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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43 : 중국 역사 개관 및 이해 본문
중국의 역사 143 (중국 역사 개관 및 이해)
중국 역사 개관
중국이란?
중국이란 뜻은 천자가 거하는 땅이며 사방 제후들의 땅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또 주나라가 황하 중류에 위치하여 '중원의 나라'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하.상.주족이 하나로 융합된 민족으로 하의 명칭을 사용하여 중국이라고 하며 화하, 구주라고도 한다
중화민족의 혈통적 기원은 17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 도개골이 1965년 운남 원모현에서 발굴되었고 불 사용한 것으로 흔적을 발견하였다 (원모인). 6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북경 주구점에서 발굴(1923년)한 두개골은 현대 인류의 두개골 용량(850~1300cc)(북경인)과 비슷하다. 40~2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산서성 정촌에서 발굴(1954년)한 두개골은 몽고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3~4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북경 주구점 상동에서 발굴한 유골은 비몽고인형(코카사스,니그로형)이다.
중국 역사의 구분은 통일/평화-분열/투쟁의 반복으로 진.한-삼국.진.남북조-수.당-오대.송.요.금-원.명.청대를 이어왔으며 서양사적 관점에서 구분하면 고대(후한까지)-중세(오대까지)-근세(송 이후)로 구분하고, 유물사관적 구분은 원시공동체 (170만면전~삼황오제)-노예제 사회(하.춘추)-봉건제 사회(전국시대~청 1840년 아편전쟁) -반식민지/반봉건적 사회(1840~1949년 중화 인민공화국)-사회주의 사회(중화 인민공화국)로 구분한다. 일반적인 구분은 고대(원시.노예.봉건~1840년 아편전쟁)-근대(1840~1919.5.4 모택동 신민주주의론)-현대(1919.5.4~1949신민주주의 혁명 시기)-당대(1949~현재)로 구분한다.
중국 역사에서 왕조별 개관하면 진나라는 법가사상 통치,절대군주 황제,통합정책, 한나라는 유학사상 주도, 왕조 정통성 확보, 실험 문화 변질(도참설), 남북조 시대는 분열,흥기,불교 발전, 유교+노장 사상 결합, 현학사상 대두되었고, 수.당 시대는 유교문화 중흥,종합문화,다양성,경제요소 변화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성리학+관료문화 발전,교조적,선학의 자유분망함이 활기를 띠었고, 요.금 시대는 북방문화가 중화문화에 수용된 시대였다. 원나라는 라마문화가 번창하였고 문화독재,고립화,몽고인 우월주의가 철저한 계급구조를 이루었다. 명나라 시대는 유교교조적 사상 통치, 저항문화, 낭만적 문화, 자본주의 발아기로 심학사상 퇴조와 유교교조주의가 팽창하였다. 청나라 시대는 중화문화 수용하여 대부분 동화되었으나 한족을 관리에 등용하여 만주족과 통합 정치를 추구하였으며 강희.옹정.건륭제 기간은 청의 최대 강성기로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나 이 후 이어진 왕조는 무능과 사치에 빠져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서태후 집권 이래 말년에는 개혁의 기회를 상실하고 부패와 무능이 극에 달하여 아편전쟁 등 열강의 침탈이 계속되어 오다 일본과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일 전쟁에서 패하는 등 멸망의 기운이 짙어가다가 손문의 신해혁명과 북양군벌 원세개에 의해 청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손문에 의해 수립된 중화민국은 신해혁명 결과 국민당이 발족되고 손문의 삼민주의에 의해 민주정부와 북벌을 통해 통일을 추구하였으나 군벌들의 발흥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문이 도중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장제스에 의해 국민당은 북벌을 감행하여 통일을 이루게 된다. 국민당은 장제스의 독재정치로 군벌 문화를 수용하는 한편 전제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 군벌들과 내전에서 승리하여 국민당 일당독재를 이루게 된다. 장제스는 홍군 토벌에 주력하자 마오쩌둥은 남부의 근거지를 모두 상실하고 대장정을 통하여 서남부 일대의 농민들에게 소비에트를 살현하고 농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면서 고난을 통해 공산당은 더욱 결속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장제스는 홍군 토벌을 진행하는 한편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해서는 국제 연합을 이용하여 처리할 작정이었으나 일본은 국제 연합의 권고를 무시하고 상해 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중국 침략이 시작되자 장제스는 홍군 토벌을 일단 중지하고 항일전에 뛰어 들었으나 강력한 일본군에 침공에 계속 밀리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장제스가 장학림에게 구금되는 시안 사태 후 2차 국공합작을 이룬 뒤 항일 전쟁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종전후에는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확장하던 공산당에 대해서 다시 토벌전을 전개하여 국공 내전으로 혼란을 겪다가 미국의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토벌전을 벌였으나 부패가 극에 달한 국민당군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던 공산당군인 홍군에게 연전연패하여 결국에는 국민당은 대만으로 철수하고 본토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석권되어 마오쩌둥에 의해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다.
