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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7 (중화민국의 시련 13 : 태평양 전쟁)

두바퀴인생 2010. 6. 24. 03:19

 

 

 

 

중국의 역사 127 (중화민국의 시련 13 :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Douglas MacArthur lands Leyte1.jpg
필리핀에 상륙하는 미군
날짜 1937년 7월 7일 ~ 1945년 9월 9일
장소 태평양 지역
결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에 따른 종전
이유 미국의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에 대한 일본의 반발
교전국

미국의 국기 미국
* 필리핀의 국기 필리핀
영국의 국기 영국
* 영국령 인도 제국의 국기 영국령 인도 제국
네덜란드의 국기 네덜란드
*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국기 네덜란드령 동인도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국기 뉴질랜드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비에트 연방}

일본 제국의 국기 일본 제국
* 만주국의 국기 만주국
* 몽강국의 국기 몽강국
* 왕징웨이 정권의 국기 왕징웨이 정권
타이의 국기 타이

지휘관

미국의 국기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의 국기 해리 트루먼
미국의 국기 체스터 니미츠
미국의 국기 더글러스 맥아더
중화민국의 국기 장제스
영국의 국기 윈스턴 처칠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존 커틴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일본 제국의 국기 히로히토
일본 제국의 국기 도조 히데키
일본 제국의 국기 야마모토 이소로쿠
만주국의 국기 장징휘
만주국의 국기 아이신교로 푸이
타이의 국기 쁠랙 피분송크람

병력

미국의 국기 미국

일본 제국의 국기 일본 제국

피해 상황

미국의 국기 미국 106,207명 전사, 248,316명 부상 및 실종.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 380만 명가량 전사, 1500만 명가량 민간인 사망.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비에트 연방 12,031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
오스트레일리아 17,501명 전사.
영국의 국기
영국 86,838명 전사(인도 식민지).

 

일본 제국의 국기 일본 제국 1,740,955명 전사, 393,000명가량 민간인 사망.

US landings.jpg
태평양 전쟁의 상황도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중화민국을 침략한 이후 1941년미국은 일본 제국에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반발한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참전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태평양아시아의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영어: Pacific War, 일본어: 太平洋戦争 (たいへいようせんそう))이라 한다.

일본과 중국의 충돌

19세기 말 중국의 혼란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화로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1910년) 만주를 제국의 영향권에 넣는 동안 중국은 군벌의 난립으로 그 영향력이 약해져 있었다.

 

이 상황은 1920년대에 들어와 조금씩 바뀌게 된다. 192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북벌에 나섰고, 장제스는 군벌들에게 충성을 요구하게 된다. 위협을 느낀 장쉐량이 장제스 쪽으로 기울자, 일본은 만주 사변을 통해 푸이를 황제로 하여 만주국을 세우게 된다.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한다.

 

중일 전쟁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순식간에 베이징을 점령하고 더나아가 중화민국수도였던 남경을 점령한다 거기서 일본군은 남경 대학살을 저질러 지금까지도 이슈가 되고있다. 하지만 중화민국도 수도를 내륙도시인 충칭으로 이전하고 영국령 버마와 연결되는 루트로 미국과 영국에 무기지원을 받았으며 곳곳에서 중국 개릴라들이 나타나 일본군을 괴롭혔다. 결국 중일전쟁은 장기적으로 봉착하게된다

 

전쟁의 확전

일본중일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전쟁을 위한 지하자원 및 원료의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게다가 미국중일 전쟁을 치르던 일본 정부에게 중국 등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대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일으킨 전쟁이기에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미일 통상 조약은 파기되어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으며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철광 등 지하자원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철·석유·고무 등 전쟁 공업품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이나 만주 등에서 나오는 지하자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한다.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침공이었다. 석유·고무·철광 등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이다. 그 당시에 유럽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군이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등을 모두 무너뜨리고 파죽지세로 서진, 프랑스를 정복하여 페탱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괴뢰 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 영국에서 망명 정부를 세우고 독일에 항전 중이던 드골로서는 인도차이나를 도저히 사수할 수 없었다. 결국 인도차이나에 있던 프랑스 세력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된다.

 

인도차이나 점령이 성공한 후에도 일본은 더욱 많은 곳을 점령(또는 침공)하길 원했다. 그리고 1941년 군인 출신인 도조 히데키를 수상으로 한 군부 내각이 들어섰다. 이들은 군부의 여러 인사 중에서도 매우 강경파로서 미국과 전쟁도 불사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만 4년 8개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의 참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가라앉은 애리조나호

 

 

 

1941년 12월 8일(화와이 시간 12월 7일), 일본제국 연합함대 기동부대는 화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같은 날 미.영도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그 다음날 국민정부도 일본.독일.이탈리아에 선전포고 했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말미암아 국내 여론이 비등하자,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참전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세계 1차대전 이후로 기술의 발달, 군부대의 양적 발전에 비해 전선의 전술적으로 발전이 없던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연이은 전투에서 후퇴를 반복해면서 전세는 미국에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는 듯하였으나, 전쟁을 거듭할수록 전술적 교리가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5일), 과달카날 전역(1942년 8월~1943년 2월) 등의 국지적 승리를 기반으로 미국은 역습을 계속하여 전황은 이후 일본에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게 전개되었다.

