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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2 : 마오쩌둥 시대 1 (중공군의 한국 전쟁 참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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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2 : 마오쩌둥 시대 1 (중공군의 한국 전쟁 참전)

두바퀴인생 2010. 6. 24. 10:28

 

 

 

중국의 역사 132 : 마오쩌둥 시대 1 (한국 전쟁, 중공군의 참전)

 

 

한반도는 아직 전쟁 중

 

6.25 전쟁을 통해서 민간인 37만여명 사망 및 38만 7000여명 납치·실종, 북한 민간인 120만여명 사망, 한국군 13만 7000여명 및 유엔군 4만여명 전사, 한국군·유엔군 4만여명 포로·실종 등 아픈 기록을 남겼다. 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민족적 책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놓여져 있다. 그러나 천안함 사태로 되돌아보게 된 대한민국 안보의 현주소를 보면 걱정스러운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북한의 호전성은 60년 동안 변함 없다. 그들이 국지 도발을 감행한 사례는 무려 200여건에 달한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안보 의식은 안이하다. 행정안전부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의 36.3%, 청소년의 58.7%는 6·25전쟁이 언제 발발했는지를 모른다. 성인 20.4%, 청소년 36.3%는 북한이 6·25를 일으켰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천안함 사태로 지난해 조사 때보다 안보 의식이 높아져 그나마 다행스럽다. 희망적인 것은 전쟁 발발 시 싸우거나 돕겠다는 응답이 77.7%에 이른다는 또 다른 조사 결과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는 든든한 만큼 이제는 현실성 있는 안보정책에 눈을 돌려야 한다.

안보엔 여야도, 보수·진보도 함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러지 못해 걱정스럽다. 천안함 사태는 최악의 북한 도발 사례로 기록됐다. 그로 인해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남남 갈등이 커지고 있는데도 정치권은 오히려 조장하는 꼴이다. ‘북한의 천안함에 대한 군사도발 규탄 및 대응조치 촉구결의안’이 사태 발생 90일 만인 그저께야 국회 국방위원회를 통과했다. 민주당은 표결 절차를 문제 삼아 ‘날치기’라고 비판하는데 어느 나라 야당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은 결의안을 발목 잡는 일이 북한을 편드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본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채택되도록 협조해야 할 것이다. 안보에 앞장서는 일은 정치권의 기본 책무다.

우리 내부엔 6·25를 민족 상잔의 전쟁이 아닌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평화통일세력으로 포장해 북한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분열적 행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 그들로부터 선량한 국민들을 보호하고 건전한 안보의식과 한반도 평화 정신을 조화롭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자면 남북 평화공존과 맹목적 종북은 다르고, 3대째 세습독재정권과 핍박 받는 북한 주민들은 동일체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빈틈 없는 안보는 대북 문제를 둘러싼 남남 갈등을 치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사설 인용)

역사는 반복된다.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 배경에 대하여 소상하게 피력하였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다소 다른 점도 있을 것이나 아래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다. 왜곡된 역사는 미래를 혼돈스럽게 만들며 자신의 판단도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든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다시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역사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 민족간에 벌어진 6.25 전쟁에 대하여 제대로 잘 모르고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거나 들은바도 없는 젊은이들을 위해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다. 또 과거와의 대화라고도 했다. 우리의 역사는 결코 위대한 역사가 아니다. 치욕의 역사이며 영욕의 역사이다. 나라를 망해 먹고도 다시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 아니겠는가! 해방이 되지 못했다면 지금도 우리는 일본눔들 뒷바라지에 노에처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로마제국과 패권을 다투던 당시 지중해 최대 강대국 카르타고가 로마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결국 로마에 패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하고 깔보던 몽고족 .만주족(글안,여진족)은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거나 중원을 점령하고 천하를 호령하며 웅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도 희미하게 사라지고 가난과 빈곤속에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역사를 모르는 자는 역사의 거센 격랑속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흘러갈 뿐이며 힘센 자에게 정복 당하여 나라도 백성도 역사도 사라지고 자신과 후손들이 오로지 노예처럼 평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나 역사를 알고 미리 대비하는 자는 오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절치부심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여 민족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강대국의 위성국이 된 남북한...

