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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6 (중화민국의 시련 12 : 중일 전쟁) 본문
중국의 역사 126 (중화민국의 시련 12 : 중일 전쟁)
중일 전쟁
중일 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항일 전쟁(중국어 간체: 中国抗日战争, 정체: 中國抗日戰爭, 병음: Zhōngguó Kàngrì Zhànzhēng), 일본에서는 일중 전쟁(일본어:
1931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항복과 함께 1945년에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이는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대두가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37년 이전에는 양쪽이 소규모, 지역적, 다양한 이유로 전투를 벌였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나, 진주만 공격 후의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4년즈음에 일본군은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못하고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중일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 1940년의 제국주의 일본의 확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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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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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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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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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상황 | |||
군인 322만 민간인 1,753만 |
군인 190만(전사자 48만 포함) |
배경
일본의 상황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구 독일제국령의 태평양 식민지들을 접수하고,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무렵 일본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로 경제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20년대말에 경제 대공황을 맞게 되면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극우 군부세력들이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이어 일본제국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더욱 확보하고자 침략전쟁의 길을 걷게된다. 자원이 풍부한 만주지역을 얻기위해 전쟁할 구실을 잡기위해 만주군벌 장작림 폭사 사건등을 조작하였고, 만주침략에 반대하였던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을 암살하는데 이어 1931년 선전 포고도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그리고 만주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일본제국은 괴뢰국가 만주국을 수립하게 된다. 이어, 경제대공황을 극복하고자 '일-만 블록경제'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한편, 국제연맹은 '만주를 불법침략, 점령한 일본제국의 만주지역 철수'를 결의하자, 일본제국은 1933년에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였다.
중국의 상황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사회질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반면에, 여러 각지역은 여러 군벌세력들이 득세를 하였고 군벌세력들은 온갖 갖은 수탈과 함께 열강세력에 빌붙는등 매국행위들을 해왔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산둥지방의 독일제국의 이권을 일본제국에게 양도한다.'는 파리 강화 회의의 내용이 알려지자, 1919년 베이징 지역에 학생들이 중심으로 결집, 대규모의 '반군벌', '반제국주의'성향의 운동이 일어났다.(이를 5.4 운동이라 한다.)
1919년 5.4 운동이후, 중국에서는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광둥지방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창당되었고, 1924년 여러 지역에 널리 퍼진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 혁명','제1차 국공합작'을 전개하였다.
국민당의 당수 손문이 사망한 이후, 장개석이 국민당 당수가 되어 손문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전개하여 추진하였다. 장개석의 북벌운동은 북양군벌세력들을 몰아내고 사실상 중국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이내 곧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제국의 침략이 본격화와 되어가면서 장개석은 중국공산당을 몰아내는데 차질이 생기게 되어 지방 여러세력 군벌들과 연계를 하게 된다.
만주사변
중국에 대한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에 대해 중국은 그 조약의 폐기또는 무효를 주장하고,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만주에서는 일본의 후원을 받았던 봉천파 군벌 장작림이 친일적 성향을 보이다가 1928년 일본군에 의해 열차안에서 폭사당하고, 그 후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은 반일 운동측으로 돌아서게 된다. 장학량은 국민당의 장개석과 손을 잡는데, 이때 일본 제국은 대륙에서 완전한 식민지를 얻는 한편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다른 대륙 정책의 근거지로 삼기위해 만주 지배를 계획한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관동군은 봉천 교외 유조구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해놓고, 이것을 '중국군의 행동'이라 몰아붙히고, 이를 구실삼아 만주를 침략한다. 이어 1932년 2월에는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한다. 이듬해, 일본 제국은 과거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수반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다. 그렇게 됨에 따라, 만주가 일본의 자원 공급지이자 경제시장, 군사 기지 역할 등을 하게 되면서 일본인들은 만주로 적극적으로 침략하게된다.[2]
국공내전
1924년, 군벌과 열강세력들을 내몰자는 목표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함으로써 북벌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28년 국민당 장개석이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국공합작은 완전 결렬되었고, 이후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전을 펼쳤다.
