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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7 (남송)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중국의 역사 57 (남송)

두바퀴인생 2010. 4. 8. 17:28

 

 

중국의 역사 57 (남송)

 

 

 

남송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남송(南宋 : 1127년-1279년)은 중국의 왕조중 하나이다. 조광윤이 건국한 송나라 왕조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정강의 변을 겪으면서 화북을 빼앗긴 후, 황족 조구 (훗날 고종)가 남쪽으로 옮겨 회화 이남의 땅 임안(현재의 항저우)으로 천도하여 재흥한 정권을 가리켜 남송이라고 부른다.

 

 

 

1142년의 남송의 판도

 

1126년 북송의 황제 흠종이 금나라에 의해 카이펑에서 북쪽으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나 북송이 멸망한 후, 흠종의 동생 조구는 남쪽으로 도망쳐 1127년 난징에서 즉위하여 고종(高宗)이 되어, 송나라을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 한세충 등의 활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화평 후 진회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이때까지 악비 등의 군벌의 손에 장악당한 군의 지휘권을 조정으로 되돌렸다. 또 한편으로는 주전론자들을 탄압하여 악비는 살해되고, 한세충은 은거를 하였다.

 

효종의 치세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다. 금나라군은 대군이었으나, 해릉왕은 권력확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금나라의 황족중 한사람인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금나라의 유력자들은 속속 완안옹의 곁으로 모이게 되었고, 해릉왕은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의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慎)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금의 세종, 남송의 효종은 각자가 속한 왕조에서 가장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인물들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동시대에 2명의 명군이 남쪽과 북쪽에 나타나게 되어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한탁주 시대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다. 광종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우둔하였기에 황후 이씨의 말밖에는 듣지않았다. 황제에 불만을 품은 재상 조여우(趙汝愚), 한탁주(韓侂胄)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했다. 한탁주는 이 공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 등은 한탁주을 멀리했다.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 등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는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편에 섰던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 왕난(王藺), 주희(朱熹), 팽귀년(彭龜年)등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 다음해에는 주희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慶元僞學之禁). 이 일련의 사건을 경원의 당금(慶元之黨禁)이라 불렀다.

 

한탁주는 그후 10년동안 권력을 유지했으나, 뒤를 보호해주던 황후와 황태후가 차례로 붕어하자, 권력이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때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을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대신)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것으로 금나라와 화의을 맺었다.

 

몽골의 위협

한탁주을 살해한 사미원이 이번에 권력을 장악하고 그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 시기 북쪽의 몽골고원에서는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사미원이 사망한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후 몽골은 일시 북쪽으로 물러나고, 그 뒤를 송나라군이 북상하여 낙양 카이펑(개봉)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격노한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허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맹홍의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윽고 1260년 몽케 칸의 친정군이 들이닥쳤다.

 

멸망

그러나 몽케는 이 원정 도중에 병사한다. 이때 쿠빌라이가 공격한 무창에 원군으로 온 가사도는 이들을 퇴각시켰다. 이 전투에서 가사도와 쿠빌라이 사이에서 밀약이 있었던 것은 훗날 알려지게 되었다.

 

몽골을 격퇴한 영웅으로써 환영받게 된 가사도는 그 인기에 힘입어 재상이 되어, 전권을 임명받았다. 가사도는 교묘한 정치수완을 발휘하고, 공전법 등 농정 개혁에 힘쓰는 한편, 인기를 얻는 것도 잊지 않아 그후 15년에 걸쳐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몽골 평원에서 아리크부케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빌라이가 다시 침공을 개시하여, 남송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국토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던 양양(襄陽,후베이성)을 1268년부터 1273년까지 5년간에 걸친 포위전(양양 공방전) 끝에 함락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졌고, 가사도는 주위의 목소리에 몽골과 싸우기 위해 출발했으나 대패했다.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사실상 송나라는 멸망했다. 그 시기 장세걸, 육수부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어린 황자를 데리고 나와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9년 그들은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에서 원나라 군에게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애산 전투).

 

충신의 귀감으로 칭해지던 문천상도 2년이상 각지에서 저항전을 계속했으나, 1278년에 원나라에 붙잡혀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을 읊고 1282년에 처형되었다.

 

남송이 멸망할 때 나라에 순사한 충신은 다른 왕조에 비해 대단히 많았으나, 원나라의 통치 아래에서 송나라의 유민으로써 살아남기를 계속한 사대부도 있어 문장궤범을 편찬한 사방득, 십팔사략을 저술한 증선지, 자치통감음주(자치통감의 주석서)을 저술한 호삼성 등, 문학 사학에서 이름을 남긴 송나라의 유민도 많았다.

 

문화

국제교역 및 농지개량등에 의해 고도의 문화을 쌓아 화중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절강성 용천애산의 청자 및 복건성 건애의 [건애]의 별명으로 알려진 [천목다완]에 최고의 명품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고, 또 일본과의 사이에서 일송교역이 왕성해 선종도 이때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는 등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송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송 고종
(宋高宗)
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
무문소인헌효황제
(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
武文昭仁憲孝皇帝)
조구(趙構) 건염(建炎) 1127년 ~ 1130년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
1127년 ~ 1162년
제2대 송 효종
(宋孝宗)
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
신무명성성효황제
(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
神武明聖成孝皇帝)
조선(趙昚) 융흥(隆興) 1163년 ~ 1164년
건도(乾道) 1165년 ~ 1173년
순희(淳熙) 1174년 ~ 1189년
1162년 ~ 1189년
제3대 송 광종
(宋光宗)
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
순무성철자효황제
(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
順武聖哲慈孝皇帝)
조돈(趙惇) 소희(紹熙) 1190년 ~ 1194년 1189년 ~ 1194년
제4대 송 영종
(宋寧宗)
법천비도순덕무공인문
철무성예공효황제
(法天備道純德茂功仁文
哲武聖睿恭孝皇帝)
조확(趙擴) 경원(慶元) 1195년 ~ 1201년
가태(嘉泰) 1201년 ~ 1205년
개희(開禧) 1205년 ~ 1208년
가정(嘉定) 1208년 ~ 1225년
1194년 ~ 1224년
제5대 송 이종
(宋理宗)
건도비덕대공부흥열문
인무성명안효황제
(建道備德大功復興烈文
仁武聖明安孝皇帝)
조윤(趙昀) 보경(寶慶) 1225년 ~ 1227년
소정(紹定) 1228년 ~ 1233년
단평(端平) 1234년 ~ 1236년
가희(嘉熙) 1237년 ~ 1240년
순우(淳祐) 1241년 ~ 1252년
보우(寶祐) 1253년 ~ 1258년
개경(開慶) 1259년
경정(景定) 1260년 ~ 1264년
1224년 ~ 1264년
제6대 송 도종
(宋度宗)
단문명무경효황제
(端文明武景孝皇帝)
조기(趙) 함순(咸淳) 1265년 ~ 1274년 1264년 ~ 1274년
제7대 송 공종
(宋恭宗)
효공의성황제
(孝恭懿聖皇帝)
(가국공<嘉國公>)
조현(趙顯) 덕우(德祐) 1275년 ~ 1276년 1274년 ~ 1276년
제8대 송 단종
(宋端宗)
유문소무민효황제
(裕文昭武愍孝皇帝)
조시(趙昰) 경염(景炎) 1277년 ~ 1278년 1276년 ~ 1278년
제9대 - 소황제
(少皇帝)
(유주<幼主>,
위왕<衛王>)
조병(趙昺) 상흥(祥興) 1279년 1278년 ~ 1279년

 

 

 

 

송 고종(宋高宗, 1107년 6월 12일 ~ 1187년 11월 9일)은 중국 남송(南宋)의 초대 황제이자 송(宋) 왕조의 제10대 황제(재위 : 1127년 ~ 1162년)이다. 휘는 조구(趙構)이고, 자는 덕기(德基). 시호는 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무문소인헌효황제(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武文昭仁憲孝皇帝)이다.