지지리도 못난 조상을 원망해 보았자 그들도 인간이었고 잘못된 위정자들 밑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선택이 잘 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누가 부국강병을 이루어 민중들이 복된 삶을 만들어 가며 나라를 이끌어 가는냐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장단점은 다 있을 것이다. 능력껏 부를 향유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자유진영은 빈부의 차와 양극화 현상의 심화는 갖지 못한자들에게는 상재적 빈곤감으로 나타나고 그들은 사회가 한번씩 뒤집어 지는 것을 꿈꾸며 인간대접도 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영원히 벗어나고픈 사회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부를 평등하게 나누어 갖고 살아가자는 공산주의 체제 선전.선동에 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가장 먼저 토지를 개혁하여 각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고 가진자, 지식인, 대지주, 관료 등 반대파를 정권을 잡은후에는 가장 먼저 숙청하는게 우선이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 사회가 모두가 잘 살면서 평등한 부의 평등이 아니라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가난의 평등이라는 점이 또한 문제다. 권력을 가진 공산정치 지도자는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반대파를 수시로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제거해야만 한다. 그래서 말 잘듣는 핵심 공산당원들만 잘먹고 잘 살지만 일반 백성들은 배급제를 실시하여 통제하면서 굶주림에 아사자가 속출하여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마오쩌둥이 그랬고 김일성이 그랬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반우파 투쟁을 실시하였고 권력 실각을 우려하여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여 문화대혁명이라는 '10년 동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흔들던 4인방을 포함하여 수많은 지식인, 당내 고급 간부, 군내 고급 장성 등 수많은 반대파를 숙청했다. 숙청된 사람들은 홍위병에게 반당분자라는 글씨를 쓴 모자,목줄,간판을 달고 전국을 돌면서 자아비판.인민제판을 실시하여 감금.폭행.고문.살해.강간 등 조리돌림을 당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공산국가에서 인민재판과 자아비판은 법에도 없고 규정에도 없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인민의 적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이라는 사실을 중국 인민이나 북한 인민들이 모를리는 없을 것이나 무리를 지은 시위대가 저지르는 폭력앞에 누구나 개인은 힘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제반 문제점으로 공산세계는 경제적인 궁핍과 생산성 저하, 그리고 가난과 빈곤이 심해지자 현대에 와서 소련을 포함한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붕괴되었고 이어서 동구권이 연쇄적으로 모두 붕괴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로 서서히 전환했다. 이러한 사태를 본 중국은 자신들의 정권도 붕괴 조짐을 보이자 마오쩌둥 이후 등소평에 의해 발빠르게 개혁.개방으로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으나 국내 소수민족 문제, 티베트 문제, 신장.위구루 문제, 인권 문제, 빈부 격차 문제 등을 포함하여 위안화 절상, 식량 자급, 자원 확보, 국제적 위상 등 대외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풀어야 할 난제는 수두룩하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은 개방정책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나 북한은 개방으로 인해 붕괴될 지도 모르는 체체가 걱정되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탈북자가 넘쳐나고 있으며 동북 3성에는 몸을 팔아 살아가는 탈북 여성들이 만주 땅에서 비참한 노예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실정인바, 지구상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공산 족벌체제 절대권력을 가진 나라가 바로 김일성 세습체제로 후손들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이다. 

 

어쩌면 김일성이란 인물은 시대를 잘 타고난 인물임에는 틀림없은 것 같다. 해방의 격동기에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에 진주한 그는 진주군인 소련군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고 정권을 세웠으며 임시정부 대표였던 김구의 남북협상을 거부하고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은 세계 적화를 위해 북한을 지원하였고 북한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시도했다.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미군을 등에 업고 남한에 기존 세력, 독립군파, 임정파를 모두 물리치고 자신만의 정권을 세웠다. 이승만은 미군을 이용하여 일제 36년 동안 중국에서 갖가지 고통을 당하면서도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임정 요인들을 개인적인 자격으로 입국토록 미군정에 요청하여 이를 허용했다. 미군은 자신들과 가까우며  말을 잘 듣는 이승만에게 정권을 세우도록 배후 조종하였고 정권을 창출하도록 후원해 주었다.  이승만은 국정 운용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정부 각 분야에 친일파를 대거 기용하였고 자신의 정적과 반대파인 김구 등 유명 정치인 여러명을 암살로 숙청해 버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외치면서 연일 미군에게 불안감을 조장하였고 미군은 그러한 이승만에게 북진의 불장난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군의 무장을 서두러지 않았고 최소한의 소총과 장비만으로 부대를 편성토록 하였다. 당시 채병덕 참모총장은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역은 신의주에서...'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으면서 자만을 떨었다. 점령군인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 지원 실패에 이어 에치선 선언으로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하였고 한국전쟁 발발을 예상하지도 못했다. 당시 미 CIA는 북한의 침공을 예상하지 못해 나중에 책임자가 해임되기도 하였다. 또 한국 전쟁에서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을 예상하지 못했고 정보도 없었으며 그들의 전략.전술을 얏잡아 보았다.

