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131 : 마오쩌둥(모택동) 사상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중국의 역사 131 : 마오쩌둥(모택동) 사상

두바퀴인생 2010. 6. 24. 10:25

 

중국의 역사 131 : 마오쩌둥(모택동) 사상

 

 

 

마오쩌둥(모택동) 사상 변천 과정

 

 

맑스-레닌사상에서 중국식 농촌 혁명전략

 

모택동 사상은 맑스-레닌주의 사상을 중국의 세대적 변화 요구에 부응하여 전통적인 가치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정신적인 사상 개조와 변화를 주장한 변형된 사상이다. 그는 대단한 사상가이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주변의 변화되는 환경에 신속하게 적응하여 그에 걸맞는 새로운 이론을 구체화시키는 뛰어난 식견과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많은 왕조가 부침하였는데, 대부분이 제후국의 군사적 반란이었으나 권력이 다양화된 당시의 중국 현실에서 동원 가능한 세력은 농민이었으며 문제는 농민 세력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끌여들여 농민 반란을 성공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바로 '농촌혁명전략'이었다.

 

 

농촌혁명전략

1927년의 호남폭동에서 실패한 후 정강산으로 퇴각하여 이른바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면서 모택동의 농촌혁명전략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하였는데 즉,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홍군을 조직하고 `혁명 근거지`를 구축한 다음, 유격전술에 입각하여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마침내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농촌혁명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1928년에 모택동은 `정강산투쟁`에 관한 보고에서 이미 `적색 근거지`와 홍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백색정권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한 개 또는 수개의 작은 적색 근거지가 발생하는 것은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적색 근거지가 존립발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을 가진 홍군의 건설과 확충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결국은 공산당 독재

또 이러한 농민혁명을 통해서 권력을 잡은 후 모택동은 신중국의 통치형태는 `인민민주전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그리고 민족 자본가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시행하지만, 그렇지 않은 계급에 대하여는 무자비한 전정이 사행된다. `인민민주전정`하에서의 공산당의 과제는 “인민의 국가기관을 강화하고… 공산당의 지도하에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신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착실하게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래서 모택동은 권력을 잡은 후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하여 급속도의 산업화를 달성하려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그리고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들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공산당의 강압적인 지배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자 모택동은 그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 실패를 반우파투쟁으로 전환

모택동은 1956년에는 “논십대관계”를 , 그리고 1957년에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서 경제적인 불균형과 정치적인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화제방, 백가쟁명 및 민주적 인사와 공산당 간의 장기공존과 상호감독의 방침을 제시하게 되었다. 인민 내부의 모순은 기본적으로 비적대적인 모순이기 때문에 독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단결-비판-단결의 원칙에 의한 민주적인 방법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의 이와 같은 낙관론은 인민 내부의 모순의 심각성이 노정되고,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판이 가열되자 그 허구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은 결국 '반우파운동'으로 대치되고, 비판적인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 '정풍운동'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정치공작을 통해 지식인과 반대파를 수없이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또 '인민공사제도'와 '대약진운동'으로 중국은 곧 공산주의 단계에까지 돌입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인 기대감이 한때 팽배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을 무시한 평등주의정책과 인민공사와 같은 과격한 제도적인 개혁은 대중들의 생산의욕을 오히려 감퇴시키고 경제활동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천재와 같은 자연적인 재해와 소련의 원조중단 등으로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고, 중공은 최대의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고, 중공은 최대의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지 모택동의 정치우선주의, 계속혁명사상, 대중운동방식의 경제발전정책, 그리고 평등주의적인 경향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모택동이 제1선에서 물러나고 유소기, 등소평, 진운 등과 같은 당관료와 경제전문가들이 `인민의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야기된 경제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사상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비등하였다.  그 당시 아사자가 4천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용주의 노선으로 당내외에서 `수정주의적 경향`과 `자본주의적 성향`이 풍미하게 되자 모택동과 임표와 같은 급진파들은 다시금 계급투쟁과 정치우선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다. 중국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주자파`의 등장과 자본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모택동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급진파의 주장이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자신의 과오를 숨기고 다시 한번 대숙청

