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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1 (중화민국의 시련 8 : 장제스 국민당의 일당 독재) 본문
중국의 역사 121 (중화민국의 시련 8 : 장제스 국민당의 일당 독재)
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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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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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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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중화민국 (타이완) |
중화민국
중화민국(中華民國)은 1912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던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이다.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통치 시기를 제외해, 국내외의 요인으로부터 국내가 분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가 같은 시기에 2개 존재하는 시기도 있었다.
중화민국은 중앙 정부가 태평양 전쟁 후의 국공 내전에 패배하여, 1949년 타이완 섬과 그 인근 섬 지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고 수도 역시 타이완 섬의 타이베이 시로 옮겼다.
건국과 내란
중국에서는, 1911년에 발발한 신해혁명을 계기로서, 1912년 1월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고, 그해 2월에 선통제가 통치권을 포기함으로써 청(淸)나라가 막을 내렸다. 그 사이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이 있었고, 이 회담의 합의에 따라 위안스카이가 임시정부의 대총통(大總統; 국가 원수직)이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절대 권력을 행사해 국내를 안정시켰지만, 제정 선언(帝政宣言; 황제에의 취임을 선언; 중화제국 수립)이나 일본 제국의 압력에 못 이겨 21개조 요구(21箇條 要求; 중국에서 일본 제국의 이권을 보장하는 내용)에 비준하는 바람에, 국내외적으로 비난이 쇄도했다. 그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직을 사임해, 실의를 안고 죽었다.
위안스카이의 사후, 중국은 군벌의 춘추 전국 시대(1916~1928년)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 암흑기에 21개조 폐기를 거국적으로 요구하는 5·4 운동(1919년)이 일어나고, 루쉰,천두슈 등이 주도한 신문화 운동(新文化運動)이 꽃피웠으며, 쑨원은 1919년 중국 국민당을 창당한 데 이어 중국 공산당(1921년 창당)과 국공 합작을 결성하였다.
1925년 쑨원이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북벌의 국민 혁명이 시작되었다. 쑨원에 이어 국민당을 이끈 장제스는 1927년 국공 합작을 해소한 후 국민당 단독으로 북진을 계속하여 1928년 베이징에 입성함으로써 중국의 대부분을 통일했다. 한편, 1927년 이후의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국민당의 공격을 받으면서 장정을 행해, 섬서성(陝西省)에 근거지를 지었다.
국민 정부와 동란
1928년의 북벌 완료 후, 장제스의 국민당은, 난징을 수도로 한 국민 정부를 수립해,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 중국 현대화의 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난징에 수도를 둔 국민당 정부는 군벌 간의 연합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난징 국민당 정부는 군벌 군대를 감축하고, 군사 부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했고 이에 대한 군벌들의 불만이 반(反)장제스 전쟁으로 터져나왔다. 1930년 중원(中原)대전을 진압함으로써 반장전쟁은 끝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합작 결렬 후 무장폭동을 일으키다 실패하고 농촌으로 들어간 공산당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에 총통 장제스는 5차례에 걸쳐서 장시 성 루이진을 수도로 하고 있던 공산당의 근거지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이무렵에 동시에 1931년, 일본 제국이 만주를 장악하고, 옛 청나라의 황제 선통제를 만주국의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공산당에 대한 공격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난징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군벌, 공산당과 대치하고 밖으로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상황에서 점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열강들과 새로운 조약을 맺어 관세 자주권을 규정하는 등 기존의 불평등 조약에서 벗어나 주권 회수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관세증가와 통일소비세 신설, 염세 정리등을 통해 세수가 증가되면서 재정자립도가 낮았던 이전의 중화민국 초기 시절 정부들에 비해 풍부한 중앙 세수를 확보했다. 경제법 정비, 국내산업 보호정책, 통화제도의 통일(대표적인 예가 법폐(法幣)발행.)과 안정화, 각종 산업정책 등을 통해 경제발전을 뒷받침했다. 세계대공황과 만주사변, 잦은 내전과 자연재해로 때로 퇴보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발전이란 측면에서 일정한 성과 및 발전을 거두었다.
또한, 국민당 정부는 농촌부흥위원회와 중국경제위원회를 두어 향촌 건설 운동을 지원함으로써 농촌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공산당의 지배로부터 수복한 지역에서는 유교도덕을 회복하고 사회 악습을 타파하여 신생활을 실천하자는 신생활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향촌 건설 운동이나 신생활 운동으로 농촌의 토지소유 불균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했던 점이 한계였다.
일본제국의 불법적인 만주점령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일치 항일(抗日)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으나, 장제스는 오히려 공산당에 대한 토벌을 더욱 강화하고, 장쉐량(張學良; 만주 군벌 장쭤린의 아들)에게 협력을 요구하러, 1936년 시안을 방문하였다. 이때 장쉐량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시안에 억류하고 국공 재합작(國共再合作)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시안 사변이다.
장제스는 마침내 이를 수락하고, 같은 해 시안을 방문한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통해 이를 공식 선언(제2차 국공 합작)하였다. 1937년 7월 일본 제국이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본격적인 중국 침공을 감행하자 장제스는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고, 제2차 국공 합작을 통한 항일 연합 전선을 결성함으로써 공산군은 국민 혁명군 소속 팔로군과 신사군이 되고 전면적인 항일 전쟁을 벌였다.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이미 이전부터 중국의 항일전을 지원하고 있던 미국·영국 등이, 아시아의 이권 확보가 목표로 전쟁에 동참하였다. 그 결과, 일본 제국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져서, 중국은 항일 전쟁에 승리했다.
