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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3 : 마오쩌둥 시대 2 (중소 갈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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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3 : 마오쩌둥 시대 2 (중소 갈등)

두바퀴인생 2010. 6. 27. 08:07

 

 

 

중국의 역사 133 : 마오쩌둥 시대 2 (중소 갈등)

 

마오쩌둥 시대(1949년~1978년)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1930년대부터 중화민국 난징 국민당 정부국공 내전을 펼쳐 온 중국공산당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시 시작된 내전에서 연달아 국민당 정부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1949년 4월에는 공산당군이 난징 국민 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난징 국민 정부는 붕괴 상태에 빠져, 주요 요인들이 국민당과 내분이 일어나 공산당과 행동을 같이 하거나 국외로 피난하는 국민당 정부 관계자가 다수 나왔다. 그 때문에 공산당은 난징 국민 정부가 붕괴·소멸했다고 판단해 같은 해 10월에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붕괴 상태에 빠진 난징 국민당 정부는 장제스의 지도하에 대만으로 철수하여(대만 국민당 정부), 현재까지 중화민국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냉전을 거치면서 현재 중화민국을 국가로 승인하고 있는 나라는 30개국 미만이지만, 두 ‘중국’ 정부가 병립하는 사태는 대만 문제로서 동아시아의 국제적 정치 문제가 되고 있다.

건국 당시 정치를 담당한 것은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였다. 이 단계에서는 공산당 독재체제는 확립되지 않았고, ‘신민주주의론’의 아래 공산당, 중국민주동맹, 중국농공민주당,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등의 여러 세력이 이 회의의 중심이 되었다. 1950년 토지개혁법이 공표되어 전국에서 토지 재분배를 시행했다. 법 내용 자체는 온건한 것이었지만, 다년간의 지주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빈농 등의 세력에 의해서 운동은 급진화되었고, 단기간에 토지 개혁은 완료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발족 직후는 구국민당, 부유층 등에 의한 반공·반정부 운동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반혁명 활동 진압에 관한 지시’가 나오고 대중을 주도하도록 한 형태로 반정부 세력의 섬멸을 도모했다. 1953년까지 71만 명을 처형, 129만 명을 체포, 123만 명을 구속하고, 240만 명의 무장세력을 소탕한 것이 중국 해방군 출판사에서 출판된 국정수책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반낭비, 반관료주를 내건 ‘삼반운동’이 전개되어 관료의 부패를 타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패의 원인이 자본가에게로 전가되어 ‘오반운동’으로 자본가 계급을 탄압하였다.(삼반 오반 운동)

 

중.소 갈등(이념 분쟁, 국경 충돌) 

1969년 중소 국경분쟁은 단순히 영토를 들러싼 양국의 대립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소련의 수정주의 노선에 대한 중국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공산진영의 패권을 두고 중국과 소련이 대립한 결과이다. 1950년에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을 맺어, 한국전쟁으로 곤란에 빠진 북한을 지원해 참전하는 등,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결속도 등한시 하지 않았다. 또한 1954년네루-저우언라이 회담에서 평화 5원칙을 천명하고,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반둥 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항상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일변도가 아니라, 제3세력으로서의 외교도 수행하였다.

 

중소 갈등은 1950년부터 시작된 중소간의 관계가 조금씩 분열되고 이념분쟁에 시작되면서 미리 예견된 사태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제일의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과 세계를 양분하고 냉전 시대로 접으들면서 미국은 아시아 지역 미군 주둔 지역의 확장, 대중 군사적인 봉쇄 정책, 다자간 지역 집단 안보체제를 통해 자본주의 진영의 세계방위체제를 구축했다.

 

한편, 1950년 중국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미국과 무승부의 휴전회담을 이룬 이후 동북아 정세에 중국의 주도권이 부각하였는바, 이는 패권국 미국과의 전쟁에서 미국에 대항 할 수 있는 능력을 성공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은 국공내전 이후 넘쳐나는 홍군을 정리해야 할 중차대한 상황이었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나 중국의 안보에 포기할수 없는 지역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은 동북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화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미국.소련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초래하게 됨으로써 세계는 양극체제에서 새로운 다극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북아 정치 질서 변화에서 중국.소련과의 관계 변화는 동북아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 질서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관계 변화는 1950년대 중반부터 틈을 보이면서 양국간의 이해관계와 이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 양국의 역사.민족적 배경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였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소련의 힘이 일정선 이상 넘을 수 없도록 중국과 소련의 갈등관계를 조장하였고 중국이 그러한 역활을 하도록 기대하였다는 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념분쟁의 원인은 1950년 2월 14일 모택동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중소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협력을 공식화하였다. 당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성심성의껏 모택동을 맞이했다. 毛 일행의 모스크바 방문을 축하하기 위하여 메트로포르 호텔에 열린 만찬에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들이 총출동하였다. 겉으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 보였다. 그러나 만찬석에 앉은 스탈린과 모택동은 통역을 통해 두어마디 교환하고는, 서로간에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주변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도와주려 했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양국은 수뇌는 성향상 물과 기름처럼 화학적으로 섞일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계속된 며칠간의 회담에서도 스탈린과 모택동간의 냉랭한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졌다.