따라서, 임표는 1963년 2월에 중국인민해방군 정치공작회의를 소집하고 모택동의 군사.혁명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확대하였다. 이와 같은 급진파의 모택동사상 학습운동은 마침내 1966년에는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청산하고 신사상, 신문화, 신풍속, 신관습으로 중국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문화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타도하고 “자본주의계급과 일체의 착취계급의 의식형태를 비판”하는 문화혁명과정에서 모택동은 대중의 혁명정신을 강조하고 중국사회에 존재한다는 모든 `봉건적`, `수정주의적`사상에 대하여 `혁명적 대비판`을 전개하라고 촉구하였다. 대중의 사상혁명은 거대한 물질적 힘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문화혁명과 같은 사상개조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모택동은 주장하였다.

 

그래서 문화대혁명을 통해 무택동은 다시 한번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주체 세력은 아직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이었는데, 모택동은 이들 어린 학생들에 대하여 수년전부터 집중적인 후원활동으로 자신의 사상과 개인 숭배 사상을 심화시켜 왔던 미래의 혁명세력들이었다. 홍위병들이 저지른 패악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그들이 10년 동안 반혁명 분자로 몰아 처형시킨 사람들의 수가 수천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중국의 역사에서 이처럼 잔악한 학살을 자행한 사례는 찿아 볼 수가 없다.

 

 

                      

 
사후 평가

모택동 사후 중국 공산당의 평가는 이성적이었다. 실용주의 지도자들의 모택동사상에 대한 비판과 재평가운동은 1981년 6월에 개최된 중공당 제11기 6중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에 반영되었다. 이 `역사결의`에 의하면 중국공산혁명과정과 사회주의 개조가 완결된 1956년 제8차 전당대회까지의 모택동의 공로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이후에 모택동은 여러 가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즉, 1957년 반우파 운동, 1958년 대약진운동, 그리고 1966년의 문화혁명은 당과 인민에 대하여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였으며, 모택동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모택동의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 계속혁명론,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활에 관한 경고 등은 막스-레닌주의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모택동사상의 오류로 말미암아 문화혁명과 같은 `대재난`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중국사회에서 계급간의 모순은 사실상 주요한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인민의 나날이 증대하는 물질적, 문화적 욕구와 사회생산과의 모순”이야말로 주요한 모순이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생산력의 발전과 4대 현대화의 달성이 당과 국가의 최대 최고의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모택동사상의 급진적인 측면은 오늘날 혹독한 비판 대상이 되고 있으며, 더 이상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서 모택동은 개인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결론적으로 모택동 사상은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나 백련교도의 난과 같이 새로운 변형된 사상으로 민중을 선동하고 혹세무민하고 민중들의 힘을 이용하여 기존 권력을 뒤집기 위하여 시도한 것은 비슷하지만 태평천국과 백련교도는 민중을 폭도화하는데 급급하여 진정으로 민중들의 마음속에 안착하지 못하였으나 모택동은 소비에트화 사업을 통해 진정으로 농민들의 가슴속에 들어가 성장하였으며 특히 대장정을 통해 중국 서부 및 내륙 산골 구석구석까지 그들의 유토피아 나라를 선전하며 동조세력화하였여 성공하였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국공내전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미국으로부터 90개 사단을 창설할 수 있는 막대한 원조를 받으면서 홍군 토벌에 나섰지만 장개석 주변 인물을 포함하여  국민당 군대의  부패상은 극에 달하여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부대가 대부분이었고 그들 장비와 물자는 그대로 홍군으로 둔갑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모택동의 홍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민당 군대의 붕괴는 반비례하여 빠른 속도로 무너졌던 것이다. 결국은 장개석이 홍군의 승리를 도와주었고 모택동은 어부지리로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다. 승자는 미화되고 패자는 비하되는 게 역사이다. 모택동은 중국역사 어디에서도 찿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도 찿아볼 수 없는 살인마이며 권모술수가였다. 이는 중국 민중이 모택동의 감언이설과 사상적 괴변에 속아 스스로 선택한 불행이었다.

