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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8 (중화민국의 시련 14 : 국공 내전, 국민당군의 붕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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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8 (중화민국의 시련 14 : 국공 내전, 국민당군의 붕괴)

두바퀴인생 2010. 6. 24. 10:14

 

 

중국의 역사 128 (중화민국의 시련 14 : 국공 내전,국민당군 붕괴)

 

 

 

 

국공 내전

 

태평양 전쟁

국공 내전
Shangtang.jpg
날짜 1927년 4월부터 1936년까지 전면전, 중간에 소강상태 이후 1945년 8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전면전; 1991년에야 종전 선언.
장소 중국
결과 중국공산당의 승리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본토에 수립
중화민국 타이완으로 퇴각
교전국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 중국 공산당 기 중국 공산당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중화민국의 국기 장제스
중화민국의 국기 장학량

중국 공산당 기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기 주더
중국 공산당 기 저우언라이

중국 공산당 기 펑더화이
중국 공산당 기 리리싼
중국 공산당 기 임표
중국 공산당 기 허룽
중국 공산당 기 엽전
중국 공산당 기 서해동

병력
430만 (1946년 7월)
365만 (1948년)
149만 (1949년)
120만 (1946년 6월)
280만 (1948년)
400만 (1949년)

 

 

 

국공 내전(중국어 정체: 國共内戰, 간체: 国共内战, 병음: guógòng neìzhàn)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방전쟁으로도 불리는데, 1927년 4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내전을 말한다. 1927년에서 1937년까지를 제1차 국공 내전, 1946년부터 1950년까지를 제2차 국공 내전으로 부르며, 결국 중국 공산당홍군(紅軍)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로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중화민국타이완(대만)으로 패주하여 쫓겨났다. 이러한 국민당의 패배는 국민당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대부분 농민 출신이라 민폐를 끼치지 않은 홍군의 도덕적인 모습 등에 기인한다. 레닌주의를 계승하여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본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 이론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이다.

 

1936년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부터 1946년 사이에는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과의 중일 전쟁 수행을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휴전과 공동 항일 전선이 이루어졌는데, 이 휴전 기간의 합작은 제2차 국공 합작이라고 부른다.

 

배경

1911년 청조가 무너진 이후 중국은 위안스카이로 대표되는 군벌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군웅 할거하는 군벌의 지배로부터 중국 북부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쑨원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서방 국가들은 별다른 관심은 돌리지 않았고 이에 쑨원은 이제 공산주의 혁명이 완수된 신생 공산 국가인 소련으로 눈을 돌려 1921년 소련에 도움을 요청한다. 1923년 소련의 대표단이 상하이를 방문하고 서로 교류하면서 이제 막 탄생한 중국 공산당중국 국민당은 군벌 세력으로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하고 외세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게 된다.

 

쑨원이 군벌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절실히 요구되었는데 쑨원은 장제스를 비롯한 몇몇 군인을 소련으로 파견하여 군사 기술을 배워 오도록 하는 한편 광저우 교외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자체적으로 현대적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시기에는 공산주의자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국민당 내 공산당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였다. 이 시기 저우언라이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교관이었고 마오쩌둥도 국민당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요컨대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정당 안의 또 다른 정당”으로 활동하고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북벌(北伐, 1926~1927)과 국민-공산당 분열

1925년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군대인 국민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군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국 북부를 국민당의 영향 아래 두기 위해 북벌을 준비한다. 이 무렵 국민당은 우파좌파로 분열되었고 공산당은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 혁명군 내의 공산당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장제스와 공산당 및 국민당 내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와중에도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은 민중의 지지로 후난 성, 후베이 성, 푸젠 성, 저장 성, 장시 성, 안후이 성의 6성을 국민당의 세력 안에 편입시켰으며, 우페이푸(吳佩孚), 쑨추안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고 만주 군벌 장쭤린과 대치하였다.

 

1927년 3월 상하이노동자가 무장봉기하여 장제스 군대를 맞아들였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상공인과 부유층 및 외세 의존 세력은 장제스에게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해 4월 12일 장제스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학살 작업을 벌인 4.12 사건이 터져,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원의 5분의 4가 학살되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제1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되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반공산당 토벌전

장제스는 농촌 지역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키우고 자치 정부(소비에트)를 구성하는 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를 ‘토공전’(討共戰)이라 한다. 공산당의 군사 조직인 홍군은 종종 홍비(紅匪)로 불렸다.

 

이러한 대규모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홍군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력과 물자가 부족한 홍군이 철저한 게릴라식 유격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규모 토벌전에서 국민 혁명군은 종전의 토벌 방식을 바꾸어 대규모 진지, 토치카를 짓고 지구전적인 진지전을 펼쳤는데, 홍군은 이 전술에 말려들어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 전술을 택해 중국 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장정을 감행하고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게 된다. 공산군의 주력은 무사히 옌안에 도착하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군벌 출신장쉐량과 대치하는데, 장쉐량은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정신에 경도되었다. 마침내 1936년 장쉐량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설득,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 전선인 '2차 국공합작'이 성립하게 된다.

