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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62 (고려-몽골 전쟁)

두바퀴인생 2010. 4. 13. 14:44

 

 

 

중국의 역사 62 (고려-몽골 전쟁)

 

 

 

고려-몽골 전쟁

 

고려-몽골 전쟁 고려 몽골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다만 한국의 입장에서 원의 침략, 몽골의 입구(入寇), 대몽항쟁 등으로 부르며, 특히 대몽항쟁으로 부를 때에는 고려-몽골 전쟁을 비롯하여 삼별초의 항쟁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배경

고려 고종 최씨의 무단정치(武斷政治) 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라는 영웅이 나와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몽골은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이를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다(→강동성 전투).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제1차 전쟁

칭기즈칸의 대를 이은 오고타이(태종)는 1231년(고종 18) 장군 살리타이(撒禮塔)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침입에 착수하여,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이를 맞아 구주(귀주)·자주(慈州)·서경 등에서 크게 무찔렀으나 대체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드디어 몽골 군사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 侹)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그 결과 싸움은 일단 중지되고 몽골은 이듬해인 1232년 음력 1월 군대를 철수하였는데 몽골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명을 두었다고 전하나 《고려사》에는 전혀 이런 기록이 없다.

 

제2차 전쟁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이는 고려의 본의가 아니었고 또 앞으로 몽골의 태도 여하를 몰라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江華遷都)를 결정하고,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 :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굳게 하였다. 이는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이는 7개월 만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서경의 홍복원(洪福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南京 : 한양)을 공격한 다음 한강을 넘어 남쪽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해전(海戰)에 약한 몽골은 강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하여 처인성(處仁城 : 용인)을 공격하다가 살리타이는 고려의 김윤후(金允候)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였는데, 이때 부인사(符仁寺) 소장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불타 없어졌다. 한편 몽골의 철수에 기세를 올린 최우는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에게 가병(家兵) 3천을 주어 앞서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고, 가족을 사로잡고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제3차 전쟁

1235년(고종 22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당을태(唐兀台)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몽골은 개주(介州 : 개천)·온수(溫水 : 온양)·죽주(竹州 : 죽산)·대흥(大興 : 예산) 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 유명한 황룡사 9층탑(皇龍寺九層塔)도 이때에 파괴되었다.

 

이같이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도만은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강도에 웅거하여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강도에서는 백성에게 미치는 피해를 우려하여 1238년(고종 25년) 겨울 김보정(金寶鼎) 등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고, 몽골은 왕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를 시작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독촉으로 입조의 불가능함을 말하고 왕족 신안공 전(新安公 佺)을 왕제(王弟 : 왕의 아우)라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내고 1241년(고종 28년)에는 신안공의 종형(從兄 : 사촌형) 영녕공 준(永寧公 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제4차 전쟁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구유크 칸(貴由 :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출륙(出陸 : 강화도에서 나옴)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몽골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한때 철군하였으나,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1년(고종 38년) 예케(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주(東州 : 철원)·춘주(春州 : 춘천)·양근(楊根 : 양주)·양주(襄州 :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제5차 전쟁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고,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그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과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제6차 전쟁

이듬해 몽골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하여,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제7차 전쟁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결과

이처럼 7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은 고려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막대한 인명·재산·문화재의 피해를 입힌 채 몽골은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몽골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1259년(고종 46년) 음력 3월 박희실(朴希實)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도의 성을 헐게 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 끝에 드디어 고려는 굴복하였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그는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 강도에서는 무신간의 알력이 생겨 한때 왕이 폐위되었으나 다시 복위하였고, 몽골의 초청을 받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하여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완전히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는 강화에 천도한 지 39년 만의 일이다.

