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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13 (선통제 시대 : 신해 혁명, 청조의 최후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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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13 (선통제 시대 : 신해 혁명, 청조의 최후 )

두바퀴인생 2010. 6. 9. 15:24

 

 

중국의 역사 113 ( 선통제 시대 : 신해 혁명, 청조의 최후  )

 

 

 

大清帝國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청나라의 국기 청나라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공금구
청나라의 위치
수도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공용어 만주어, 중국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9,984,670 km²
2.8%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383,100,000명
명/km²
통화 위안 (1889년부터)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건주여진 추장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원황제
(原皇帝)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1405년 ~ 1433년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1433년 ~ 1467년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1467년 ~ 1481년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1481년 ~ 1522년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직황제
(直皇帝)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1522년 ~ 1542년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익황제
(翼皇帝)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1542년 ~ 1571년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선황제
(宣皇帝)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1571년 ~ 1583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1583년 ~ 1616년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후금 대칸과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천명(天命) 1616년 ~ 1626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천총(天聰) 1626년 ~ 1636년

청(淸, 1636년 ~ 1912년)

청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숭덕(崇德) 1636년 ~ 1643년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제3대 청 세조
(淸世祖)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순치(順治) 1643년 ~ 1661년
제4대 청 성조
(淸聖祖)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강희(康熙) 1661년 ~ 1722년
제5대 청 세종
(淸世宗)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옹정(雍正) 1722년 ~ 1735년
제6대 청 고종
(淸高宗)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건륭(乾隆) 1735년 ~ 1795년
제7대 청 인종
(淸仁宗)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가경(嘉慶) 1795년 ~ 1820년
제8대 청 선종
(淸宣宗)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도광(道光) 1820년 ~ 1850년
제9대 청 문종
(淸文宗)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함풍(咸豊) 1850년 ~ 1861년
제10대 청 목종
(淸穆宗)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동치(同治) 1861년 ~ 1875년
제11대 청 덕종
(淸德宗)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광서(光緖) 1875년 ~ 1908년
비정통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보경(保慶) 1899년
제12대 청 공종
(淸恭宗)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선통(宣統) 1908년 ~ 1912년

 

 

 

선통제/푸이 (마지막 황제)

선통제 / 강덕제
푸이
청나라의 제12대 황제
만주국의 황제
재위 청나라의 국기 청나라 1908년 ~ 1912년
만주국의 국기 만주국 1932년 ~ 1945년
황후 효각민황후
부친 순친왕 재풍
모친 순친왕대복진
이전 황제 광서제

퇴위 후 중화민국 시절의 푸이
만주국 황제 시절의 푸이

 

 

푸이(중국어 간체: 爱新觉罗溥仪, 정체: 愛新覺羅溥儀, 병음: Àixīnjuéluó Pǔyí 아이신줴뤄 푸이[*](애신각라부의), 만주어 발음: 아이신교로 푸이, 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는 청나라의 마지막 12대 황제 선통제(宣統帝, 재위 1908년 ~ 1912년. 황제의 칭호는 1924년까지 유지, 묘호는 공종(恭宗)[1], 그리고 만주국의 황제인 강덕황제(중국어: 康德皇帝, (일본어: 愛新覚羅溥儀, 1934년 ~ 1945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 위원을 지냈다.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로 널리 알려져 있고, 시호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예인입효양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襄皇帝)이다.

연보

일화

  • 1935년 황후 완용이 일본군관 사이에서 사생아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푸이는 황후가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는데, 황후는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오빠가 키우는 줄 알고 양육비를 건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이 패망한 이듬해인 46년 지린(吉林)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아이가 궁밖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 푸이는 위안룽과 이혼하려고 했으나 일본인과 관동군측이 모두 불허하면서 또다른 귀인을 물색해서 보복을 하기로 했다. 친척의 소개로 1937년 탄위링(譚玉齡)이라는 17세의 만주족 중학생과 결혼했다. 이후 중학교를 졸업한 탄위링과 부부관계를 가졌으나, 탄위링은 1942년 원인모를 이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 리위친은 푸이가 해방 이후 59년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5번 전범 관리소를 찾았다. 그녀는 푸이가 유일하게 아내로 받아들일 정도로 관계가 좋았지만 나이차와 여러가지 배경을 고려해 결국 58년 이혼하고 만다. 푸이의 자서전을 편집했던 편집인 멍상룽은 이 대목을 삭제한 배경에 대해 당시 당의 배려로 62년에 결혼한 간호사 출신의 부인(李淑賢·당시 37세)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푸이의 자서전은 이후 영화 마지막 황제로 발표되었는데 인기를 끌었다.

아궁이 사건

푸이의 자서전을 썼던 멍상룽은 푸이가 원용의 아이를 아궁이에 던진 사실을 숨겼다. 2010년의 한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멍상룽은 "푸이가 위안룽이 낳은 아이를 아궁이에 던진 사실을 64년판에서 삭제한 것은 외국인들이 가질 수 있는 혐오감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0년에는 푸이의 회고록 중 삭제된 부분 15만자가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회고록은 이밖에 4번째 부인으로 ‘복귀인’이라는 호칭을 받은 리위친(李玉琴·1928년생)과 이혼한 내용 등도 새롭게 부활했다.