 

 

남송 고종

 

생애

휘종(徽宗)의 9남이자 흠종(欽宗)의 아우로, (金)이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開封)을 함락시키자 강남으로 도주하여 임안(臨安)에서 남송을 건국하고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하였다.

 

황족 조구 (훗날 고종)가 남쪽으로 옮겨 회화 이남의 땅 임안(현재의 항저우)으로 천도하여 재흥한 정권을 가리켜 남송이라고 부른다.

 

남송을 건국한 후 기울어진 국운을 부흥시키기 위해 군사 방면을 중시하여 발전시켰으며 시가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1162년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다. 금나라군은 대군이었으나, 해릉왕은 권력확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금나라의 황족중 한사람인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금나라의 유력자들은 속속 완안옹의 곁으로 모이게 되었고, 해릉왕은 군중에서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의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慎)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황위에서 물러난 고종은 1187년 사망했다.

 

 

 

진회(秦檜, 1090년 ~ 1155년)는 남송의 재상. 자는 회지(會之). 현재의 난징인 강녕(江寧) 출신. 금나라와의 외교 정책에 있어 화평을 진행하고, 강화를 주창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주전파인 악비 한세충 같은 군벌을 탄압하고, 그 후도 스스로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공포정치를 동반했기 때문에, 후세에 매국노(漢奸)로 지탄받았다.

 

1115년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그 후는 순조롭게 출세를 한다. 1127년 금나라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휘종, 흠종 황제를 끌고가는 정강의 변이 발생한다. 여기서 진회와 많은 신하들이 이때 포로 신분으로 같이 끌려가게 된다.

 

 

 

무릎꿇은 진회 부부의 동상(악왕묘)

 

정강의 변으로 화북지역을 점령한 금나라는 화북 통치를 위해 꼭두각시 국가인 초나라를 세울려고 했지만, 진회는 이것을 맹렬히 반대를 했기 때문에 금나라 수뇌부에 의해 북으로 압송되었다. 이 때 금나라의 중신이 달려와 밀약을 매고, 남송의 주전론(악비,한세충세력을 지칭.)을 억누르고 화친을 결정했다고 소문을 흘린 후에 풀려났다.

 

1130년, 진회는 금나라를 탈출해 가까스로 남송의 황제 고종에게 도착했다. 고종은 진회가 돌아온 것을 보고, 상당히 즐거워하며, 당일로 예부상서에 임명하고, 다음해에는 재상에 임명한다. 그 후 일시적으로 재상에서 파면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복귀하고 금나라와의 화평교섭 추진에 노력을 다했다.

 

정강의 변에 끌려갔던 진회 자신도 힘을 갖추지 못한 대책없는 주전론에 의한 피해자였으며, 악비를 비롯한 강경파 주전론자를 극도로 경계하였다.

 

당시는 금과의 교전에서 공을 세운 악비 등의 군벌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고, 주화파의 진회를 비판했다. 이에 진회는 군벌 간의 알력을 이용하여, 군벌의 힘을 견제하고, 그 군대를 중앙군에 편입하여 주전파들을 숙청하였다.

 

1141년, 화친을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를 탄압하고 관직으로부터 추방하였다. 특히 당시의 구국의 영웅이라고 일컬어 졌던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한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처형의 이유를 한세충에게 설명하였다. 이것이 후에 그 평가를 현저하게 낮추는 이유가 된다. 주전파를 억눌렀던 진회는 다음 해 1142년에 드디어 금과의 화친을 추진시킨다. 그러나, 이 화친은 양국의 역관계를 반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화친조약으로 황하 강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게 양보했을뿐만 아닌 매년 25만냥의 은과 25만필의 비단을 조공바쳐야했고, 남송의 황제가 금의 황제한테 '신하의 예'를 취한다는것이 화친조약의 주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그 후에 진회는 '매국노'(漢奸)으로 지탄받았고, 그후에도 진회에 대한 비난은 그치지 않았지만, 남송의 재상 진회는 그러한 반대파에 대해서는 철저한 탄압을 하는 공포정치를 펼쳐 반대파에 대한 강경 탄압을 한다.

 

1155년, 재상에 있은 지 20년 만에 66세로 사망했다. 사망하자 신왕(申王)으로 추증하였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206년, 남송(南宋) 영종(寧宗) 개희(開喜)2년, 왕작(王爵)이 추탈되었고 시호를 유추(謬醜)라고 고쳤다.

 

1208년, 남송(南宋) 영종(寧宗) 가정(嘉定)원년, 사미원(史彌遠)의 주청에 의하여 왕작과 시호를 회복시켰다.

 

평가

진회는 사후,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당시의 상황에서 군사력이 약한 남송의 현실적인 처세였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악비를 숙청하여 처형시킨 행위가 후세에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회 자신도 악비를 죽인 것에 대하여는 상당히 번민하였지만 아내의 재촉을 받고 죽일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악비를 죽인 진회 부부는 아직도 악왕묘에 포박된 채로 꿇어 앉아서 전시되고 있다. 옛날 중국에는 이 상에 침을 뱉거나 차는 습관이 있었다.(지금은 여기에 침을 뱉거나, 차서는 안된다고 붙어 있다.)

 

항저우에는 밀가루 반죽을 길게 하여 진회 부부로 여기고, 기름으로 튀긴 음식을 유조라고 한다. 남송이 망한 후도 악비가 영웅 시 되었으며, 그에 반해 진회의 악명은 점점 높아져 매국노의 대명사로서 다루어졌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를 쓰지 않는다.

2000년대에 들어서, 중국에서 외부 민족의 역사를 끌어안아 중국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는 역사공정 작업이 활발해 짐에 따라, 송을 정복한 금나라 역시 중국 역사의 일부로 인정되면서, 지금까지의 평가와는 반대로 대항자 악비가 절하되고, 진회는 유연한 외교로 국가를 대환란에서 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예전과 크게 차이가 없으며, 악왕묘 역시 그대로 유지되는 중이다.

