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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3 (요나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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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3 (요나라)

두바퀴인생 2010. 4. 4. 22:08

 

 

중국의 역사 53 (요나라)

 

요나라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遼, 916년 - 1125년)또는 거란국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 상경 임황부, 개봉 등의 수도가 있었다.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엘리아바오지(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엘리아바오지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금나라에게 망해가던 요나라가 이때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하지만 120년만에(금나라와 비슷하게)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요나라는 점령지의 중국인과 발해인등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 중국인과 발해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거란 문자를 고안해냈다.

역대 황제

요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요 숙조
(遼肅祖)
(요 태조 추숭)
소열황제
(昭烈皇帝)
야율누리사
(耶律耨里思)
- -
- 요 의조
(遼懿祖)
(요 태조 추숭)
장경황제
(莊敬皇帝)
야율살랄덕
(耶律薩剌德)
- -
- 요 현조
(遼玄祖)
(요 태조 추숭)
간헌황제
(簡獻皇帝)
야율균덕식
(耶律勻德寔)
- -
- 요 덕조
(遼德祖)
(요 태조 추숭)
선간황제
(宣簡皇帝)
야율적노
(耶律的魯)
- -
제1대 요 태조
(遼太祖)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야율아보기
(耶律阿保機)
신책(神冊) 916년 ~ 922년
천찬(天贊) 922년 ~ 926년
천현(天顯) 926년
916년 ~ 926년
제2대 요 태종
(遼太宗)
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야율덕광(耶律德光) 천현(天顯) 927년 ~ 938년
회동(會同) 938년 ~ 947년
대동(大同) 947년
926년 ~ 947년
- 요 의종
(遼義宗)
(요 세종 추숭)
문헌흠의황제
(文獻欽義皇帝)
야율배(耶律倍) - -
- - 장숙황제
(章肅皇帝)
(요 목종 추숭)
야율이호(耶律李胡) - -
제3대 요 세종
(遼世宗)
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야율원(耶律阮) 천록(天祿) 947년 ~ 951년 947년 ~ 951년
임시 - 익무황제
(翼武皇帝)
야율찰할(耶律察割) - 951년
제4대 요 목종
(遼穆宗)
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야율경(耶律璟) 응력(應曆) 951년 ~ 969년 951년 ~ 969년
제5대 요 경종
(遼景宗)
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야율현(耶律賢) 보녕(保寧) 969년 ~ 979년
건형(乾亨) 979년 ~ 982년
969년 ~ 982년
제6대 요 성종
(遼聖宗)
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야율융서(耶律隆緖) 통화(統和) 983년 ~ 1012년
개태(開泰) 1012년 ~ 1021년
태평(太平) 1021년 ~ 1031년
982년 ~ 1031년
제7대 요 흥종
(遼興宗)
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야율종진(耶律宗眞) 경복(景福) 1031년 ~ 1032년
중희(重熙) 1032년 ~ 1055년
1031년 ~ 1055년
제8대 요 도종
(遼道宗)
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야율홍기(耶律洪基) 청녕(淸寧) 1055년 ~ 1064년
함옹(咸雍) 1065년 ~ 1074년
대강(大康) 1075년 ~ 1084년
대안(大安) 1085년 ~ 1094년
수창(壽昌) 1095년 ~ 1101년
1055년 ~ 1101년
- 요 순종
(遼順宗)
(요 천조제 추숭)
대효순성황제
(大孝順聖皇帝)
야율준(耶律濬) - -
제9대 - 천조황제
(天祚皇帝)
야율연희(耶律延禧) 건통(乾統) 1101년 ~ 1110년
천경(天慶) 1111년 ~ 1120년
보대(保大) 1121년 ~ 1125년
1101년 ~ 1125년

 

 

 

요 태조(遼太祖, 872년 - 926년, 재위 : 907년 - 926년)는 요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이름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磯, 옐뤼아바오지, Yelü Abaoji). 시호는 대성대명신열천황제(大聖大明神烈天皇帝)이다.

 

거란 문자는 920년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직접 창제 작업에 착수하여 같은 해 9월에 완성, 공포하였다고 한다.

그는 872년 태어났으며 불안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조부는 종족간의 갈등으로 피살되었고,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달아났다. 옐리아바오지는 그의 할머니가 숨겨 키웠다.

