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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64 (명나라 : 역대 황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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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64 (명나라 : 역대 황제)

두바퀴인생 2010. 4. 15. 07:31

 

 

중국의 역사 64 (명나라 2 : 역대 황제)

 

 

 

 

명나라 역대 황제

 

 

전성기의 명나라 영토

 

 

명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명 덕조
(明德祖)
(명 태조 추숭)
현황제
(玄皇帝)
주백륙(朱百六) - -
- 명 의조
(明懿祖)
(명 태조 추숭)
유황제
(裕皇帝)
주사구(朱四九) - -
- 명 희조
(明熙祖)
(명 태조 추숭)
항황제
(恒皇帝)
주초일(朱初一) - -
- 명 인조
(明仁祖)
(명 태조 추숭)
순황제
(淳皇帝)
주세진(朱世珍) - -
제1대 명 태조
(明太祖)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
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
(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
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주원장(朱元璋) 홍무(洪武) 1368년 ~ 1398년
- 명 흥종
(明興宗)
(명 혜종 추숭)
효강황제
(孝康皇帝)
주표(朱標) - -
제2대 명 혜종
(明惠宗)
사천장도성의연공관문
독양무극인효양황제
(嗣天章道誠懿淵功觀文
篤揚武克仁孝讓皇帝)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
주윤문(朱允炆) 건문(建文) 1398년 ~ 1402년
제3대 명 성조
(明成祖)
(명 태종<明太宗>)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
신공순인지효문황제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
神功純仁至孝文皇帝)
주체(朱棣) 영락(永樂) 1402년 ~ 1424년
제4대 명 인종
(明仁宗)
경천체도순성지덕홍문
흠무장성달효소황제
(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
欽武章聖達孝昭皇帝)
주고치(朱高熾) 홍희(洪熙) 1424년 ~ 1425년
제5대 명 선종
(明宣宗)
헌천숭도영명신성흠문
소무관인순효장황제
(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
昭武寬仁純孝章皇帝)
주첨기(朱瞻基) 선덕(宣德) 1425년 ~ 1435년
제6대 명 영종
(明英宗)
법천입도인명성경소문
헌무지덕광효예황제
(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
憲武至德廣孝睿皇帝)
주기진(朱祁鎭) 정통(正統) 1425년 ~ 1449년
제7대 명 대종
(明代宗)
부천건도공인강정융문
포무현덕숭효경황제
(符天建道恭仁康定隆文
布武顯德崇孝景皇帝)
주기옥(朱祁鈺) 경태(景泰) 1449년 ~ 1457년
제6대
(복위)
명 영종
(明英宗)
법천입도인명성경소문
헌무지덕광효예황제
(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
憲武至德廣孝睿皇帝)
주기진(朱祁鎭) 천순(天順) 1457년 ~ 1465년
제8대 명 헌종
(明憲宗)
계천의도성명인경숭문
숙무굉덕성효순황제
(繼天疑道誠明仁敬崇文
肅武宏德聖孝純皇帝)
주견심(朱見深) 성화(成化) 1464년 ~ 1487년
제9대 명 효종
(明孝宗)
건천명도성순중정성문
신무지인대덕경황제
(建天明道誠純中正聖文
神武至仁大德敬皇帝)
주우당(朱樘) 홍치(弘治) 1487년 ~ 1505년
제10대 명 무종
(明武宗)
승천체도영숙예철소덕
현공홍문사효의황제
(承天體道英肅睿哲昭德
顯功弘文思孝毅皇帝)
주후조(朱厚照) 정덕(正德) 1505년 ~ 1521년
- 명 예종
(明睿宗)
(명 세종 추숭)
지천수도홍덕연인관목
순성공간경문헌황제
(知天守道洪德淵仁寬穆
純聖恭簡敬文獻皇帝)
주우원(朱杬) - -
제11대 명 세종
(明世宗)
흠천이도영의성신선문
광무홍인대효숙황제
(欽天履道英毅聖神宣文
廣武洪仁大孝肅皇帝)
주후총(朱厚熜) 가정(嘉靖) 1521년 ~ 1567년
제12대 명 목종
(明穆宗)
계천융도연의관인현문
광무순덕홍효장황제
(契天隆道淵懿寬仁顯文
光武純德弘孝莊皇帝)
주재후(朱載垕) 융경(隆慶) 1567년 ~ 1572년
제13대 명 신종
(明神宗)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
장무안인지효현황제
(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
章武安仁止孝顯皇帝)
주익균(朱翊鈞) 만력(萬曆) 1572년 ~ 1620년
제14대 명 광종
(明光宗)
숭천계도영예공순헌문
경무연인의효정황제
(崇天契道英睿恭純憲文
景武淵仁懿孝貞皇帝)
주상락(朱常洛) 태창(泰昌) 1620년
제15대 명 희종
(明熹宗)
달천천도돈효독우장문
양무정목장근철황제
(達天闡道敦孝篤友章文
襄武靖穆莊勤皇帝)
주유교(朱由校) 천계(天啓) 1620년 ~ 1627년
제16대 명 의종
(明毅宗)
(명 사종<明思宗>)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
체인치효장렬민황제
(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
體仁致孝莊烈愍皇帝)
주유검(朱由檢) 숭정(崇禎) 1627년 ~ 1644년
- 명 순종
(明順宗)
(남명 안종 추숭)
동천합도승명순정강문
의무신인헌효도황제
(同天合道承明純靖康文
懿武神仁獻孝悼皇帝)
주자랑(朱慈烺) 의흥(義興)

1644년

 

 

주세진(朱世珍)은 홍무제 주원장의 부친으로 본래의 이름은 주오사(朱五四)였다.

 

1351년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는 호주종리(濠州鐘離) 출신의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원말에 세력을 떨친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운 홍건군의 일부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출신 주원장의 아버지였다.

 

주원장은 1328년 쟝수성 수주 페이현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가난한 농부로 주원장이 16세일 때 황하가 범람하여 아이들만 남기고 타계하였다.

 

그의 아내는 진씨로 아들 사형제가 있었는데, 사후 주원장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와 어머니인 주세진과 진씨를 각각 인조순황제(仁祖淳皇帝)와 순황후(淳皇后)로 추존하였다.

 

 

홍무제(洪武帝, 천력 원년 9월 18일(1328년 10월 21일) ~ 홍무 31년 윤 5월 10일(1398년 6월 24일)는 명나라(明國)를 건국한 초대 황제(재위 1368년 ~ 1398년)이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1328년 주세진과 진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무렵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후에 주흥종(朱興宗)으로 개명했다가 주덕유(朱德裕)로, 홍건군에 참가하는 무렵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개명했다. (字)는 국서(國瑞)이다.

 

 

홍무제
홍무제
명나라의 초대 황제
재위 1368년 ~ 1398년
황후 효자고황후
부친 인조
모친 순황후
다음 황제 건문제
묘호 태조(太祖)
시호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
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 14세기에 들어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 지변에서 전염병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白蓮敎徒)가 1351년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호주종리(濠州鐘離) 출신의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말(元末)에 세력을 떨친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다. 홍건군의 장수였던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長江) 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1368년 명나라를 건설하였고, 원호(元號)를 홍무(洪武)로 정하였는데, 홍무제라는 명칭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백련교 (白蓮教)는 불교에서 기원한 중국 민간종교이다. 특히 여성과 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유행했는데 그 교리는 한 여인이 있어 그녀의 자식을 천년왕국이 도래할때 하나의 가족으로 모은다는 것으로 불교의 미륵사상과 민간신앙이 혼합된 사상이다. 보통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서 비밀결사 형태로 존재했다.


백련교는 남송때의 승려 모자원(茅子元)이 창건한 정토종의 일종인 '백련종'(白蓮宗)에서 기원한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 정권이 중국을 지배할 때 이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상과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미륵신앙이 합쳐져 그 세력을 키웠는데 원나라 조정은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비밀결사 형태로 바뀌었다.