1950년 2월 14일 30년간의 우호조약이 조인되어 양국은 형식상 동맹 관계를 맺었다. 물론 이 조약은 유효기간이 지나기도 전에 휴지통에 쳐박히고 말았다.

 

1954년 10월 12일 소련의 후르시초프가 북경을 방문하여 상호 우호관계를 확인하였고 1956년 20차 공산당 대회에서 후르시초프는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자 모택동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소련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또 후르시초프가 한 ‘스탈린 비판’에 대해서, 중국공산당은 다른 견해(공적 7할, 잘못 3할)를 표명했다. 모택동이 소련에 본격적으로 화가난 것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 독재, 기타 폭압적인 행위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나서 부터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택동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자신도 스탈린 못지않은 개인숭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해 9월에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제8차 전인대에서는 등소평의 제안으로 모택동과 관련된 당 규약의 일부를 개정하였다. '모택동 사상을 당의 최고 방침으로 한다.'와 '모택동 사상을 학습하는 것은 당원의 의무다.'라는 두 조항의 삭제였다. 이러한 내용은 스탈린 신격화에 버금가는 독재자라는 오명을 쓰기에 비난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삭제한 것이다.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이끄는 소련공산당의 입장변화는 바로 중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조치가 모택동을 당장 실각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최고권력자 입장에서는 내심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모택동이라 할지라도 국제 공산주의의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스탈린이 죽고 한참이 지난 1957년 11월, 모택동은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두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국제 공산당 대회에서 모택동은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내키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서 소련의 사회주의 영도자를 인정하였다. 소련의 수정주의와 미국과의 화해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은 대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毛를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국무장관 덜레스는 "미국의 안전을 확보하고 대만과 기타 섬들에 대한 장개석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대통령은 시의적절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굳게 결심하고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모택동이 대만을 위협할 경우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毛는 소련이 자신의 편을 들어 미국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기를 바라며 아래와 같은 제의를 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전쟁을 도발할지 모른다. 중국은 이같은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며, 현재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이 핵무기로 중국을 공격하면 우리 군은 국경지대로부터 나라안 깊숙히 퇴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을 내부 깊히 끌어들여 중국 안에서 협공해야만한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은 초기단계에서 미국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해서는 안된다. 당신들은 적들이 우리 영토 안에 깊숙히 침투하도록 해야한다. 미군이 국토의 중앙부에 다다랐을때 당신들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들을 덮쳐야한다.

어쨌든 소련인들은 이런 미치광이같은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번에 걸친 회의에서 모택동은 스탈린 격하운동의 부당함과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이 시기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주장하였으나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중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모택동은 소련의 지원 없이 독자적인 산업화를 시도하기로 결심하였다.

 

毛의 결심은 1958년부터 66년까지 계속된 대약진 운동으로 현실화되나,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수천만 명이 아사하고 농촌은 황페화하였으며 집단농장은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생산량은 조금씩은 상향되었으나  생산품은 조잡하였고 실적도 부풀리기 일쑤였다.
모택동은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무언가 새로운 빌미를 만들어 난국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이 책임지기에는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였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의 머리속에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무궁하게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주덕과 함께 소련 공산당 대회를 다녀온 등소평은 폴란그와 헝가리 시태를 거울삼아 혁명을 지속하려면 지식인들을 많이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고했다. 모택동은 그 제안을 수락하며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일어난 폭동은 지식인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마음껏 떠들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택동이 구상하고 있는 엄청난 함정이 있었다.

이것이 소위 '백화제방(百花齊放)과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구호였다. 온갖 의견과 견해를 자유롭게 발표하라는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백 가지의 꽃들을 피게 해서 백 가지의 사상과 학파들이 서로 겨루게 하라! 인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할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말하라. 남김없이 다 말하라. 말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듣는 사람에게 교훈을 줄 수 있으니까.
- 모택동 -

그러나 이것은 노련한 모택동이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치밀한 음모였다.

