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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9 (몽골제국 2 : 제국의 팽창과 분열) 본문
중국의 역사 59
(몽골 제국 2 : 제국의 팽창과 분열)
몽골제국의 팽창
거대 제국을 세운 몽골의 전성기는 원나라를 수립한 쿠빌라이 시대로 알려져 있다. 중국을 기반으로 한 원나라는 중국식 연호를 사용했으며 1279년에 남송을 정벌하고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이후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반란군에게 원나라는 멸망하게 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역사관이 반영된 것으로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20세기까지 존재하였다.
몽골제국은 기본적으로 부족사회로 중앙집권 체제를 가진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칭기즈 칸이 죽고 부족연합이 느슨해지자 각각의 칸국으로 나뉘게된다. 각각의 칸은 몽골제국의 후예로 서로 협조하기도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몽골제국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 원나라는 쿠빌라이때 최전성기를 지내긴 하지만 이러한 칸 국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러한 원나라조차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반란군에게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몽골고원으로 물러난 것이었다. 이후 명나라의 영락제는 수차례 원나라를 정벌했지만 완전히 토벌하는데 실패한다.
특히 1449년 원나라의 예센은 명나라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하여 명나라 군대 10만을 섬멸하고, 영종황제를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1635년 원나라는 멸망하게 되는데 명나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후 청태종이 되는 홍타이시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명나라와 원나라는 이백여년 동안 싸웠지만 결국 10여년의 기간을 두고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후 청나라는 몽골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나선다. 몽골제국이 북방민족의 연합이라고 보았을 때 청나라도 자격이 있었던 것이었다.
중국의 서쪽을 보면, 몽골 왕실의 후예였던 티무르가 1369년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 제국을 세운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제2도시인 사마르칸트는 고대에 실크로드의 교역기지로 중국에서는 강국이라 불리우는 곳이었다. 티무르제국은 서아시아 일대에서 패권을 잡고 있는 오스만 투르크를 격파하고 중앙아시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며, 사절을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하여 그 위력을 과시한다.
티무르는 제위시절 명나라를 정복하려 하지만 정복 길에 오른지 얼마 후 사망한다. 그 당시 명나라는 최대 전성기였고, 만약 티무르와 명나라가 싸웠더라면 세계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티무르 제국은 이후 1500년에 거듭된 내전으로 우즈베크족에게 멸망당한다.
지금의 인도에서는 칭기즈 칸의 후손인 바부르가 1526년 무굴 제국을 세운다.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또 남북으로는 구자라트에서 데칸까지 영토를 확장해 무굴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무굴제국은 1857년 멸망하게 되는데, 무굴제국이란 페르시아어로 몽골제국을 의미하며, 기존의 몽골제국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후대사람들이 편의상 무굴제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러시아 지역에서는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황금오르도의 영역이 있었으며, 1783년 에카테리나 2세가 크리미아를 멸망시키면서 끝나게 된다. 특히 러시아의 짜르는 몽골 혈통만이 정통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1575년 이반 4세 같은 경우 몽골 황족을 짜르에 앉힌후 그 다음해에 양위를 받아 짜르가 될 정도였다. 특히 17세기 로마노프 왕조에는 몽골계 귀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국의 분열
몽골 제국은 칭키즈 칸 사후 쥬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톨루이 등 4명의 자식들이 각자 제국을 분리하여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몽골 제국을 통치하는 대칸에 대한 권력다툼이 계속되면서 각 제국은 이해가 엇갈리어 파벌이 조성되고 분리되어 치열한 권력다툼이 계속되면서 나중에는 종교적인 문제까지 겹쳐 서로간에 갈등을 빗게 된다. 장남 쥬치는 러시아, 동유럽 지역에서 킵자크 한국, 차남 차가타이는 신장 웨이우얼 지구와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차가데이 한국, 3남 우구데이는 몽골 고원 지역을 중심으로 중앙 아시아 일대에서 우구데이 한국, 막내 톨루이의 아들 홀라구가 1256년 이란,터키,시리아 지역 일대를 정복하고 일 한국을 세우게 된다.
2대 대칸으로 우구데이(1229-1241년)가 등극하면서 1227년에 칭기즈 칸 생전 서하를 멸망시켰고, 1233년에는 우구데이와 톨루이가 중국 북방을 지배하던 여진족에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게 된다. 1241년 우구데이가 사망하자 킵착 한국의 쥬치의 아들 바투가 대칸 승계에 관계하여 우구데이의 장남인 구유크(1246-1248년)가 3대 대칸으로 등극하자 장남의 아들인 자신이 대칸에 우선권이 잇다는 점을 들어 호전적인 성격으로 참지 못하고 둘 사이에는 분쟁이 벌어지게 된다. 둘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구유크가 2년이란 짧은 치세 후 갑자기 사망하자 바투와 톨루이의 부인인 소르칵타니이 같이 협력하여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1251-1259년)를 4대 대칸으로 즉위시키게 된다. 몽케는 즉위 후 반란 음모를 꾸미던 우구데이 파를 철저히 숙청시키자 우구데이 한국의 칸인 카이두가 은밀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카이두는 1259년 몽케 사망 후 차카타이 한국을 침공하여 복속시키고 쿠빌라이와 여러차례 대립하였으나 쿠빌라이의 부하 장수 바얀에게 번번히 패전하게 된다. 1294년 우구데이 한국의 카이두 칸은 쿠빌라이 사망 후 1301년 차가타이 한국과 대규모 반격을 시도하다가 결국 사망하게 된다. 그후 우구데이 후손들과 차카다이 후손들 간에는 지속적인 분쟁이 계속되었다.
