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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04 (함풍제 시대 : 2차 아편전쟁(애로 호 사건))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중국의 역사 104 (함풍제 시대 : 2차 아편전쟁(애로 호 사건))

두바퀴인생 2010. 5. 30. 03:33

 

 

중국의 역사 104 (함풍제 시대 : 2차 아편전쟁(애로호 사건)) 

 

 

大清帝國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청나라의 국기 청나라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공금구
청나라의 위치
수도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공용어 만주어, 중국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9,984,670 km²
2.8%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383,100,000명
명/km²
통화 위안 (1889년부터)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건주여진 추장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원황제
(原皇帝)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1405년 ~ 1433년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1433년 ~ 1467년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1467년 ~ 1481년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1481년 ~ 1522년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직황제
(直皇帝)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1522년 ~ 1542년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익황제
(翼皇帝)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1542년 ~ 1571년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선황제
(宣皇帝)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1571년 ~ 1583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1583년 ~ 1616년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후금 대칸과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천명(天命) 1616년 ~ 1626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천총(天聰) 1626년 ~ 1636년

청(淸, 1636년 ~ 1912년)

청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숭덕(崇德) 1636년 ~ 1643년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제3대 청 세조
(淸世祖)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순치(順治) 1643년 ~ 1661년
제4대 청 성조
(淸聖祖)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강희(康熙) 1661년 ~ 1722년
제5대 청 세종
(淸世宗)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옹정(雍正) 1722년 ~ 1735년
제6대 청 고종
(淸高宗)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건륭(乾隆) 1735년 ~ 1795년
제7대 청 인종
(淸仁宗)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가경(嘉慶) 1795년 ~ 1820년
제8대 청 선종
(淸宣宗)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도광(道光) 1820년 ~ 1850년
제9대 청 문종
(淸文宗)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함풍(咸豊) 1850년 ~ 1861년
제10대 청 목종
(淸穆宗)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동치(同治) 1861년 ~ 1875년
제11대 청 덕종
(淸德宗)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광서(光緖) 1875년 ~ 1908년
비정통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보경(保慶) 1899년
제12대 청 공종
(淸恭宗)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선통(宣統) 1908년 ~ 1912년

 

2차 아편 전쟁(애로호 사건)

 

제2차 아편 전쟁

 

 

Upper North Taku Fort.jpg

날짜 1856년~1860년
장소 중국 동부 해안
결과 청나라반식민지화, 톈진 조약,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가 러시아 제국연해주 할양.
교전국
영국의 국기 영국
프랑스의 국기 프랑스
아일랜드의 국기 아일랜드
청나라의 국기 청나라
지휘관
영국의 국기 마이클 세이무어
영국의 국기 제임스 브루스
프랑스의 국기 장 밥티스트 루이스 그로
프랑스의 국기 오그스트 레오폴드 프로테
청나라의 국기 승격림심

영프연합군의 광저우 약탈

 

 

제2차 아편 전쟁은 청나라와 영국 , 프랑스, 아일랜드 연합군 간에 1856년에서 1860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생각대로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자, 애로호 사건을 일으키고 청나라를 공격하여, 톈진 조약을 맺어 개방을 확대시킨 전쟁이다. 애로호 때문에 격발되었다고 해서 애로호 전쟁이라고도 한다.

 

 

배경

 

제1차 아편 전쟁(1839~1842년)이 끝난 뒤, 영국은 대중 무역에서 많은 효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주력상품이었던 면제품의 판매는 기대와는 달리 열악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중국 농촌에서 생산하는 면포가 값이 싸고 품질이 좋다.
  2. 중국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해서 수입제품을 꺼려했다.
  3. 늘어난 아편 수입으로 은이 유출되면서 구매력을 잃었다.
  4. 제1차 아편전쟁 이후 광동을 중심으로 대영항쟁이 전개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영국의 대중 무역은 여전히 차의 수입과 아편의 수출이었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시장 개방을 확대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것은 1851년 태평천국 사건을 유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수출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영국은 조약개정을 청나라에 요구하게 된다. 수출부진에는 위에 언급했듯이 값싼 중국 제품의 저향력, 자급자족적인 중국의 사회경제 구조, 은 유출로 인한 구매력 저하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깊숙한 내륙지역까지 진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유로운 내지여행과 북쪽의 항구 개방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는 조약개정에 응하지 않자, 영국은 무력을 사용하고자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마침 1856년 10월 광저우주강(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애로호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애로호에 있던 중국인 승무원 12명을 해적 혐의로 연행한 사건과 불법적인 포교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을 구실로 영국프랑스가 전쟁을 도발하게 된다. 이 사건을 애로호 사건이라 부른다.