 

야올리안 족은 750년대에서부터 거란족을 이끄는 부족이었다. 그들은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지녔으나 9세기말까지는 일라족의 지도자가 야올리안 칸에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옐리아바오지의 부친 야율적노는 일라족의 부족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성은 중국문화의 표시를 보였고 그들은 야올리안 부족외의 거란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옐리아바오지 901년 903년 일라족의 부족장이 되었다. 전거란 군 사령관인 유웨라 불렸다. 이것은 그가 거란의 2인자임을 의미한다.

 

그는 당나라의 쇠퇴(조광윤이 송나라를 건설할 시기)를 계기로 요태조인 옐리아바오지 거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다. 907년 그는 거란의 대가한(요태조)이 되었다. 그는 중국 북부에서 7개 부족장의 지지를 받았고, 야올리안 대가한의 승인을 받었다.

그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어 한자를 본따 거란 문자를 창제하였고, 농업을 발달시켰으며, 그 동안 단임제인 황제를 종신제로 하여, 요나라 황실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먼저 동돌궐과 몽골족을 정벌하기 위해 서방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서방 정책이 마무리가 되었을 때인 925년 12월에 당시 쇠퇴하고 있었던 발해를 정복하는 사업을 계획하여, 926년 1월에 발해를 멸망시켰다.(하지만 발해가 멸망된 이후에도 정안국 등 발해의 계승국들이 생겨났다.)

 

옐리아바오지 발해를 멸망시키고, 거란으로 돌아갔을 때 사망하였다. 요나라 태조가 죽자 그의 부인 술율평(述律平, 요사(遼史)에서는 소 황후로 기록됨)이 잠시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의 둘째아들인 요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술율평(述律平, 879년 ~ 953년)은 요나라 태조(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황후이며 술율파고(述律婆姑)의 딸이다. 과단성을 지녔고 계책을 세우는 데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한 후 여러 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유주(幽州)에는 당나라의 노룡 절도사(盧龍節度使)였던 유수광(劉守光)이 911년 자립하여 나라 이름을 대연(大燕)이라 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했다. 이 나라는 5대 10국(五代十國)에 포함되며 훗날 걸연(桀燕)으로 불리게 된다.

 

후량(後梁)의 진왕(晋王) 이존욱(李存勖)이 유주를 공격해 와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유수광은 자신의 녹사참군(錄事參軍) 한연휘(韓延徽)를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한연휘가 야율아보기에게 무릎꿇지 않자 야율아보기는 화를 내며 말먹이꾼으로 삼으려 했다. 술율평은 한연휘가 지략에 뛰어나고 문장에 능한 인물임을 알아차리고 야율아보기에게 한연휘는 절개를 굽히지 않는 사람이니 마땅히 예로써 대하는 것이 옳다고 충고하였다. 이후 요나라의 신하가 된 한연휘는 모사(謀士)로서 야율아보기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916년 응천대명지황후(應天大明地皇后) 라는 칭호를 받았다.

 

917년 야율아보기가 유주를 공격하기 위해 화공(火攻)을 쓰려 했으나 술율평은 유주의 상황을 껍질 없는 나무에 비유하며 성을 포위한 채 주위의 재물을 약탈하면 성의 식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유주의 수비군이 완강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유주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926년 야율아보기가 죽자 섭정(攝政)을 하며 조정을 장악했다. 술율평은 장차 나라에 화근이 될 만한 사람들을 제거할 생각으로 내심 껄끄럽게 여기는 장수들과 그 부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고는 선황제가 그리우냐고 물었다. 그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렇다면 마땅히 저승에 가 뵈어야 마땅하다면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또 권력을 바탕으로 횡포를 부리는 자들도 선황제께 내 안부를 전하라면서 백여 명을 계속 죽였다. 마지막으로 조사온(趙思溫)을 죽이려 들자 조사온은 황후께서 저승으로 가시면 자신도 따라 죽겠다고 했다. 술율평은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면서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 야율아보기의 무덤에 묻도록 했고 조사온은 죽음을 면하였다.

 

926년 9월, 술율평은 여러 추장들을 불러모으고 맏아들 야율돌욕(耶律突欲)과 둘째아들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각각 말을 타고 서 있게 한 다음 황제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의 말고삐를 붙잡으라고 했다. 추장들은 술율평의 마음이 야율덕광에게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야율덕광의 말고삐를 잡았고, 이리하여 야율덕광이 요나라의 2대 황제 태종(太宗)이 되고 술율평도 태후가 되었다. 신하들에게서 광덕지인소열숭간응천황태후(廣德至仁昭烈崇簡應天皇太后)라는 존호(尊號)를 받았다.