완룽은 정신질환을 앓았고,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이후 이혼했다.

가족 관계

푸이 황제는 정신장애를 갖고 있던 황후 완용(완룽)과 사이가 좋지 않아 부부관계가 사실상 절연상태였다. 황후 위안룽은 푸이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는 없었지만 황후라는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푸이는 밝히고 있다. 그녀가 아편에 빠진 것은 친정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고 일본 군관과 간통한 것은 친정 오빠가 주선한 것이다. 오빠는 위안룽이 1932년 푸이를 따라 톈진(天津)에서 다롄(大連)으로 옮기던 도중 ‘어떤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여동생을 일본 군관에게 넘겼다고 푸이는 지적하고 있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는 이어졌고 푸이는 1935년 ‘황후’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는 화가 났지만 일본인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일을 크게 떠벌리지는 않았다. 위안룽이 아이를 낳자마자 푸이는 아이를 아궁이에 던져 죽였다.

완용과는 1945년 일제 패망 직후 이혼했다.

 

완용과 함께 입궁한 숙비 문수완용의 표리부동한 행동에 상처받았고, 푸이의 냉대를 견디지 못하고 1921년 가출했다. 문수는 치루위(齊如玉)와 그녀의 남편인 변호사 리텐민(黎天民)의 도움으로 탈출한뒤, 이혼했다.

 

4번째 부인으로 ‘복귀인’이라는 호칭을 받은 1928년생 리위친(李玉琴)은 1940년대에 만났다. 푸이가 해방 이후 59년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5번 전범 관리소를 찾았다. 그녀는 푸이가 유일하게 아내로 받아들일 정도로 관계가 좋았지만 나이차와 여러가지 배경을 고려하여 푸이는 58년 리위친을 보내준다.

 

1962년의 마지막 결혼을 포함해서 일생 동안 다섯 번 결혼하였으나 후손은 없다.

 

남동생이 셋 있다. 이 중 차남인 부걸(중국어 정체: 溥傑, 병음: Pǔjié 푸제[*])은 일본인과 결혼하여 딸만 둘 있고, 삼남 부공(중국어: 溥供, 병음: Pǔgōng 푸공[*])은 어려서 죽었다. 막내 부임(중국어: 溥任, 병음: Pǔrèn 푸런[*])[14]은 현재 생존해 있으며, 아들 김육장(중국어 정체: 金毓嶂, 병음: Jīn Yùzhàng 진위장[*]), 김육재(중국어 정체: 金毓峑, 병음: Jīn Yùquán 진위창[*]), 김육람(중국어 정체: 金毓嵐, 병음: Jīn Yùlán 진위랑[*])을 낳았다.

자서전

자서전으로는 《황제에서 시민으로》(중국어: 我的前半生, 영어: From Emperor to Citizen)가 있다.

영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는 이천 년 중화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일생을 다룬 전기 영화이다.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모두 9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신해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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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辛亥革命)은 중국 민족 자산 계급이 주도한 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다. 1911년 우창 봉기로 시작되어 남경 임시 정부가 건립(1912년 1월 1일)되었다. 전기 쑨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자산계급혁명파를 주체로한 정부)되었으나, 후기 북양군벌 위안스카이쑨원이 임시 대총통 지위를 양위하여 임시총통으로 되고 군벌독재체제를 세웠다.

 

1911년이 12간지로 신해년(辛亥年)이기 때문에 신해 혁명이란 이름이 붙었다. 비록 이 혁명으로 공화정이 세워지긴 했지만 곧 위안스카이의 반동정치가 시작되고 이에 대한 반발을 제2혁명으로 부르고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의 할거에 대한 대항을 제3혁명으로 부른다.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타이완에서는 중요국경일인 "쌍십절(雙十節)"로 기념하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지킨다.

배경

캉유웨이

쓰러져가는 청나라

아편전쟁 이후 몇몇 중국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중국이 서양의 문물과 과학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작이 186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일종의 국가 개혁운동으로 퍼졌는데 이를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고 부른다. 청나라 조정이 주도가 되어 이루어진 양무운동은 어느정도의 성과를 이루었으나 청일 전쟁의 패배로 그 한계를 드러나게 된다. 더이상 봉건적인 청나라로서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청일전쟁 패배에 대한 한계의식은 곧 "변법자강운동"이라는 새로운 개혁운동으로 발전했다. 캉유웨이(강유위)와 량치차오(양계초)의 개혁운동은 광서제의 주목을 받았고 여러가지 개혁조치가 시도되었으나, 이들의 청조 개조운동은 서태후를 중심으로한 반동세력에 의해 100일만에 끝나고 만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중 과거 제도 폐지 및 근대적 대학 설립등은 나중에 신해혁명의 자양분이 되었다. 청조는 1906년 새로이 헌법을 정하고 입헌군주국으로 변화를 선언했고 1911년 5월 헌법에 의거한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는데 이 초대 13명의 내각중 9명이 만주족 출신이고 그나마도 7명이 황제의 친족이었다. 이는 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실망을 더욱 키운 꼴이 되었다.

