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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0 (오대십국 시대 : 오대) 본문
중국의 역사 50 (오대십국 시대 : 오대)
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60년)은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건립된 960년까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했던 5개의 왕조(오대)와 화중·화남과 화북의 일부를 지배했던 여러 지방정권(십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를 가리킨다. 오대십국의 오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된 해는 당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907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조로서의 당나라는 875년~884년에 걸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고, 그 후 장안을 중심으로 관중 지역을 지배한 일개 지방정권으로 추락하여 주전충과 이극용 등 절도사 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난립 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대략적인 내용을 황소의 난 시점부터 설명하겠다.
황소의 난(黃巢-亂)은 당나라 희종 연간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이다. 875년~884년사이에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에 시작된 환관의 횡포와 인민의 수탈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토호나 상인층이 반당나라 경향으로 돌아선 것과 기근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장 성에서 구보의 반란(859년 - 860년), 쉬저우에서 방훈의 반란(868년 - 869년) 등이 이전에 일어났고 황소의 난은 이러한 반란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산둥 성의 왕선지(王仙之), 황소(黃巢) 등이 난을 일으켰다. 선지가 죽은 뒤, 황소는 선지의 잔당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켰다. 황소와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대부분 황소와 혈연을 맺은 자, 원래는 부하였던 자, 파산 농민, 유랑 무리, 부패한 당나라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었다.
황소와 이들은 당나라 전역에서 약탈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희종은 쓰촨 성으로 망명했다. 희종이 망명한 뒤, 황소는 장안으로 들어가서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에게 항복한 군인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사실상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그리고 황소의 세력은 단지 장안 근교밖에 그 세력이 미치치 못하였으며, 결국 황소의 군대는 이극용에게 격파당했고, 황소 또한 동쪽으로 도망간 뒤 산둥 성의 타이산 산 부근에서 자결했다.
이 난은 당나라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나라 완전 멸망 때까지
당나라의 중앙정부는 755년~763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에 의해 많은 힘을 잃어버렸다. 이를 틈타 각지의 절도사 세력은 자립성이 강해져 자신들의 임지를 스스로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먼 지방의 절도사 중에는 중앙에 대한 납세마저도 거부한 자가 있었다. 이에 대해 역대 황제들은 억제책을 고안해 부분적으로 절도사를 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용했던 환관세력이 도리어 힘을 갖게 되어, 정치에 과도하게 참여하게 되어 황제의 폐립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이런 폐단으로 중앙정부는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다시 절도사들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황소의 난이 발발했다. 정부군은 추락할 때까지 추락하여 별로 강하지 않은 황소군에 대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세간에는 황소군을 전멸시키면 자신들의 입장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두려워해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황소군은 장안을 함락했고, 황제 희종은 촉으로 도망쳤다. 당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황소군이 장안에서 폭정을 일삼아, 장안 시민의 실망과 분노를 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당나라 정부에서는 장안을 회복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 여기서 돌궐 사타족 출신의 이극용과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한 주온(후에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이 활약하여 장안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당나라의 실력이 만천하에 폭로되었고, 황제는 명목상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주의 동천(東遷) 이후(춘추시대)나 후한말기 헌제 등의 상황과 비슷하였다.
이 시기 중앙을 두고 다투었던 이들이 변주(汴州;현재의 카이펑)를 중심으로 산동, 하남을 지배한 주전충과 태원을 중심으로 산서를 지배하던 이극용, 하북을 지배한 유인공이나 섬서 일대를 지배한 이무정 등이다. 그외의 지역에서도 자립한 이들이 많아 후에 10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극용의 군대는 검은색 의복으로 통일하여 이들을 통칭 [갈가마귀군(鴉軍)]이라 불렸고 전투에 매우 강했지만 횡폭한 행동을 많이 했었다. 주전충은 정략(政略)에 뛰어나 다른 누구보다도 한발 앞섰다. 당조정을 장악한 주전충은 황제를 꼭두각시화하고 907년 협박하여 선양을 받아 후량(국호는 단순히 양(梁)이었다. [후](後)의 글씨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을 건국하였다. 이로써 당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후량
후량(後梁 907년~923년)은 오대십국 시대 오대(五代)의 첫번째 왕조이다. 당나라 말기 혼란한 정세속에 당나라 조정을 장악한 군벌 주전충이 907년 당나라 소선제(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수도는 카이펑(開封)이다. 남북조 시대 괴뢰정권인 후량이나 남조 양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주량(朱梁)이라 부르기도 했다.
주전충은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평정한 인물로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는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가 되어 변주(지금의 하남 카이펑 부근)를 다스리게 되었고, 변주가 당나라 말기 최대의 번진이 되어 양왕(梁王)에 봉해지게 되었다. 904년 윤4월 장안에 있던 소종을 낙양으로 데려와 8월 살해하고 13세 된 이축을 제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애제이다.
907년 6월 1일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였다. 국호는 대량(大梁), 건원개평이라 하였다. 후량의 지배 영역은 중원의 5개 왕조 중 가장 작아 지금의 하남성, 산동성 지역과 섬서, 호북의 대부분, 하북, 영하, 산서, 강소, 안휘성등의 일부를 다스렸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시기, 진왕(晋王) 이극용등 당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 자립한 군벌(절도사)들은 후량의 선양을 인정하지 않고, 각지에서 자립했기 때문에 오대십국의 분열시대가 찾아왔다. 후량을 건국한 후에도 주전충은 이극용과 격렬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8만의 군사를 이끌고 주전충은 이극용이 있던 노주(潞州)를 반년간 포위했다. 다음해 이극용이 죽고, 그의 아들 이존욱이 진왕이 되어 반격에 나서자 포위를 풀었다.
