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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61 (몽골 제국 4 : 원나라) 본문
중국의 역사 61 (몽골 제국 4 : 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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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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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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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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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원나라(元 ; 중국 대륙에 있던 국가로서는 1271년~1368년, 유목국가로는 1271년~1635년)는 일반적으로 중국이 몽골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몽골족의 정복 왕조 원나라는 중국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한 영역을 지배하다가 명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난 뒤 ("북원"), 유목민 국가로 1635년까지 존속한 몽골인 왕조로서, 몽골 제국의 대칸 직할 세습령이었다. 정식 국호는 대원(大元)이었다.
원나라는 송나라 를 멸망시킨 이민족의 정복 국가이며, 중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이후 명나라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물려주게 된다. 원나라는 중국을 지배했으되 한족화 되지는 않았으며, 지배층뿐 아니라, 제도 및 문화에서도 기존 몽골 제국의 유목 국가적인 특성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원나라라는 호칭 대신 유목민의 나라를 가리키는 울루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원 울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가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몽골어로는 다이온 이케 몽골 울루스(Dai-ön Yeke Mongγol Ulus), 즉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國)이다. 원나라는 유목 국가인 몽골 제국의 직계 국가다. 그러면서도 중국화된 명칭과 제도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쇠퇴한다. 원나라가 성립된 전후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의 후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위가 크게 변화하면서 몽골 제국은 재편의 과정에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 끝에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이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대칸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라이 가문의 세습령(울루스)이 되었다.
몽골 제국의 재편
1259년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에 병사하고, 몽골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람을 수비하던 막내동생 아리크 부케는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둘째동생 쿠빌라이는 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훗날의 상도(上都)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몽케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람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서전인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아리크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아리크부케의 항복으로 인해 대칸의 지위는 다시 통합되었으나, 중국 서쪽의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에서의 대칸의 위신은 큰 타격을 입었다. 1269년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차가타이 가문의 바라크와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 그리고 주치 가문(킵차크 칸국 혹은 금장한국(Golden Horde))의 여러 왕이 탈라스 하반에서 모여 중앙아시아의 대칸령을 분할해 쿠빌라이에 대항해 자립의 태도를 명확히 했다. 이윽고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가 중앙아시아 여러 왕 사이에서 맹주의 지위를 확립하고, 하이두의 반항은 몽골 제국을 동서로 나뉘게 된 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하이두의 난)
그 사이 쿠빌라이는 중국식 정치기관인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고,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람에서 중국 북부의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로 옮겼다. 지방에는 몽골 제국의 금나라 공략의 과정에서 자립해 몽골에 귀의하여 화북 각지에서 호족 노릇을 하던 한족 현지군벌(한인세후)과 몽골인 귀족, 중앙정부와의 지배관계를 정리하고, 각 교통로에 총관부(고려의 쌍성총관부 등)를 설치하는 등 중국지배에 적합한 갖가지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271년, 국호를 대원이라고 하고 기존의 중국 통일 왕조의 맥을 잇게 된다. 이로써 칭기즈 칸이 세운 거대한 몽골 제국은, 서부의 여러 칸국들과 중국의 대칸령 사이의 느슨한 연합으로 재편되었다.
중국 지배
원나라 건국 당시 쿠빌라이의 세력은 몽골 고원과 기존 금나라가 점유하던 화북 지역에 불과했다. 장강 이남에 버티고 있던 남송은 뛰어난 경제력을 갖춘 것은 물론, 금나라 멸망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 충분히 원나라를 위협할 만한 군사력도 갖춘 터라, 그대로 유지시켰을 경우 원나라의 지배가 불안해 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몽케 칸의 대에, 남송의 재상인 가사도에게 패퇴한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 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력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일명 가미카제의 도움),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이 쩐 왕조에게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로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고, 그의 치세 때인 1301년 하이두가 죽자, 1304년 긴 시간 동안 원나라와 항쟁을 벌였던 서쪽 여러 칸과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동서 울루스의 융화로 인해 몽골 제국은 대칸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연합으로 다시 묶어지는 동시에, 실크로드 교역의 호황이 찾아왔다. 이 상황을 가리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 몽골의 평화)라고 불리었다.
