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107 (광서제 시대 : 청일 전쟁 1) 본문
중국의 역사 107 (광서제 시대 : 청일 전쟁 1)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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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없음) | |||||
국가: 공금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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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 ||||
공용어 | 만주어, 중국어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 ||||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 ||||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
9,984,670 km² 2.8% | ||||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
383,100,000명 명/km² | ||||
통화 | 위안 (1889년부터) |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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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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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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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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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
원황제 (原皇帝) |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
1405년 ~ 1433년 |
- |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
1433년 ~ 1467년 |
- |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
1467년 ~ 1481년 |
- |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
1481년 ~ 1522년 |
-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
직황제 (直皇帝) |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
1522년 ~ 1542년 |
-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
익황제 (翼皇帝) |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
1542년 ~ 1571년 |
-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
1571년 ~ 1583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1583년 ~ 1616년 |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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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천명(天命) | 1616년 ~ 1626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천총(天聰) | 1626년 ~ 1636년 |
청(淸, 1636년 ~ 1912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숭덕(崇德) | 1636년 ~ 1643년 |
-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
순치(順治) | 1643년 ~ 1661년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
강희(康熙) | 1661년 ~ 1722년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
옹정(雍正) | 1722년 ~ 1735년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
건륭(乾隆) | 1735년 ~ 1795년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
가경(嘉慶) | 1795년 ~ 1820년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
도광(道光) | 1820년 ~ 1850년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
함풍(咸豊) | 1850년 ~ 1861년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
동치(同治) | 1861년 ~ 1875년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
광서(光緖) | 1875년 ~ 1908년 |
비정통 | -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
보경(保慶) | 1899년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
선통(宣統) | 1908년 ~ 1912년 |
개요
1894∼1895년 사이에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으로 이로 인하여 일본의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분할이 시작되었으며,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시대의 막이 열렸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고 다음해 부산에 거류지(居留地)를 설정, 곡물의 매점과 무관세(無關稅) 특권으로 공산품을 수출하며 조선에 진출하였다. 82년 최초의 반일운동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공사관 주둔병의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주병권(駐兵權)을 장악하고, 84년에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를 후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청의 종주권이 강화되었다.
당시 일본은 1880년대 후반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급속히 발전한 일본자본주의는 1890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을 통해 그 모순을 드러냈다. 즉 값싼 노동력의 국내시장 발전제약과 섬유공업·군수공업 등에 대한 수년 간의 투자확장이 공황의 원인이었다. 1889년의 흉작으로 인한 쌀 생산의 감소도 공황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1890년도의 일본경제는 심한 수입초과를 나타냈으며 일본은 무역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 침략을 꾀하게 되었다. 1890~94년 일본 의회에서 나타난 일본지배층 내부의 대립 격화와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 악화 및 불만의 증대는 지배층의 침략기도를 부추겼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영토분할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당시 제정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찾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을 장래의 동맹국으로 보고 청일전쟁 개시 2주일 전인 1894년 7월 16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 개시를 승인한 것을 의미했다. 미국도 러시아를 위험시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했다. 반면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침략 기도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도,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정책은 취하지 않고 장차의 침략기회만 노리고 있는 단계였다.
