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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6 : 마오쩌둥 시대 5 (문화대혁명 1 ) 본문
중국의 역사 136 : 마오쩌둥 시대 5 (문화대혁명 1 )
대약진 운동 실패 후 류샤오치(유소기)가 경제 조정을 실시하지만, 이 정책에 대해 마오쩌둥과 지지자가 맹렬히 반발하였고, 1966년에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발동시켜 류샤오치와 반대파를 정치 무대에서 내쫓았다. 이 문화대혁명은 정치 영역뿐만이 아니라 너무나 광대한 영역까지 영향을 미쳐 청소년에 의해 결성된 홍위병이 반혁명파로 지목된 인간을 매달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문화대혁명은 후기로 갈수록 중국을 내란 상태로 몰고 가다가 결국 1976년 마오쩌둥 사망으로 끝을 맺었지만, 문화대혁명은 각지에서 엄청난 살상을 기록하였고 그 희생자 수는 수백만 명에서 20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마오쩌둥의 사후 화궈펑(화국봉)이 뒤를 이었지만 2년 만에 실각하고,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았다.
문화 대혁명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0년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적, 정치적 격동기이다. 공식명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 대혁명이며, 약칭으로 문혁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이 기간동안 전국적인 혁명의 기운과 혼돈 및 경제적 침체를 일으켰다.
이 운동은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인 마오쩌둥의 제창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부르주아계급의 자본주의 요소가 당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젊은이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혁명후의 계급투쟁"을 통해 이런것들을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마오가 문혁을 제창하게 된 동기는,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국에서도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국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한편. 자신이 시도한 대약진운동에서 파멸적인 결과를 빚어 당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이 덩샤오핑과 류샤오치에게 넘어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69년 마오는 공식적으로 문혁이 끝났다고 선언하였으나, 사실상 1976년, 마오의 죽음과 사인방의 체포까지 10년간 벌어졌던 여러 혼돈과 변혁을 통틀어 문혁기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에서는 이 기간을 '십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혁은 대개의 중국인들이나 외부인 심지어는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국가적 재난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문혁의 공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중국공산당은 1981년에 이를 '마오의 과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린뱌오와 사인방도 주요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배경
중공의 사상정화운동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공산당이 실시한 여러 개혁정책은 중국사회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전의 지배층들은 "반동분자"의 낙인이 찍혀 재산 및 모든 기득권을 잃는 것은 물론,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이런 와중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중국공산당은 이렇게 사회변화로 벌어진 갈등이나 불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종종 대규모의 사상정화운동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문화 대혁명 이전에도 공산당의 사상정화운동은 몇차례 실시되었으며, 그 방법론은 집권하기도 전인 1930년대 말에 벌인 연안 정풍운동 기간 동안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즉 이런 운동들에서 초기에는 "올바른 사상의 함양"을 외치다가, 후기로 접어들면 "반혁명세력" 및 "우파"를 숙청하는 것으로 변모하곤 했다.