 

슬픈 전쟁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농간으로 머리수만 채운 오합지졸에 불과한 한국군은 김일성의 북한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국군은 수차례의 북한 침공 예상 정보 보고를 받고도 무시한 체 장병들을 외출.외박을 내보내고 비상 상황도 해제한 상태였으며 전쟁 발발 전날에는 용산 장교 클럽 낙성식에 전 사단장을 초청하여 성대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북한 남침 급보를 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개성-문산 축선, 의정부-동두천 축선에 소총만 무장한 부대를 축차적으로 투입하였으나 적전차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강 이북 전선에 주력의 대부분을 축차 투입하였으나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적은 파북지세로 내려와 의정부를 점령하고 축석 고개를 돌파하였다. 축석 고개 전투에서 갓 입교했던 육사 2기생들 대부분 전사하였다. 축석 고개를 돌파한  적 전차 3대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괭음 소리도 요란하게 서울로 진입하자 수도 서울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승만 정권은 미리 남쪽으로 도망쳤고 수많은 서울 시민은 북진하고 있다며 방송하였던 정부의 선전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다가 대부분 공산치하에 포로로 잡혀 유명 인사들은 줄줄이 묶여 북으로 끌려 갔다. 북괴군 전차가 서울에 나타나자 한강 대교가 조기 폭파되는 바람에 급하게 피난가던 수많은 시민들이 폭사되었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 주력은 지리멸렬되었다. 수많은 한국군 젊은 병사들이 소총과 수류탄, 화염병으로 적 전차에 뛰어들었으나 낙엽처럼 산화했다. 한강교 조기 폭파로 나중에 공병감이었던 최창식 대령이 총살형에 처해졌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 후 한강을 건너 전차를 앞세우고 다시 남하하였다. 맥아더는 급거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를 오산 지역에 투입하여 적을 저지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남진하던 북괴군은 미군 선발대인 스미스 부대와 오산 전투에서 반나절 만에 미군을 패배시키고 남하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스미스 부대에 이어 급거 투입되어 대전 지역에서 방어 작전을 펴고 기다리고 있던 미 24사단을 침투와 포위 전술로 괴멸시키면서 사단장 딘 소장을 포로로 잡았다. 이어 북괴군은 파죽지세로 계속 남진하여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여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퍼붓고 있었지만 제공권을 상실하고 보급선이 길어지자 공격기세가 약회된 북한군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앞에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형산강 전투, 다부동 전투, 영천 회전, 왜관 융단폭격, 마창 전선에서 밀고 당기며 연합군은 초인적인 내선적전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공격기세가 꺽인 북한군의 진격이 저지되고 있을 즈음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대부분의 장비와 무기를 버리고 삼삼오오 산길을 타고 북상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일부는 지리산, 태백산맥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경의 소탕작전으로 하나 둘 소멸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휴전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계속하여 평양을 점령한 후, 초산,장진호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중공군의 위치와 정보는 전무한 상태에서 진격을 멈추고 위력수색이 실시되면서 맥아더의 구상인 만주 폭격도 원폭 투하도 트루만 대통령의 거부로 불발로 그쳤다. 잠시 위력수색으로 적군의 동태를 살피던 중 갑자기 후방에 나타난 중공군에 의해 전방 부대들이 포위되면서 연합군 주력들이 지리멸렬되기 시작하였다.  맥아더는 트루만과의 갈등으로 연합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연합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부분의 장비와 무기를 버리고 처절한 1.4 후퇴를 거듭하여 서울과 수원을 다시 빼앗기고 다시 수복하는 등 철의 삼각지 전투,백마고지 전투,펀치볼 전투,단장의 능선, 지평리 전투 등 휴전선 일대에서  지리한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승자없는 전쟁을 더이상 지속하는 것이 서로에게 피해만 초래할 것으로 판단하여  이승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 전선에서 휴전하기로 합의하여 한국은 제외된 체 휴전이 성립되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이렇게 한국 전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중공은 우리들에게는 남북통일의 가장 큰 장애였다.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먹이감이요 전장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힘이 센 눔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한반도를 삼키기 위해 달려든다. 중국-일본-러시아-중국-미국이 돌아가며 한반도에서 그들의 지배권을 두고 각축을 벌이면서 강점을 해왔다. 우리는 힘이 없고 무능한 지도층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나라를 점령 당하거나 빼앗기는 눈물겨운 역사를 반복하여 왔다.

 

이러한 눈물겨운 역사를 수없이 경험하고도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하나 둘 아니다. 국론을 모아도 헤처나가기 힘든 판국에 서로 갈등을 부추기고 정권을 전복시키고 권력을 탐하며 더 갖기 위해 무슨짓이던지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대명사는 부패 공화국,  비리 공화국, 낙태 공화국, 촟불 공화국, 선거 공화국, 갈등 공화국, 사기 공화국, 양극화 공화국, 낙하산 공화국, 검사-스폰서 공화국, 군면제 공화국, 성형 공화국, 교육비리 공화국, 연예 공화국, 노숙자 공화국, 저출산 공화국, 노인 공화국, 교통사고 다발 공화국, 데모 공화국, 시위 공화국.... 