칭기즈 칸의 막내 아들 톨루이는 몽케,쿠빌라이,아라 부카, 홀라구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몽케(1251-1259년)가 대칸 재임시 1259년 한반도 고려를 항복시키고 남송을 정벌 중 사망하게 되자, 쿠빌라이의 동생 아라 부카가 몽골 고원 카라코롬 수도에서 자파 족장들을 불러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에 일방적으로 취임하자 쿠빌라이도 자신을 따르는 부족들의 지지를 받아 5대 대칸(1260-1294년)에 취임을 선언한 후 아라 부케가 있는 카라코롬을 쳐들어가 치열한 전투를 벌여 1264년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쿠빌라이는 대칸에 취임하자 국호를 원이라 칭하고 북경에 도읍하였다. 1279년 애산전투를 마지막으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1294년 손자 테무르에게 대칸을 인계하고 사망한다.
우구데이 한국
우구데이 칸국(Ögedei Khan國) 또는 오고타이 한국( - 汗國)은 칭기스 칸의 3남인 우구데이가 칭기스 칸에게서 영지를 받아 세운 국가로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다스렸다. 수십 년간 원나라와 대립했으며, 빠르게 중국에 동화된 원나라와는 달리 몽골의 유목민적 전통을 고수하는 데 힘썼다. 일부에서는 우구데이 칸국을 지배한 카이두를 원에 저항한 반란세력으로 간주하여 우구데이 칸국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카이두 이전
우구데이 칸국은 칭기스 칸의 3남인 우구데이가 칭기스 칸에게서 받은 영지로부터 시작됐다. 우구데이가 받은 영지는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 북서부 지역의 작은 땅이었다. 하지만 이 땅의 본래 주인인 우구데이는 이 땅과는 별 연관이 없었다. 1229년, 칭기스칸이 사망한 지 2년만에 쿠릴타이를 통해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선출된 우구데이는 1235년에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
1241년, 우구데이가 사망하자 킵차크 한국의 바투와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유크 간의 분쟁이 발생했고 결국 구유크가 독단적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1246년에 왕위에 올랐다. 구유크의 즉위 이후 구유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구유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 구유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는 톨루이 계의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1251년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계의 몽케를 칸위에 올렸다. 몽케가 칸으로 즉위하자 구유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시와 우구데이계의 왕자 시레문이 몽케를 제거하고 다시 우구데이계 대칸을 세우려는 음모를 세웠지만 발각당해 몽케에 의해 숙청당하고 말았다.
카이두
몽케 칸의 숙청으로 우구데이계가 사실상 멸망하자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에서 복수를 준비했다. 1259년, 몽케 칸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1271년에 차가타이 칸국의 바락을 궁지로 몰아넣고 이후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켰다.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킨 뒤 원나라의 쿠빌라이와 여러 차례 대립하였으나 바얀에 의해 번번이 막혔다. 1294년에 숙적인 쿠빌라이가 죽자 기회를 노려 1301년에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와 함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패배하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도져 사망하였다.
카이두 이후
카이두 사후 차가타이 칸 두아는 카이두의 유언대로 카이두의 둘째 아들 오르스를 옹립하지 않고 첫째 아들 차파르를 지지해 둘 간의 분쟁을 유도했다. 두아의 지지 덕분에 차파르는 2년 뒤인 1303년에 동생 오르스를 물리치고 칸위에 올랐다. 칸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304년(혹은 1305년)에 차파르는 두아의 제의에 따라 전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평화 협정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306년에 차파르와 차가타이 칸국 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은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유린했고 원나라가 차가타이 칸국을 지원하고 나서자 차파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차가타이 칸국에 항복했다. 차파르의 항복을 받아낸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분할한 뒤 차파르에게 작은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두아는 차파르에게 영지를 준 지 얼마 안 돼 차파르를 쫓아내고 그의 동생인 얀기차르와 투그메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다.
두아가 1307년에 죽고 차가타이 칸국이 칸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이자 카이두의 네 아들 차파르, 오르스, 얀기차르, 투그메는 힘을 모아 131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이끄는 반란군은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고 이 패배 이후 차파르는 원나라의 무종에게로 망명했다. 차파르가 원나라로 망명하면서 우구데이계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우구데이 한국 역대 칸
귀위크 칸 또는 구유크 칸(1206년 ~ 1248년)은 몽골 제국의 3대 대칸으로 1246년부터 124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우구데이 칸의 장남이었다. 묘호는 정종(定宗)이다. 그를 끝으로 우구데이 계의 대칸 세습은 끝을 맺고 대신 칭기즈 칸의 막내 아들 톨루이의 자손들이 몽골제국 대칸의 자리를 계승해나갔다.
즉위
1241년, 오고타이가 사망하자 킵차크 한국의 바투와 우구데이의 아들인 귀위크 간의 분쟁이 발생했고 결국 귀위크가 독단적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1246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서부의 크리스천과 실리시안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몽골과 위대한 동맹을 맺기를 바랐다. 실리시안 아르메니아인들은 1247년과 1254년 그들의 왕인 헤토움이 몽골의 수도를 방문함으로써 몽골에 대하여 종속의 예를 갖추었다.
제7차 십자군을 구성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1246년 카라코룸에 있는 몽골의 대칸에게 프란시스코파 선교사 지오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를 보내 무슬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고자 하였으나, 그는 귀위크 칸에게 교황과 유럽의 왕들이 모두 귀위크 칸에게 복종해야만 동맹이 성립할 것이라는 실망스러운 대답을 받았다.
대칸 귀위크 칸은 이수 뭉케로 차가다이 칸국을 다스리게 하였다.
귀위크의 즉위 이후 귀위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귀위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 귀위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는 죽은 톨루이 부인인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1251년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아들인 몽케를 칸위에 올렸다.