 

 

 

모택동 사상

 

모택동 사상은 막스-레닌주의처럼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순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막스-레닌주의라는 보편적인 이론을 중국혁명의 실천과정에 적용하면서 생성된 `실천적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즉, 모택동사상은 영구불변의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산출된 `사상`이며, 따라서 중국혁명과 중국의 정치현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택동 사상의 발전과정을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신문화운동과 모택동사상

1839년의 아편전쟁과 1860년의 태평천국의 난으로 가속화되기 시작한 전통질서의 붕괴는 청조의 몰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통문화와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재평가를 강요하는 위기상황을 초래했다.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를 중심으로 추진된 무술유신운동(戊戌維新運動)의 실패와 손문(孫文)의 신해혁명의 좌절은 전통문화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비판운동을 초래하였다. 즉, 진독수(陳獨秀), 이대조(李大釣), 호적(胡適) 등은 신중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가치와 제도를 타파하고 중국 인민의 정신적인 각성이 필요하고 주장하였다. 특히 청년들은 진보적이고 실용적인 새로운 가치를 습득히여 신중국 건설의 전위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신문화 운동은 당시 장사사범(長沙師範)의 학생이던 모택동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17년에 모택동은 진독수가 주간하는 <신청년>이라는 잡지에 “체육문화의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문약(文弱)에 흐르는 유교의 가치관을 배격하였다. 1918년에는 장사에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고 청년들의 육체적인 단련, 애국심,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모택동은 이미 전통문화의 핵심적인 군신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의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서구제국의 정책에 항거하여 최초로 대규모의 대중운동이 발생하자 모택동은 `인민대중의 대동단결`에 의하여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민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인민대중의 역사적 사명과 잠재력을 강조한 이 논문은 모택동의 인민주의적인 성향을 예고한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의 전통가치를 타파하고 청년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각성을 통하여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 당시의 모택동의 사상은 1949년 이후 문화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사상개조운동으로 발전하였지만, 1919년 당시의 모택동사상은 막시즘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에 불과했다. 모택동 자신도 이 당시에는 진독수, 이대조와 같은 신문화운동의 기수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자유주의, 민주적 개혁주의, 이상주의적 사회주의 등과 같은 사상적인 혼돈상태에 있었다고 토로한 바가 있다. 사실 모택동은 1918년에 이대조, 진독수의 주도하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막시즘 연구회에 가담하였지만 그 자신이 이론적인 측면에서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막스주의자로 자처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여름부터였다고 한다. 이 당시의 막시즘에 대한 모택동의 이해는 극히 피상적이고 단편적이었다고 하겠다.

2.모택동의 호남농촌운동 시찰보고

1921년에 극소수의 지식인들이 레닌의 동방우회작전을 표방하는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무산계급을 조직하고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노농 독재정치를 수립하고 사유재산제를 철폐하여 점차로 공산사회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을 창설하였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창당대회에 참가한 후 호남성의 책임자로서 장사에 돌아와 노동운동과 당세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3년에 중공당이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하여 국공합작을 결정하자, 모택동은 국민당에 가입하여 주로 농촌 공작에 종사하였다. 1921년에서 1926년까지 모택동은 진독수가 이끄는 중공당지도부에 별다른 이론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막시즘에 대한 특이한 해석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국공합작의 상징이던 손문이 1925년 사망하고 공산당의 노동자. 농민운동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던 국민당의 우파가 장개석의 쿠데타를 계기로 반공정책을 강화하던 1926년 모택동은 유명한 “호남농민 운동 시찰보고”를 발표하였다. 모택동은 중국의 농촌지역에서 “단기간 내에 수억의 농민들이 마치 태풍처럼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일어날 것이며… 이들의 혁명적인 세력은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모든 혁명정당은 이와 같이 혁명적인 농민의 힘을 조직하고 농촌혁명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국공합작이 와해되지 않기 위해서는 농민운동의 과격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혁명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권력을 전복시키는 폭력적인 행위”라고 하면서 “봉건 지주계급과 모든 전통적인 속박에서 해방하려는” 농민들의 폭력혁명을 옹호하였다.