그라하여 청의 식민지적 지배와 일본 상업자본의 진출, 조선왕조의 압제 등에 시달려온 농민들과 동학 교도들이 봉기(蜂起)하여, 1894년 5월에 전주(全州)를 점령하자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텐진조약에 의하여 조선에서 청 ·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요구하던 일본 정부는 6월 초에 출병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의 오오토리[大鳥] 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는 겉으로는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해 조선내정의 개혁을 촉구하여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에 대처할 전략적 시설을 한반도 안에서 확보하고 불평등조약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본원적 축적을 강행하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이 당시 일본은 청국이 북양함대의 군사력이 증강이 미진한 사이, 자력으로 건조한 순양함, 철 갑함 다수를 포함하여 1894년 당시까지에 55척, 6만톤의 대해군을 건설하였다. 특히 북양 함대에는 1문도 없었던 최신의 속사포 155문을 갖추었다. 그 결과 1884년의 시점에 일본해 군은 북양함대에 비해 주력함의 평균시속이 1해리 빠르고 평균선령도 2년이 적었으며, 포 의 발사속도도 4-6배 우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과 29일 성환(成歡) 육전에서 청국군을 격파하였고 7월 30일 아산을 점령하였다. 8월 1일의 개전 후 9월 15일에는 평양을 지키고 있던 청군 1만명을 패퇴시켰으며,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우세를 확보한 일본은 랴오둥[遼東]반도의 탈취 계략을 세우고, 10월에 청국 영토에 진격하여 뤼순[旅順]학살사건을 일으킨 후 봉천(奉天) 남부를 제압, 이어서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타이완[臺灣] 점령을 위하여 펑후섬[澎湖島] 작전을 벌였다. 즉,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公州)·성환(成歡)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고, 갑오정권(甲午政權)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만 자국에서 가지고 왔을 뿐, 8월 27일 체결된 '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對朝鮮對日本兩國盟約:朝日盟約)에 의해 식량·부식물·군수물자 수송의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이에 농민군은 그해 10월 다시 전면적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공주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급히 남하하여 조선정부군과 함께 농민군토벌에 나섰다. 결국 농민군은 12월 우금치전투에서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한편 9월 17일 황해해전(黃海海戰)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錦州城]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뤄순[旅順]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국은 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하지만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야욕은 드러났다. 즉, 전쟁에 참패한 청나라정부는 강화를 시도하고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청나라 대표단이 파견되기 직전, 일본에서는 조선의 독립승인(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遼東]·타이완[臺灣]·펑후[澎湖]의 할양, 배상금지불, 서구열강과 맺은 것과 같은 통상조약(불평등조약)을 일본과 체결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강화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1895년 1월 30일 청나라 대표단이 도착하자, 일본은 시간을 지연시켜 점령지를 확대함으로써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하려는 속셈에서, 대표단의 권한부족을 트집잡아 귀국시켰다. 그동안 일본 해군은 1월 20~23일 위해위(威海衛)를 봉쇄한 다음, 2월 12일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이를 함락시켰다. 사태의 급진전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李鴻章)을 강화전권대사로 하는 새로운 대표단을 시모노세키[下關]파견하고, 일본측이 제시하는 강화초안을 수용하여 4월 17일 조약에 조인했다.
일본은 ①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②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펑후섬의 할양,쑤저우[蘇州] 등 4개 도시의 개항③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 ④ 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의 체결 등을 얻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 간섭 앞에 무릎을 꿇고 랴오둥반도는 반환되었다. 타이완 민중은 일본에의 할양을 거부하며 저항하였는데, 일본은 고전 끝에 11월에 이를 진압하였다.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청일전쟁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战争 / 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퇴보와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가 중국의 양무운동에 비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청일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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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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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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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63만 북양군벌 북양함대 |
24만 일본 육군 일본 해군 | ||
피해 상황 | |||
약 3만 5천 | 약 1만 8천 |
청일 양국의 병력 상태
청나라
북양군(北洋軍)과 북양 함대(北洋艦隊)는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근대화된 청나라 군대의 상징이었으나, 도덕적 해이와 부패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의 정치가들은 조직적으로 기금을 착복했으며, 전쟁 중에도 그러했다. 병참에도 큰 문제가 있어, 만주 철도의 건설도 어려웠다. 청나라 군대의 사기는 매우 낮았는데, 이는 급료와 신용이 부족했고 아편을 피웠으며 통솔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며, 이는 요새화되고 방어할 수 있었던 웨이하이(威海)를 포기하는 등의 불명예스러운 퇴각을 초래했다.
북양군
청나라는 국군(national army)을 보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난 이후에 만주, 몽골, 회(무슬림), 한족 부대로 나뉘었고, 이들은 다시 독립된 지역 사령부로 나뉘었다. 전쟁 당시에는 대부분의 전투는 북양군과 북양 함대가 참여했으며, 청나라의 다른 육군과 해군에의 도움 요청은 지역간 경쟁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었다.
북양함대
북양함대는 청나라의 근대화된 네 개의 해군 중 하나였다. 북양함대는 직례총독(直隸總督)이었던 리훙장이 크게 후원하였다. 북양함대는 청일 전쟁 이전에는 동아시아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이들은 '아시아 제일'로 일컬어졌고, 1890년대 후반에는 '세계 8위'의 함대였다.