이에 귀위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시와 우구데이계의 왕자 시레문은 몽케를 제거하고 다시 우구데이계 대칸을 세우려는 음모를 세웠지만 발각당해 몽케에 의해 모조리 숙청당하고 말았다.
카이두 또는 하이두(1230년~1301년)는 1260년경부터 1301년까지 우구데이 칸국을 다스렸던 칸이다.
초기의 삶
카이두는 1230년에 우구데이의 4남인 카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아직 어렸던 1241년에 우구데이가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유크와 킵차크 한국의 바투 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구유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위에 올랐다. 이렇게 칸위에 오른 구유크는 재위 3년 만인 1248년에 사망하였고, 그 후 바투와 연합한 툴루이계와 우구데이계간의 분쟁이 다시 발생하게 됐다. 이 분쟁에서는 바투와 툴루이계가 승리하여 1251년에 툴루이의 장남인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었다.
툴루이계의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자 시레문을 비롯한 우구데이계 왕자들은 대칸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금세 발각되어 음모의 주동자인 시레문을 비롯한 여러 우구데이계 왕자들과 구유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 등이 숙청당했다. 카이두 역시 이 숙청 과정에서 희생당할 뻔했으나 미리 몽케 칸에게 복종하여 목숨을 건졌다. 목숨을 건진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로 가서 와신상담하며 우구데이계의 부흥과 툴루이계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차가타이 칸국 정벌
1259년, 몽케 칸이 남송 원정 중 사망하자 다음 해인 1260년에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가 각각 대칸을 칭했다. 서로 대칸을 칭한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는 곧바로 전쟁에 들어갔다. 전쟁은 중국 북부의 풍부한 물자를 가진 쿠빌라이에게 시종일관 유리하게 진행됐다. 이에 아리크 부케는 자신이 임명한 차가타이 칸국의 알루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알루구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1263년에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었다.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은 알루구는 카이두가 아리크 부케를 도왔다는 구실로 카이두를 공격했다. 알루구의 공격을 받은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로 침입하여 알루구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 번 전투에서 반격을 당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한편 몽골 초원에서는 1264년에 아리크 부케가 최종적으로 패하고 쿠빌라이가 유일한 대칸이 됐다. 최대의 경쟁자를 제거한 쿠빌라이는 이후 알루구와 협력하여 카이두 제거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던 1266년에 알루구가 죽고 알루구에 의해 쫓겨났던 무바라크 샤가 잠시 칸위를 차지했다가 곧 바락으로 교체됐다.
차가타이의 칸이 바락으로 교체되자 카이두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카이두는 칸 칸국의 만그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을 침입하여 시르다라강 근처와 코잔드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바락은 트란속시아나로 도망친 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약탈하여 군대를 다시 모았다. 바락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를 보이자 카이두는 배후의 쿠빌라이가 침입해올 것을 염려해 바락과 강화를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의 결과 카이두와 만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으며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국이 소유하고 있던 투르키스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카이두는 강화대로 이 땅을 만그 티무르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영토로 병합시켰다.
강화는 체결되었지만 바락은 이 강화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부하라를 재정복하려 했으며 사마르칸트를 약탈하려고도 했다. 카이두는 바락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바락에게 아바카가 다스리고 있는 일 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했다. 바락은 이 제의에 쉽게 응하여 일 한국을 공격할 준비에 나섰다. 이에 카이두는 자신의 아들인 차파르가 이끄는 군대를 지원했으며 킵차크 칸국 역시 군대를 지원했다.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의 지원을 받은 바락은 아바카 휘하의 장수인 테구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 뒤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에서 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는 바락의 성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킵차크 칸국 군대는 바락 휘하의 장군인 자라일타이(Jalayirtai)와의 언쟁을 구실삼아 군대를 퇴각시켰다. 바락은 자라일타이를 보내 킵차크 칸국 군대에 용서를 구하고 복귀할 것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떠나자 카이두가 보낸 차파르 역시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본국으로 도망가버렸다. 차파르가 도망오자 카이두는 아예 바락과의 관계를 끊고 아바카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설상가상으로 1270년, 바락의 군대는 아바카와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고 바락은 부상을 입었다. 엄청난 손해를 본 채 본국으로 돌아온 바락은 카이두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카이두는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응답했다. 결국 1271년, 바락은 카이두의 군대에 둘러싸인 채 막사에서 사망했으며 카이두는 죽은 바락 대신 네구베이(Negubei)를 차가타이 칸으로 세웠다.
하지만 차가타이 칸국은 녹록치 않았다. 알루구와 바락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우구데이 칸국과 카이두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네구베이가 그들에 동조하면서 반란은 확산됐다. 이에 카이두는 군대를 보내어 네구베이를 죽이고 부카 테무르(Buqa Temur)를 칸으로 세웠다. 새로 칸이 된 부카 테무르는 무능하여 알루구와 바락의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카이두는 1282년에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인 두아를 칸위에 올렸다. 칸위에 오른 두아는 우구데이 칸국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카이두를 따르게 됐으며 카이두는 더 이상 차가타이 칸국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원나라와의 대립
평소 우구데이 칸국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자신의 넷째 아들인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우구데이 칸국과 맞서게 했다. 이 원정군에는 몽케의 아들인 시리기(Sirigi),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 멜릭 테무르가 있었는데, 이들은 1276년에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사로잡은 뒤 킵차크 한국에 넘겨 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 이후 차가타이의 둘째아들 사르반(Sarban)도 이 세력에 합류하여, 네 명의 왕자와 킵차크 한국 및 카이두가 반 쿠빌라이 연합을 형성하게 됐다.