910년 후량의 공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왕 이존욱이 구원하러 나섰기에 911년 초 백향(柏鄉;지금의 하북에 속함)에서 진군과 후량군이 격전을 벌였다. 하루 동안 벌어진 격전에서 후량은 대패하였고, 진군은 150여리나 추격하였다. 주전충은 이에 놀라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서 방어진을 구축했다. 백향 전투에서 후량의 주력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이 때문에 후량의 세력은 쇠퇴하였다.
다음해 주전충은 이존욱을 공격하기 위해 약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하지만 이존욱이 대군을 이끌고 반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군을 후퇴시켰다.
태조 주전충은 912년 병석에서 양자 박왕 주우문을 후계자로 세웠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친아들 영왕 주우규에 의해 살해당했다. 제위에 오른 주우규는 인망을 얻지 못해 동생 균왕 주우정에게 살해당하고 제위를 빼앗겼다.
915년 봄 이존욱과 싸워 태행 황택령, 덕주, 연주에서 후량군은 연패했다. 다음해 봄 왕단(王檀)이 3만을 이끌고 태원을 공격했으나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918년 8월 이존욱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자 후량군은 이를 맞아 싸웠다. 12월 하순 호류파(胡柳陂 ;지금의 복양 서남쪽)에서 양군은 격돌하여 혈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진군의 명장 주덕위가 후량군 기병대장 왕언장에게 패해 전사했다. 위기에 빠진 진군을 구한 것은 진군 장수 이사소, 왕건급이 이끄는 기병으로 후량의 보병을 격파해 후량은 대패하여 3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생겼다. 하지만 진군도 다수의 사상자가 생겨 후량과 진군의 전투는 일단 소강상태에 빠졌다. 921년 진주를 포위한 진군을 후량군이 공격해 격파하여 진군은 약 2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923년 진왕 이존욱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당이라 하며 나라를 세웠다. 역사상 후당이었다. 윤 4월말 이사원이 이끄는 5000 기병이 후량을 기습했다. 후량은 왕언장을 총사령관으로 단의를 부사령관으로 한 10만의 정병을 이끌고 후당을 공격했다. 장종 이존욱 또한 직접 군을 이끌고 양유에서 격전을 벌여 후량군을 격파했다. 왕언장은 중도현에서 참수되었다. 923년 11월 19일 후당군이 카이펑을 함락시키자 후량은 멸망하게 되었다. 주우정은 자살하였다. 이로써 후량의 황제는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3대 16년이라는 짦은 통치를 마쳤다.
역대 황제
- 태조(太祖, 주전충(朱全忠), 재위 : 907년 ~ 912년)
- 영왕(郢王, 주우규(朱友珪), 재위 : 912년 ~ 913년)
- 말제(末帝, 주우정(朱友貞), 재위 : 913년 ~ 923년)
명신, 명장
주전충(朱全忠 852년 10월 21일~912년 6월 2일, 재위 907년~912년)은 오대십국시대 후량의 창건자로서 초대 황제이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신무원성효황제(神武元聖孝皇帝)이다. 원래 이름은 온(溫)이었는데, 황소의 난 때 공적을 세워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받아 개명하였다. 황제가 되어서는 황(晃)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어릴 때는 주삼(朱三)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주성(朱誠), 조부는 주신(朱信)이라고 한다.
주온은 가난한 농부출신으로, 유년기에 알려진 아버지를 잃은 후, 형과 함께 어머니 왕씨를 모시고 친척뻘인 부호 유숭(劉崇, 십국의 하나인 북한의 창건자)의 집에서 소작을 하며 살았다. 허나 그는 농업을 싫어하고 학문과 무예에 전념하였다. 황소의 난이 발발하자, 둘째 형인 주존과 함께 황소의 무리에 가담해 두각을 드러냈다. 주존은 도중에 전사했다고 전한다. 황소는 장안을 함락하고 대제를 세웠으나,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하여 이후 대제는 자멸의 길에 들어섰다.
처음부터 황소는 인망이 있었던 주전충을 경계하고 있었다. 당연히 주전충도 그 일을 민감하게 알아채고 있었다. 촉에 있던 당나라 장군 왕중영이 주전충에게 밀사를 파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주전충은 왕중영과 내통하게 되었다. 그 후 주전충은 장안에서 황소를 배신하고 이들을 격퇴하여 몰아내었다. 이 전공으로 주전충에게는 왕중영은 물론 당나라로부터 사례가 내려졌다. 당나라 조정은 좌금오위대장군-하중행영부초토사의 지위와 함께, 당나라에게 충성하라는 의미가 있는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후 그는 당나라 무장으로서 주전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곧 당나라 왕실에게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강요한 후, 기어코 제위를 찬탈하였다.
주전충은 절도사로 승진한 후, 황소에 대해 함께 싸웠던 이극용과 당 조정 내부에서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주전충은 이 싸움에서 승리해 당나라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시기 당나라는 장안 일대만을 보유한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였고, 각지에서는 절도사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904년 주전충은 소종(昭宗)을 살해하고 그의 9번째 아들인 13살의 소선제(昭宣帝,애제哀帝)를 제위에 올리고 선양의 준비에 나섰다. 907년 주전충은 소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을 양(梁)으로 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산동의 제음왕으로 격하된 소선제는 908년 주전충의 명에 의해 독살되었다.
