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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8 (몽골제국 1 : 개요) 본문
중국의 역사 58 (몽골 제국 1 : 개요)
몽골 제국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b/bc/Mongol_Empire_map_2.gif)
칭기즈 칸의 성장과 치세
1206년 테무진은 몽골 지방의 동부를 흐르는 아무르 강의 지류인 오논 강변에서 부족연합의 군장인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면서 통일제국의 성립을 보았다.
어린 시절 여러 부족이 서로 살인, 납치, 폭력을 휘두르초원에서 자라 온 칭기즈 칸은 자신의 부족에게 추방되어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는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 욕망, 야망, 잔혹 등 인간감정의 전 영역을 목격하면서 자랐다. 그는 배다른 형을 죽이기도 했고 경쟁관계인 부족에게 붙잡혀 노예 생활도 했고 납치되어 탈출하기도 했다. 그의 동생은 그에 비해 힘도 세고 활도 잘 쏘았다. 그의 배다른 형은 그를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그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나중에는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하지만 친구도 만나게 되고 사랑하는 여인도 만나게 된다.
칭기즈 칸은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점차 주변의 뜻있는 부족들을 규합하여 힘을 기르게 되었다. 드래서 어느정도 힘이 길러지자 해마다 자기보다 권력이 센 사람들을 하나 둘 물리치고 몽골 초원지대의 모든 부족을 정복하게 된다.
그는 바이칼 호의 남쪽과 동남쪽의 초원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여러 부족장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으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함께 그의 권위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의 호전적인 성격이 주변 여러 부족들을 향한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는 고비사막과 황허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고,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 땅을 통과하고, 아프카니스탄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까지 이르면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게 된다.
최초의 공격목표는 중국 서북방의 변경국인 탕구트족의 서하(西夏)왕국이었으며, 이어서 고원 북부의 오이라트나 서북방의 키르기스, 기타 삼림지대의 부족들을 정복해 나갔다. 또한 서요(西遼)를 토벌하고 위구르·카를루크 등을 굴복시켰으며, 1211년에는 마침내 조상의 오랜 숙적인 금나라를 침입해 황허 강(黃河) 이북과 만주 땅을 점령하고 금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다.
1219년부터는 서아시아를 원정해 호라즘 왕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한편, 카프카스를 함락해 남러시아의 스텝 지대를 빼앗고 1225년 귀환했다. 아시아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몽골 제국의 판도를 현저히 확대시킨 칭기즈 칸은 다시 서하를 토벌하던 중 1227년 진중에서 병사했다. 칭기즈 칸 사후 당시 몽골 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에서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중앙평야에 접해 있었다. 또한 제국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젝 웨더포드'의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서 칭기스 칸에 대한 내용을 인용한다.
"칭기즈 칸의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칭기즈 칸의 아들, 손자들과 함께 13세기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문명을 정복해 나갔으며 그가 굴복시킨 사람들 숫자로 보나, 합병한 나라들의 숫자를 보나, 정복한 땅의 면적으로보나 칭기즈 칸은 역사상 다른 어떤 정복자보다 두 배 이상을 정복했다. 몽골전사들의 말발굽은 태평양에서부터 지중해에까지 모든 강과 호수의 물을 밟아 보았고 전성기의 몽골 제국은 연속되는 면적으로 2800만 내지 3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대략 아프리카 대륙만한 넓이이며, 미국.캐나다.멕시코.중앙아메리카.카리브 해의 섬들을 합친 면적보다도 훨씬 넓다. 몽골 제국은 시베리아 눈덮인 툰드라부터 인도의 뜨거운 평원까지, 베트남의 논에서부터 헝거리의 밀밭까지, 고려에서부터 발칸 제국까지 뻗어 있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즈 칸이 점령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런 성취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의 휘하에 있던 뭉골 부족 전체가 약 100만 명으로, 현대 기업의 직원들보다 적은 숫자였다는 점이다. 칭기즈 칸은 이 100만 명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그 숫자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그의 기병대가 13세기를 가로질러 돌격하자 세계의 경계는 다시 그려졌다.그는 돌이 아니라 나라들로 건축했으며 작은 나라들은 합쳐 큰 나라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동유럽의 슬라브족 공국과 도시를 묶어 하나의 커다란 러시아 국가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3대에 걸쳐 남쪽의 송나라에 만주의 여진족, 서쪽의 티베트, 고비 사막 옆의 탕구트, 투르키스탄 동부의 위그루 땅을 결합하여 커다란 중국을 만들었다. 몽골른 통치영역을 인도까지 넓혀 무굴제국을 세우고 통치했다.