 

국민정부는 중일 전쟁 발발 이래 지금까지 대일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국민당 정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장제스의 직속부대들을 버마전선으로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해 나아 갔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2년 전인 1939년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초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세계는 이른바 추축국(독일.일본.이탈리아)과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의 둘로 갈려 전면적으로 대결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제 중일 전쟁은 중국 대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세계 전체의 구조적 변화의 일부로 변한 것이었다.

 

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군은 각지에서 거침없이 진격을 계속했다. 1941년 12월 25일 홍콩과 구룡 반도를 함락한데 이어 다음해 1월에는 라바울이 함락되고 마닐라도 점령되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작전과 병행하여 자바 공략작전도 행해졌다. 일본군은1942년 3월 바타비아 해전에서 연합군 함대를 격멸함으로써 자바를 비롯한 남방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연전연승 파죽지세로 공격을 계속한 일본군은 전승에 들떤 나머지 작전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했다. 42년 2월 미얀마의 몰매인, 3월에는 랑군, 5월에는 단달레이를 점령하고 미얀마 점령을 달성하엿다. 또 인도양의 안다만, 니코르바 두 섬을 점령하였고 해군 기동부대는 3월들어 스리랑카 섬을 공습하였고 이어 솔로몬 제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1942년 미 해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2월에 마셜 군도, 3월에 뉴기니아 라메.사라모아에 공습을 감행하였고 4월 18일 16대의 B52 폭격기가 도쿄.나고야.고베를 공습했다. 42년 6월 5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미 태평양 함대의 반격으로 항모 4척, 항공병력 태반을 잃고 치명타를 입음으로써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1943년 2월 일본군은 남태평양 과달카날 섬에서 패퇴하였고 유럽의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항복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제2차 세게대전이 군사적 전환점에 이르렀음을 뜻하며 중국 전선에서도 점차 일본군을 제압할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미국은 조셉 스틸웰을 군사고문관으로 중국으로 파견하여 버마-인도전선 지휘를 하였고, 미 공군은 중국 전선으로 지원하여 중국 국민당 공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워 제공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미 공군 의용대대는 플라잉 타이거즈라 불리며, 이들은 연합국이 일본군에 연패하던 태평양 전쟁 초기 몇 개월동안 연합국 부대중에서 유일하게 주목할만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연합국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이들 플라잉 타이거즈 대대는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해체되었고, 이후 중국대륙내에는 미육군 제 23 전투기 집단으로 대체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이 된 국민정부에 무기를 원조하였고 1943년에는 중국을 기지로 하는 미국 공군이 점차 증강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강서성의 수천 기지에서 출격한 B29 폭격기 등 15대가 대만의 신죽에 첯 공습을 감행하였다. 이어 1944년 8월 중국 오지의 사천성 성도 기지로부터 B29 편대가 일본의 북규슈에 폭격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전선의 제공권은 완전히 미국 공군이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1944년 중국 전선에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최후의 대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북경-한구간, 한구-광주간의 두 철도를 확보하고 남북을 달리는 주요 간선을 연결시킴과 동시에 계림.유주 등의 공군 기지를 파괴할 작정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에 국민당군은 쉽게 무너져 8월에는 계림이 함락되고 1월에는 유주가 점령되었다.

 

6월 하순에는 미군 장교.사찰단이 비행기로 연안에 도착, 공산당 지도층과 면담을 가졌다. 7월 루스벨트는 팔로군을 포함한 중국군과 중국 주둔 미군을 지휘하고 작전을 통솔하기 위해 스틸웰 중장을 지휘관으로 임명하도록 제의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지휘권이 스틸웰에게 넘어가면 공산군에 원조가 주어질 것을 염려하여 스틸웰의 본국 송환을 요구함으로써 스틸웰은 10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선이 교착 상태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부패하고 무능하였으며 전투력은 형편없었고, 지방 주둔 지역에는 국민당군이 민간인들의 식량이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하는 등의 범죄가 들끓었다. 거기다가 국민당군은 강제징집을 위해 시골이나 농촌등 마을에 습격하는일이 잦았는데, 이때문에 마을사람들은 강제징집에 반발하여 '자경단'을 조직하고 국민당군에 대항하는 등 민란이 일어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었다.(대표적인 사례가 1942년 감숙성 지역에 일어난 농민반란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무능함과 부패, 잦은 수탈등 때문에 중일전쟁 전후 훗날 국공내전때 민중들의 민심은 장개석의 국민당이 아닌 모택동의 공산당 세력으로 돌아서 지지하는 경우로 이어지게 된다.

