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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44 : 중국과 한반도 간 전쟁사 본문
중국의 역사 144 : 중국과 한반도 간 전쟁사
중국의 역사 속에서 한반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왕조가 바뀔때마다 통일 후 넘쳐나는 군사력과 반대파를 몰락시키는 방법은 대외 전쟁을 통해 소모하는 방법이 유일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반도 전쟁을 통해 허약한 왕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한반도의 인구 수와 중국 대륙의 인구 수를 비교하면 수십배의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 그들이 한번씩 동원하는 병력수는 가히 한반도 국가들이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군사력을 동원한 황제는 수양제로 113만 대군이었다. 113만 전투병력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부대는 그 2~3배의 수가 된다고 역사가들은 이야기 하고 있어 약 500만 명 가까이 되지 않았을 까 하는 추측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한 수 양제는 고구려에 참패하고 말았다. 결국 수나라는 수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고 반란이 일어나 짧은 기간에 멸망하고 말았다.
수나라 뒤를 이은 당나라 태종도 '현무문의 변'을 통해 형제들과 반대파 장수들을 제거하고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황권을 차지하여 대외 원정을 진행하면서 수나라의 원수를 갚고 신라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에 의해 성공적인 방어 작전을 전개하였고 당나라 군대는 수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 아들 3형제의 권력다툼으로 나라가 분열되자 나당연합군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한반도 침공은 순순히 말을 잘 듣는 경우에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으나 이민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한반도를 침공하였다. 복종 강요,군신.형제 맹약,간접 지배 등을 빌미로 고려 시대는 글안족의 3차 침공, 몽골족의 7차 침공을 겪으면서 고초를 겪었으나 모든 원인은 고려 자체의 부패와 무능이 만연한 결과였다.
이조 시대에는 인진왜란 7년 병화를 겪었고 뒤이어 후금의 2차에 걸친 침공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스런 항복을 하는 수모도 겪었다. 임진왜란과 후금의 침공도 모두 조선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병약함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이후 한반도의 나라들은 중국에 비해 국력도 미약하거니와 부패하거나 무능한 정치체제하에서 문약에 흘러 공허한 공리공론에 심취하여 국방을 소홀히 하여 일어난 병화였다.
한반도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에 따라 막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사대주의와 유교의 공허한 이론, 관리들의 부패, 인재등용의 제한, 상무정신 후퇴, 허약한 왕권, 정치제도와 군비제도의 부실 등 정치 사회 군사적인 모든면에서 중국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옛 영토를 모두 잃어버리고 한반도 안에 안주하기를 바랐던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눈도 말고 귀도 멀어버린 장애인의 나라였으며 그런 가운데 지도층 양반들만 배불리 먹으며 백성들의 피눈물만 짜내던 외척.탐관들의 전횡은 결국은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는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찿아보기 힘든 망국의 길을 걸었다.
중국과 한반도 간의 전쟁사를 네타즌의 글을 인용하였는데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과 한반도 간의 전쟁 역사 | |
이 글은 한족(漢族)과 우리나라 민족간의 전쟁사이며 선비나 몽골,만주족 등과의 전쟁사는 제외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가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공격했다. 고조선의 만만치 않은 반격으로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고조선 내부에서 정쟁이 발생하여 분열이 일어나서 기원전 108년 우거왕이 살해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 지역에 현도,낙랑,임둔,진번의 한사군을 설치했다.
기원전 75년 예맥족들의 항쟁으로 현도군이 크게 패해 흥경.노성 지방으로 후퇴했다.
서력 12년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을 일으킨 왕망이 고구려로 사신을 보내 흉노 토벌에 동참하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고구려 유리명왕이 장군 연비에게 군사를 이끌되 전투에 되도록 참여하지 말라고 지시해서 보냈다.
연비는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라고 낮게 말하는 신나라 장군 전담의 오만무도함에 화가 나 대열을 이탈해 고구려로 달아나다 추격해온 전담의 군대를 몰살시키고 전담 또한 죽여버렸다. 이에 왕망이 장군 엄우를 보내 연비를 죽이게 했는데 엄우는 계책을 써서 연비를 살해하고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왕망은 연비의 목을 고구려왕의 목이라고 선언하고 하구려후라고 칭하게 했다.
서력 32년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공격해 일부를 정벌했으며 서력 37년 대무신왕은 재차 군사를 일으켜 낙랑국을 다시 공격해 완전히 멸망시켰다.
서력 49년 고구려 5대 모본왕은 한나라를 공격해 북중국 일대인 북평,어양, 상곡,태원 등지까지 쳐들어갔는데 한나라는 장군 채동을 시켜 막게 했으나 결국 패하고 고구려에 막대한 세공을 바치기로 했다.