 

독립군과 전쟁터에서 묵숨을 바친 수많은 유가족들이 가난과 빈곤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장차 국가 위기시에 이나라를 위해 누가 목숨을 바칠 것인가? 무공훈장이 하루 일당도 되지 않는 보훈금을 받는 이나라에서 무공훈장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땅속에 묻힌 순국 선열들의 뼈가 썩지도 못하고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휴전선 일대의 적 방사포, 적 특수 군단 18만 명, 적 잠수함, 공기 부양정, 스커드 미사일, 노동 미사일, 대포동 미사일, 100만이 넘는 인민군 및 후방 지원 세력, 남한내 음지에서 준동하고 있는 수많은 간첩들, 좌편향 불순 분자, 재소자, 극빈층, 재야 세력, 종북.친북 좌익 세력 등 적을 눈앞에 두고 설마 전쟁이 나겠냐는 마음으로 방심한다면 패망전 명나라, 청나라, 월남과 똑 같은 나라꼴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6.25 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들이 현실에 급급해 하는 동안 주변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한반도를 농단할 비밀회담을 벌이고 있을 지 모른다. 북한은 핵무기를 포함하여 대량파괴무기를 이미 장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가 재래식 무기로 아무리 타격을 해봤자 미사일 방어 체제가 갖추어져 있지 못한 현실에 적의 핵무기 한 발이면 서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또 저들은 든든한 후원자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나 우리의 후원자는 이억만리 태평양 바다 건너에 있다. 역사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여차하면 그들은 최종 방어선인 한반도를 포기하고 일본 열도로 물러날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미군이 떠난 지역에 살던 양공주 신세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한반도가 통일이 되는 것은 우리들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변 강대국의 힘의 역학적인 변화에 따라 북한에 의해서나 남한에 의해서나 언젠가는 통일을 이룰 것이나 우리들 당대에는 실현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앞으로 백년이 갈 지 2백년이 갈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면 어느날 갑자기 해방이 찿아왔듯이 통일이 찿아올지도 모른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우리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우리들의 운명이 결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또 족벌세습정권은 절대 부패하였고 절대권력과 철권통치는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강할수록 쉽게 뿌러지며 그 붕괴속도는 강한 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루며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고 복리를 증진시키며 부국강병을 이룬 나라만이 긴 역사를 달성하였다는 것이다.

 

권력은 무상하며 인생도 무상하다. 역사속에서 수많은 왕조들이 창업시에는 천년 만년을 갈 것처럼 출발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은 주지육림에 빠지고 사치와 방탕해지는 등 부패하기 마련이거늘, 권력욕에 눈이 멀어 권력 쟁탈전은 무수하게 발생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3족이나 9족을 멸하면서 반역과 반란,반정을 색출.제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백성이 고통받고 힘들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면 반드시 나라를 뒤엎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그래서 그런 나라는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내면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사랑,행복,자유,평등이다. 이러한 인간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지도층이 부패와 무능으로 나라가 병든다면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들 젊은이들 중에서 유능하고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지금의 갈등을 치유하며 국론을 통합하고 강대국과 맞설 수 있는 국력과 힘을 배양하여 주변 강대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지혜로운 국제 외교와 대북방 정책으로 만년설이 따사로운 햋볕에 저절로 녹아내리듯, 독일이 통일을 이룬 것처럼 총한방 쏘지 않고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 버리고 위대한 통일 업적을 이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대할 뿐이다. 단 그가 역사에 대한 심오한 지혜와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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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 마오 결정은 중국을 위한 선택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숱한 해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한국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을 목표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 3개 루트를 통해 침투하려는 미국의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 전략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들 3개 지역을 차지하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중국본토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과정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설득에 따라 공산진영을 지키려는 마오쩌둥의 고독하고 영명한 결정이라는 정도밖에.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신의 운명을 건 주사위를 한국전쟁을 향해 내던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마오쩌둥의 독단적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과 결과만 얘기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실마리는 ‘조선인 사단’의 귀환 동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전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 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동북 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 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 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쓴 화동 사범대 선즈화 교수는 “북한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정과 지지를 보여준 조치”라고 분석했다.

 

 

한국 전쟁(6.25 전쟁)

한국 전쟁(韓國戰爭) 또는 6·25 전쟁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지만, 휴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2010년 5월 현재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로 남북간에 전쟁 위기감이 다시 한번 고조되고 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한 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한과 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지금까지도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로 남아있다.

다양한 호칭

대한민국(이하 남한)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전쟁(六二五戰爭), 주로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사변(六二五事變),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전쟁(일본어: 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 항미원조전쟁( 抗美援朝戰爭), 코리아 전쟁(Korean War, 서구권)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 전쟁/조선 전쟁
Korean War Montage.jpg
한국 전쟁 중의 사진들
날짜 1950년 6월 25일 - 현재
(1953년 7월 27일 휴전)
장소 한반도
결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본격적인 냉전체제 돌입
북한, 남한의 중앙집권 강화
교전국
Flag of the United Nations.svg 국제 연합: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미국의 국기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오스트레일리아
영국의 국기 영국
캐나다의 국기 캐나다
뉴질랜드의 국기 뉴질랜드
터키의 국기 터키
네덜란드의 국기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국기 룩셈부르크
콜롬비아의 국기 콜롬비아
벨기에의 국기 벨기에
에티오피아의 국기 에티오피아
프랑스의 국기 프랑스
그리스의 국기 그리스
필리핀의 국기 필리핀
Flag of South Africa 1928-1994.svg 남아프리카 연방
타이의 국기 타이