 

후진(後晋)의 2대 출제(出帝) 석중귀(石重貴)는 그의 큰아버지 고조(高祖) 석경당(石敬瑭)과 달리 요나라의 신하로 칭하는 것을 거부하여 945년 야율덕광이 직접 공격에 나섰으나 후진군에 패했다. 술율평은 화친을 맺자고 했지만 야율덕광은 따르지 않았다. 946년 후진이 공격해 오자 야율덕광은 이를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개봉(開封)을 점령한 다음 석중귀를 사로잡아 요나라로 보냈다. 그러나 점차 중국인들의 반격이 거세지자 개봉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던 중 병으로 죽었다. 술율평은 아들의 시신을 보고도 화친을 하지 않고 전국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정벌에 몰두한 것을 책망하였다.

 

한편 아직 중국에 남아 있던 요나라 진영에서 야율돌욕의 아들 야율원(耶律阮)이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등극하니 이가 요나라 세종(世宗)이다. 그러나 이는 태후인 술율평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것이어서 야율원은 몹시 불안해했다. 결국 태후와 맞설 생각을 품고 군사들을 이끌고 수도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로 쳐들어갔다. 분노한 술율평은 군사를 동원하여 석교(石橋)에서 싸웠으나 야율원에게 대패하였다. 결국 손자에 의해 야율아보기의 능묘에 갇혔고, 953년에 죽었다. 죽은 후 야율아보기와 합장(合葬)되었고 시호(諡號)는 정렬황후(貞烈皇后)이며, 훗날 순흠황후(淳欽皇后)로 고쳐졌다.

 

 

요 태종 야율덕광(遼太宗耶律德光, 902년 ~ 947년)은 요나라의 제 2대 황제(재위: 926년 ~ 947년). 자는 덕근(德謹). 시호는 효무혜문황제(孝武惠文皇帝)이다.

 

926년 야율아보기가 죽자 야율덕광의 어머니 술율평이 섭정(攝政)을 하며 조정을 장악했다. 술율평은 장차 나라에 화근이 될 만한 사람들을 제거할 생각으로 내심 껄끄럽게 여기는 장수들과 그 부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고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 또 권력을 바탕으로 횡포를 부리는 자들도 선황제께 내 안부를 전하라면서 백여 명을 계속 죽였다.

 

926년 9월, 술율평은 여러 추장들을 불러모으고 맏아들 야율돌욕(耶律突欲)과 둘째아들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각각 말을 타고 서 있게 한 다음 황제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의 말고삐를 붙잡으라고 했다. 추장들은 술율평의 마음이 야율덕광에게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야율덕광의 말고삐를 잡았고, 이리하여 야율덕광이 요나라의 2대 황제 태종(太宗)이 되고 술율평도 태후가 되었다. 신하들에게서 광덕지인소열숭간응천황태후(廣德至仁昭烈崇簡應天皇太后)라는 존호(尊號)를 받았다.

 

후당의 명종 붕어한 후 3남 이종후가 뒤를 이었으나 곧 양자인 이종가에 의해 찬탈되었다. 또한 이종가는 권력의 안정을 노려 명종의 사위이며, 실력자였던 석경당을 배제하기에 이른다. 석경당은 이에 대항했으나, 혼자 힘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북쪽의 거란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의 할양을 약속했다. 이에 응답해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몰아내고 후당을 멸망시켰다.

 

이때 후진 고조 석경당은 원군에 대한 댓가로 요나라에 매년 비단 30만필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속하였고, 국경 지역 연(燕)일대 16주(州)을 넘겨주었다.

 

936년 즉위하여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고조)은 요나라에게 신종하여 후진은 요나라의 위성국가였다. 중앙의 상황을 본 지방세력은 등을 돌려 남쪽의 오나라에게 넘어갔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속출했다. 이 진압에 나섰던 고조는 942년에 병사했다.

 

후진(後晋)의 2대 출제(出帝) 석중귀(石重貴)는 그의 큰아버지 고조(高祖) 석경당(石敬瑭)과 달리 요나라의 신하로 칭하는 것을 거부하여 945년 야율덕광이 직접 공격에 나섰으나 후진군에 패했다. 술율평은 화친을 맺자고 했지만 야율덕광은 따르지 않았다.