칭기즈 칸의 제국은 많은 문명을 서로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었다. 그 이전에는 여러 지역문명이 서로 알지 못하였고 중국이 유럽을, 유럽은 중국을 모르고 지내던 시대를 외교나 상업적으로 연결시켰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칭기즈 칸은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 장점과 충성심, 성취에 기초한 새롭고 독특한 체제를 건설했다. 그는 비단길 주변에 고립되어 잇는 교역도시글을 점령하여 비단길을 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조직해 놓았으며 군사, 정치, 상업 ,외교의 통로로 번성을 이루었다. 그는 점령지 세금을 내렸고, 의사.교사.사제.교육기관에는 완전히 면제해 주었고 통계조사와 역참제도를 확립했다. 이 역참은 오늘날 통신선의 원시적 형태이나 몽골군에게는 신경이었고 군사, 정보의 혈관이었으며 점령지의 부와 물자가 몽골 수도 로 향하는 길이기도 했다.
칭기즈 칸은 점령지 부와 물자를 축적하지 않았으며 모두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인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는 국제법을 만들고 법을 만민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최고의 법으로 규정했다. 그는 스스로 법아래 군림하였으며 점령지 주민들에게 충성은 요구했지만 종교의 자유는 허용해 주었다. 법의 지배를 내세우고 고문을 철폐했으나 양민을 약탈하는 도적떼나 테르리스트 암살자들을 찿아내 죽이기 위한 원정에 서슴없이 나섰다. 그는 볼모를 잡아두는 관행을 없애고, 대신 모든 대사에게 외교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해 주고 전쟁 중인 사절에게도 적용했다.
칭기즈 칸은 제국을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두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제국은 그 뒤에도 150년 동안 더 팽창해 나갔다. 제국이 붕괴된 뒤에도 수백 년 동안 그의 후손들은 러시아, 터키, 인도에서 중국과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작은 제국과 큰 나라를 다스렸다. 이 통치자들은 칸, 술탄, 왕, 샤,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 다양한 절충적인 칭호를 사용했으며 무굴인 가운데 일부는 18세기에도 인도에서 통치하였고 1875년 영국의 침략으로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아들과 손자가 참수되었다. 마지막 통치자로 우즈베케스탄 아미르인 알람 칸은 1920년 소비에트 혁명의 물결에 밀려 퇴위했다.
역사는 대부분 위대한 정복자들에게 비참하고 때 이른 죽음을 선고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33세의 나이에 그의 위대한 정복을 마치고 바빌론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부하들은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땅을 서로 나누어 가졌으며, 카르타고의 위대한 영웅 한니발은 16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로마군을 공포에 떨게 만들다 고국 카르타고의 버림을 받고 소아시아로 망명하여 로마군의 추적에 이국 땅에서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끓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동료 귀족과 이전 동맹자들에게 로마 원로원에서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자싱의 모든 정복지가 파괴되거나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본 뒤 지구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외딴 섬에서 외로운 수인으로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러나 70세에 이른 칭기스 칸은 자신의 야영지 침대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의리있는 친구, 명령만 내리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충성스런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었다.그는 1227년 여름 황허의 상류지방에서 탕구트 민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 적의 화살에 맞아 생긴 무릎 부상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몽골인들은 '하늘로 올라갔다.'고 표현하였다. 일설에는 번개, 독살, 마법 등 무수한 전설이 남아 있다.