1277년 카이두는 자신에게 의탁한 시리기와 사르반 등을 앞세워 카라코룸으로 진격했다.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은 쿠빌라이는 즉시 명장 바얀을 불러 이들을 막게 했다. 바얀은 남송과의 전투에서 보여줬던 뛰어난 용병술을 바탕으로 그들의 군대를 격파했다. 바얀에개 진 뒤 왕자들은 내분을 일으켰으며 결국 사르반이 시리기를 넘기는 대가로 바얀에게 항복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1년 뒤인 1278년에는 킵차크 한국에 붙잡혀 있던 노무간마저 풀려나고 말았다.
1287년, 카이두는 만주와 동몽골을 영지로 하는 카사르의 후손 식투르, 카치운의 후손 카다안,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인 나얀과 동맹을 맺고 다시 쿠빌라이와의 전쟁에 나섰다. 1288년, 동쪽 군대의 맹주인 나얀은 쿠빌라이의 친위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쿠빌라이에 의해 처형당했다. 나얀이 패한 이후 대부분의 반란 가담 세력들은 쿠빌라이에 항복하였다. 동쪽 반란군과 함께 진군했던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손자인 가말라를 격파하는 등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나얀을 평정한 쿠빌라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이 원정이 실패한 후 카이두는 산발적인 전투를 몇 번 더 벌였으나 바얀의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294년,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 테무르 올제이투가 제위에 올라 성종이 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297년,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와 몽케의 손자 울루스 부카가 우구데이 칸국을 이탈하여 원나라로 귀환하였고 이로 인해 카이두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카이두는 지속적으로 원을 공격하였고 1298년에는 성종의 사위인 쾨르기즈를 생포하여 처형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세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데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카이두는 1301년 아리크 부케의 차남 멜릭 테무르,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와 함께 최대 규모의 원정에 나섰다. 전쟁 초기엔 카이두의 군대가 우세하여 가말라와 그의 아들 예순 테무르군대를 압도했지만 카이샨의 군대가 전장으로 지원되면서 전황은 급속도로 변했다. 차가타이 칸국의 칸인 두아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퇴각했고 카이두는 전투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사망하고 말았다.
카이두는 죽기 전에 자신의 차남인 오르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이를 무시하고 1303년에 장남인 차파르를 옹립하였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차파르는 두아와 대립하였고, 1306년에 두아의 군대와 원나라의 지원군에게 협공을 받았다. 양국 군대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310년, 차파르는 다른 우구데이계 왕자들인 오르스, 얀기차르, 투그메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하고 나서 원나라로 망명했다. 차파르가 원나라로 망명하면서 우구데이 가문은 사실상 몰락하고 말았다.
차카타이 한국
차가타이 한국은 칭기스 칸의 차남인 차가타이가 칭기스 칸에게 물려받은 영토를 바탕으로 세운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 지역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쳐 있던 몽골계 유목민족 국가이다. 1370년 차가타이 한국내의 소부족 출신인 티무르에 의해 멸망당했지만 차가타이 한국을 계승한 동차가타이 한국(모굴리스탄 한국)은 18세기 초에 준가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했다.
차가타이 한국의 독립
초기의 차가타이 한국은 칭기스 칸이 세운 몽골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고 독자적인 권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차가타이에 이어 칸위를 계승한 카라 훌레구, 예수 몽케, 무바라크 샤는 모두 몽골 제국의 대칸에 의해 해임됐던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사실상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이었던 몽케 칸이 죽은 후인 1260년에 즉위한 알루구(Alghu)는 중앙의 아리크 부케에게 반기를 들며 독자적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오고타이 한국과의 대립
아리크 부케에게 반기를 든 알루구는 곧 아리크 부케의 지원을 받고 있던 오고타이 한국의 하이두와 맞서게 됐다. 1266년, 알루구의 뒤를 이어 칸위에 오른 바락(Baraq)도 하이두와의 전투를 계속했다. 3년간의 격렬한 전쟁으로 바락과 하이두는 모두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결국 1269년에 잠시 휴전할 것에 합의했다. 바락과 휴전한 하이두는 바락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바락에게 일 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했고 지원군을 보냈다. 1270년 바락은 이 제안에 넘어가 먼저 일 한국을 공격했지만 하이두의 지원군이 그를 배신하면서 일 한국의 군대에게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1년 뒤인 1271년에 바락은 죽고 차가타이 한국은 오고타이 한국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하이두는 이름뿐인 칸들을 즉위시켜 차가타이 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곧 바락의 아들인 두아(Duwa)를 비롯한 왕족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차가타이 한국의 지배에 어려움을 느낀 하이두는 두아와 타협하여 그를 칸위에 올렸다. 두아는 영리한 인물이었고 자신을 칸위에 올린 하이두와 협력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1301년, 차가타이 한국의 숙적인 하이두가 사망하였다. 하이두가 사망하자 두아는 즉시 오고타이 한국의 칸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1303년에 하이두의 장남인 차바르를 칸위에 올린 뒤 원을 비롯한 모든 한국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평화협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1306년에 두아는 원나라의 정종과 연합하여 오고타이 한국을 공격, 칸인 차바르를 추방시키고 원과 함께 오고타이 한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분열과 몰락
오고타이 한국을 멸망시킨 두아 칸 이후에 즉위한 에센부카 칸과 케벡 칸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은 약 20여년간 중앙아시아의 분쟁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유르바르와다는 일 한국의 울제이투과 동맹하여 원나라를 공격한 차가타이 한국의 에센 부카 1세에 대항하였다. 1316년 그는 에센부카를 격파하였고 에센부카의 사후에 케벡이 원나라와 화의하였다.