 

 

방랍의 난(方臘之亂)은 북송 말기 휘종 황제 선화 2년인 1120년에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자 이에 반발하여 방랍이 농민세력을 규합하여 목주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원인

1100년 2월 형 철종이 아들이 없이 승하하자, 제8대 황제로 즉위한 송 휘종은 서화 등의 예술에 뛰어난 솜씨를 가졌고, 예술에 관한 식견도 탁월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지나친 그의 집착은 정도가 지나쳐서 나랏일에 소홀히 하여 훗날 금나라로 붙잡혀가는 계기가 된다.

 

휘종은 각종 예술품을 수집하기 위해 항저우(杭州)에 명금국(明金局)이라는 정부기관을 설치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기화요초를 수집하여 대궐을 장식하도록 한 '화석강'(花石綱)을 실행하고 이를 주관하는 조정 기관인 응봉국(應奉局)을 설치하였다.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빼어난 화석을 수도 개봉(開封)으로 실어오게 했다.

 

과도한 예술활동으로 말미암아 필요한 예산을 편법으로 수취하기도 했다. 토지를 측량할 때 기존보다도 짧은 길이를 이용하고, 그것에 의해 발생한 잉여 논밭을 강제적으로 국고에 편입하거나, 매매계약서가 애매한 토지를 몰수하는 등 무리한 수단도 취했다.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백성들의 불만이 커져 1120년 방랍(方臘)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과정

1120년 방랍은 반란을 일으키고,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개칭하고, 독립적인 국가수립을 지향하여 항주, 목주 등을 공격하였다. 이어 안휘와 강서 등으로 확대되었고, 난을 일으킨 지 10일 만에 10만여 명의 농민들이 가담하게 되었다.

결과

 

악비

 

이에 분노한 휘종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동관의 군사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백성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휘종은 기석 수집을 중지하고, 강온양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방랍의 난은 1121년에 평정되었지만, 결국 진압 과정에서 협력한 백성까지 300만명을 도륙함으로써 국력의 약화를 불러왔다. 결국 1127년 금나라에 의해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과 아들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가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정강의 변(靖康之變)

 

휘종의 9남이자 흠종의 아우인, 조구(趙構)는 난징으로 도망쳐와 남송을 세우고 고종이 된다. 이 무렵 방랍의 난을 진압했던 한세충과 소작농 출신의 악비 금나라에 저항하는 의용군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관련 작품

 

수호전의 노지심

  • 고전 소설 수호전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며, 송강 등의 일부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 1부에서도 이 사건을 배경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3편에서도 명교의 초대 교주로서 방랍을 묘사한다.

 

한세충(韓世忠)(1088~1151), 자는 양신(良臣)으로 산시 성 (섬서성) 옌안(延安)사람이다. 남송 때 방랍의 난을 진압하고, 금에 대항한 명장이다. 한세충은 악비(岳飛)와 유기(劉錡) 등과 함께 금군의 침입을 막아 송조(宋朝)의 명맥을 유지하고 없어진 영토를 회복하려고 힘쓴 무장이다.

 

생애

산시 성 옌안에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마술(馬術)에 뛰어나고, 힘세어 무예에 통달하였다. 종군 하고 나서는 공을 거듭하여 장군 왕연(王淵)의 인정을 받아 빠르게 출세하였다.

 

송사(宋史)에 의(義)롭고, 재물을 경시하였으며, 엄중하게 군을 지켰다. 병졸들과 고락을 같이하여 군사를 아끼면서도 규율은 엄중하여 민중으로부터의 지지도 두터웠다'고 전한다.

 

방랍의 난

송 휘종 때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분투하여 진압하였고, 이 공을 인정받아 승절랑(承節朗)으로 승진했다. 환관을 주살하고 고종 황제에 퇴위를 강요한 ‘명수(明受)의 난’ 때도 항저우 임안부(臨安府)를 반란군을 물리치고, 황제를 구출하여 명성을 떨친다.

 

금나라의 침공

금나라가 남쪽으로 침공을 해오자, 군대를 이끌고 끊임없이 저항하여 황천탕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다. 그는 거듭된 전투에서 승리를 하여 추밀사(樞密使), 함안군왕(咸安郡王), 진남절도사(鎭南節度使), 무안절도사(武安節度使) 등을 겸임하며 고분군투하였다.

 

은둔

악비가 주화파 재상 진회(秦檜)에 의해 투옥되자, 그는 구명을 위해 진회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며 악비를 처형한 이유를 물었으나, 진회는 막수유(莫須有,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답하였고, 한세충은 그런 말로는 천하를 납득시킬 수 없다(莫須有三字,何以服天下)리고 하면서 물러났다.

 

 

악비(岳飛, 1103년 3월 17일  - 1142년 1월 27일)는 금나라 여진족 군대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 초기의 장군이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악비(岳飛)
1103년 ~ 11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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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악묘의 악비의 동상
별명 鵬舉(字), 忠武
태어난 곳 하북, 상주(相州) 탕음현(湯陰)
죽은 곳 임안부(臨安府)
복무 남송
최종 계급 軍事統帥
주요 참전
전투/전쟁
금나라와의 전쟁

 

 

출생과 어린시절

그는 가난한 농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현재의 허난 성(河南) 안양시(安阳市) 탕음현(湯陰縣)이다.

 

태어나자마자, 황하가 범람해서 태어난 고향이 파괴되고, 그의 부친인 악화(岳和, 1054년-1122년?)는 홍수에 익사하여, 악비와 그의 모친인 요부인(姚夫人)은 허베이 성에 정착했다. 야사로는 악비의 아버지는 홍수에서 살아남아서 훨씬 후에까지 생존했다고 한다. 8살의 악비는 들판에서 악화와 만나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악비는 1122년 군에 입대한다. 부친의 사망과 2년의 애도기간으로 인해, 1124년까지 군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시절에, 악비는 매일밤 잠들기 전에 손자병법을 읽는 것으로써 군사전략을 익혔다. 이 지식은 그가 후일 장군으로서 활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무술 훈련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을 새기는 모친

 

그의 첫 무술 스승은 그 고장에서 창술과 검술 사범으로 유명한 진광(陳廣)이었다. 그는 악비가 11세였을 때부터 창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주(孙遒)가 저술한 악왕사(鄂王事)에서는 진광은 악비의 외조부 요대옹(姚大翁)에 의해 고용되었다고 한다. 성년이 되었을 때, 그의 두번째 무술 스승은 궁술을 가르친 주동(周同)이었다. 송사(宋史) 악비전(嶽飛傳)에서는 악비에 대해서 300척(90m)까지 활을 쏠 수 있고, 노(弩)를 8석(石)까지 감당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나라와 전쟁

 

무릎꿇은 진회 부부의 상

 

 

1122년 개봉을 방어하고 있던, 종척을 따라 의용군으로 참가 했다. 그의 뛰어난 무용은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전공을 세우고, 정강의 변으로 남송이 들어서자 우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 성(湖北省)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백성들이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군단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 라는 뜻의 '악가군'이라 불리며 남송 제일의 최정예 군단으로 꼽혔다.