원나라의 수도 대도는 전 몽골 제국의 정치 경제의 센터가 되어, 마르코 폴로 등 수많은 서방의 여행자가 방문하고, 그 번영은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강남의 항만도시에서는 해상무역이 융성하였고, 일본 원정을 통해 국교가 단절되었던 일본에서도 사적인 무역선 및 유학승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교류가 지속되었다.
쇠퇴기
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연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또 권력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칭기즈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의 모친 코코진등의 출신부족에서 쿠빌라이, 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옹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의 궁정귀족들이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옹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대대로 옹기라트씨 출신의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곤기라트부 출신의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 카톤이 궁정내의 권력을 장악하여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라고 이야기 되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 1322년에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다. 다음해 1323년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계승한 시데바라가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
겨우 제위가 안정된 것은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에 의해 쓰러진 끝에,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의 즉위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 권력을 장악하던 킵차크 친위군 사령관 에르 테무르에게 묶여있어, 에르 테무르가 병사할 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에르 테무르의 사후에는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인 바얀이 에르 테무르의 유아를 살해하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고, 1340년에는 바얀의 조카 토구다가 백부를 쿠데타로 살해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등,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항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성인이 된 칸도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구다가 추방당하는 등 중앙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 정치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페스트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중국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권력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차별정책 아래 놓였던 옛 남송인의 불만과 상업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명나라의 건국
1348년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육박했다. 여기까지 이르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의 북쪽으로의 이동에 의해 원 왕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존속하였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왕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허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왕통은 단절되었다.
북원
북원에서는 1388년 토구스 테무르의 자손이 끊어지면서 쿠빌라이 가문의 대칸세습이 끝나고, 쿠빌라이 가문 정권인 원나라는 단절되었다.
정치
원나라의 정치제도, 경제, 재정제도는 몽골 제국 특유의 제도가 이어져 유지되었기 때문에 중국을 지배한 다른 이민족의 역사와 비추어보더라도 상당히 특이한 것이었다.
역대 칸(汗)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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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 원 태조 (元太祖) |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 칸>) |
패아지근철목진 (孛兒只斤鐵木眞) (테무진) |
- | 1206년 ~ 1227년 |
- | 원 목종 (元穆宗) (원 세조 추숭) |
도녕황제 (道寧皇帝) |
패아지근출적 (孛兒只斤朮赤) (주치) |
- | - |
- | 원 성종 (元聖宗) (원 세조 추숭) |
충무황제 (忠武皇帝) |
패아지근찰합태 (孛兒只斤察合台) (차가타이) |