 

한편, 전통적인 청나라 군대인 팔기군태평천국의 난, 청일 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히 약화되고 대신 이홍장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홍장의 뒤를 이은 위안스카이는 북양군을 더욱 강화하고 각 지방에 군사학교를 세워 장교를 양성하였고 이들은 나중에 중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혁명조직의 결성

1912년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 쑨원

 

근대적 대학의 설립과 군사학교등을 통해 신식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늘어나자 이들 지식인, 특히 해외 유학생을 중심으로 서서히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 익었다. 1903년 황싱 등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후난 성 창사에서 "화흥회(華興會)"라는 혁명조직이 설립되었고 1904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차이위안페이, 장빙린 등의 "광복회(光復會)"가 결성되었다. 마침내 1905년 이러한 여러 혁명단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중국동맹회가 성립되었다. 동맹회는 쑨원을 대표로 추대했고, "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공화국 창립, 토지 소유의 균등"의 강령을 채택했다. 또한 기관지 〈민바오(民報)〉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혁명운동에 나섰다.

 

여러 혁명단체는 해외에서 해외 동포들과 유학생의 힘을 모으고 중국 본토에서는 비밀리에 무장봉기 운동, 혁명 세력의 조직화를 꾀했다. 수차례의 무장봉기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지만 아직까지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서서히 청조 몰락과 새로운 혁명의 기운은 고조되고 있었다.

혁명의 전개

무창 봉기

후베이혁명정부 설립, 1911년 10월 11일

 

1910년 7월 31일 상해에서 혁명파 담인봉.송교인.진기미 등은 광주 봉기가 실패하고 그후 여러 차례 봉기가 실패하면서 봉기 장소를 장강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강력하게 대두되어 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한데 이어 무한 지방에도 호북분회를 설립하여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봉기 준비를 서둘렀다.

 

그해 9월 21일에는 무창에서 봉기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전회의가 열렸다. 혁명의 주동 세력을 담당하던 문학사와 공진회는 이날 오전 10시 공진회 사무실에서 주요 간부 60명이 모여 모임을 갖고 봉기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숙의한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1.봉기 날짜는 한가위(음력 8월 15일)인 10월 6일로 한다.

2.초기 작전 중점은 대포 진지와 무기고 점령에 둔다.

 

위 작전의 구체적인 실천 계획으로 우선 전망이 좋은 무창성 밖 공정(공병) 제11영에서 방화하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봉기하여 성내의 사산과 봉황산의 대포 진지 및 무기고를 탈취하고 이와 때를 갖이하여 무창의 맞은편에 있는 한양에서도 제42연대가 호응하여 무한 삼진을 일거에 장악하기로 했다. 이어서 각 작전 부대의 지휘 책임자와 공격 장소도 상세하게 결정한 후 산회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하마터면 탄로가 날 뻔 하였는데 포병 제8연대 소속 혁명 동지가 취중에 대포를 끌어내어 세 발의 공포를 쏘는 소란을 피웠으나 다행히 계획은 누설되지 않고 처벌로 끝났다.

 

그러나 무창 일대에서는 곧 혁명 봉기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고 일부 언론에서는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보도까지 나왔다. 무창 일대 방위를 담당한 호광총독 '서징'은 무창 일대의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9월 30일 청 조정에 원군을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어 10월 3일에는 군사회의를 열어 주요 기관 시설 경비를 강화토록 하고 장강 일대 군함에 의한 순찰도 아울러 실시하였다. 그러나 혁명군은 주요 간부들이 자리를 비우고 봉기 준비에 차질이 생겨 봉기를 11일 전후로 연기하고 9일에 다시 회의를 열기로 하였다. 회의를 열고 있을 때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다. 혁명군 참모장 '손무'가 러시아 조계 총기관부에서 폭탄을 만들기 위해 화약을 섞고 있다가  동지 한 사람이 피우던 담배가 화약에 떨어져 폭발이 일어나면서 큰 굉음이 일어나고 같이 있던 '손무'가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굉음을 듣고 달려온 러시아 조계 경찰은 혁명회 동지 30명을 일망타진하였다.

 

한편 강을 사이에 둔 '무창'에서는 임시 총사령관 '장익무'의 주재 아래 청군 내부의 동지들이 모여 협의 하던 중 폭발 사고 소식을 들었다. 동지들이 체포되고 명단까지 입수되었다는 소식에 동지들은 서둘러 봉기할 수 밖에 없었다. 임시 총사령관 '장익무'는 동지들을 돌아보며 비장한 각오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1.오늘밤 12시를 기해 일제히 봉기한다.

2.기율을 엄수하고 동족이나 외국군에 대해서는 철저한 보호하라.

3.각군은 중화성 포성을 신호로 일제히 각자의 임무 수행한다.