 

악가군은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등의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 강(淮河), 친링산맥(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들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소속 병사들을 모두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악비의 최후

1141년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양자 악운과 악가군의 최고 간부인 장헌과 함께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 악운의 나이는 23세 였다.

 

1155년 진회가 죽고 난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고,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1204년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어 항주 서호 부근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복권

정치적인 이유에서 주살당한 악비는 1178년에 복권되어, 1204년 악왕에 추대되게 되어 시후 근처에 악왕묘(岳王廟)가 건립되었다. 악비의 등에는 그의 어머니에 의해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악왕묘에도 진충보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평가

지금까지 악비는 관우와 함께 민간에서 무신으로 대우를 받을만큼 구국의 영웅으로 지지를 받아왔다.

하지만 한족이 아니라 중국을 다스렸던 모든 민족을 끌어안으려는 중국의 역사 공정에 의해 다시 평가절하되고 있다. 금나라의 역사도 곧 중국의 역사라는 역사 인식으로 인해, 금나라에 대항했던 악비는 민중의 지지와는 달리 국가적으로는 평가가 난처해지고 있다.

 

 

 

송강(宋江, ? ~ ?)은 북송 말의 1121년에 현재의 산둥 성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중국의 사대기서 중의 하나인 수호전의 주인공이다.

 

실제 인물

14세기에 편찬된 《송사》(宋史)에 따르면, 송강이 거느리는 반란군은 황하 북쪽의 하삭에서 봉기하여, 1121년에 회남의 여러 지방을 휩쓴 후 관군의 토벌을 받아 경동(북송의 수도 개봉의 동쪽으로 현재의 산둥 성 서부), 장강 북안으로 나아가 열 개의 군을 공략했다.

 

송강의 세력을 무서워한 북송 조정은 후몽(侯蒙)의 건의에 따라 송강의 죄를 사하고 장군 직위를 주어서 당시 강남을 석권하고 있다 방랍의 반란군을 토벌시키려고 했지만, 후몽의 죽음으로 실현하지 않았다. 그 후 산동 반도의 해주를 침공할 때, 지주의 장숙야에 패배하고 항복했다.

 

송사(宋史)에 기록된 후몽의 상주문에는 송강은 36인으로 제위를 횡행하고, 수만 명 있어도 대항할 수 없을 만큼 신출귀몰하다. 송강의 재능이 뛰어난 것임에 틀림없다고 되어 있다.

 

송사와는 다른 사료에서는 송강 반란의 진압된 후에 방랍 토벌군의 안에 송강이라고 한 이름의 장군이 있던 것이 명백하지만, 이 인물이 송사에 기록된 적장 송강과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수호전(水滸傳)은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로, 시내암(施耐庵)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북송(北宋) 말인 선화(宣和) 연간, 송강(宋江) 이하 108명의 호걸들로 회집된 군도(群盜)가 산둥의 양산박(梁山泊)을 근거지로 관(官)과 맞서는 이야기이다. 108명의 전력(前歷)은 하급관리·무관·시골 학자·농어민·상인·도박꾼·도둑 등 다채롭기 짝이 없고, 이들이 각각 정정당당한, 또는 불령(不逞)한 여러 가지 죄상 때문에 속속 양산박에 흘러들어온 경위가 전반이며, 후반은 양산박을 진압 못한 조정의 귀순책에 속아서 관군(官軍)으로 둔갑, 북방의 (遼)를 치고, 다시 강남의 방랍(方臘)의 난을 평정하다가 전사·이산되고 그 중 남은 거물들은 간신에게 독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송강의 난은 역사상의 사실이며, <송사(宋史)> 등 기타에 약간의 기록이 있으나 전설화되어 남송·의 2대를 통해서 강담이나 연극의 재료가 되었다. 그 단계를 볼 수 있는 사료나 작품이 얼마간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전후 2집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강석(講釋) 대본식의 전기적(前期的)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북송 멸망 전후의 애사(哀史)를 엮은 속에 '송강 36인'의 모반의 전말(顚末)이 이미 한 편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형태로 삽입되어 있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明) 초에(1400년 전후), 시내암의 손으로 독본소설로 꾸며져서, 처음에는 사본으로 유포되었다고 생각되나 다시 정리되어 가정 연간(1522-1566)에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 100회의 간행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만력(萬曆, 1573년-1619년)에 걸쳐서는 장편소설의 황금시대로서 어느 것이나 (宋)·(元) 이래의 민중연예의 정화를 전제로 하는 만큼, 풍부한 오락성과 동시에 정통문학인 시문(詩文)에 담지 못했던 왕성한 상상이나 적나라한 인간 관찰이 충만되어 있다. 작자는 대부분 무명의 하급 문인으로서, 전대의 연예장(演藝場) 고용작가의 의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수호'는 그러하여 어조의 강석 기분은 아주 농후하고 쾌조(快調)하다. 이 시기의 걸작인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는 모두가 세계적 소설 유산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족한 것으로서, 후세에 이것을 4대기서(四大奇書)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호전>이 후세에 끼친 영향은 무수한 무협 소설의 원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소설 그 자체의 규범이 된 느낌이 있고, 나아가서 소설의 울타리를 넘어 <삼국지>와 함께 서민의 역사 지식과 인간학의 보고(寶庫)이기도 했다. 또한 역대의 도둑·모반인은 다투어 양산박 건아(建兒)와 같은 별명을 자칭하였고, 관은 관대로 '도둑을 가르치는' 책이라 하여 연이어 압박을 가했다. 따라서 혁명 후의 성망(聲望)은 반대로 극히 높은데, 주제인 반관(反官) 정신은 원래 회도(誨盜)라든지 혁명으로만 부를 수 없는 통쾌한 불령감(不逞感)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100회본 후에 풍부한 운문을 삭제하고 후반의 줄거리를 늘린 120회본이 나왔으나, 문체를 더욱 철저히 산문화시키고 전반의 양산박 세력이 모이는 데까지에서 끊어 버린 김성탄(金聖歎)의 70회본이 여러 책을 압도했다.

 

 

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은 김용 1957년 작품이다. 국내에는 고려원에서 영웅문이라는 작품으로 소개가 되었고, 후에 김영사에서 사조영웅전으로 다시 소개가 되었다.

 

이 사조영웅전은 후에 드라마, 게임과 영화 등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국각량 감독의 사조영웅전 2004를 영화화하였고, 후에도 계속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징기스칸

 

 

가흥의 남호의 야경

 

 

줄거리

시대적인 배경은 이야기는 휘종 흠종 금나라의 포로로 잡혀간 정강의 변 이후 남송이 세워지고 주전파 악비 진회에 의해 살해를 당한 후 몇 세대를 지난 남송과 금나라의 남북 정립, 몽골의 성립과 송나라의 멸망에 이르기까지가 사조 영웅전의 시대적 배경이다.

