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52 (송나라) 본문
중국의 역사 52 (송나라)
송나라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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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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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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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송(宋, 960년~1279년)은 중국의 옛 왕조이다.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임안(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開封, 또는 변경), 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훗날 원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정권이며, 상비 해군을 설치한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문치주의 국가로 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전의 왕조들과는 달리 무장 출신들의 철권폭정을 하지 않고 문민관료에 의한 문화 정치를 폈다. 시대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이 시기 당나라 시대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점성도(占城稻)라는 안정성이 있는 조도(早稻)가 도입되어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농업으로 인해 북송시대의 인구는 약 1억 명에 달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사상 등이 시민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북송
후주(後周)의 전전도점검(殿前都点檢;근위군 대장)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후주 최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중국의 분열상태 종식을 목표로 삼았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동생 조광의(태종 조광의)가 뒤를 이어 중국의 통일을 이루고,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왕권의 강화를 기했다. 과거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시대에 완성되었으며 과거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재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동시에 과도한 문관우대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자 진종은 요나라에 대해 매년 재물을 보내는것으로 화의를 맺었다.(단연의 맹세(澶淵之盟). 또한 요나라의 침공과 동시에 서쪽의 탕구트족은 서하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워 송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것도 1044년 서하의 침공으로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경력의 화약(慶暦和約). 그 결과 획득한 평화를 토대로 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국방비의 증가와 대상인, 대지주 증가로 일어난 세수(稅收) 감소 등에 대해 개혁이 촉구되어 6대 황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라 불리었고, 주로 영세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했으나, 신법은 대지주, 상인세력과 그쪽 출신인 관료(구법파(舊法派)의 대반대에 부딪쳤다. 이들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하게 증가하여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을 기울게 하였다.
이때쯤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함께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약속을 맺었다(해상의 맹세). 그래서 1121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송나라가 신흥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1127년 카이펑이 금나라에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 흠종(欽宗),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을 북쪽으로 사로잡아 갔다(정강의 변(靖康之變).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천도하여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여 고종으로 즉위하였다. 이 이후부터 송나라는 남송이라고 불리었다.
남송
조구는 1127년 임안(항저우)에서 즉위하여 고종(高宗)이 되었고, 송나라를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등의 활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고, 악비는 살해되었다.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으나, 금나라의 황족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해릉왕는 죽고 완안옹은 금나라의 금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해 고종은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慎)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으나, 한탁주(韓侂冑)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하고 반대파의 대량탄압을 일으켰다(경원의 당금(慶元の党禁). 이 시기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慶元偽學の禁).
한탁주는 금나라가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1207년 금나라의 요청으로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것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후 송나라군은 북상하여 낙양과 카이펑을 회복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쿠빌라이가 양양(襄陽)을 함락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져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사실상 송나라는 멸망했다.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항전을 계속했던 일부 황족, 관료, 군인들도 1279년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에서 원나라군에게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애산 전투).
사회
당나라가 각지에 군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절도사의 할거를 허락하여 이윽고 오대십국시대의 전란으로까지 이르는 것을 교훈삼아, 송나라는 과거(科挙)를 본격적으로 운영하여 명실공히 문신 관료제,문치주의가 완성되게 되었다. 황제가 사대부출신의 관료를 수족으로 사용하여 국정을 맡기는 체제는 황제전제,군주독제라고도 칭한다. 수나라의 문제에 의해 시작된 과거제도였으나, 과거가 실제적인 의미로써 효력을 발휘한것은 송나라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역대 어느시대보다도 매우 왕성하게 과거제도가 이루어진 시기여서 거의 3년에 1번 시행하였고, 1번에 약 3~400명이 합격하였다.