비공식 지원국
일본의 국기
일본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


의료지원국
인도의 국기
인도
이탈리아의 국기 이탈리아
덴마크의 국기 덴마크
스웨덴의 국기 스웨덴
노르웨이의 국기 노르웨이

공산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


비공식 지원군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비에트 연방


의료지원국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기
체코슬로바키아

지휘관
대한민국의 국기 이승만
대한민국의 국기 정일권
대한민국의 국기 백선엽
대한민국의 국기 이형근
대한민국의 국기 채병덕
대한민국의 국기 김두한
미국의 국기 해리 S. 트루먼
미국의 국기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의 국기 매슈 리지웨이
미국의 국기 마크 웨인 클라크
미국의 국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의 국기 월턴 워커
미국의 국기 윌리엄 F. 딘
영국의 국기 클레멘트 애틀리
터키의 국기 타흐신 야즈즈
필리핀의 국기엘피디오 퀴리니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김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김무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김광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전우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마오 쩌둥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펑더화이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이오시프 스탈린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게오르기 말렌코프
병력
UN군 사령부: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590,911명
미국의 국기
미국 480,000명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캐나다의 국기
캐나다 2만 5687명
뉴질랜드의 국기
뉴질랜드 3794명
영국의 국기
영국 5만 6000명
필리핀의 국기
필리핀 7420명
터키의 국기
터키 1만 4936명
네덜란드의 국기
네덜란드 3522명
룩셈부르크의 국기
룩셈부르크 44명
콜롬비아의 국기
콜롬비아 1,068명
벨기에의 국기
벨기에 900명
Flag of Ethiopia (1897).svg 에티오피아 1,271명
프랑스의 국기
프랑스 1,119명
그리스의 국기
그리스 1,263명
Flag of South Africa 1928-1994.svg 남아프리카 연방 826명
타이의 국기
타이 1,294명
총: 933,845명

공산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260,000명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중국) 780,000명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비에트 연방(소련) 26,000명
총: 1,066,000

피해 상황
대한민국의 국기
군인
14만 9005명 전사
71만 783명 부상
13만 2256명 실종
민간인
37만 3599명 사망
22만 9625명 부상
30만 3212명 행방불명
총계
52만 2604명 사망
94만 408명 부상
43만 5468명 실종
총계 189만 8480명 사상


미국의 국기
3만 6940명 전사
9만 2134명 부상
3737명 실종
4439명 포로
총계 13만 7250명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339명 전사
1216명 부상
3명 실종
26명 포로
총계 1584명
캐나다의 국기
312명 전사
1212명 부상
1명 실종
32명 포로
총계 1557명
영국의 국기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79명 실종
997명 포로
총계 4908명
뉴질랜드의 국기
23명 전사
79명 부상
1명 실종
총계 103명
필리핀의 국기
112명 전사
229명 부상
16명 실종
41명 포로
총계 398명
터키의 국기
741명 전사
2068명 부상
163명 실종
244명 포로
총계 3216명
네덜란드의 국기
120명 전사
645명 부상
3명 포로
총계 768명

총계: 474,000명 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군인
29만 4000명 전사
22만 6000명 부상
12만 명 실종 및 포로
민간인
40만 6000명 사망
159만 4000명 부상
68만 명 행방불명
총계
70만 명 사망
182만 명 부상
80만 명 실종
총계 332만 명 사상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13만 5600명 전사
20만 8400명 부상
2만 5600명 실종 및 포로
총계 36만 9600명 사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315명 전사
500명 부상
총계 715명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배경

한반도제2차 세계 대전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련의 군정, 남쪽에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1948년 각각 남한북한을 건설함과 동시에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쪽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남쪽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북쪽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국의 통치자인 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모택동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고, 김일성이 그후 수 차례 그를 설득하여, 결국 중공이 전쟁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일당 독재, 반대파(애국자, 종교인, 기업가를 포함한 상당수의 북한 인민)의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북한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던 김일성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미국에서 입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남한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과,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 간 불신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50년 5월 코민포름이 일본공산당의 온건노선을 비판하자, 일본공산당 도구사 서기장은 노동절을 기하여 일본공산당은 1950년 테제인 다가오는 혁명에 있어서 일본공산당의 기본임무를 채택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전투적 공산당으로 변모하였다. 일본공산당은 5월 30일 궁성앞 인민광장에서 2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한 "공산당 방위, 평화옹호, 요구관철, 조선통일전선 인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 조총련의 행동대, 학생, 조직노조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집회 후 도심지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여 미군 헌병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전에 있던 전투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그 예로 1949년 6월 7일에는 남한군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 북쪽으로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지를 점령하기도 하였고, 같은해 6월 17일에는 38선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태탄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하였었는데, 이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까지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이 전투남한이 더 적극적이었으나, 이후에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강원도양양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원인

김일성의 남침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구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에 의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6년 7월 한국 전쟁의 기록을 북침에서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결국 구 소련문서의 공개에 따라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리고 CIA는 한국 전쟁 발발 엿새전의 보고서에서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하고 있었고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근거로했다. 그러나 CIA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 전쟁 발발하자 백악관은 그 책임을 물어 CIA를 전쟁 발발후 며칠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수장을 교체했다.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덜레스 장관이 남한을 방문하는 사건 등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비교적 폐쇄적인 북한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북한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북한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사회학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한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북한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이 엇갈리고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 제기된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이론이다.