 

이후 백련교는 애국심과 종교가 합쳐진 형태의 비밀결사 조직으로 발전했다.

 

백련교의 교리는 현세의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추구하는 일종의 메시아 사상으로 볼 수 있다. 창세주인 '무생노모'(無生老母)가 미륵을 이 세상으로 보내서 자신의 흩어진 자녀들을 거두어들여 '진공가향'(眞空家鄕)이라는 일종의 천국에 귀의시키고 평화로운 천년왕국이 인간세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백련교도들은 불교식으로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는 한편 새로올 왕국을 대비하며 무술 수련도 하였다.

 

백련교는 중국 역사에서 두번 큰 역할을 하는데 첫번째는 14세기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세워질 때 이른바 홍건적의 난의 사상적 기원이 되었다. 명의 태조 주원장도 백련교도로 출발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명을 세웠다.

 

두번째는 18세기 말 청나라에서 일어난 무장반란인데 이 때도 이민족인 만주족의 지배에 대항하여 한족을 중심으로 저항하는 세력으로 청나라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도 백련교도는 여러차려 청나라에 반대하는 비밀결사로 조직되었고 나중에 의화단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홍건의 난(紅巾之亂) 또는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은 말기에 한산동(韓山童)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건적은 홍적(紅賊)·홍두적(紅豆賊) 등으로도 불렸다.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 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그때 한산동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군사를 일으켜 각지를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는 10만에 달하였다. 그리고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맞아들여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게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 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면서, 홍건적 일부 세력들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관선생 파두반의 홍건적이 원나라 여름 수도였던 상도(上都)와 주변 지역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1359년 주력 부대가 주둔하던 변량(개봉)을 다시 원나라에 뺐기면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되고, 급기야 원군(元軍)에게 쫓겨 고려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주원장이 저우장의 심만삼의 재력에 도움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 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한다.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장강유역의 화남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로 통일되었다. 결국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明)을 건국하여,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시켰다.

 

홍건적의 고려 침공

홍건적들은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까지 침범하였다.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하순, 고려군은 2만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비록 고려군 사상자가 1천여 명에 달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 뒤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적은 3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그 뒤에는 수군으로써 황해·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하북 지방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2차 침공의 주역은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파두반(破頭潘) 등이며, 병력은 20만 명이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홍건적은 음력 11월 11일에 절령(岊嶺 : 자비령)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수도 개경(開京)에 육박하여 왔다. 이에 공민왕 및 왕실과 정신(廷臣)은 남쪽인 복주(현재의 경상북도 안동)로 대피하게 된다. 왕가(王駕)가 이천에 도착하던 날 홍건당은 개경을 함락하고 온갖 만행을 다하였다. 그러나 홍건당은 개경 입성 후 2달간 주둔하면서 더 이상 남진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홍건적이 개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중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의 병력을 모병했다. 복주에 있던 공민왕은 그해 음력 12월경에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정세운은 1362년 음력 1월, 동교 천수사(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소재)에서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金得培) 등에게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도록 했다.

 

전의가 꺾인 홍건적은 이 두 갈래 길로 개경에서 도망쳐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후퇴했다. 고려군은 그들의 퇴로를 열어준 채 계속 추격하여 홍건적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여름에 수장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이 개경을 떠난 이후 음력 11월 24일에 개경에 입성했다.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선봉에서 적장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여,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죽이고, 수도에 제일 먼저 탈환해 입성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나게 되었는데, 앞서 중국의 북서에서 만주 방면으로 진출한 홍건적의 무리들은 고려에서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난은 고려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어 국운을 쇠퇴케 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외정

홍무제는 건국한 직후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상도(上都)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국함에 따라,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결국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明)을 건국하여,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시켰다.

 

치세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 조사 및 인구 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배포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홍무제는 건국공신을 숙청하고, 재상이 있던 중서령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말년에는 한 고조 유방(漢高祖劉邦)을 능가할 정도로 건국 공신들을 대거 숙청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대 승상 이선장, 좌승상 호유용(胡惟庸)과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등을 사형에 처해 다수의 건국 공신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398년에 홍무제가 죽자, 그의 손자인 흥종 의문태자 장남 주윤문(朱允炆)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건문제이다. 그가 죽자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로 추존하였다.

가족

 

명혜종 건문제 주윤문(明惠宗建文帝朱允炆, 1377년: 홍무(洪武) 10년 12월 5일 ~ ?)은 명나라의 제2대 황제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의 장손이자 의문황태자(懿文皇太子) 주표(朱標)의 아들이다. 역대 명나라 황제 중 숭정제(崇禎帝)와 함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황제로 숙부인 연왕 주체(朱棣)에게 황위를 빼앗겼다. 조선 단종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초기 생애

홍무 10년인 1377년 12월 5일에 당시 황태자인 주표와 그 후궁 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윤문은 서장자로서 차남이었으나, 황태자비 상씨 소생의 적장남 우회왕 주웅영(朱雄英)이 어린 나이에 죽자, 주윤문이 황장손(皇長孫)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상씨의 양자로 입적되어 주원장의 적장손이 되었다. 그러나, 1392년 4월에 황태자 주표가 38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4남인 연왕 주체와 장손 주윤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학사 유삼오(劉三吾)가 장자가 죽었으면 장손이 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이에 주원장은 주윤문을 황태손에 책봉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천명하였다. 황태손인 주윤문은 유삼오와 방효유, 황자징(黃子澄), 제태(齊泰) 등에게 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참모로 삼아 차기 황제로서의 준비를 탄탄히 다져놓고 있었다.

 

정난의 변

1398년에 할아버지인 주원장이 71세를 일기로 붕어하자, 주윤문이 22세로 명나라의 제2대 황제로 오르니 이가 혜종 건문양황제(惠宗 建文讓皇帝)이다. 건문제는 제일 먼저 할아버지 주원장의 유지에 따라 숙부들에게 남경으로 문상을 오지 말라 하였다. 또한 너무나 커져있던 숙부들의 세력을 끊으려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왕 주체를 필두로 한 번왕, 즉 건문제의 숙부들과 사촌들은 이에 반발하며 주체를 중심으로 몰래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부에 대항할 방책을 세우고 있었다. 건문제는 이에 대해 세가 약한 번왕들을 수도인 남경으로 은밀히 불러들여 체포한 후, 유배를 보내거나 죽여버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연왕 주체는 건문 1년인 1399년에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정난의 변'(靖難之變)이다.

 

건문제는 신료들에게 주체를 막으라고 지시하였으나 관군은 북방에서 잔뼈가 굵은 주체군에게 계속 지고 있었다. 건문제는 이번 사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하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번왕들은 주체의 편에 서거나 중립이 되어 있었고, 조정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주체는 무려 3년간이나 이 반란을 끌었는데, 그 이유는 번왕들과 장군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고 병기와 군마를 모집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건문제는 빨리 대책을 세워야 했으나, 관군이 계속해서 패전하는 바람에 물자 등이 바닥났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1402년 7월, 연왕 주체는 결국 수도 남경성을 포위, 함락시킨다. 건문제는 남경의 궁전에 불을 지르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의 건문제의 행적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얼마 뒤, 연왕 주체는 황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이다.

 

건문제의 최후설

건문제의 최후설은 여러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남경의 궁전에 불을 지를 때, 그 불에 타 죽었다는 설과, 남경을 빠져나와 양자강에 투신했다는 설, 도사가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설은 승려가 되어 중국 곳곳을 유람하며 다녔으나, 정통 5년인 1440년, 영락제 주체의 증손자인 정통제(正統帝) 때에 이르러 신분이 알려져 북경에서 살다가 1445년에 생을 마쳤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원래 건문제는 달리 묘호가 없고 시호만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로 주어졌다. 그러나, 명나라가 멸망하고 남명 정권이 들어선 후, 남명의 홍광제가 건문제에게 묘호를 혜종(惠宗)으로, 시호를 양황제(讓皇帝)로 추증하였다.


