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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5 : 마오쩌둥 시대 4 (대약진 운동, 티베트 침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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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5 : 마오쩌둥 시대 4 (대약진 운동, 티베트 침공)

두바퀴인생 2010. 6. 29. 02:19

 

 

 

중국의 역사 135 : 마오쩌둥 시대 4 (대약진 운동, 티베트 침공)

 

 

대약진 운동

 

대약진 운동( 大躍進Dàyuèjìn, Great Leap Forward)은 공산 혁명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업의 대증산 정책이다.

 

마오는 《생산성 이론》에 근거해 이 정책을 실시했지만, 농촌의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집단농장화나 농촌에서의 철강 생산 등을 진행시킨 결과 2,000만명에서 5,000만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를 내고 큰 실패로 끝이난다. 이 때문에 마오의 권위는 추락하고 이 권력 회복을 목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1958 農業大躍進.jpg

1957년 11월 6일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소련이 공업 생산 및 농업 생산으로 15년 이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오는 이것에 자극을 받아,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을 세우고, 당시 세계2위의 경제 대국인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무모한 계획을 입안했다.

 

그러나 시장원리를 무시하며 인민에게 과도한 할당량을 부과하고, 엉성한 관리들의 주도로 무리한 증산을 지시했기 때문에 오히려 생산력 저하를 가져왔다. 대약진 정책이 시작되기 전에 마오는 1956년 《백화제방 백가정명 (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으로 공산당을 비판한 지식인들을 1957년반우파 투쟁》으로 척결하고 있었는데 다시 탄압을 받을 것을 우려한 지식인들은 침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일까지 강서성려산에서 개최된 《려산 회의》에서, 공산당의 요인 펑더화이가 대약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간하자, 마오의 노여움을 사서 펑의 지지자와 함께 실각을 시켰다. 이 결과 대약진에 대한 반대 의견이 없어지는 동시에, 한층 무리한 할당량이 부과되게 되어, 할당량을 달성할 수 없었던 현장 지도자들은 부풀린 성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받아들인 마오는 보다 많은 증산을 명령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마오쩌둥은 기계보다 인력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화 방안을 내세웠는데, 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를 개발하여 새로운 대형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대체하려 하였다. 대약진 운동은 소련식 모델을 본뜬 산업화 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반동운동으로, 1960년대 중·소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소련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소련에서도 실체를 수반하지 않는 할당량 보고가 계속되었고, 현실에서는 동서 양 진영 간 실력의 균형은 1970년 대에 붕괴되고 있었다.

 

결국 무리한 정책추진으로 인해 중국은 오히려 많은 인민들이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58년, 마오쩌둥이 참새를 가리키면서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한마디 한 것 때문에 참새잡이 광풍이 불어 참새 개체수가 급락, 해충이 창궐하여 대흉년이 들고 말았다. 1960년, 중국의 총농경지의 반을 차지하는 약 1억5천만 에이커의 농토가 가뭄, 태풍 및 여러가지 수해에 휩쓸렸으며 동 농토의 반 이상이 막대한 피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농토가 전 농산물을 상실하였다.

 

결국 대한민국 1970년대 전체 인구에 달하는 4,00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사상 최악의 굶주림과 기아로 사망하자, 1960년 초 중국 정부는 대약진 운동을 철회하고, 사유지와 농기구를 농민에게 되돌려주게 되었으며, 각종 공사조직도 폐지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려산 회의 이후 당내의 분열을 초래해, 대약진 운동의 결과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펑더화이는 숙청되고 1966년 초에 일어난 문화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대약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체 사망자수(3000만명~5000만명)에 이르는 인구를 전쟁 한번 없이 굶어죽게함으로써 경종을 울리며, 끝나게 되었다.

 

 

티베트 침공

 

1959년 티베트의 중국과의 동화를 도모해,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무력 침공을 단행하여, 티베트에서도 수십만 명에 이르는 대학살을 자행했다고 추측된다. 티베트의 최고 지도자 달라이 라마인도에 망명하여, 아직도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Tibet-claims.jpg
            티베트 망명정부가 주장하는 티베트의 영역
중국 정부가 정한 티베트 영역
티베트 자치구
인도악사이 친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지역
중국티베트 자치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지역
그 외의 티베트 문화 영향권

1912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제정한 설산사자기로, 현재는 티베트 망명 정부가 티베트의 기로 사용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 독립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티베트( 西藏 시짱)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고원 지역으로, 토착 티베트인들의 고향이다. 평균 고도는 약 4,900m이며, 지구상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네팔과의 국경에는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 수도(중심지)는 라싸(Lhasa, 拉薩)이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특성 때문에 희귀한 동식물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한족의 유입에 따른 지역 경제의 성장으로 티베트 특유의 환경은 위협받고 있다. 티베트의 70%는 초원이어서 주요 산업으로는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티베트는 현재 중국의 일부(시짱 자치구)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일부가 인도에 포함되기도 하며, 중화민국(타이완)에서는 공식적인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기도 한다. 티베트의 주권과 관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는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된 시기와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된 것이 국제법상 효력이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이견이 있다.

 

티베트는 중국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티베트 신화는 진화론과 과거 티베트 지역의 상당부분이 바다였음을 알고 있었던 듯한, 관찰할 만한 신비로운 성격을 띠고 있다.