황제에 즉위한 주전충은 무계획한 행동을 일삼았다. 같은 해 심복인 이진, 장현운 등이 당나라 고관들을 황하에 던져버리라는 진언을 하였고, 주전충도 흥미을 표시해 실행에 옮겼다. 이에 당나라의 고관이었던 배구, 독고손, 최원, 왕부, 조숭 등 30여명이 백마역에서 처형되어 그 시체가 황하에 버려졌다고 전한다. 또한 여성관계에서도 절도를 잃어 자신의 양자였던 주우문의 아내와도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912년 연로한 주전충은 병이 들어 제위를 양자인 박왕(博王) 주우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셋째 아들 영왕(郢王) 주우규가 주전충을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하였다.
왕언장(王彦章 862년? ~ 923년)은 자(字)는 현명(賢明)이며 운주수장(鄆州寿長)사람이다. 중국 오대십국 시대 후량의 대표적 무장이다. 무용, 무략에 뛰어나 군졸로 시작해 차례로 군공을 세워 후량 건국후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항상 선봉으로써 용맹한 싸움을 벌여 왕철창(王鐵槍)이란 이명을 가졌다. 후당의 주덕위와 비견되어 이존욱에게도 외경받아, 처자을 인질로 복종을 요구받았으나 사자를 베어버리고 거절했다. 오랫동안 요직에 있었으나, 923년 선의군절도부대사지절도사에 북면초토사을 겸직하여 후당군을 격퇴했으나, 균왕 측근과의 반목으로 참언을 받아 마지막엔 후당군과 싸우다 사로잡혔다. 항복을 요구받자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거절하고 참수당했다.
후당
후당(後唐 923년~936년)은 오대십국 시대 중 오대(五代)의 두번째 왕조로 진왕(晉王)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건국한 나라이다.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여 국호를 당나라라고 하였는데, 구별하기 위해 후당이라 불리었다. 수도는 낙양이다.
당나라 말기 돌궐 사타족 출신의 이극용이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서 진양(晋陽;태원)에 주둔하여 산서지방에서 일어난 군벌(진(晋)나라)이 그 전신(前身)이다. 이극용은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진왕의 지위를 제수받았으나, 라이벌 주전충과의 세력다툼에서 패배했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세우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량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극용의 사후, 아들 이존욱이 진왕을 계승할 때쯤 후량의 내분이 일어나 서서히 진나라가 우세하게 되었다. 힘을 얻은 이존욱은 923년 위주(魏州)에서 황제를 칭하면서 후당을 건국했다. 같은 해 후량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낙양에 수도를 정했다.
이존욱(장종;莊宗)은 이후 사천지방의 전촉을 멸망시키고, 남쪽 여러나라의 제위를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재통일을 추진했으나, 서서히 교만해지면서 사치와 향략에 빠져 군대의 신뢰를 잃었다. 926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후당은 큰 혼란에 빠졌다. 장종은 부득이하게 이극용의 양자 이사원(후에 명종(明宗)에게 명하여 하북의 반란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이사원의 양자 이종가와 사위 석경당의 책략하에 하북 반군은 이사원을 황제로 옹립하고 오히려 낙양에 쳐들어왔다. 장종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이사원은 반란을 수습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 수도를 낙양에서 카이펑으로 옮기니 그가 바로 후당의 명종이다.
명종은 즉위 후 재상 풍도를 등용하여 정치를 바로 잡고, 열심히 다스렸기에 상당한 치적을 쌓았고 조정안팎은 매우 안정되었다. 다만 군인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지게 된 것이 불안요소였다. 치세기간은 비교적 평온하게 보냈으나 만년에 이르러 제위를 둘러싼 혼란이 일어났다. 933년 명종이 병으로 쓰러지자 진왕(秦王) 이종영이 찬탈을 노리고 명종을 살해하려 병사를 이끌고 궁전에 들어왔으나 결과적으로 찬탈은 실패하고 이종영은 살해되었다. 명종은 아들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사실을 알고 놀라 사망하였고, 대신들은 상의끝에 송왕(宋王) 이종후가 뒤를 잇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민제이다.
민제의 즉위 후 채용한 삭번정책은 군인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명종의 양자 노왕(潞王)이종가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에 쳐들어와 제위를 빼앗았다. 민제는 부인을 데리고 하북으로 도망쳤으나 이종가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종가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말제이다.
말제가 즉위하였지만 이번엔 이종가와 함께 명종의 오랜 심복이면서 명종의 사위였던 석경당과 불화가 일어나 석경당이 진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말제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태원을 공격하자, 석경당은 북쪽의 거란에게 항복하여 원군을 요청하였고,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격파했다.
석경당은 거란의 힘을 빌려 스스로 제위에 올라 936년 후진을 건국했다. 937년 1월 거란과 합세한 석경당의 대군이 낙양을 공격하자 말제는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고, 후당은 멸망하였다.
후당의 지배영역은 하남, 산동, 산서, 하북, 섬서 북부, 감숙 동부, 호북 북부, 안휘 북부에 이르렀다.