새로운 미디어의 보급
문화 대혁명에는 새로이 보급되기 시작한 미디어인 라디오가 큰 역할을 하였다. 문화 대혁명의 초기 준비단계에서, 중국 정부는 모든 학교, 군부대, 그리고 공공조직에 라디오를 청취한 후 이를 다시 대중에게 전달할 선전자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중앙인민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은 이런 선전활동을 위한 기구였으며, 선전자들은 방송을 듣고 이것을 다시 대중들에게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선전자의 수는 1960년대에 4억의 농촌 인구 중에 7천만에 달했다.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정책과 중.소분열
1953년 스탈린 사후 집권한 소련의 후르시초프는 전임 지도자였던 스탈린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국가적으로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 또한 "평화 공존 정책"을 부르짖으며 서방과 화해를 모색했다. 전 세계 공산주의의 최고지도자로 여겼던 스탈린이 격하되는 모습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에게 충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은 서방 제국주의 세력을 제3세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혁명이 필요하며 "핵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평화공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956년에 일어난 헝가리 반소 봉기와 폴란드 반소 봉기로 인해 소련의 공산주의권의 지도력에 대해 중국은 의구심을 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소련을 추종해왔던 중국의 외교방침을 회의적으로 보게 되었다. 또한 소련은 1962년에 벌어진 중인국경분쟁에서 미그기를 지원하는 등 인도를 지지하였으며, 이는 중국측을 크게 실망시켰으며 분노케 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MiG-15 제트전투기와 같은 최신 무기를 소련에서 구매했는데, 소련이 공산주의 우방국임에도 혜택을 주지 않고 중국에 거액을 청구하여 중국측을 격분시켰다. 또한 소련은 중국에 약속한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취소했으며, 핵기술 제공도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인민해방군의 현대화와 핵무기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고 중국의 산업화는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마오는 흐루스초프를 "수정주의자"라고 규정하였고, 소련은 "공산전체주의 국가"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또한 소련과 같은 인민이 소외된 관료제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중국이 관료의 영향력 하에서 소련의 "잘못된 길"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대중적 사상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대약진 운동
1957년 중국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난 후, 중국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급자족의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니만큼, 마오는 공산주의 이행 속도를 증진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오는 "대약진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을 위해 농촌에 집단농업과 집단동원을 위한 인민공사를 설립하였다. 대약진운동은 산업발달의 척도가 되는 철의 생산을 촉진시키고 농업생산을 1957년 수준의 두 배로 늘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이 농사보다는 질낮은 철을 생산하는 데 온통 몰두했기 때문에, 전 산업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철들은 목표량 달성에 급급한 관리들이 농민들을 몰아붙여 농가의 마당에 설치된 구식화로와 농기구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산업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 동안 농기구들은 대거 이런 화로에서 강철 생산을 위해 녹여져서 농업생산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역담당자는 처벌을 면하기 위해 허위생산량을 보고하여 문제가 커졌다. 수십 년간 계속된 내전 및 중일 전쟁, 한국 전쟁으로 타격을 입었던 중국경제는 회복되는 듯하다가 다시 한번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철강 생산량은 연간 520만 톤에서 1400만 톤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처음의 목표는 비현실적으로 연간 3000만 톤의 철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후에 2000만 톤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철은 대부분 질이 떨어졌고, 처음에 목표한 산업발전을 위한 기자제로 쓰기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동안 이상기후와 농업집단화가 광범위한 기근을 초래하였는데도, 체면을 세우기 위해 중국정부는 곡물 수출을 계속하였다. 이때 기근으로 사망한 이들은 2,000만-3,000만으로 추산된다.
1959년 루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 원수는 개인적 서한을 보내 대약진 운동을 개시한 마오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의 파국은 미숙한 행정도 한몫 했지만, 대약진운동 자체가 "소부르주아 환상주의"라고 규정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에 관해 자신의 과오를 거듭 인정했지만, 대약진운동은 전체로봐서는 70%는 옳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방어하였다.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으로 마오는 국가주석을 사임하였고, 국가 행정은 새 국가주석인 류샤오치, 총리 저우언라이, 그리고 당총서기 덩샤오핑 등이 운영하였다. 마오는 당주석 자리만 유지하고 있었다.
마오는 류샤오치, 덩샤오핑과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일시적인 국가운영권을 내주고 그 반대급부로 펑더화이을 고립시켜 "우익 기회주의자"로 규탄하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펑더화이는 국방부장에서 해임되어 실각하였다.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갈등
류와 덩의 개혁은 집단화 정책에서 부분적인 후퇴였고,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였다. 류는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는 대여가 더 좋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기며 새로운 경제 정책을 실시하려고 했고,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관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정책차이를 둘러싸고,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간에 점점 갈등이 심화되었다. 또한 1959년부터 3년간 자연재해가 극심하여, 식량은 극히 부족했고, 산업생산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자연재해가 극심했던 3년의 끝무렵에 2000만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류샤오치는 마오가 실시했던 여러 "도약" 정책을 종식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인민공사와 같은 집단화를 해체하고, 대약진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러한 류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면서 류는 인민들뿐만 아니라 고급 당원들 사이에서도 신망을 얻게 되었다. 덩샤오핑과 함께 류는 마오를 점진적으로 실권으로부터 은퇴시키고, 자신이 최고실권자로 올라서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1963년 "공산주의 교육 운동"을 개시했다. 공산주의 교육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의 강력한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 운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목표로 한 것이어서 현행 정치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마오는 이 아이들이 자라난 몇 년 후에는 모두 자신의 추종자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실제 이 아이들은 몇 년후 마오의 주된 지지 세력, 즉 홍위병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1963년 마오는 계급투쟁의 이상은 항상 이해되고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1964년까지 공산주의 교육운동은 "사청운동(四淸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서 불순한 것들을 청산해야한다는 것이었고 류샤오치를 직접적으로 겨눈 운동이었다.