칭기스 칸의 병사들은 죽은 칸의 주검을 몽골 고향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는데, 그의 무덤은 모세의 무덤처럼 그를 묻은 자리에는 능도 없고 피라미드는 커녕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은 묘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칭기스 칸은 매장되어 자신이 나왔던 몽골의 광대한 풍경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장례 행열에 속한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40일 동안 길에서 만나 모든 사람과 짐승을 죽였다고 한다. 비밀리에 매장을 마친 뒤에는 800명의 기병이 그 땅을 여러 번 밟아 다져 무덤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또 이 기병들은 무덤의 위치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다른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이 병사들은 또 다른 병사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우구데이 칸의 치세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우구데이(窩闊合) 칸은 금나라의 잔존 세력과 대규모의 전쟁을 재개하여 금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236년에는 서방을 향한 새로운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러시아와 중유럽의 점령을 위한 시도였는데, 볼가·부르갈인들의 제국은 1~2년만에 멸망했으며, 그 승리는 러시아 본토로 향하는 길을 연 셈이었다. 그무렵 러시아 중부와 북부는 도시국가와 독립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몽골군에 차례로 함락되어갔다.
발트 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이 겨울 추위로 인해 진격을 멈춤에 따라 러시아의 무역도시인 노브고로트를 비롯한 몇몇 도시가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의 일부를 토벌했으며 전위부대는 슐레지엔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독일과 폴란드의 기사 연합군은 슐레지엔의 헨리크 2세공의 지휘 아래 레그니차의 발슈타트에서 몽골군과 싸워 1242년 4월 9일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몽골군은 독일 중앙부를 침입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작전중인 부대에 합류했고, 1241년 4월 헝가리군을 격파한 몽골군은 헝가리에서의 몽골 통치의 기초를 구축했다.
한편 그에 앞서 몽골군은 이란·그루지아·아르메니아에서 장기간에 걸친 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몽골의 진격은 1241년 12월 우구데이의 죽음으로 중지되었다.
구유크 칸의 치세
우구데이의 사후, 새로운 칸의 선출은 의견일치를 얻기 어려웠다. 당분간 섭정을 하던 우구데이의 부인은 아들 구유크가 칸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나, 칭기즈 칸의 장손으로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바투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1246년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는 칸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3년 만에 죽었고, 다시 그 어머니에 의한 섭정이 계속되었다.
몽케 칸의 치세
이처럼 칸위의 공백기가 계속된 것은 우구데이 일가와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툴루이 측의 승리로 돌아갔고,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가 제4대 칸이 되었다. 그후 몽골 제국에서 원나라(元)에 이르기까지 칸위는 툴루이 자손에 의해 독점되었다.
몽케는 이미 서정(西征)에 참여하여 명성을 얻었고 전장에서도 공적을 쌓았다. 몽케는 1252년 훌라구로 하여금 아바스 왕조를 멸하게 하고 이라크·이란 방면을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쿠빌라이에게 남송을 정벌하게 했다.
제국의 분열과 쿠빌라이의 원나라
몽케칸이 죽자,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동생인 아리크부카는, 그의 부하와 우구데이계 제왕(諸王)의 지지를 얻어 대칸위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신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대를 받아 제5대 대칸에 올랐다. 그후 아리크부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쿠빌라이에게 불만을 품은 일파는 우구데이의 손자인 카이두(하이두)를 칸으로 추대하여 쿠빌라이칸과 대립함으로써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국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을 계기로 킵차크 한국과 차가타이 한국은 하이두의 편에 서고, 일 한국은 쿠빌라이측에 가담함으로써 몽골 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었다.
결국 쿠빌라이 칸의 일파가 승리하였지만(1303년), 이때에는 이미 쿠빌라이나 하이두가 모두 죽은 뒤였다. 그러나 그 후 원조와 대립하였던 여러 한국도 점차 개화됨으로써 원나라와 화의를 맺게 되어, 몽골제국의 상호 연대성이 부활되었다.
제국의 소멸
원나라는 몽골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종주국(宗主國)이 되었고, 1310년 멸망한 우구데이 한국을 제외한 다른 킵차크·차가타이·일 등 3한국이 서로 연합함으로써 그로부터 거의 60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이른바 ‘타타르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또 아시아와 유럽 세계 사이의 동서 문화 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때의 몽골 제국은 몽케칸의 치세(治世)까지 몽골고원의 대칸의 권력과 혈연적 연관에 의해 보존하고 있던 통일성을 잃고, 다만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여 그 정권 밖에서 독립국을 형성한 3한국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원나라의 멸망(1368년)과 함께 붕괴하였다.
몽골 제국의 카간
한자 이름에서 물결표(~)로 생략한 곳은 ‘孛兒只斤’(베얼즈진)이다.