송나라의 군사제도는 위병제(傭兵制;모병제)였다. 태조는 금군(禁軍)의 제도를 고쳐 전군의 사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직속으로 그 하부의 존재로써 장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비군은 북송 중기에 140만명에 달했으나, 숫자만 많을뿐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불안한 병사가 많았다. 사료에서도 중국 통일후의 송나라군의 전력(戰歷)은 승리한 전투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또한 보병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기병을 주력으로 한 요나라 및 서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또 140만에 달하는 막대한 병사를 고용하기 위해 쓰이는 군사비나 외세(요나라,서하,금나라등)하고 평화유지를 위해 많은 세페를 바쳐야했기에 국가예산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거기에 더해서 문인중시주의 때문에 무인은 매우 경시되어 중국 속담에서는 '좋은 철은 못에 없고, 좋은 인간은 군대에는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결과적으로 병사를 모집하기 위한것에도 고생이 많아, 병사들은 죄인출신자 및 품행이 좋지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채워지게 되었기에 사기 및 규율도 낮아지게 된것으로 생각된다. 또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병사들에게는 모두 문신이 실시되어 일반 백성들과 구별하게 하였다.
당나라때까지는 도시는 밤이되면 문을 닫고, 도시안의 각 지구도 출입을 금지하였으나, 송나라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폐지하여 카이펑은 밤에도 도로상에 상점이 빼곡히 들어섰고, 도시에는 사람의 모습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문화
초기에는 [사대서](四大書)라 총칭하는 대부분의 서책 편찬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송나라에 이르러 문학은 당나라 중기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물려받았다. 이 흐름에는 구양수에 의한 송문학의 주류가 되어, 당송팔대가라 불리는 명문가가 활약했다. 팔대가 이외는 황정견, 범중엄, 사마광 등의 이름이 열거된다. 한시(漢詩)에서는 당나라대까지의 서정시에 비해 매우 일상적이고 평이한 서사시(叙事詩)가 나오게 되었다. 또 당나라말기에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 사(詞)의 분야도 이 시기에 융성을 맞이했다. 역사분야에서는 신당서,신오대사, 그리고 사마광에 의해 편년체로 기술된 자치통감이 있다.
과거제도의 융성으로 인해 지식인은 대부분 완전히 유교를 기초로 한 인물들이 많아 송나라는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유학(儒學)이 강했던 시대였다. 그 유학중에도 도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문이 시작되었는데, 후에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주자학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경사업이 진행되었으나, 이 경전의 대부분은 당시 말기였던 인도의 불교상황의 영향을 받아 거의 밀교에 속하는 경전이었다.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진 강학중심의 불교는 송나라대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실천적인 교의를 가진 선종과 정토교가 융성하게 되었다. 선종은 이 시대에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두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도교는 황실과 인연을 맺어 크게 번영하였다. 또 민간도교였던 진대도교, 태일교, 전진교 등이 이 시대에 나타났다.
송나라 시대는 수묵화, 산수화 분야의 발흥기라 할 수 있어 다수의 작품이 그려졌다. 송나라 시대의 화단에는 2종류의 흐름이 있어 조정이 만든 한림도화원이라 불리는 국립미술 아카데미 속에서 태어난 원체화(院体画)와 민간의 사대부에 의해 생긴 문인화(文人画)등 2개가 바로 그것이다. 또 책의 분야에서는 송나라의 4대가라 일컬어지는 소철, , 황정견, 채양 4사람을 열거하는데, 휘종과 그의 재상이던 채경도 포함될 수 있다. 휘종은 금체라고 불리는 필체를 만들기도 했다. 도자기 분야에서는 현재도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경덕진이 청백자의 생산을 계기로 일대 생산지가 되었던 시기였다.
경제
이 시기에 이르러 강남의 경제력은 압도적으로 성장하여 화북은 소비사회로써 강남에서 올라온 식료품으로 지탱하는 상황이 되었다.
송나라는 농업, 상업상에서 현저한 변혁이 보인 시기였고, 송나라의 경제력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나라와의 단연의 맹세에 지불한 것으로 알려진 재물은 비단 20만필, 은 10만량이라고 알려진 액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거액임에는 틀림없으나(은은 일괄적으로 보면 약 11톤), 진종이 봉선의식을 거행할때 사용한 비용은 단연의 맹세에 지불한 액수의 60배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 인구는 전한말기 이후 전쟁으로 인해 증감을 되풀이하여 인구는 6천만명을 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북송때에 이르러 6천만명을 돌파하고 1080년의 계산으로는 9천만명에 이르렀다. 그 이후 1억을 한계점으로써 청나라 시대까지 감소와 증가를 다시 되풀이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인구를 지탱한 것은 새로운 농업이었다. 당나라때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남쪽의 베트남에서 전해진 점성도라 불린 안정성이 있는 조도가 도입되었고, 또한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중국 전역의 경제의 중심점은 이 시기부터 확실히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거기에 지역에 따라 차, 과수, 양잠 등의 생산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농업의 분업화가 진행되었다.