종류별 전함
- 철갑함: 정원(定遠) - 기함, 진원(鎮遠)
- 장갑순양함: 경원(經遠), 내원(來遠)
- 방호순양함: 치원(致遠), 정원(靖遠)
- 어뢰순양함: 제원(濟遠), 초용(超勇), 양위(揚威)
- 해양전투함: 평원(平遠)
- 코르벳함: 콴챠
일본
일본 메이지 정권하의 개혁은 해군의 건설과 효과적인 근대 육군과 해군을 창설하는 데에 중요한 이점을 제공하였다. 일본은 훈련을 위해 군 관료들을 외국에 보내었고, 유럽 육군과 해군의 상대적인 힘과 전술을 평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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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사단 사령부(위) 및 숙영지(아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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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메이지 정부는 처음에는 프랑스의 육군을 모델로 하였고, 프랑스의 고문이 두 차례(1872년 ~ 1880년, 1884년)의 군사사절단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 1873년에는 전국적으로 징병이 실시되었고, 서양식의 징집된 군대가 창설되었다. 군사 학교와 무기고 또한 세워졌다.
1886년에는 독일 육군쪽으로 선회하였는데, 특히 프러시아를 육군의 기초 모델로 삼았다. 그 정책과 군사 제도, 조직이 일본육군에 의해 면밀하게 연구되어 도입되었다. 1885년에는 독일의 고문 야콥 멕켈(Jakob Meckel)은 새로운 법령을 실시, 육군의 지휘 체계를 사단과 연대로 개편하였다. 육군 병참, 운송, 조직이 강화되고 기동성이 증가되었으며, 포병과 기술 연대는 독립된 사령부가 되었다.
1890년대의 일본은 근대화되고 전문적으로 잘 훈련된 서양식의 군대로 탄생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장비가 잘 갖추어지고 보급된 육군을 운용할 수 있었다. 장교들은 외국에서 학습하였고, 최근의 전술과 전략을 익혔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 육군은 2군 5사단의 총 12만 명의 군대를 전투에 배치할 수 있었다.
일본 해군
일본 해군은 당시 세계의 선두 위치에 있었던 영국 해군을 모델로 하였다. 영국의 고문단이 훈련, 조언, 교육을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고, 학생들은 영국에 보내어져 영국 해군을 견학하였다. 영국 해군 교관의 연습과 지도로 일본은 포술과 조종술에 능한 해군을 보유할 수 있었다.
개전 초기에 일본 해군은 전함은 없었지만, 12척의 최신 전함(이즈미호는 전쟁 중에 추가), 한 척의 프리깃함(타카오), 22척의 어뢰정, 기타 여러 척의 보조함/무장 상선과 순양함, 코르벳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은 전함을 보유할 만한 재원이 없었고, 대형 함선에 대항하여 소형의 빠른 전함, 특히 순양함과 어뢰정을 선호한 '쥬네 에콜(Jeune Ecole)'주의의 도입을 계획하였다.
많은 수의 일본의 주요 군함은 영국과 프랑스의 조선소에서 제작되었다. (영국이 8척, 프랑스가 3척이며, 2척은 일본에서 제작하였다.) 그리고, 어뢰정 16대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일본에서 조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류별 전함
- 방호순양함 : 마츠시마(松島) - 기함, 이추쿠시마(厳島), 하시다테(橋立), 나니와(浪速), 타카치호(高千穂), 야에야마(八重山), 아키츠시마(秋津洲), 요시노(吉野), 이즈미(和泉)
- 순양함 : 치요다(千代田)
- 장갑 코르벳함: 히에이(比叡), 콘고(金剛)
- 철갑함 : 후소(扶桑)
배경
일본은 1854년 미국의 간섭으로 200년간 계속 된 에도시대 쇼군(將軍) 통치하의 쇄국정책이 끝나 시장을 개방하게 되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과 막부시대의 몰락에 이은 수 년간, 일본인들은 일본이 봉건의 상대적인 후진 사회에서 근대 산업 국가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일본은 각국에 대표단과 학생들을 파견하여 서양의 예술과 과학을 배우고 모방하려 하였다. 또 일본은 사할린 섬, 쿠릴 열도, 둥베이에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온 러시아를 경계하여, 이를 막기 위해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쇄국 상태로, 주변의 사회 정세에 대해서 자세하지 않아서, 일본에서 일어난 개혁의 의도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치의 실권을 취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제외한 모든 서양·일본과의 통상수교를 거부하였고, 결국 통상수교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한편,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의 소요를 거치며 크게 쇠퇴하여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양무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의 신식 문물과 무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보수파의 반발과 서양의 겉모습을 모방하는데 그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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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 바다에 정박한 일본 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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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에 상륙한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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