 

영락제(永樂帝,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는 명 왕조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1424년)이다. 묘호는 태종(太宗)이었다가, 훗날 가정제 성조(成祖)로 고쳤으며,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이다. 이름은 주체(朱棣), 태조 홍무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효자고황후 마씨이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연왕(燕王)에 책봉되고 성년이 되자 수도인 남경을 떠나 북평에 주둔하며 북방의 군사들을 총괄하고 중국 대륙에서 쫓겨난 북원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1398년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였던 손자 건문제가 자신을 비롯한 숙부들, 즉 홍무제의 아들들의 군권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펼치니, 건문제와 숙부였던 홍무제의 아들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났고 당시 홍무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이며 세력이 강대한 주체가 수반이 되어 1402년 군사를 일으키니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한다.

 

1402년 주체는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였다. 영락제의 즉위로 인해 정치의 중심은 다시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여 홍무제의 신중책을 바꿔, 왕성하게 세력을 넓혔다. 북쪽으로 후퇴한 원나라의 잔당(북원, 명나라에서는 이것을 타타르라고 부른다)은 1388년 토곤 테무르의 왕통이 단절되었으나, 영락제는 원정을 감행해 이들을 제압했다. 만주에는 여진족을 복속시켜 위소제에 조직해 넣는 데 성공했다. 남쪽은 베트남 진조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정복하였다.

 

거기에 해외의 동남아시아, 인도양까지 위신을 넓히기 위해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를 파견하여 일부가 메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한 대원정의 결과, 다수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맺었다.

 

한편, 유생 방효유에게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오히려 비난하는 글을 쓰자 그의 십족(구족에다 방효유와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 방효유의 문집을 애독하는 모든 사람 추가)을 차례로 처형하고 제일 마지막에 방효유를 처형하였다. 방효유의 처와 자녀들은 자신의 집에서 음독자살하여 화를 면하였다.

 

몽골족과 교전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고, 동아프리카에 자신의 심복인 정화를 보내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문화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명나라 학문을 종합한 《영락대전》(永樂大典), 《사서 대전》, 《오경 대전》, 《성리 대전》을 편찬하였다.

가족관계

  • 부황 : 홍무제
  • 모후 : 효자고황후
  • 황후 : 인효문황후 서씨(仁孝文皇后 徐氏)
    • 장남 : 홍희제
    • 차남 : 한왕 고후(漢王 高煦)
    • 3남 : 조간왕 고수(趙簡王 高燧)
    • 3녀 : 안성공주(安成公主)
    • 4녀 : 함녕공주(咸寧公主)
  • 후궁 : 왕귀비(王貴妃)
  • 후궁 : 현인비(賢仁妃), 조선의 공녀
  • 후궁 : 여미인(呂美人), 조선의 공녀
  • 후궁 :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 조선의 공녀
  • 후궁 : 강목의공혜비(康穆懿恭惠妃)
    • 4남 : 고희(高爔)
  • 후궁 : 임순비(任順妃), 조선의 공녀
  • 후궁 : 이소의(李昭儀), 조선의 공녀
  • 후궁 : 최미인(崔美人), 조선의 공녀
  • 후궁 : 공영왕미인(恭榮王美人)
  • 후궁 : 경혜노미인(景惠盧美人)
  • 후궁 : 정비(鄭妃), 조선의 공녀
  • 후궁 : 송비(宋妃), 조선의 공녀
  • 후궁 : 황비(黃妃), 조선의 공녀
  • 후궁 : 여비(呂妃), 여미인에게 현인비 살해 혐의를 무고함
  • 후궁 : 어비(魚妃), 여미인에게 현인비 살해 혐의를 무고함

정화(鄭和,Zhèng Hé 1371년~1434년)는 중국 명나라시대의 장군이자 환관이다. 영락제(永樂帝)의 심복으로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해에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성씨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인 마(馬) 씨이고, 이름은 삼보(三保)였다.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太監)이 되었기에 중국에서는 삼보태감(三保太監) 혹은 삼보태감(三寶太監)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해서 가장 멀리간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마린티(현재 케냐의 마린티)였다. 그가 지휘한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보선(寶船)은 전체 길이가 120미터가 넘는 대형 선박이었다고 한다.

마삼보(후에 정화)는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윈난성(雲南省) 쿤양(毘陽)의 무슬림(이슬람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씨인 마 씨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자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 합지도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를 순례한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인 할지에서 유래되었다. 선조는 징기스칸 중앙아시아 원정 때 몽골에 귀순하여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 때 윈난성 개발에 노력했던 색목인 정치가 사이이드 아쟈르였다. 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던 것은 나중에 영락제가 대원정을 준비할 때 그 지휘관으로 정화를 맘에 두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원나라의 세력하에 있던 윈난성을 공격하여, 아직 소년이었던 정화는 붙잡혀 거세를 당한 뒤 환관이 되어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棣; 후에 영락제)에게 헌상되었다. 주원장 사후 영락제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靖難의 變) 때 정화는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 씨란 성을 하사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쪽 바다에 대한 대원정을 준비하여 1405년 6월 제1차 원정을 떠났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44장(丈;약 137미터), 폭 18장(약 56미터)에 이르는 대형 선박이 포함된 함선 62척에 총승무원 2만 7,800명이 탑승했다.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120톤급 3척, 승무원 170명이었고, 콜럼버스의 함대는 250톤급 3척, 승무원 88명에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의 대함대였다.

 

소주(蘇州)에서 출발한 함대는 참파(지금의 베트남 중부)와 수마트라를 거쳐 팔렘방, 말라카,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등의 항로를 거쳐 1407년 초쯤 인도 캘커타(Calicut)에 도달했다. 함대의 목적은 항해 도중 만나는 나라에 대해 명나라에 조공을 요구하는 일과 남쪽에서 나오는 물물 등을 가지고 돌아가는 일이었다.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질을 일삼던 진조의(陳祖義)란 중국인을 붙잡아 일시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이 항해로 인해 그때까지 명나라와 교류가 없었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차례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정화가 귀국한 것은 1407년 9월로써 귀국 후 얼마 안 있어 재출발 명령이 내려와 연말에 제2차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항로는 예전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시암(타이)과 자바 섬 등을 거쳐 캘커타에 도착했다. 귀환 중 스리랑카 섬 가레란 곳에 중국어, 타미르어(현지어), 페르시아어(당시 국제어) 등 3개 국어로 쓰여진 비석을 세웠다.

 

1409년 여름에 돌아온 정화는 다시 출발 명령을 받고 연말에 제3차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도 캘리컷에 도달하고 돌아오던중 스리랑카 섬의 현지 왕이 정화의 배에 실려 있던 보물을 강탈하기 위해 공격했다. 정화가 반격에 나서 군대를 무찌르고 왕과 그 가족을 포로로 잡아 귀환하니 1411년 7월에 귀국했다.

 

3차의 대원정은 거의 같은 항로를 유지했지만 네 번째 원정은 약간 시간을 두고 1413년 겨울에 출발했다. 이번에는 좀 더 서쪽으로 나아갈 생각으로 준비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캘리컷에 도달한 후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아덴에 도달했다. 귀환 중 수마트라 현지 국왕의 요청을 받아 병사를 움직여 반역자를 토벌하고 1415년 7월에 귀국했다.

 

다섯 번째 원정은 1417년 겨울에 출발해 본대는 저번 원정과 같이 아덴까지 도달했으나, 도중 나눠진 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해안의 마린티에까지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1419년 8월에 귀국할 때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 등 진귀한 동물을 데리고 돌아왔다.

6번째 원정은 2년후 1421년 2월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공을 바쳤던 각국의 사절을 돌려보내기 위한것이 임무였다. 항로는 동일했고, 1422년 8월에 귀국하였다.