 

영향

고려는 강화도의 작은 섬을 안전지대로 삼아 근 40년간 질풍 같은 몽골의 대군을 맞아 항전하는 동안 상하 모든 사람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극히 왕성하였는데,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 무사들의 항거정신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부처의 힘을 빌고자 15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사실은 한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문화의 형성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 각지는 적의 침략을 당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족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화재는 소실되고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간섭을 받아 충렬왕 이후 공민왕까지는 부마국(鮒馬國 : 사위나라)으로 변질되어 자주성을 잃은 왕조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기구와 그 명칭은 제국이 아닌 왕국으로써의 관제로 개편당했고, 동·서북면에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동녕부(東寧府) 등이 설치되어 국토의 손실을 가져왔다. 한편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왕실의 내부·심왕당(瀋王黨)의 대두 등은 고려 쇠퇴의 중요한 원인을 만들었다. 문화적으로도 몽골 지배하의 80여 년간은 문물교환·인물교환이 잦아 이른바 몽골풍의 유행을 보게 하여 고려인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동서 문화의 교류에 힘쓴 몽골의 영향을 받아 천문·의학·수학·역법(曆法)·예술·목화·화약·정주학(程朱學) 등이 전래되어 고려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상류층 사회에서도 고려양(高麗樣)이 유행하게 되었다.

 

 

고려의 대몽항쟁

 

고려의 대몽항쟁 고려 몽골에 맞서 싸운 전쟁을 일컫는다. 좁게는 고려-몽골 전쟁을, 넓게는 삼별초의 항쟁을 비롯한 공민왕 때의 원나라와의 전쟁까지도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대몽항쟁이라 하면 고려-몽골 전쟁과 삼별초의 항쟁만을 가리킨다.

 

고려와 몽골의 접촉

고려가 몽골과 최초의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은 몽골에게 쫓겨 오는 거란인(금나라 군)을 협공하던 때부터이다. 거란인은 금이 망할 무렵 독립하였다가 다시 몽골군에게 쫓겨 고려의 강동성(江東城)에 내려와 서북 지방에서 약탈을 감행했다. 고려는 몽골과 합세하여, 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이를 함락시켰다. 몽골은 이후 고려에 대해 매년 공물(貢物)을 요구함으로써 양국 사이는 소원해져 갔다.

 

무신정권의 분열

한편 농민은 무인정권에 점차 반항심을 갖게 되었고, 점차 대두한 문신들은 왕을 중심으로 몽골과 강화(講和)할 것을 주장했다. 문신들은 외세와 결탁하여 주전파(主戰派)인 무인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다. 1258년(고종 45년) 무신 유경(柳璥)과 무신 김준(金俊) 등이 최의(崔竩)를 살해하자 정권은 일단 왕에게 돌아가고 대몽 강화가 결정되었다. 다음해인 1259년 태자 전(倎)이 몽골에 입조(入朝)하여 항복의 뜻을 표하고 강도(江都)의 성곽을 파괴하였다.

 

무신정권은 여전히 대몽 강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김준은 비록 대세에 끌려 적극적으로 강화를 거부하지는 못하였으나 강화 정책에 불만이 없지도 않았다. 김준을 죽이고 대신 정권을 쥔 임연(林衍)은 친몽 정책을 수행하는 원종을 폐하는 등 노골적으로 강화를 반대했다. 그러나 국내 결속의 해이(解弛)와 강화 정책의 진전으로 몽골의 압력은 더해져 원종이 복위되고 또 몽골병이 출동하였다.

 

항몽전이 장기화되자 무신정권은 제정도 악화되고, 통솔력의 유지도 점차 어려워졌다. 최우의 아들 최항은 집권 8년 만에 병사하였고(1257년), 그 뒤를 이은 최의는 다음해인 1258년(고종 45년)에 그 수하 김준에게 제거됨으로써 최씨 정권은 막을 내렸다.

 

강화의 성립

1257년(고종 44년) 몽골에서 강화 교섭의 요구 조건을 양보해 오고, 고려에서도 다음해에 대몽 항쟁을 주도해온 최씨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강화 교섭은 직전을 보게 되었으니, 1259년(고종 46년)에 파견된 고려 태자는 몽골의 몽케 칸(원 헌종)이 죽은 직후 아우 쿠빌라이(원 세조)를 만나 강화를 성립시켰다. 제위 계승을 놓고 형제간에 무력 충돌을 하게 된 쿠빌라이는 그토록 완강한 항전을 벌여온 고려가 자신에게 화의를 요청해온 것에 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였고, 고려에 대해 전과 다른 호의를 보였다. 그는 고려 측에서 강화 조건으로 제시한 고려 왕국의 존속 보장과 몽골군의 즉각적인 철수 등과 관련된 여섯 개 조항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였다.