 

946년 후진이 공격해 오자 야율덕광은 이를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개봉(開封)을 점령한 다음 석중귀를 사로잡아 요나라로 보내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947년 태종은 국호를 요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개봉 등 중국인 점령 지역에 대한 무자비한 폭정으로 점차 중국인들의 반격이 거세지자 개봉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던 중 병으로 죽었다. 술율평은 아들의 시신을 보고 화친을 하지 않고 전국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정벌에 몰두한 것을 책망하였다.

 

요 세종 야율완(遼 世宗耶律阮, 918년 ~ 951년)은 요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947년 ~ 951년). 시호는 효화장헌황제(孝和莊憲皇帝)이다. 그는 요나라의 창건자 야율아보기(耶律阿保磯)의 장남이었던 황태자 야율배(耶律倍, 요 의종 문헌흠의황제(遼 義宗 文獻欽義皇帝)의 아들이었다. 그는 그의 숙부 요 태종의 사후에 즉위하였다. 요 태종은 야율아보기가 후당 왕조의 왕궁으로 떠난 뒤에 그를 길렀다.

 

요 목종 야율경(遼 穆宗耶律璟, 931년 ~ 969년)은 요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951년 ~ 969년). 시호는 효안경정황제(孝安敬正皇帝). 제2대 황제 요 태종 야율덕광의 장남이다.

 

그는 요 태종의 황자였고 요 세종이 951년 피살되자 즉위하였다.

 

959년 후주 시영은 오대 국가들의 비원이었으며, 북방의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연운십육주 탈환에 나섰다. 일련의 전투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하고 유주을 되찾은 시영은 계속 진군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환으로 쓰러져 원정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959년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요나라 목종은 세종과 같이 알코올 의존자였다. 그는 폭력적이였고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곤 하였다. 그도 사냥을 좋아하였다. 목종의 치세는 요나라의 암흑기 중의 하나였다.

 

969년 2월 목종은 흑산으로 사냥을 나가 시종들과 축제를 벌였다. 한밤중에 목종은 음식을 요구하였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고 화가난 황제는 주방장을 죽이려하다가 피살되었다. 요 경종이 즉위하였다.

 

 

요 경종 야율현(遼 景宗耶律賢, 948년 ~ 982년)은 요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969년 ~ 982년). 시호는 효성강정황제(孝成康靖皇帝). 제3대 황제 세종의 차남.

 

그는 969년 사냥에서 돌아오다 피살된 목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야율현은 거란과 한족 장교의 지지를 얻었다.

경종은 한족 관료를 채용하기 시작하였고 남부대신 진공(요진공)을 임명하였다. 요나라는 봉건사회로 변환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패를 일소하였는데 뇌물수수자와 경쟁력이 없는 이들을 해고하였다. 그는 비평을 받아들여 사냥을 줄였다.

 

그는 북한을 멸망시킨 송나라와 전쟁을 준비하였고 베이징을 포함한 수차례 전투후 교착상태에 도달하였다.

 

979년 5월 송 태종은 연운16주를 수복하고자 타이위안(산시성 성도)을 출발하여 요나라에 원정군을 보내지만, 대패하고 만다. 처음에는 두 개의 성을 손쉽게 공략하였지만, 지금의 베이징인 당시의 연경을 공략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본인도 화살을 맞고 상처를 입었다.

 

경종도 사냥후 귀환중에 죽었다.

 

요 성종 야율융서(遼聖宗耶律隆緒, 971년 - 1031년)는 요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982년 ~ 1031년). 제5대 황제 경종과 예지황후 소씨의 아들이다.

 

성종은 요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황제로, 그의 치세에 이르러 요나라의 판도가 넓어졌다. 986년 1월,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이 고려와 손을 잡으려했고 그 사실을 알게된 성종은 그해 12월(또는 986년 1월) 정안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성종은 1004년 을 침공했고, 이에 대해 송의 진종은 요나라에 대해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화평조약인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었다. 성종의 치세 동안 요나라는 서로는 하서(河西)의 회흘(回紇)을 정복하여 판도를 넓혔다. 또한 성종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으나 고려를 복속시키는 데는 실패하였다.

 

 

전연의 맹(澶淵之盟)은 중국의 (宋)에 침입한 (遼)의 성종(聖宗)과 이를 막기 위해 북상(北上)하였던 송의 진종(眞宗)이 전주(澶州)에 대진(對陣)하고 체결한 강화조약이다.

그 조건은 다음의 3개조이다.