지리적인 배경은 당시 남송의 수도였던 임안(지금의 항저우)의 근처의 소흥의 우가촌에서부터 시작된다.

 

소흥의 우가촌에는 금나라에 맞서 싸운 양씨와 곽씨가 각각 아들을 임신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전진파의 도사 장춘자 구처기가 우가촌을 지나가다가 이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금나라와 부패한 남송의 조정에 쫓기게 되고, 곽씨의 부인 이씨와 양씨의 부인 포씨는 각각 외진 곳에서 주인공 곽정과 양강을 낳게 된다.

 

양씨부인과 곽씨 부인을 납치한 범인을 추격하던 구처기는 가흥 남호 근처의 취선루에서 오해로 인해 강남칠협과 부딪치게 되고, 화해를 하면서 각각 곽정과 양강의 스승이 되기로 한다.

 

한편 양씨의 부인 포석약을 납치한 금나라의 왕자 완안홍열은 포석약을 데리고 금나라의 수도로 가고, 곽씨의 부인 이평은 강남칠협에 쫓기는 단천덕을 따라 몽골에서 곽정을 낳아 기르게 된다. 이로서 양강은 금나라의 왕자로 성장하게 되고, 곽정은 의협심이 높은 청년으로 자라나게 된다.

주요 인물

  • 곽정: 남자주인공

어려서부터 징기스칸과 함께 생활하며 마침내는 몽고의 대병을 통솔 하여 서정(西征)에 나선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김용의 붓 끝에서 창조되는 인물의 처리는 자 유 자재로 표현되며 어떤 때는 심지어 역사적 인물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배치 는 김용이 그의 작품 가운데 서술해 내는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작자 자신이 깊은 연구와 소 감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독자들이 김용의 작품을 읽는 동안 역사적 사실과 창작의 조화 가운데 감정이나 이론이 잘 융합되어 전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황용: 여자주인공
  • 양강: 남자주인공
  • 구처기: 실존인물로 양강의 스승이자 전진칠자의 한 명
  • 강남칠협: 가진악, 주총, 한소영, 한구보 등 곽정의 스승이 된다.
  • 황약사: 절대 고수를 일컫는 남제북개 / 동사서독 중 동사(東邪)로 황용의 아버지
  • 구양봉: 절대 고수를 일컫는 서독(西毒)으로 주요 갈등의 핵심
  • 홍칠공: 남제북개의 북개(北丐)로 개방의 방주. 곽정과 황용의 스승이 된다.
  • 단황야: 남제북개의 남제(南帝)로 대리국의 국왕이었다가 출가하여 일등대사가 된다.
  • 징기스칸: 몽골의 황제로 곽정에게 시련과 성장을 주는 실존 인물이다.

지리적 배경

 

현재의 저장 성 행정구역

 

 

항저우 비래봉의 불상

 

 

세계자연유산 화산

 

 

동정호가 보이는 악양루

 

김용의 태생이 이곳 항저우여서 그런 지 실제로 사건이 발생하는 모든 공간의 대부분이 실존하고 있다.

이야기의 첫부분이 전개되는 장소로 주인공의 부친, 곽소천과 양가창법의 후예 양철심이 전진파 도사 구처기를 만나 사건이 갈등이 시작되는 곳이다. 완안열도 구처기를 습격하다가 금나라의 왕자 양철심의 부인 포석약을 이곳에서 만난다.
구처기를 피해, 곽소천의 부인 이평을 납치한 단천덕이 추적을 피해 가흥으로 도망온다. 가흥의 남호에서 구처기는 강남칠협과 오해로 싸우지만, 오해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되고, 임신한 곽부인과 양부인의 자손들의 스승이 되어 18년 후 이곳에서 다시 겨루기로 한다. 나중에 완안열의 왕자로 살아가는 양강 패거리와 남호의 연우루에서 겨루기로 약속한다.
구지신개 홍칠공이 독수를 당하고, 황궁의 음식을 훔쳐먹기 위해 침투하였다가 악비의 병법서를 두고 치열한 격투를 벌이는 무대이다.
서호의 단교 (단교잔설) 앞 주막에서 남송 효종의 실정을 비웃고, 영은사 앞의 비래봉 취미정(翠微亭)에서 한세충 악비의 기개에 감탄한다.
동사 황약사와 그의 딸이자, 여주인공인 황용의 거처로, 주산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기화요초와 병법에 의한 정원 배치 등으로 외부의 침략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이곳에서 노완동 주백통을 만나 형제의 결의를 하며, 구양공자와 황용을 두고 사위 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또한 주인공 곽정의 스승인 강남칠협도 가진악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구양봉의 독수로 세상을 마친다.
태호에서 뱃놀이를 하며, 범려 서시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육장주와 육관영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머물다 금나라 사신을 습격하는 육부자를 보고, 황약사의 옛제자임을 알게 된다. 구천인이 처음 등장하는 배경이다.
악양루에서 범중엄의 시를 논하다가 구천인을 만나 싸우고, 개방의 분란에 말려 섭심술에 걸려 동정호의 군산으로 납치된다. 군산에서 새로운 방주를 선출하는 개방대회를 개최하며, 양강의 계략에 말려 타구진으로 당할 뻔 한다.
두차례나 화친을 위해 파견한 몽골의 사신을 죽이고 모욕한 호라즘의 무하마드 왕을 정복하기 중앙아시아 정벌에 나선다. 당시 사마르칸트는 호라즘의 수도였다. 이곳에서 천호를 맡은 곽정은 구양봉을 세 차례 살려주며, 사마르칸트 정복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섬서성 서안 근처에 있는 오악 중 가장 험산 산으로 동사서독, 남제북개의 절대 고수들의 최고를 위한 투쟁이 전재된다. 곽정도 이곳에서 의를 깨닫고, 몽골에 투쟁을 하며 이미 가세가 기운 남송를 위해 징기스칸의 군대와 싸우게 된다.
 

평가

사조영웅전은 장르가 무협소설이면서 너무나 잘 쓰여져서 평가가 애매한 소설이다. 홍루몽의 홍학 등을 따서 김학이라고 부를 정도로 비평과 찬사를 받는 소설이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의 외국의 대학에서 중국어 보조교재로 사용할 정도이며, 중국에서도 대학 교재로 적합한 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무협소설임에도 불구하여 대하역사소설의 평가를 받는 것은 그 역사적 배경이나 지리적 배경, 그리고 인물적인 배경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김용소설에 매료되는 이유

 

첫째,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 묘사되는 것은 보편적인 인성(人性)이다. 김용은 이 인성에 대한 이해가 깊다. 그의 붓 끝에서 창조되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중국 문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수호전(水滸傳)>의 인물 묘사가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러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인물과 김용의 작품 가운데 나오는 인물을 비교한다면 후자가 더 나 은 편이다. 현실 생활 가운데 억압되고 노출되지 않은 인성을 김용은 소설 가운데서 생생하고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를 통쾌하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둘째, 정절(情節)이 다채롭다.