정권 수립 후 마오쩌둥은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 농장, 인민 공사 등 공산체제를 시도하였으나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그 책임을 지식인 우파에게 전가하여 우파에 대한 대숙청이 이루어지고 한국 전쟁 참전, 티베트 침공 등 영토 확장과 외세 침략에 대한 방어 전쟁을 시행하였으며 소련과 이념분쟁으로 국경 분쟁까지 벌이는 등 중국을 수반으로 하는 제3세계를 구축하였으며 내부적으로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 문제로 2선으로 물러나 교육에 전념하기 되는데, 권력을 잡은 지도층이 정치.사회체제의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는 등 마오쩌둥이 지금가지 실시해오던 정책을 무시하고 새로운 정책을 추구하자 실각 위기에 놓인 마오쩌둥이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수년 동안 키워오던 어린 청소년소녀들을 동원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그들을 충동하여 일으킨 것이 '문화 대혁명'이다. 문화 대혁명은 소위 '10년 동란'이 전개되면서 지도부, 당원, 지식인, 대지주, 군부내 등 반대파에 대한 체포,구금,고문,자이비판,공개 처형,조리 돌림,인민 재판으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 숭배 사상까지 전개되다가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문화 대혁명은 종식된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화국봉-덩샤오핑으로 실권이 이어지면서 문화 대혁명을 중지시키고 중월 전쟁, 4인방 축출로 정권을 안정시킨 후 덩샤오핑은 과감하게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성공적인 달성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장쩌민-후진타오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대별 개관
자바 원인 (猿人)과 함께 알려져 있는 `베이핑(北平)원인`의 뼈는 지금으로부터 약 40∼50만년 전의 구석기시대 초기의 것이라고 한다. 황허(黃河)의 유역에는 오랜 옛날부터 인류의 선조가 살고 있었다. 한(漢)민족의 고향도 역시 황허의 유역이었다. 그들은 비옥한 황토와 물이 풍성한 상류 지방에서 일찍부터 농업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에 황제(皇帝)가 나와 나라를 이룩하고 요(堯) 순(舜)등의 명군(名君)이 나타나고, 그 다음엔 황허의 치수 사업을 환성한 우왕(禹王)이 하(夏)나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확실한 역사는 같은 황허 중류에 일어난 나라 은(殷)으로부터 시작한다.
은(殷)문화와 한자의 발명
은이란 나라도 오랫동안 수수께끼 속에 싸여 있었다. 은문화의 유적(은허 殷墟)으로부터 나온 궁전이나 주택의 터, 무수한 토기 도기(陶器) 청동기 보석류가 `황하문명`의 모습을 상상케 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귀중한 것은 거북의 등 과 짐승의 뼈 따위에 새겨진 갑골(甲骨)문자였다. 한자(漢字)는 이 갑골문자로 시작되어, 주대(周代)의 금문(金文 동판에 새긴 문자)을 거쳐 완성되었다.