식료의 증산에 따라 이것을 운반하기 위한 수운(水運)도 빠르게 발달하였다. 매우 세밀한 운하망이 구축되어져 운하는 전국의 ¾ 지역을 망라했다. 수도 카이펑은 이 운하를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도시였기에 내부를 운하로 관통할 수 있었다. 또 이때까지 경시했던 해운기술이 대폭적으로 향상되어 정크선이 개발되어 일본, 조선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교역망이 발전하게 되었다.
물자의 증산과 교통망의 정비는 상업을 활발화시켰다. 상인길드가 탄생하고, 상업형식이 정비되어졌다. 이것과 함께 약속어음이 운용되어져 사천, 섬서지역에서는 세계 최초의 지폐라 할 수 있는 교자(交子)가 발행되어 유통되었다.
과학기술
송나라때에는 경제발달과 함께 각종 실용기술도 발전하여 방위자석이 발명되었다. 또 화약, 인쇄기술도 본격적으로 운용되어 사회 각 방면에서 이용되었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이 독점하던 문학, 사상등이 시민들 사이에도 퍼져나가게 되었다.
송나라 역대황제 일람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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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 성조 (宋聖祖) (송 태조 추숭) |
상령고도구천사명 보생천존대제 (上靈高道九天司命 保生天尊大帝) |
조현랑(趙玄朗) | - | - |
- | 송 희조 (宋僖祖) (송 태조 추숭) |
입도조기적덕기공의문 헌무예화지효황제 (立道肇基積德起功懿文 憲武睿和至孝皇帝) |
조조(趙朓) | - | - |
- | 송 순조 (宋順祖) (송 태조 추숭) |
혜원예명황제 (惠元睿明皇帝) |
조정(趙珽) | - | - |
- | 송 익조 (宋翼祖) (송 태조 추숭) |
간공예덕황제 (簡恭睿德皇帝) |
조경(趙敬) | - | - |
- | 송 선조 (宋宣祖) (송 태조 추숭) |
무소예성황제 (武昭睿聖皇帝) |
조홍은(趙弘殷) | - | - |
제1대 | 송 태조 (宋太祖) |
계운입극영무예문신덕 성공지명대효황제 (啓運立極英武睿文神德 聖功至明大孝皇帝) |
조광윤(趙匡胤) | 건륭(建隆) 960년 ~ 963년 건덕(乾德) 963년 ~ 968년 개보(開寶) 968년 ~ 976년 |
960년 ~ 976년 |
제2대 | 송 태종 (宋太宗) |
지인응도신공성덕문무 예열대명광효황제 (至仁應道神功聖德文武 睿烈大明廣孝皇帝) |
조광의(趙匡義) | 태평흥국(太平興國) 976년 ~ 984년 옹희(雍熙) 984년 ~ 987년 단공(端拱) 988년 ~ 989년 순화(淳化) 990년 ~ 994년 지도(至道) 995년 ~ 997년 |
976년 ~ 997년 |
제3대 | 송 진종 (宋眞宗) |
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 무정장성원효황제 (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 武定章聖元孝皇帝) |
조항(趙恆) | 함평(咸平) 998년 ~ 1003년 경덕(景德) 1004년 ~ 1007년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년 ~ 1016년 천희(天禧) 1017년 ~ 1021년 건흥(乾興) 1022년 |
997년 ~ 1022년 |
제4대 | 송 인종 (宋仁宗) |
체천법도극공전덕신문 성무예철명효황제 (體天法道極功全德神文 聖武睿哲明孝皇帝) |
조정(趙禎) | 천성(天聖) 1023년 ~ 1032년 명도(明道) 1032년 ~ 1033년 경우(景祐) 1034년 ~ 1038년 보원(寶元) 1038년 ~ 1040년 강정(康定) 1040년 ~ 1041년 경력(慶曆) 1041년 ~ 1048년 황우(皇祐) 1049년 ~ 1054년 지화(至化) 1054년 ~ 1056년 가우(嘉祐) 1056년 ~ 1063년 |
1022년 ~ 1063년 |
제5대 | 송 영종 (宋英宗) |
체건응력융공성덕헌문 숙무예성선효황제 (體乾應歷隆功盛德憲文 肅武睿聖宣孝皇帝) |
조서(趙曙) | 치평(治平) 1064년 ~ 1067년 | 1063년 ~ 1067년 |
제6대 | 송 신종 (宋神宗) |
소천법고운덕건공영문 열무흠인성효황제 (紹天法古運德建功英文 烈武欽仁聖孝皇帝) |
조욱(趙頊) | 희녕(熙寧) 1068년 ~ 1077년 원풍(元豊) 1078년 ~ 1085년 |
1067년 ~ 1085년 |