서력 55년 고구려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 진출해 10여 개의 성을 쌓고 고구려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서력 105년 태조대왕은 장군 목도루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현도군을 공격했는데, 현도의 6개 현이 순식간에 함락되자 현도태수 경기가 즉시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대량수 도하중에 현도의 군사들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5천이나 죽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태수 경기는 광기에 찬 기세로 끝까지 밀어붙였다. 결국 화살이 다 떨어진 고구려군은 퇴각했고 경기는 승리한에 만족하고 현도로 돌아갔다..
서력 121년 한나라의 안제가 유주자사 풍환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풍환은 요동태수 채풍과 현도태수 요광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갔다. 태조대왕의 동생 수성이 군사를 이끌고 한군의 공격을 받고있는 예맥성을 구원하러 갔으나 도중에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일부러 항복하는 계책을 써서 풍환을 방심하게 만든 뒤 예맥성 탈환에 나섰다. 유인책에 걸린 풍환은 고구려군의 매복공격에 군사 태반을 잃고 달아나다 예맥성을 빼앗기고 온 요동태수 채풍과 만났다. 둘은 요동의 요수현으로 후퇴해 재반격을 준비했다. 태조대왕은 직접 선비족 군사 8천이 합세한 정예군을 이끌고 수성과 합류했다.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한군은 대패했다. 이 싸움에서 요동태수 채풍은 전사하고 요광은 현도로 달아났으며 풍환은 요동의 6개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고구려와 화평을 맺었다.
서력 172년 고구려 8대 신대왕때 한나라 영제가 대장군 왕정에게 10만의 대군을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대장군 왕정은 현도태수 경림과 함께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환도산성을 포위한 한군은 공성전을 개시했으나 고구려군의 반격이 대단히 거세어 매번 실패했다. 현도태수 경림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던 왕정은 고구려 군사가 쏜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경림은 군량이 바닥나자 퇴각을 명했다. 고구려 국상 명림답부가 이 소식을 듣고 대가(大加) 우거와 주부(主簿) 연인에게 경기병 3천을 주어 추격하게 한 뒤 몸소 자신도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좌원(坐原)으로 나아갔다. 고구려의 추격군에게 한군은 크게 패했고 태반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현도태수 경림은 달아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고구려군에 항복했다.
고구려 11대 동천왕때인 234년 오나라의 손권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길 요청했다. 목적은 위나라 견제를 위한것이었다. 오나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 명제 조예는 즉시 사신을 고구려로 보내 은근한 압력을 가했다. 고심하던 동천왕은 오나라의 사신을 몰래 돌려보낸뒤 거짓으로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대신 처형한 사형수의 목을 위나라 사신에게 주었다.
238년 요동의 공손연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자 위나라 명제는 태부(太簿) 사마의에게 토벌군을 주어 토벌을 명하는 한편,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동천왕은 주부(主簿) 내탐과 대가(大加) 율도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의 정세를 관망하다가 요동의 서안평을 점령하도록 명했다. 공손연은 위나라군을 상대로 저항했으나 사마의의 계책으로 대패했고 서안평으로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이 매복하고 있는줄로 알고 오던 길로 달아나다 사마의에게 사로잡혔다. 공손연의 토벌이 끝난뒤 위나라 명제 조예는 고구려에 감사를 표시한뒤 요동에 사마의의 조카 사마강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242년 동천왕은 서안평을 고구려 영토로 선포했다. 이에 크게 놀란 사마강은 조정에 보고를 한뒤 군사를 이끌고 서안평으로 쳐들어왔다. 서안평을 지키고 있던 주부 내탐은 짐짓 패해 달아나는 척을 해 사마강을 유인했다. 이를 모르는 사마강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추격을 해오다 안평하에서 고구려 장군 화도(和道)가 이끄는 고구려군의 급습으로 대패해 그 자신은 물 속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다.
패전소식을 접한 사마의는 사마강을 크게 꾸짖은뒤 삭탈관직하여 집에 머물게 했다. 사마의는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고 싶으나 오와 촉이 공격해올지 몰라 그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다 결국 대세를 관망하기로 했다.
위나라의 정세를 간파하고 있던 동천왕은 장군 화도에게 명해 서안평 주위로 영토를 조금씩 확장해갔다.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고구려의 영토확장의 심각성을 보고했다. 조정에선 관구검에게 고구려를 정벌하도록 명했다. 관구검은 유주자사로 동북지역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그 자신은 지략이 뛰어나고 용맹했으며 밑의 군사들 또한 용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246년 관구검은 5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진격했다.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의 지척인 비류수에 도착한 관구검은 휘하장수 장문에게 먼저 강을 건너게 했다. 숲이 우거지고 이날따라 안개가 짙어 앞뒤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는데 동쪽에서 함성소리가 들리고 서쪽에서 북소리가 연달아 들려 동서로 왔다갔다 하던 위군은 지쳐버렸다.