 

7번째 원정은 영락제의 사후 그의 손자 선덕제(宣德帝)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1431년 12월에 출발하였는데, 이때 정화는 나이가 많아 지휘관직을 거절하려 했으나 그를 대신할 만한 인재가 없었다. 이번 항해 때 분대는 메카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433년 7월에 귀국하였지만 얼마 후 정화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정화의 사후 명나라는 다시 쇄국정책으로 전환하여 이후 원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화제(成化帝) 때 다시 대항해에 대한 목소리가 나왔으나 항해에 쓰이는 막대한 비용과 유교적 성격을 지닌 관료의 반대에 부딪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대항해에 대한 기록은 제4차 원정과 제7차 원정 때 동행했던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과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嵯勝覽),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 등의 견문지가 현재까지 남아 있어, 그 시대 동남아시아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간의 것이었고, 정화의 공식 기록은 다시 대항해를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한 관료에 의해 감춰지고, 그 이후 기록은 행방불명되었다(일설에는 그 관료에 의해 소각되었다고도 한다).

 

대원정을 한 이유

영락제가 막대한 비용이 드는 대원정을 기획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었다.

  • 정난의 변때 남경에서 탈출한 건문제가 남해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는 이유로 그 탐색을 위해 시작한 설
  • 서쪽의 티무르 왕조의 성장을 두려워 한 영락제가 티무르 제국의 주변 세력과 동맹을 맺고 협공을 하기 위한 설
  • 예전 주원장이 명나라 건국 시 멸망시킨 진우량(陳友諒) 휘하에 있던 수군 세력이 반항할 것을 두려워해 이들을 남해원정에 포함시켰다는 설 등이 있다.

첫 번째 설은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주목적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두 번째 설은 티무르가 제1차 원정이 시작한 해에 죽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세 번째 설은 주원장이 진우량을 격파한 시기가 너무 오래되었기에 납득할 수는 없다. 달리 생각할 만한 이유로는 찬탈이란 수단을 이용하여 즉위한 영락제가 국내의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해 타국의 조공을 많이 받아 유교적 성왕이란 모습을 연출하여 스스로 계승의 정당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작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중국 함대가 남중국해와 인도양에 이르는 해상패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여러 나라의 조공을 촉구하여 궁정에서 사용하는 해외의 사치품을 입수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신 등의 기록을 보더라도 여러 나라의 물물과 통상교역에 대한 사정에 관심을 기울인 것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동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평가

이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선 대원정이자 대항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후세에 삼보태감으로 불리며, 사마천 채륜 등과 함께 환관의 영웅으로 이야기 되었다. 또 정화가 머물렀던 각지의 항에서도 정화에 대한 평판은 높아 자바와 수마트라, 타이에서는 삼보묘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한다. 또한 정화 함대는 당초부터 말라카 해협에 건국된 말라카 왕국을 인도양 항해를 위한 근거지로서 중시하여 말라카 국왕을 우대하였다. 그 때문에 말라카 왕국은 정화 함대의 보호 아래 성장하여 중국 함대의 항해가 단절된 뒤에도 동서교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 대원정에 참여한 인원 중 일부가 세이셸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은 본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 곳에 그냥 머물러 살았다. 그래서 오늘날 세이셸에는 중국계 황인종들이 다수 살고 있다.

 

 

홍희제(洪熙帝, 1378년 8월 16일 ~ 1425년 5월 29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424년~1425년)이다. 이름은 주고치(朱高熾)이다. 묘호는 인종(仁宗), 연호는 홍희(洪熙)이다. 홍무제의 손자이며, 영락제와 인효문황후 서씨(仁孝文皇后 徐氏)의 장남이다.

 

1395년(홍무 27년)에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아버지 주체의 후계자로서 연왕세자(燕王世子)에 책봉되고 정난의 변에서 아버지의 영지인 연의 영토를 지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영락제가 즉위한 이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문무에 빼어났다고 하나 어렸을 때부터 병약 하였기에 아버지인 영락제는 흡족해 하지 않아, 황태자로써의 폐위를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주첨기(명나라의 5대 황제 선덕제)가 영민하고 날렵하여 영락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손자를 생각하여 홍희제의 태자 폐립 문제는 백지화 되었다. 그리고 영락제는 주첨기를 매우 총애하여 황태손으로 삼고 벌써부터 제왕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또 홍희제는 비정상적으로 뚱뚱하여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스스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영락제가 외정(外征)을 나가는 경우, 궁궐을 비우는 일이 많아 궁궐에서 황제를 대신하여 감국(監國)으로써 업무와 정사를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황제가 되어 황태자 시절의 정치 능력을 발휘했다.

 

아버지 영락제가 많은 신하들을 숙청하고 공포정치를 펼친 데에 반해 홍희제는 정난의 변에 건문제의 편에 서 몰살을 당한 일가의 신원을 회복하고 재산을 반환하는 정책과, 영락제에게 간언하여 투옥된 하원길(夏元吉)을 석방하는 등 인정(仁政)을 베풀었다. 또한 영락제의 외정(外征)으로 인한 국고 손실을 막기 위해 홍희제는 대외 팽창 정책을 억제하고, 다시 난징(南京)으로 천도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죽음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의 적용을 명확히 하고 궁형(宮刑)을 금지했으며 내치의 회복을 위해 힘썼으나 재위 8개월 만에 붕어하였으므로, 명나라에서 태창제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짧은 황제가 되었다. 1425년 5월 29일에 붕어하였고 다섯 명의 귀비가 순장되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약 1년간의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선정을 베풀고 대내 안정을 확고히 하여 다음 황제인 선덕제(宣德帝)의 치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초기 명나라의 기틀을 잡아, 홍희제와 아들 선덕제의 치세를 인선의 치(仁宣之治,인종[仁宗]과 선종[宣宗]의 치세)라고 부른다.

 

 

선덕제(宣德帝, 1398년 2월 25일 ~ 1435년 1월 31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425년~1435년)이다. 이름은 주첨기(朱瞻基)이다. 묘호는 선종(宣宗), 연호는 선덕(宣德)이다. 영락제의 장자인 홍희제(洪熙帝)와 성효소황후 장씨(誠孝昭皇后 張氏)의 장남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민하였기에 조부인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아버지인 홍희제의 태자 폐립 문제를 거론할 때애도 영락제는 아들 홍희제보다 손자인 선덕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황태손이 되어 제왕학을 일찍 배웠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영락제의 외정시에 영락제를 따라 같이 수행을 다녔으며 영락제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아 영락제가 늘상 곁에 두고 총애하였다.

 

숙부 주고후의 반란

선덕제가 즉위한 이듬해에 숙부인 한왕(漢王)주고후(朱高煦)가 반란을 일으킨다. 주고후는 영락제와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 徐氏)의 차남으로, 조왕(趙王)주고수와 더불어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장남인 홍희제는 인자했지만 병약했고, 차남인 한왕(漢王)주고후(朱高煦)는 날렵하고 무술이 뛰어났으나 다혈질이고 난폭하여 군왕으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셋째인 조왕(趙王)주고수(朱高燧) 또한 막내로써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역모사건이 발각되는 사태가 일어나 낙양으로 쫓겨났다. 영락제가 태자의 폐립 사건을 고민 할 때, 한왕 주고후가 새로운 태자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난폭한 성격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 주고후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명 조정에 있어 정난의 변을 떠올리게 했다. 정난의 변 건문제(建文帝)가 숙부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피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비해, 선덕제는 자신이 직접 친정(親征)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숙부인 한왕 고후와 일족를 잡아 자금성의 서안문 안에 있는 소요성(逍遙城)이라는 건물을 새로짓고 유폐시켰다. 이 후 선덕제가 감옥에 갇힌 숙부 한왕을 만나기 위해 소요성에 행차 하였을 때, 숙부인 한왕 주고후는 선덕제를 발로 걷어 차 넘어트렸다. 이 일은 선덕제를 분노하게 하여, 선덕제는 한왕 주고후를 구리 항아리에 가두었고, 주고후가 항아리를 밀치자, 장작더미에 달궈 죽였다.