역대 황제
후당 923년 ~ 936년 | ||||
장종(莊宗) | 광성신민효황제(光聖神閔孝皇帝) | 이존욱(李存勖) | 923년 ~ 926년 | 동광(同光) 923년 ~ 926년 |
명종(明宗) | 성덕화무흠효황제(聖德和武欽孝皇帝) | 이사원(李嗣源) | 926년 ~ 933년 | 천성(天成) 926년 ~ 930년 |
민제(閔帝) | 이종후(李從厚) | 933년 ~ 934년 | 应顺 933년 ~ 934년 | |
말제(末帝) | 이종가(李從珂) | 934년 ~ 936년 | 청태(清泰) 934년 ~ 936년 |
명장,명신
이극용(李克用 856년~908년)은 중국 당나라말기 돌궐계 사타족(沙陀族) 출신의 최대 군벌이자 군사지도자이다. 후당의 건국자 이존욱은 그의 아들이며, 그에 의해 태조(太祖) 무제(武帝)라 추증받았다. 훗날 명종(明宗)이 된 이사원의 의부(義父)이기도 하다. 당나라 말기 갈가마귀군(鴉軍)이라 불리는 정예병을 이끌고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최대의 공적을 세워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진왕(晉王)에 봉해졌다. 이후 동료이자 라이벌인 주전충과 격렬한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이극용의 본성은 돌궐풍으로 주사(朱邪) 혹은 주야(朱耶)로, 아버지 주사적심(朱邪赤心)이 삭주자사(朔州刺史)를 지내면서 방훈의 난(龐勛)을 진압하고 방훈을 토벌한 공적을 세워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당나라의 국성(國姓)을 하사받은 것이다. 주자적심은 이국창(李國昌)이라 이름을 고쳤고, 후에 손자 이존욱으로부터 소열황제(昭烈皇帝)의 시호와 의조(懿祖)의 묘호를 추증받았다.
이극용은 이국창의 3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진씨(秦氏)였다. 이극용은 태어날때부터 한쪽 눈이 작아서 그 때문에 주변에서 그를 ‘독안룡(獨眼龍)’이라 불리게 되었다. 작호(綽號)는 아아(鴉兒)이고, 군대에 있을 때 불려진 명칭은 비호자(飛虎子)였다.
이극용은 어릴 적부터 날쌔고 용맹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15살의 나이에 전쟁에 참가했다. 당나라 정부에서는 그를 사타 부병마사(副兵馬使)로 임명하였다. 878년 대북(代北;현재의 산서성 북부)이 기근에 휩싸였다. 대동(大同)방어사 단문초(段文楚)는 식량과 관련하여 병사들을 엄히 법으로 다스려 병사들의 원한을 샀다. 이극용은 단문초를 살해하고 880년 다시 하동절도사 강전규(康傳圭)을 살해하고 태원을 점령했으나 당나라군에게 패해 북으로 도망쳤었다.
881년 당나라 정부는 이극용부자의 죄를 용서해주고 대신 황소의 토벌을 맡겼다. 황소는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를 칭하면 제(齊)나라를 건국하였다. 이극용은 용병(用兵)의 천재로서 온몸을 검은색 복장으로 통일된 정예부대을 이끌었는데, 모두들 "검은 갈가마귀 군대(黑鴉軍)" 혹은 갈가마귀군(鴉軍)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주위로부터 그 용맹함에 두려움을 느꼈다.
882년 이극용은 2차 조칙을 받들어 아문절도사(雁門節度使)에 임명되었고, 근왕이 되어 사타군을 다시 이끌고 남하하여 황소군과 대치하여 883년 황소군을 격파했고, 황소는 장안에서 물러났다. 이극용은 장안수복의 최대공로자가 되어 그 공적으로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태원(太原)을 중심으로 한 일대)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아직 황소군은 건재했고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주전충등 각 진(鎭)은 독자활동을 했기에 재차 하동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884년 이극용은 다시 하동을 남하하여 황소군을 격파하여 최종적으로 황소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이극용은 황소군을 격파한 후 하동으로 돌아갔고, 변주(汴州;현재 하남성 카이펑)는 주전충이 입성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이극용은 술자리에서 주전충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치욕을 주었기에 주전충은 병사를 이끌고 하동군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극용은 이들을 물리치고, 태원으로 도망쳤다. 이때부터 둘의 원한은 깊어지게 되었다.
885년에 황소의 난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당 황조는 멸망하고 이극용 같은 실력자가 당나라 조정의 귄위을 이용하여 패권을 다투는 시대가 되었다. 이극용의 최대의 적이자 라이벌이 있었으니 원래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후에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측에 서서 공적을 세운 주온(주전충)이었다.
이극용은 전쟁에는 강했으나 정략에는 주전충에게 뒤졌고, 또한 그의 갈가마귀군도 그 용맹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난폭함으로 변했기 때문에 조정의 평판은 좋지 못했다. 주전충과는 여러 번 격렬한 싸움을 되풀이하였으나, 901년 주전충이 하중(河中)을 손아귀에 넣자 중앙으로 진출이 어려워져서 태원에 갇혀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907년, 주전충에 의해 선양극이 벌어져 후량이 건국되었으나 이극용은 당연히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해 1월에 주전충 타도를 아들 이존욱에게 부탁하고 병사했다. 향년 53세였다.
이극용은 당대 제일의 군벌로써 짧은시기 당나라 정부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워 소영웅으로 평가받았다.
이극용 독수리사건
원래 이름은 이극용 전사비조(李克用箭射飛雕)이다. 풀이하자면 활을 쏘아 날아가는 독수리를 맞추었다는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고사는 <<잔당오대사연의전>>(殘唐五代史演義傳) 제9회 <<극용전복주덕위>>(克用箭服周德威)에서였다. 그외 백복이 만든 <<이극용전사쌍조>>(李克用箭射雙雕)가 있고, 경극 <<주렴채>>(朱簾寨)중에 나오기도 한다.