- | - |
임시 | 원 예종 (元睿宗) (원 세조 추숭) |
경양황제 (景襄皇帝) |
패아지근타뢰 (孛兒只斤拖雷) (툴루이) |
- | 1227년 ~ 1229년 |
제2대 | 원 태종 (元太宗) |
영문황제 (英文皇帝) |
패아지근와활태 (孛兒只斤窩闊台) (우구데이) |
- | 1229년 ~ 1241년 |
제3대 | 원 정종 (元定宗) |
간평황제 (簡平皇帝) |
패아지근귀유 (孛兒只斤貴由) (귀위크) |
- | 1241년 ~ 1248년 |
제4대 | 원 헌종 (元憲宗) |
환숙황제 (桓肅皇帝) |
패아지근몽가 (孛兒只斤蒙哥) (몽케) |
- | 1248년 ~ 1259년 |
제5대 | 원 세조 (元世祖) |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
패아지근홀필렬 (孛兒只斤忽必烈) (쿠빌라이) |
중통(中統) 1260년 ~ 1264년 지원(至元) 1264년 ~ 1271년 |
1260년 ~ 1271년 |
원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원 세조 (元世祖) |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
패아지근홀필렬 (孛兒只斤忽必烈) (쿠빌라이) |
지원(至元) 1271년 ~ 1294년 | 1271년 ~ 1294년 |
- | 원 유종 (元裕宗) (원 성종 추숭) |
문혜명효황제 (文惠明孝皇帝) |
패아지근진금 (孛兒只斤眞金) (징김) |
- | - |
제2대 | 원 성종 (元成宗) |
흠명광효황제 (欽明光孝皇帝) |
패아지근철목이 (孛兒只斤鐵穆耳) (테무르) |
원정(元貞) 1295년 ~ 1297년 대덕(大德) 1297년 ~ 1307년 |
1294년 ~ 1307년 |
- | 원 순종 (元順宗) (원 무종 추숭) |
소성연효황제 (昭聖衍孝皇帝) |
패아지근답랄마팔랄 (孛兒只斤答剌麻八剌) (다르마바라) |
- | - |
제3대 | 원 무종 (元武宗) |
인혜선효황제 (仁惠宣孝皇帝) |
패아지근해산 (孛兒只斤海山) (카이산) |
지대(至大) 1308년 ~ 1311년 | 1307년 ~ 1311년 |
제4대 | 원 인종 (元仁宗) |
성문흠효황제 (聖文欽孝皇帝) |
패아지근애육려발력팔달 (孛兒只斤愛育黎拔力八達) (아유르바르와다) |
황경(皇慶) 1312년 ~ 1313년 연우(延祐) 1314년 ~ 1320년 |
1311년 ~ 1320년 |
제5대 | 원 영종 (元英宗) |
예성문효황제 (睿聖文孝皇帝) |
패아지근석덕팔랄 (孛兒只斤碩德八剌) (시디발라) |
지치(至治) 1321년 ~ 1323년 | 1320년 ~ 1323년 |
- | 원 현종 (元顯宗) (원 진종 추숭) |
광성인효황제 (光聖仁孝皇帝) |
패아지근감마랄 (孛兒只斤甘麻剌) (카말라) |
- | - |
제6대 | 원 진종 (元眞宗) |
치효황제 (致孝皇帝) (진왕<晉王>) |
패아지근야손철목아 (孛兒只斤也孫鐵木兒) (예순테무르) |
태정(泰定) 1324년 ~ 1328년 치화(致和) 1328년 |
1323년 ~ 1328년 |
제7대 | - | 덕효황제 (德孝皇帝) (폐황제<廢皇帝>, 유주<幼主>) |
패아지근아속길팔 (孛兒只斤阿速吉八) (라기바흐) |
천순(天順) 1328년 | 1328년 |
제8대 | 원 문종 (元文宗) |
성명원효황제 (聖明元孝皇帝) |
패아지근도첩목이 (孛兒只斤圖帖睦爾) (투그테무르) |
천력(天曆) 1328년 ~ 1329년 | 1328년 ~ 1329년 |
제9대 | 원 명종 (元明宗) |
익헌경효황제 (翼獻景孝皇帝) |
패아지근화세랄 (孛兒只斤和世剌) (쿠살라) |
천력(天曆) 1329년 | 1329년 |
제8대 (복위) |
원 문종 (元文宗) |
성명원효황제 (聖明元孝皇帝) |
패아지근도첩목이 (孛兒只斤圖帖睦爾) (투그테무르) |
지순(至順) 1330년 ~ 1332년 | 1330년 ~ 1332년 |
제10대 | 원 영종 (元寧宗) |
충성사효황제 (沖聖嗣孝皇帝) |
패아지근의린질반 (孛兒只斤懿璘質班) (린칠반) |
지순(至順) 1333년 | 1332년 ~ 1333년 |
제11대 | 원 혜종 (元惠宗) |
선인보효황제 (宣仁普孝皇帝) (순황제<順皇帝>) |
패아지근타환첩목이 (孛兒只斤妥懽帖睦爾) (토곤테무르) |
지순(至順) 1333년 원통(元統) 1333년 ~ 1335년 지원(至元) 1335년 ~ 1340년 지정(至正) 1341년 ~ 1368년 |
1333년 ~ 1368년 |
쿠빌라이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년 ~ 1294년)은 몽고 제국의 제5대 칸(재위 : 1260년 ~ 1294년)이며,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고려·버마·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색목인(중앙 아시아 인)을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서양인을 우대하여 마르코 폴로 등이 입국하는 등,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고,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을 완성하여 원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생애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고려에 대한 정책
쿠빌라이는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에 협력을 종용하였다. 또한 한인(漢人) 학자들을 동원하여 고려로 하여금 성리학(주자학)을 도입하게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때부터 계속된 원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파스파 문자
파스파 문자(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몽골 원나라(元) 국사(國師)인 파스파(八思巴)가 쿠빌라이(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가족관계
황후는 소예순성황후 옹기라트 씨 이다. 그녀의 가문은 칭기스칸의 처이자 쿠빌라이의 할머니인 부르테 대카툰을 배출한 가문으로 보르지긴 일족에 이은 몽고 제국 서열 2위의 가문이였다.