'먼 옛날 이 설역 고원은 바다였다.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니 거품이 일어나고 이 거품들이 쌓이고 쌓이자 육지를 형성하였다 …(중략)… 시간이 또 흘러 남해 바닷가 보따낙가산 관음보살은 변종으로 나타난 원숭이를 보고 그를 대륙으로 보내어 살게 했다. 원숭이는 불도를 지키며 얄룽계곡의 한 동굴에 살게 되었는데, 남자(수컷)원숭이는 '투' 였고, 여자(암컷)원숭이는 '초' 였다. …(나찰녀가 나타나 원숭이와 결혼한 내용. 중략)… 그 후 나찰녀와 원숭이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진 여섯 자식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점차 털이 줄고 꼬리가 짧아지면서 일어나 사람처럼 변하였고, 결국 사람이 되었다.

 

티베트 역사

선사시대

1만여 년 전부터 티베트 지역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2] 중국어와 고대 티베트미얀마어군은 티베트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고 중국인들은 황하에서 을 재배하기 시작한 기원전 4,000년경에 분리되었다고 추측된다. 티베트인들은 약 500년경에 미얀마와 분리되었다.

 

철기시대의 구릉지 마을과 매장지가 티베트 고원에서 발굴되었는데, 티베트의 고대 문서를 따라 샹슝(Zhang Zhung, 象雄)문화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뵌(Bön) 지역 문화의 기원으로 알려졌다.

티베트 왕국(토번)

티베트민족과 한족의 마찰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서역 개척 무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티베트의 기록된 역사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중국 사서로 보면, 「신당서」엔 4세기 첸뽀(贊普, 토번 왕을 이르는 명칭) 라토토리넨쩬(拉托托日年贊)이 '줘떠투두' 로 기록되어 있다).[5] 티베트의 역사는 야루짱부강 계곡의 일부를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첸캄포(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40년 당 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文成公主, 625~680)와 혼인하였다. 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간쑤 지방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였다. 670년 ~ 692년에는 당과 대비천 전투(669년)를 통해 타림 분지와 인접한 신장카슈가르시를 점령하고, 승풍령 전투(678년)에 승리해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나 692년 중국 왕조 당나라의 장수 왕효걸이 이끄는 군대에 서역을 빼앗겼다. 당은 이 기세를 몰아 토번을 압박하고자 했으나 토번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가르친링(대비천, 승풍령 전투 승리시의 지휘관)에 의해 소라한산에서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아랍, 동부 투르크와 동맹을 맺었다. 747년에는 당나라의 장군인 고선지의 원정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티베트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750년까지 티베트인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대부분 잃었다. 고선지751년 탈라스 강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칼룩스의 연합군에 패하였고,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티베트의 세력이 회복되었다. 티베트는 북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고, 763년 안사의 난 때에는 당나라가 토번에 매년 바치던 공납을 중단한 것을 빌미삼아 그 당시의 첸뽀 치쏭데쩬(赤松德贊)이 다짜뤼공(達札樂宮)을 동정원수로 임명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잠시 장악하기도 하였다.

 

 

820년경의 세계. 티베트는 중국(노랑색) 남쪽의 짙은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821년 또는 822년에는 티베트와 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두 나라의 국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양국 언어로 기록된 이 조약은 라싸조캉사원 앞의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 티베트는 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왕국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티베트는 토번(吐蕃)이라 불렸고, 티베트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200년간 9대의 왕이 다스렸다.

몽골과 청나라 이후

이후 티베트는 13 ~ 14세기에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정권은 완전한 독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13년에는 몽골몽장 조약을 체결하면서 두 나라가 협동하여 한인의 공화정권인 중화민국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몽골에는 러시아, 티베트에는 영국이 무기, 차관을 제공하는 등 외부의 지원이 있었으나,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몽골과 티베트를 독립국으로서 인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티베트는, 신해혁명의 소식이 알려진 1913년, 라싸를 점거하였던 청나라 군대가 격렬한 시가전 끝에 물러났으나, 그 이후에도 중국국민당 등의 중화민국의 역대정권과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유지되었으며, 티베트 달라이 라마 정부의 실효적 지배영역내에서는 어떠한 중국의 기관도 설치가 승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국국민당의 사절단은 의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8년에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라싸에 계속 머물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영국령 인도로부터 이주해 온 영국군에 의해 갼세, 라싸와 카무 지방 각지에 통신기지가 건설되었다. 이 기지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무력점거하기까지 영국군의 무선기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하지만 티베트의 오랜 정치, 종교 합일의 농노 제도하에 국민들이 점점 고통받으며 불만을 갖기 시작하였다.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은 독립국으로서 존재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였으나, 북경정권의 시대에는 군벌의 혼전, 남경국민정부 시대에는 대일전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에 대하여 압력은 행사하였으나 본격적인 군사적 침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의 승리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티베트의 전 지역을 목표로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군사행동을 시작하여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1951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중국에 의해서 점령, 통치되고 있으며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인에 대한 장기적출과 학살로써 티베트를 지배하였고, 1960년대에는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시짱자치구(서장자치구, 西藏自治區)가 설립되어 티베트인들에 대한 자치가 허용되었다. 티베트의 중국 귀속 이후로 망명을 떠난 티베트인들의 일부는 동화정책에 따라 티베트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 한인의 이민을 실시하여 한족의 인구 비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포탈라 궁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행하였고, 2005년에는 티베트로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2008년 티베트 반중국 시위

2008년 3월 10일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수도승) 600여명의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로 시작되어 2008년 3월 14일 티베트 독립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고,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사태가 격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