직접적인 계기: 해서파관과 조반유리
1959년 말, 역사가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이 역사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해서가 파면되다)을 발표하였다. 이 극은 청백리인 해서가 타락한 황제에게 파면된다는 내용이었다.
마오는 처음에 이 극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1965년 마오의 부인인 장칭과 그녀의 피후견인인 야오원위안(당시 상하이의 신문인 《문휘보(文匯報)》의 편집장이었으며, 그때까지 무명인사였다)은 이 희곡을 비판한 논평을 썼다. 그들은 이 희곡이 독초이며, 마오를 폄하하기 위한 것이고, 황제는 마오, 해서는 펑더화이를 은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평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많은 신문들은 이것이 언론탄압의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여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한편 베이징 시장이었던 펑전은 우한을 지지하여 이 비판이 지나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문화혁명오인소조(文化革命 5人小組)"를 구성하였고, 이 소조는 《현재 학술적 문제에 관한 대강( 關於當前學術討論等彙報提綱)》 또는 《2월대강(二月提綱)》 을 발표하여 "해서파관"에 관한 논란을 정치문제가 아닌 순수한 학술문제로 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칭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면서, 문예계가 "일부 반당, 반공산주의의 불순세력의 음모"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국방부장이었던 린뱌오가 합세하고 세를 불리기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장칭과 야오원위안은 다시 한번 우한과 펑전을 비판하는 논평을 발표하였다. 5월 16일, 마오의 주재 하에서 당 정치국은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 中國共產黨中央委員會通知)》 혹은 《5.16통지(五一六通知)》를 발표하였다. 이 통지에서 펑전은 날카롭게 비판되었고, 5인소조는 해체되었다.
이 통지는 펑전과 5인소조가 "표리부동한 자세로 마오쩌둥 동지의 우한에 관한 교시와 마오 주석이 이룩한 위대한 문화혁명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년 후, 1967년 5월 18일 "인민일보"는 이 고시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하에 작성된 위대한 역사적 문서"라고 칭송하였다.
1966년의 이후 정치국 회의에서 새로운 "문혁소조"(文革小組)가 구성되었다. 5월 18일 린뱌오는 한 연설에서 "마오 주석은 천재이고, 마오 주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마오 주석의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만마디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첫 번째 마오 개인숭배의 시작이었다. 이때 장칭과 린뱌오는 이미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있었다.
5월 25일 베이징 대학의 젊은 철학과 강사인 네위안쯔는 대학 당국과 다른 교수들이 우파, 또는 반당(反黨)분자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며칠 후 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적으로 회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것을 "중국의 첫 번째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라고 불렀다. 5월 29일, 칭화 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첫 번째 홍위병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마오의 적과 지식분자를 응징하고 무력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다.
1966년 6월 1일, 공식적인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자본주의자과 그의 주구, 그리고 자본주의적 지식인들"을 반드시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곧 대학 총장과 다른 저명한 지식인을 겨냥한 대대적인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6년 7월 27일, 홍위병의 대표단이 마오에게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 조반유리(造反有理), 즉,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고 대량숙청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마오는 이에 대해 전적인 지지와 동의를 표했다.