 

중일 전쟁

1937년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공산군은 제8로군신사으로 개편되어 국민 혁명군에 소속되지만 사실상 장제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일전을 벌였다.

 

이 항일 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은 일본군에 패하여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갔고 공산군(팔로군, 신사군)은 세력이 점차 커졌다.

 

제2차 국공 내전

일본이 패망한 직후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중국 민중들은 평화와 민주를 외치며 내전 반대 목소리를 높이 부르 짖었다. 이에 양측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개시했다. 1945년 8월 28일 마오는 장제스의 초청을 받는 형식으로 주중 미국 대사 하레와 함께 약 한 달 반 정도 충칭에서 장제스마오쩌둥이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고 10월에 양측의 협정이 맺어져서 내전을 피하고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장제스와 마오의 직접 회담 이외에도 국민당측의 장군 왕세걸 등과 공산당측의 저우언라이 사이에도 협상이 진행되었다. 양측은 10월 10일 '회담기록요강'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쌍십협정'이다. 이 요강에는 남부의 8개 해방구로부터 홍군 철수, 홍군을 20개 사단으로 축소, 공산당과 중도 세력이 참가하는 정치협상 회의의 개최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중경협약은 성실히 지켜지지 않았다. 장제스는 10월 13일, 15일에 수원.산서.장가구 등지의 공산당 근거지에 공격을 가하였다.

 

그래서 양측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미국의 마샬 장군이 중재하여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측을 조율하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이 1946년 1월부터 마샬 주재하에 국민당 정부 대표 장군과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는 정치협상 회의를 개최하여 어느 정도 합의에 성공했다. 이어 10일에는 '군사 충돌 방지에 관한 방법'을 정하고 북경에 군사조처집행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정치협상 회의가 끝난 후에도 국공 대표 각 1명과 미국 대표 1명으로 구성된 3인 위원회는 12일간에 걸쳐 회의를 열어 '군대 개편 및 중공군의 국군 편입에 관한 기본방안'을 토의했다.  마샬의 조정에 의해 정전결정의 조인과 함께 국공 쌍방은 휴전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쌍방은 모든 부대의 이동을 중지할 것도 동의했다.

 

같은 날 정치협상 회의 결과 다음 5개 안이 채택되었다.

1. 각 정파의 민주적인 참여하의 정부 개편

2. 평화적 건국 계획

3. 군대의 국가화 및 정리 축소

4. 국민대회 소집

5. 민주헌법 기초 및 지방자치 허용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은 그 해 3월에 개최된 중국 국민당 2차 전국대표회의 중앙위원회는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고 공산당은 이에 항의하여 결국 합의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2월에는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다수의 정예부대를 동북지역에 보내 지역을 인계.인수하고 그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이에 항의한 인민 권력을 조직하던 중국 공산당은 정전협정 위반이라며 항의하여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그 해 6월 국민당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1946년 6월 국민당은 2백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여 화북과 화중에서 대규모 공격에 들어갔다. 그들은 중부 평원과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 홍군을 몰아냈다. 8월에는 열하 해방구의 중심지인 숭덕을 , 10월에는 장가구를 점령한 데 이어 1947년 1월 산동 남부해방구의 중심지 임기를 점령하였다. 이어 1947년 3월 19일에는 장정 이후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심장부이자 상징인 연안을 점령했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급속히 앙등된 인플레로 인해 국민 정부 지배 지역의 경제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근로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급속히 저하하면서 많은 민중이 기아 상태에 빠졌다. 1946년 1월부터 1948년 8월에 이르는 동안 물가는 67배나 폭등하였고 상해에서는 30만 명이 빈민으로 전락해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그 결과 국민정부에 반대하는 기치를 든 통일 전선이 형성되고 국민당을 부정하는 대중 운동이 일어났다.

 

국민당이 항공기와 중포를 가진 4백만 명의 군대를 가진 것에 비해 공산당은 겨우 120만 명 남짓한 군대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연안에서 시베리아에 걸친 길고 긴 보급로와 미군 장비의 사용으로 인한 재정 부담 및 수송 문제, 그리고 장제스 직계군과 기타 군대 사이의 갈등, 고위층 내부의 권력투쟁, 내부적인 심각한 부정 부패 등으로 인해 심각한 난국에 처해 있었다.

 

초기에 국민당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공산 측보다 우세했고,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다. 특히 1947년에는 후쫑난 장군의 지휘하의 20만 명의 병력이 중국 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공산당은 이같은 국민당 내부의 취약성과 이질 요소를 이용했으며 민중의 정치적 지지에 기반을 두었다. 이 같은 기반은 공산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그 믿음을 잃지 않았다. 공산당의 일차적 목표는 지역을 점령하지 않고도 국민당군을 궤멸시키는 것이다. 우세한 힘을 집중하여 적을 하나하나 궤멸시키는 작전으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려 하고 있었다.