 

평가

선덕제는 아버지 홍희제와는 달리 과감하고 강력한 정치를 하였다. 황제 독재체제를 확립하고, 황족을 엄히 다스렸으며 증조부인 홍무제가 환관의 정치 개입을 막고자 환관의 학문 교육을 금지시켰지만, 선덕제는 환관을 교육시키는 내서당(內書堂)을 설립하고 태감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선덕제의 정책은 후에 명나라 조정에서의 환관의 정치개입을 야기시켜, 환관이 정사를 농락하는 사태를 발생시킨다. 이 외에도 선덕제의 시대에 회화를 즐겨 뛰어난 그림 작품을 남겨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홍희제와 선덕제의 시대는 후대에 인선의 치(仁宣之治)로 불리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정통제 / 천순제(正統帝 / 天順帝, 1427년 11월 29일 ~ 1464년 2월 23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435년 ~ 1449년, 복위 1457년 ~ 1464년)이다. 이름은 주기진(朱祁鎭)이다. 명 왕조 사상 첫 복위를 한 황제로, 정통(正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복위 후에 천순(天順)으로 개원하였다. 명나라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즉 한 황제마다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명나라 황제 중, 유일하게 복위하여 연호를 개원하였으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묘호인 명 영종(明英宗)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선덕제(宣德帝)의 장남이며, 경태제(景泰帝)의 이복형이다. 어머니는 효공장황후 손씨(孝恭章皇后 孫氏)이다.

1435년 선덕제가 죽자,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명나라 황제가 되었다. 영종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황제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太皇太后張氏, 성효소황후)가 섭정을 하고 양사기(楊士奇)를 비롯한 현명한 신하들의 섭정에 의해 안정된 정국을 이끌어 나갔지만, 영종의 총애를 업고 환관 왕진(王振)이 전횡을 일삼았지만, 영종은 이를 눈감아 주었다. 또한 이후 명나라는 환관의 전횡과 폐단으로 여러 차례 파국을 맞게 된다.

 

토목의 변

환관 왕진의 전횡과 더불어 명나라 초기의 안정적인 조정은 해이해지기 시작했고, 1449년에는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Oirāt)가 세력을 형성하고무역의 확장을 위해 명과 교섭하였으나 여러 차례 결렬되자 오이라트족의 족장 에센은 명나라 변방에 침입하였다. 이에 환관 왕진(王振)은 영종에게 직접 친정(親征)을 간청했으나 이부상서와 병부상서는 친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영종은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이라트족을 친정하고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으나, 50만명의 군사중에는 문신(文臣), 귀족(貴族) 등 전쟁과 무관한 이들을 포함시켜 군대의 규모를 과시하였다.

 

전투에서 비정예군이 오이라트족에게 대패하였음에도 여러 군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왕진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들의 패전소식은 북경(北京)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남경(南京) 천도설이 나왔지만 병부시랑 우겸(于謙)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宋, 960년 ~ 1279년)의 예를 못 보았느냐며 북경은 천리이므로 사수하여야 한다" 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한편 에센족은 명군의 수급로를 차단하고 연승하였으나 환관 왕진은 이 와중에도 신하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피살당하였으며, 결국 에센군은 토목보를 포위하여 명나라 황제 영종을 잡아갔다. 중국 역사상 외적과의 전쟁 중 황제가 포로로 잡혀 간 것은 명나라 영종이 처음이다.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한다.

 

황제를 포로로 잡아간 에센족은 전세의 유리함을 알고, 명과의 교섭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북경 조정은 영종의 이복동생인 주기옥(朱祁鈺)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니 대종 경태제(代宗 景泰帝)이다. 에센족은 포로로 잡은 영종이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아무런 조건 없이 1450년에 명나라 조정에 송환했다. 하지만 이미 이복동생인 대종이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으므로 영종은 태상황(太上皇)이 되었으나 궁에 유폐되었다.

 

탈문의 변

경태제가 영종을 유폐시키자 조정은 영종(정통제/천순제)을 중심으로 하는 파와 경태제를 중심으로 하는 파로 나뉘어졌다. 경태제는 본래 황태자였던 영종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그는 병으로 죽고 만다. 1457년에 병을 앓는 도중 영종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경태제는 폐위되었고, 폐위된지 한 달 후에 급사하였다. 영종은 천순제라는 이름으로 복위에 성공했다.

 

 

성화제(成化帝, 1447년 12월 9일 ~ 1487년 9월 9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8대 황제(재위 1464년 ~ 1487년)이다. 이름은 주견심(朱見深)이다. 초명은 견준(見濬). 묘호는 헌종(憲宗). 영종(英宗) 주기진의 아들이다.

 

영종이 와랄(瓦剌)에게 포로로 잡힌 뒤 황태후의 명령으로 황태자가 되었다. 1452년 숙부 경태제(景帝)가 폐위되어 기왕(沂王)이 되었다. 1457년 다시 황태자가 되고, 이름을 고쳤다. 1464년 영종이 죽은 뒤 황위를 이었다. 다음 해 성화(成化)로 연호를 바꾸었다. 재위 중에 우겸(于謙)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경태제의 제호(帝號)를 회복했다. 그러나 실정을 많이 저질렀다. 처음으로 황장(皇莊)을 두었다. 권호(權豪)들이 한전(閑田)을 요구하자 전지(田地)를 빼앗아 장전(莊田)으로 만드는 것을 허락했다. 자신보다 17살 많은 만귀비(萬貴妃)를 총애했는데, 낳은 아들이 얼마 뒤 죽자 온갖 패악을 다 저질렀다. 내비(內批)에게 관직을 주는 제도를 실시했다. 방술(方術)을 지나치게 믿었고, 방사(方士)와 승도(僧道)는 내비로 고관이 되었다. 환관 왕직(汪直)을 기용해 서창(西廠)을 설치해 무고한 충량(忠良)들을 죽였다. 왕직이 축출된 뒤에도 또 환관 상명(尙銘)을 불러 동창(東廠)을 맡기면서 매관매직을 거침없이 자행했다. 하투(河套)에 들어와 살던 달단(韃靼) 부락들이 더욱 거세게 공격해 들어왔고, 형양(荊襄)의 유민들과 광서(廣西)의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기세가 날로 드세져 갔다. 23년 병으로 죽었다.

 

 

홍치제(弘治帝, 1470년 7월 30일 ~ 1505년 6월 8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9대 황제(재위 : 1487년 ~ 1505년). 이름은 주우당(朱祐樘)이다. 묘호는 효종(孝宗). 시호는 달천명도순성중정성문신무지인대덕경황제(達天明道純誠中正聖文神武至仁大德敬皇帝)이다.

 

그는 태아상태일때 만귀비에 의해 낙태약으로 독살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무사히 태어났다. 성화제의 최측근 환관 중의 한 명은 이렇게 태어난 홍치제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운 나머지 만귀비에게 살해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홍치제를 자신의 숙소에 잠시 숨겨 길렀다가 기회를 틈타 궁 밖으로 유출시켜 민가에서 키우게 했다.

 

어머니인 효목순황후 기씨(孝穆純皇后 紀氏)는 홍치제가 18살 되던 해에 아버지 성화제의 후궁인 만귀비(萬貴妃)에 의해 독살되었으나 총명하였던 그는 즉위 후 안으로는 대명률(大明律)을 개정하여 문형조례(問刑條例)를 반포하였고 법규를 정비하기 위해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개정하였으며 밖으로는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하미(哈密) 달단(韃靼)과의 관계를 개선한 명제국 중흥의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정덕제(正德帝, 1491년 10월 26일 ~ 1521년 4월 20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10대 황제(재위 : 1505년 ~ 1521년). 이름은 주후조(朱厚照)이고, 묘호는 무종(武宗). 시호는 승천달도영숙예철소덕현공홍문사효의황제(承天達道英肅睿哲昭德顯功弘文思孝毅皇帝)이다.