제7대 | 송 철종 (宋哲宗) |
헌원계도현덕정공흠문 예무제성소효황제 (憲元繼道顯德定功欽文 睿武齊聖昭孝皇帝) |
조후(趙煦) |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소성(紹聖) 1094년 ~ 1098년 원부(元符) 1098년 ~ 1100년 |
1085년 ~ 1100년 |
제8대 | 송 휘종 (宋徽宗) |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 인덕헌자현효황제 (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 仁德憲慈顯孝皇帝) |
조길(趙佶) |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중화(重和) 1118년 ~ 1119년 선화(宣和) 1119년 ~ 1125년 |
1100년 ~ 1125년 |
제9대 | 송 흠종 (宋欽宗) |
공문순덕인효황제 (恭文順德仁孝皇帝) |
조환(趙桓) | 정강(靖康) 1126년 ~ 1127년 | 1125년 ~ 1127년 |
남송 황제와 연호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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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 송 고종 (宋高宗) |
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 무문소인헌효황제 (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 武文昭仁憲孝皇帝) |
조구(趙構) | 건염(建炎) 1127년 ~ 1130년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 |
1127년 ~ 1162년 |
제2대 | 송 효종 (宋孝宗) |
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 신무명성성효황제 (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 神武明聖成孝皇帝) |
조선(趙昚) | 융흥(隆興) 1163년 ~ 1164년 건도(乾道) 1165년 ~ 1173년 순희(淳熙) 1174년 ~ 1189년 |
1162년 ~ 1189년 |
제3대 | 송 광종 (宋光宗) |
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 순무성철자효황제 (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 順武聖哲慈孝皇帝) |
조돈(趙惇) | 소희(紹熙) 1190년 ~ 1194년 | 1189년 ~ 1194년 |
제4대 | 송 영종 (宋寧宗) |
법천비도순덕무공인문 철무성예공효황제 (法天備道純德茂功仁文 哲武聖睿恭孝皇帝) |
조확(趙擴) | 경원(慶元) 1195년 ~ 1201년 가태(嘉泰) 1201년 ~ 1205년 개희(開禧) 1205년 ~ 1208년 가정(嘉定) 1208년 ~ 1225년 |
1194년 ~ 1224년 |
제5대 | 송 이종 (宋理宗) |
건도비덕대공부흥열문 인무성명안효황제 (建道備德大功復興烈文 仁武聖明安孝皇帝) |
조윤(趙昀) | 보경(寶慶) 1225년 ~ 1227년 소정(紹定) 1228년 ~ 1233년 단평(端平) 1234년 ~ 1236년 가희(嘉熙) 1237년 ~ 1240년 순우(淳祐) 1241년 ~ 1252년 보우(寶祐) 1253년 ~ 1258년 개경(開慶) 1259년 경정(景定) 1260년 ~ 1264년 |
1224년 ~ 1264년 |
제6대 | 송 도종 (宋度宗) |
단문명무경효황제 (端文明武景孝皇帝) |
조기(趙禥) | 함순(咸淳) 1265년 ~ 1274년 | 1264년 ~ 1274년 |
제7대 | 송 공종 (宋恭宗) |
효공의성황제 (孝恭懿聖皇帝) (가국공<嘉國公>) |
조현(趙顯) | 덕우(德祐) 1275년 ~ 1276년 | 1274년 ~ 1276년 |
제8대 | 송 단종 (宋端宗) |
유문소무민효황제 (裕文昭武愍孝皇帝) |
조시(趙昰) | 경염(景炎) 1277년 ~ 1278년 | 1276년 ~ 1278년 |
제9대 | - | 소황제 (少皇帝) (유주<幼主>, 위왕<衛王>) |
조병(趙昺) | 상흥(祥興) 1279년 | 1278년 ~ 1279년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뛰어난 문장가 여덟 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는 다음과 같다.