김용의 작품은 스케일이 크고 기세가 힘차며 세련되고 원숙하다. 구조,순서,배치,전절(轉折) 등이 큰 강에 바람이 일지 않는데도 물결이 출렁이듯 하고, 파란하늘에 무심한 흰 구름이 생 겼다가는 어느덧 사라지듯 신출귀몰하여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세째, 문장이 아름답다.

김용의 문필은 사람을 끌어 잡아당기는 자력이 풍부하다. 부드럽고 우아한 가운데 행운유수 (行雲流水)와 같은 재미가 넘쳐 흐른다. 한번 그의 작품을 손에 잡기만 하면 놓을 줄을 모른 다. 요컨대 김용의 소설은 서사나 사경(寫景)은 물론 인물의 묘사에도 정감이 넘쳐 표현할 수 없는 마력으로 독자를 작품속의 분위기로 끌어들여 몰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가 쓴 작품의 재미는 영원히 무궁 무진할 뿐만 아니라 영원 불멸의 문화적 가치를 구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중국 문학사상 찬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소설 사의 금자탑인 홍루몽(紅樓夢)을 연구하는 학문을 홍학(紅學)이라 하듯이, 김용의 작품을 연 구하는 것을 김학(金學)이라고까지 부르게끔 만들었다. 지금 대만에서 발간된 김학 연구 총 서(金學硏究叢書)만도 18권에 이르고 있다. 김용의 작품은 모두 14부(部) 36권으로 되어 있 다. 이 14부의 소설(그 중 단편 소설이 2편 있다)은 각 부마다 나름대로의 품격과 특색을 가지 고 있다.

 

다른 매체로의 각색

  • 1958~1959년 영화 홍콩 아미영편공사 사조영웅전 (1집~2집) 호붕 감독/ 리청,매기,조달화,용소의,석견,이향금,당가,원소전 주연
  • 1976년 드라마 홍콩 가예전시 (CTV) 사조영웅전 - 소생 감독 백표,미설 주연
  • 1977년~1981년 영화 쇼 브라더스 사조영웅전 (1집~3집) - 장철 감독 / 부성,념뉴,뉴뉴,혜영홍,곡봉,적룡,정리 주연
  • 1983년 홍콩 TVB 사조영웅전 - 왕천림 감독 / 황일화,옹미령,묘교위,양반반 주연
  • 1988년 대만 CTV 사조영웅전- 진옥련,황문호,구숙의,반광빈 주연
  • 1994년 홍콩 TVB 사조영웅전 (대사조영웅문) - 이첨승 감독 / 장지림,주인,나가량,관보혜 주연
  • 2003년 중국 대륙판 사조영웅전 - 국각량,조전,우민 감독 / 이아붕,주걸,주신,장근근 주연
  • 2008년 중국 대륙판 사조영웅전 - 이국립 감독 / 호가,임의신,서금강,양가인,주해미 주연

 

 

송 효종(宋 孝宗, 1127년 ~ 1194년)은 남송 2대 황제(재위 : 1162년 ~ 1189년). 휘는 조선(趙昚). 시호는 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신무명성성효황제(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神武明聖成孝皇帝)이다.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다. 금나라군은 대군이었으나, 해릉왕은 권력확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금나라의 황족중 한사람인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금나라의 유력자들은 속속 완안옹의 곁으로 모이게 되었고, 해릉왕은 군중에서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의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慎)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금의 세종, 남송의 효종은 각자가 속한 왕조에서 가장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인물들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동시대에 2명의 명군이 남쪽과 북쪽에 나타나게 되어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다.

 

 

송 광종(宋 光宗, 1147년 ~ 1200년)은 남송의 3대 황제(재위 : 1189년 ~ 1194년)였다. 휘는 조돈(趙惇). 시호는 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순무성철자효황제(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順武聖哲慈孝皇帝). 송 효종의 아들이다.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다. 광종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우둔하였기에 황후 이씨의 말밖에는 듣지않았다. 황제에 불만을 품은 재상 조여우(趙汝愚), 한탁주(韓侂胄)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했다.

1194년 영종(宋寧宗)이 즉위하였다.

 

 

송 영종(宋 寧宗, 1168년 ~ 1224년)은 남송의 제4대 황제(재위 : 1194년 ~ 1224년). 휘는 조확(趙擴). 시호는 법천비도순덕무공인문철무성예공효황제(法天備道純德茂功仁文哲武聖睿恭孝皇帝). 광종의 둘째아들이다.

 

1194년 황제에 불만을 품은 재상 조여우(趙汝愚), 한탁주(韓侂胄)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했다. 그리고 영종(宋寧宗)이 즉위하였다. 한탁주는 이 공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들은 한탁주을 멀리했다.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들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는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편에 섰던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 왕난(王藺), 주희(朱熹), 팽귀년(彭龜年)등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 다음 해에는 주희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 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慶元僞學之禁). 이 일련의 사건을 경원의 당금(慶元之黨禁)이라 불렀다.

 

1206년 테무진이 몽골을 통일 하고 칭기즈 칸의 칭호를 받았다. 칭기즈는 몽골어로 만물의 지배자 또는 강건한 지배자를 뜻한다.

1207년 한탁주를 살해한 사미원이 이번에 권력을 장악하고 그후 26년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 시기 북쪽의 몽골고원에서는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1207년 몽골족은 북서부 중국과 티벳을 지배하는 서하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은 1210년 에 서하의 왕이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기간 동안 위구르족 또한 몽골족에게 항복하였다.

 

1211년 몽골은 대회의를 가진 후 금나라를 침공하였다.

 

1219년 1222년 몽골족은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중앙 아시아를 침략하여 호라즘 제국을 멸망시켰다.

 

영종은 9명의 아들 중 趙竑을 후계자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미원(史弥遠)을 배재하여 1224년 영종이 위급해지자 조윤(趙昀)이 태자로하여 황제로 즉위하였다.

 

 

한탁주(韓侂胄, 1152년 ~ 1207년)는 남송의 관리이며, 하남 안양의 사람. 자는 절부(節夫). 할아버지는 한기(韓琦), 어머니는 고종의 황후인 오황후의 여동생이다.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다. 광종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우둔하였기에 황후 이씨의 말밖에는 듣지않았다. 황제에 불만을 품은 재상 조여우(趙汝愚), 한탁주(韓侂胄)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했다. 한탁주는 이 공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들은 한탁주을 멀리했다.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들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1195년(경원 원년) 조여우는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경원 3년에는 조여우편에 섰던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 왕난(王藺), 주희(朱熹), 팽귀년(彭龜年)등 59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 다음 해에는 주희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 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慶元僞學之禁). 이 일련의 사건을 경원의 당금(慶元之黨禁)이라 불렀다.

 

한탁주는 그후 10년 동안 권력을 유지했으나, 뒤를 보호해 주던 황후와 황태후가 차례로 붕어하자, 권력이 서서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때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대신)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을 맺었다.