 

홍치제(弘治帝)의 맏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불교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통했으나 황제가 된 뒤로는 미녀를 후궁으로 삼아 쾌락을 즐기는 음탕한 생활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환관을 사랑하고 라마교를 광신하였으며 유희를 좋아하여 국비를 낭비하였고 그로 인해 명나라 각지에서 농민들과 제후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이 무렵부터 포르투갈의 내항(來航)이 시작되어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기도 하였다. 난징(南京)에서 보트를 타고 물놀이를 하다 보트가 전복되어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그는 후사가 없었기에 사촌동생인 주후총(朱厚憁)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가정제(嘉靖帝, 1507년 9월 16일 ~ 1567년 1월 23일)는 중국 명나라 제11대 황제(재위 1521년 ~ 1567년)이며 이름은 주후총(朱厚熜)이다.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시호는 흠천이도영의성신선문광무홍인대효숙황제(欽天履道英毅聖神宣文廣武洪仁大孝肅皇帝)이다. 흥헌왕(興獻王)인 주우원(朱祐杬)의 장자로 태어나 후사가 없던 정덕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즉위 시기에 입경의례(入京儀禮)와 생부인 흥헌왕에 대한 존호 제사 등의 문제로 오랜 기간을 대신들과의 갈등에 소비하였으며 황제의 생부 추존문제로 시작된 이 사건은 세종 치세에 정치의 문란과 부패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임인궁변

즉위 이후에도 가정제는 정사를 멀리하며 오직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단약을 제조하는데만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심지어 그는 단약을 제조하기 위해 12~14세의 궁녀들에게 강제로 월경액을 채취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렇게 월경액이 채취된 궁녀들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외에도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 인해 가정제에게 장살당한 궁녀의 수가 200명이 넘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희생된 궁녀의 연령층이 8세에서 14세였다고 한다. 이런 가정제의 엽기적인 행각은 결국 가정21년 (1542년) 겨울, 임인궁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가정제가 단비(端妃) 조씨(曹氏)의 궁에서 잠을 자는데 궁녀인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등 16명의 궁녀들이 가정제가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목졸라 죽이려 한 사건이었다. 다행히 가정제는 황후 방씨(方氏)가 급히 도우러 와서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양금영등 16명의 궁녀는 능지처참당하고 단비 조씨와 영비(寧妃) 왕씨(王氏) 또한 이 일에 연루되어 주살당하였다. 또한 가정제는 다분히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첫번째 황후였던 진씨(陳氏)는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가정제의 발에 걷어차여 복중에 있던 아들과 함께 절명하였고 두번째 황후였던 장씨(張氏)는 가정제 자신이 만든 단약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출되어 냉궁에서 병사하였다. 또 가정제는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인 영비가 임인궁변으로 인해 주살되자 황후였던 방씨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몇 년뒤 황후가 거처하던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가정제는 그저 그를 방관만 하면서 황후를 구출하지 않았다. 결국 가정제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방씨는 자신이 목숨을 구해주었던 가정제에 의해 불에 타죽고 만다.

 

가정제에 대한 평가

가정제 치세의 명(明)제국은 안으로는 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밖으로는 몽골 왜구들이 명제국의 강역(疆域)을 위협하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정치의 문란과 부패는 끊이지 않았으며 명제국은 점점 위축되어 갔다. 가정제 치세에서 시작된 명제국의 쇠퇴는 만력제(萬曆帝)와 천계제(天啓帝)를 거치며 더욱 더 악화되어 가정제가 붕어한지 채 100년이 안된 1644년 숭정제(崇禎帝)를 끝으로 명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융경제(隆慶帝, 1537년 ~ 1572년)는 명나라의 제12대 황제(재위 : 1566년 ~ 1572년). 이름은 주재후(朱載垕)이다. 묘호는 목종(穆宗). 가정제의 셋째 아들이며 만력제의 아버지이다.

 

가정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539년(가정 18년)에 유왕(裕王)에 봉해졌다. 가정제의 시대, 명나라는 내정의 혼란 외에, 「남왜북로(南倭北虜)」라고 칭해지는 왜구와 타타르에 의한 침공에 노출되어 있었다. 융경제는 즉위 후, 가정제의 폐정을 개혁할 수 있도록, 가정제시대에 간언에 의해 죄를 얻고 있던 서계, 해서등의 인재를 등용해, 그것까지 조정으로 권세를 적극적으로 있던 도사를 일소했다. 또 피폐 하는 국고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해외 무역을 개방해, 왜구, 타타르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무역을 인정하는 유연책으로 대외적으로도 안정되었던 시대를 출현했다.

 

그러나 융경제 자신은 범용한 황제이며, 정무는 대학사에게 대행되고 있었다. 또 주색에 빠지고 향락을 추구한 생활때문에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만력제(萬曆帝, 1563년 ~ 1620년)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는 익균(翊鈞), 묘호는 신종(神宗). 융경제의 3남이다.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나고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유왕 주재후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큰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자 유왕세자(裕王世子)에 봉해졌다. 1567년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572년에는 10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張居正)에게 맡겼다.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끊어 놓기 일쑤였다.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편들었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다. 그는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이미 만력제 때 뒤숭숭해진 민심은 이자성의 난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지 24년째 되던 해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군주이지만, 임진왜란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친 편이다. 물론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어리석은 패착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 적극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 중국인들에게서는 만력제를 가리켜 ‘고려의 천자(天子)’ 또는 ‘조선의 황제’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대한 호감이 생겨난 배경도 이때 만력제가 보여준 적극적인 우호 정책 탓이 매우 크다.

 

그런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송시열이 제자인 권상하에게 만력제와 숭정제의 제사를 지낼 사당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만동묘(萬東廟)이다. 만동묘는 도산서원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원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지시할때 헐려버리고 지금은 묘정비만 존재하고 있다.

 

명의 조선 임진왜란 지원
의주로 몸을 피신한 조선의 선조는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적을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 아래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 때 명나라는 일본의 의도가 중국을 도모함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한편, 몇 해 전 조선의 역관이 중국인 여성을 홍등가로부터 구해준 적이 있었고 그 여성이 나중에 석성의 부인이 되었고 조선의 어려움을 듣고 부인이 석성을 설득해 조선에 명군이 파병이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성호 이익은 그의 저서에서 임진왜란의 최고의 공신은 석성이고 그 다음이 이순신이라고 평가했다.

 

요양부총병(療養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은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沈惟敬)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1593년 음력 1월 이여송(李如松), 송응창(宋應昌) 등이 이끄는 4만여 명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 3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0만 명 정도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켰다.

 

명군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의 개입으로 전쟁이 길어진 면도 있다. 개전 1년 후 조선군은 정규군 17만5천을 운용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도해 15만 중에서 7만명 이상이 전사한 상태였으며 전선도 경상도 남부로 고착되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일본은 강화를 요청하였고 피해나 위험 부담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군은 조선 장수들의 공세적 요구를 묵살하고 강화에 응하곤 하였다.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은 권율이 배수진을 치고 있던 곳으로 일본군을 맞아 격전 끝에 이를 무찔렀다. 행주산성에서의 전투는 권율의 분전도 있었지만 일본 측의 지휘관이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같이 군사적 식견이 전혀 없는 매우 무능한 다이묘였다는 것도 조선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는 처신을 잘못하는 바람에 조선군에게 일격을 당해 중상을 입기까지 했다. 행주산성 전투는 김시민 진주성 전투, 이순신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이다.

 

명나라는 다시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으며, 일본군도 전황의 불리,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雄川 :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니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충청병사 황진(黃進)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과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한 휴전 협상을 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장거정 (張居正, 1525년 ~ 1582년) 은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이다. 1572년 신종 때 재상이 되어 몽고와의 화평에 성공하였다. 또한 전국적인 호구 조사 및 검지를 실시하여 지주를 누르고, 농민 부담의 균형을 꾀하였다. 명나라 제일의 정치가로 손꼽힌다.