은나라가 번영하고 있을 때, 그 서쪽의 웨이수이(胃水)근처에 주(周)가 일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기원전 1125년에 건국되었는데, 무왕(武王) 때에 동쪽으로 세력을 뻗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문화를 이어받아 최초의 봉건국가를 건설하였다. 주나라는 기원전 777년, 도읍 뤼양(洛陽)으로 옮기고 동시에 차차로 쇠퇴하여 춘추시대(기원전404년)으로 들어가고, 각지의 제후가 천하통일을 다투는 전국(戰國)시대(기원전 1112년)를 이루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간에 걸쳐 문자 그대로 세상이 혼란하던 약육강식의 시대였으나 한편으로는 많은 학자들이 가지가지 학설을 들고 나와 천하국가를 다스릴 길을 설파하였으니 이 때의 학자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은 유교를 편 공자(孔子 기원전 6∼5세기)와 도교(道敎)의 시조가 된 노자(老子 기원전 6세기)였다. 노(魯)라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인(仁)`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 도덕을 이상으로 한 세상을 만들려고 생각하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제후에게 그 가르침을 전하였다. 이에 반하여, 노자는 `무위(無爲)하면서도 다스린다`는 자연의 도를 설파하였다. 이 가르침은 상당히 어려운 철학적인 것으로서, 후세의 중국 사람들의 마음에서 살아갔다. 공자나 노자에 있어서는 서양인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동양인의 사상과 지혜와 도덕이 있다. 그러나 공자나 노자는 당시의 봉건사회 위에 서서 성인군자의 길만을 설파하였기 때문에 참다운 의미로 서민을 구하고,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은 없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중국에서의 최초의 농민 반란은 주나라의 여왕(9세기)때에 일어났다. 왕은 수도로부터 쫓겨나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두 사람이 정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얼마 지나자 다시 농민들에게 무거운 질곡을 씌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사에 허다한 농민의 반란은 언제나 어떤 야심가에 이용되어 버리고, 성공하지 못한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춘추시대에 백 수십을 헤아리던 진 초 연(秦 楚 燕), 제(齊), 조(趙), 한(韓), 위(魏)의 7대국으로 뭉쳐졌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세웠다. 이 사이에 월(越)나라의 구천(勾踐)을 도와 회계지치(會稽之恥)를 씻은 범라(기원전 5세기)의 이야기가 생기고, 또 진(秦)나라에 대해 여러 나라가 `합종(合縱) 연형(連衡)`의 전술을 외친 것도 역사상 유명하다. 자유경제와 국토개발로 국력을 기른 진나라는 기원전 1149년에 통일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진(秦)나라왕 정(政)은 천하를 손아귀에 쥐자 스스로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다. 그는 그 때까지의 봉건제를 없애고 군현제(郡縣制)를 펴고 중앙 집권적인 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마음대로 정치를 휘두르던 시황제(始皇帝)는 비위에 거슬리는 학자들을 잡아 생매장을 하고, 대나 명주에 쓰인 수많은 책들을 불살랐다. 도 70만이라는 죄인과 보통의 농민들을 몰아서 만리장성과 아방궁(阿房宮) 등의 대공사를 시켰다. 이와 같은 학정(虐政)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각지에 번지자 진(秦)나라는 단 2대 15년만에 망해버렸다.
기원전 202년 한(漢)을 세운 유방, 즉 한의 고조는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봉건(封建)과 군현(郡縣)을 합쳐, `군국(郡國)의 제도`를 폈다. 차차 발전한 한나라는 7대 무제(武帝)때에는 북쪽의 흉노(匈奴), 동쪽의 조선, 남쪽의 안난(安南), 서남쪽의 이민족 등을 쳤다. 그밖에도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 안식(安息). 대월씨(大月氏). 대하(大夏) 로부터도 공물(貢物)을 징수하였다. 그 결과 한(漢)민족의 세계는 현저하게 팽창되어, 민족의 영예가 높여짐과 동시에 무제 때 장건에 의해 동서세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라는 새로운 길도 열렸다. 서방측의 진귀한 물질 문화가 수입되고 중국의 명주며 칠기 등이 서방세계로 들어갔다. 유럽인이 이름 붙인 `비단의 길`은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황제들의 사치와 환관(宦官) 외척들의 횡포로 한나라는 얼마 안 가서 외척이던 왕망(王莽 기원전 45∼113년)에 의해 정권이 무너졌다. 이 때까지를 전한(前漢)이라고 한다.
그 후 광무제(光武帝)가 `녹림(綠林)의 도(徒)`라는 농민비적의 도움을 얻어 한(漢)을 부흥(後漢)시켜 후한을 건설하고 유교에 의한 정치로 한 때는 평화로운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후한(後漢)도 궁정 안의 싸움과 대지주들의 힘이 강해지자 차차 쇠퇴하여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계기가 되어 또다시 전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황건적의 난이라는 것도 당시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의 하나이다.
