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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51 (오대십국 시대 : 십국)

두바퀴인생 2010. 4. 1. 05:46

 

 

 

중국의 역사 51 (오대십국 시대 : 십국 시대)

 

 

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 907년~960년)은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건립된 960년까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했던 5개의 왕조(오대)와 화중·화남과 화북의 일부를 지배했던 여러 지방정권(십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를 가리킨다. 오대십국의 오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 , 형남, . ,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된 해는 당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907년 이후 화북 지역은 오대국이 차례로 탄생하고 멸망하면서 강대국으로 중국 북방을 지배하였으나 중국 전역을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은 부족했다. 대부분 전왕조들이 짦은 치세 중 당나라 멸망 이후 끓이지 않는 각지역의 반란을 통제할 능력도 부족하였고 권력다툼이나 정치적인 능력 부족으로 나라를 유지할 힘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반란군 진압을 통해 힘을 비축한 장수들이 대부분 선위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오대국들이 부침하는 가운데 비해 주변 십국들은 중원 외곽 지역을 둘러싼 모양으로 서로 영역을 지키면서 각축을 벌이는 상태였다. 영토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힘이 부족한 나라는 흡수되는 등 흥망성쇠를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황소의 난(黃巢-亂)은 당나라 희종 연간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875년~884년사이에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에 시작된 환관의 횡포와 인민의 수탈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토호나 상인층이 반당나라 경향으로 돌아선 것과 기근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중앙정부는 755년~763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 875~884년 황소의 난으로 많은 힘을 잃어버렸고 이를 틈타 각지의 절도사 세력은 자립성이 강해져 자신들의 임지를 스스로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먼 지방의 절도사 중에는 중앙에 대한 납세마저도 거부한 자가 있었다. 이에 대해 역대 황제들은 억제책을 고안해 부분적으로 절도사를 누르는 데 성공했으나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용했던 환관세력이 도리어 힘을 갖게 되어, 정치에 과도하게 참여하게 되어 황제의 폐립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이런 폐단으로 중앙정부는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다시 절도사들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황소의 난이 발발했다. 정부군은 추락할 때까지 추락하여 별로 강하지 않은 황소군에 대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세간에는 황소군을 전멸시키면 자신들의 입장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두려워해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황소군은 장안을 함락했고, 황제 희종은 촉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당나라 정부에서는 장안을 회복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 여기서 돌궐 사타족 출신의 이극용과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당나라 조정에 투항한 주온(후에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이 활약하여 장안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당나라의 실력이 만천하에 폭로되었고, 황제는 명목상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앙을 두고 다투었던 이들이 변주(汴州;현재의 카이펑)를 중심으로 산동, 하남을 지배한 주전충과 태원을 중심으로 산서를 지배하던 이극용, 하북을 지배한 유인공이나 섬서 일대를 지배한 이무정 등이다. 그외의 지역에서도 자립한 이들이 많아 후에 10국의 기원이 되었다.

 

 

 

 

 

오월( 吳越國 907년 - 978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로, 당나라 절도사 전류(錢鏐)가 현재의 항주(杭州)을 중심으로 저장 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이다.

 

시조 전류는 항주 출신으로 젊을 적에 소금의 밀매에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이 발발하자, 이 지역에서 동창(董昌)이란 자가 현지의 토호들을 중심으로 병사을 모아 항주8도(杭州八都)라고 부르는 군단을 만들자 전류도 여기에 참가해 공적을 세워 887년 고향의 항주자사가 되었다.

 

그후 항주8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남쪽의 (閩)과 항쟁하면서 소주(蘇州), 상주(常州)를 확보하고 896년에 진해(鎭海), 진동(鎭東) 양군절도사(兩軍節度使)가 되어 저장성을 지배했다.

 

907년 주전충 후량을 세우자, 그에게 복종하여 오월왕이 되었고, 후량을 후당이 멸망시키자 이번엔 후당에게 복종하면서 북쪽의 와 남쪽의 민에 대항했다.