중국 공산당 장정
1931년 난창 지역에 중국 공산당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공산당의 세력이 넓혀지는것을 우려한 국민당은 무려 5번이나 공산당 지구를 포위하고 토벌전을 펼쳐나아갓다. 제1회 토벌은 1930년, 2회와 3회는 1931년, 4회는 1932년 6월에 이루어졌으나 모두 국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던중 1933년 10월에 100여만명의 국민당 군대가 제5회 토벌을 시작했다. 여기서 공산군은 패전에 직면하게 되고, 1934년 10월에 10만여명의 공산군은 강서성으로 후퇴하며 서쪽으로 장정을 시작했다. 오랜기간동안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무려 9600km라는 장정 끝에 1935년 10월에 섬서성 옌안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서 살아남은 공산군은 약 2만여 명뿐이었다.
시안사건
1936년 12월 12일 중국 섬서성 중부의 도시 시안에 머물고 있던 장개석이 갑자기 장학량에 의해 체포, 감금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중국 공산당에 대해 제6회 토벌을 위해 이들 군대를 대규모로 동원했었다. 그러나, 이들 양군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내전중지, 항일'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켜 장개석을 인질로 체포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반(反)장개석을 주장하는 내부세력들을 억누르고 국민당에서는 친일 반공파를 억누름으로써 장학량과 장개석 사이에 타협이 성립되고, 장개석은 25일 난징으로 돌아왔다. 시안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 항일전선에 기반이 된다.[3]
경과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서쪽에 있는 펑타이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중국군사이에서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무력충돌했다. 여기에서 일본군 현장 지휘부는 독단으로 "중국군이 일본 병사를 납치해갔다!"는 주장을 펼치며 중국군에게 공격을 가하는데, 이러한 지시를 내린자는 무다구치 렌야였다.
전투는 처음에 국지에 제한된 전투였고, 서둘러 제안한 교섭으로 양측은 협정을 맺고, 이 사건을 덮어두기로 결정하여 사태를 되돌려놨지만, 전쟁발발의 구실을 찾던 일본군 상층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7월 28일,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개시했다. 일본은 공격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뒷날 일본군에 의한 조작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국공 합작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 휘하의 변구(邊區)정부로 격하되고 1937년 8월 중국 공산군의 홍군(紅軍)이 국민 혁명군 제 8로군으로 개칭, 국민당 정부 군대로 합류하였다.[5] 다음달 9월 23일에는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어 항일전쟁 체제를 정비한다. 그러나, 제2차 국공합작은 머지않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균열은 차츰 커져가면서 이들은 서로 다투면서도 각자 항일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국민당 정부군은 정면전장으로 지구전 형식으로 전개하였고, 공산군은 유격전을 벌이면서 적후방의 전장으로 나뉘어 치러졌다.