후베이성 장링 현 출신으로, 잘 생기고 수려한 외모를 타고났다. 1547년 가정 24년 진사로 합격했다. 처음에는 한림원 서길사가 되어, 서계에 그 재능을 인정받아 문하생이 된다. 서계가 재상이 되면서 그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예부우시랑, 이부좌시랑, 예부 서경 등을 역임하였고, 융경 원년(1567년)에 입각하여, 서계가 가정제의 유언에 따라, 가정제가 중용한 도사를 배제할 때 그 한쪽 역할을 맡았다.

 

이 때 서계의 정적이었던 고공은 이 모의로부터 배척당한 것으로 서계를 앙심을 품게 되며, 서계의 아들의 죄를 들어 서계를 탄핵하지만, 반격을 당해 파면되었다. 하야를 한 고공은 태감 이방 등과 연결해 서계의 실각을 노리게 된다. 그 후 서계는 1568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그 후임으로서 예부서경 조정길이 선택되었다. 고공은 복권을 위해 이방을 통해 장거정에게 협력하게 하고 고공은 복권하여 조정길을 대신해 재상이 되었다.

 

장거정은 고공과 결탁해 권력을 기반을 다지고, 더욱 강력한 권력을 얻기 위해 고공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내시 풍보와 연합해, 고공을 실각시키려 했다. 융경제가 1572년 사망하고, 장거정이 지지하던 만력제가 즉위 한다. 이 때에 융경제의 유언을 이용해 고공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수보의 지위에 올랐다.

 

만력제를 등에 업은 장거정은 독재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차례로 개혁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관리의 탄핵을 담당하는 언관이나 각지의 서원 등의 입을 봉해 독재권을 확립하고, 낭비의 철폐, 강기숙정(綱紀肅正) 등을 실시했다. 그리고 장거정의 최대 공적으로 손꼽히는 전국적인 토지측량과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한다.

 

당시 지방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향신세력(鄕紳勢力)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이것을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대량의 땅을 적발하였다. 그때까지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점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그것을 일관화시켜, 과세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이 진행되고 있던 은으로 납세를 하게 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국고에는 10년 분의 식료와 4백만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언론 탄압, 기득권의 침해 등으로 조정과 재야에는 장거정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1577년 만력 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휴직 중에 탄핵 되는 것을 무서워해 실시하지 않았다. 1581년 만력 9년에 병으로 쓰러져 다음 해에 사망하였다. 상주국(上柱國)의 봉호와 문충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사후 부모의 복상을 빠뜨린 것 등을 이유로 탄핵이 잇따라, 만력 11년 1583년에는 봉호와 시호가 박탈되고 사후 사형을 받아 가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장남 경수는 자살하고 가족은 변경으로 보내졌다.

 

 

태창제(泰昌帝, 1582년 8월 28일 ~ 1620년 9월 26일)는 중국 명나라의 14대 황제(재위 : 1620년). 이름은 주상락(朱常洛)이고, 묘호는 광종(光宗). 만력제의 장자이다.

  • 1620년 8월 28일 만력제가 죽고, 태창제가 즉위하였다.
  • 1620년 9월 태창제의 안색이 나빠졌으며, 병을 앓게 되었다.
  • 1620년 9월 내감 최문승이 태창제가 복용한 다른 약을 체내에서 배출시키기 위해 설사약을 복용시켰다.
  • 1620년 9월 26일 홍려시관 이가작이 만든 선단 2알을 연거푸 복용하고 갑자기 급사하였다.

 

천계제(天啓帝, 1605년 12월 23일 ~ 1627년 9월 30일)는 중국 명나라의 15대 황제(재위:1620년 ~ 1627년). 이름은 주유교(朱由校)이고, 묘호는 희종(熹宗). 태창제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선시 왕씨(王氏, ? ~ 1619년) 소생이다. 부왕 태창제가 즉위한 지 29일 만에 갑자기 죽자 그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올랐다.재위 이후에는 환관 위충현에게 정치를 모두 넘겼고,위충현은 전횡을 일삼아 뇌물이 끊이지 않고 간신들이 국정을 농단하였다.정치를 떠맡긴뒤 취미인 목공일을 하다 일찍 죽었다.

 

 

숭정제(崇禎帝, 1611년 2월 6일 ~ 1644년 4월 25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16대 황제(재위 : 1628년 ~ 1644년).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이며, 이름은 주유검(朱由檢)이다. 천계제의 동생으로써 후사가 없는 천계제의 뒤를 이어 명나라 제1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천계제는 7년의 짧은 치세 후 죽고, 숭정제가 즉위하던 시기 명나라는 말기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 즉위후 곧바로 기근과 반란이 차례로 발생하고, 거기에 후금군의 침공도 나날이 격해져갔다. 명장 원숭환이 후금군의 침공을 방어했으나, 후금의 홍타이지의 책략에 걸린 숭정제가 원숭환을 의심하여 주살하자 후금군을 억누를 힘이 없어졌고, 뒤이어 도적의 우두머리였던 고영상이 이미 백성들을 규합, 틈왕(闖王)이라 자칭, 그 뒤를 이은 이자성이 서안을 점거하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칭하고 북경에 육박했다. 1644년 이자성군의 포위 앞에 숭정제는 자살하였고, 명나라는 멸망했다.

 

같은 해 후금은 국호를 (淸)으로 바꾼 뒤, 이자성까지 격파하고 베이징을 점령하여 중국 지배를 선언하였다. 중국 남부에서는 명나라의 황족과 관료들이 남명정권을 세우고 청나라에 저항했으나, 운남에서 미얀마까지 도망쳤던 영력제를 최후로 멸망시켰다. 복건에서도 정성공이 대만을 점거하고 저항했으나, 정씨 왕국은 후에 청나라에 항복했다.

 

1644년 이자성 반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처음에는 남명정권의 황제였던 홍광제(弘光帝)가 묘호 사종(思宗)으로 추증하였으나 곧 의종(毅宗)으로 개호(改號)했고 융무제(隆武帝) 때에는 따로 묘호를 위종(威宗)으로 올렸다. 이후 남명정권을 제압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청나라는 다시금 숭정제에게 회종(懷宗)의 묘호와 장렬민황제(莊烈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의종이라는 묘호가 널리 쓰인다.

 

 

이자성(李自成, 1606.9.22~1644)은 명나라 말기의 틈왕(闖王)이었다. 그의 본명은 이홍기(李鸿基)였으며, 그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주요인물 중의 하나였다.

 

숭정제(崇祯帝)가 즉위하던 시기 명나라는 말기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숭정제 즉위후 기근과 반란이 차례로 발생하고, 후금군의 침공도 나날이 격해져갔다. 명장 원숭환(袁崇煥)이 후금군의 침공을 항상 방어해 왔으나, 후금의 홍타이지의 책략에 걸린 숭정제가 원숭환을 의심하여 주살하자 후금군을 억누를 힘이 없어졌다.

 

이때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였던 고영상이 이미 백성들을 규합하고, 틈왕(闖王)이라 자칭하였다. 그 뒤를 이은 이자성이 시안을 점거하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칭하였으며, 그 군세가 베이징에 육박했다.

 

숭정 17년(1644년) 3월 19일, 이자성이 베이징(北京)을 점령하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신무문으로 나와 경산 동쪽 비탈 홰나무(槐树) 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당시 33세였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명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1644년 5월 27일 후금의 도르곤은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죽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吳三桂)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한 뒤, 명의 수도 베이징에 들어가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임을 선포하였다. 같은 해 만주족은 후금에서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이자성은 베이징에서 상주(商州, 지금의 산시 성 상락시)로 달아났다. 이자성의 군대가 계속 패퇴하자 많은 명의 유신(遺臣)들이 난징에서 세운 남명(南明)이나 청에 투항하자 이자성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1645년 이자성은 청나라에게 동관(潼關)마저 빼앗기자 양양(襄陽)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남명의 좌양옥(左良玉)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여 형세의 회복을 노렸지만, 좌양옥의 병사로 무산되었다.