 

 

애로호 사건

 

1856년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호'가 항해를 하던 중 청나라 관원이 승무원 전원을 체포하고 영국 국기를 바다에 던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애로호는 중국인 소유의 해적선으로 영국 국기를 달았고, 중국인 선원 13명과 영국인 선장 한 명이 있었다. 그러나 체포 당시 선장은 안에 없었고 중국인 선원 13명만 체포되었다. 바다의 안전을 위협하는 해적선을 단속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국기모욕을 구실로 배상금과 사과문을 내라고 하였고, 당시의 총독이었던 '양광(兩廣)'은 사건 당시 배에 영국 국기가 걸려 있지도 않았고, 중국인 소유의 배이므로 영국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말이 오갔으나 사실은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다시 한번 청국을 두들겨 더 유리한 조약을 체결해 보겠다는 의도에 지나지 않았다. 설사 '애로 호 사건'이 없엇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무슨 구실을 붙여서든 이와 비슷한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 틀림 없었다.

 

영국 내각은 개전을 결정하였고 '파머스턴 '수상은 의회의 찬성을 얻기 위해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겨우 찬성을 얻는 비상수단까지 동원하였다. 프랑스는 신부 '샤프들레이네'가 중국인 신도를선동하여 모반을 꾀하였다는 죄로 사형에 처한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영국과 함께 참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차 아편전쟁

 

1857년 12월  영국-프랑스 연합군 5천 6백 명은 광저우를 공격, 시내로 침입하여 이 해 12월 29일, 광저우는 점령되고 시가지 곳곳에 을 지르고 민간인을 죽였다. 양광총독 '섭명침'은 포로가 되어 '캘커타'로 송치되었다가 2년 후 사망하였다. 영국-프랑스군은 광저우를 점령한 이후에도 3년 동안 지방관의 괴뢰정권을 앞세워 연합군위원회(영국, 프랑스)의 점령행정이 실시 되었다. 점령 기간 중 주민들의 반발은 심하였으며 특히 대영 투쟁의 경험이 있는 삼원리 주민들은 화염병과 함정 작전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불군에 대항하였다. 

 

광저우에서 아무리 소란을 피워봤자 북경 조정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편 전쟁을 통해 경험한 영불군은 북경을 위협하기 위하여 북상하였다. 미국과 러시아도 참관인 자격으로 동참하였는데 영국 군함 10여 척, 프랑스 군함 6척 이외에러시아 군함 1척을 앞세워 계속 북상하였다.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1858년 북상하여 '다구포대(大沽炮台)'를 점령하였고, 북경의 관문인 톈진의 '백하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북경 조정에 대하여 전권대사를 파견할 것과 만약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단호한 행동을 취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외국 함대가 북경에 접근하자 청 조정은 '담정양'을 흠차대신을 임명하였으나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정리를 참작하여 법으로써 회유하라."는 것이었다.

 

협상에 임한 '담정양'은 "광동.복건에서 2개 소항구를 개항하고 세액의 경감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영불의 전권대사는 제의를 일축하고 "더 이상 담판을 해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백하를 거슬러 올라가 천진으로 진출할 것이요. 대고의 포대를 연합군에게 인도하시오." 였다. 청국이 대고 포대를 인도할 리가 없었다. 역시 이 통고는 '계속 공격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잇었다. 결국 2시간여 공방전 끝에 '대고' 포대는 영불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포대를 점령한 연합군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 5월 30일 천진에 도착하였다.