자녀로는 12남 5녀가 알려져 있는데, "원사"와 "집사" 의 기록이 일부 상이하다.
- 도르지 [多爾濟] : 장남, 일찍 죽었다.
- 명효황태자 (明孝皇太子)
- 진왕 망갈라 [秦王忙哥剌]
- 북안왕 노무칸 [北安王那木干]
- 코리다이 [忽理台] : 원사에는 기록이 없고 집사에만 쿠빌라이의 5남으로 기록이 있다.
- 운남왕 쿠카치 [雲南王忽哥赤]
- 아야치 [愛牙赤]
- 서평왕 올로치 [西平王奧魯赤]
- 영왕 쿠케추 [寧王闊闊出]
- 진남왕 토곤 [眞南王妥歡]
- 쿠틀룩 티무르 [忽都魯帖木兒]
- 테무치 [帖木赤]
- 창국 대장공주 (昌國大長公主) : 창왕(昌王) 옹기라트 부카에게 하가(下嫁)
- 조국 대장공주 (趙國大長公主) : 조왕(趙王) 옹기라트 아이부카에게 하가
- 노국 대장공주 (魯國大長公主) : 세 번 결혼하였다
- 첫 번째 남편은 알라친 [斡剌眞] 이며 옹기라트 씨족이다.
- 두 번째 남편은 티무르 [帖木兒] 이며 역시 옹기라트 씨족이다.
- 세 번째 남편은 만지타이 [蠻子台] 이며 역시 옹기라트 씨족이다.
- 제국 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 : 본명 쿠트로 카이미시. 고려 충렬왕에게 하가
- 창국공주 차륜 (昌國公主茶倫) : 칭기스칸의 맏 딸인 코친 베키의 아들과 결혼
친킴(真金, 1243년 ~ 1285년)은 몽골제국의 왕족이었다. 그는 쿠빌라이와 차브이의 차남이었다. 묘호는 유종(裕宗)으로 원 성종이 추숭하였으며 시호는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이다.
그는 코코진과 결혼하여 원 성종 테무르를 낳았다. 그녀는 곤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쿠빌라이의 차남 친김의 처로 받아들여져 1263년에서 1265년까지 3년간 아들 카말라, 다르마발라, 테무르를 얻었다.
1281년에 차브이가 사망하며 군주 후,비의 궁과 소속영지, 재산은 동일 부족 출신의 후,비가 상속하는 몽골의 전통을 따라 생전의 차브이가 모은 막대한 재산을 코코진이 상속하였다.
1285년에는 친김 태자가 쿠빌라이보다 먼저 죽고 원나라에 의해 최고의 권력과 재산이 있는 세력이 있는 황태자부의 관리 권한이 코코진이 받았다.
그의 가족은 다음과 같다.
성종(成宗,테무르)은 원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1294년~1307년)였다. 시호는 흠명광효황제(欽明光孝皇帝) 휘는 패아지근철목이(孛兒只斤鐵穆耳, 테무르)이다.
1294년,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이며 친김 태자의 아들 테무르 올제이투가 제위에 올라 성종이 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297년,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와 몽케의 손자 울루스 부카가 우구데이 칸국을 이탈하여 원나라로 귀환하였고 이로 인해 카이두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카이두는 지속적으로 원을 공격하였고 1298년에는 성종의 사위인 쾨르기즈를 생포하여 처형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세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데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카이두는 1301년 아리크 부케의 차남 멜릭 테무르,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와 함께 최대 규모의 원정에 나섰다. 전쟁 초기엔 카이두의 군대가 우세하여 가말라와 그의 아들 예순테무르 군대를 압도했지만 카이산의 군대가 전장으로 지원되면서 전황은 급속도로 변했다. 차가타이 칸국의 칸인 두아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퇴각했고 카이두는 전투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사망하고 말았다.
1301년 카이두가 죽자 두아는 즉시 오고타이 한국의 칸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1303년에 카이두의 장남인 차바르를 칸위에 올린 뒤 1304년 긴 시간 동안 원나라와 항쟁을 벌였던 서쪽 여러 칸과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동서 울루스의 융화로 인해 몽골 제국은 대칸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연합으로써 다시 묶어지는 동시에, 실크로드 교역의 호황이 찾아왔다. 이 상황을 가리켜 바쿠스 몽고리카(몽골의 평화)라고 불리었다.
