선시하는 마오쩌둥을 지지하게 되었다. 당권을 잡고 국민당군에 정규전으로 맞서 큰 피해를 낸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이 몰락하고 장정 기간중 마오가 당권을 장악하자 그는 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군벌 장쉐량이 국민당과 공산당의 항일연대를 주장하면서 자신을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사건이 벌어지자, 저우는 교섭자로 나서 장제스를 석방하는 대신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다시 재건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후 저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국민당 정부가 있던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물렀다.
정치 활동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저우는 총리겸 외교부장을 맡아 국제 외교무대에서 활약하였다. 1955년 제네바 회의와 반둥회의에 중국 대표로 활약하였다. 이때 중국본토에서 대만으로 쫒겨간 국민당에서 그를 암살할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무사히 벗어났다. 이후 인도, 인도네시아, 유고슬라비아등의 국가와 함께 비동맹회의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58년 천이에게 외교부장을 넘겨주지만, 총리는 그가 죽을때까지 계속 맡았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혼란의 와중에도 그는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은 처신으로 총리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통합 노력과 실패
1970년대에는 미중 국교정상화를 주도하여 1972년 8월 미국 대통령 닉슨의 예방을 받고 중미수뇌회담에 참석하였다. 1972년의 미국 닉슨 대통령의 방중에서 마오를 대신하여 주된 상대로 나서 상하이 코뮤니케에 공동서명하였다.
그는 말년에 자신에 방광암이 발병한 것을 알고, 덩샤오핑에게 많은 직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1974년 문화대혁명의 말기 기간에는 저우 자신이 마오와 사인방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총리직 사퇴를 만류하는 주변의 요청에 따라 정계에서 은퇴하지 못하고 계속 정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1976년 1월 마오에 8개월 앞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자신의 희망대로 화장되어 중국에 뿌려졌다. 저우는 지위에 욕심내지 않고 2인자로서 마오쩌둥을 보필하였으나, 일설에는 마오가 저우가 자신보다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 텐진에는 이후 저우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세워졌다.
텐안먼 사태
저우의 죽음은 마오 사후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사인방에게 희소식이었고, 그를 존경하던 많은 중국의 인민들에겐 슬픈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자발적으로 저우를 기리기 위해 텐안먼 광장에 모인 추모인파가 사인방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자, 4인방은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4인방은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돌렸고, 덩샤오핑은 자리를 물러나 마오 사후 4인방 체포때까지 권력에서 밀려나 있었다.
평가
노련한 외교관으로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헌신적인 혁명가로서, 그리고 실용적 정치가로서 중국 현대사에 남긴 그의 족적은 매우 크다. 그의 삶은 현대적인 공산주의 혁명가의 삶과 관리집안 출신으로 "최후의 만다린(궁정관료)"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삶이 교차하는 역설적인 것이었다. 그는 마오의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을 자신의 권한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도록 노력했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홍위병들의 파괴으로부터 많은 문화유적지들을 보호하고, 숙청인사들을 보호하였다.
마오를 비롯한 많은 중국 지도자들의 비행이나 추문에 대한 사후 폭로나 비화가 잇다르고 있지만, 저우언라이는 이들과는 달리 청빈하고 성실한 근무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
그러나 비밀로 분류된 중국공산당의 서류들을 접할 수 있었던 전기작가 가오원첸이 홍콩에서 펴낸 저서에 의하면, 저우는 문화대혁명 기간중 마오의 행보를 완화시켰다는 통설과는 달리,마오에 굴복하여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일관, 자신이 구할 수 있던 많은 사람들을 숙청당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그와 아내 덩잉차오는 자식이 없어서, 혁명기간중 부모를 잃은 동지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키웠다. 그중 유명한 이는 후에 총리를 지낸 리펑이 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
그는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려는 시도를 하던 중국사회과학원에 경고를 표하였으며, 이는 훗날 동북공정으로 나타나게 되는 중국의 국수주의를 우려한 바 있다. [1]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조선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조선에 공식사과하기도 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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