국공 내전
하지만 1945년 일본 제국의 항복을 전후하여, 국민 정부와 공산당은 견해차를 공공연히 드러내었다. 그 결과, 1946년에 내전이 시작되어, 1948년부터 드디어 공산당의 공격이 본격화했다. 국민 정부는 서서히 쇠퇴해, 1949년 4월에는 수도 난징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제압되어, 정부가 붕괴했다.
다만, 공산당은 국민 정부가 소멸했다고 판단해, 동년 10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지만, 국민당은 1950년까지 윈난 성(雲南省), 해남도(海南島), 저장 성(浙江省) 및 주산 열도(舟山列島) 등에서 저항 운동을 행하고 있었다. 또, 장제스가 중앙 정부 조직을 대만(臺灣)에 이전했으므로, “중화민국”을 자칭하는 나라는 지금도 대만에 존재하고 있다. 그 때문에, 대만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분리된 상황이 계속되고 있고, “대만 문제”라는 국제 문제가 되고 있다.
대만 피난 후
국공 내전의 패배 후, 1949년에 대만으로 피난한 국민당 정부는, 1950년 장제스의 대총통 취임에 의해 활동을 재개했다. 장제스는, 무력에 의한 중국 공산당 지배 지역(중화인민공화국)의 탈환(대륙 반공(大陸反攻))을 목표로 삼아, 중국 연안부의 거점으로부터 공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공산군의 반격을 받아 1955년에 저장 성의 거점을 잃었다. 그 후 중화민국이 실제로 통치하는 영역은 변화하고 있지 않다. 타이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2·28 사태 등 불상사도 겪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본토 수복을 최고 국책으로 삼고 있으나 1954년 12월 체결된 미국·중화민국 공동방위조약에 의하여 무력행사에는 미국의 동의를 얻도록 되어 있으며, 1958년 가을 중국군의 진먼 섬 포격으로 타이완 해협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의 압력으로 무력 침공은 사실상 단념하게 되었다.
중화민국은 1949년 이래 실시된 계엄령으로 국민의 자유가 제약을 받고 있다가 1987년 해제되었다. 반공·친미정책이 외교정책의 기조였으나 현재 미국과의 단교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1981년 이후 중국으로부터 평화공세와 통일제의를 받았으나 계속 일축하다가 1987년 본토의 친족방문을 허용하는 등 교류를 시도하고 있으며, 1988년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정치의 민주화를 천명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리덩후이는 1996년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재선되었다. 대만은 1971년 국제 연합 탈퇴, 영토 귀속문제 등으로 많은 수교국들과 단절하여 2009년 10월 현재 정식수교국은 23개국뿐이지만, 실제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국가와 경제·문화 교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8년 3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국민당의 마잉주가 총통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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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국민당의 일당 독재
국민정부는 북벌 완료에 이어 1928년 8월 남경에서 5중전회를 개최하여 기본 정책을 토의한 끝에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훈정개시.5원입안과 군사정리안'이었다. 훈정은 일찍이손문이 혁명 단계로서 구상했던 군정기-훈정기-헌정기의 3단계 중 제2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당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시기'에 해당한다. 또 5원제란 입법.사법.행정.고시.감찰을 말한다.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회는 10월 3일 훈정강령 6개조를 공포하고 이 강령에 의거 국민정부조직법을 공포하여 10월 10일에 역사적인 5월 정부가 수립되었다.
주석에 장제스, 행정원장에 담연기, 입법원장에 호한민, 사법원장에 왕총혜, 고시원장에 대개요, 감찰원장에 채원배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훈정강령에 따르면 훈정 기간 안에는 국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민정부가 5원제에 의해 권력을 집행하도록 되어 있어 일당 독재의 지배체제를 합법화시키고 있다. 이와같은 국민당의 일당 독재하에서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 및 육해공 3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가짐으로써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장악하였다. 그러나 장제스의 기반은 그렇게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당내에서는 전에 무한 정부의 주석이었던 왕조명 일파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국공합작을 당초부터 반대했던 극우파인 서산파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내 문제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새로 국민혁명군에 합류한 군벌들의 움직임이었다. 이들 군벌의 군대를 어떻게 해체하고 하나의 군대로 통일 시키느냐가 당면 문제였다. 그래서 5중전회에서 군사정리안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당시 전군의 군대는 중앙과 지방의 잡군을 합쳐 약 2백만 명에 이르렀다.1928년 국가 재정 4억 3천만원 가운데 48%에 해당하는 2억원이 군사비로 지출되었다. 국민정부 입장에서도 신속하게 감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그래서 군사정리안을 통과 시키고 각 장군들을 소집하여 '편견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편'은 편성, '견'은 파견을 의미하는데 이 회의에서 '국군편견대강 17개조'가 가결되었다. 그 골자는 전국을 8개 편견구로 나누고 총병력 수를 65개 사단 80만 명으로 축소 편성하는 것으로서 결국 지방 군벌의 해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각 지방의 군사 지도자 및 각 파벌을 일당 독재 속에 흡수시키고 대립적인 각 파벌 세력의 조정자 역활을 하면서 그의 지배력을 각 방면에 침투시켰다. 그러나 대립적인 각 파벌 세력을 해소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장제스의 통일에 대한 신군벌 반대파의 저항으로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대규모 내전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 내전은 반장제스 전쟁의 형태로 1929년 2월 전 중국에 할거하고 있던 이종인.백숭희.이제첨 등 이른바 광서파의 저항을 필두로 섬서,하남을 근거지로 풍옥상의 서북파, 산서성을 근거지로 하는 염석산의 산서파, 그리고 동북 3성을 지배하는 장학량의 봉천파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 볼 때 장제스가 장악한 기반은 강소.절강 정도에 불과하였다. 결국 이 내전은 봉천파의 장학량이 장제스와 협력함으로써 장제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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