원나라의 수도 대도는 전 몽골 제국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어, 마르코 폴로 등 수많은 서방의 여행자가 방문하고, 그 번영은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강남의 항만도시에서는 해상무역이 융성하였고, 일본 원정을 통해 국교가 단절되었던 일본에서도 사적인 무역선 및 유학승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교류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평화협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1306년에 두아는 원나라의 성종과 연합하여 오고타이 한국을 공격, 칸인 차바르를 추방시키고 원과 함께 오고타이 한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연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또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칭기즈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의 모친 코코진 등의 출신부족에서 쿠빌라이, 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곤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의 궁정 귀족들이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 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다.
카이산은 원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1307년~1311년)였다. 원 무종(元武宗)의 시호는 인혜선효황제(仁惠宣孝皇帝) 휘는 패아지근해산(孛兒只斤海山)이었다.
그는 쿠빌라이의 황손 친김 태자의 아들 다르마발라와 다기의 아들이었다.
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연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또 권력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칭기즈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의 모친 코코진 등의 출신부족에서 쿠빌라이, 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곤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의 궁정귀족들이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다.
그는 킵차크 한국, 아수드, 캉그리 인사를 영입하였고 곤기라트 족에 대해서는 논공행상이 없었다.
두아가 1307년에 죽고 차가타이 한국이 칸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이자 카이두의 네 아들 차파르, 오르스, 얀기차르, 투그메는 힘을 모아 131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이끄는 반란군은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고 이 패배 이후 차파르는 원나라의 무종에게로 망명했다. 차파르가 원나라로 망명하면서 우구데이계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다.
가족 관계
황후는 선의혜성황후 옹기라트 씨 [宣懿惠聖皇后 弘吉剌氏] 이지만, 황후가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낳은 두 명의 후비가 황후로 추존되었다. 자녀는 2남이고, 딸은 없다.
아유르바르와다(바얀투)는 원나라의 제4대 황제(1311년~1320년)였다. 원 인종(元仁宗)의 시호는 성문흠효황제(聖文欽孝皇帝) 휘는 패아지근애육려발력팔달(孛兒只斤愛育黎拔力八達)(아유르바르와다)였다. 바얀투 칸은 아유르바르와다였다. 그는 쿠빌라이의 황손 다르마발라와 다기의 아들이었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대대로 곤기라트씨 출신의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곤기라트부 출신의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 카톤이 궁정내의 권력을 장악하여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라고 이야기 되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시데바라 계승했다.
바얀투 칸은 원나라 정부의 개혁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 한국의 울제이투과 동맹하여 원나라를 공격한 차가타이 한국의 에센 부카 1세에 대항하였다. 1316년 그는 에센부카를 격파하였고 에센부카의 사후에 케벡이 원나라와 화의하였다.
1322년에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다.
원 영종(元英宗)은 원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1320년 ~ 1323년) 였다. 원 영종의 시호는 예성문효황제(睿聖文孝皇帝) 휘는 패아지근석덕팔랄(孛兒只斤碩德八剌)(시데발라) 였다. 게게엔 칸은 시데발라로 태어나 원나라와 몽골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유르바르와다 부얀투 칸과 훈기라드족의 라드나시리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었다.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 1322년에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다. 다음 해 1323년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계승한 시데바라가 살해당한다.
그는 형 카이샨에게 카이산의 아들을 황태자로 임명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카이산인 죽자 카이산의 두 아들은 변방으로 좌천되었고 카이산파의 장교들은 숙청되었다. 시데발라의 강력한 조모 다기는 시데발라를 황태자로 임명하였고 다시 칸으로 즉위시켰다. 왜냐하며 그는 훈기라드 하툰의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 제국은 거의 파산상태였으며 그녀는 손자의 계승 직후에 테무데르를 비서실장으로 복위시켰다.
1322년 다기와 테무데르의 죽음은 그가 실질적으로 집권하게 하였다. 그는 훈기라드 족을 새 행정부에서 구동하려고 하였고 테무데르의 경쟁자이며 안퉁의 손자인 잘라이르의 바이주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였다.