여덟 사람 중, 소순·소식·소철은 부자형제 사이이며, 묶어서 삼소(三蘇)라 부른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사마광이 지은 중국 고대사를 담은 역사책이다. 통감이라 줄여 말하기도 한다.
북송 영종 때 역사 관계의 책이 방대하여 황제가 두루 이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사마광에 명하여 《통지》(通志) 8권을 만들게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2제(二帝) 19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1084년(신종 7년) 11월에 이르러 완성한 실로 294권에 달하는 거대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주(周)의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에서 시작하여 송(宋)의 전·5대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6년(959년)에 끝맺고 있다.
기술은 통사(通史)·편년사(編年史)의 체재를 취하고, 구양수의 《신오대사》(新五代史)와 같이 《춘추》(春秋)에서 그 규범을 모방하고 있다. 사마광이 이 책을 제작한 의도는 전국 시대에서 5대(五代)까지 1362년의 정치적 변천을 더듬어 그 치란흥망(治亂興亡)을 정돈함으로써 대의명분을 밝혀 제왕(帝王)의 치정의 거울로 삼는 데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 자신의 역사관이 대의명분에 집약적으로 관철되어 있다. “신(臣)의 정력이 이 서(書)에 다하였도다”라고 그가 상주(上奏)한 바 있는 19년간의 수사 사업(修史事業)에는 각 왕조의 정사(正史) 외에 잡사(雜史) 322종이 사용되고, 부산물로서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 《통감목록》(通鑑目錄), 《통감석례》(通鑑釋例), 《계고록》(稽古錄) 등의 저술이 생겼다.
《자치통감》 및 이런 유의 저서가 송대에 미친 영향은 크며 통감 제작에 관하여 범조우(范祖禹)(1041∼1098)의 《당감》(唐鑑)은 정통론의 기초가 되어 호안국(胡安國)의 《춘추전》(春秋傳),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이 나오게 되었다.
사마광(司馬光; 1019년 - 1086년)은 중국 북송 대의 유학자이자 역사가, 정치가이다. 자(字)는 군실(君實). 섬주 하현(陝州 夏縣;산시 성) 사람으로 호(號)는 우수(迂叟). 또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렸다. 시호는 문정(文正). 온국공(溫國公)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선조는 서진(西晋)의 고조(高祖) 선제(宣帝) 사마의(司馬懿)의 동생 사마부(司馬孚)라고 한다. 자치통감의 저자로서 유명하다.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의 다툼에서 구법파의 영수로서 왕안석과 논쟁을 벌였다.
1038년에 진사(進士)가 된다. 부친도, 조부도 진사였다.
1067년 북송 신종(神宗)이 즉위하고 왕안석을 기용하여 신법을 단행했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学士)였던 사마광은 당초 개혁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이 관료의 기득권을 침범하고 정치의 일신을 도모하자, 곧 반대 입장으로 바꾸고 추밀원을 근거지로 한 왕안석 반대파(이른바 구법파)와 연계하여 강행하는 신법 반대를 주장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신법의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에, 마침내 조정에서 퇴출되어 부도(副都) 낙양에 사실상의 은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 이후 사마광은 구법파 동조자와 함께 신법의 반대를 끝까지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조정의 의향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사마광이었지만 선대 영종(英宗)이후 신종에게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특히 <자치통감>의 편찬을 생각한 후에는 영종에게서 특별히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그 완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또 신종의 신법에 반대하여 수도에서 쫓겨난 사마광이었지만 역으로 신종에게서 <자치통감>을 완성하라는 명을 받았다. 즉 이 책은 사마광의 낙양 은거때 완성되었다.