역사적 배경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몽골 비사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1240년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 야만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초기의 투쟁과정
오논 강, 테무친이 태어난 곳이다.
칭기즈 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아직 없다. 그의 본명인 테무진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라 한다.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피 한 움큼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강간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 비사〉(원조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권력에의 부상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의 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토그릴과 케레이트족은 모두 전멸했다.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친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친은 칭기즈 칸('전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몽골족의 통일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식민통치)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누어져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말 아무다리야(고대명은 옥수스) 강과 시르다리야(고대명은 작사르테스) 강 지역에서 화레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화레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를 받고 있던 한 이슬람 대상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화레즘의 왕은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화레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들을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화레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1223년 마침내 그는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칭기즈 칸의 정복활동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중의 하나를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하와 금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많은 지역을 합병하였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이루고,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역은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라크,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몰도바, 쿠웨이트, 독일, 폴란드, 헝가리를 포함하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간접지배를 받았다.
서하 정복
몽골을 통일한 그는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 최초의 공격을 시작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이다.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종교는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평원에서 전쟁하는 것에 능했던 몽골인들은 여러 차례(1205-1207, 1209) 서하를 황폐화시켰지만, 수도인 영하를 함락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댐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 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1211년 이준욱이 반역을 일으키자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금(金)과의 오랜 전쟁으로 서하(西夏)의 국력은 급속히 쇠퇴했으며, 1226년에는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다시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국력의 소모 뒤, 결국 서하는 1227년 칭기즈 칸의 몽골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서하를 점령한 칭기즈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실시했는데, 이는 서하의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칸을 노하게 만든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매우 철저하게 살육해서 멸족시켰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금 정복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와 함께 금의 마달갈(장종, 1189-1208)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금의 마달갈의 신하였으며, 마달갈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마달갈이 죽자 그의 후계자 영제는 칭기즈 칸이 군신의 예를 갖추기를 요구하였으나, 칭기즈 칸은 무능한 통치자인 영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1212년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다.
칭기즈 칸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3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의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타이위안 시)과 평양(린펀)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영제가 홀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홀사호는 영제의 조카인 오도보 즉 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공성전에 자신이 없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후 오도보는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였고, 칭기즈 칸은 그것을 반역으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이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그들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고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후진적이었다.
금은 개봉 천도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이 투르크스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다시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 칸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었야 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와 톨루이에 의하여 1233년 5월에야 정복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칭기즈 칸의 지휘기법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징기스칸의 조카인 모토칸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징기스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칭기즈 칸의 지도자로서의 장점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 철저한 능력위주의 군 인사행정
- 이민족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인재흡수
- 승마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
- 상인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
- 다른 종교(그리스도교, 이슬람)에 대한 존중
-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가 다종교사회인 경우, 특정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조성
아들들과 영토 분할
주치(1185년~ 1227년)는 칭기즈 칸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사후 투르가이와 우랄스크를 물려받았다. 출생이 의심스웠던지라 중세 몽골어로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나, 칭기즈 칸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큰 아들이 가장 멀리에 있는 땅을 물려받는 몽골의 풍습에 따라 아버지와 가장 먼곳에 거주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나라는 유럽과 가장 근접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어머니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때 강간에 의하여 가지게 되었다고 의심된다. 칭기즈 칸이 살아있을 때에는 주치의 혈통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나와 바투와 다른 칭기즈 칸의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으로 나타난다. 오고타이는 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킵차크 한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린다.
주치의 아들들 가운데 훌륭한 임금이란 뜻의 바투가 아버지의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차가타이(? ~ 1242년)는 몽골의 대칸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이다. 위구르 지방에서 서쪽으로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 이르는 옛 카라키타이 제국의 초원, 즉 일리, 이식쿨, 추 강 상류, 그리고 탈라스 지역을 몫으로 물려받았다.
그는 겨울에는 일리 강 근처에서 지냈고, 여름에는 쿠야쉬(Quyash)에서 지냈다. 두 곳 모두 일리 계곡에 있었고 쿠아쉬는 오늘날 쿨자에서 멀지 않은 알말릭 부근이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과는 달리 정착하지 않았으며 유목생활을 계속하였다.