1323년 8월 그가 상도의 여름 궁에서 대도의 겨울궁으로 이동하다가 난포에 머물 때 황제 시데발라와 비서실장 바이주는 테무데르의 양자 테그시에 의해 암살되었다.
테그시는 예순테무르에게 왕좌에 오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예순테무르는 테그시 파를 숙청하였고 그것은 대도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영종의 치세는 짧았다. 그는 조모 다기의 사후 한 해 동안 겨우 직접 다스렸다. 그리고 그는 아유르바르와다와 같인 중국 문화를 보호하여 중국의 기록에서 한영받는 황제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데발라의 암살은 때로 친중국파와 친몽골파의 투쟁으로 설명된다. 예순테무르 칸은 즉위 전에 몽골을 다스렸고 그의 정책은 중국 관료에게는 선호되지 않았다.
원 진종(元眞宗 1293년~1328년)은 원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1323년 ~ 1328년)였다. 원 진종의 시호는 흠인대효황제(欽仁大孝皇帝) 이다. 태정(泰定)이나 치화(致和)는 그가 재위 기간에 사용했던 연호이며, 그의 묘호와 시호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흔히 태정제로 지칭되는 이유는 그의 아들이 폐위될 때 그의 시호 역시 추탈되었기 때문이다. 휘는 패아지근야손철목아(孛兒只斤也孫鐵木兒)(예순테무르)였다. 그는 쿠빌라이의 손자이며 친김 태자의 장자인 가말라의 아들이었다.
그는 시데바라(시디발라)를 계승하였다. 그는 교역의 황제였다. 그는 카말라의 아들로 1293년에 태어났다. 카말라는 1292년 친김의 사후 진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동생 테무르와 다르마발라 그리고 그들의 아들 손자들과의 계승 경쟁에서 패하였다. 진왕은 고비사막 북쪽의 몽골을 소유하였고 징기스칸의 무덤이 오르도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302년 카말라는 죽고 예순테무르가 진왕으로 계승하였다.
1323년 시디발라 게게엔 칸이 테그시에의해 암살될 때 예순 테무르는 반란군에의해 지지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훈기라트 족의 부얀 켈미시였기 때문이었다. 보답으로 그는 징기스칸의 오르도스의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대도로 군대를 보내어 대도에 다다르기 전에 반란군을 처형하였다.
그는 그의 5년간의 치세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는 제국의 통치권을 무슬림 다울라트 샤에게 넘겼다.
차가타이 한국의 두아 칸을 계승한 케벡 칸이 사망한 1326년(혹은 1325년) 이후 차가타이 한국의 국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각 유목 부족들은 독자적 권리를 행사하며 서로 분열하였고, 칸은 부족장들에 의해 추대되고 부족장들에 의해 쫓겨났다.
그는 상도에서 1328년 돌연사하였다. 그의 아들 라기바그가 다울라트 샤에의해 칸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경쟁자 투그테무르에의해 격파되었다.
원 천순제는 원나라의 제7대 칸(재위: 1328년)이었다. 그의 시호는 덕효황제(德孝皇帝)이며 휘는 패아지근아속길팔(孛兒只斤阿速吉八)(라기바흐) 천순(天順)이었다.
그의 아버지 예순테무르는 상도에서 1328년 돌연사하였다. 그의 아들 라기바그가 다울라트 샤에 의해 칸으로 즉위하였으나 경쟁자 투그테무르에 의해 격파되었다.
원 문종(元文宗)은 원나라의 제8대 황제(재위:1328년~1329년,1330년 ~ 1332년)였다. 그는 자야아투 칸으로 불렸다.
원 문종의 휘는 투그테무르(패아지근 도첩목이,孛兒只斤圖帖睦爾)였으며 시호는 성명원효황제(聖明元孝皇帝)였다. 그는 카이산 퀼리그 칸과 탕구트 여인의 둘째 아들이었다. 쿠살라 후트그투 칸은 그의 형이었다.
그의 아버지 카이샨이 돌연사하고 그의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1311년 즉위하였다.
그와 그의 형제는 조모 다기와 테뮈더를 포함한 다른 훈기라트 부족 구성원에 의해 중앙 정권으로 부터 제거되었다. 그들은 훈기라트 하툰의 왕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들 시디발라 게게엔 칸은 1320년에 즉위하였으나 암살되고, 예순테무르 칸이 즉위하며 그의 조건은 풀렸다.그는 후아이의 왕자라는 직위가 주어졌고 난징으로 옮겼다가 다시 지앙글링으로 옮겼다.