스탈린 주도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은 소련의 지배아래 있던 부리야드 공화국(현 몽골)의 기갑부대 요원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북한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미 공모설

이승만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북한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내란 확전설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2.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 북한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남한)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3.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함.
  4.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해으나 대답이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국제연합군(UN군)도 진격시작, 평양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듬.
  5. 고착 전쟁(1951년 6월 ~ ) : 중공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당황한 공산측이 휴전협정을 받아들임.

북한 위주이거나 북한을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북한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전쟁준비

조·소 비밀회담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였고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회의에는 북한과 중공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로 북한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북한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코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북한의 수뇌부는 방문기간인 3월 17일에 동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인 의용군 입북

한국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의 요청과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팔로군(八路軍)중 한인 출신들로‘조선의용군’을 만들어 입북 시켰다. 이중 팔로군 제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4 사단은 만주지역에 주둔해 있는 한인들로만 구성된 단일부대로 1949년 7월 20일 입북하여 조선인민군 제 5사단으로 개편 되었다. 입북한 사단 인원은 10821명이다.

 

제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6사단은 국민당군을 쫒아 대만해협까지 진격한 역전의 사단이며 한중 혼성 부대이다. 원래는 166사단중 1개 연대만 한인이며 조선의용군으로 개편과정에서 중국인들을 한인으로 교체하여 1949년 7월 20일 입북 시켜 조선 인민군 제 6사단으로 개편 시켰다. 사단 병력은 10320명으로 한국전쟁당시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라고 불리며 미 24사단을 괴멸시키고 한국군 사단 대부분을 격파한 최강의 부대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요청으로 팔로군 제 156사단을 중심으로 139, 140, 141사단의 한인들을 모와 1950년 4월경 입북하여 약 1만 4천 병력으로 조선인민군 제 7사단을 만든다.(이후 제 12사단으로 명칭 변경)

 

그외 중국인민해방군에 부대단위가 아닌 개인적으로 복무중인 한인들을 모와 1개 연대를 만들어 입북시키는데 이들은 오토바이 연대가 된다. 이렇게 하여 모택동이 보내준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 출신 조선의용군은 3개사단 5만명이다.(대안교과서등 일부자료는 2개사단 3만명으로 나오는데 12사단과 오토바이연대를 누락 시킨 것이다.)

준비 과정

북한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준비함에 앞서 남한의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발견된 북한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 보리 등의 모든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북한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 특히 모든 종류의 주식은 물론이며 주식이 아닌 깨까지 군 단위별로 예상 수확량과 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준비함에 있어서 이 정도까지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북한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남한에 거의 전무했던 탱크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남한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아주 허술하게 대응했다.

 

경과

경위

남북한 군사력 비교(1950년 기준)
항목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장갑차 24대 54대
전차 0대 242대 (T-34)
곡사포 105mm-m3 88문
사정거리 6500m
122mm 172문
76.2mm곡사포 176문
76.2mm자주포 242문
사정거리 평균 10,000m
대전차포 57mm 140문 45mm 540문
박격포 60mm 576문
81mm 384문
61mm 1142문
82mm 950문
120mm 226문
군용기 연습기 20대 전투기 등 170대
육군병력 9만 4000명 19만 1680명
해군병력 8866명 4700명
공군병력 1800명 2000명
총병력 10만 4666명 19만 8380명
전투경험 대부분 없음
(신병대다수)
중국 팔로군 출신 한인중 일부
국공내전 참전 경험

1950년 6월 당시 북한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16] 북한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대전차 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T-34를 격파할 수 없는 무기였다(미국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한국군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스미스 대대가 치른 오산 전투에서야 자신들이 오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사단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개성 - 문산 - 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17]. 전체적으로 남한군은 단지 15일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발언이 미국측에서는 이승만이 북침을 노린다고 받아져 탱크와 전투기등 공격에 필요한 무기를 한국군에게 제공하지 않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이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이에 정보국 요원들 중 박정희는 적이 바로 앞에서 조국을 침략하기 위해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놀고 먹는데에 여념이 없는 정부에 대해 매우 대노하여 얼마 후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정권을 뒤엎고 군사반란을 일으키려 시도했지만 장도영 등 박정희의 상관들은 전쟁중에 반란을 일으키면 서로 멸망하기 때문에 박정희의 군사반란 시도를 막았으나 이후 1960년 박정희는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외 전쟁발발 2주전 대부분의 지휘관들을 교체하고(숙군 작업의 일환임), 1주전 대부분의 전방부대의 위치를 변경하고(여순사건의 여파로 인한 것임), 전방부대의 중화기와 차량중 60%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일제 점검 목적임) 개별적으로는 이해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하여 이형근 장군은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지휘부(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안에 통적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이승만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이형근은 군번 1번 문제로 일본육사 선배인 채병덕과 개인적으로 사이가 매우 안좋은 상태이며 이것은 국군 창설 첫날이자 최초의 파벌 싸움의 시초가 되었다)