하지만 케벡 칸이 사망한 1326년(혹은 1325년) 이후 차가타이 한국의 국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각 유목 부족들은 독자적 권리를 행사하며 서로 분열하였고, 칸은 부족장들에 의해 추대되고 부족장들에 의해 쫓겨났다. 여기에 차가타이 한국의 이슬람화로 인한 이슬람교와 전통 종교인 불교-샤머니즘 간의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차가타이 한국은 나락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1348년, 현재의 신장 지역인 차가타이 한국 동부 지역의 유력 가문인 도그라트(Duglaht)부에서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를 옹립하면서 차가타이 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동차가타이 한국(=모굴리스탄 한국)의 첫번째 칸이 된 투글루크 티무르가 잠시 차가타이 한국을 통합하고 여러 부족의 아미르들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이 일시적 통합은 그가 죽은 1363년에 붕괴되고 말았다.
투글루크 티무르에 이어 차가타이 한국을 장악한 것은 발라스부의 아미르였던 티무르였다. 투글루크 티무르에 의해 아미르가 된 티무르는 다른 여러 부족들을 제압한 뒤 1370년에 서차가타이 한국을 장악하고 티무르 왕조를 세웠다. 티무르 왕조가 설립된 이후에도 차가타이 한국의 칸은 1402년까지 명목상으로 존재하지만 사실상 차가타이 한국은 1370년에 멸망을 고했다.
모굴리스탄 한국
1490년의 모굴리스탄 한국
차가타이 한국을 통합한 투글루크 티무르 사후, 그의 아들 일리아스 호자(Illyas Khoja)는 트란속시아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서차가타이 한국에서 티무르 왕조가 성립, 모굴리스탄 한국은 티무르 왕조의 지배권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 15세기 중반, 티무르 한국의 분열로 다시 자립한 모굴리스탄 한국은 에센 부카 2세와 유누스 칸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모굴리스탄은 도스트 무함마드가 유누스 칸에 대항하여 동쪽 투르판을 중심으로 위구르스탄 한국을 세우며 양분되었다. 16세기 초 위구르스탄의 만수르 칸이 모굴리스탄을 재통일하고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그의 형제인 사이드 칸이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카슈가르 한국[1]을 세우면서 모굴리스탄 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카슈가르 한국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칸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대신 호자(Khoja)라는 이슬람 귀족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됐다. 호자 가문은 카슈가르의 백산당과 야르칸트의 흑산당으로 분열하여 권력 투쟁을 벌였다. 1678년, 카슈가르 한국의 마지막 칸인 이스마일 칸은 백산당의 영수 아팍 호자(Appak Khoja)를 몰아내고 칸의 권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도리어 아팍 호자가 불러들인 준가르의 칸 갈단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카슈가르 한국은 준가르의 보호령으로 전락했으며 호자 가문이 완전한 권력을 쥐게 됐다. 위구르스탄도 이와 마찬가지로 준가르의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695년, 아팍 호자의 아들인 야흐야 호자(Yahya Khoja)가 죽은 뒤 마지막 칸인 아크바쉬 칸(Akbash Khan)이 즉위하여 준가르에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1706년에 호자 가문에 의해 추방당해 무굴 제국으로 망명하면서 모굴리스탄 한국의 역사는 끝을 맺었다.
역대 칸
- 차가타이(Chagatai) (1226 ~1242년 )
- 카라 훌레구(재위 : 1242년 ~ 1246년, 1251년 ~ 1252년)
- 이수 뭉케(1246년 ~ 1251년)
- 카라 훌레구(1251년 ~ 1252년)
- 무바라크 샤 (1252년 - 1260년)
- 오르키나 하툰(섭정 : 1252년 - 1260년)
- 알루구(Alghu, 1260년 ~ 1266년)
- 무바라크 샤(복위 : 1266년)
- 바락(Baraq, 1266년 ~ 1270년)
- 네구베이(Negubei, 1270년 ~ 1272년)
- 부카 테무르(Buqa Temur, 1272년 - 1287년)
- 두아(Duwa, 1282년 ~ 1307년)
- 콘첵 칸(Könchek, 1306년 - 1308년)
- 탈리쿠(Taliqu, 1308년 - 1309년)
- 케벡 칸(Kebek, 1309년)
- 에센부카 칸(1309년 ~ 1318년)
- 케벡 칸(Kebek, 1318년 - 1325년)
- 엘지기데이(Eljigidey, 1325년)
- 두와 테무르(Duwa Temur, 1325년)
- 알라딘 타르마시린(Aladdin Tarmashirin, 1325년 - 1333년)
- 부잔(Buzan, 1333년 ~ 1334년)
- 창시(Changshi, 1334년 ~ 1338년)
- 예순 테무르(Yesun Temur, 1338년 ~ 1342년) 알리 술탄(Ali-Sultan, 1338년 ~ 1342년)과 함께 통치
- 무하마드 1세 이븐 풀라드(Muhammad I ibn Pulad, 1342년 - 1343년)
- 카잔 칸 이븐 야사우르(Qazan Khan ibn Yasaur, 1343년 - 1346년)
- 다니시멘지(Danishmendji, 1346년 - 1348년)
차가타이 한국이 동서로 분할
- 바얀 쿨리(Bayan Quli, 1348년 - 1358년)
-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 (모굴리스탄 한국 1348년 - 1363년), 1358년 - 1363년)
- 일리야스 호자(Ilyas Khodja, 1363년 - 1368년)
- 아딜 술탄(Adil-Sultan, 1363년)
- 카불 샤(Khabul Shah, 1364년 - 1370년)
1370년부터 티무르의 총독이였다.
카라 훌레구(? ~ 1252년)는 차가타이 한국의 제2대 칸(재위:1242년 - 1246년). 칭기즈칸 차남 차가타이의 장남인 무투겐의 4남, 즉 칭기즈칸의 증손이다.
무투겐은 호라즘 제국과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그 외의 친자식도 대부분 요절하여, 차가타이로부터 후계자로서 지명되어 1242년에 차가타이가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되었다.