1328년 예순테무르가 붕어한 후 라기바흐가 계승하였다가 폐위되고 투그 테무르가 킵차크 한국의 사령관 엘 테무르에의해 다두(베이징)에서 대칸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형제 쿠살라는 먼 중앙 아시아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한편 예순테무르의 아들 라기바그는 상도에서 즉위하였으나 결국 내전에서 투구테무르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형 쿠살라는 몽골과 차가타이 한국의 장군들은 모아서 월등한 대군으로 카라코룸으로 입성하였다. 투그테무르는 양위를 선언하고 다음해 엘 테무르로 하여금 왕관을 쿠살라에게 가져가고 다두(베이징)에서는 그를 환영하였다. 쿠살라는 카라코룸에서 즉위하고 투구테무르는 황태자가 되었다. 다두로 가던 쿠살라는 투그테무르와 만나고 4일 후에 돌연사하였다. 또는 엘 테무르에의해 독살되었다. 그리하여 투그테무르는 복위하였다.
자야아투 칸은 중국의 황제로 원나라와 몽골제국을 다스렸다. 차가타이 왕자 창시는 200명의 러시아 포로를 선물하였다. 원나라 황제는 그에게 보석을 주었다.
투그테무르는 백과사전 징시 다디안을 편찬케 하였다. 그리고 주시의 유교를 지원하였으며 그는 바올린 불교사원에 자오조우 탑을 건설케 하였다.
그는 1332년에 붕어하였고 아들 엘 테귀스가 있었지만 쿠살라의 아들을 계승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쿠살라의 차남 린친발이 6세로 즉위하였다.
원 명종(元明宗)은 원나라의 황제(재위:1329년) 였다. 그의 시호는 익성경효황제(翼聖景孝皇帝) 휘는 패아지근화세랄(孛兒只斤和世剌)(쿠살라)였다. 그는 투그테무르의 형이었으며 카이산 퀼리그 칸과 탕구트 여인의 둘째 아들이었다.
토곤 테무르는 중앙아시아에 머물던 쿠살라와 투르크 카를룩족의 추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328년 예순테무르가 붕어하고 투그테무르가 킵차크 한국의 사령관 엘 테무르에 의해 대도(베이징)에서 대칸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형제 쿠살라는 먼 중앙 아시아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한편 예순테무르의 아들 라기바그는 상도에서 즉위하자 내전이 벌어진 결과 투구테무르가 승리하여 즉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형 쿠살라는 몽골과 차가타이 한국의 장군들은 모아서 월등한 대군으로 카라코룸으로 입성하였다. 투그테무르는 양위를 선언하고 다음해 엘 테무르가 왕관을 쿠살라에게 가져가고 다두는 그를 환영하였다. 쿠살라는 카라코룸에서 즉위하고 투구테무르는 황태자가 되었다. 다두로 가던 쿠살라는 투그테무르와 만나고 4일 후에 돌연사하였는데, 엘 테무르에의해 독살되었다. 그리하여 투그테무르가 다시 복위하였다.
투그테무르는 1332년에 붕어하였고 아들 엘 테귀스가 있었지만 쿠살라의 아들이 계승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쿠살라의 차남 린친발이 6세로 즉위하였다.
원 영종(元寧宗)은 원나라의 충성사효황제(沖聖嗣孝皇帝 재위:1332년 ~ 1333년)로 휘는 패아지근의린질반(孛兒只斤懿璘質班)(린칠반)이었다. 그의 어머니 부다시리는 나이만 부 출신으로 쿠살라가 즉위 이전에 알타이 바색의 서쪽으로 망명하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버지 쿠살라가 죽고 투그테무르가 즉위할 때 린친발이 황태자 임명되었다. 투그테무르가 1332년에 사망하였고 아들 엘 테구스가 있었지만 쿠살라의 아들을 계승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투그테무르의 미망인 부다시리하툰은 쿠살라의 차남 린친발이 6세로 즉위시켰다.
실제의 군주 엘 테무르는 쿠살라의 장남 토곤테무르가 왕좌에 오르는 것에 저항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토곤테무르의 아버지를 독살하였는지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곤테무르가 대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유아 린친발은 대도에서 투그테무르에 의해 보호되었다. 그리하여 엘 테무르는 린친발을 대칸으로 즉위시켰으나 두 달 후 그는 7세로 사망하였다.