백가쟁명이 진행되면서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발언이 이어졌고, 결국에는 공산당과 공산주의 자체를 비방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사태가 진전되자 모택동이 칼을 뽑아들였다.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독초(毒草)와 독사(毒蛇)로 지목되어 숙청당했다. 우경(右傾)이나 반소(反蘇)혐의로 숙청당한 당사자와 가족들의 숫자는 수백만명에 이르렀다.

 

1959년 소련공산당 21차 대회에서 후르시초프는 평화공존과 미국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추구하기로 천명하고 그 후 미국을 방문하여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소 정상회담을 열어 협력을 다짐했다. 귀국길에 후르시초프는 북경을 방문하여 모택동을 만나 미국과 경쟁을 중지하고 대만 문제를 더 이상 일으키지 말도록 설득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중국에 핵기술 제공을 거절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미국과 협력이냐 아니면 소련과 결별이냐를 놓고 양자택일을 고심하였다. 결국 소련과 더 이상의 공존은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1960년부터 본격적인 사회주의 이론의 이데올로기 이념논쟁이 시작되었다.

   
1960년 6월 세계 공산당 회의가 열린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흐르시초프는 다른 국가의 대표단과 함께 중국 공산당을 맹공격했다. 중국 또한 알바니아 공산당과 함께 격렬하게 반격했다. 같은해 7월 16일에 소련은 중국내에 파견된 모든 전문가들을 철수시킨다고 결정했고, 상호간에 체결된 수백건의 협정과 계약이 파기되기에 이르렀다.

 

1960년 12월 후르시초프는 공산당 선언에서 핵시대의 전쟁은 상호 파멸을 초래한다고 역설하였으며 1961년 10월 22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소련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였고 알바니아 공산당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쏟아냈는데 이는 중국에 대한 비판이었다.

 

1962년 중국.인도 국경 문제로 충돌이 야기 되었을 때 소련은 인도에 미그기를 지원하는 등 중국을 분노케 하였고, 양국 국경 문제 가 이후 긴장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65년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양국의 입장차가 증폭되었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소련이 비난하면서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양국의 관계는 최고조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소련이 국경에 병력을 증강하자 중국도 병력을 국경선에 증강하였다. 결국 고조되던 긴장관계로 양국은 1969년 3월 우수리강 '진보도'에서 양국이 충돌하게 된다.

 

1963년 중국은 인민일보 논설을 통해 후르시초프를 공격하였으며 주소 중국대사를 통해 25개항의 질의서를 소련에 보내면서 공격이 본격화되었다.

 

1964년 7월 14일 중국은 후루시초프를 사이비 공산주의자.수정주의자라 비판하면서 소련은 중국을 부르주아 사회주의 한 형태라고 비판하였다. 중국은 1964년 10월 원자탄, 67년 수소폭탄 시험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미국과 소련에 대해서 강경방침으로 선회하게 된다.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은 신문 지면을 통해 상대방을 맹렬하게 공격하였으며, 이 논쟁은 1964년 10월 흐르시초프가 실각할 때까지 이어졌다. 논쟁의 주된 내용은 '전쟁에 대한 시각,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에 대한 문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법론, 스탈린 비판' 등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흐루시초프의 철학을 수정주의(修正主義)라고 공격하였으며, 흐르시초프는 모택동의 철학을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로 몰아붙였다.

양국 공산당 지도부간의 불화는 국가 차원의 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념 투쟁으로 시작된 분쟁이 결국 국경선 문제를 놓고 다투는 현실적 문제로까지 확장되어간 것이다.

1964년 후르시초프가 실각하고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 시절에도 두 공산국가간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국경 지대에서는 몇백만의 병력이 서로 대치하였으며, 중앙아시아 등 7400킬로미터의 국경선 일대에서 수시로 소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1969년 3월 우수리강 유역 진보도에서 두 차례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쌍방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2일 새벽 4시 300여 명의 중국 국경수비대가 진보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소련 순찰대를 공격하여 31명 전사, 14명 중경상을 입히는 충돌이 일어났으며 서로 먼저 공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과거 1924년 소련과 중국의 군벌 사이에 쌍방 국경에 대해 재확정을 약속하였으나 중국 내부 혼란으로 지연되었으며 한국 전쟁을 통해서 양국은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경 문제를 확정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서로간의 분쟁은 완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놓고 다시 양국간의 대립에 불이 붙었다. 소련은 베트남을 지지하였고, 중국은 베트남을 비난했으며 결국 중월전쟁을 일으켜 실력행사를 하기도 했다. 소련은 중국의 침략을 비난하고 베트남에 의용군을 파견하겠다고 위협했다.