안개가 걷히자 장문은 크게 놀랐다. 어느새 고구려군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다가 관구검이 장군 허일에게 구원하게 했다. 허일이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오자 고구려군은 그제서야 물러갔다.
관구검은 장군 허일에게 강을 따라 올라가 양맥(梁貊)을 지나 고구려군을 공격하게 했다.양맥의 골짜기를 지나가던중, 고구려군이 갑자기 나타나 위군에 맹공을 퍼부었다. 혼란에 빠진 위군은 허일이 직접 앞장서서 활로를 뚫어나가자 힘을 얻어 반격에 나섰다.위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고구려군은 후퇴했다.
두번이나 패하자 관구검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냉정하게 패전의 원인을 분석한 뒤 새로운 전술을 구상했다.
한편, 두번이나 승리하자 자못 기세등등해진 동천왕은 철기병 5천을 이끌고 위군을 공격했다. 국상 명림어수가 조심하라고 일렀으나 동천왕은 이를 듣지 않고 무모하게 공격을 시도하다가 관구검이 사각형의 방진(方陣)을 펼쳐 동천왕의 5천 철기병을 대부분 죽이고 이어 동천왕을 구원하러 온 명림어수의 군사까지 모조리 참살하니 그 수가 1만 8천에 달했다. 동천왕은 환도성으로 퇴각하려 했으나 이미 위나라 군사에 의해 막혀 있어서 남옥저로 달아났다. 환도성은 태자 연불이 지키고 있었는데 연불은 총력전을 펼쳤으나 관구검의 대군을 막을수 없었다. 결국 연불은 복수를 다짐하며 달아났고 환도성은 위나라군에게 함락되었다. 남옥저로 달아난 동천왕은 관구검이 보낸 현도태수 왕기의 추격을 받았다. 그러나 밀우와 유옥구, 유유의 결사항전에 힘입어 위군을 격퇴하고 고구려 5부(계루,연나,환나,관나,소노)의 군사까지 합쳐 환도성으로 진격했다. 고구려가 전력을 다해 공세를 가해오자 겁을 먹은 관구검은 버티지 못하고 유주로 퇴각했다. 그러나 환도성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동천왕은 247년에 동황성으로 천도했다.
서력 259년 고구려 12대 중천왕때 사마의의 차남 사마소가 장군 위지해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사마씨 집안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 사마소는 반드시 고구려에 복수하겠다고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위지해가 이끄는 위군은 양맥곡에서 고구려군의 매복에 걸려 대패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사마소는 불같이 노해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로 쳐들어가려고 했으나 공교롭게 촉의 강유가 공격을 해와 고구려 공격을 중단해야했다.
고구려 15대 미천왕은 302년 3만의 대군을 일으켜 현도군을 공격했다. 현도군 남부의 서개마에 고구려군이 도착하자 서개마의 백성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고 요양과 후성(候城)까지 점령하고 8천명의 포로를 잡아 도성으로 보냈다.
311년에 미천왕은 북부 패자 조불(組弗)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게 했다. 서안평에는 사마강의 아들 사마후가 지키고 있었는데 조불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다 패하고 그 자신은 사로잡힌뒤 처형당했다.서안평을 확보한 고구려는 요서지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얻었다.
313년에 이름만 유지하고 있던 낙랑군을 병합했고 314년엔 대방군마저 병합해 요동 지역에서 한족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
서력 369년에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의 대군을 반걸양의 치양벌(오늘날 황해도 배천 지방)에서 격파하고 371년엔 평양성으로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패사(敗死)시킨 백제의 13대 근초고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는데 그는 진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요서로 진출해 요서군과 진평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서력 391년에 18대 고국양왕의 태자 담덕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19대 광개토태왕이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백제를 정벌한뒤 뒤이어 연나라와도 전쟁을 개시했다. 강대한 고구려의 군대 아래 연나라 또한 무너졌고 광개토태왕은 화북 침공까지 계획했다.
서력 407년 유주자사 여진의 선처로 진황도 유주부가 의외로 빨리 자리를 잡자 광개토태왕은 5천의 철기군과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위의 연군(지금의 북경)으로 쳐들어갔다. 연군태수 탁발명은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내분으로 정신이 없는 북위 조정은 구원군을 보낼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연군,광녕,상곡,어양,대군,북평 일대가 고구려 철기병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후원을 받던 대연의 고운이 모반으로 인해 살해당하자 그는 원정을 중단해야만 했다.
서력 479년 백제 24대 동성태왕이 즉위했다. 나라가 안정되자 그는 점점 근초고왕대의 영화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 군사를 조련하고 강병을 양성했다.
서력 488년 남제의 무제가 백제에 협력을 요청해오자 동성태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동성태왕은 장군 목간나,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에게 명해 군사를 조련하게 했다.