 

혁명파의 봉기 낌새를 알아차린 호광총독 '서징'은 더욱 경계를 강화하면거 거리마다 검문 검색을 철저히 하였다. 이로인해 혁명군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포성도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서징'은 체포한 혁명파  인사들을 참수하는 등 '무한삼진' 거리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침내 10월 10일 아침이 밝았다. 무창의 거리는 온통 혁명파 색출 군경들로 거리를 메웠다. 혁명파는 동지 간에 연락도 두절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무창 시내의 공병 제8영에 임시총사령부로부터 전날 5시에 발송된 봉기 명령이 전달된 것은 10일 아침이었다. 공병 제8영의 책임자 '웅병곤'은 동지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리고 각 부대와 연락하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주력인 성 밖의 포병 부대에 대한 정보가 없어 애를 태웠다. 봉기는 오후 3시로 정했지만 연락에 시간이 걸려 오후 7시 이후로 연기되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마침내 혁명을 알리는 신호 포성이 무창 거리를 뒤흔들었다. 혁명군은 기민하게 움직였고 '웅병곤'은 40명의 동지들과 같이 무창대의 무기고로 돌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무창성 밖 '당각'에 있던 제21혼성여단의 제11영도 봉기에 호응하여 '이붕승'의 지휘 아래 건초 더미에 불을 질러 궐기의 봉화를 올렸다. 성안에서는 제29표의 '채제민'이 봉기에 가담하여 '웅병곤' 부대와 같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손쉽게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다.

 

초망대 무기고에는 독일제 7.9밀리미터 쌍구모젤 1만여 정, 일본제 6.5밀리미터 보병 소총 1만 5천 정, 한양병공창 제조 6.5밀리미터 단구총 수만 정, 탄환,포탄 등이 다량 보관되어 있었다. 혁명군은 무장을 갖춘 무장 부대로 탈바꿈하였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혁명군은 '사산'의 초망대에 포병 진지를 구축하고 성 밖 '남호'에 있는 포병 제8표에 연락하여 급히 성내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들 혁명군 중에 대부대를 지휘한 경력있는 인물이 없어 지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숨어있던 초망대 좌대대관 '오조린'을 찿아내어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는 반응이 없었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자 혁명군 간부들이 협박하여 지휘관으로 추대하여 지휘토록했다. 그러나 '오조린'은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머뭇거리다가 혁명군의 무기와 탄약, 그리고 동조 세력의 규모를 보고 마음을 바꾸어 햑명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오조린'의 명령을 받은 혁명군은 헌병영을 공격하여 손쉽게 점령하였고 기회를 보고 있던 청군 병사들이 속속 혁명군으로 모여들어 급기야 약2천 명으로 불어났다. 혁명군은 '오조린'의 형 '오조기'가 청군측에서 보낸 순찰 임무를 띠고 방문했다가 동생이 혁명군에 가담한 것을 알고 그 의 도움으로 청의 수뇌부를 속이고 난 뒤, 혁명군은 제30표를 돌파하고 오후 10시 30분 경에는 호광총독 '서징'의 관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호광총독 '서징'은 격렬한 공격을 퍼붓는 혁명군의 기세를 보고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측근들만 대리고 관저 뒷문을 빠져나와 성 밖으로 탈출, 장강에 정박 중인 '초예호'에 올라 '한구'로 도주하여 한구 근방 장강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 뒤에 선체를 숨겼다. '서징'은  평소 영국인과 교류를 통해 만약의 사태시 영국 군함의 도움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영국인과 약속되었던 약속을 믿고 영국 영사에게 군함의 지원 사격을 요청하였으나 영국 영사는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절하였다.

 

호광총독 관저를 수비하던 청군은 총독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바로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혁명군이 총독 관저에 불을 지르자 불은 거세게 타오르며 무창의 밤하늘을 붉게 비추었고 이를 본 청군은 앞을 다투어 도망쳤다. 무창의 밤하늘에 솟구치는 불꽃을 장강 대안의 '초예'호 함상에서 바라본 호광총독 '서징'은 증원군을 급파해 달라는 전문을 청국 조정에 타전하였다.

 

10월 11일 새벽까지는 무창 시내의 주요 지대가 거의 혁명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최후까지 저항하던 '사산' 북쪽의 '번서(경찰서)'도 포병의 지원을 받은 혁명군에 박살나고 말았다. 무창 시내의 청국 관리들은 모두 도망쳐 그림자도 찿을 수 없었고 모든 관공서가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하룻밤 사이에 무창 봉기가 성공한 것이다.

 

무창의 봉기 전투에서 전사한 혁명군은 결사대 소속 10여 명이었고, 부상자는 20여 명에 불과하였다. 무창의 혁명은 일단 성공하엿으나 혁명군을 지휘할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그들은 토의 끝에 21혼성여단장인 '여원홍'을 찿아내어 위협을 가하여서라도 도독에 추대하기로 결정하엿다.

 

여원홍은 이때 나이가 48세였다. 천진 '수사학당'에서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인물로 청일 전쟁 때 기함 '정원호'의 포술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혁명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없고 이해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혁명군은 어렵게 성공한 무창 봉기가 계속 확산되기 위해서는 비록 혁명에 대해서 찬동하지 않더라도 국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그를 도독으로 추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여원홍'은 혁명군의 추격을 피해 초망대 가까이 있는 한 참모의 집에 숨어 있다가 혁명군에게 발견되었다. 임시 총지휘관 '오조린'이 그를 영접하면서 환영하자 그는 좀처럼 굳은 표정을 누구러뜨리지 않았다.