내용을 보면 당나라 조정의 요청을 받은 이극용은 출정하여 황소군을 토벌할때 주렴채에 도착했다. 이때 황소군 장수인 주덕위가 막아섰다. 이극용은 익히 소문으로 주덕위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말을 몰아 그와 대결을 펼쳤다. 둘이 서로 싸우기를 100여합에 이르렀지만 승부가 나지않자, 이극용은 제안을 했다. [만약 저 하늘위를 날고 있는 독수리를 쏘아 맞춘다면 내가 이긴것이다] 라고 말했고, 주덕위는 그렇게 되면 항복하겠다고 했다. 이극용은 능숙하게 활을 쏘아 독수리를 맞추었다. 오랫동안 수렵생활을 보낸 이극용에게 높은 하늘에서 날고 있는 독수리를 쏘는 건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이극용의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에 놀란 주덕위는 즉시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이렇게 하여 이극용은 화살 하나로 명장으로 소문난 주덕위을 자신의 휘하로 삼을 수 있었다.
이 얘기의 원전은 <<구오대사-무황기상>>(舊五代史‧武皇紀上)에 기재되어 있고, <<신오대사-당본기제4>>(新五代史‧唐本紀第四)에도 그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3개의 화살
이극용과 아들 이존욱사이에 전해진 가장 유명한 고사이다. 송나라 초기 왕우칭(王禹偁)이 <<오대사궐문>>(五代史闕文)에 기록하였는데, 이극용이 죽을 때 3개의 화살을 이존욱에게 주면서 이야기했다.
[유인공부자가 나를 배신하고, 거란의 야율아보기 또한 나와의 맹약을 배신했다. 주량(주전충을 말함)은 나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3개의 화살 중 첫 번째는 유인공에게, 두 번째는 거란에게, 세 번째는 주전충을 멸망시킬 때 각각 사용하거라.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소원이다.
이존욱(李存勗, 885년 ~ 926년, 재위: 909년 ~ 926년)은 오대십국시대 후당의 창건자로서 초대 황제이다. 묘호는 장종(莊宗)이며 시호는 광성신민효황제(光聖神閔孝皇帝)이다.
주전충의 숙적이었던 이극용은 908년에 사망했고, 뒤를 계승한 이존욱(후당의 장종)은 후량에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후량측에서도 주전충의 실정과 추락이 심해 차례로 영토를 빼앗겼다. 거기에다 주전충이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에도 실패해 내분을 초래했다. 이를 지켜본 이존욱은 연왕을 칭하던 유인공을 공격하여 그 나라를 병합했다.
923년 자신감을 가진 진왕 이존욱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당이라 하며 나라를 세웠다. 역사상 후당이었다. 윤 4월말 이사원이 이끄는 5000 기병이 후량을 기습했다. 후량은 왕언장을 총사령관으로 단의를 부사령관으로 한 10만의 정병을 이끌고 후당을 공격했다. 장종 이존욱 또한 직접 군을 이끌고 양유에서 격전을 벌여 후량군을 격파했다. 왕언장은 중도현에서 참수되었다. 923년 11월 19일 후당군이 카이펑을 함락시키자 후량은 멸망하게 되었다.
이극용의 이(李)씨 성은 공적에 의해 당나라로부터 국성(國姓)을 하사받은 것이었다. 이것을 이유로 장종은 스스로가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고 후당을 건국하게 되었다. 후량을 멸망시킨 후, 뒤이어 기왕(冀王)을 자칭한 이무정, 사천을 지배한 전촉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대했다. 그러나 장종의 생각은 당나라의 위광을 되살리는 것으로 낙양으로 천도하고, 주전충이 폐지했던 군대에 환관을 감찰로써 파견하는 제도를 부활시켜 무장들의 불만을 샀다.
이 불만 때문에 926년 무장들이 이사원(후에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사원의 군이 낙양에 육박하자 금군(근위병)들에 의해 장종은 살해당했다.
주덕위(周德威 ? ~ 918년)는 자(字)는 진원(鎭遠)이며 삭주마읍(朔州馬邑)출신의 중국 오대십국 시대 후당을 대표하는 무장이다. 어릴적 자(字)는 양오(陽五)였으며, 용기가 있고, 지혜가 풍부하며 눈에는 광채가 빛나고 웃어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 하였다.
처음엔 당나라의 장군이었다가 황소군에 참가했다. 진왕 이극용을 만나 그의 휘하가 되어 접중기독(帳中騎督)이 되었고, 공적을 세워 오내지휘사(衙内指揮使)가 되었다. 그는 기마전에 매우 뛰어나서 멀리서 피어오르는 사막의 먼지구름을 보고 이것으로 적의 기병의 숫자가 많고 적음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후 진무절도사(振武節度使)-(동중서문하평장사)의 지위에 올랐다.
899년 주전충이 태원을 공격할때 누군가 주덕위를 쓰러뜨린자는 자사(刺史)에 임명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자 후량군에서 한명의 용맹한 무장이 있었는데, 이름은 진장(陳章)이고 호는 진야의(陳野義)라는 사람이 주덕위를 만나는 순간 포로로 잡아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백마를 타고 붉은갑옷을 입고 여러차례 진지를 출입했다. 진왕 이존욱은 이 상황을 보고 주덕위에게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주덕위는 웃으며 말했다.
[진장은 호언장담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덕위는 백마를 타고, 붉은갑옷을 입은 자가 있다면 회피하라고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자신은 무장의 복장을 갖추지 않고, 보통의 병사와 같은 복장을 입었다.