미국과 소련의 중국지원
미국의 지원
미 의회는 피트만 법을 통과시켰고, 이 법을 통해서 중국의 은을 미국의 금과 바꾸는 것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중국 국민당은 이법을 통하여 필요한 군수물자를 살 수 잇는 화폐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난징대학살이후 1940년 일본제국이 인도차이나반도에 침략하고, 나치 독일-이탈리아와 추축국 동맹을 맺자, 미국의회에서 대일수출을 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이에 곤란해진 일본제국은 제재를 가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중화민국을 묶어 'ABCD 포위망'이라고 가칭하며 일종의 배후처럼 선전해댔으며,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어 이들 국가들과 맞서게 된다.[7]
소련의 지원
일본군이 화북지방을 침략하자, 중국과 소련사이에 협상이 급히 시작되었다. 협상 결과 200대가 넘는 항공기와 화포, T-26전차등 다른 물자들이 소련으로부터 원조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훈련된 의용 파일럿들도 극비리에 중일전쟁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극비리에 소련이 원조한 작전을 제트작전이라 부르는데, 이와 동시에 중국과 소련간에 상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전쟁 초기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근대화된 산업력에 바탕을 둔 잘 훈련된 30만 여명 이상의 정규군과 일본군 장교에 의해 지휘되는 만주국출신 만주인 및 몽골인 부대 15만 여명 이상, 그리고 약 200만 명에 가까운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세계 3위의 막강한 해군력과 육군및 해군 항공대가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 국민당은 숫적으로는 약 400만 여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현대식 무장을 제대로 갖춘 부대는 약 10만 여명 이상인 장개석의 직속부대뿐이었다. 나머지 군대는 지방 군벌들 세력을 주축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변변한 장비조차 갖추지도 못하였다. 더구나 외부로부터의 원조로 보급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던 국민당군은 변변한 해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항공력 역시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했었다. 7월과 8월에는 베이징, 톈진등 손쉽게 점령하는 등 일본군은 기세등등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8월에는 중국 최대 항구 도시인 상하이를 상륙작전하여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9월부터는 일본군이 화북지방에서 남진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철도를 따라 3갈래로 뻗은 이 진격은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과 주로 야간에 통신망과 보급로를 차단하는 게릴라등의 활동으로 11월에 이르자,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상하이 전투 & 삼광 작전
전쟁초기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수뇌부들은 '2~3개월정도면 중국대륙 전역을 점령해 끝낼수있을거같다.'라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리고, 8월에 상하이를 상륙하여 공략에 들어갔는데, 상하이에서의 중국군 저항은 예상외로 격렬했다. 특히 '오송 상륙 전투'에서 일본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1930년대에 중국내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팔켄하우젠 장군과 젝트 장군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해놓는데 추진하였고, 장개석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대로 받으면서 육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1930년대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과 추진으로 설치한 벙커밭을 뚫기위해 돌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개석의 직속군대의 정예 제 88사단이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놓아,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었다. 그렇게됨으로써 3개월동안의 전투끝에 지원부대에 의해 증강된 일본군은 11월에 겨우 상하이를 점령한다.
상하이 전투에서 전쟁의 범위가 확대되어 장기화 되어가자, 일본군은 적개심이 불타올랐고 무고한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가는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작전'을 개시하면서 살육전이 일반화 되어간다. 1937년 12월, 상하이 교두보를 벗어난 일본군은 예정도 없었던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으로 향한다.
난징 대학살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할동안, 중국 국민당 정부는 수도 난징을 버리고 충칭(중경)으로 옮긴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성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속에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명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갈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등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고 권고 및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성을 지키고있던 탕셩즈(唐生智)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물며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방식으로 나가려고 했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을 돌파하여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당시 난징성에 방어하고 있던 국민당 군대 약 15만여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중국군의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 되었던 것에 큰 한몫을 했다. 즉,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 해본채로 혼란속에 빠져들었다.
그무렵, 난징성이 함락되기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는 자신의 휘하 중국군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을 쳤다. 여기서 피난 떠나지 못한 채 남아있던 5~60만의 난징 시민들과 중국 군인들은 공황상태 속에 빠지게 되고, 1937년 12월 13일부터 4~6주간 일본군은 중국 민간인들 및 중국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 방화, 강간등 남경 대학살로 30만 이상이 살육되는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전쟁의 고착화와 전쟁의 확대
전쟁의 고착화
1937년~1938년동안 일본군은 중국의 여러 도시들에 대해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중국의 주요 해안가 도시들을 점령하고자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일본군 수뇌부들은 전쟁 첫해에 그들이 이뤄내고자 했던 성과에 대해 불만족이었다. 그들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이 중국내의 내분을 통합하기 전에 장개석의 조직화된 직속부대를 분쇄하고자 했으며, 중일전쟁이 일본경제에 부담을 끼치기 전에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랬엇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의도는 중국이 시간을 벌기위해 공간을 포기하는 등 결정적 전투를 회피하는 등 지구전 전략을 나아갔기 때문에 전쟁은 점점 장기화 되어갔다.