 

이때 혁명군이 미리 '중화민국 호북군 도독'의 이름으로 된 포고문을 작성해 놓고 혁명 간부 '이익동'이 그 사본을 가지고 '여원홍'에게 서명을 요구하자 그는 벌벌 떨면서 서명을 주저하였다. '여원홍'의 태도에 울화가 치민 혁명군 간부가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도 하였으나 '여원홍'은 입을 다문채 말이 없었다. 할수 없이 혁명군 간부가 대신 서명했다.

 

'여원홍'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거취문제를 신중하게 저울질 하였을 것이다. 얼마 후 그는 혁명군이 소유하고 있는  무기와 병력,은화를 보고 마음을 바꾸어 만주식의 변발을 자르고 도독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여원홍'은 혁명군을 배신하고 '원세개'와 협력하여 혁명군을 배척했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시작된 무창 봉기는 당시 무르익은 혁명의 기운에 도화선이 되었다. 무창의 신군병사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한 혁명군은 단 하루 만에 무창을 점령하고, 이튿날 한커우·한양(漢陽)을 점령하였다. 무창 봉기의 성공은 혁명에 지식인, 학생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신군이 가담하여 군사적으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창 봉기의 성공은 곧바로 전국을 급격한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후베이 성의 무창 봉기 이후 약 40여일 사이에 사이에 산시 성(陝西省), 산시 성(山西省), 후난 성, 윈난 성, 구이저우 성, 장쑤 성, 저장 성, 광시 성, 푸젠 성, 안후이 성, 광둥 성 등 남부지방 대부분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군에 가담했다.

 

무한 삼진의 함락

무창 혁명의 성공 소식이 한구.한양에 전해진 것은 11일 오후 4시경이었다. 청조는 무창 혁명을 은폐하기 위하여 무창과 연결되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는 등 물샐 틈 없는 보안조치를 취했으나 혁명 동지의 한 사람이 무창성 밖에 내붙인 포고문을 보고 즉시 장강을 건너 한구.한양의 혁명군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다. 한구.한양의 혁명군은 한구에 모여 작전회의를 열고 오후 8시 30분을 기해 일제히 봉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약속시간이 되자 혁명군은 한양 병기창을 기습 점령한 데 이어 가까운 산마루에 대포를 배치하여 위협 포격을 가하자 혁명은 손쉽게 성공하였다. 혁명군은 한양 병기창에서 다량의 무기를 확보하였고 그 후의 혁명 봉기에 크게 위력을 발휘하였다.

 

한구는 12일 새벽에 혁명에 성공하였고 일부 폭도들에 의한 약탈과 방화가 있었으나 무창에서 혁명지원군이 도착하여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무한 삼진은 마침내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무창 봉기 2일 후인 1911년 10월 12일 오전 6시 무창의 전화선이 복구되자 군정부는 즉시 도독 '여원홍'의 이름으로 전국에 무창 혁명의 성공을 선포하고 각지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와같이 청조에 대해서도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청군에 소속되어 있는 한족 출신 장병들에게 투항을 요구하는 권고문을 발표하였다. 무한 삼진의 혁명 성공은 청조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어 혁명의 기운을 더욱 부채질 하였다. 그 결과 혁명의 불길은 요원처럼 타올라 무창 봉기 후 불과 한 달만에 15개 성이 청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포했다. 이들 각성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흡수하여 통일된 정부를 세우는 것이 신해 혁명의 어려운 과제로 남았다.

 

무창 혁명 성공 소식이 북경 조정에 전해진 것은 10월 11일 오후였다. 당황한 청나라 조정은 그 이튿날인 12일 무창에서 도망쳐온 총독 '서징'을 파면하고 육군부 대신 '음창'과 해군부 부대신 '살전빙'으로 하여금 혁명군을 제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서징'에게 전가하고 철도국유화 정책을 추진하던 우전부 대신 '성선회'를 민란의 책임자로 몰아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철도국유화는 민간들의 많은 반발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도를 국가 소유로 하여 그 이익을 국고로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철도 건설비를 조달할 능력이 없던 조정으로서는 외국 차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고관들을 숙청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병을 핑계로 파면되었던 '원세개'를 다시 기용하려 하였다. 청나라 조정이 '원세개'를 생각하게 된 것은 혁명군 토벌을 명령받은 '음창'과 '설진빙'이 제대로 청군을 통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세개'의 신식 육군을 모체로 '이홍장'의 회군까지 흡수한 '북양군'은 '원세개'가 편성한 군대로 개인의 군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다. 청 조정은 북양군을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원세개'의 명예를 회복시켜 그가 전군을 통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청조는 '원세개'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여 혁명군을 토벌토록 명하였으나 '원세개'는 응하지 않았다. 원래 그는 섭정왕인 '순친왕'이 자객을 보내어 그를 암살하려 하자 몰래 도망쳐 하남 땅 고향에서 권토중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원세개'는 계속 발의 병을 핑계로 움직이지 않았고 청 조정에서는 그를 호광총독에서 흠차대신으로 격상하고 육군부 대신 '음창'을 소환하는 한편 '원세개'의 부하였던 '풍국장'과 '단서기'를 각각 1,2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청국의 육해군 및 장강수사라는 직책까지 겸하여 모든 군권을 '원세개'에게 위임하였다.