8월 8일 인민일보에 마오의 짧은 논평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 炮打司令部—我的一張大字報)》가 실렸다. 여기에서 마오는 반혁명, 우파(실질적으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에 대한 투쟁을 전인민에게 부르짖었다. 이로서 문화 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진행 과정
1966년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中國共產黨中央委員會關於無產階級文化大革命的決定》, 약칭 《16개 항( 十六條)》 을 발표하였다. 이 문건은 문화 대혁명을 인민들의 혼까지 와닿는 혁명이고,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사에 새로운 장을 연 것이라고 정의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타도되었지만, 이들은 아직도 다른 계급을 착취하던 낡은 이념, 문화, 풍속, 관습을 이용하여 대중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이것의 반대로 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이념면에서 당면의 모든 부르조아 계급의 도전에 응전해야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이념, 문화, 관습, 습관을 이용하여 모든 사회의 정신적 시야를 바꾸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우리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모든 당국자들과 투쟁하여 이들을 분쇄하는 것이고, 반동적인 부르조아 학문의 권위자들과 부르조아 계급이나 다른 모든 착취 계급의 이념을 비판 및 규탄하고, 공산주의적 경제 토대와 맞지 않는 교육, 문학, 예술, 그리고 모든 상부구조를 변환하여 공산주의 체제의 공고와 발달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 결정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학생운동을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들이 집단이 참여하는 전국규모의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렸다. 이들은 "상부구조를 전환시키기" 위해 대자보와 논쟁을 사용했다. 문화 대혁명의 주목표중의 하나는 "4개의 낡은 것( 四舊)"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말한다.
이 결정문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인민에게 최대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이 "표현의 자유"는 마오쩌둥 사상에 의해 범위와 성질이 규정된 것이었다. 또한 언론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15항, 16항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마오의 의중에 따라 진정한 의미가 결정되었다. 제16항이 규정한 자유는 후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대민주(大民主)의 4대자유(四大自由)'로 규정되었다. '자유롭게 말할 권리( 大鸣), 자신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권리 또는 다른 사람과 단결할 수 있는 권리(大放, 또는 大串聯), 대자보를 쓸 수 있는 권리(大字報), 그리고 논쟁을 할 수 있는 권리(大辯論)'였다.
이렇게 규정된 자유들에 의거해 홍위병은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마오쩌둥 주의자가 아닌 모든 사람은 비판을 하였고, 때로는 부패혐의로 고발하여 감옥에 보내거나 실각시켰다. 후에 이 자유들에 쟁의권이 추가되어 다시 보완되었다. 그러나 이 쟁의권은 1967년 2월, 민간 대중 정치에 대한 군대의 개입으로 심하게 약화되었다. 이 권리들은 1978년 서단민주장(西單民主墻) 사건이후, 덩샤오핑 집권시인 1979년 헌법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1966년 8월 16일, 전국으로부터 수백만명의 홍위병이 마오 주석을 회견하기 위해 베이징에 모였다. 마오쩌둥과 린뱌오는 톈안먼 광장의 단상에서 전국에서 상경한 약 1100만의 홍위병들에게 자주 모습을 드러내어, 매번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마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한 최근의 운동(즉 문화 대혁명)에서 보여준 홍위병의 행동을 칭찬했다.
"4구" 파괴 운동에서, 홍위병은 모든 종교활동에 핍박을 가했다. 절, 서원, 교회, 수도원 등은 문을 닫았고, 더 나아가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홍위병은 4구라고 간주된 모든 것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핍박 끝에 심문과 고문도 일어났고, 구타와 폭행을 견디지 못한 많은 이들이 자살을 마지막으로 선택하였다.
8월과 9월에 베이징에서만 홍위병에 의해 1,772명이 살해되었다. 상하이에서는 문화 대혁명에 관련되어 704명이 자살하고 534명이 살해되었다. 우한에서도 62명이 자살하고 32명이 살해당했다. 관계 당국은 이런 홍위병의 폭력을 막는 것을 제지당하거나 방관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 ||
마오는 전혀 이러한 살인행위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며, 도리어 진정한 혁명가의 표시는 살인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히틀러 그사람은 더 잔인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더 많은 사람을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에 가까워진다." | ||
— 마오쩌뚱, |
1968년까지 약 2년 동안(어떤 곳에선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하였다), 홍위병과 같은 학생운동세력은 사회적 발언권과 권한을 늘렸고, 사회의 공산주의적 개편을 위한 자신들의 노력을 가속화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발전과 강화를 위한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전단을 뿌렸고, "반혁명" 혐의자라고 지목된 이들의 명단을 대자보에 공개했다. 그들은 집단을 이뤄 집회를 열고 교훈적인 연극을 상연했다. 또한 그들은 집회에서 자아비판을 행하고 "반혁명" 혐의자 들을 비판했다.