 

북경 조정은 할 수 없이 대학사 '계량'과 이부상서 '화사납'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6월 4일 천진성 밖에 있는 해광사에서 회견하였다. 영국측은 다음 7개항을 요구하였다.

 

1. 사신을 북경에 상주시킬 것.

2. 원정비 및 광주 양관 방화 손해 배상

3. 중국 내지의 통상.여행.장강의 통상 개방

4. 그리스도교 선교사, 신도의 보호, 선교 보장

5. 세율표 개정을 위한 위원회 임명

6. 해적 진압을 위한 협력과 원조

7.공문서에 영문을채용하고 조약은 영문을 정문으로 할 것.

 

청국측 흠차대신 계량과 화사납은 제1,2조항을 제외한 나머지 5개항을 문서화하기로 거의 합의하였으나 오랑캐를 인간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기영이 나타나 반대함으로써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다가 결국 청국 정부는 요구 사항을 모두 받아들여 1858년 6월 26일 조인하였다. 이른바 이것이 '천진 조약'이다.

 

 

전쟁의 재개 

 

천진 조약 체결 1년 후인 1859년 6월 17일 영불 함대는 또다시 대고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미 조인된 천진 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조약의 비준을 위해서 함대가 왜 나타났는지는 그들의 속셈은 뻔한 것이었다.

 

대고는 백하의 하구에 있는 포대로 천진과의 거리가 50키로미터 정도이다. 백하의 하구에는 '대고.당고.북당'이라는 소도시가 인접해 있었다. 영불 함대의 출현 소식을 접한 북경 조정에서는 직례총독 '항복'을 파견하여 영불 대표를 맞아 협상을 진행토록 했다. 그런데 백하의 하구에는 뗏목과 철조망 등 지난해에 없었던 장애물이 매설되어 있었고 포대의 수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영불 대포들은 청나라 정부가 이 같은 장애물을 매설한 것은 천진 조약을 비준할 의사가 없는 증거라는 등 비약적인 논리를 펴 생떼를 썼다. 영불 연합군은 마침내 장애물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며 6월 25일 오후 2시부터 포격전이 시작되어 꼬박 2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포격전은 어이없게도 영불함대의 참패로 끝났다. 이 싸움에서 청국군이 승리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청군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민간 의용군이 분전했기 때문이었다. 결과 영국 군함 4척이 격침되고 2척이 나포되었으며 총 병력 1천 200명 중 5백 명에 가까운 병력들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영국 제독 '호프'도 중상을 입엇다. 영국 함대는 항해 불능한 군함과 포탄 등을 모두 버리고 상해 쪽으로 도망쳤다.

 

처음 당한 참패에 그들이 그냥 있을 턱이 없었다. 영불 양국은 세 번째 원정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다음해인 1860년 영국 군함 73척, 병력 1만 8천 명, 프랑스 군함 33척에 병력 6천 3백 명이 7월 말에 또다시 백하 하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8월 1일 '북당' 앞바다에 도착, 상륙을 개시하여 이곳을 지키던 청국측 장수는 맹장 몽골족의 '승격임심'이었다. 그러나 용맹을 떨치던 승격임심의 몽골 철기군도 영불군의 포격 앞에서는 무력하였다. 결국 청군이 궤멸되자 청국은 협상을 요청했다.

 

영국 대표 '엘긴'은 자신들 '빅토리아' 여왕의 국서를 황제에게 직접 전달할 것을 요구했으나 청국측 대표는 황제를 직접 알현하려면 '삼궤구고두'의 예를 다하지 않는 한 황제를 배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엘긴이 청국측요구를 거절한 것은 당연하였다. 영국 여왕이 청 황제에게 무릎을 끓는 것이 되므로 그 예를 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고 청국측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리지 않고서는 황제를 배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국측은 지난해 미국의 영사가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국서를 흠차대신 '계량'에게 건네주어 '계량'이 황제에게 바치는 형식을 취한 일이 있었는데, 청국은 이 예를 따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도 영국측은 거절하였다. 영국 대표는 청국측 수석 대표인 이천왕 '재원'에게 주먹을 들이대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함풍제는 친정할 결의를 보이는 조서를 내리면서 "짐은 전군을 통솔하고 통주(북경 동쪽의 도시)로 직행하여 하늘의 위엄을 보여 그들을 응징하겠노라." 고 하였다.