488년에 동성왕은 장군 목간나와 군사(軍師) 사법명에게 2만의 정병을 주어 먼저 산동반도로 보냈다. 목간나는 산동반도의 요충지인 성양(成陽,지금의 칭다오) 앞바다에 주둔하고 있던 북위의 함선들을 공격해 불태웠다. 목간나는 여세를 몰아 성양을 공격해 반나절만에 성을 함락시켰는데 백제의 침공 소식을 들은 북위의 효문제는 크게 놀라 10만의 대군을 일으켜 백제군을 막게 했다. 이 때에는 찬수류와 해례곤이 이끈 3만의 백제군이 기벌포를 떠나 서해를 건너오고 있었다. 북위의 군사들은 갑작스런 백제의 공격때문에 허둥지둥 먼 길을 행군해왔기 때문에 산동반도에 도착할 즈음엔 기진맥진해있었다. 사법명은 북위군이 지친틈을 타 야습을 하자고 건의를 했고 목간나는 사법명의 계책을 받아들여 야습을 감행했다.
목간나의 기습으로 북위군은 혼란에 빠졌고 어두컴컴한 밤이다보니 사방을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둘러댔다. 그 틈을 타 목간나는 군사들을 이끌고 유유히 빠져나갔고 북위군은 아군끼리 서로 죽여댔다. 첫 싸움에서 백제군에게 대패한 북위의 탁발비는 이를 갈며 지원군이 오길 기다렸으나 조정에서는 남제의 무제가 이끄는 군사가 회수(淮水)를 건넜으니 속히 남제군을 막으라고 명을 내려 할수없이 회수로 진군했다.
이 즈음 성양에 찬수류와 해례곤이 도착하자 목간나는 여세를 몰아 산동 일대를 점령했고 백제의 영토로 삼았다. 동성태왕은 논공행상에서 목간나를 면중후(面中侯)로, 사법명을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를 벽중왕(碧中王)으로, 해례곤을 불중후(弗中侯)로 삼았으며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모견을 낙랑태수로, 고달을 대방태수로, 양무를 광릉태수로 회매를 청하태수로, 왕무를 성양태수로, 장새를 조선태수로 삼고 이를 남제의 무제로 통보했다. 무제가 동성태왕의 국서를 받으면서 백제왕을 태왕(太王)이라 칭하니 이때부터 백제의 왕들도 태왕이라 불렸다.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한 북위는 493년에 백제의 위세에 눌려 북경 부근의 수도인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494년에 북위는 전열을 정비하여 백제와 남제에 대해 전쟁을 개시했다. 남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남제군 3천명을 포로로 사로잡자 기세가 오른 북위의 효문제는 개전 21일만에 직접 전장에 나섰으나 불과 4일만에 백제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장군 풍탄이 전사하고 효문제 자신은 호위군의 호위를 받으며 후퇴했다.
497년에 다시 20만 대군을 일으켜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498년에 재차 전쟁을 일으켰지만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했다.
10년간의 전쟁에서 백제에게 참패한 북위는 산동지방과 회수 일대를 백제에게 완전히 내주고 국고를 탕진해 재정이 파탄났으며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24대 동성태왕은 초기에는 백제의 위세를 만방에 떨쳤으나 잇따른 승리로 자만심에 차 정사를 게을리하고 임류각이라는 화려한 누각을 짓는등 폭정을 펼치다가 결국 위사좌평 백가에게 살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서력 577년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고구려까지 공격했다.
고구려 25대 평원태왕은 친히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요서 지역의 배찰산에서 북주군을 대파했다.
서력 589년에 수 문제 양견이 진나라 이후 3백여 년간 갈라져 있던 중원을 통일했다. 남은건 고구려뿐이었는데 수 문제는 언젠가 고구려를 무너뜨리겠다고 다짐했다. 수 문제의 오만무도한 국서를 받아본 고구려 26대 영양태왕은 격노했다. 이제껏 고구려에 이토록 방자하게 대하였던 나라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력 598년 영양태왕은 몸소 말갈족 기병 1만을 이끌고 수나라의 영주부로 쳐들어갔다. 영주총관 위충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고구려군에게 패했고 수 문제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고구려 정벌군 30만을 편성해 고구려로 보냈다. 한왕 양량이 이끄는 군대는 요택에서 고립되었고 장마철이라 전염병까지 돌았다. 부원수 왕세적은 양량에게서 군사 5만을 받아 유성(柳城)을 함락시키라는 명을 받았는데 유성은 연태조의 부친인 연자유가 지키고 있었다. 왕세적은 짐짓 요택에 고립되어있는 한왕 량을 구하러 가는척 하면서 연자유를 유인했다. 유인책에 걸린 연자유는 수나라군의 매복공격에 걸렸고 왕세적에게 목숨을 잃었다.
요택에 고립되어 있던 한왕 량의 군대는 이미 전염병으로 인해 피폐해져 전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왕세적은 한왕 량을 요택에 그대로 두고 요하를 건너 개모성으로 진격했지만 강이식에게 대패하고 한왕 량과 함께 쓸쓸하게 수나라로 돌아갔다.
