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파투쟁의 국내, 국제적 배경
1956-1957년 사이에 중국에서 “반우파투쟁”을 말하자면 반드시 그 전해에 있었던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표 대회와 중공 8차 대회를
거론해야만 한다.
1956년 2월 14일, 소련 공산당 20차대회가 열렸고 흐르시초프는 『개인숭배 및 그 성과에 관하여』라는 비밀보고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 개인독재로 인한 많은 오류과 죄악을 폭로하고, “평화적공존” ․ “평화적경쟁” ․ “평화적이행”이라는 삼화(三和) 노선을
내놓아 세상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도 하나의 커다란 충격파가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런 국제적 배경 하에서 1956년 9월 15일부터 29일까지 중공 8차대회가 북경에서 열렸다. 8차대회에서는 매우 정확한
당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교훈에 비추어 중공 8차대회에서는 중국에서의 계급투쟁은 기본적으로 끝나고 국내의 주요한 모순은 더는 계급
모순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중공 8차대회에서는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모순은 날로 늘어나는 인민들의 물질, 정신적
수요와 낙후한 생산력간의 모순이므로 중공의 사업 중심을 사회주의 건설에로 옮길 것을 확정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국제 정세는 “폴란드사건”(1956년 6월)과 “항가리아사건”(1956년 10월 말)이 터졌다. 이 두 사건은 중국
공산당 중앙의 정책 결정자들, 특히 모택동의 원래의 생각을 바꾸어놓는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중국공산당은
그래도 비교적 냉철하게 대응하였으며 모택동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사고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의 이러한 심리적 고민은
바로 모택동의 『10대 관계를 론함』,『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등에서 보여진다.
“반우파운동”이 일어나기 전야인 1957년 3월에 초에까지도 중공의 중요한 정책 결정자인 모택동은『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에서 착취계급이 계급으로서 소멸된 이후 인민 내부의 모순은 이미 국가 정치의 주제(主題)로 되였다고
인정하면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함에 있어서 잔혹한 투쟁이 아닌 “단결-비평-단결”의 방침을 운용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비당인사나 민주당파들과도 “간담상조(肝膽相照), 장기공존(長期共存), 호상감독(互相監督)”하고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방침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중공공산당이 시종일관하게 8차당대회의 정확한 노선을 견지하였다면, 만약 중국 공산당 중앙의 가장 주요한 정책 결정자인
모택동의 이런 초심(初心)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문화대혁명이라는 중국 역사의 최대 비극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6,70년대에
이미 세계강대국으로 탈바꿈했을 것이다.
“정풍운동”으로부터 “반우파운동”으로 돌변
“정풍운동”은 중국 공산당이 연안시기에 창조한 당의 건설을 강화하는 하나의 방법이였다. 한마디로 당내 반대파나 불평분자를
찿아내 숙청하는 방법이 정풍운동이었다.
1956년 9월 15일, 모택동은 8차대회 개막식에서 “사상상의 주관주의, 사업상의 관료주의, 조직상의 종파주의”가 존재하면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인정하면서 이 삼풍을 정돈하는 '정풍운동'을 할 것임을 암시하였다. 이처럼 모택동은 언어의 마술사이면서
설득의 귀재이며 권모술수의 대가였다.
1957년 4월 30일, 모택동은 천안문 성루에서 민주당파와 무당파 민주인사들과 담화를 나누면서 당외 인사들이 중국 공산당의
정풍에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중국 공산당에 대해 비평을 하고 의견을 제기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표했다.
그리하여 북경 같은 곳에서는 1956년 5월초부터 전후로 13차의 좌담회가 열려 각 민주당파와 무당파 인사들을 초청하여 중국
공산당의 정풍을 돕게 되었다.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의 이런 가식적이었으나 성실한 태도에 힘을 입어 중국의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은 무서운 함정인지도 모르고 대담하게 중국 공산당을 비평하고 의견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1957년 5월 중순까지 정풍운동은 아주 순조로웠고 모택동도 “당외 인사들의 우리들에 대한 비평이 아주 날카롭기는 하나 기본적
으로 성실하고 정확한 것이다. 이런 비평의 90% 이상이 우리당의 정풍에 유익하고 우리들이 결함을 시정하는데 필요하다”고 인정
했다.