 

한탁주를 살해한 사미원이 이번에 권력을 장악하고 그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사미원(史弥遠, 1164년 ~ 1233년)은 남송의 재상이였다.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대신)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을 맺었다.

 

한탁주을 살해한 사미원이 이번에 권력을 장악하고 그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 시기 북쪽의 몽골 고원에서는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영종은 9명의 아들 중 趙竑을 후계자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미원(史弥遠)을 배재하여 1224년 영종이 위급해지자 조윤(趙昀)이 태자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사미원이 사망한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송 이종(宋 理宗, 1205년 ~ 1264년)은 남송의 5대 황제(재위 : 1224년 ~ 1264년). 휘는 조윤(趙昀). 시호는 건도비덕대공복흥열문인무성명안효황제(建道備德大功復興烈文仁武聖明安孝皇帝)이다.

 

영종은 9명의 아들 중 趙竑을 후계자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미원(史弥遠)을 배재하여 1224년 영종이 위급해지자 조윤(趙昀)이 태자로 황제에 즉위했다.

 

그 시기 북쪽의 몽골고원에서는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했다. 사미원이 사망한 1233년 몽골 제국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 후 몽골은 일시 북쪽으로 물러나고, 그 뒤를 송나라 군이 북상하여 낙양과 카이펑(개봉)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격노한 몽골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1259년(개경 원년)에 몽골이 남송에 침공해 왔다. 허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맹홍의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윽고 1260년 몽케 칸의 친정 군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몽케는 이 원정 도중에 병사한다. 이때 쿠빌라이가 공격한 무창에 원군으로 온 가사도는 이들을 퇴각시켰다.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군대를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된다.

 

이 때 가사도가 대승한 말을 할 수 있던 것은, 몽골의 황제 몽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가사도와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가사도가 재상으로 취임한 다음, 1264년(경정 5년)에는 이종이 붕어하고 황제 도종이 즉위했다.

 

 

가사도(賈似道, 1213년 - 1275년)는 중국의 남송 이종 때 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누이가 남송의 황제 이종의 왕후였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가사도는 집착적일만큼 미술이나 예술품 수집광이었고, 그 방면에 통달하였다. 예술에 대한 안목뿐만 아니라 머리도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황제에게 중용되어, 1246년 국경 수비대장에 취임을 한다.

 

1259년(개경 원년)에 몽골이 남송에 침공해 왔다.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군대를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된다. 이 때 가사도가 대승한 말을 할 수 있던 것은, 몽골의 황제 몽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가사도와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가사도가 재상으로 취임한 다음, 1264년(경정 5년)에는 이종이 붕어하고 어리석은 황제 도종이 즉위했다. 이 때문에 남송의 실권은 완전하게 가사도의 것이 되고, 가사도는 재상과 태사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독점함으로써 독재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가사도는 스스로의 독재권 강화를 위해, 우선 자신에게 반대한 일파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또한 몽골의 침공이 거세졌기 때문에, 남송에 여문환 등의 군벌 세력이 커지고 있었지만, 가사도는 자신의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군인을 중앙으로부터 격리시키고, 몽골 군이 침공해도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고도 말한다. 또 상원(과거시험의 수석 급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애국심과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던 문천상이 자신에게 영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요직에서 밀어내었다.

 

업적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측량이나 통화개혁, 나아가서는 공전법을 채용하거나, 전리품을 착복하거나, 전비를 속였던 장군을 처벌하는 등으로, 남송 전시 경제를 긴축하고, 학생을 중용하고 남송의 문화적 발전을 도모한 업적 등 일부에 있어서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송 도종(宋 度宗, 1240년 ~ 1274년)은 남송의 제6대 황제(재위 : 1264년 ~ 1274년). 휘는 조기(趙禥). 시호는 단문명무경효황제(端文明武景孝皇帝)이다.

 

가사도가 재상으로 취임한 다음, 1264년(경정 5년)에는 이종이 붕어하고 도종이 즉위했다. 사실상 가사도의 괴뢰황제였다.

몽골을 격퇴한 영웅으로써 환영받게 된 가사도는 그 인기에 힘입어 재상이 되어, 전권을 임명받았다. 가사도는 교묘한 정치수완을 발휘하고, 공전법 등 농정개혁에 힘쓰는 한편, 인기를 얻는 것도 잊지 않아 그후 15년에 걸쳐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몽골 평원에서 아리크부케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빌라이가 다시 침공을 개시하여, 남송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국토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던 양양(襄陽)을 1268년부터 1273년까지 5년간에 걸친 포위전 끝에 함락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졌고, 가사도는 주위의 목소리에 몽골과 싸우기 위해 출발했으나 대패했다.

 

 

송 공제(宋 恭帝, 1270년 ~ 1323년?)는 남송 제 7대 황제(재위 : 1274년 ~ 1276년). 휘는 조현(趙顯). 시호는 효공의성황제(孝恭懿聖皇帝)이다.

 

1274년 몽골군은 5년간 공격으로 양양을 함락시킨 후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다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이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각지에서 봉괴되고 있었다.

 

결국 쿠빌라이 원나라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항저우)을 함락시키고, 남송 황제 공제(恭帝)을 항복시켰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들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시기 남송의 저항군 장세걸, 육수부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어린 황자를 데리고 나와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도망쳐 마지막 항전을 계속하였다.

 

 

양양 공방전

양양 공방전
날짜 1267년~1273년
장소 남송 양양성
결과 몽골의 승리, 남송의 멸망을 불러옴
교전국
몽골 남송
지휘관
아주
사천택
알리벡-병참
마르 유프나-병참
여문환
여문덕
장한영
범문호
병력
10만+?? 여문덕휘하의 사병 몇만(?)+남송 정부군 수군 10만
피해 상황
불문 약 10만

배경

당시 몽골에서는 막 계승전쟁이 끝나고 쿠빌라이가 집권한 상태이며, 남송제국정부는 가사도의 농간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쿠빌라이는 바얀 수베에테이의 손자 아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아주를 총대장으로 하여 10만대군으로 번성, 양양성을 포위하게 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과및 영향

양양성의 함락으로 남송의 대몽항쟁전선은 사실상 무너지면서 결국은 파죽지세로 성을 함락시키는 몽골군에 남송정부가 항복을 하면서 남송은 멸망하고 처음으로 이민족이 중국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남송 망명정부도 결국은 해상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송 단종(宋 端宗, 1269년 ~ 1278년)은 남송의 제 8대 황제(재위 : 1276년 ~ 1278년). 휘는 조시(趙昰). 시호는 유문소무민효황제(裕文昭武愍孝皇帝). 제 6대 황제 도종의 아들. 제 7대 공제의 형이다.