 

내정면에서는 농지개발 및 수도 항주의 확대와 보수를 실시하고, 해상무역을 통해 고려와 일본과도 교류했다. 또한 이것으로 얻어진 막대한 이익을 가지고, 문화인을 보호하였다. 한편 백성들에게는 닭, 물고기, 계란등의 생활용품에 소비세를 걷기도 하였다.

 

전류가 932년에 죽자, 5남인 전원관(錢元瓘)이 뒤를 계승했다. 전원관은 내정에 힘써 조세를 감면하는 시책을 펼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시기 북쪽의 오나라를 찬탈한 남당이 들어서 오월을 공격하자 이를 막아냈다. 그러나 941년 항주에서 일어난 큰 화재에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

 

그후 전원관의 6남 전홍좌(錢弘佐)가 뒤를 이었다. 946년 남쪽의 민은 내분이 발생해 혼란에 빠지고, 이를 틈타 남당군이 공격해 오자, 민은 오월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월은 오히려 민을 공격하여 복건의 북쪽의 요충인 복주(福州)을 점령했다.

 

다음해 전홍좌가 죽고, 동생 전홍종(錢弘倧)이 뒤를 이었다. 전홍종은 군인들을 장악하는 데 실패하여 948년 반란이 일어나 전홍종은 퇴위 당하고 동생 전홍숙(錢弘俶)이 제위를 얻었다. 전홍종은 유폐에 앞서 시를 짓거나 술에 취해 지내다가 971년 사망했다.

 

전홍숙의 시대에는 최강의 적이었던 남당이 후주의 공격을 받아 영토를 빼앗기면서 약체화되었기에 오월은 평온했다. 오월에서도 후주의 공격을 틈타 남당에 대한 침공을 감행했으나, 이것은 실패로 끝났다. 960년 송나라가 탄생하고, 975년 송나라가 남당을 공격하자, 오월은 이에 참가해 남당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송나라의 대군앞에 남당이 멸망하자 송나라와 직접 국경이 맞닿게 된 오월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978년 전홍숙은 송나라에 나라를 바치며 스스로 오월국의 종말을 고했다. 전홍숙은 송나라로부터 회해국왕(淮海國王)에 봉해져, 카이펑으로 이주하여 988년까지 안락하게 보내다가 사망했다.

 

역대 오월왕은 불교를 신앙으로 삼았고, 전숙은 불탑 8만 4천개를 만들고 경전을 봉해 영내에 배치했다. 또한 이곳에서 나오는 도자기의 요원(窯元; 도자기를 굽는 곳)인 월주요(越州窯)를 후원해 번영하였다.

역대 군주

  1. 태조무숙왕(太祖武肅王) 전류(錢鏐, 재위 : 907년 ~ 932년)
  2. 세종문목왕(世宗文穆王) 전원관(錢元瓘, 재위 : 932년 ~ 941년)
  3. 충헌왕(忠獻王) 전홍좌(錢弘佐, 재위 : 941년 ~ 947년)
  4. 충손왕(忠遜王) 전홍종(錢弘倧, 자(字)는 융도(隆道), 생몰연도 : 929년 ~ 971년, 재위 : 947년 ~ 948년)
  5. 충의왕(忠懿王) 전홍숙(錢弘俶, 재위 : 948년 ~ 978년)

(閩, 909년~945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중 하나로써 현재 복건성을 중심으로 왕심지(王審知)가 세운 나라이다.

 

개조 왕심지는 광주고시(光州固始)사람으로 형 왕조(王潮)와 함께 당나라 말기 혼란속에서 중앙의 혼란을 피해 복건으로 이주하여 이곳을 점령하였다. 896년 왕조는 당나라로부터 무위군절도사(武威軍節度使) 자리를 인정받았으며, 다음해 왕조가 죽자 왕심지가 지위를 이어받았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후량을 세우자, 왕심지는 후량에 입조하여 민왕에 봉해졌다. 왕심지는 내정에 힘을 기울여 당시 아직 낙후된 지역이었던 복건의 개발을 진행해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남해 교역에서 이익을 얻자, 문인, 승려등을 모아 문화를 진흥시켰다.