이와 같이 농민운동과 농촌혁명을 강조하는 모택동의 주장은 노농동맹에 대한 레닌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모택동 자신도 도시노동자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중국적인 현실에서 농촌혁명이 중요하며, 농민계급은 도시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세력이 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모택동의 “호남보고”의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모택동의 농촌혁명론은 당 지도부에 의하여 채택되지 않았다. 1927년에 국공합작이 와해되자 구추백과 이립삼 등의 `모험주의 노선`에 의하여 주로 대도시에서 대중봉기가 시도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27년의 남창폭동을 위시하여 추수기에는 강서, 광동, 강소, 호남 등지에서 무장봉기가 있었으며 모택동은 호남폭등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는 장개석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탄압을 받게 되었고, 대도시에서 공산당의 세력은 거의 와해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산주의운동은 모택동이 “호남보고”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어쩔 수 없이 농촌혁명의 성격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정강산에서 연안까지

1927년의 호남폭동에서 실패한 모택동의 1천 명의 패잔군을 이끌고 호남성과 강서성의 접경지역에 있는 정강산으로 퇴각하여 이른바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면서 모택동의 농촌혁명전략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즉,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홍군을 조직하고 `혁명 근거지`를 구축한 다음, 유격전술에 입각하여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마침내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농촌혁명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1928년에 모택동은 `정강산투쟁`에 관한 보고에서 이미 `적색 근거지`와 홍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백색정권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한 개 또는 수개의 작은 적색 근거지가 발생하는 것은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지적하면서 모택동은 이와 같은 적색 근거지가 존립발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을 가진 홍군의 건설과 확충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모택동은 “적색 근거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하여 홍군의 역할을 강조하고 군사적인 투쟁에 많은 주의력을 경주하면서도 통치에 `군사만능주의`에 대하여 경고를 하였다. 즉, 모택동은 “군사와 정치를 대립적인 관계로 생각하며… 군사는 정치임무를 완성하는 수단에 지나지 못한다는 점을 정하지 않는 것” 은 `그릇된 사상`이라고 지적하였다. 모택동은 “홍군은 전투를 해서 적의 군사력을 소멸시키는 것 이외에 대중에게 선전을 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을 무장하며, 대중을 도와 혁명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사적 문제는 정치공작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유격전략은 단순히 군사적인 작전기술이 아니라 농민대중과의 접촉을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확충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정치공작의 뒷받침이 없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모택동은 농민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혁명과정에 동원하는 정치공작의 지도이면이며 조직기술인 `대중노선`을 강서시대에 처음으로 개발하였던 것이다.

 

정강산과 강서 소비에트시대에 생존을 위하여 모택동이 제안한 농촌 혁명전략에 대하여 당내의 반대와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당중앙을 지배하던 이립삼과 같은 소련 유학파 지도자들은 `적색근거지 농촌혁명전략에 대하여 당내의 반대와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당중앙을 지배하던 이립삼과 소련 유학파 지도자들은 `적색근거지의 건설`과 홍군의 조직, 그리고 농민의 동원을 골자로 하는 모택동의 농촌혁명전략에 대하여서 `군사주의`, `산상 막시즘` 또는 `농민적인 정신상태`의 소산이라고 혹평을 하였다. 이립삼에 의하면, 모택동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당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대도시에서의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지엽적인 농촌지역에서의 군사적인 투쟁만을 강조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광대한 농촌지역과 농촌인구를 가진 중국사회에서, 그리고 국민당의 탄압으로 대도시에서 공산당의 세력이 지리멸렬된 상태에서 모택동의 농촌투쟁전략은 공산주의운동의 명맥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모택동, 주덕 등은 1931년 11월에 서금을 수도로 하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건립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모택동의 농촌혁명전략에 따라서 강서소비에트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강서소비에트의 세력이 확대되자 장개석은 다섯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소공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1934년 9월에는 모택동과 주덕으로 하여금 `만리장정`을 결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들은 장개석군과 지방군벌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면서도 대륙을 종횡단하는 대 도피행진 끝에 1935년 가을 섬서성에 도착하였다.