어느날 진장은 출진하여 도전하다가 주덕위의 부하(주덕위가 변장한 모습)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모(矛)를 쥐고 쫓아갔다. 주덕위는 진장의 기마가 자신의 옆을 달려오는 것을 보고 시간차를 노려 추(錘)를 던져 진장을 노렸다. 이것은 보기좋게 진장을 명중시켰고, 진장은 낙마했다. 주덕위는 진장을 말에 싣고 포로로 사로잡았다.
910년 후량이 왕용(王鎔)을 공격할 때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후량의 대군을 무찔렀다. 또한 연(燕)의 유수광(劉守光)을 공격하여 탁주(涿州), 유주(幽州)를 지배하에 두는 공적을 세워 노용군절도사(盧龍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918년 이존욱에게 싸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주의하라는 간언을 했으나 듣지 않아 호류파(胡柳陂)의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다.
풍도(馮道, 882년~954년)는 오대의 정치가이다. 군벌 정권의 혼란 시대에 후당·후진·요(遼:契丹)·후한·후주의 5왕조 11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항상 재상의 지위를 유지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무절조·파렴치한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난세에 처하여 민중 생활의 안정을 잘 보살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관후한 어른이라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또 경서(經書) 인쇄로는 최초로 『구경(九經)』의 간행 사업을 벌였는데, 이것은 문화사상의 공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후진
후진(後晉, 936년~946년)은 오대십국 시대 중 오대의 3번째 왕조로써 후당의 실력자였던 석경당이 세운 국가이다. 국호는 진이었으나, 춘추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의 진(晉)과 구별하기 위해 후진, 또는 창업자 석경당의 성을 따 석진(石晉)이라고 불렀다. 수도는 카이펑(개봉)이고, 이전 국가였던 후당과 마찬가지로 돌궐 사타족계열의 왕조였다.
후진의 건국자 석경당은 사타족출신으로 후당의 개국공신이었다. 후당의 황제 이존욱과 이사원을 따르며, 여러번의 위기에서 후당을 구원하였기에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이사원은 그를 아껴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명종의 대에 석경당은 하동절도사가 되어 그 지역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석경당이 하동에서 쌓은 정치적 실적은 훌륭하였고, 청렴한 생활을 지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명종(明宗) 이사원이 죽자 말제(末帝) 이종가가 제위에 올랐으나, 명종의 사위이자 실력자였던 석경당과 불화가 일어나 석경당은 자신이 주둔하던 진양에서 후당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종가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키자, 석경당은 힘을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북쪽의 거란(요나라)에 항복하는 대신 원군을 요청했다. 힘을 얻은 그는 936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진을 건국하고, 같은해 요나라의 힘을 빌어 후당을 멸망시켰다.
이때 석경당은 원군에 대한 댓가로 요나라에 매년 비단 30만필을 조공으로 바칠것을 약속하였고, 국경지역 연(燕)일대 16주(州)을 넘겨주었다. 이 땅을 연운십육주라고 불리며, 이 땅의 탈환은 오대의 여러왕조들과 그 뒤를 계승한 송나라의 오랜 비원이었으나, 송나라대에는 결국 완전한 탈환은 성공하지 못했다.
후진은 건국되었지만 내우외란으로 나라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942년 석경당이 죽자, 중신 경연광이 석경당의 조카 석중귀를 옹립하고 정권을 쥐고 흔들었다. 이 옹립사건은 요나라와 상의없이 진행되었기에 요나라의 분노를 사서 944년 요나라와 후진은 단주에서 교전을 벌였고, 945년 2번째 원정에서는 석중귀가 직접 출정하여 재차 교전을 벌였다. 947년 2대 황제 야율덕광이 직접 군을 이끌고 세번째로 원정을 하자, 후진의 중신 두중위가 요나라에 항복하고 요양에서 후진의 주력은 격파되었다. 그대로 요나라군은 카이펑을 함락시키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그후 후진의 절도사였던 유지원은 요나라가 북쪽으로 돌아간 사이 카이펑에 들어가 후한을 세웠다.
역대 황제
후한
후한(後漢, 946년~950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오대(五代)의 네 번째 왕조로서, 건국자인 유지원(劉知遠)은 돌궐 사타족 출신인 후진(後晉)황제 석경당의 부장이었다. 유씨란 성씨 때문에 국호를 한이라고 하였다. 수도는 카이펑이었다. 1세기 광무제에 의해 세워진 한(後漢; 동한(東漢))도 후한이라 불렀으나, 이를 구별하기 위해 중국에서는 광무제의 한은 동한이라 부르고, 오대의 후한은 후한이라 부르면서 구별하기도 한다.
후진 왕조가 요(거란)에게 멸망할때 후진을 섬기며 절도사로서 진양(晋陽)에 주둔하던 유지원은 후진을 돕지않고, 형세를 관망하다가 요나라군이 돌아간 뒤 카이펑에 입성해 948년 카이펑(개봉)에서 황제가 되어 나라이름을 한(漢)이라 칭하고 후진을 대신해 왕조를 열었다. 그 후 유지원은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중원을 지배하여 오대(五代)의 명맥을 이어간다.
요나라군이 유지원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요나라가 카이펑의 통치에 실패하여 거란인 병사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또한 요나라의 남진은 후진에 대한 징벌과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유지원의 군대와 싸울 의미가 없었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유지원이 10개월 만에 죽고, 차남 유승우(劉承祐)가 황제가 되어 유지원의 시호를 고조 황제(高祖 皇帝)라 하고, 자신은 은황제(隱皇帝)가 되었다. 은제 때는 내분이 잇따라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웠다. 이에 노장 곽위(후주 고조)가 모두 진압하였다.