마오를 비롯한 문화 대혁명의 수뇌부들과 "16개 항"은 물리적 수단(武鬪,)보다는 언어적 수단(文鬪)의 투쟁을 권고했으나, 이런 활동은 결국 폭력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그리고 활동가들 사이의 논쟁이 더욱 폭력적이 되어 급기야는 1967년 군부대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문화 대혁명의 수뇌부들은 활동가들의 언어 투쟁이 폭력사태로 비화하는 것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가끔은 "무투"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기고 탈취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러한 대중 운동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한편 류샤오치는 카이펑으로 유배되었다가, 지병이 악화되었지만 의사가 치료를 거부하여 1969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덩샤오핑은 소위 "재교육" 과정을 세번 거쳐 결국 엔진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이후 저우언라이에 의해 구제될 때까지 몇 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혁명분자" 및 "우파"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홍위병의 행동을 칭송하였다. 1966년 8월 22일 마오는 공안이 홍위병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지문을 발표하였다. 홍위병의 행동을 제지하는 공안은 "반혁명세력"의 딱지가 붙어서 자신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1966년 9월 5일, 마오는 모둔 홍위병이 베이징을 순례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숙박비와 교통비는 정부가 부담한다는 것을 곁들였다. 10월 10일, 문혁의 수뇌부중의 한 명인 린뱌오는 류와 덩을 공개적으로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자)로 비난하였다. 또한 펑더화이도 베이징에서 홍위병에 의해 자택에서 끌려나와 조리돌림되었다.
1967년
1967년 1월 3일, 린뱌오와 장칭은 미디어를 동원하여 지방의 문혁지도원들에게 소위 "일월의 폭풍(一月風暴)"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 이 운동에서 상하이의 수많은 고위 행정직들이 심하게 비판받았고 숙청되었다. 이것은 문혁파였던 왕훙원이 지역혁명위원회 지도자로서 상하이의 행정과 시당(市黨)을 장악하는데 길을 열어주었다. 이곳의 지역정부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베이징에서는 류와 덩이 다시한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당의 비판활동에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던 캉셩이나 천보다 등은 이를 기회로 삼아 부총리였던 타오주가 과오를 범했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중앙정부 내부와 지방당의 책임자들 사이에서 문혁을 자신의 반대자나 정적을 "반혁명분자"로 고발하여 실각시키거나 숙청시키는 기회로 삼는 권력투쟁의 시작이었다.
1월 8일, 마오는 "인민일보"를 통한 이러한 활동을 크게 칭찬하였고, 모든 지방 정부 지도자들이 자아비판과 함께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숙청하도록 권장했다. 이것은 지방정부 내에서 숙청에 숙청이 꼬리를 문 대규모의 권력투쟁을 야기하였다. 이것이 심화되자 지방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숙청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혁명활동"(즉 문화 대혁명)에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이것도 꼭 확실한 보장은 아니었다.
2월, 장칭과 린뱌오는 마오의 승인하에서 "계급투쟁"을 군사부문까지 확대했다. 중공정권을 세우는데 일조한 인민해방군의 많은 유력 지휘관들이 "군사부문의 문화 혁명"을 우려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전(前) 외교부장이자 군에서 원수인 천이는 정치국 회의에서 문혁파가 군사부문을 황폐화시키고 다음에는 당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다른 원수였던 네룽전, 쉬샹첸도 이런 운동에 큰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던 문혁파 장춘챠오, 야오원위안의 반격을 받아 차례로 "2월역류"(二月逆流)의 낙인이 찍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결국 홍위병의 비판을 받아 실각하였다.
동시에 많은 홍위병 조직들도 분화하여 자신과 다른 혁명적 메시지를 전하는 다른 조직들을 서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것들은 상황을 악화시켰고, 혼동을 가중시켰다. 이에 대해 장칭은 홍위병 내의 모든 불건전한 활동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6일, 류샤오치는 장칭과 캉셩 일파로부터 공개적이고 광범위하게 비판받았고 여기에 궁극적으로 마오가 가세하여 비판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공개 비판 집회들이 열렸고, 장은 이에 참석하여 모든 "반혁명활동"을 규탄하였다.