 

선통제는 10월 30일 '스스로를 죄하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선통제가 나이가 어리고 정사에 어두워 정치를 그르쳐 고관들이 사리사욕에 빠져 백성들에게 피해가 막심했다는 자기 비판으로 백성들의 노여움을 풀어보자는 것으로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자주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원세개'는 10월 30일에야 겨우 하남성 '신양'에 도착하여 '음창'으로부터 모든 군권을 인수받고 혁명군에 대한 회유공작을 폈다. 2차에 걸쳐 혁명군과 서신이 오갔으나 혁명군이 거부하자 '풍국장'으로 하여금 한구를 공격토록 하여 손쉽게 함락시켰다.

 

위안스카이의 등장

위안 스카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은 통일 혁명중앙정부의 수립을 위해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혁명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 동맹회 등 통일된 혁명세력이 각 성의 무장봉기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일률적인 규율이나 지도체제가 없었다. 일단 청조와 구체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입헌파든 공화파든 가리지 않고 무장봉기에 나섰기 때문에 봉기가 성공하여도 실제 지배권은 입헌파등 반동세력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청나라 측은 군대가 혁명군에 대한 초기의 진압에서 실패하자, 은퇴해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내정과 군정의 전권을 위임하여 총리로 기용하고 그의 강력한 북양군으로 혁명군을 진압하고자 했다. 위안스카이는 11월 2일에 한커우를 11월 27일에 한양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혁명군측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11월 16일 원세개는 경친왕 후임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직했는데, 자신의 심복 '조병균'을 민정대신, '당소의'를 우정대신, 입헌파의 '장건'을 농공대신, 보황파의 '양계초'를 사법부 대신에 기용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하려 하였으나 '장건'과 '양계초'가 입각을 거부함으로써 연립내각 구성은 실패하였다.

 

원세개는 화평을 내세우는 한편 한구를 수복한 데 이어 한양에 대하여 총공세를 폈다. 혁명군도 즉각 항전에 나섰으나 압도적인 무력 앞에 27일에는 한양마저 빼았기고 말았다. 한구.한양을 모두 빼앗긴 혁명군은 '황흥'의 지휘 아래 무창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혁명군은 전국적인 통일정부 수립하여 하나의 구심점으로 집결할 움직임을 보여 11월 30일 제1차 각 성 대표회의가 한구의 영국 조계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청조는 이미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혁명군과 청조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혁명군과 원세개 사이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한족끼리 유혈 충돌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그래서 원세개를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는 것이 최선책이다"는 결론을 내었다.

 

이러한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은 교전 상태임에도 원세개의 사주를 받은 동맹회의 중진 '왕조명'의 책략에 의한 것이었는데 원세개의 권모술수가 서서히 나타나는 대목이었다. 그해 12월 2일 남경이 혁명군의 수중으로 들어오자 무창의 대표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임시 정부 소재지를 남경으로 옮긴 후 7일 이내에 각 성 대표회의를 열어 10성 이상이 참석하면 임시 대총통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창에서 이러한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상해에 남은 '진기미.정덕전' 등은 무창의 결의와는 달리 '황흥'을 대원수.'여원홍'을 부원수로 선출하고 대원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대권을 가진다고 결정함으로써 무창과 상해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였다.

 

당시 외국의 일부 신문에는 손문을 중화민국 초대 원수로 가장 유력하다는 내용의 보도가 나오고 있었으나 혁명파 중에는 찬반이 반반이었다. 혁명파의 이같은 내부동정을 예의주시하던 원세개는 실력을 기르는 한편 회유 공작을 폈다. 당시 장강 이남 지역은 거의 혁명군이 장악한 상태였다. 원세개가 영국 공사 '존 조르단'을 통해 혁명군과 강화를 모색하자, 한구 주재 영국 영사 '하버트 코페'에게 혁명군과 접촉을 의뢰했다. 12월1일 청군은 무창에 대하여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오후 6시쯤 '코페'의 지시를 받은 영국 민간인 '밴'이 군정부에 찿아와 정전을 제의했다. 정전 기간은 당초 12월 2일부터 3일간으로 되어 있었으나 원세개의 요청으로 15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손문의 귀국

이러한 상태에서 1911년 12월 25일 혁명파의 원로 손문이 상해로 돌아왔다. 혁명파는 열광적으로 손문을 환영하였다. 그는 무창 혁명이 성공했을 무렵 미국과 유럽을 돌아 모금운동을 전개하면서 그는 청조에 대한 4개국 차관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공화정에 대한 경제 원조를 요청하는 등 맹활약을 전개하였다. 4개국 차관의 중심국이었던 영국은 손문의 요청에 따라 진행중인 차관을 중지하고 새로운 은행단을 신정권에 파견한다는 데 동의했다.