젊은 은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중신들을 제거하였고,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치는것을 느낀 곽위는 분노하여 군사를 위주에서 일으켜 은황제를 공격했다. 곽위의 군이 카이펑에 육박하던 도중 950년 은제는 곽윤명(郭允明)에게 살해 당한다.
중원 근처에서는 유지원(劉知遠)의 두 동생 유숭(劉崇)과 유신(劉信), 그리고 유숭의 아들 유빈(劉贇; 유지원의 조카로 한때 유지원의 신임을 받아 그의 양자가 됐었다.)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곽위는 일단 유빈을 옹립하였으나, 부하들의 추대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주왕조를 열었다.
후주가 건국되면서 불필요한 존재가 된 유빈을 살해하자, 그의 아버지였던 유숭이 분노하여 자신이 절도사로써 주둔하던 진양에서 자립하여 10국 중 하나인 북한(北漢)을 세웠다. 북한은 후주을 대신한 송나라에 멸망할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유지원이 세운 오대(五代)의 정통왕조 후한(後漢)은 2대 2년이란 오대(五代) 중 최 단명왕조로써 막을 내리고, 그뒤는 오대의 마지막 왕조 후주(後周)가 잇게 된다. 그 후, 후주가 망하자, 마침내 통일국가 송(宋)이 세워져 십국(十國)을 차례로 멸하니, 북한도 이때 사라져 돌궐사타족의 유씨(劉氏)왕조는 사라진다.
역대 황제
약자: 豫B | |
![]() 开宝寺琉璃塔(祐国寺塔) | |
![]() | |
행정 단위 | 지급시 |
---|---|
청사소재지 | 카이펑 普安路 |
면적 | 6,247km² |
인구 (2007년) 인구밀도 |
5,070,000 812/km² |
민족 | 한족 후이족 |
지역전화 | 378 |
ISO 3166-2 | CN-41 |
시차 | UTC+8 |
카이펑(개봉, 開封)은 중국 허난 성 북동부의 도시로, 중국의 옛 수도 중 하나이다. 예전에는 변량 (汴梁 or 汴樑), 변경 (汴京), 대량 (大梁 or 大樑)또는 간단히 줄여 량 (梁 or 樑)으로 알려져있었다.
황하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서쪽으로 성도 정저우, 북서쪽으로 신샹, 동쪽으로 상추, 남동쪽으로 저우커우, 남서쪽으로 쉬창과 접하고 동북쪽으로는 산둥 성과 접한다.
행정구역
5개의 시할구(区)와 5개의 현(县)이 있다.
- 구
- 현
역사
카이펑의 이름의 유래는 춘추 시대에 당시 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정나라의 장공(鄭荘公)이 현재의 카이펑의 근처에 성을 쌓고 啓封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에서 시작한다.
전국 시대 위나라(魏)의 영역이였고 대량이라는 이름의 수도가 되었으나, 진나라의 공격으로 낙성되고 도시도 황폐하게 되었다.
한나라의 경제는 啓封가 같은 뜻의 개봉(開封)이라는 이름을 사용케하였고, 전한 무제의 동생 양왕 유무가 이곳에 봉하기도 하였다.
오대십국의 혼란기 동안 카이펑에 도읍을 정한 나라는 오대의 후량(907~923), 후진(936~947), 후한(947~951), 후주(951~960)의 네 개가 있었다. 송나라(960~1279)가 혼란을 수습하며 982년에 다시 중국을 통일하였고, 수도를 카이펑으로 하였다.
송은 군사적으로는 성공을 이루지 못했으나 문화와 번영의 황금시대에 접어들어 수도 카이펑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러나 1127년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의 공격을 받아 수백만에 달하는 난민들이 수나라와 함께 강남으로 이주하였다. 곧 남송의 시작이었다. 남쪽 임안(臨安, 현재 이름: 항저우)으로 수도를 옮겨 연명한 남송은 1142년, 허난 성을 포함한 북중국 전체를 금나라에게 바친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장강 삼각주 지역, 이른바 강남이 허난 성을 대신하여 새로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허난 성은 이전의 탁월한 지위를 영원히 잃게 된다.
금나라는 1157년에 카이펑을 남경으로 정하고 재건한다. 1214년에 금나라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기게 된다. 1234년 결국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의 군대에 의해 멸망하게 되고, 1279년에는 남송 역시 몽골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서 몽골은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몽골의 지배는 1368년 명나라(1368~1644)가 건국되면서 끝나게 된다. 명나라는 지금의 허난 성과 거의 일치하는 행정구역을 설치하였다.
후주
후주(後周 951년~960년)는 오대십국 시대 중 오대(五代) 최후의 왕조로서 후한의 실력자였던 곽위가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주(周)였으나, 무왕이 세운 주와 구별하기 위해 후주라고 불렀다. 수도는 개봉(카이펑)이었다.
건국자 곽위는 후한의 개국공신으로 유지원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중용되었고, 유지원이 죽으면서 아들을 보필할 인물로 지명한 대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은제가 즉위했으나, 오히려 백부와 짜고, 고명대신들을 멀리하고 그들을 살해했다. 곽위는 마침 반란 진압을 위해 바깥에 있었기에 위험을 피했지만,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은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곽위의 반란에 놀라던 은제가 신하에게 살해되고, 곽위는 카이펑에 입성해 당시 서주에 있던 유빈(劉贇)을 새로운 황제로 앉히고, 자신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했다. 하지만 파견한 부하에 의해 유빈이 노상에서 피살되었기에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새로운 왕조인 후주를 열었다.