1937년 말까지 일본군은 화북 전선에서 산서.산동.하북.치치하르.수원을 확보하였다. 다음해인 1938년 5월 화북에서 남하해온 북지나방면군과 상해 전선에서 북상한 중지나방면군의 공격으로 서주가 함락되었다. 이어서 10월 일본군은 무한을 점령하였다. 같은날 남쪽 광주가 함락되었다. 당시 마오는 항일 전쟁이 지구전임을 강조하며 '지구전론'을 발표하였다. 마오는 일본이 군가력.경제력.정치 조직에서 강하지만 야만적이며 인력.물자도 불충분할 뿐 아니라 국제관계도 불리한 입장이며 이에 비하여 중국은 지구전을 짙탱할 조건이 되어 잇으며 세계 열강들이 중국을 원조할 것이다고 생각했다.
한편, 중국은 주요 항구도시 상하이와 수도 난징을 잃어버린 것이 큰 타격이긴 했으나, 중국군은 아직도 대부분의 항구와 4개의 대외 주요보급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하이퐁에서 쿤밍간 이어지는 철도와 양곤과 라쉬오를 거쳐 쿤밍에 도달하는 철도 및 도로, 그리고 러시아에 이르는 2개의 도로가 주요 보급로였다.
1938년에 일본군의 주된 목표는 중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차단하는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첫 번째 목표는 중요한 철도중심지인 쉬저우 시를 점령하는것이었다. 중국군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북쪽으로부터 남하해 온 두갈래의 공격에 의해 일본군은 5월에 이르자, 쉬저우 시를 거의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6월에는 한커우로 통하는 철도를 봉쇄하고자 정저우 시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진격은 중국군이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려, 주변 지역을 강물로 범람 시켰기 때문에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패배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본군은 장개석 정부의 수도인 한커우로 공격을 더욱 가열시켜, 8월에는 4만 여명 이상의 병력을 영국령 홍콩으로부터 20마일쯤 북쪽으로 상륙시킴으로써, 광동지역을 쉽사리 점령했다. 이 때문에 한커우는 그 주요 보급로가 차단당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9월에 가서야 장개석은 주요산업시설들을 보다 내륙으로 이전하는 한편, 수도를 충칭으로 옮겼다.
이렇게 되면서 1938년말까지 일본은 중국의 해안 주요도시들을 거의 장악했었으나, 그 지역 내에 아직도 계속적인 난관에 부딪쳤엇다. 각지역마다 게릴라의 활동은 나날이 격화되어가고, 일본의 비 인도적인 행정통치와 점령지 주민들에 대한 갖가지 횡포등으로 주민들의 적개심 또한 깊어만 갔다. 쉽사리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던 중국군은 계속 저항을 하고 있엇고, 이와 동시에 미국이 중국 국민당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많은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원기를 돋우어 주고 있었다.
2년 만에 신속한 승리를 쟁취하고자 했던 당초의 의도가 좌절된 일본 제국은 1939년에 접어들면서 최소의 군사력으로 전략적 요충지를 점거하는 봉쇄전술로 전환하게 되었다. 즉, 중국의 해안지대를 거의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의 보급로를 봉쇄시키는 '경제적 교살정책'으로 바꾼것이다. 그러나 넓은 대륙을 바탕으로한 중국군과 중국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의 양상은 계속지속되어 고착화 되어갔다.
마오의 지구전론은 결과적으로 정확하게 일본군의 전략을 좌절시키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인력.불자가 충분치 못하여 중국에서 점과 선밖에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고 내륙에서는 항일 근거지가 계속 확대되어 갔으며 일본군은 점차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무한이 함락된 후 망국론이 대두하고 대지주.대자본가들 사이에 격심한 동요가 일고 있을 무렵인 1938년 12월 국민당 지도자 '왕조명'이 중경에서 탈출하여 하노이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과 교섭한 끝에 1940년 3월 남경에서 국민정부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모두 일본 공작에 의한 것으로 형식적으로 국민정부의 '남경 환도'라 불리는 왕조명 정권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사실은 친일 괴뢰 정권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왕조명 자신도 처음에는 일본에 기대를 걸었으나 교섭간 일본측의 과도한 요구와 자신을 친일 정권의 도구로 밖에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였고 중국인들도 왕조명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장제스는 왕조명이 중경 탈출 직후 그의 당적을 박탈하였다.