 

몽골의 장군 바얀에게 수도 임안을 점령 당하면서 장세걸, 육수부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어린 황자를 데리고 나와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6년에 원과 강화를 맺기 위해 바얀의 진중으로 갔다가 바얀이 문천상의 기량을 두려워하는 바람에 갇혀 버렸다. 그 사이에 남송이 멸망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포로로 잡혀 북송되던 도중 탈출하여 도종의 장자 익왕을 받들고 잔병을 모아 싸운다. 1278년에 그렇게 싸우던 도중 오파령 전투에서 패하여 장홍범에게 체포되고 만다.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 및 진선중등 일부 남송의 유신들은 임안함락과 동시에 남송의 황자를 황제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원나라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는 한편, 천주(泉州)의 실력자로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포수경을 포섭하여 화남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서서히 강남에서 광둥 성으로 밀려난 옛 남송군은 선단으로 해상을 표류하던 중, 저항을 계속하여 현재의 홍콩 주변에 있던 애산이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섬에 요새와 행궁(行宮)을 구축하고 철저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문천상(文天祥, Wén Tiān xiáng, 1236년 ~ 1282년)은 남송 최후의 재상이자 중국에서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옥중에서 쓴 정기가로 유명하다.

 

1236년에 남송에서 태어나 1255년에 진사에 수석로 합격하였다. 1259년, 남송이 몽고군의 침입을 받으면서 수도를 옮기려하자 이를 반대, 결국 면직되고 말았다. 그러다 1275년에 의용군을 조직하여 원에 대항했다. 1276년에 원과 강화를 맺기 위해 바얀의 진중으로 갔다가 바얀이 문천상의 기량을 두려워하는 바람에 갇혀 버렸다. 그 사이에 남송이 멸망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포로로 잡혀 북송되던 도중 탈출하여 도종의 장자 익왕을 받들고 잔병을 모아 싸운다. 1278년에 그렇게 싸우던 도중 오파령 전투에서 패하여 장홍범에게 체포되고 만다. 원측에서는 관직을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약 3년간 대도로 북송되어 갇혀 있는 동안 옥중에서 정기가를 지었다고 한다. 1282년에 장홍범이나 쿠빌라이칸이 그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거부.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만 되풀이하다 사형되었다. 향년 46세. 쿠빌라이칸이 크게 아까워하였다고 한다.

 

중국 정부 입장

문천상은 중국정부입장에서 보면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옹호를 하자니 자신들이 주장하는 다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관에 맞지 않고 하지 않자니 천고의 충신이 아닌 단순히 중국의 통일 정권수립을 방해한 역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확고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이래서 역사에서 정통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다시 한 번 일깨우게 된다.

 

한족 민족영웅과 확장적 민족주의

마찬가지로 북송의 충신인 악비의 경우도 논란이 되고 있다. 악비는 거란족의 침입에 맞서 한족 왕조 송나라를 지켜낸 후대의 귀감이 된 만고의 충신이지만, 소수민족의 흡수와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고 있는 집권정당 중국 공산당으로선 악비를 다민족 화합을 방해한 악적이라고 깎아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이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다민족국가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를 유력 민족에 의한 실질적 단일민족 국가 라고 한다. 이 국가 유형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지금 지적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 등이 포함된다. 이들 국가들은 사실상의 소수민족들에게 압제를 가하면서 그들의 영토와 그에 부속되는 자원권, 기타 여러 변환가능한 경제적 가치를 강탈하며 그들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독립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런 실질적 단일민족 국가들은 나치오날리무스(Nationalismus - 독일어 독음) 국가들, 즉 2차 세계대전 당시 자국, 자민족의 영토 확장과 국제사회에서의 패권을 꾀했던 확장주의적 민족주의 국가와 동일하다는 지적도 있다.

 

 

송 소제(宋 少皇帝, 1272년 ~ 1279년)는 남송의 마지막 제 9대 황제(재위 : 1278년 ~ 1279년). 휘는 조병(趙昺)이다.

 

한편 원나라군은 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수부(水夫)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상에서도 옛 남송 함대를 추적해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원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옛 남송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 선체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을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옛 남송군은 패주했다.

 

1279년 3월 19일 중국 남부 광주(廣州)의 애산에서 원나라와 남송의 최후 결전이 있었다. 원나라의 군대가 남송의 해군을 격파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남송은 패배하고, 이것에 절망한 신하 및 간부들이 차례로 물에 뛰어들었고, 그 와중에 육수부는 어린 황제에게 [대학]의 강의를 배안에서 하였다. 그러나 패배를 깨닫고, 황제를 안고 물에 뛰어들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원나라군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애산 전투).

 

남송이 멸망할 때 나라에 순사한 충신은 다른 왕조에 비해 대단히 많았으나, 원나라의 통치 아래에서 송나라의 유민으로써 살아 남기를 계속한 사대부도 있어 문장궤범을 편찬한 사방득, 십팔사략을 저술한 증선지, 자치통감음주(자치통감의 주석서)을 저술한 호삼성 등, 문학 사학에서 이름을 남긴 송나라의 유민도 많았다.

 

 

애산 전투 (남송.원 최후의 해상결전)

애산 전투(厓山戰鬪)는 1279년 3월 19일 중국 남부 광주(廣州)의 애산에서 원나라 남송의 최후 결전이다. 원나라의 군대가 남송의 해군을 격파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남송은 패배하고, 위왕(衛王)은 재상 육수부와 함께 물에 뛰어들어 사실상 남송은 멸망했다.

 

 

애산 전투
(송-원 전쟁의 일부)
날짜 1279년 3월 19일
장소 광동성 애문
결과 원의 승리와 남송의 멸망.
교전국
남송 원나라
지휘관
장세걸 포수경
병력
200,000명 및 전선 1,000척 20,000명 및 전선 50척
피해 상황
알 수 없으나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 알 수 없음

 

개요

쿠빌라이의 원나라는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키고, 남송 황제 공제(恭帝)을 항복시켰다. 이로써 남송은 멸망했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 진선중등 일부 남송의 유신들은 임안함락과 동시에 남송의 황자을 황제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원나라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는 한편, 천주(泉州)의 실력자로 해상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포수경을 포섭하여 화남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서서히 강남에서 광둥 성으로 밀려난 옛 남송군은 선단으로 해상을 표류하던 중, 저항을 계속하여 현재의 홍콩 주변에 있던 애산이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섬에 요새와 행궁(行宮)을 구축하고 철저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한편 원나라군은 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수부(水夫)을 제공받게 되어, 약했던 해상에서도 옛 남송함대을 추적해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원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옛 남송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모두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 선체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을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의도를 가진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1279년 2월에 이르러,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옛 남송군은 패주했다. 이것에 절망한 신하 및 간부들이 차례로 물에 뛰어들었고, 그 와중에 육수부는 어린 황제에게 대학의 강의를 배안에서 하였다. 그러나 2월 6일 저녁쯤 패배를 깨닫고, 황제을 안고 물에 뛰어들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원나라군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며 남송은 9대 152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후

육상에서 저항운동을 벌이던 문천상은 이 전투 이전인 1278년에 원나라의 포로가 되어 대도(지금의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원나라 왕조는 뛰어난 문인이던 그를 등용하기 위해 설득을 여러번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를 읊었고, 1282년에 처형되었다. 이로써 원나라는 중국통일이 완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