1085년 신종이 붕어하고 북송 철종(哲宗)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섭정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의 명령으로 재상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이때 사마광은 신법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모두 신법실시이전의 법으로 되돌려 정권을 운영했으나, 매우 극단적이기에 같은 신법의 폐지를 주장하던 친구, 부하들에게도 반대받을 정도였다. 더해서 사마광의 명성은 천하에 울려퍼질 정도로 영향력이 있어 많은 관료가 사마광의 발언에 영합해 거꾸로 신법 여러 정책 중에 근간 중 하나였던 역법(役法)을 변경할 정도였기에 그 폐해는 이후 10년 가까이 영향을 끼쳤다. 바라던 신법 폐지에 전력을 기울이던 사마광이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평가
오래전부터 사마광의 평판은 매우 높았다. 그것은 그가 속한 구법파의 흐름을 따르던 주자학이 학계에 군림하였고 사마광을 격찬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 입장에서 본다면 사마광은 군자 중에 군자로, 또 시시비비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이후 발전한 경제사학적인 입장으로 본다면 사마광은 오랜 대지주, 대상인을 옹호하고 이들의 정권세습 타파를 노리던 신법을 배제하는 반동적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의 의의를 모두 이해하지 않았고 단지 수구파의 영수 이외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사마광이 재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서거했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법을 대신할 방책을 고려했지만 이것을 바꿀 때까지의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자치통감
<자치통감>은 기년체 전성시대였던 시기 과감하게 경서 춘추의 편년체를 기초로 제작된 역사서이다. 춘추이후부터 송나라 이전의 5대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 이 책은 황제로부터 편의를 받을 정도였으나, 당시 사학자중에 제1인자였던 유?(劉?) 및 한대사의 저명한 연구자 유?(劉?), 제자 범조우(范祖禹) 등의 도움을 얻어 당시 모을 수 있었던 사료를 망라한 자료집을 만들었고, 이것을 사마광이 손을 더하는 방법을 거쳐 제작하였다. 책 이름처럼 황제의 치세도구를 위해 만든 책이기도 했으며, 사마광의 이름도 기록되어, 높은 호평을 얻었다.
일화
- 사마광이 어렸을 때 그의 친구들과 함께 화원에서 놀고 있었다. 화원 안에는 가산(假山)이 있었으며 가산 아래에 커다란 물항아리가 있었고 그 물항아리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친구들과 가산 위에 놀고 있을 때 어떤 아이가 조심하지 않아 큰 물항아리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친구들 모두 당황하였으며 어떤 아이는 울었고 어떤 아이는 소리쳤으며 어르신을 찾으러 뛰어갔다. 사마광은 당황해 하지 않고 돌 하나를 들어 항아리를 맞추어 때려 부셨다. 항아리 속 물은 흘러나왔고 물항아리에 빠진 친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 사마광은 또한 신동으로 알려져 있어 7살때 좌씨춘추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집의 사람들에게 들었던 내용을 강의를 했었다고 한다.
성리학(性理學)은 12세기에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유교의 주류 학파이다. 성리학의 어원은 주희(朱熹)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를 축약한 명칭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도 하고, 송대(宋代) 이전의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점을 비출 때에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한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頥), 주희로 이어지는 학통 때문에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 또는 정주 이학(程朱理學), 정주학으로도 불린다.
학문의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수양, 수기)를 위한 학문)이다.