1937~1938년에 걸친 국공합작의 통일 전선은 비교적 성공한 시기였다. 장제스는 항일영웅으로 추앙되었으며 공산당도 국공합작.장제스 옹호를 부르짖었다. 이때가 국공합작의 절정기였다. 1938년 들어 일본군의 공세가 주춤해지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접어들자 중국측의 정치 상황도 차츰 변하기 시작하면서 국공 간에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화북.화중에서 팔로군과 신사군이 활약하여 근거지를 확대해 감에 따라 장제스는 자기 지배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국민당은 1938년 후반 은밀히 '이당활동제한판법'을 제정하여 공산당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그 해 12월 하북성 중부에서 국민당의 부대 5천 명이 팔로군의 후방에 기습을 가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서 39년에서 40년에 걸쳐 곳곳에서 국공 양군 사이에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마오는 국민당의 이같은 태도 변화에 대하여 '상대방이 도발하면 우리도 도발한다'는 단호한 원칙을 세웠다. 1940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에는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3개의 지역이 형성되었는데,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 중경을 수도로 한 국민당 정부 지역, 연안을 중심으로 공산당 섬강연변구 등이다. 마오는 대장정을 끝낸 후 연안에 머물며 점차 체력을 회복하면서 미래를 구상하며 <실천론>과 <모순론>을 저술하였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지 2~3년이 지나 교착 상태에 빠지자 마오의 팔로군은 일본 점령 지역의 배후에서 항일 근거지를 확대했으나 국민당는 철수한 그대로였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항일을 결의한 청년들이 속속 연안으로 몰려들었다. 연안에는 군정대학과 일반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군정대학은 그 후 약 10만 명의 공산당 정예 간부를 배출하였다.
이같은 공산당의 세력 확산을 염려한 장제스는 1939년 봄 호남의 평강, 호북 및 하북에서 팔로군을 공격하였고 11월에는 하남을 공격하여 연안 근거지 남부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마오의 세력은 점점 확되되었고 팔로군도 증강되었다.
전쟁의 확대
1940년
1940년 이후 중국대륙은 일본군 점령지구, 충칭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 정부, 옌안을 중심으로하는 공산당의 섬강녕변구등 3개지역으로 크게 나뉘었다. 전쟁이 고착화되어가면서 계속 시일만 끌어갈 뿐이었다. 그럼에 따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세력이 점점 커져가고 팔로군도 1940년에는 40만 명으로 불어났고, 신사군이 2만에서 10만으로 급증되었다.
팔로군은 화북의 다섯 성에서 이른바 '백단전투'에서 일본군의 교통.통신망을 마비시키고 일본군 25000여 명을 크게 무찌르는등 성과를 보였다. 이 작전은 8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대규모 작전이었다. 철도 480킬로미터를 파과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41년 ~ 1943년
1941년 10월,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계열의 신사군간의 싸움인 '환남 사변'이 일어나게 된다.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양쪽이 교섭 끝에 북상하던 신사군의 일부가 국민당군에 의해 기습을 당하게된다. 국민당과 공산당 양군은 7일동안 밤낮으로 전투했고, 이 전투에서 신사군 9천여 명이 전사했고 1천여명이 간신히 탈출했다. 군장 '섭정'은 포로가 되고 부군장 '항영'은 전사했다. 이 '환남 사변'으로 공산군은 커다란 충격을 맞게 된다. 그 후 장제스는 공산군을 더욱 옥죄었고 공산당은 이같은 사태에 직접적인 보복 행동으을 삼가하는 대신 중국 여론에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여 국민당군의 잔악함과 무능과 부패를 폭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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