4.인민민주전정시대의 모택동사상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던 1949년 7월, 모택동은 신중국의 통치형태는 `인민민주전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그리고 민족 자본가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시행하지만, 그렇지 않은 계급에 대하여는 무자비한 전정이 사행된다. `인민민주전정`하에서의 공산당의 과제는 “인민의 국가기관을 강화하고… 공산당의 지도하에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신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착실하게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따라서 중공정권은 1950년대 초에는 “토지개혁, 항미원조운동, 반혁명분자의 숙청, 국민경제의 부흥 등과 같은 대규모 투쟁을 수행하여 계획적은 경제건설은 추진하고 사회주의사회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중공정권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기틀을 마련하였던 1953년에 중공정권은 스탈린 경제발전 모델에 입각하여 제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동시에 농업, 수공업, 상업 등 경제구조의 사회주의 개조운동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급적인 산업화와 집단화정책에 대하여 일부 지도자들 사이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모택동은 그와 같은 `보수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집단화한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 개조는 “개체경제의 속박으로부터 대중의 생산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1955년과 1956년에 중공정권은 농촌사회에서 합작화운동을 강화하였으며,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를 강행함으로써 사실상 사회주의개조를 완결하였다.

 

그러나 현대공업, 특히 중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하여 급속도의 산업화를 달성하려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그리고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들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공산당의 강압적인 지배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자 모택동은 그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1956년에는 “논십대관계”를 , 그리고 1957년에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서 경제적인 불균형과 정치적인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화제방, 백가쟁명 및 민주적 인사와 공산당 간의 장기공존과 상호감독의 방침을 제시하게 되었다. 모택동이 무자비한 계급투쟁이나 강압적인 방법보다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하여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이유는 흐루시초프의 자유화정책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사회주의에 대하여 기본적인 반대가 없으리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농업과 수공업의 집단화와 상공업의 국유로 “사회주의경제의 우위가 확립되었고, 노동자계급이 수억의 농민과 동맹관계를 가지고 전국적인 지배권력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체제는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어 있으며, 인민 내부의 모순은 기본적으로 비적대적인 모순이기 때문에 독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단결-비판-단결의 원칙에 의한 민주적인 방법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의 이와 같은 낙관론은 인민 내부의 모순의 심각성이 노정되고,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판이 가열되자 그 허구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은 결국 반우파운동으로 대치되고, 비판적인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 정풍운동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다.

5.대약진운동과 모택동사상

모택동은 이미 1956년의 “논십대관계”에서 스탈린식 경제발전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현대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말미암아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발전으로 파생되는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하기 위해서 모택동은 중국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경제발전계획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소련의 경제적 원조와 전문적인 지식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모택동은 연안시대의 경험에 입각하여 농업과 공업의 병진, 경공업과 중공업의 동시에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집체경제의 우수성과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성과 자력갱생의 정신을 동원하면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가능하며, 농촌과 도시,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모택동은 믿었던 것이다. 1958년 2월 3일자 <인민일보>는 “고기간경, 역쟁상유”라는 사설을 통하여 모든 분야에서 `대승리`를 획득하라고 촉구하였다. “3년의 고전으로 각 지구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며, “15년내에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고속도적 대규모적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경(右傾) 보수사상`을 극복하고 `인민의 사상을 해방`시키며 집체경제의 우수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약진운동과정에서 모택동은 중국인민은 `일궁 이백`, 즉 빈궁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혁명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중의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집체주의 사상을 강화하는 정치교육과 사상혁명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정치. 사상혁명을 통하여 구 관습과 구 제도를 과감하게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가치와 제도를 수립함으로써 대중의 무한한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고 비약적인 경제발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활동에서도 `전`보다는 `홍`의 역할을 강조하는 정치지도와 사상지도를 기본지침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인민의 적극성을 고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동시에 추진되었다. 특히 분배상의 불평등을 대폭 감소하기 위한 `평등주의적`인 분배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인민의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성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기 위하여 “대규모적이고 공농상학병이 상호결합되어 있으며 정사합일의 인민공사”가 수립되었다. 인민공사제도와 대약진운동으로 중국은 곧 공산주의 단계에까지 돌입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인 기대감이 한때 팽배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을 무시한 평등주의정책과 인민공사와 같은 과격한 제도적인 개혁은 대중들의 생산의욕을 오히려 감퇴시키고 경제활동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천재와 같은 자연적인 재해와 소련의 원조중단 등으로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고, 중공은 최대의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6.문화혁명과 모택동사상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모택동의 지도력과 모택동사상의 권위에 대하여 불신과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마침내 지도층의 내의 노선투쟁으로 발전하여 문화혁명을 야기하게 되었다. 1959년 9월에 노산에서 개최된 당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시 국방상이던 팽덕회가 대약진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좌익모험주의`와 `소시민계급적 열광`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팽덕회를 숙청하고 대약진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1959년에서 1961년에 이르는 사이에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고, 중공은 최대의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모택동의 정치우선주의, 계속혁명사상, 대중운동방식의 경제발전정책, 그리고 평등주의적인 경향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모택동이 제1선에서 물러나고 유소기, 등소평, 진운 등과 같은 당관료와 경제전문가들이 `인민의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야기된 경제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사상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비등하였다.