바투, 몽케와 구유크에 의한 후계자 싸움에서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숙부 예수 몽케는 구유크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 때문에 1246년에 구유크가 대칸에 즉위 하자 구유크의 개입을 받아 칸의 자리를 쫓겨 새롭게 예수 몽케가 즉위 했다.
구유크의 사후, 1251년에 몽케가 즉위 하여, 구유크 지지자였던 예수 몽케는 몽케 칸의 개입으로 퇴위하게 되고, 카라 훌레구가 복위 되었다. 그러나 카라 훌레구는 정식으로 칸으로서 승인받기 위해서 몽케 캉에게 가는 도중에 병사했다고 한다.
알루구(Alghu, ? ~ 1266년)는 차가타이 한국의 칸(재위:1260년 ~ 1266년)이다.
몽케 칸이 죽은 후인 1260년에 즉위한 알루구는 중앙의 아리크 부케에게 반기를 들며 독자적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아리크 부케는 자신이 임명한 차가타이 칸국의 알루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알루구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1263년에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었다.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은 알루구는 카이두가 아리크 부케를 도왔다는 구실로 카이두를 공격했다. 알루구의 공격을 받은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로 침입하여 알루구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 번 전투에서 반격을 당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한편 몽골 초원에서는 1264년에 아리크 부케가 최종적으로 패하고 쿠빌라이가 유일한 대칸이 됐다. 최대의 경쟁자를 제거한 쿠빌라이는 이후 알루구와 협력하여 카이두 제거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던 1266년에 알루구가 죽고 알루구에 의해 쫓겨났던 무바라크 샤가 잠시 칸위를 차지했다가 곧 바락(Baraq)으로 교체됐다.
바락(Barāq, ? ~ 1271년)은 차가타이 한국의 제 7대 칸(재위:1266년 ~ 1271년)이다. 칭기즈칸 차남 차가타이의 장남인 무투겐의 삼남 이슨 도아의 차남이다.
1266년에 알루구가 죽고 알루구에 의해 쫓겨났던 무바라크 샤가 잠시 칸위를 차지했다가 곧 바락으로 교체됐다. 1266년, 알루구의 뒤를 이어 칸위에 오른 바락(Baraq)도 우구데이 한국의 칸 카이두(하이두)와의 전투를 계속했다. 차가타이의 칸이 바락으로 교체되자 카이두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만그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을 침입하여 시르다라강 근처와 코잔트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바락은 트란속시아나(우즈베키스탄 지역)로 도망친 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로 퇴각하여 군대를 다시 모았다. 바락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를 보이자 카이두는 배후의 쿠빌라이가 침입해올 것을 염려해 바락과 1269년에 강화를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의 결과 카이두와 킵자크 한국의 만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으며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국이 소유하고 있던 투르키스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카이두는 강화대로 이 땅을 만그 티무르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영토로 병합시켰다. 강화는 체결되었지만 바락은 이 강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하라(우즈베키스탄 자랴포사 강 하류)를 재정복하려 했으며 사마르칸트를 약탈하려고도 했다.
카이두는 바락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바락에게 아바카가 다스리고 있는 일 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했다. 바락은 이 제의에 쉽게 응하여 일 한국을 공격할 준비에 나섰다. 이에 카이두는 자신의 아들인 차파르가 이끄는 군대를 지원했으며 킵차크 한국 역시 군대를 지원했다.
1270년 바락은 이 제안에 넘어가 먼저 일 한국을 공격했지만 카이두의 지원군이 그를 배신하면서 일 한국의 군대에게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의 지원을 받은 바락은 일 한국의 아바카 휘하의 장수인 테구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 뒤 군대를 기동시켜 호라산에서 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는 바락의 성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킵차크 한국 군대는 바락 휘하의 장군인 자라일타이(Jalayirtai)와의 언쟁을 구실삼아 군대를 퇴각시켰다. 바락은 자라일타이를 킵차크 한국 군대에 보내 용서를 구하고 복귀할 것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킵차크 한국의 군대가 떠나자 카이두가 보낸 차파르 역시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본국으로 도망가버렸다.
차파르가 도망오자 카이두는 아예 바락과의 관계를 끊고 일 한국의 아바카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설상가상으로 1270년, 바락의 군대는 아바카와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고 바락은 부상을 입었다.
엄청난 손해를 본 채 본국으로 돌아온 바락은 카이두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카이두는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응답했다. 결국 1271년, 바락은 카이두의 군대에 둘러싸인 채 막사에서 사망했으며 카이두는 죽은 바락 대신 이름뿐인 칸 네구베이(Negubei)를 차가타이 칸으로 세웠다. 차가타이 한국은 오고타이 한국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하이두는 차가타이 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두아(Dua, ? ~ 1307년)는 차가타이 한국의 제10대 칸(재위 : 1283년 ~ 1307년)으로, 차가타이 한국의 실질적인 건국자이다. 한자식 표기는 都硅. 제7대 칸 바락의 아들이다.
카이두는 1282년에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인 두아를 칸위에 올렸다. 칸위에 오른 두아는 우구데이 칸국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카이두를 따르게 됐으며 카이두는 더 이상 차가타이 칸국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그러던 1301년, 카이두는 사망하면서 자신의 차남인 오르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이를 무시하고 1303년에 장남인 차파르를 옹립하였다. 그리고 원을 비롯한 모든 한국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즉위한 후에 차파르는 두아와 대립하였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1306년에 두아의 군대와 원나라의 지원군에게 협공을 받았다. 양국 군대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는 원나라로 차바르를 추방시켰다.