 

무신정권의 종말

강화는 성립되었으나, 1264년(원종 5년) 몽골에서 친조를 요구하자, 무신들을 중심으로 반몽 여론이 다시 일어났다. 더욱이 몽골이 일본 원정을 위해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줄 것을 고려에 요구함에 이르러서는 반몽 여론이 크게 고조되어, 원종(元宗)을 중심으로 한 강화론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새로운 무인집정 김준이 살해되고 임연(林衍)이 집권했으며, 1269년(원종 10년)에는 임연이 독단으로 원종을 폐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몽골에 가 있던 세자(뒤의 충렬왕)가 몽골에 요청하여 지원을 받음으로써 원종은 복위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몽골이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게 만든 사건이 되었다.

 

복위 직후 몽골에 간 원종은 태자와 몽골 공주의 혼인을 제의하고, 무신정권의 제거를 위해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음력 2월 궁지에 몰린 임연이 원종의 귀국 직전에 병사하였으나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무인집정이 되어 반몽 노선을 고수하였다. 그는 강도로부터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하는 원종과 대립하다가 살해되었다(1270년). 이로써 무신정권은 끝이 나고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개경으로 환도가 결정되었다.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三別抄의 抗爭, 1270년~1273년)은 고려-몽골 전쟁이 끝난 뒤 삼별초 몽골(원나라) 및 고려 왕조에 대항하여 일으킨 항쟁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또는 삼별초의 난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반란군들과는 다르게 삼별초는 난을 일으키기 전에는 고려 정부의 지휘하에 있었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군부 독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입해 오자, 최씨 무신정권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하지만 허약한 기반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반란 중 일부는 평정되었지만, 북부 지역의 반란 무리는 몽골로 이탈하고, 그 영토는 몽골 제국에 병합되었다. 또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는 몽골 제국에 항복하였다.

 

몽골의 지원으로 군부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되찾게 된 원종 1270년(원종 11년) 삼별초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끄는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의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애초에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면서 대몽 항쟁에서 선봉에 섰던 삼별초는 그러한 강화(講和)와 무신정권의 와해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즉각 반기를 들었다.

 

삼별초 지유(脂諭) 배중손과 야별초(夜別抄)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은 항쟁을 결의하였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었으며, 왕족 승화후 온(昇化候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1천여 함선을 징발하여, 고려 정부의 재화와 백성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며 남행하여 진도에 이르렀다. 그곳에 항구적인 근거지를 두고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았다. 그 뒤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고 그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였으며, 고려의 유일한 정통 정부임을 주장했으며 일본과 연계하고자 외교도 펼쳤다. 당시 진도와 그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무신정권이 소유한 농장이 그때까지도 대규모로 존재했다. 동시에 경상도 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서울로 운송되는 길목에 진도가 있었으며, 이는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빼앗아 자체 군량으로 쓰는 동시에 개경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또한 남해 연안과 각 도서·나주·장흥에서 동으로는 마산·김해·부산 등까지, 북으로는 전주에까지 출병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그해 음력 11월에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는 등 1271년 초까지 여러 차례 여몽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개경 정부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1271년(김진관 12년) 음력 5월 상장군 김방경 흔도(炘都)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이 세 방향에서 진도를 향해 공격한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삼별초가 중군을 방어하는 동안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하였다. 진도 정권이 수립된 지 9개월 만에 진도는 함락당하였다.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전사하였다.

 

1271년 말, 김통정이 이끄는 잔존 세력은 탐라(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탐라에서의 삼별초는 처음 1년 동안 자체적인 조직 정비 및 방어 시설의 구축에 주력하였고, 이후 약 반년간 전라도 연해안에 대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충청도 경기도 연해안까지 확대되었으며, 개경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조직적 공략으로 1273년(원종 14년) 음력 4월 제주 삼별초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삼별초의 항전은 고려 대몽항전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서 이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의 정치적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당시 고려 민중 중에서 삼별초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남부 지방의 조세가 개경으로 운송되지 않기도 하였다.

