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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5 (서하)

두바퀴인생 2010. 4. 6. 05:23

 

 

중국의 역사 55 (서하)

 

서하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서하(西夏)는 1032년에서 1227년까지 중국 북서부의 간쑤 성(甘肅省), 산시 성(陝西省)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강족 계통)의 왕조이다.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고비 사막, 남으로는 난주, 동으로는 황허, 서로는 옥문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간쑤 성,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이다.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국교는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 서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국호

탕구트족은 자신의 나라를 "크고 높은 나라"(phiow¹-bjij²-lhjij-lhjij², 大白高國)라고 불렀었다. 당나라는 탕구트족을 평하부(平夏部), 남산부, 동산부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 당시 평하부의 탁발사공(拓跋思恭)이 장안의 수복에 결정적 기여를 하여 당나라로부터 황실의 성(姓)인 이(李)씨를 하사받고, 하국공(夏國公)으로 봉해진다. 1005년 송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덕명(德明)은 송나라와 화의하고 송 황실로부터 조(趙)씨 성을 하사받고 은주, 유주 절도사의 직책을 받는다. 1038년까지는 송나라의 신하국이었다.

 

서하의 송나라 침입

1038년 서하의 원호(元昊)가 조씨 성을 버리고 탕구트어에 의한 성으로 바꾸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의 이름을 대하(大夏)로 정해 고대 중국 (夏)나라의 계승을 자처하였고 연호를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로 고쳤다. 서하 문자를 제정하고 관제를 확립하는 등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려 하였다. 서하는 송나라에게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송나라는 서하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1041년 서하군이 송나라 영토 근처에 집결해 호수천에서 양국 간 전투가 벌어졌는데, 송군이 패배해 전사자가 1만 3천 명에 달했다. 그 후 2년 여간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 송나라 요나라가 강화를 맺고 서하의 병사와 백성들이 느끼는 전쟁의 피로가 커지는 등 전황이 서하군에 유리하지 않게 되자 서하에서는 송나라에 강화를 요청했다.

 

송나라는 서하와 요나라와의 동맹을 우려하여 서하의 강화 교섭을 받아들였다. 1044년 송이 서하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는 대신 서하에서는 송나라의 황제를 인정하고 신하의 나라가 되는 조건의 강화를 맺었다. 그래서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송나라는 평화유지를 위해, 사실 상 공물에 해당하는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근을 매년 서하국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후 서하는 송나라 및 화북 지역에 있던 내륙 아시아인인 거란족 요나라(遼)나라와 불안한 3국관계를 유지했다. 서하는 송의 관제를 모방했으며, 독자적인 문자를 제정했다. 중국과는 달리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서하의 멸망

서하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부패가 만연하고 경제 사정은 열악해져 갔다. 1206년 이안전은 환종 이순우를 시해하고 왕을 자처하였다. 1202년부터 서하는 당시 국력이 신장하고 있던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의 침략을 6번이나 받게 된다.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인 보내 칭기즈 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1211년 이준욱이 반역을 일으키자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금(金)과의 오랜 전쟁으로 서하(西夏)의 국력은 급속히 쇠퇴했으며, 1226년에는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다시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국력의 소모 뒤, 결국 서하는 1227년 칭기즈 칸 몽골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서하를 점령한 칭기즈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실시했는데, 이는 서하의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칭기즈칸은 서하인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해서 멸족시켰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1]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언어와 문화

서하(西夏)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는데, 탕구트어라고도 부르는 서하어(西夏語)는 티베트-미얀마어 계통에 속하며, 1036년에 공포된 서하문자(西夏文字)는 한자(漢字)와 유사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서하문자(西夏文字)로 <논어(論語)>, <맹자(孟子)>, <손자병법(孫子兵法)> 등의 서적이나 불경을 서하어로 번역하였고, <신집금쇄장치문(新集金碎掌置文)>, <신집금합도(新集錦合道)>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리고 인쇄국(印刷局)인 각자사(刻字司)를 두어 문자 보급을 위해 단어집(單語集)이나 음운조직(音韻組織)을 정리한 운서(韻書) 등의 서적을 출판하였다. 몽골에 의해서 멸망당한 후 서하의 민족과 언어는 절멸(絶滅)됐으나, 이들 서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서하 문자(西夏文字)는 오늘날에 와서 그 발음이나 의미가 파악되고 있으며, 서하어의 언어적 계통도 밝혀지고 있다.

 

서하(西夏)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을 매개하며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며 크게 세력을 넓혔다. 그리고 송(宋)과 활발히 교역하며 농경과 유목, 한족(漢族) 문화와 탕구트(Tangut) 고유 문화가 결합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닝샤 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인촨(銀川) 서쪽의 허란산(賀蘭山) 기슭에서 발견된 서하(西夏) 왕릉에는 9개의 황제릉을 포함해 250여 개의 묘지가 분포해 있는데, 서하(西夏) 문화의 특징을 알려주는 수많은 유물과 부장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서하왕릉의 능탑(陵塔)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릴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서하(西夏)는 불교가 발달해 카라호토(黑水城, Kara Khoto)와 둔황(敦煌) 일대에 회화와 탑 등의 불교 미술 작품들을 남겼다. 불교를 국교화하여 국가에 화상공덕사(和尙功德司), 출가공덕사(出家功德司)라는 관청을 설치했고, 각지에 절이나 탑을 세우고 불교 경전을 서하어로 번역하여 보급했다.

 

서하의 역대 왕

묘호 시호 이름 재위기간
경종 (景宗) 무열제 (武烈帝) 이원호 (李元昊) 1038-1048
의종 (毅宗) 소영제 (昭英帝) 이양조 (李諒祚) 1048-1067
혜종 (惠宗) 강정제 (康靖帝) 이병상 (李秉常) 1067-1086
숭종 (崇宗) 성문제 (聖文帝) 이건순 (李乾順) 1086-1139
인종 (仁宗) 성정제 (聖禎帝) 이인효 (李仁孝) 1139-1193
환종 (桓宗) 소간제 (昭簡帝) 이순우 (李純佑) 1193-1206
양종 (襄宗) 경목제 (敬穆帝) 이안전 (李安全) 1206-1211
신종 (神宗) 영문제 (英文帝) 이준욱 (李遵頊) 1211-1223
헌종 (獻宗) 광효제 이덕왕 (李德旺) 1223-1226
말제 (末帝) 남평왕 (南平王) 이현 (李晛) 1226-1227

 

 

환종(桓宗, 1177년 ~ 1206년)는 서하의 제6대 황제(재위 1193년 ~ 1206년)이다. 휘는 이순우(李純祐)이고, 시호는 소간제(昭簡帝)이다.

 

서하의 제5대 황제 이인효(李仁孝)의 아들로 1193년 그가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1] 선대의 인종을 정책을 계승하여 국내에서는 경제력의 안정과 국외는 친남송과 친금나라의 정책을 취하엿다. 1194년 금나라에 의해서 하국왕(夏國王)에 책봉되었다. 1205년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침공해오자 국내가 혼란스럽게 되었다. 1206년, 이안전은 그를 죽이고 정권을 탈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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