 

손문의 귀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교착상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12월 25일 손문이 상해에 도착하자 각 성 대표들은 임시 대총통 선거를 서둘러 12월 29일 정식으로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는 총 17개성이 참가하였고 선거권은 각 1표씩이었다. 개표 결과 손문이 16표, 황흥이 1표로 손문이 압도적으로 득표하여 초대 임시 대총통에 선출되엇다.

 

1912년 1월1일 중회민국 임시 대총통 취임 선서에서 손문은 '민의 공의를 취하고 중(衆)을 위하여 복무한다."고 서약하였다. 새로운 공화국 연호를 쓰지 않고 1912년을 민국 원년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유사 이래 중국을 지배했던 전제 군주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민의에 의한 정치와 민중을 위한 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공화정치가 실현되게 되었다.

 

1월 3일 손문은 내각 명단을 각성 대표회의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육군총장 황흥/차장 장덕빈, 내무총장 정덕진/차장 거정, 외교총장 왕총혜/차장 위신조, 재정총장 진금도/차장 왕홍유, 해군총장 황종영/차장 탕향명, 사법총장 오정방/차장 여지이, 교육총장 채원배.차장 경요월, 실업총장 장건/차장 마군무, 교통총장 탕잠수/차장 우우임 등이 임명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육군.외교.교육의 3총장만 동맹회 회원일 뿐 나머지는 모두 청조의 구관료와 입헌파가 차지한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실무는 혁명파가 장악하였다.  1월 28일 임시정부 조직대강의 규정에 의거 18성의 대표에 의해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각 성 대표회의는 해산했다. 참의원의 최대 임무는 '중회민국의 임시약법'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2월 7일 기초위원회가 구성되고 1개월간의 토의 끝에 3월11일에 마침내 임시약법을 공포하였다.

 

임시약법은 주권재민.내각제도.국민의 기본권을 정한 것으로 손문의 삼민주의에 입각해 중화민국의 골격을 이루엇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탄생과 동시에 세계 열강에 대한 대책에 부심해야 했고 원세개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남경에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긴 하였으나 북경에는 여전히 청조가 존재했고 실권자 원세개가 청국군의 전권을 배경으로 버티는 가운데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남북의화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군측은 위안스카이와 협상하는 방향을 채택했다. 이로써 혁명은 무장봉기 국면에서 정치적인 협상국면으로 전환 되었다. 이러한 협상은 "남북의화(南北議和)"라고 하는데 혁명세력이 강했던 남부지방과 위안스카이등 청조세력의 북부지방의 협상을 의미한다. 혁명군은 이 이러한 정치적 타협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 혁명군은 자체적인 통일성과, 단결성이 결여되었음
  • 위안스카이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 및 서구등 열강의 지지
  • 군사적 열세로 일단 위안을 이용하여 청조를 타도하자는 전략 등.

혁명군과 북양군은 12월 3일 이후 정전상태로 들어가고 상하이에서 정식으로 남북의화가 개시되었다. 양측 대표의 협상중 12월 29일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임시 공화국 정부를 세우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조건부로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한 후 협상이 지속되었다.

 

정전에 이어 강화교섭이 시작되어 혁명군측에서 '오정방', 청조측에서 '당소의'가 각각 대표로 선출되어 12월 18일 1차 교섭에서 '오정방'은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만청 정부의 폐지

2. 공화정부의 수립

3. 청국 황제의 우대

4. 가난한 만주인 후대

 

그러나 1차 교섭에서 잠정적인 정전만 합의하고 20일 다시 2차 교섭에 들어가 국체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오정방'은 1차 교섭에서 주장한 대로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대하여 '당소의'는 국민대회를 열어 정체 문제를 결정한다는 선까지 양보했다. 이것은 원세개가 모두 조종한 결과였다.

 

원세개는 대총통의 자리를 꿈꾸고 있음이 분명하였고 무창회의에서 혁명파가 자기를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현실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입헌군주파를 설득, 무마하여 자기편으로 끌여들이고 혁명파와 강화교섭만 성공한다면 대총통 자리는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원세개는 중국인 전형의 엄흉하고 간교하며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여실히 증명된다.

 

이 무렵 세계 열강은 원세개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는데, 원세개에 의해 남북 통일이 실현된다면 중화민국은 승인하지만 남경 임시정부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었고 경제적으로도 임시정부가 지배한 지역의 세관은 열강의 억제정책으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곤란한 상태엿다. 이 같은 모든 사태는 모두 원세개가 비밀리에 책동하였고 조종하고 있었다.    

 

손문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기 전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둘러싸고 중국이 분열되어서는 안된다는 군은 신념 아래 대총통의 지위도 원세개에게 양도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원세개는 자신의 야심을 키우는데 급급하였고 혁명정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청조에 대해서도 1월 16일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상주문을 국무대신 연명으로 제출하였다.