전란(戰亂)시대
기원 1210년에 망한 후한의 다음은 `삼국사(삼국지)`의 시대 (1210∼1165년)이다. 위(魏) 촉(蜀 오(吳)의 세 나라에 각지의 호족과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상반되어 또다시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다. 위(魏)의 조조(曹操)와 촉(蜀)의 유비(劉備)가 다투고 있을 때, 가지가지 묘한 술책으로 유비를 도운 사람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이었다.
삼국의 뒤에는 진(晉)과 5호(胡) 16국의 시대(265∼420년)가 온다. 5호라는 것은 몽골계. 티베트계 등의 다섯 이민족을 가리킨다. 이들은 통일 상태가 헝클어지자 이를 기회로 중국 북부에 침입하여 16개국이나 되는 작은 나라를 세웠다가 멸망시키곤 하였다. 그 후 남북조 시대가 전개되면서 수차례의 왕조가 창업과 흥망을 반복하다가 수나락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삼국(三國)으로부터 남북조(南北朝)까지의 서로 다투는 시대는 370년간 계속되었다. 기원 589년이 되어 겨우 북조(北朝)측의 수(隨)도 2대 30년 정도로 망하고 말았다. 수나라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일은 양제(煬帝)때에 완성된 황허(黃河)와 창장(長江)을 연결하는 대운하의 건설이다. 양제는 그런 사업을 완수하면서 사치한 생활에 날이 지고 새고, 수차례의 대규모 조선 원정에 실패하곤 하여 스스로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오대 십국과 송(宋)의 시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니 통일은 또다시 헝클어지고 당이 멸망의 길로 접으들면서 오대(907∼960년) 십국의 전란이 계속되었다. 이 시대에는 당나라의 귀족들이 쇠락하여 지방의 방위에 당하고 있던 절도사(節度使)들의 힘이 강해졌다. 오대 즉 다섯 나라가 연이어 흥망한 후, 후주(後周 950∼60년)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이 찬탈에 의해 제위에 올라 송나라(960∼1279년)를 일으켰다. 그 후 송나라는 문약에 흘러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니 산업도 진흥하고 상업 자본도 발달하였다. 문화상으로는 당나라의 귀족문화에 대체하여 서민적인 문화가 성하였다. 서양의 르네상스의 3대 발명이라고 하는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이 중국에서는 송나라시대에 발명되었다.
이 때쯤 해서 북방의 고원에는 새로운 몽골족이 일어났다. 12세기에 들어서 징기스칸이 나타나자 곧 민족을 통일하고, 1219년에는 웅대한 정복의 길로 나섰다. 징기스칸은 정벌 도중에 죽었으나, 단 몇 십 년 동안에 중앙아시아, 북서인도, 러시아, 동유럽까지 짓밟고 역사상 가장 큰 유목제국을 건설하였다. 징기스칸이 죽고 나라는 분열되어 권력다툼이 지속되다가 쿠빌라이가 제위에 오른 1271년에는 제국의 이름을 원으로 고쳐 베이징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한민족을 지배한 원은 언제나 몽골 제일주의를 취하고 중국인의 전통과 문화를 짓밟았다. 그 때까지 중국에 침입한 이민족은 모두 중국문화에 동화되었으나 원은 그렇지 않았다. 대제국 건설로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이 열리고, 마르코폴로를 비롯한 서양 사람들이 기독교를 중국에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제국도 백 년이 못되어 멸망하게 되었다. 패망의 원인은 폭정으로 인한 핍박으로 통치 방식에 무리가 있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늘어나면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무엇보다도 한민족이 스스로의 반원 깃발을 높이 들고 반항의 불길을 올린 것이다.
명(明)에서 청(淸)의 시대로
몽골족을 쫓아내고, 한민족을 위한 중국을 부활시킨 것은 1368년의 일이다. 이것이 명나라다. 최초의 황제가 된 주원장(柱元章)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자라나서 거지 노릇을 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제위에 오르자 농민의 일은 잊어버리고 전제정치를 강화하고 수만 명의 신하와 학자들을 죽였다. 후계 문제로 인해 연왕(燕王) 주체가 군사를 일으켜서 1402년에 제위를 빼앗아 수도를 난징으로부터 베이칭으로 옮겼다. 명나라 시대의 문화적인 업적으로는 2천명의 학자를 모아 대백과(大百科) `영락대전`을 만들었다.