1307년 오고타이 한국을 멸망시킨 두아 칸이 붕어한 이후에 즉위한 케벡 칸과 에센부카 칸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은 약 20여 년간 중앙아시아의 분쟁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에센부카 칸(Esen Buqa, ? ~ 1320년)은 차가타이 한국의 칸(재위 : 1310년 ~ 1320년)이며, 두아의 아들이다.
오고타이 한국을 멸망시킨 두아 칸 이후에 즉위한 에센부카 칸과 케벡 칸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은 약 20여년간 중앙아시아의 분쟁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유르바르와다(원나라 4대 황제)는 일 한국의 울제이투과 동맹하여 원나라를 공격한 차가타이 한국의 에센 부카 1세에 대항하였다. 1316년 그는 에센부카를 격파하였고 에센부카의 사후에 케벡이 원나라와 화의하였다.
그는 케벡 칸을 계승하였다가 사후에 케벡칸에 의해 계승되었다.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 1329년 ~ 1363년)는 동차가타이 한국 모굴리스탄 한국의 초대 칸이다.
1348년, 현재의 신장 지역인 차가타이 한국 동부 지역의 유력 가문인 도그라트(Duglaht)부에서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를 옹립하면서 차가타이 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동차가타이 한국(=모굴리스탄 한국)의 첫번째 칸이 된 투글루크 티무르가 잠시 차가타이 한국을 통합하고 여러 부족의 아미르들을 격파하기도 했다.
1360년 동 차가타이 한국의 투그르 티무르가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발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 받았다. 그러나 곧 동 차가타이 한국을 배신하고, 카라우나스부의 아미르 후사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해 본거지로써 사마르칸트를 손에 넣었다.
투글루크 티무르의 일시적 통합은 그가 죽은 1363년에 붕괴되고 말았다. 차가타이 한국을 통합한 투글루크 티무르 사후, 그의 아들 일리아스 호자(Illyas Khoja)는 트란속시아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투글루크 티무르에 이어 차가타이 한국을 장악한 것은 발라스부의 아미르, 티무르였다. 투글루크 티무르에 의해 아미르가 된 티무르는 다른 여러 부족들을 제압한 뒤 1370년에 서차가타이 한국을 장악하고 서차가타이 한국에서 티무르 제국을 세웠다. 모굴리스탄 한국은 티무르 왕조의 지배권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
티무르 제국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는 티무르에 의해 14세기에 세워졌으며 중앙 아시아 수니파 무슬림 왕조로 중앙 아시아, 오늘날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메소포타미아, 카프카스 산맥을 포함하였던 왕조이였다.
16세기에는 티무르 왕조의 왕자 바부르는 페르가나의 지배자로 인도에 침입하였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무굴 제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동안 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개요
14세기 후반 서(西)차가타이 한국(汗國) 출신의 티무르는 스스로를 칭기즈 칸의 자손이라 칭하고 몽골 제국의 재건을 기도했다. 그는 사마르칸트에 수도를 두고 동서 차가타이 한국·일 한국을 병합하였으며 킵차크 한국·북인도에 침입했다. 이어 소아시아 방면에서 일어난 오스만 투르크를 앙고라에서 격파해 구(舊)몽골 제국의 서반부를 영유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는 다시 몽골인의 구적(仇敵) 명(明)의 정복을 기도했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했다.
티무르의 사후 왕실의 상속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샤 로흐 시대에 일시 번영을 되찾았다. 그런데 울루그 베그가 암살된 뒤 쓰러진 뒤에는 제국의 분열이 표면화되어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에 두 세 개의 정권이 대립했다. 그리고 킵차크 한국에서 나온 북방의 우즈베크족이 침입하여 1500년에는 사마르칸트가 함락되고, 2년 뒤 헤라트도 함락되었다.
수도인 사마르칸트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서 번영하여 왕년의 바그다드를 능가할 정도로 번영했다. 예술·문화면에서는 이란 문화의 영향이 강하고 역대 군주의 보호 장려에 의해서 티무르풍(風)의 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다. 건축 양식에서는 중국식의 탑과 유목 민족의 천막을 조합한 독특한 사원(寺院)이 만들어졌고, 회화(繪畵)에서는 이란풍의 미니어처(細密畵) 예술이 발달했다. 이란 문학에서는 시인 자미의 이름이 가장 알려졌고 아라비아 수학·천문학·의학· 지리학·역사학 등도 발달하여 이슬람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역대 군주
- 티무르(1370년 - 1405년)
- 할릴1405년 - 1409년)
- 샤 로흐(1409년 -1447년)
- 울루그 베그(1447년 - 1449년)
- 아브드 라티프(1449년 - 1450년)
- 압둘라(1450년 - 1451년)
- 아부 사이드(1451년 - 1469년)
사마르칸드 정권
- 술탄 아흐마드(1469년 - 1494년)
- 술탄 마흐무드(1494년 - 1495년)
- 바이순쿠르(1495년 -1496년)
- 술탄 알리(1496년)
- 바이순쿠르(2번째, 1497년)
- 바부르(1497년 - 1498년)
- 술탄 알리(2번째, 1498년 - 1500년)
헤라트 정권
티무르
티무르(تيمور Tīmūr/Taymūr 1336년 4월 9일~1405년 2월 18일, 영어로는 테멀레인(Tamerlane: 절름발이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몽골-투르크계 군사 지도자이며,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재위 1370년 ~ 1405년)이다. 이름은 중세 몽골어로는 Temür, 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 로서, “테무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말의 뜻은 "쇠"(鐵, iron)을 의미하며 이 이름을 가진 투르크계, 몽골계의 인물은 상당히 많았다.