주자 이전
대략 진종조(眞宗朝)로부터 인종조(仁宗朝, 998-1063)에 걸친 시기에 송나라의 학문 문화가 새로운 경향을 가지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범중엄(范仲淹)이나 정학(正學)의 4선생으로 호칭된 호원(胡瑗), 손복(孫復), 석개(石介), 진양(陳襄) 등은 각기 특색있는 학풍이나 주장을 가지고 서로 잇따라 나와 성리학의 선하(先河)를 이루었다. 범중엄은 그 명절(名節)과 고매한 식견으로 시대의 선구자로서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서하(西夏) 경영에 정치적 수완을 보여 중앙정부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학문적으로는 6경(六經)에 통하였으며 더욱이 역(易)에 정통하였고 장횡거(張橫渠)에게 《중용》을 주어 유학의 문에 들어가게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호원(胡瑗, 933-1059)은 안정 선생(安定 先生)이라고 호칭되며 교육가로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정이천(程伊川)도 그 문하에서 배운 준재(俊才)이다. 그의 <주역구의(周易口義)>는 역(易)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한대 유가(儒家)와 같이 상수론(象數論)을 혼합하지 않았다. 이천(伊川)의 역전(易傳)에 그 영향이 보인다. 손복(孫復, 992-1057)은 태산선생(泰山先生)으로 호칭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태산(泰山)에 은퇴하여 강학(講學)에 힘을 쏟았으며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저술에서 종래의 주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운 자기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중에도 다시 <춘추(春秋)>의 본지(本旨)를 정명정분(正名定分)에 있다고 하고 또 <춘추>에 실린 사실을 전부 도의에 위배된 것뿐이라고 하였다. 손복 및 그 제자인 석개(石介, 1005-1045)는 춘추론을 통하여 중국(宋王朝)의 정통성과 고전사상의 정통적 부활 및 양(楊)·묵(墨)·불(佛)·노(老) 사상의 배격을 주장하여 송조 국가체제의 정신적 지주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다시 진양(陳襄)은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의거 실천도덕론을 전개하여 <성명기(誠明記)>와 함께 송대 도덕의 궁리진성(窮理盡性)·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의 방향을 잡아 놓았다. 그의 지방정치에 있어서의 권농정책(勸農政策)이나 향촌민(鄕村民)의 교도에 이용한 <고령선생권유문(古靈先生勸誘文)>은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에 이르러서 크게 채택되어 그 모범이 되었다.
주자의 집대성
주자(朱子)의 학문은 북송(北宋)에서 일어난 신경향의 학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이것을 절충하고 또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또 4서(<大學>·<中庸>·<論語>·<孟子>)를 특별히 중요시 하여 주석을 하였고, 《대학》의 <성의(誠意)>장의 주해는 죽기 3일 전까지 계속해서 수정했다.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에서는 정이천(程伊川)의 2원론(二元論)을 계승하여 다시 더욱 상세·엄밀하게 체계화하였다. 형이상적(形而上的), 형이하적(形而下的) 논리 구별을 분명하게 하였다. 또 주돈이의 태극론(太極論)도 받아서 태극(太極)은 오직 1개의 이(理)의 자(字)라고 규정하여, 이(理)=태극(太極)=도(道:形而上的)와 기(氣)=음양5행(陰陽五行:形而下的)인 것은 형이하(形而下)의 음양2기(陰陽二氣)의 교감에 의해 생성되는 개체(個體)와 상즉불리(相卽不離)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도덕론(道德論)
도덕론에서 이천이 명(命)·성(性)·이(理)·심(心)을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성즉리(性卽理)>, <심즉리(心卽理)>라고 한 데 대하여, 주자는 <성즉리(性卽理)>만을 취하고 심(心)은 형이하적(形而下的)인 것, 즉 음양2기(陰陽二氣)의 작용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사람의 성(性)은 이(理)이고 지선(至善)한 것이며 사람의 본연의 것이라고 하였다. 심(心)은 이(理)가 있는 곳, 이가 작용하는 장소이다. 또한 심(心)의 발동은 이(理)에 의하여 있게 되는데, 그 이야말로 사람에게 본래의 성(性)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본연의 성(性)이 지선(至善)하지만 현실에는 악도 존재하고 악인도 있다. 그것은 기품(사람도 氣의 집합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 그 氣가 모이는 방법, 氣를 받는 방식은 개별적인 것이라고 朱子는 생각하였다)에 과불급(過不及)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理)=태극(太極)이라고 하는 형이상적인 것은 항상 사사물물(事事物物) 속에 있다. 사사물물이 없으면 다라서 이(理)는 없다. 즉 1물(一物)에 1리(一理)=1태극(一太極)이 있는 것이다. 논리적 과정을 말하면 이(理)가 있어야 물(物)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물(物)이 없는 이(理)는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이기(理氣)에 선후는 없다고 한다. 또 주자에 의하면 1물(一物)에 1태극(一太極)이 있는데, 이 이(理)는 즉 만물의 이(理)이다. 달이 호수나 냇물에 비쳐도 달은 원래 하나의 것이다. 일반자(一般者)·형이상자(形而上者)는 항상 개체(個體)에 내재하여 개체(個體)를 통하여 일반자(一般者)는 실현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도덕론에 적용되면 사람은 자기의 본연(本然)의 성(性)(理)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덕을 완성하는 것이며, 개별적 인간은 실천에 의하여서만 일반자(一般者)로서의 도(道)∼이(理)-성(性)을 구현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양론(修養論)