그러나 당외 인사들의 입에서는 점차 일부 첨예하다 못해 창궐한 발언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당시 중국민주동맹중앙
부주석이였고 삼림공업부 부장인 라륭기는 심지어 “맑스주의 소지식인들이 소자산계급의 대지식인들을 영도하고 문외한이
전문가들을 영도한다”고 하면서 모택동 같은 중국공산당의 영수 인물들을 빗대고 공격했다. 이에 대한 내용을 들은 모택동은 극히
분개하여 5월 15일에 『사정은 바야흐로 변화하고 있다』는 글을 써서 중공당내의 고급간부들에게 배포했다. 이 글에서 모택동은
이미 정풍보다는 우파들의 공격에 대해 단호하게 반격할 것을 강조하였다.
1957년 5월 16일 모택동은 『당전 당외 인사들의 비평을 대처하는 데 대한 중공 중앙의 지시』라는 문건을 친히 작성하여 당외
인사들이 “마음대로 말을 하게 내버려두고 잠시 반박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익분자들이 저들의 반동의 몰골을 드러내게 한다”고
지시했다. 1957년 5월 중순에 모택동은 상해에서 중공 당내의 고급 간부들을 보고 “잡귀신들을 굴속에서 나와서 떠들어대게 해야
한다”, “이는 적을 깊숙하게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물에 걸리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이것을 이른바 “뱀을
굴 밖으로 유인해 내는 전술(引蛇出洞)”이라고 한다. 후에 이 “뱀을 굴 밖으로 유인해 내는 전술(引蛇出洞)”에 대해 모택동은
『문회보의 자산계급방향에 대해서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한바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음모(陰謀)라고 하는데, 우리는 양모(陽謀)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전에 적들에게 잡귀신들을 굴속
에서 유인해내야만 박멸할 수 있고, 독초는 땅 위에 돋아나게 해야만 뽑아버릴 수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이런 전술을 구사한다는 것을 알 리 없는 당외의 인사들은 비교적 날카로운 비평을 자유자재로 펴냈다. 이를테면 1957년
6월 1일 93학사의 저안평 (당시는『광명일보』주필이였음)같은 사람은 6월 1일 중앙통전부에서의 『모주석과 주총리에게 의견을
제기한다』는 발언에서 당천하(黨天下), 즉 공산당의 인사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기했다.
“지금 종파주의가 불거지고 있고 당과 대중의 관계가 나쁘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공산당은 고도의 조직, 규율성을
갖고 있는 당으로서 이러한 전국적인 결함이 당중앙의 영도와 관계가 없단 말인가? 최근에 사람들은 작은 중들에게는 적잖게
의견을 제기했지만 늙은 중들에게는 의견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오늘 한 가지 사례를 들어서 모주석과 주총리한테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해방 전에 우리들은 모주석께서 당외 인사들과 함께 연합정부를 조직할 것을 제창한다고 들어왔다.
1949년 개국 후, 그때 중앙 인민정부의 6명의 부주석 중에서 3명은 당외 인사였고, 4명의 부총리 중에서 2명은 당외인사였다.
이렇게 되니 연합정부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후에 정부는 개조를 거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 자리에는 당외
인사의 자리는 하나밖에 남지않았고, 원래 중앙인민정부의 몇몇 비당 부주석들은 걸상을 모두 인대상무위원회로 옮겨갔다.
이런 말은 그만두고라도 지금 국무원의 부총리들이 열둘이나 되지만 그중에는 단 한명의 비당인사도 없다. 비당인사들 중
에서 이 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지? 혹은 이러한 직무를 감당할 사람을 배양할만 사람이 없어서인지? 당외 인사
들을 단결하고 전당을 단결하는 염원으로부터 출발하고, 국내.국제상의 눈길과 생각을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인사 배치에 대해
좀 연구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안평(儲安平)의 상술한 발언은 전 중국의 이른바 “우파언론” 중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것이였다. 감히 발설은 못했지만 중국
민주동맹중앙의 부주석 장백균이나 라륭기 같은 민주당파의 수령들도 저안평(儲安平)의 이런 생각에 동조했다.