그의 이름에서 차가타이 한국이 생겨났으며, 그의 나라는 몽골령 투르크스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차가타이는 차가타이 한국을 1227년부터 1242년까기 통치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칭기즈 칸은 그를 야삭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그는 야삭을 평생동안 준수하였고 주위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는 영토안에 트란스옥시아나가 존재하였지만 대칸 오고타이가 마흐무드 얄라바치에게 통치를 위임하여 그 지역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마흐무드 얄라비치와 그의 아들 마스우드 얄라바치는 차가타이 한국의 문명화된 도시들을 대칸의 이름으로 다스렸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서 큰아들 무투겐의 아들인 카라 훌레구를 지명하였다. 그러나, 카라 훌레구는 4년간만 통치할 수 있었고, 대칸 구유크 칸은 이수 뭉케로 차가타이 칸국을 다스리게 하였다. 다시 톨루이의 아들 뭉케가 대칸이 되자 카라 훌레구가 다시 칸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차카다이의 사후에 차가다이 한국은 자주적이지 못하였고, 카라코롬 조정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우구데이 칸 또는 오고타이 칸( 窩闊臺; 1186년 ~ 1241년)은 몽골의 황제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로 칭기즈 칸으로부터 몽골 제국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칭기즈 칸의 아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오고타이는 거처를 카라코룸에 정하였고, 그가 가장 신임한 인물은 야율초재로 아버지 칭기즈 칸 때부터 통치의 조력자로 함께 해왔으며, 중국식 행정 조직을 구성하여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야율초재는 무분별한 약탈의 대상으로 간주되던 정복지를 세금을 내는 행정구역으로 편성하였다. 또한 유교 교육을 위하여 북경과 평양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남송의 사미원이 사망한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후 몽골은 일시 북쪽으로 물러나고, 그 뒤를 송나라군이 북상하여 낙양과 카이펑(개봉)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격노한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허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맹홍의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황후는 퇴레게네(? –1265)이며 그의 사후 장남 구유크가 1246년에 칸으로 선출될 때까지 섭정하였다.
툴루이(拖雷, 1190년 ~ 1232년)는 칭기즈 칸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보르테이며 원나라를 통치한 세조 쿠빌라이의 아버지이다. 몽골족의 전통에 따라 가장 가까운 땅인 몽골의 원래 거주지를 물려받았다. 칭기즈 칸의 사후에 형 오고타이가 대칸에 오르기 전까지 감국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금나라와 카레즈미드 정복에 늘 함께 하였다.
칭기즈 칸의 후계
칭기즈 칸은 툴루이와 오고타이 중의 하나를 후계자를 고를 때 고심하였다. 툴루이는 용맹스러운 장수였으나, 칭기즈 칸은 정치적인 능력이 있는 오고타이를 선택했다. 툴루이는 알코올에 중독되었으며 통찰력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소르칵타니는 케레이트족 토그릴의 질녀로 네스토리우스 교도였으며 현명하였다.
칭기즈 칸의 사후 쿠릴타이에서 몽골 족장들은 툴루이를 새로운 대칸으로 선출하였지만, 툴루이는 그것을 거절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그의 형 오고타이에게 양위하였다. 몽골 족장들은 막내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한다는 전통에 따라 이와 같이 결정하였으며, 툴루이가 당시 가장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죽음과 유산
몽골비사에 의하면 툴루이는 중국 원정시에 형 오고타이의 심한 병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무당이 오고타이의 병이 그들이 금나라 정벌시 죽인 중국인의 혼령들의 원한으로 인한 것이며, 제물로 가족중의 하나를 바쳐야지 그가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툴루이가 자원하여 나섰으며 그는 독배를 마시고 희생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툴루이보다 소르칵타니로 부터 얻은 그의 네 아들로 이루어진 툴루이 가문 사람들은 몽골제국의 운명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아들은 몽케와 쿠빌라이, 아라 부가, 훌라구이었다. 몽케는 4대 몽골 황제가 되었고, 아라 부가는 황제가 되려 하였으나 쿠빌라이와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자리를 내 주어야 했다. 송나라를 정복한 쿠빌라이 칸은 5대 황제로 중국을 거점으로 원나라를 세웠고, 훌라구 칸은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일 한국을 세웠다.
몽케 (1208년 ~ 1259년)는 몽골 제국의 제4대 칸(재위:1251년~1259년)이고,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구유크 칸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묘호는 헌종(憲宗)이다.