 

그러나 함풍제는 이 말을 한 입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동생 공친왕 '혁흔'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열하'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공친왕은 평소 대외 강경론을 제창하였으나 실제로 적이 나타나자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추태를 보였다. 함풍제가 후비들을 거느리고 '열하'로 도망친 것은 9월 22일이었고 영불 연합군이 북경의 '안정문'을 점령한 것은 10월 13일이었다. 이보다 며칠 전 10월 6일에서 9일 사이에 영불 연합군은 '원명원'을 노략질하고 방화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청나라의 진귀한 보물과 도서가 반출되었으며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던 것이다.

 

원명원의 약탈

연합군은 베이징 근방에 주둔한 후, 황제의 별궁인 원명원으로 쳐들어갔다. 영프 연합군은 원명원에 침입하여 금은 세공품과 장식품, 여러가지 화려하고 고상한 물건들을 약탈한 후 원명원에 불을 질렀다. 이것은 청 조정에 고문을 받거나 죽은 수십명의 서양인에 대한 복수라고는 하나, 그것은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원명원은 북경성 밖 10키로미터 지점에 있던 이궁으로 옹정제가 황자일 때 아버지 강희제로부터 하사받은 궁이었다. 건륭제 시대에 장춘원과 기춘원을 증축하여 원명원이라 불렀다. 장춘원에는 이국적인 향취가 넘쳐 흐르는 궁인데 건륭제가 위그루족의 여성인 향비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 유럽풍의 헤안당을 짓고 분수대까지 시설한 곳이었다.

 

간륭제 이후 황제들은 자금성을 공식 집무 장소로, 원명원을 사생활을 주로 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는데 북경에서 거리가 가가워 왕복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역대 황제의 수집품이 소장되어 있었다.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진귀한 서화.골동품을 비롯하여 희귀본.진본.금은 재보 등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미술관이며 도서관이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영불 연합군은 가져갈수 있는 것은 모두 탈취하고 움직이지 못할 것은 모두 부셔 버렸다. 하루 아침에 백만 장자가 된 자도 수두룩 하였다. 영불 연합군이 북경 입성이 늦어진 것은 원명원 약탈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보물 약탈에 열광하였다. 영불 연합군은 가는 곳마다 약탈.살인.방화.강간 등 만행을 서슴치 않았고 그들의 포로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에 보복전을 철저하게 치루고 있었다. 그래서 원명원도 약탈하게 되었으며 모든 보물을 약탈한 다음에는 원명원에 방화하는 일은 전권대사 엘긴이 결정하였고 대약탈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전쟁의 종결

 

일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러시아 공사 '에그나치프'가 조정해 청국의 공친왕과 영-프 연합군의 협상에 의하여 전쟁은 종결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중재하에 '베이징 조약(북경 조약')이 체결되었다. 베이징 조약에 의해 청 조정은 '천진 조약(톈진 조약)'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편의 거래도 합법화 되게 된다. 여기에 추가로 외국공사의 베이징 주재, 톈진을 포함한 11개 항구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 통상, 포교의 자유, 양쯔 강 및 통상항으로의 군함진입권,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 허용, 영국-프랑스에 전쟁배상금으로 은 800만냥, 그리고 영국에 홍콩에 인접한 '구룽반도(주룽사)'를 할양 조차하는 등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는 데 중재하여 도움을 준 러시아 제국에게도 연해주 지역을 할양하게 된다. 러시아와 미국은 영불 연합군에 편승하여 어부지리의 성과를 얻게 되었다. 1858년 6월 13일 미국은 '천진 조약'과 거의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보다 16일 전에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는 '아이훈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아이훈 조약에 의해 청국은 흑룡강 북쪽 땅을 러시아에 할양하였다.