그러나 장백균 같은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떠들어대도 되는지 은근히 근심이 되여 1957년 6월 초에 주총리에게 계속 이렇게
명방(鳴放)을 해도 되는가고 물었으나 주총리는 명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1957년 6월 8일, 모택동은『역량을 조직하여 우파분자들의 창궐한 진공에 반격을 가할 준비를 하자』라는 중공 중앙의 지시
문건을 작성하였으며 동시에 『인민일보』에서는 “이는 무엇 때문인가?” 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마땅히
인민 내부의 모순으로 처리해야 했을 정풍운동은 폭풍우 같이 “반우파투쟁”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반우파투쟁”의 확대
1957년 6월 8일부터 모택동의 지시에 좇아 중국 공산당은 “우파분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에 나섰다. 이리하여 전국적인
폭풍우식의 대중적인 “반우파투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반우파투쟁의 확대화는 우선 그 투쟁의 규모와 형식에서 나타났다.
“반우파투쟁”에서는 대명, 대방, 대자보, 대변론의 방법이 동원되였으며, 전장(戰場)은 당외로부터 당내에까지 확대되였다.
그 해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모택동은 강력하게 “반우파투쟁”을 지도하고 그 전과(戰果)를 확대하여 나갔다.
모택동의 인식상의 편차로 인하여 “반우파투쟁”은 점차 확대되어 대규모의 대중적인 계급투쟁으로 변모하였다.
1957년 7월 1일, 모택동은 『인민일보』에 “문회보의 자산계급 방향을 마땅히 비판해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여 민주동맹과
공농민주당을 “반당반사회주의”라고 했고 공개적으로 “장나동맹(章羅同盟)”(이 동맹은 실제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지명하여 비판했으며 “자산계급 우파는 바로 반공반사회주의의 자산계급 반동파”라고 낙인지었다.
“반우파투쟁”초기에 모택동과 중공 중앙에서는 그렇게 많은 우파를 잡아 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규모의 대중적인
정치운동이 일어나자 운동의 진전을 컨트롤 할 수 없게 되었다.
반우파투쟁은 1년 동안 지속되였는데, 11차 3중 전회 이후의 조사를 거쳐 전국적으로 55만 2877명의 “우파”를 잡아냈다.
1980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무죄로 복권된 우파는 54여만 명으로서 원래의 결론을 고치지 않았거나 더 조사를 해야 한다고
인정한 “우파”는 5000명밖에 안 되었다.
1957년 반우파투쟁의 확대는 사회주의사회에 들어선 후 모택동과 당중앙이 사회주의건설을 지도하는 과정 중에서
범한 첫 번째의 중대한 착오이다. 그 착오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면을 포괄하고 있다.
첫째, 적아간의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이라는 두 가지 모순을 혼동했다.
둘째, 너무 많은 사람들은 억울하게 우파로 잡아냈다. 55만명 남짓한 우파들 중에는 99%이상이 우파로 잘못 색출한 것이다.
셋째, 너무 오래 동안 시정을 해주지 않아 55만명의 우파 본인들과 그 가족 친척들이 억울하게 20년 동안이나 연루당하였다.
넷째, 억울하게 우파로 된 사람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으며 당내처분, 행정처분을 받았고 중하면
감옥살이로 강제 수용소에 갇혀 혹사당하였다. 빈대 한두 마리를 잡기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운 우둔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반우파투쟁”이 중국사회에 초래한 결과
“반우파투쟁”은 중국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첫째, 그 가장 직접적인 후과는 많은 지식인, 혁명간부와 민주인사들이 “우파”로 잡혀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억울하게 피해를
받음으로써 그들 개인과 가정에 정신, 육체적인 손실과 불행을 안겨주었으며 나아가서는 나라와 민족의 원기를 크게 상하게 했다.