 

"...... 만약 내전이 장기화되면 외국의 간섭을 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혁명군의 조정에 대한 감정 또한 악화되어 어떠한 유혈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니 하루속히 민의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혁명군이 목적하는 정치체제는 군주제가 아니고 공화제 입니다. 하루 속히 대세를 살피시어 민심에 따르시기 바랍옵니다."

 

청국 황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격이 되었다. 가장 믿고 의지했던 원세개로부터 결정적인 배반을 당한 셈이다.

 

청조의 최후

원세개의 내각으로부터 황제의 퇴위를 강요당한 청국 조정은 1월 17일부터 매일 어전회의를 열었다. 원세개에게 설득당한 '경친왕' 등은 공화제도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으나 '부위.재택' 등 만주 귀족들은 군주제를 고수하여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엿다.

 

청조의 귀족인 '양필'은 '종사당'을 결성하여 청조의 붕괴를 저지하려 하였다. 원세개의 내각을 무너뜨리고 '철량'을 군정대신으로 삼아 최후까지 청조를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1월 26일 종사당의 영수 '양필'이 경진동맹회 소속의 '팽가진'에게 암살되었다. '양필'이 죽자 귀족들은 재산을 외국에 도피시키고 천진.대련 등지로 빠져나가 외국인 보호하에 들어감으로써 청나라 황실은 완전 고립되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강화 책임자인 '오정방.당소의'를 통하여 원세개와 황제 퇴위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하였다. 대총통 손문은 '청제가 퇴위하고 원세개가 공화정에 찬동한다면 원세개에게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할 것임을 선언'하고 5개 조항에 대하여 조건을 제시했다.

1. 황제가 퇴위하고 원세개는 청국 황제가 퇴위했음을 북경 주재 외국공사에게 통지한다.

2. 원세개는 공화주의를 절대적으로 찬성한다는 뜻을 표명한다.

3. 손문은 외교단에 대하여 청국 황제의 퇴위를 포고한 후 사직한다.

4. 참의원은 원세개를 임시 대초통으로 선출한다.

5. 원세개는 대총통에 선출된 후 참의원이 정한 약법을 수호할 것임을 선서한다.

 

원세개는 이 5개 조항을 우선 받아들였으나 청국 황제에 대한 퇴위를 직접 요구하지 않고 호광총독 '단기서'로 하여금 장군 42명의 연명으로 된 퇴위 상주문을 올리면서 공화제를 요청하게 하였다.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들로부터 퇴위 압력을 받은 청조는 이제 퇴위하는 길밖에 없었다.

 

융유 황태후는 마침내 퇴위를 결정하고 2월 3일 원세개에게 전권을 양도하여 임시정부와 퇴위 후의 청국 황실에 대한 처우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2월11일 원세개와 임시정부 사이에 청국 황실에 대한 처우 문제가 결정되었다.

1. 청국 황제의 존호를 폐지하지 않고 외국 군주에 대한 예로써 대우한다.

2. 세비 8백만 냥을 신화폐로 환산하여 4백만 원을 중회민국에서 지급한다.

3. 황실의 사유 재산은 중화민국이 특별히 보호한다.

4. 미완성된 광서제의 능묘 공사는 중회민국의 경지 지출로 계속 공사한다.

5. 청국의 황족도 중회민국의 국권.사권에 대해서 일반 국민과 동등하다.

 

협상의 결과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종말을 실현시켰다. 청조는 이튼날 12일 이를 수락하였고  원세개는 퇴위 조서를 정서하여 융유 황태후에게 바쳤다. 황태후는 그 조서를 읽기도 전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고 옆에 있던 7세의 어린 황제 선통제는 황태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대신들은 황태후를 위로했고 시종들도 슬픔에 잠겨 넋을 잃었다. '서세창'이 조서에 옥쇄를 찍었고 퇴위 조서는 곧 선포되었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자신이 황제에서 퇴위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퇴위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청조는 세조 순치제가 북경을 점령한 1644년 이래 12대 267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서 268년에 걸친 만주족중국통치는 종말을 고했으며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부터 내려온 2,133년 간의 황제의 통치 역시 끝이 났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퇴위 조서의 기초자는 임시정부측의 '장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서가 원세개에게 전해지자 원세개는 원문에 '원세개가 전권으로 공화정부를 조직하여'라는 문구를 삽입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단순히 '퇴위선언'이었던 조서가 원세개에게 '양위'한다는 뜻을 포함하는 내용으로 탈바꿈해 버린 것이었다. 이런 일에서도 후일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던 원세개의 야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원세개의 정치 일정은 일단 공화국의 대총통이 된 다음 공화제가 중국에는 타당치 않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신이 황제에 오르는 것이었다.

 

선통제의 퇴위칙서

 

2월 13일 쑨원은 임시공화국 정부의 대총통직을 사직하고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쑨원은 자신이 사직하는 조건으로 난징을 임시정부의 수도로 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2월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군사반란등을 구실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4월 5일 임시공화정부의 의회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하는 것을 결의했다. 이로써 위안스카이를 난징에서 견제하려는 혁명파의 시도는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