청나라는 원나라보다 훨씬 오랜 1911년까지 250년을 다스렸다. 그러나 소수의 만주 사람이 중국을 어떻게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민족의 사회가 낡은 중세적인 신분에 얽매여 서양 같은 국민 국가로서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엽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시대에 가장 강성하였으며 당시 인구는 1억을 넘었다. 나라 재정도 윤택해지고 외국에 상품도 많이 수출하여 많은 은화도 획득하였으나, 이것이 곧 근대화의 길은 아니었다. 청나라는 그저 겉치레의 번영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의 군함과 대포앞에 최강을 자랑하던 청나라 팔기군은 힘없이 대패했다. 결국 난징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으나, 청은 자유무역과 외국인의 특권을 인정하게 되자, 이로부터 유럽 여러 나라는 차차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게 되었다.
얼마 지나자 일본도 침략자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일본이 대륙에 손길을 뻗칠 계기가 되었다. 이제 무력해진 청은 침략에 몸을 맡길 도리밖에 없었다. 분함을 참지 못한 중국 백성들은 의화단(義和團)을 조직하여, 외국인을 습격하였다. 이 때문에 철도부설권. 광산부설권 등 모두 외국의 손에 넘어가고 독립국이란 말은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20세기를 맞이할 전야였다.
유럽 여러 나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에서 독립의 싸움이 시작된 때였다. 이 때 새로운 혁명사상을 가지고 일어선 이가 바로 손문(孫文)이었다. 그는 광동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널리 지식인 농민들에게 호소하여 혁명운동을 추진하더니, 1911년 `신해(辛亥)혁명의 결과 마침내 청을 넘어뜨렸고 다음 해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중국은 완전히 구각을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손문은 중국 내분을 우려하여 당시 막강한 북경군벌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원세개(袁世凱)에게 총통 자리를 양보하였고 이에 원세개는 황제가 되려는 엉뚱한 생각을 품은 야심가로서 손문 계통의 혁명파를 누르려고 하였다. 당시 국내에는 많은 군벌이 다투고 있었고 봉건적인 제도와 습관이 뿌리 깊이 남아 있었다. 손문은 그가 창도한 삼민주의의 이상도 실현하지 못하고 죽었다.
중국 역사의 대한 이해
우리가 중국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가 우리들의 역사에 비해 장구한 역사와 한족을 비롯한 주변 소수민족들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왕조들의 탄생과 멸망이 있었고 넓은 영역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분량 또한 엄청난 내용이다. 중국 역사를 기술하면서 그동안 중국에 대해 그냥 대략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자신에게 다시 한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시각도 변하였다는 점이다.
중원 땅은 중국 역사의 발원지이며 중국인들이 중원을 지배하는 자는 천하를 지배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수많은 주변 이민족들이 중원 땅을 침범하여 중국을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결국 한족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하여 나라가 멸망하고 중원 땅에서 쫒겨 나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중원 땅은 커녕 고구려 시대를 제외하고 산해관을 넘어보지도 못하고 그들의 간접지배를 받아왔다. 또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우리들의 역사도 흘러 왔을 뿐이다.
그리고 중국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정립이 필요하다. 개념정립 없이는 중국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큰 오류를 범하기도 쉽다는 점이다.
중국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중국 역사는 왕조 중심의 역사서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의 역사는 그 유구한 시간만큼이나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또 중국의 언어나 그 기록을 위한 문자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아서, 또 역사적 사실관계를 당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한 왕조가 바뀌거나 최소한 한 세기가 흐른 후에 각자의 시각으로 해석을 붙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에 대한 시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중국의 정사(正史)라고 하는 것은 한 왕조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대륙 전체와 그 많은 인민을 역사라고 하는 커다란 틀로 전부다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의 역사는 사실관계의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유추관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누구나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무리함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공상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고대 역사는 신화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 문자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라도 그 해석의 방향이 천차만별이다. 역사서는 전대의 수많은 역사서를 참고하여 기술하였으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의 판단에 의해 자의적으로 기술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가 없다. 중국의 역사서 중에서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바로 사마천이 쓴 사기이다.