  1. 송(宋)은 군비(軍備)로서 요(遼)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을 보낸다.
  2. 진종은 성종의 모친을 숙모(叔母)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3. 양국의 국경은 현상대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越境者)는 서로 송환한다.

이 조약 체결 후 요와 송 사이에는 오래 평화가 유지되었으며, 그 결과 요는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상으로도 발전을 이루어 동아시아 제1의 강국이 되었다. 전연(澶淵)이란 전주(澶州)의 아명(雅名)이다.

 

 

고려-거란 전쟁

고려-거란 전쟁
날짜 993년-1019년
장소 한반도 북부
결과 고려의 승리
이유 요나라의 고려 송나라간의 관계 단절 요구
교전국
고려 요나라
지휘관
고려 성종
고려 현종
서희
강감찬
강조
양규
김숙흥
요 성종
소손녕
소배압
병력
208,000명 (1019년) 800,000 (993년, 실제론 알수 없음)
400,000 (1010년)
100,000명 (1019년)
피해 상황
알 수 없음 90,000여명 이상 추정(1019년)

 

 

고려-거란 전쟁 993년, 1010년, 1019년 고려 거란 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배경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遼)를 건국하였다. 922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의 태조는 거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북진 정책을 실행하였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광군(光軍) 30만명을 양성하여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발해 유민이 압록강가에 세운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 진화(振化), 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성종 12년) 10월 요나라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朴良柔)와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함께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등의 주장이 난무하였고,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였으나, 서희와 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주장하였으므로 성종(成宗)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를 급파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였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는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이 때문에 대국[여기서는 자신의 국가인 거란을 말한다.]이 와서 치는 것이다. 지금 땅을 떼어 우리에게 바치고 사신을 보내 조빙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던 것이다. 만약 다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여기서는 거란을 말한다.]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이다.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하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은 우리나라 땅이지만 여진이 점거하였다. 이들이 교활하고 변덕이 많아 길을 막아서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조빙을 못하게 됨은 여진 탓이다.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 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하여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으며 강제 출가한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의 실제적인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여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재차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姜邯贊)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회군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고려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귀주대첩

강감찬은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귀주 대첩
(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의 일부)
날짜 1018년 현종
장소 귀주(龜州)
결과 고려의 승리
교전국
고려 요나라
지휘관
강감찬
강민첨
소배압
병력
20만 8천여 명 10만여 명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에게 승리한 뒤 서희가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1018년(현종 9년)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이루었다. 이때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하였다. 고려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대승하였으나,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다. 남하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에서 다시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계속 남하하여 개경 근방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귀주에서 매복하고 있던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다.

 

전쟁 결과

1019년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으며, 이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을 하지 않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요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한편 고려도 서북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하기도 힘들어졌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쌓는다.

 

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요 흥종 야율종진(遼興宗耶律宗眞, 1016년 ~ 1055년)은 요나라의 제7대 황제(재위:1031년 ~ 1054년). 시호는 신성효장황제(神聖孝章皇帝)이다.

 

흥종은 요 성종의 장남으로 1021년에 황태자가 되었고 그 때 6세였다. 성종이 1031년 죽자 그가 즉위하였다.

흥종의 치세부터 요나라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정부는 부패하였고 군대는 흩어졌다.

 

그는 서하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고 송나라와도 교전하였다. 그러나 잦은 전쟁은 높은 세금으로 이어지고 그는 불교를 내세우며 사치하였다. 그는 1055년 죽었다.

 

 

요 도종 야율홍기(遼道宗耶律洪基, 1032년 ~ 1101년)는 요나라의 제8대 황제(재위 : 1055년 ~ 1101년). 시호는 인성대효문황제(仁聖大孝文皇帝)이다.

 

1055년 아버지 흥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056년 사카야무니 탑을 건설하였고, 1066년에는 요 태종이 사용하였던 '대요'라는 이름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불교의 트리피타카의 요나라 판을 만들었다.

 

아들 야율준(耶律濬)은 그보다 일찍 사망하였다. 1101년에 사망하여 손자 천조제가 황위를 계승하였다.

 

 

요 천조제 야율연희(遼天祚帝耶律延禧, 1075년 ~ 1128년)는, 요나라의 제9대(마지막) 황제(재위 : 1101년 1125년). 제8대 황제 도종(道宗)의 손자이다.

 

1114년 금(金)나라 태조 아구다(阿骨打)가 요나라 동북변을 공략해오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으나 패배하였다. 1121년 송(宋)·금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고 1125년 금나라 포로가 되어 백두산(白頭山)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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