서력 604년에 진왕 양광이 아버지와 태자를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가 곧 수 양제이다. 서력 612년 수 양제는 113만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양제는 요동을 뚫지 못했다. 요동에서 가장 큰 성인 요동성을 수십일 동안 공격했으나 요동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는데 이에 양제는 별동대 30만을 편성해 요동성을 우회해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게 했다. 별동대로 편성한 30만 군대는 평양성까지 진격했다가 기진맥진해 공성전을 벌일 여력도 없어 돌아오던 중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몰살당하고 2천 7백여명만이 살아서 돌아오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후에도 수 양제는 계속해서 고구려 정벌전쟁을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실패했고 급기야 국고가 탕진되고 전국에서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락에 젖어있던 수 양제는 618년에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손자가 황위를 이어받았으나 왕세충에 의해 폐위되고 수나라는 3대 38년만에 단명했다.
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나라가 바로 당나라였다. 618년에 태원에서 북방을 방비하던 이연이 난을 일으켜 장안을 함락시키고 나라를 세운뒤 나라 이름을 당(唐)이라고 했다. 군웅 이밀, 왕세충, 두건적등을 평정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당 고조는 626년에 차남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자 그에게 황위를 양위했다.
626년에 당나라 2대 황제로 즉위한 당 태종 이세민은 야심이 컸다. 북으로는 돌궐을 굴복시키고 서로는 비단길을 확보하기 위해 640년 고창국을 정복하고 안서도호부를 설치했다.
644년 당 태종은 이적(본명은 이세적이나 태종의 이름이 이세민이라 '세' 자를 빼 버리고 이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에게 보기 6만을 주어 먼저 고구려를 치게 했고 몸소 자신도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그 뒤를 받쳐주기로 했다. 이적은 신성을 공격하다가 여의치 않자 남쪽의 개모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요동성으로 진군했다. 비슷한 시기에 장량이 이끄는 당의 수군이 요동반도 최남단의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비사성을 함락시킨 장량은 의기양양해져 행군총관 구효충을 시켜 고구려 수군의 전력을 탐색하게 했는데 구효충은 고구려 수군을 깔보고 함부로 전투를 진행하다 그 자신을 비롯해 군사들 대부분이 수장되었다.
645년 이적과 합류한 당 태종이 화공을 이용해 난공불락의 요동성을 공격, 함락시켰고 요동성 함락 소식을 들은 백암성주 손대음은 지레 겁을 먹고 당 태종에게 항복했다. 북부욕살 고연수, 남부욕살 고혜진이 대군을 이끌고 당 태종과 격전을 벌였으나 주필산에서 당군에 포위되어 패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항복했고 말갈군 3천 3백명은 구덩이를 판뒤 생매장시키는 잔혹함을 보였다
645년 7월부터 당 태종은 안시성 공략을 개시했다. 그러나 안시성주 양만춘의 지휘아래 고구려군사와 백성들이 합심해 결사항전을 계속하자 함락되지 못했다. 당 태종은 강하왕 이도종에게 명해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의 뼈대가 완성될 무렵 양만춘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급습으로 반 이상이 타버렸다. 그러나 당 태종이 꾸준히 토산 축조를 계속했고 고구려군은 당군의 공성을 막기에 급급했으므로 이를 막지 못했다.
이즈음 비사성에 주둔하고 있던 장량은 수군 일부만 비사성에 남겨두고 연안을 따라 올라가 건안성을 공격했으나 건안성주 기동부에게 대패했다. 이어 연개소문이 동생 연정토와 함께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는데 연개소문은 곧바로 장량의 함대에 공세를 퍼부으니 장량은 대패해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갔다.
안시성 공략을 계속하던 당 태종은 안시성에서 날아온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 당 태종이 부상을 입어 누워있을 즈음 양만춘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급습으로 토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 당 태종은 격분해 고함을 지르다 혼절하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되찾은 당 태종은 철군을 명했다. 그러나 철군하는것도 쉽지 않았다. 요하에서 고구려 추격군에 의해 많은 수의 당군이 죽었다. 1차 고.당 전쟁에서 당나라는 35만명의 군사를 잃었고 막대한 물자와 치중 또한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고구려는 6만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647년 당 태종은 좌무위대장군 우진달과 우무위장군 이해안에게 명해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 남단을 공격하게 했으며 이적과 손이랑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고구려의 신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번에도 신성 함락에 실패한 이적은 남소성으로 진격해 남소성을 공격했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자 목저성으로 진격해 목저성을 공격하던 중 신성과 남소성의 구원군이 오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급히 요하를 건너 퇴각했다. 우진달과 이해안은 비사성 공격을 개시했으나 성주 마혜진의 죽음도 불사한 활약에 고구려군민이 분노해 거세게 반격하자 실패하고 말았다.