발발

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공산국가의 맹주격인 소련에서 대량으로 제작하여 여러 공산국가에 뿌린 관계로 당시 북한 뿐만 아니라 공산계의 주력전차였다
 
 
개전 초기 북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남한의 의견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남한)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남한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한강 철교의 폭파는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미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는 여러 견해가 나뉘고 있는데, 첫째 춘천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포위계획 실패, 둘째 도하장비 부족,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남한 자체가 조기 붕괴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였다는 3가지 설이 있는데 강원도와 6사단에서는 첫 번째 설을 정설로 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두 번째 설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2사단의정부에서 북한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유엔군의 참전

1950년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한편 대한민국 정부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이러한 결의를 북한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7월 1일 영국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필리핀·타이·터키·영국·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대한민국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수복

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UN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관찰하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10월 19일에는 평양를 탈환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쪽은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초산에 이르렀고, 중부쪽은 장진호까지 진격했고 동부는 압록강혜산진까지 진격하다가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북한은 지금의 자강도의 중심지인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했다(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 미국 1 해병사단의 목표가 바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 하다가 중국군의 의해 밀린다).

중국의 참전과 1.4 후퇴

중국군이 한국에서 이룬 "승리"를 보여주는 중국의 포스터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국의 모택동을 만났다. 그리고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대만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국땅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50만 명이상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고 중국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국에게 많은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소련인들도 중국 마크를 달고 쳐들어오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중공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12월 4일에 평양철수를 하고 이어 북한은 수도 평양을 되찾음으로써,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강계에서 평양이 다시 북한의 수도가 되었다. 한편,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인민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45] 2월 이승만은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인민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서울 바로 위에는 중국과 북한군이 옆으로 일렬로 서 있었고, 동부(강원도 쪽)에서 북한과 중국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북한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이 무렵 소련이 소련마크를 달고 부분적으로 참전했었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휴전 협정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나중에 중국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뺏기고 남하했지만 다시 수복하고 38선 넘어 공산군을 쫓아낸 뒤 현재의 휴전선이 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정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북한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휴전을 하기로 했었다. 또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북한(조선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2010년 6월 19일KBS1 전쟁드라마 전우를 첫 방송되었으나, 60주기 기념드라마로 제작하고 있다.

휴전 협정 이후의 충돌

휴전협정 이후 크고작은 국지도발 및 무력충돌이 여러번 있었다. 1968년에는 북한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1990년 이후에는 서해 NLL부근에서 수차례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제일 최근의 사건은 2010년 3월 26일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초계함 PCC-772 천안이 침몰하여 46명이 사망하였다.

피해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 하지만 1차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못하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남한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 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보도연맹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는데 이것은 113만 명에 이른다.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를 고려한다면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이제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한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북한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공업화 즉, 계획경제에 따른 공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북한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 (남한)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

사용되었던 무기

대한민국 국군

장갑차

항공기

UN군

장갑차

전차

구축전차,자주포

전투기

폭격기

조선인민군

장갑차

중전차

구축전차·자주포

전투기

폭격기

중공군

장갑차

중전차

구축전차·자주포

전투기

폭격기

사진

 

 

 

중공군의 참전 결정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절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마오쩌둥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듯 중국과 한국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 ‘콜디스트 윈터’에서 묘사한 중국 참전결정의 전야(前夜)이다. 중국 주력부대의 압록강 도하 시간은 1950년 10월19일 오후 5시30분이었으니 18일 밤 상황인지도 모른다. 진위를 떠나 핼버스탬은 마오쩌둥의 번민을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중국군 개입은 한반도 내전을 순식간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 1949년 10월1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누각에서 거행된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선포식장의 마오쩌둥(왼쪽 사진). 1950년 9월28일 수복된 서울의 처참한 광경. 폭격으로 파괴된 기차들 끝자락에 서울역이 보인다. 존리치 기자의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이다.

 

마오 결정은 중국을 위한 선택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숱한 해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한국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을 목표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 3개 루트를 통해 침투하려는 미국의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 전략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들 3개 지역을 차지하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중국본토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과정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설득에 따라 공산진영을 지키려는 마오쩌둥의 고독하고 영명한 결정이라는 정도밖에.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신의 운명을 건 주사위를 한국전쟁을 향해 내던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마오쩌둥의 독단적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과 결과만 얘기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실마리는 ‘조선인 사단’의 귀환 동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전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 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동북 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 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 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쓴 화동 사범대 선즈화 교수는 “북한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정과 지지를 보여준 조치”라고 분석했다.