그의 아버지는 톨루이이며 어머니는 소르칵타니로 그의 형제는 쿠빌라이, 아라 부가, 훌라구 등이 있었다. 몽케는 4대 몽골 황제가 되었다.
1251년 몽케 칸이 몽골족의 대칸으로 임명되었고 1255년 훌라구는 몽케의 명을 받들어 대군을 이끌고 서남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그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타심에게 몽골족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는데 아바스 칼리파가 거부했다. 그는 수십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1256년 12월 알라무트의 아사신 근거지를 파괴하고 거침없이 바그다드로 쳐들어갔다.
바그다드를 포위하자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자비를 구했으나 소용없었다. 1258년 2월 10일 훌라구는 이슬람군의 항복을 받았고 이슬람군이 무장해제함과 동시에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여 거의 8만명의 바그다드 이슬람교도가 학살당했고 칼리파 알 무스타심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압바스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1259년 고려를 항복시켰으며 간접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윽고 1259년 몽케 칸의 친정군이 남송으로 원정하였다. 남송의 장군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군대를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된다. 이 때 가사도가 대승한 말을 할 수 있던 것은, 몽골의 황제 몽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가사도와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1259년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에 병사하고, 몽골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룸을 수비하던 막내동생 아리크 부케는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둘째동생 쿠빌라이는 윤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훗날의 상도(上都)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몽케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람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서전인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아리크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년 ~ 1294년)은 몽고 제국의 제5대 칸(재위 : 1260년 ~ 1294년)이며,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고려·버마·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색목인(중앙 아시아 인)을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서양인을 우대하여 마르코 폴로 등이 입국하는 등,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고,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을 완성하여 원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생애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고려에 대한 정책
쿠빌라이는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에 협력을 종용하였다. 또한 한인(漢人) 학자들을 동원하여 고려로 하여금 성리학(주자학)을 도입하게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때부터 계속된 원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파스파 문자
파스파 문자(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몽골 원나라(元) 국사(國師)인 파스파(八思巴)가 쿠빌라이(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가족관계
황후는 소예순성황후 옹기라트 씨 이다. 그녀의 가문은 칭기스칸의 처이자 쿠빌라이의 할머니인 부르테 대카툰을 배출한 가문으로 보르지긴 일족에 이은 몽고 제국 서열 2위의 가문이였다.
자녀로는 12남 5녀가 알려져 있는데, "원사"와 "집사" 의 기록이 일부 상이하다.
- 도르지 [多爾濟] : 장남, 일찍 죽었다.
- 명효황태자 (明孝皇太子)
- 진왕 망갈라 [秦王忙哥剌]
- 북안왕 노무칸 [北安王那木干]
- 코리다이 [忽理台] : 원사에는 기록이 없고 집사에만 쿠빌라이의 5남으로 기록이 있다.
- 운남왕 쿠카치 [雲南王忽哥赤]
- 아야치 [愛牙赤]
- 서평왕 올로치 [西平王奧魯赤]
- 영왕 쿠케추 [寧王闊闊出]
- 진남왕 토곤 [眞南王妥歡]
- 쿠틀룩 티무르 [忽都魯帖木兒]
- 테무치 [帖木赤]
- 창국 대장공주 (昌國大長公主) : 창왕(昌王) 옹기라트 부카에게 하가(下嫁)
- 조국 대장공주 (趙國大長公主) : 조왕(趙王) 옹기라트 아이부카에게 하가
- 노국 대장공주 (魯國大長公主) : 세 번 결혼하였다
- 첫 번째 남편은 알라친 [斡剌眞] 이며 옹기라트 씨족이다.
- 두 번째 남편은 티무르 [帖木兒] 이며 역시 옹기라트 씨족이다.
- 세 번째 남편은 만지타이 [蠻子台] 이며 역시 옹기라트 씨족이다.
- 두 번째 남편은 티무르 [帖木兒] 이며 역시 옹기라트 씨족이다.
- 첫 번째 남편은 알라친 [斡剌眞] 이며 옹기라트 씨족이다.
- 제국 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 : 본명 쿠트로 카이미시. 고려 충렬왕에게 하가
- 창국공주 차륜 (昌國公主茶倫) : 칭기스칸의 맏 딸인 코친 베키의 아들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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