197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입하자 중국은 이를 격렬히 비난했다. 양국의 불화는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고르바초프가 취임하고나서야 서서히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1969년 3월 2일 - 중·소 우수리강 전바오섬에서 충돌

 

 

1969년 3월 2일 새벽 4시, 소련과 중국의 국경인 우수리강 유역의 전바오(珍寶, 소련측 명칭은 다민스키) 섬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날 충돌은 섬을 순찰하던 소련 국경수비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 300여 명이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써 촉발되었다. 날이 밝자 소련은 자국 순찰대가 얼어붙은 강위를 지날 때 중국 측이 선제공격을 가해 31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를 당했다고 밝힌다. 중국은 장갑차까지 동원한 소련 측이 먼저 발포를 했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역시 세계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충돌은 그 뿌리가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860년 제정 러시아는 베이징조약을 맺어 쇠락한 청나라로부터 헤이룽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을 빼앗았다. 당시 러시아가 빼앗은 지역은 조선영토였던 연해주를 포함해 한반도의 5배 가까운 엄청난 넓이였다. 중국으로선 억울한 일이었지만 빼앗긴 땅을 되찾을만한 힘이 없었다. 한편, 혁명을 성공시킨 소비에트 정부는 1919년 카라한 선언을 통해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얻은 이권과 불평등 조약의 전면적인 폐기를 선언한다. 1924년 5월에는 소비에트 정부와 중국 ‘헤이룽장’(黑龍江)省 군벌 정부 사이에 쌍방의 합의에 따라 국경선을 재조정하기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중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구체적인 협상은 진행되지 못했다.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뒤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했지만, 1950년 2월 ‘중소 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으로 양국 간의 밀월관계가 시작되면서 중·소 국경문제는 논의가 유보 되었다. 한국전에서 함께 북한을 지원하면서 공고해져가는 듯 했던 양국의 밀월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념문제였다. 1956년 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있었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발언은 마오쩌뚱 1인 지도 체제를 구축해가던 중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교조적 입장을 견지하던 중국에 대해 소련은 1959년 6월, ‘국방 신기술에 대한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중국의 국방 현대화를 지원하고 있던 자국의 기술자들을 철수시키게 된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집회 광경. 마오쩌뚱 주석의 어록을 든 손을 올리고 있습니다.

 

1962년 중국·인도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소련이 인도에 미그기를 비롯한 무기를 공급해 중국을 격분시켰다. 이런 갈등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차로 더욱 증폭되었고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소련의 맹렬한 비난에, 중국은 ‘소련의 지도부는 사이비 수정주의 공산주의자’라는 말로 맞받았다. 갈등은 양국이 상대방의 외교관들을 추방시키는 사태로까지 비화되고 국경지대에는 긴장이 흐르게 된다. 동부국경 4280km와 서부국경 2978km를 맞대고 있던 양국 군대 간에 소규모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소련은 그 때까지 강으로 나뉜 국경선의 경우 중국 쪽 강안(江岸)을 경계로 삼아 강 복판에 있는 1845개의 섬들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은 국제법대로 국경선을 강 중앙으로 설정, 총면적 787km²에 이르는 890여개의 섬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전바오’섬 무력충돌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양국 국경수비대 간의 몸싸움은 결국 무력충돌을 불러왔습니다.

 

3월 15일, 양측 군대 간에 2차 교전이 벌어졌다. 중국군은 2천 여 명의 병력과 야포를 동원했고, 소련군은 전차와 장갑차 등 현대식 무기를 총동원해 ‘전바오’ 섬뿐만 아니라 국경 일대의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여 이충돌에서 중국군은 8백 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고 소련군은 60여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중국에서는 2억5천 만 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소련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고, 세계는 사회주의 ‘형제 국가’간의 3차 대전을 걱정하게 된다. 다행히 같은 해 9월 북베트남의 '호치민' 주석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귀국길에 오른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가 북경을 방문함으로써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양국간의 긴장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전바오’섬 충돌 이후 중국은 주된 적을 미국이 아닌 소련으로 상정하였고, 중국의 외교정책은 미국과 일본과의 협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죠. 이에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중국과 미국은 화해의 시대를 열었다. 2005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양국가간에 모든 국경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오늘날 중·소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견제하고 있으니,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