 

우창 장시에서도 청군에 패배한 이자성은 통성(通城, 지금의 湖北省 通山)으로 퇴각하였지만, 구궁산(九宮山)에서 명나라에 충성하는 현지 무장세력에게 살해되었다.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는 탈출이 어려워지자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이 죽은 뒤 대순의 군대는 구궁산 일대를 소탕하여 보복하고, 남명과 연합하여 청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한편, 이자성이 죽은 뒤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자성이 탈출하여 후난 성의 석문(石門, 지금의 후난 성 상덕시)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삼계(吳三桂, 1612년 ~ 1678년)는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장수이다. 명나라 말 청에 투항하여, 청나라 군대의 길잡이가 된 공으로 번왕에 봉해진다. 강희제가 번을 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망했다.

오삼계는 자는 월소(月所), 장백(長白)이며, 원래 집안은 강소성 고우(高郵)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부친의 근무지가 요동성이어서, 요동에 적을 옮겼다. 오삼계도 1612년 요동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공적으로 무장에 등용되었다. 그 후 출세를 거듭하여 1641년에 제독으로 요서의 영원(寧遠)(랴오닝성 흥성시)에서 명군을 지휘하여 청나라 군대를 막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청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1644년 농민반란군으로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李自成)이 북경(北京)을 물리칠 때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에게 투항하였다. 그 후, 청나라 군대는 오삼계를 길잡이로 하여 관내로 들어왔다.

후에 번왕(藩王)인 평서왕(平西王)으로 봉해지고, 운남(雲南)을 관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운남은 한족(漢族) 오삼계가 다스리는 독자적인 지방정권이 된 것이다.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성조)가 한족을 탄압하는 정책을 실시하자, 운남에서 명나라를 다시 건국한다는 명분을 세워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평남왕 상가희(平南王 尙可喜)와 정남왕 경정충(靖南王 耿精忠)이 오삼계의 쿠데타에 호응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가리켜 “삼번의 난(三藩之亂)”이라고 한다.강력한 군사로 섬서성 하남성, 감숙성을 휩쓸었으며 곧이어 청나라 조정을 얕잡아 여겨 도성 북경으로의 진군을 멈추었다. 조정에게 숨돌릴 틈을 준 사이, 조정은 한족 출신 장군을 등용하여 엄청난 반격을 시작하였고 수 차례 패배를 겪었다.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황제를 참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 정하였으나 그 해 8월에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이로 인해, 오삼계군의 군세는 크게 약해졌고, 1681년(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이자 오씨의 주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오세번이 곤명에서 자살을 함으로써 8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끝이 났다.

남명

 

남명정권(정성공)의 영향권

 

남명(南明)은 명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후에 존속하였던 남쪽 지방 정권으로 일명 남명정권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멸망 후, 명나라 황제의 유신(遺臣)들은 명나라 황족을 옹립 해, 남명(南明)나라를 수립했다. 남명의 초대 황제 홍광제 주유송(朱由崧 재위:1644년 ~ 1645년 )은 건문제에게 묘호를 혜종(惠宗)으로, 시호를 양황제(讓皇帝)로 추증하였다.정성공은 청(淸)나라의 군대에 쫓기고 화남(華南, 중국 남부)에 도망친 륭무제(隆武帝, 이름은 주율건; 朱聿鍵)에 수행(隨行)해, 연평군왕(延平郡王)의 작위를 받고 명나라의 황실 성인 주(朱)씨의 성을 하사받고 국성야(國姓爺)로 불리었다.

 

청나라가 명나라의 재건을 목표로 한 남명(南明)정권을 제압하여 중국을 지배했다. 1650년 청군이 중국 남부 경동과 구이린을 함락시키고 1656년 주산열도를 점령하였다. 1659년 운남까지 차지하자 영명왕은 버마로 도주하였다.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 버마까지 쳐들어와 영명왕을 살해하였고 이로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1724년 명나라의 대왕 주이의 손자, 주지련이 청나라 옹정제로부터 1등 연은후의 작위를 받고, 이후 이 자손은 명나라의 제사를 이어갔다.

 

 

남명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명 공종
(明恭宗)
(남명 안종 추숭)
모천부도정순숙철수문
현무성경인의효황제
(慕天敷道貞純肅哲修文
顯武聖敬仁毅孝皇帝)
주상순(朱常洵) - -
제1대 명 안종
(明安宗)
(명 질종<明質宗>)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
비무선인광효간황제
(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
備武宣仁度孝簡皇帝)
(난황제<赧皇帝>)
주유송(朱由崧) 홍광(弘光) 1644년 ~ 1645년
임시 - 화황제
(和皇帝)
(노왕<潞王>)
주상방(朱常淓) - 1645년
비정통 명 의종
(明義宗)
시천제도공화양정헌문
경무명덕숙인성황제
(侍天制道恭和襄定獻文
敬武明德肅仁成皇帝)
(노왕<魯王>)
주이해(朱以海) - 1645년 ~ 1655년
임시 - 평황제
(平皇帝)
(정강왕<靖江王>)
주형가(朱亨嘉) - 1645년
- - 혜황제
(惠皇帝)
(남명 소종 추숭)
주우온(朱宇溫) - -
- - 순황제
(順皇帝)
(남명 소종 추숭)
주주영(朱宙栐) - -
- - 단황제
(端皇帝)
(남명 소종 추숭)
주석황(朱碩潢) - -
- - 선황제
(宣皇帝)
(남명 소종 추숭)
주기성(朱器墭) - -
제2대 명 소종
(明紹宗)
배천지도홍의숙목사문
열무민인광효양황제
(配天至道弘毅肅穆思文
烈武敏仁廣孝襄皇帝)
주율건(朱聿鍵) 융무(隆武) 1645년 ~ 1646년
제3대 명 문종
(明文宗)
정천응도소숭영문굉무
달인성선민효절황제
(貞天應道昭崇寧文宏武
達仁成宣閔孝節皇帝)
(당왕<唐王>)
주율오(朱聿鐭) 소무(紹武) 1646년 ~ 1647년
비정통 명 평종
(明平宗)
규천현도지인정신덕문
분무정숙돈강원황제
(揆天顯道知仁貞信德文
奮武靖肅敦康元皇帝)
(한왕<韓王>)
주본현(朱本鉉) 정무(定武) 1646년 ~ 1664년
- 명 예종
(明禮宗)
(남명 소종 추숭)
체천창도장의온홍흥문
선무인지성효단황제
(體天昌道莊毅溫弘興文
宣武仁智誠孝端皇帝)
주상영(朱常瀛) - -
제4대 명 소종
(明昭宗)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
위무예인극효광황제
(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
緯武禮仁克孝匡皇帝)
(계왕<桂王>)
주유랑(朱由榔) 영력(永曆) 1646년 ~ 1662년
비정통 명 경종
(明敬宗)
충천융도소의흠성정문
양무분인예효화황제
(忠天隆道昭義欽成靖文
襄武奮仁睿孝和皇帝)
(회왕<淮王>)
주상청(朱常淸) 동무(東武) 1648년

 

 

영력제(永曆帝, 1623년~ 1662년) 또는 영명왕(永明王)은 남명의 제4대 황제이며 명나라로는 20대 황제이다. 이름은 주유랑(朱由榔)이다.

 

부왕 주상영은 만력제의 셋째 아들이었다.

 

1650년 군이 중국 남부 경동 구이린을 합락시키고 1656년 주산열도를 점령하였다. 1659년 운남까지 차지하자 영명왕은 버마로 도주하였다. 1662년 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와 영명왕을 살해하였고 이로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