둘째, “반우파투쟁”으로 인하여 중국 공산당은 8차 대회에서 제정했던 올바른 노선을 이탈하게 되었다. 1957년 9,10월 사이에
소집되였던 8차 3중전회에서 모택동은 1년 전인 8차 1중 전회에서 채택했던 중국사회의 주요 모순에 관한 판단을 뒤엎고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모순, 사회주의 도로와 자본주의 길 간의 모순은 의심할 바 없이 당면한 우리나라 사회의 주요한 모순”
이라고 인정했다. 모택동의 견해 변화는 “8차대회”노선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당의 사업 중심이 전이를 중단시켰고 당과
국가로 하여금 장기적으로 계급투쟁 확대화의 미로에 빠져들게 하였다.
셋째, 정치상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침을 위반하고 중국의 당 생활과 사회생활에서의 민주주의적 질서를
깨뜨려버렸으며 활발한 정치 국면의 형성을 방해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개인독단과 그에 편승한 아첨과 굴종만이 무성해
지게 했다.
넷째, 조직상에서 “반우파투쟁”에서 자행되였던 광란은 정치적 문제로 끌어올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잔혹하게 피해를 주는
사악한 기풍이 점차 중국사회에 만연되게 하였으며 그 후의 문화대혁명에 이런 사악한 사회적 기풍이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우파투쟁”은 “문화대혁명”의 전주곡이였다.
다섯째, “반우파투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계층은 지식인들이였다. 이로 하여 지식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부인하게 되였
으며 중국의 지식인들을 자산계급과 같은 착취계급의 부류에 포함시켜 공평하지 못한 대접이 시작되었다.
전체적으로 “반우파투쟁”은 이른바 “계급투쟁을 기본 고리로 하는 과도시기의 이론”의 실천적 기초를 닦아놓았으며 중국 인민
들로 하여금 오래 동안 인위적이고 무위한 계급투쟁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시달리게 하는 단초를 열어놓았다.
또 “반우파투쟁”은 수많은 지식들에게 있어서는 악몽이였고, 중국인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스스로 만들어낸 자작(自作)
비극이였다.
“반우파투쟁”에서 확대가 발생하게 된 원인
“반우파투쟁” 당시에 중공 중앙 통전부부장으로 있었던 이유한(李維漢)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는 사회주의사회의 각종 모순의 발전에 대해 충분한 사상 준비와 과학적 연구가 없는데 그 원인이 있다. 그리하여 인민
내부의 각종 비평과 의견들을 모두 싸잡아서 투쟁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일정한 범위내에 존재하는 계급투쟁을
확대화하고 절대화했던 것이다.
둘째는 계급투쟁의 형세에 대해 너무 엄중하게 예견하고 판단한데 있다.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 이래 후르스초프의 반스탈린린
주의, 제국주의자들의 반사회주의의 물결에 호응하여 국내의 일부 당외 인사들 속에는 반당반사회주의 사조가 일정하게 존재
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판단하고 과잉대응을 했던 것이다.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휘둘러댄 격이고,
모기 몇 마리가 날아다니는데 고사포를 쏘아댄 격이다.
셋째, 모택동은 거시적 승리 앞에서 점차 교만해지면서 주관주의와 개인독단의 작풍을 발전시켰다. 이리하여 당의 집단지도
와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위반하게 되었으며 당내 민주와 국가의 정치생활이 이로 인하여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밖에도 일부 학자들은 “반우파투쟁”의 착오는 건전한 법제가 없는 데 원인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55만 이상의 사람들을
“반동파”, “계급의 적”이라고 딱지를 붙여 놓고 노동개조를 시키고 강직(降職), 강급(降級), 강신(降薪) 등 처분을 주고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연루를 시키면서도 모두 확실한 법률적 의거가 없었으며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았다. 전적으로
“반우파투쟁”은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할 모택동의 권력 유지를 위한 간교한 정치운동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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