648년 당 태종은 우무위대장군 설만철과 우위장군 배행방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비사성을 공격하게 했지만 이번에도 비사성 함락에는 실패했다. 설만철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박작성으로 목표를 바꾸었고 곧장 압록강으로 간다음 박작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시킬수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설만철은 크게 패해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갔다.
649년 당 태종은 등창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660년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삼아 13만의 대군을 주어 백제를 치게했다.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와 격전을 벌였고 마침내 관창의 죽음에 분노한 신라군의 공격으로 계백을 비롯한 5천 결사대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은 백강 하류에서 신라군과 합류한 다음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진군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니 백제는 온조가 나라를 세운 이래 31대 678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백제의 달솔 흑치상지가 임존성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자 순식간에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3만이 넘는 인원이 모여들자 소정방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임존성으로 쳐들어갔으나 흑치상지가 이끄는 임존성 군사들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661년 당 고종은 임아상,계필하력,소정방,소사업,정명진,방효태 등에게 명해 35만의 정예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그러나 누방도행군 총관 정명진은 진군 중 통정진 근처에서 고구려군의 매복에 걸려 그 자신은 물론 군사들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여도행군 총관 소사업은 겁을 먹고 영주의 유성으로 후퇴해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소정방과 임아상이 이끄는 12만의 당군은 고구려군의 주의를 요동으로 끈 틈을 타 별 저항없이 대동강 하구까지 오는데 성공했다. 방효태 또한 양자강 하구에서 7만의 군사를 따로 이끌고 그들과 합류했다.
평양성을 포위한 당군은 최신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여러번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평양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사이 당 고종은 계필하력에게 군사 6만을 주어 압록수로 보냈는데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을 얕보고 함부로 공격하다 남생의 계책에 빠져 군사 4만을 잃는 대패를 당했다.
662년에 국내성과 요동성에서 달려온 구원군까지 합쳐 총 13만의 정예군을 거느린 연개소문은 반격에 나섰다. 패강도행군 총관 임아상을 비롯한 패강도행군 8만명이 고구려군에 의해 모조리 학살되었고 연개소문은 이어 방효태가 있는 사수(蛇水)로 진격했다. 고구려군의 공격에 방효태를 비롯한 방효태의 13명 아들들 그리고 옥저도행군 7만여명이 모조리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평양도행군 소정방은 신라에서 보낸 식량으로 간신히 퇴각을 할수 있었다. 당 고종은 이번 전쟁의 처참한 패배로 다시는 고구려 정벌전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 연남생,연남건,연남산은 처음엔 협력했으나 연개소문의 오랜 독재에 불만을 품은 고구려 신하들의 이간질로 차츰 사이가 벌어졌고 급기야 서로 군사를 일으켜 전쟁까지 벌였다. 이 일로 연남생은 당나라로 망명했고 당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 고구려 정복전쟁을 개시했다. 당 고종은 이적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그 밑에 학처준,소상백, 방동선,독고경운, 두의적, 곽대봉 등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이적은 세번째로 신성 공략을 시작했으나 이번에도 신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성 성민 중 당나라 포로 한명이 몰래 성문을 여는 바람에 난공불락의 신성은 어이없이 당나라에 함락되고 말았으니 이때가 667년이었다.
신성에서 후퇴한 고구려군이 금산(金山)에서 당나라 장수 고간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신성을 공격했으나 설인귀의 기습으로 5만의 군사를 잃고 패주했다. 이에 설인귀는 남소,목저,창암 세 성을 함락시키고 남생과 합류했다.
668년 이적은 고구려 북변의 요충지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남건은 5만의 군사를 보내 부여성 탈환을 노렸으나 설하수 전투에서 대패했다. 고구려의 사정을 잘 아는 남생이 있었기에 당나라의 고구려 정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적은 기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진출했다.
계필하력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하고 이어 압록강에 있는 욕이성을 함락시킨 이적도 합류했다. 한 달간의 농성 끝에 28대 보장왕은 결국 당나라에 항복하니 고구려는 28대 705년만에 당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남건은 죽음도 불사하고 항전을 다짐했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자결을 시도했으나 당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통치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멸망후 검모잠과 안승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671년에 신라는 백제 부흥군과 당나라 장수 두의적을 격파하고 본격적으로 당나라를 옛 백제 땅에서 축출하기 시작했다. 10월에 당나라가 웅진도독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으나 신라 장수 당천이 검포현(김포)에서 당군을 대파했다.
672년에 신라는 웅진도독부가 있던 웅진을 함락시키고 당군을 백제 땅에서 축출했다.
같은 해 7월에 당나라는 이근행과 고간을 보내 신라를 응징하기로 했다. 신라군은 석문벌 전투에서 당나라에게 크게 패했다.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이때 장렬히 옥쇄하려고 했으나 부장의 만류도 할수 없이 뒷날을 기약했다.