 

 

 

조선인 해방군 3만여명 北에 넘겨

본격적인 참전준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부터 치밀하게 이뤄졌음이 중국 측 자료에 의해 새롭게 드러났다. 참전이 최종 결정된 10월19일까지 넉 달 가까이 피 말리는 내부투쟁이 중국 지도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7월7일 ‘미국의 조선 무장침략 후의 정세분석과 중국의 국방 증강대책’이라는 국방군사 회의가 열렸다. 13일에는 한국에 투입될 30만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창설이 결정됐다. 가상 적국은 미국이었다.

 

8월4일 당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미국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교전할 작정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전투규모가 크든 작든 혹은 원자폭탄을 사용하든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결사항전의 비장한 선언을 했다. 동북변방군은 출동할 때 ‘의용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인민군 복장을 착용하며, 인민군의 깃발을 내걸고, 주요 간부의 이름도 조선인 이름으로 바꿨다. 해방군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이 주축이 된 의용군은 ‘준비된 군대’였다. 참전 초기 연합군을 무서운 속도로 밀어내며 연전연승한 것은 연합군의 실책도,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매복, 위장 등 한반도 북부 산악지형에 맞는 전술을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기 때문이었다. 30만 의용군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북진 중이던 13만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건 냉전시대 교육의 산물이다.

 

9월 참전 구상이 세워졌지만 시기는 계속 연기됐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 총리와 린뱌오 등 지도부의 거센 반대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중국의 문서보관소인 당안관(?案館)자료와 내부적으로 발간된 ‘건국 이후 마오쩌둥의 문고(文矯)’ 등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혼란을 겪었다. 린뱌오는 “중국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지도 모르고, 승리 가능성이 작다.”라는 이유로 출병을 반대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도요가쿠엔대학 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의 한국전쟁’에서 10월4일과 5일 정치국 회의 참가자 중 찬성과 반대의 세력분포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찬성자는 마오쩌둥 혼자뿐이었고, 불명확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펑더화이 사령관 두 명이었으며, 나머지 7명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中 독자출병 소식에 스탈린 눈물

그러나 마오쩌둥은 10월5일 정치국 회의에서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떤 곤란이 있더라도,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출병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였다. 펑더화이를 의용군 총사령관에 추천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세 번이나 번복된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 이후 냉전체제가 해체돼 한국전쟁의 주역인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사이에 오간 극비문서들이 공개되기 전까지 중공군 참전과정의 진실은 서고 속에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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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중국군.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개월 만인 1950년 10월19일 참전을 결정했다. 참전 중국군은 연인원 500만명에 이른다(왼쪽 사진). 한국전쟁 발발을 첫 보도한 1950년 6월26일자 서울신문 1면. 서울신문은 26일 오후 2시까지 6차례나 호외를 찍어 전쟁 개시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등 진중신문 역할을 했다.

 

김일성에게 베이징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크렘린은 계속 베이징 지도자에게 미루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소식은 나흘 뒤인 10월8일에야 평양에 전해졌다. 초대 평양 대리대사를 지낸 차이청원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것 잘됐다, 잘됐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에 나와 조선 당, 인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라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10월1일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라고 애걸복걸하는 편지를 보낸 상태였다.

 

중공군의 참전결정이 차일피일 늦어진 것은 소련군의 공군지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보병은 중국, 공군은 소련이 맡는다는 것이 애초 양측의 합의사항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모스크바에 보내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준비 불충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이를 ‘스탈린의 배신’이며 추후 중·소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고 본다. 또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독자출병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눈물을 흘렸다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몇 년 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나를 (자국이익만 생각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로 의심했지만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1950년 겨울부터 이 의심은 사라졌다.”라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한 장남 마오안잉(28)을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잃었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남 회령군 ‘지원군 열사능원’에 있다. 36만명에 이르는 중국군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마오쩌둥은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인민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과 북한 양국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中, 3년간 500만명 병력 투입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200만~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3년 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동원됐다는 서방 측 자료도 있다. 중공군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36만 6000명이지만 비전투 사상자를 더하면 사실상 60만~90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군 전사자 3만 3000명과는 비교 불가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이 됐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북한 편들기를 비판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60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일본-타이완-한국전선에 대항하고 완충지대를 갖기 위해서는 설령 사고뭉치라고 하더라도 북한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의 우상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소련 위주의 북한정책이 전쟁 후 중국위주로 전환됐다. 지안롱은 “정전협정 뒤 중국과 북한 수뇌는 언제라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특수한 관계가 계속됐다.”라고 설명했다.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터닝 포인트였다.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을 공고히 했고, 북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이 함부로 못하는 위협적 존재가 됐다. 인도차이나반도 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1971년 타이완을 내쫓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발판이 됐다. 비록 ‘비기는 전쟁’으로 끝났지만 마오쩌둥의 도전과 모험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자신이 사망한 1976년까지 중국과 공산진영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했다.(노주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