 

내부적으로도 국민당은 크게 흔들렸었다.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자신의 얼마 안 남은 영역에 틀어박혀 단독으로 베이핑(오늘날 북경)의 일본군 사령부와 협상을 벌여 평화상태를 유지하려 애썼고, 국민당 임시 수도인 충칭을 중심으로 쓰촨성윈난성 지역의 지방 군벌들과 장개석의 알력 다툼은 극심했었다.

 

대륙타통작전

1944년 4월, 일본군이 전황을 타개하고자 중국 북부 점령지와 남부 하이난섬 일대의 상륙지점을 연결하는 대륙타통작전 '이치고 작전'을 개시하자, 중국군은 어김없이 대패를 당하는등 중국군은 무려 30만이라는 병력이 희생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못한거 뿐만 아니라 전투력도 허술했었으며, 지휘관조차도 부패하고 무능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계획한 '이치고 작전'이 성공하게 되면서 중국 국민당 내에는 '붕괴론'위기까지 몰리고 있었다.

 

이후 1944년의 미군의 사이판 상륙, 이오지마 점령(1945년 2월~3월) 등으로 태평양에 항공 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B-29 등의 고고도 폭격기를 동원한 일본 내 대도시에 대한 전략 폭격을 개시하게 되고 급기야 45년에 들어서자 일본의 패색은 짙어지고 있었다. 이미 43년  11월 카이로 선언에서 중국은 만주.대만.팽호도 등의 반환을 보장받았고 45년 2월 얄타에서 루스벨트.처칠.스탈린 세 거두가 모여 이른바 얄타 회담이 열렸다. 전쟁 완결을 위한 계획과 전후 처리 문제, 그리고 전쟁전략과 외교전략이 점차 각국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데 얄타 회담에서 중국에 대해 불리한 결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본의 전력을 과대 평가한 루스벨트가 소련의 참전을 요구했으며 이에 응한 스탈린은 참전 대가로 중국을 대상으로 엄청난 요구를 해온 것이다. 사할린 남부의 치시마 열도 반환, 대련항의 소련 우선권 인정, 여순 해군기지의 조차권 등이 골자였다. 이 결정은 중국의 양해 없이 3거두 사이에 승인되었다. 5월 베를린이 함락되고 6월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었다.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 해 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각기 중요한 회의를 열어 당의 방침을 결정했다.

 

연안에서 열린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는 항일 전쟁을 총괄한 뒤 구체적인 강령으로 '일본침략자 타도, 국민당 일당독재 즉시 폐지, 항일 정당 및 무당.무파의 대표적 인물을 포함한 거국일치 민주적 연합정부 수립'을 호소했다.

 

중경에서는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려 장제스는 여기서 북벌 완성 이래 17년간 지속된 훈정기를 끝내고 그 해 11월 12일에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헌정기에 들어갈 것을 공표하였다.

 

마오는 "장제스의 국민대회 목적은 연합정부의 거부, 독재 지배의 준비, 내전의 합법화를 기하는 데 있다."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이렇게 국공간에 대립이 팽배한 가운데 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에는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일에는 소련이 참전하자 일본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마침내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 방송을 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유조구 사건 이래 15년, 노구교 사건 이래 8년, 청일 전쟁 이래 50년간 지속된 일본의 침략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

 

영향

종전 후 & 영향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대륙 내에서는 주요도시들(해안지역에 주로 위치)은 일본제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고 수많은 중국인들은 희생을 당했으며, 중국대륙에서 정부군이었던 국민당군은 부패하고 비리만 저지르는 등 무능할뿐만 아니라 군대편제 조직도 엉망진창이었다. 반면, 공산당은 겉으로는 일본군과 싸우는 척하면서 뒤로는 힘을 비축하면서 민심지지를 얻어갔었다.

 

중일전쟁 종전 후 평화를 바라던 중국인들의 희망대로 중국을 다시 내전상태로 빠뜨리지 않기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간의 회담이 열리는데, 여기서 '쌍십협정'이라는것을 체결한다. 그러나, 국민당 장개석은 이 협정을 무시하고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국공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민심은 국민당의 부패하고 무능한 행태와 중일전쟁때 일제에 부역, 협력한 매국노 한간처벌에 미미했던 국민당 정부의 행동 등에 등을 돌려 공산당편에 붙어 결국 민심의 지지를 얻지못한 국민당은 중일전쟁 이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하게 되어 타이완으로 쫒겨나게 된다.

 

중일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전쟁이 일어나고, 1941년 태평양에서도 전쟁이 크게 일어난 탓에 중일전쟁은 상대적으로 역사에서 큰 비중을 갖지 못하고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본제국이 중국대륙을 침략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은 아예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을것이다. 그랬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전환이 되었기 때문에 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1939년 9월 1일 일이 폴란드 침공하였던 일을 기준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구분짓는 유럽 중심 역사관에서 벗어나, 중일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시작으로 보는 역사관이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