장칭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군사부분까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러한 집회중에서 가장 큰 규모가 열렸던 우한으로 달려가서 우한의 방위를 맡고 있던 천자이다오 장군을 비판하였다. 7월 22일에 장칭은 홍위병이 필요하다면 인민해방군을 대체하고 현존하는 군을 무력화하는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장칭의 선동으로 홍위병은 군대에 난입하여 약탈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은 반혁명분자로 몰릴 것을 두려워 한 군의 지휘관들이 통제할 수 없어서 1968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1968년
1968년 봄, 이미 숭배의 대상이 된 마오쩌둥을 신격화시키려는 대규모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마오는 이런 시도를 자신의 "최고지침"으로 지지하였다. 1년 후 홍위병은 완전히 몇 개 파로 분열되었고, 갈등은 더 커졌다.
마오는 홍위병이 야기하고 있는 이러한 혼란이 공산당의 지지기반에 해가 될 것을 우려했다. 마오의 입장에서는 홍위병이라는 존재로써 권력회복이라는 목표를 대체로 달성하였기 때문에 더이상의 혼란은 원치 않았다. 이제 광범위한 파괴와 혼란을 부른 홍위병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7월 27일에는 인민해방군에 대한 홍위병의 우위는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군대가 나서 홍위병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정부는 병력을 파견하여 홍위병의 목표가 될만한 곳들을 경비하였다.
10월 초반, 마오는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고위 공직자를 겨냥한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재교육의 명목으로 농촌으로 보내져서 육체노동을 하게 되었다. 같은달 제8차 중앙위원회의 제12차 전체회의에서는 류샤오치를 당에서 영구제명하기로 결정하였고, 린뱌오가 당의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린을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로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마오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린은 마오에 이어 권력 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
1968년 12월 마오는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다시 배우자"고 주장하면서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개시하였다. 약 10년간 계속된 이 운동에서 도시에 살고 있던 지식 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그곳에서 육체노동을 하도록 명령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최근에 중학교(대한민국 학제로는 고등학교에 해당)를 졸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70년 후반에, 이런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 운동은 홍위병들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보내 사회적 분란을 감소시키려는 의미도 부분적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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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방의 단원. 1966년 9월12일 어린 홍위병이 중국 북쪽 끝에 있는 하얼빈 시장 리판우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리의 목에 걸린 간판이 그를 ‘흑방의 단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흑방은 마오쩌둥이 새로이 선포한 문화대혁명을 방해하려 한다고 고발당한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낡고 봉건적인 모든 요소들을 사회에서 쓸어버리기 위해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모인 10대 소녀들은 홍위병 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고 공격적인 편이었다. 홍위병 경험에 대한 자전적인 회고록에서 류솔라는 열한 살 때 학교에서 홍위병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애걸했는지 회상하고 있다. 엄청나게 지독한 말로 가족을 공개 비난하고, 한때 지주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늙은 넝마주이를 감시하는 일을 도운 뒤에야 가입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그 늙은 여인은 류솔라가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목을 베어 자살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이러한 비극은 비일비재했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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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봉자, 문화대혁명이 심화됨에 따라 홍위병은 ‘반동분자’를 학대하고 자신들의 ‘혁명 경험’을 공유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인민해방군 소속인 이 병사는 혁명에 대한 열정과 활기로 유명해졌다. 1968년 4월16일에 찍은 이 사진에서 그는 마오쩌둥의 어록이 담긴 빨간 소책자를 꼭 쥐고 자신의 혁명적 열의에 감동한 전국의 농민들이 준 마오쩌둥 단추와 배지를 자랑스럽게 가리키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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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숭배, 1966년 8월부터 그 다음 해까지 대규모 홍위병 집회가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열렸고, 마오쩌둥은 자금성 정문 꼭대기에서 그들을 사열했다. 1967년 5월 같은 장소에서 한 홍위병 그룹이 다 함께 마오쩌둥 수첩 첫 장에 있는 그의 사진을 펼쳐 흔들어대고 있다. 