 

몽골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1294년까지 탐라를 직접 통치하였다. 한편 고려의 반란 진압에 도움을 줌으로써 일본 원정에서 고려 정부의 지원을 더 많이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삼별초의 난은 외세 침략에 대해 완강한 저항을 한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신 사병 집단의 저항 정도로만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1978년 삼별초의 난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 제주도에 세워졌다. 진도에 있는 용장산성과 같은 유적지는 관광지로 유지되고 있다.

 

 

동녕부(東寧府)는 원나라 고려 서경을 편입한 후 설치한 통치기관이다.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쿠빌라이 칸은 자비령을 경계를 삼아 그 이북의 영토를 모두 원나라에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 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 이에 고려 원종은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로 입조하여 쿠빌라이 칸에게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1275년(충렬왕 1년)에는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1290년에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동녕부 정벌은 1369년(공민왕 18년)부터 1370년까지의 원·명 교체기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책을 실현하려고 일으킨 원정이다.

 

1368년 원 순제 주원장의 군대에게 쫓기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기황후(奇皇后) 소생의 소종(昭宗)이 즉위하였으나 정세를 돌리지 못하였다. 고려의 공민왕은 원나라의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관직명을 원나라 침공 이전으로 복구하였다. 공민왕은 대륙의 정치적 변동을 이용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북진주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그의 부친 기철이 고려에서 참형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서 침공해왔다. 1369년(공민왕 18년) 음력 12월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원수,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 원수로 삼아 군사 1만 5천을 주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이성계는 1370년 음력 1월에 동북면에서 황초(黃草), 설한(雪寒)의 두 영(嶺)을 넘고, 압록강 파저강(婆猪江)을 건너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라오양)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부근 주민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결국 요하(遼河) 동쪽의 땅은 명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1258년 원나라 함경남도 화주(和州 : 영흥)에 설치한 통치기구이다. 쌍성총관부는 동녕부와 함께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에 귀속된 영토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통치 기간이 100여 년간 유지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자주권 회복 및 영토 회복을 위한 북벌 정책의 핵심으로 이 두 기구를 무력으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1258년(고종 45년) 원나라의 별장 산길(散吉)과 보지(普只)가 동여진(東女眞)을 경유하여 장성(長城) 이남을 침공했다. 이들이 화주에 이르자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楮島)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竹島)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등주 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 부사 김선보(金宣甫) 및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치며 원나라에 투항했다.

 

중앙 정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사건으로, 원나라는 어쨌거나 새로 점령한 이 지역을 다스릴 기구로 쌍성총관부를 설치한다. 이때 초대 총관으로 조휘가 임명되었고, 탁청은 천호(千戶)에 임명되었다. 이후 총관은 한양 조씨 집안이 세습하여 조휘의 아들 조양기, 손자 조림, 종증손 조소생이 세습하였고, 천호도 탁청의 후손이 세습하였다.

한편, 10년 뒤인 1269년 최탄은 반란을 일으킨 후, 서경을 비롯한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성을 원나라에 바쳤고, 원나라는 서경을 동녕부로 개칭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때는 원나라의 침입과도 무관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쌍성총관부 탈환은 1356년(공민왕 5년)에 시작되었다. 1356년 음력 4월에서 음력 8월 사이에 추밀원부사였던 유인우(柳仁雨)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공민왕으로부터 쌍성총관부 탈환을 명령받고 대호군 공부보(貢夫甫), 종부령 김원봉(金元鳳),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 등과 함께 출정했다.

 

이때 조휘의 증손자인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조휘의 손자인 조돈(趙暾)과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의 성문을 열었다. 쌍성총관부는 함락되었고, 조소생은 도망갔다.

 

이후 유인우는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하여 나머지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관할 지역을 수복했다.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운 이자춘은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쌍성총관부의 초대 총관이었던 조휘의 후손인 조돈도 쌍성총관부 함락에 적극 협력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조상의 배신을 청산하고 새로이 고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조돈은 조선 건국에도 관여하여 개국 공신에까지 이르렀다. 이성계가 나중에 태종을 싫어하여 함흥으로 떠나버린 것도 그의 출신지가 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는 고려 말기에 오늘날의 제주도에 둔 몽골(원나라)의 행정기관이다.

고려 말기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후 지금의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1277년(충렬왕 3)에는 목마장을 설치하여 일본 원정을 준비하였다. 총관부의 설치 기간은 1273년부터 1290년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