이들은 `경제법칙`과 객관적인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약진운동의 유토피아적 경향을 비판하였고, 경제활동에 대한 정치와 사상공작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홍`에 대한 `전`의 역할을 강조하고, 경제적 효율과 수익성에 입각하여 대약진운동 당시에 추진되었던 정책을 조정하기 시작하였다. 실용주의 노선은 대약진운동의 정책적인 과오를 시정하고 경제위기를 수습한다는 한계를 넘어서 사회주의의 건설과 경제발전에 대한 모택동 사상을 비판하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960년 초에 북경시당부의 오함, 등척 등은 모택동의 급진적인 혁명사상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고, 중공당 고급당학교의 교장이던 양헌진은 모택동의 모순론과 유물변증법을 정면을 부정하는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즉, 양헌진은 모순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모택동의`일분위이론`에 대하여 모순의 통일과 계급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합이이일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 노선으로 당내외에서 `수정주의적 경향`과 `자본주의적 성향`이 풍미하게 되자 모택동과 임표와 같은 급진파들은 다시금 계급투쟁과 정치우선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다. 중국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주자파`의 등장과 자본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모택동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급진파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임표는 1963년 2월에 중국인민해방군 정치공작회의를 소집하고 모택동의 군사.혁명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확대하였다. 이와 같은 급진파의 모택동사상 학습운동은 마침내 1966년에는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청산하고 신사상, 신문화, 신풍속, 신관습으로 중국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문화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타도하고 “자본주의계급과 일체의 착취계급의 의식형태를 비판”하는 문화혁명과정에서 모택동은 대중의 혁명정신을 강조하고 중국사회에 존재한다는 모든 `봉건적`, `수정주의적`사상에 대하여 `혁명적 대비판`을 전개하라고 촉구하였다. 대중의 사상혁명은 거대한 물질적 힘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문화혁명과 같은 사상개조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모택동은 주장하였다.

7.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1976년의 모택동의 사망과 문화혁명 4인방에 대한 숙청이 중공 정치사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등소평을 비롯하여 문화혁명 기간에 박해를 받았던 실용주의 지도자들이 대거 복권되면서 모택동사상과 모택동의 공적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실사구시`와 “실천만이 진리를 검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주장과 함께 모택동사상을 신비화하고 교조화하였던 좌파의 오류를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대중들의 `사상해방`을 촉구하였다. 특히 이들은 계급투쟁과 사상혁명을 강조한 모택동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계급투쟁의 종식을 선언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 지도자들의 모택동사상에 대한 비판과 재평가운동은 1981년 6월에 개최된 중공당 제11기 6중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에 반영되었다. 이 `역사결의`에 의하면 중국공산혁명과정과 사회주의 개조가 완결된 1956년 제8차 전당대회까지의 모택동의 공로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이후에 모택동은 여러 가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즉, 1957년 반우파 운동, 1958년 대약진운동, 그리고 1966년의 문화혁명은 당과 인민에 대하여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였으며, 모택동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모택동의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 계속혁명론,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활에 관한 경고 등은 막스-레닌주의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모택동사상의 오류로 말미암아 문화혁명과 같은 `대재난`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중국사회에서 계급간의 모순은 사실상 주요한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인민의 나날이 증대하는 물질적, 문화적 욕구와 사회생산과의 모순”이야말로 주요한 모순이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생산력의 발전과 4대 현대화의 달성이 당과 국가의 최대 최고의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모택동사상의 급진적인 측면은 오늘날 혹독한 비판 대상이 되고 있으며, 더 이상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서 모택동은 개인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