생애
몽골 부족의 일파인 발라스부 출신으로 언어적으로는 이미 투르크화, 종교로는 이슬람화된 몽골 귀족의 가문에 속한다. 계보에 따르면, 5대 전 선조 카라챨 노얀은 칭기스칸의 차남 차가타이를 섬긴 유력한 무장이었으나, 티무르가 샤프리사브즈의 근교에서 태어날 때쯤에는 몰락하여 겨우 소수의 하인만을 갖고 있던 작은 귀족이었다.
젊은 시절 티무르는 차가타이 한국의 동서분열과 혼란을 틈타 하인들을 데리고 가축을 약탈하는 도적질을 일삼았지만, 뛰어난 군사지휘자로서 그 재능을 발휘하면서 서서히 인망을 모아 서차가타이 한국의 유력자로까지 성장하였다.
1360년 동 차가타이 한국의 투그르 티무르가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발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 받았다. 그러나 곧 동 차가타이 한국을 배신하고, 카라우나스부의 아미르 후사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해 본거지로써 사마르칸드를 손에 넣었다. 이 기간 전장에서 다리 한쪽을 다쳐 [절름발이 티무르]를 뜻하는 Tīmūr-i Lang 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서양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타멜랑(또는 타메렝, 크리스토퍼 말로위(Christopher Marlowe)에 따르면 타메를란(Tamerlane))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후 패권을 둘러싸고 후사인과 대립하여 1369년에 후사인의 본거지 발흐를 공격해 후사인을 죽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장악한 뒤 1370년에 후사인이 내세운 칸인 카불 샤를 처형하고 그 대신에 오고타이의 후예 슈르가드미슈 란 왕자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그해 후사인의 과부로써 칭기스칸의 자손이기도 한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큐레겐)]를 자칭했다.
칭기스칸의 자손이 아닌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스스로 칸에 즉위하지 않고, 다른 유목부족의 장군들과 같이 아미르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명목상은 칸이었던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로써 칸의 곁에 있는 아미르의 최고 유력자로써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370년 중앙 아시아에서 티무르 가문의 권력이 확립되고, 티무르 가문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면서 이를 티무르 왕조(티무르 제국)이라고 불렀다.
티무르는 칭기스칸이 쌓아 올렸던 세계제국의 꿈을 이상으로 삼았고, 또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리를 계속해, 전리품을 휘하의 여러 부족에게 분배해 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대외 원정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를 통일한 후 10년간 동 차가타이 한국을 지배한 모그리즈탄(동 투르크스탄)에 원정을 되풀이해, 코기란트 부족이 지배하던 호라즘을 병합하고, 주치의 후예 토그타미슈를 지원하여 토크다미슈를 주치 우르스의 칸에 추대해주고, 주변의 여러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1380년부터는 일 한국왕조의 해체후 분열상태로 있던 이란에 진출하여 호라산을 정복하고, 1386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1388년 토그타미슈가 티무르 제국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잠시 3년 전쟁을 종료한 티무르는 토그타미슈를 격파한 뒤 다시 이란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여 1392년부터 시작하여 5년 전쟁에서 무자파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 전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게 된 티무르는 여기서 북상하여 카프카스를 넘어 토크타미슈를 격파하여 볼가강 유역에까지 진군하여 주치 우루스의 수도 사라이를 파괴하고 루시제국(諸國)까지 침입한뒤 1396년에 귀환했다.
1398년 티무르는 인도 원정을 결심하고,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했다. 1399년 시작된 7년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을 일으킨 3남 미란 샤를 굴복시키고, 그루지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시리아로 들어가서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거기서 이라크로 전진해 모술을 정복했다. 1402년 중앙 아나톨리아에 진출한 티무르군은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확대를 저지하고,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영지를 바야지드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옛 영주들에게 반환해 준 뒤에 귀환했다. 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곳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티무르의 지배영역은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404년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격파하여 원나라의 옛 영지를 탈환한다는 목표를 갖고 중국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1405년 2월 오트랄에서 병사했다.
평가
티무르는 군사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인물로, 생애에 걸쳐 벌인 전투에서는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을 할 경우 특별한 이슬람교적인 문화로서의 도시건설을 할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원정은 그곳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기보다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을 살려주었던 반면에 티무르는 투항하는 적도 여지없이 살육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티무르 1대에 쌓아올린 티무르 왕조는 그 지배도 티무르의 개성에 크게 기대고 있었고, 티무르 생전에 확고한 지배체제가 준비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티무르의 사후 그의 제국은 급속도로 동요하고 분열되어 갔다.
일화
그리아미르 사당([아미르의 묘]란 뜻)에 있던 티무르의 검은돌로 된 관 속에는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때, 가장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한 문장이 새겨져 있어 아무도 관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6월 19일 소련의 조사에 의해 처음으로 개봉되어 다리의 장애등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일이 있은 후 3일 후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에 의한 소련 침공)이 실행되어 이것이 소련에서 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단이었다. 후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에 의해 뚜껑이 납으로 용접되어, 이후 두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샤 로흐(1377년~1447년, 재위 1409년~1447년, 페르시아어: شاهرخ)는 티무르 제국 제3대의 군주이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군(名君)으로서 내란을 진압하여 오스만 투르크와 명나라의 국교를 회복하여 티무르 제국의 융성 시대를 이룩했다. 샤 로흐는 학문·예술에 대한 훌륭한 이해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음의 울루그 베그의 치세와 함께 티무르풍(風) 이슬람 문화의 최성기를 맞았다.
울루그 베그(1393년~1449년, 재위 1447년~1449년, 페르시아어: الغبیگ)는 티무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티무르 제국 제4대 군주로, 제3대 군주 샤 로흐의 장자이다. 문화인으로서 뛰어난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로서 학자·예술가들을 우대하고 학문·예술을 보호 장려했기 때문에 수도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학예(學藝)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군주로서의 재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란이 끊이지 않았고 재위 불과 2년 8개월 만에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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