세 번째는, 중국 역사는 이중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중국 왕조를 중심으로 기술하였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이 침소붕대하거나 은폐축소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정한 중국의 역사인지를 분간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중국 왕조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고, 주변 소수민족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기술한 김부식의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수.당의 침공에 대해서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중국의 역사서에는 세부적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중국 중심의 역사 기록이 관행처럼 기술되어 왔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중국의 역사는 주변국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역사 자체보다도 주변국의 역사와 같이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중국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로마의 역사나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역사를 모르고서 중국 역사의 진실로 접근한다는 것은 자석 없이 밤중에 바늘을 집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여러 역사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중국역사에 대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국을 오해해서 중국 역사를 에피소드로 여긴다든지, 중국 역사가 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고 폄하한다든지, 중국 역사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잃고 가장 큰 민족과 가장 큰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세계 역사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 하게 될 것이다.
중국역사를 왕조별로 비교적 잘 정리한 미국의 역사 연구가 '오우웬 라티모어'의 저서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중국 역사를 연구한 선교사가 「중국역사는 너무나 요원하고 단조로우며 애매하다.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너무나 공상적이어서 역사와 우화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경역사나 영국사처럼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의 뒤를 이었다」고 하는 식의 무익한 인명록에 인간적 흥미 때문에 때때로 첩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것을 역사라고 가르쳐온 것으로부터 나오는 말이다.
아마도 그 같은 방법으로 배우는 한 중국의 역사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의 역사에 비교해도 과도하게 많은 연호(年號)라든가, 외국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인명의 어려움이라든가, 왜곡과 민담의 복잡한 가감으로 흥미를 끌지 못하는 역사로 이해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또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관찰자들 간의 입장과 시각이 제각기 달라 어느 것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매우 모호하고, 당대에 기록 된 것보다는 수 세기동안 구전되었다가 기록되거나 2차적 창조나 필요한 부분을 서술을 통해서만 중국사를 대하게 되므로 그 사료적 가치를 측정하기란 정말 난해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배운다면 인류의 역사상에 찬란한 광채와 선지자적인 그림자를 던지는 중국 역사의 찬란한 면모를 통해 인류의 모든 역사의 용광로를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시아에서 발생한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기원으로부터 철학, 종교, 문학, 예술의 발전이 최고 정점으로 이르기까지 중국의 위대한 창조적인 시대의 것을 추월하는 문화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과 사상뿐만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방면에도 우리들은 구주 문명의 기원은 거의 구주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부분이 그들이 창조하거나 발견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종이와 인쇄술, 화약과 나침반, 비단과 직조술, 음용의 차와 음식의 향신료, 도기와 피혁기술 등이 모두 그러하다.
만약에 중국인들이 피혁기술을 창조해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그들이 들어가 살 수 있었을 것이며, 어떻게 에스키모 인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침반이 단 1세기만 늦게 발명되었더라면, 오늘날의 구라파의 문명이 아메리카로 이동하는데 몇 세기를 더 많이 흘려보내야 했을지도 짐작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자랑으로, 심지어는 우월하게 까지 거들먹거리며 중국 역사를 하나의 만화로 격하시키려는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지켰을 것이며, 성서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역사 학자들의 그 논거는 중국의 종이와 인쇄술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말이다.
역사에는 고정된 기점은 없다.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도 언제나 더욱 먼 옛날로 갈 수 있다. 역사가들이 기점을 정하는 이유는 연구를 거기서부터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기선을 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구하여 수많은 추리를 끌어다 붙이고 사실로 왜곡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사는 아주 많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도 남을 것이다.
역사 안에는 얼마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 희미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커다랗고 먼 사실을 발견하며 그것을 지식의 체계로 모아 역사가 오늘날에 와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일부분은 사실, 일부분은 전설, 그리고 일부분은 추측에 불과한 일종의 증거를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역사를 다루다보면 연구자의 지극히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마련이고, 또 다시 후대의 사람들은 그 가미된 역사의 진위를 따지느라 또 세월을 흘려보낸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보는 기선을 언제로 잡느냐? 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부연하면 사실을 보느냐? 역사를 기록한 사람의 인간적 추측과 가미된 요소를 중점으로 보느냐? 에 따라 우리가 전설을 향해 가느냐? 역사의 진실을 향해 진일보하느냐? 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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