곽위는 즉위 후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954년 곽위가 죽자 그의 양자인 시영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오대 제일의 명군(名君)이라 일컫는 세종(世宗)이었다. 세종은 곽위의 개혁을 물려받아 내정에 힘을 기울여 국력을 충실히 하여 오랜 전란 속에 황폐해진 중원을 경제를 크게 회복시켰다. 이것을 바탕으로 군사적으로 강대해진 후주는 당나라 붕괴 후 아무도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목표로 원정에 나섰다.
후주의 1,2대 황제는 중국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한 황제였고, 곽위는 자신의 무덤에 석비 하나만이 있었고, 그 석비마저 새겨진 명문은 매우 간소하고, 소박했다.
시영이 즉위한 직후 북한이 기회를 노리고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후주의 불안정한 내부사정과 후주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한 탐색전과 비슷했다. 시영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고평전투에서 북한의 군대를 격파했다. 후주의 반격에 크게 패한 북한은 이후 세력을 잃어갔다. 그후 시영은 적극적인 원정에 나서 후촉을 멸망시키고, 955년~958년 세 차례에 걸쳐 친정하여 남당을 멸망시켰다. 이것으로 후주의 판도는 장강 이북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959년 시영은 오대의 국가들의 비원이었으며, 북방의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연운십육주 탈환에 나섰다. 일련의 전투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하고 유주을 되찾은 시영은 계속 진군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환으로 쓰러져 원정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959년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이 죽은 후, 7살의 시종훈이 뒤를 이었으나, 아직 어린 황제에 대해 불안을 느꼈던 군인들은 원정군의 사령관이었던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근위군 사령관)인 조광윤을 옹립했다.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개봉에 입성한 조광윤은 공제(시종훈)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을 세웠다. 일련의 사건을 진교의 변이라 부른다.
이로써 후주는 3대 만에 멸망했으나, 조광윤은 시종훈의 보호자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신문열(辛文悅)을 임명하여, 전임 황제를 살해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그러나 시종훈이 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뤄주었다. 조광윤의 유훈(遺訓)에 의해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300년간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역대 황제
- 태조(太祖, 곽위(郭威), 재위 : 951년 ~ 954년)
- 세종(世宗, 시영(柴栄), 재위 : 954년 ~ 959년)
- 공제(恭帝, 시종훈(柴宗訓), 재위 : 959년 ~ 960년)
시종훈(柴宗訓, 953년 ~ 968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의 후주의 제 3대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 959년 ~ 960년)이다. 시호는 공제이다. 선황제 후주 세종의 4남으로 태어났다. 재위 1년만에 조광윤에게 제위를 선양했고, 이후는 정왕에 봉해졌다.
부황이 절도사로 부임해 있던 단주(澶州)(현재의 허베이 성 양현)에서 태어났다. 부황의 즉위에 즈음하여 양왕에 봉해져졌고, 7살 때에 부황의 붕어로 의해 황위를 계승했다. 어린 황제를 위해, 황태후가 정무를 보고 범질, 왕부, 조광윤 등이 보좌를 했다.
부황 세종의 붕어로 인한 일시적인 불안을 틈타, 요나라와 북한이 연합하여 후주를 공격했다. 황태후는 조광윤에게 방어를 명령했다. 그런데 수도 개봉의 동북쪽 40리에 있는 진교역에서 어린 황제에 불안을 느꼈던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조광윤을 황제로 추대하고 개봉을 점령했다. 이 사건으로 시종훈이 제위를 선양하여 조광윤은 송 왕조를 열었다(진교의 변).
즉위한 후 조광윤은 시종훈을 정왕에 봉하고 방주(房州)(현재의 후베이 성 북방현)로 옮겼다. 그리고 방주의 태수이자 자신의 스승인 신문열로 하여금 그를 지키게 하고, 뒤를 보살피게 하였다. 968년 1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고, 황제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진교의 변(陳橋之變)은 960년 송태조 조광윤이 7세의 후주의 공제(恭帝)에게서 왕위를 이어받아, 송나라를 세우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969년 오대십국 중 가장 명군으로 손꼽히는 후주의 세종이 급사를 하자, 7세에 불과한 공제 시종훈(柴宗訓)이 그 제위를 이었다. 960년 정월, 어린 황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카이펑 부근의 진교역(陳橋驛)에서 조광윤에게 술을 만취하도록 먹이고, 정신을 잃은 그에게 황포를 입혀 강제로 추대하였다. 조광윤은 조보, 조광의 등 부하들의 추천에 못이기는 척하며 카이펑에 입성하여 7세의 어린 시종훈에게 황제를 선양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이것을 진교병변(陳橋兵變) 또는 진교의 변(陳橋之變)'이라고 한다.
반대를 하던 한통(韓通)은 조광윤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고, 당시 후주의 재상이었던, 범질(范質)과 왕부(王溥) 등을 협박하여 굴복시켰다.
오대에서는 선양은 이렇듯 자주 일어났었고, 양위를 물려준 황제는 뒷날 일어날 역습을 우려해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시종훈을 죽이지 않았고,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의 멸망 때까지 두터운 보호를 받았다. 968년 시종훈이 1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송태종은 황제의 예로 장례를 치뤄준다.
그후 송조는 300년간 시씨의 가문을 돌봐주며, 시씨 가문도 애산 전투에 참여하여 송나라와 명운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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