674년 당나라는 유인궤와 이근행,이필을 보내 신라를 공격했으나 칠중성 전투에서 결국 신라군에게 패하고 물러났다.
675년에 문무왕은 10만의 군사를 일으켜 옛 고구려 수도 평양으로 진격했다.
설인귀와 이근행이 이에 맞서 싸웠으나 신라의 아찬 설수진에 계책으로 인해 대패하고 평양을 빼앗겼다.
같은 해 9월에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억울하게 죽은 김진주의 아들 김풍훈을 향도로 삼아 신라로 쳐들어왔으나 국원에서 크게 패했다. 설인귀와 합류하기로 했던 이근행의 20만 대군은 매초성에서 원술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대패했다.
676년에 설인귀는 수군을 이끌고 서해의 기벌포로 쳐들어왔지만 김시득이 이끄는 신라 해군에 패하고 말았다. 그 이후 당나라는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자 그 주위 여러부족들이 이진충에게 합세했다.
이를 지켜보던 영주의 고구려 유민들은 자신들 또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대중상을 중심으로 말갈족까지 끌여들여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진충이 병사하고 처남 손만영마저 당과 돌궐의 연합공격에 목숨을 잃자 대중상은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신성으로 진군해 성을 점령한뒤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당나라 측천무후는 항복한 거란족 장수 이해고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대중상을 공격하게 했다. 당군이 진격해오고 있을즈음 대중상이 병사하고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해고는 신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당군이 장기전으로 나오자 대조영은 휘하 군민들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당군의 주의를 끌기위해 걸사비우와 말갈군 결사대가 남아 당군을 막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천문령에 도달한 대조영은 천문령에 군사를 매복시킨뒤 이해고의 군사가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급습했다.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은 천문령에서 궤멸당했고 대조영은 동모산으로 가 나라를 세웠는데 나라 이름을 대진(大震)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진국은 고구려의 고토 대부분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대조영은 둘째 아들 대문예를 당의 수도 장안으로 보내 당의 허실을 살피게 했다.
서력 720년 대진국 고왕 대조영이 죽고 장남 대무예가 왕위에 오르니 2대 무왕이다. 무왕 대무예는 줄곧 당나라에 강경한 자세를 취했는데 당나라에 돌아온 대문예는 사사건건 형의 발목을 잡았다. 대문예는 한창 강성했을때의 고구려로도 당을 이기지 못했는데 하물며 고구려의 1/3도 안되는 지금의 군사력으로 어찌 당나라를 이기겠냐고 계속 반대했다. 대무예는 대노했으나 당장엔 참고 대문예를 대장으로 삼아 당나라의 편에 선 흑수말갈을 정벌하라고 했으나 두려움에 빠진 대문예는 당나라에 투항했다. 격분한 대무예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의 송환을 요청했으나 당 현종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무왕은 732년 장군 장문휴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산동반도의 등주를 공격하게 했다. 발해의 공격으로 등주는 황폐화되다시피 했고 당나라는 충격에 빠졌다.
755년 안녹산의 난이 발발하자 당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 평로군 소속의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는 오랫동안 품고 있던 야심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758년에 사촌형 후희일을 평로절도사로 옹립하고 761년 12월에 산동으로 건너가 이듬해 762년에 청주에 자리를 잡았다. 765년 평로치청절도사로 임명받은 후희일이 차츰 마음이 변해 사이가 틀어지다가 급기야 자신을 죽이려 하자 이정기는 평로군과 함께 난을 일으켜 후희일을 쫓아내고 스스로 평로치청절도사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정기를 두려워하는 당나라 조정은 사신을 보내 이정기를 정식으로 절도사로 임명했지만 말이 절도사일뿐 사실상의 독립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이정기가 일으킨 치청왕국은 당과는 다른 법제로 백성들을 통치했고 평로.치청 일대는 당나라의 다른 지역에 비해 안정되었다. 치청왕국은 발해나 신라의 사신이나 상인들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기 위해 거쳐가는 곳으로 되었고 정식으로 다른 나라와 무역을 했다.
하지만 778년에 이정기가 병으로 급사하자 치청왕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정기를 두려워하던 당 조정은 이정기가 죽자 크게 기뻐하며 치청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784년에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치청왕국을 비롯한 하북 번진들이 연합해 당나라에 반격을 가해와 장안이 함락되자 당나라 덕종은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했다.
792년에 이납이 병으로 세상을 뜨고 이납의 아들 이사고가 뒤를 이었다. 독고조란 인물이 치청왕국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빌붙자 이사고는 대장 왕제를 보내 그를 죽여버렸다. 이 사건은 아직도 치청왕국이 독립왕국으로서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당나라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사고 또한 806년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니 그의 동생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이사도는 자객을 보내 당나라의 재상 무원형과 어사중승 배도를 장안의 길거리에서 습격해 죽이게 했다. 새벽녘에 일어난 이 습격에서 무원형은 살해당하고 배도는 해자로 떨어졌는데 자객들이 죽은줄 알고 그냥 가버렸다. 당나라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818년에 당나라 헌종은 이사도의 관작을 삭탈하고 대군을 일으켜 치청왕국을 공격했다.