수양론은 우선 격물치지(格物致知)이며 궁리진성(窮理盡性)인 것이다. 주자에 의하면 사사물물의 이를 궁구한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궁구하는 것이며 나를 다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물(物)의 이(理)와 심(心)의 이(理)와 심(心)의 이(理)와의 통일적인 파악에는 아직 불충분한 점이 있었다. 육상산(陸象山)이나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이 그 정곡을 찔러 비판했다.
후대에 미친 영향
주자사상(朱子思想)이 송대 이후 끼친 영향은 지극히 크다. 주자학은 주자의 생전에 있어 지방관적, 재야적(在野的) 입장에서의 사상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원(元)·명(明)을 거쳐 청조에 이르기까지 관학적(官學的)인 아카데미즘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조선이나 일본(日本)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주자의 사상이 봉건사회에 있어서 지배계급의 상하적 신분의 확립을 지향하는 논리라고 하는 것이 용이하게 지적되고 있지만, 그 학식·논리 구성·학문적 태도는 의연히 중국사상 내지 동양사상의 해명에 있어 중요한 지위를 점거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주희(朱熹, 1130~1200)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성(姓)은 주(朱), 휘(諱)는 희(熹)이며, 자(字)는 원회(元晦)·중회(仲晦)이다. 그리고, 호(号)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창주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이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맹자·공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정호·정이 등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희는 주렴계, 정주로 대표되는 이전 송학의 흐름을 이어받아 이를 집대성하고 종래 유교가 불,도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었던 이론적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서 한당의 훈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 잡게 하고자 했다.
이후 주자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도 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우주만물을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서 구성되어있다고 보고,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가 발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불순한 기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로 이뤄진 우주와 만물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운동법칙, 원리로서 태극을 제시한다.
이상의 개념들을 통해 주자는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정이(程頤)의 성즉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주자는 동시에 젊은 시절 탐독했던 불교와 도교의 사상에서 받았던 영향에서 착안하여 유학의 사상적 이학적 내용을 풍성하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주자문집
주자문집(朱子文集)은 주희(朱憙)가 쓴 문장(文章)을 집록(集錄)한 100권의 서(書)이다. 여기에 수록된 주자의 글은 실로 다종다양하다. 특히 그의 상주문(上奏文)·사면문(辭免文)·기(記)·공이(公移) 등등은 주자의 구체적인 정치활동이나 정치사상을 아는 데 지극히 중요한 자료이다. 또 서간문(書簡文)·잡저(雜著)·기(記) 등은 주자의 학문사상을 아는 데 있어 《어류(語類)》와 함께 필독해야 할 부분이다. 기타 이 문집(文集) 100권은 별집(別集)·속집(續集)을 합하여 주자의 사상이나 역사적 성격을 전체적으로 규정하는 점에서 필요 불가결한 자료이나, 종래 주자를 논하는 사람 가운데서 문집을 자세히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주자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설이나 해석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적 보고(寶庫)라 해도 무방하다.
사서집주
오경(五經) 뿐만 아니라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유학의 핵심 경전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저술하였고 이후에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서 귄위를 부여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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