한때 홍위병이었던 류솔라의 후일 기록에 따르면 “마오쩌둥 위원장이 천안문에서 손을 흔들자 100만명의 홍위병은 마치 호르몬 반응이라도 보이듯 목놓아 울었다. 훗날 마오쩌둥이 화면에 나타나기만 해도 모두 울음을 터뜨릴 준비가 이때 이미 되어 있었다. 그는 신적인 존재였고 세계혁명의 흐름은 그의 지휘에 따라 흥하거나 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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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간이 모자, 문화대혁명 당시 공인들은 종종 얼간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모욕을 당하면서 거리를 끌려다녔다. 이 같은 광경이 비일비재하자 얼간이 모자는 시선을 끌기 위해 점점 더 커졌다. 1966년 9월에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헤이룽장성 당서기 런중이가 쓴 엄청나게 큰 얼간이 모자가 한 예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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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당시 예술과 마오쩌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전직 여배우였던 부인 장칭은 이 시기에 문화분야를 감독했고, 소수의 이른바 ‘혁명 가극’만이 극작품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작품은 인민해방군의 예술단원들이 공연했는데, 단장이었던 린뱌오는 관료 중 마오쩌둥 부부의 가장 헌신적인 지지자 중 한 명이였다. 1967년 광저우 중앙역에서 군 예술단이 3년 전 린뱌오가 처음으로 편집한 마오쩌둥 어록이 담긴 빨간 소책자를 읽으며 무용을 공연하고 있다. 한때 ‘몽고 바이올린’이라고 불리던 얼후(중국의 근대 현악기)와 작은 피리로 연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전통악기는 혁명 정서를 올바르게 표현할 때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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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노선, 문화대혁명이 쇠퇴하는데도 정치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초점을 바꾸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1974년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 안 모습으로, 승객들이 모여 객차에 걸린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며 끝까지 투쟁하자”고 촉구하는 현수막 아래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린뱌오는 1971년 비밀리에 숙청당했지만 그의 죽음(소련으로 도망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전해진다)은 1972년에야 발표되었다. 정부는 실각한 장군과 공자를 연계해 린뱌오의 반동 기질과 계급투쟁 반대를 강조하려 했다. 북폴리오 제공 -----------------------------------------------------------------------------------------------------------------
이처럼 한 인간의 잘못된 권력욕과 선동적인 사상에 의해 중국 인민은 서로 죽고 죽이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 실패 후 권력에서 잠시 물러나 있으면서 교육에 힘을 쏟았는데, 바로 미래의 홍위병이 될 어린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우상화에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육에 힘쓰는 모택동에 대하여 당 권력 상층부는 전혀 문제세 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이처럼 모택동은 자신의 실수와 인민에 끼친 엄청난 잘못을 만회하고 권력을 다시 찿기 위해 교묘한 방법으로 홍위병을 선동하여 전국적으로 반대파를 무지비하게 숙청하였다. '10년동란' 동안 중국 사회는 엄청난 재난을 겪게 되었고 문화재,사찰 등이 수없이 파괴되었고 지식인,군인,당 간부 할 것없이 모택동에 반대한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던 사람들은 홍위병에 의해 조리돌림, 인민재판, 자아비판이라는 방식으로 홍위병들에 의해 처단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모택동은 군대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무력으로 쿠테타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단지 어린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선동하고 자신의 의도한 대로 반대파를 처단하도록 유조하였을 뿐이다. 100만 명의 홍위병들이 찬안문 광장에 나타난 모택동을 보고 울부짓으며 눈물을 흘리고 광신적인 집단이 되엇던 것이다. 모택동 사상은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나 의화단 사건, 백련교도의 난에서와 같이 사이비 종교 집단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는 영원히 중국인의 우상이 되고 싶어했고 자신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자신 스스로 신이 되기를 희망하였던 모택동은 중국 인민들을 의식없는 동물로 만든 다음에 대약진 운동, 반우파 투쟁, 문화 대혁명을 통해 중국 사회를 피바다로 만들고 수천만 인민을 기아와 숙청으로 죽게 만든 다음에 천수를 누리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공과를 지금 당장 평가하기에는 무리이나 중국 내에서도 모택동에 대한 사후 평가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 전쟁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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