 

1947년 들어 공세로 전환한 공산당 임표의 군대는 국민당군의 많은 부대를 패배시키고 동북 지방의 장춘.길림.심양 등의 3개 도시를 포위했다. 동시에 중부 평원에서도 공산당의 역공세가 시작되었다. '유백승'과 '진의'의 군대는 각각 산서와 산동으로부터 진격하여 1947년 여름 황하와 농해 철도를 건넜다. 같은 해 홍군은 하북.산동.산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내전 개시 이래 처음으로 '석가장'을 탈취했다. 공산당의 군대는 1947년 2월까지 국민당군 56개 여단, 5월까지 90개 여단, 9월까지 97개 여단을 패배시켰다. 이것은 거의 1백만 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국민당군의 1/4에 해당하는 것이엇다. 한편 공산당 군대는 120만 명에서 2백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1948년에는 황하 연변의 대도시 낙양과 개봉을 점령했다. 그리고 1947년 국민당군에게 빼앗겼던 연안을 수복했다. 9월에는 산동의 제남을 점령했다.

 

공산당은 1948년 9월에서 11월에 걸쳐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 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요심전투)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만주 전투에서 장춘.길림.심양 등 대도시를 함락함으로써 전 동북을 장악하였다.  1948년 11월에서 1949년 1월에 걸쳐 내전 이래 최대 규모의 '회하 대전'이 벌어졌다. 국공 쌍방이 각각 50만 명의 대병력을 투입하여 회하와 농해 철도 지역에서 전투를 벌인 결과 국민당군은 진의와 유백승에게 포위되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어서 1월 15일에는 천진이 함락되고 31일에는 국민당군 사령관 '부작의'가 항복 조건을 협상한 끝에 공산당에 항복했다.

 

장제스는 1949년 1월 신년사에서 남경 정부의 권력을 그대로 두는 것을 전제로 하여 공산당측에 화평을 제의했다. 이에 마오는 아래 8개항의 조건을 제시했다.

1. 장제스를 포함한전쟁범죄자 처벌

2.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 군대 재편성

3 관료 자본 몰수

4. 토지개혁

5. 매국 조약 파기

6. 반동분자가 참가하지 않는 정치협상 회의 개최

7. 민주 연합정부 수립

8. 남경 국민당 정부 모든 권력 접수

 

장제스는 1월 화평을 제의하면서 남부에 국민당 세력을 재집결하고 미국의 증원을 받아 정권을 그대로 지탱하려 하였으나 미국은 망설였고 화평 제의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1949년 봄 이래 장제스는 정부의 금괴와 최정예부대를 빼돌려 대만으로 이동할 준비를 서둘렀다.  

 

 

 

국민당군의 붕괴와 대만 철수

 

중국의 내전이 국민당군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여 붕괴 직전에 있었으나 미국은 직접적.대규모적 개입을 망설였다. 미국은 중국 문제의 해결은 중국인 자신에게 부여된 문제이며 자신들은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발뺌했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이미 붕괴 조짐이 역력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원조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극동 정책의 중점을 서서히 중국에서 한반도와 일본으로 후퇴하여 이 선을 연하여 공산주의 봉쇄 거점으로 삼으려 하였다. 미국의 이같은 정책이 장제스의 붕괴를 재촉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창 강을 건너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1949년 4월 공산당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양자강 남쪽을 진격하였다. 그들은 몇 개월 만에 화북.화동 일대의 대도시를 점령하고 화서.화남.서남 등지에서도 진격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였다. 국민당 소속의 지도급 인사 및 군 지휘관들이 싸우지도 않고 대부분 항복을 하였다. 4월 남경 함락, 5월에는 항주.상해.서안.남창.무한.산서가 함락되고 6월과 7월에는 신강.내몽골 등 서북 전체가 점령되었다. 이어서 8월에는 호남.호북.복건이 함락되고 10월에는 광동 등 화남이, 11월에는 다시 사천.귀주, 12월에는 광서의 남녕이 함락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1949년 봄 남경을 포기하고 광동에서 저항하려다 수도를 다시 중경으로 옮겼다가 그 후 성도로 옮겼다. 그리고 1949년 12월 미국의 보호 아래 대만으로 옮기게 되었다.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전토를 장악한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북경을 수도로 하여 중화인민 공화국을 수립을 선포하고 마오짜둥은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국민정부는 공산당이 북경을 점령하기 앞서 고궁의 보물과 도서관의 기증한 각종 서적 및 자료들을 남경으로 운반했다가 다시 구축함에 실어 대만으로 보냈다. 대만으로 이동한 국민정부는 5권 분립의 민주 체제 아래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인의 활약

1945년 이후 국공내전 시기에 동북삼성에서 중공측으로 참전한 조선족의 숫자는 6만 3천여명으로 연변에서만 3만 5천여명이 참전하였다. 이는 연변 총참군의 85%에 달하는 숫자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국공 내전시 조선족 병사는 3,550여 명으로, 길림성에서만 2,262명으로 조선족은 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중국혁명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북한도 중국공산혁명을 위하여 기여를 했는데, 직접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에 참여하였고, 북한지역에 중공군의 후방기지를 세워, 훈련기지와 병원 등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만포진, 청진, 정주 등에 주둔하였다. 북한에 주둔했든 중공군의 숫자는 47년 당시 5만 ~ 7만 5천에 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중공군은 국민당군에게 포위되어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