이사도는 굳게 성을 지켰으나 전세는 불리했다. 819년 당군에 패한 장수 유오는 살 길은 당나라에 항복하는 길뿐이라 여겨 밤중에 이사도를 습격해 그를 죽이고 당 헌종에게 항복했다. 이로서 이정기 이후 4대 54년만에 치청왕국은 멸망했다.
1359년 고려 공민왕때 모거경이 이끄는 홍건적 4만명이 고려를 침입했다.
고려는 철주와 서경이 함락되는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가 이듬해 2월에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격퇴했다.
1361년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이끄는 10만명의 홍건적이 2차 침입을 개시했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를 버리고 안동까지 몽진했다. 왕이 달아나는 동안 고려군 20만이 정세운과 안우,이방실,최영, 이성계의 지휘 아래 재반격에 나서 홍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다시 개경을 수복했다.
1950년에 북한이 6월 25일 새벽에 약 20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남한을 공격함으로서 시작된 6.25전쟁. 북한군은 9월까지 낙동강 유역까지 밀린 남한에 총 공세를 퍼부었으나 한국군과 미군의 결사항전으로 전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게다가 9월 15일에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자 전세는 역전되어 10월 1일에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했다.
북한이 수세에 몰리자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점령할경우 중국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 군대를 투입시켰는데 1950년 10월 25일에 처음으로 국군과 중공군이 조우했다.
이 즈음 30만으로 불어난 중국군의 공세로 미군과 한국군은 퇴각을 거듭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등으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중국군은 철저하게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낮에는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밤에만 움직이는 치밀한 전술을 보였다.
중국군의 특징은 오로지 밤에만 공격한다는것이며 징과 꽹과리 등으로 적군의 혼을 뺀 다음에 적의 약한부분을 파악해 그 부분만 공격해 단숨에 적을 무너뜨리는 전술이었다.
1950년 11월 25일 부터 12월 14일까지 이어진 중국의 2차 대공세에서 미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1월 27일부터 시작된 중국군과 미군간의 치열한 전투인 장진호 전투는 전사자보다는 얼어죽는 자가 더 많을 정도였지만 미 해병 1사단은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군 또한 큰 피해를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11월 29일에 군우리 전투에서 미 2사단은 중국군의 포위공격으로 와해되었다.
1951년 1월 4일에 국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남쪽으로 후퇴했다.이 즈음부터 중국군은 병참선이 길어지면서 굶주리는 군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해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11일부터 개시된 중국군의 2월 공세(중국에선 제 4차 전역이라고 부름)로 국군과 유엔군은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3월 15일에 서울을 재탈환했다. 4월 29일에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4월 공세를 격퇴했다.
5월 16일에 중국군과 인민군의 5월 공세가 개시되었다. 서부 전선에 있던 국군 1사단의 선전과 영국 그로스터 대대의 분전으로 서부 전선에서는 실패했으나 동부 전선에서 국군 3군단이 현리에서 자멸했다. 이때 고위 장성부터 하급 말단 병사까지 계급도 없고 그저 오합지졸로 전락해 오로지 달아나기에 바빴다고 한다.
5월 21일에 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5월 23일에 국군은 대관령을 확보했으며 6월 11일에는 철의 삼각지대(평강,김화,철원)를 탈환했다.
9월 2일에 국군과 미군은 피의 능선을 점령했고 10월 15일엔 단장의 능선을 확보했다
이 전투는 소규모 전투였음에도 사상자가 3천명이나 나왔고 포탄을 36만발이나 소모해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피해가 막심해지자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1952년에 들어 전선은 고착화되고 소강 상태에 빠졌다. 1952년 10월 8일부터 백마고지를 두고 국군과 중국군간에 격전이 벌어졌다. 12차례나 쟁탈전을 벌여 7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 끝에 결국 국군이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1만여명이 사망했고 국군 또한 3400여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중국군은 5만 5천발 국군은 21만 9천여발을 소모해 원래 수목이 울창하던 산이 민둥산으로 바뀔 정도였다.
1953년 7월 13일에 중국군은 최후의 공세를 시작했다. 이미 휴전이 기정사실화 되는 시점에서 유엔군에게 공산군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가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2만 8천명, 국군은 1만 4천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국군은 결국 금성천을 내주고 4km 정도 후퇴했다.
이 전투를 끝으로 3년간의 6.25 동란은 끝이났다. 중국의 참전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이 무산되었으니 중국이 우리나라에 끼친 해는 아주 크다고 할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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