 

1861년 1월에는 북경의 '총리 각국 사무아문(약칭 '총리아문')'이 창설되엇는데 이것은 지금의 외무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이 총리아문은 공친왕 혁흔.문상.계량 3인으로 출범하였다. 부설 관청으로 '총세무사'와 외국인 학교인 '동문관'이 설림되는 등 점차 불평등 조약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행정 기구들이 설립되었다. 

 

2차 아편전쟁의 패배는 모든 동양인들에게 1차 아편전쟁의 패배보다 훨씬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청 황제의 피신과 베이징의 점령은 단순한 전쟁의 패배가 아니라 모든 중국인과 동양인의 머리 속에 박혀있던 중화사상을 그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는 사건이었다.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청 조정은 양무운동을 실시하게 된다. 그리고 청 조정과의 조약으로 중국 내에서의 이권을 확보한 서양세력은, 아직까지 중국 남부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태평천국을 토벌하는 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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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침략과 약탈의 역사였다.

 

이처럼 힘 없는 자는 철저하게 유린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지금은 신사의 나라며 선진국이라는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도 마찬가지로 야만적인 것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하였다. 그들이 힘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점령하거나 다른 나라를 침공할 경우에는 이처럼 반인륜적인 잔학함은 극에 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이처럼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던지 수많은 문화재,영토,포로를 빼았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잔학함을 서슴치 않았다.

 

미국의 프로레스탄트들이 유럽에서 쫒겨나 새로운 땅을 찿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대륙인 북미에 당도하여 미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인 수많은 인디안을 잔학하게 멸족시킨 것이나, 스페인이 멕시코와 남미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과 그들이 이룩한  잉카.마야문명에 대하여 벌인 잔학한 전쟁과 반이륜적인 행위나, 몽골제국의 징키즈 칸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침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벌인 잔학한 행위나, 영불 연합군이 청나라에 저지른 만행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청나라도 중원 점령시 저항하는 한족에 대한 대대적인 살륙 행위는 수백만 명의 한족을 멸족시켰다.

 

지금은 강대국으로 군림하는 나라들이 모두 세계 곳곳에서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탈취한 문화재를 버젓이 그들의 박물관에 비치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도 이조 말엽  강화도 침략과 일제 강점 기간 동안 프랑스와 일본 등에 약탈 당한 수많은 문화재를 아직 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탈을 쓰고 남의 물건을 훔쳐간 도적떼라고 욕만 하고 있는 것이 최선은 아닐진데 문화재 반환을 위해서 지금까지 정부는 외교적인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같은 힘이 없는 약소 민족이나 나라는 항상 힘이 있는 인접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가진 것을 빼았기고 능욕을 당하며 노예처럼 살아온 것이우리들의 역사였다. 이는 나라가 부패해지고 공평.평등이 무너지면  비도덕.윤리가 판을 치고 가진자들이 스스로 국난의 위기에 앞장서지 않는다면 그리고 지도층과 권력을 가진자들이 바른 정치를 하지 못하고 권력 쟁탈에만 눈이 멀어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지 못한다면 백성들은 나라와 정부에 대하여 배타적인 감정을 가질 것이며 이는 바로 국론의 분열을 가져오고 부국강병이 허물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점이다. 부의 편중화 현상은 지도층의 부패와 비리를 초래하고 인재 등용은 혈연,학연.지연으로 이루어진다면 유능한인재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무능한 인재들이 지도층에서 지혜롭지 못한 결정을 내리고 안보가 취약해지면 주변 강대국은 언제라도 우리를 집어 삼킬 야욕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선진국으로 부유하게 잘 살고 있지만 그들의 부는 모두 약소 민족과 나라에서 탈취한 부와 자원으로 오늘의 그들이 있지 않는가! 

 

우리들이 역사를 통하여 미래를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야 함에도 우리들 역사를 소홀히 하고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조들의 과오를 오늘 다시 되풀이 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반성하지도 못하며 미래에 대한 지혜로운 국가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오로지 현실에만 급급하여 자신의 이기심만 추구한다면 그 나라와 민족은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