엘테무르는 다시 부다시리에게 엘테구스를 즉위시키자고 요청하였지만 거절되었다. 그는 운난에서 토곤테무르를 초청할 수밖에 없었다.
원 순제(元順帝, 1320년 - 1370년) 혹은 토곤 테무르는 원나라의 제11대 칸(재위:1333년 ~ 1368년 )이다. 순제는 명나라에서 바친 시호로, 정식 시호는 혜종(元惠宗) 선인보효황제(宣仁普孝皇帝)라고 하며, 휘는 패아지근타환첩목이(孛兒只斤妥懽帖睦爾)(토곤 테무르)이다.
토곤 테무르는 중앙아시아에 머물던 쿠살라와 투르크 카를룩(葛邏祿)족의 추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나라는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5대~10대까지)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에 의해 반복적으로 쓰러진 끝에, 겨우 제위를 안정시킨 황제는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의 즉위에 의해서 이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킵차크 친위군 사령관 엘 테무르에게 묶여있어, 엘 테무르가 병사할 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에르 테무르 사후에는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인 바얀이 에르 테무르의 유아를 살해하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고, 1340년에는 바얀의 조카 토구다가 백부를 쿠데타로 살해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등,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항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성인이 된 칸도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구다가 추방당하는 등 중앙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치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페스트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중국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권력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었고, 원나라의 차별정책 아래 놓였던 옛 남송인의 불만과 상업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착취에 신음하던 농민들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마침내 1348년, 현재의 신장 지역인 차가타이 한국 동부 지역의 유력 가문인 도그라트(Duglaht)부에서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를 옹립하면서 차가타이 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동차가타이 한국(모굴리스탄 한국)의 첫번째 칸이 된 투글루크 티무르가 잠시 차가타이 한국을 통합하고 여러 부족의 아미르들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이 일시적 통합은 그가 죽은 1363년에 붕괴되고 말았다.
1348년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적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육박했다. 1368년에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에 의해 수도인 대도(大都)를 빼앗기고 원나라 순제는 몽골 고원에 있는 상도(上都)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1369년 상도도 명나라가 점령해 순제는 상도의 북쪽에 있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를 하였다. 그리고 1년 뒤인 1370년에 원 순제는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에게 칸 지위를 물려주고 응창부에서 사망하였다.
명나라에게 쫓겨 수도를 북쪽에 있는 응창부로 천도하였지만, 북원은 여전히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가 1634년 후금에 의해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가족 관계
첫 번째 황후는 태평왕 옌티무르의 딸 킵챠크씨[欽察氏] 였으나, 옌티무르 일가를 내칠 때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이후 옹기라트 씨족에서 황후를 맞아들였고, 종국에는 고려인 기씨가 제1황후가 되어 보현숙성황후 (普顯淑聖皇后) 라고 하였다. 자녀는 6남 5녀이다.
- 원 소종, 아유시리다라
- 오왕(吳王) 바얀 테무르 [伯顔帖木兒]
- 촉왕(蜀王) 투센 테무르 [都先帖木兒]
- 익왕(益王) 토구스 테무르 [塔古思帖木兒]
- 제왕(齊王) 옌타이 [燕台]
- 초왕(楚王) 코타이라 [和台剌]
- 정국공주 (鄭國公主) : 진동무성왕(鎭東武成王) 박공목소특 (博供穆素特) 에게 하가(下嫁)
- 초국공주 (楚國公主) : 요왕(遼王), 옹기라트 소보치만수트 [色坪持滿思特] 에게 하가
- 연국공주 (燕國公主) : 정남충성왕(征南忠成王), 옹기라트 쇼샤크부타이카바이 [礎朔克布台可巴) 에게 하가
- 완국공주 (宛國公主) : 평북무헌왕(平北武獻王), 옹기라트 시킴[時金] 에게 하가
- 촉국공주 (蜀國公主) : 안평왕(安平王), 파통격만 (把通格滿) 에게 하가
- 여양왕 찰한특목이(勵梁王察罕特穆爾): 원순제의 동생
- 영랑공주 민민특목이(領朗公主敏敏特穆爾) : 여양왕의 딸. 원순제의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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