 

이러한 선정으로 인해 왕심지는 개민왕(開閩王)이라 불리면서 복주에서는 민왕덕정비(閩王德政碑)가 세워져 지금까지도 방문자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925년 왕심지가 죽은 후 내분이 계속되었다. 바로 다음해 왕심지의 장남 왕연한(王延翰)이 제위에 올랐으나, 동생 왕연균(王延鈞)에게 살해당하고, 그대로 왕연균이 제위에 올랐다. 민은 후량을 무너뜨린 후당에 대해서 신하를 자처했으나,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병으로 쓰러지고, 후당이 혼란에 휩싸인 틈을 노려 933년에 독립하여 황제를 칭했다.

 

왕연균은 935년 장남 왕계붕(王繼鵬)에게 살해당하고, 왕계붕이 제위에 올랐다. 937년 왕계붕은 후당을 쓰러뜨린 후진에게 복종하여 민왕으로 지위가 내려갔다. 즉위 후, 이름을 왕창(王昶)이라고 개명하였다. 그는 도교를 광신하여 무녀의 말만 믿고 일족을 살해하였다. 이를 보다못한 근위대장 주문진(朱文進)과 연중우(連重遇)가 939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왕창을 살해하고, 왕심지의 3남 왕연희(王延羲)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왕연희도 폭정을 일삼고 원한이 있던 일족을 살해하였다. 943년 이에 대해 왕연희의 아우 왕연정(王延政)이 임지인 건주(建州)에서 자립하여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殷)이라고 했다.

 

다음해 왕연희는 주문진과 연중우에게 살해되고, 주문진이 그 뒤를 이어 민왕에 즉위했다. 그러나 왕연정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고, 주문진과 연중우는 부하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이후 왕연정이 민왕의 지위를 물려받았으나, 재위 기간 동안 방만한 재정운영과 과도한 세금징수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 혼란을 지켜본 왕연정의 두 조카 왕계훈(王繼勳)과 왕계성(王繼成)이 각자 자립하여 나라는 분열상태에 빠졌다. 이 상황을 지켜본 남당 이경(李璟)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민을 멸망시키고, 왕연정과 일족은 남당의 수도 금릉으로 끌려와 이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왕심지의 문화진흥에 의해 건립된 건축물들은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것이 적지 않다.

  • 개원사 철불(開元寺鐵佛)-복주에 있는 개원사에는 높이 5.3m의 철불이 있다. 왕심지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민왕사(閩王祠) - 앞서 얘기한 민왕덕정비가 세워져 있다.
  • 통천사(涌泉寺) - 복주의 동남쪽 고산(鼓山)중턱에 있는 사찰. 908년 왕심지에 의해 창건되었다.
  • 개원사(開元寺) - 천주(泉州)에 있는 사찰로써 위에 있는 사찰과는 다른 절이다. 이곳에 있는 탑중 하나가 왕심지가 세운 것이다.

역대 군주

  1. 왕조(王潮, 재위 : 896년 ~ 897년)
  2. 태조 소무효황제 왕심지(太祖 昭武孝皇帝 王審知, 재위 : 897년 ~ 925년)
  3. 사왕 왕연한(嗣王 王延翰, 재위 : 925년 ~ 926년)
  4. 혜종 제숙명효황제 왕연균(惠宗齊肅明孝皇帝 王延鈞, 재위 : 926년 ~ 935년)
  5. 강종 성신영예문명광무응도대홍효황제 왕계붕(康宗 聖神英睿文明広武応道大弘孝皇帝 王継鵬, 재위 : 935년 ~ 939년)
  6. 경종 예문광무명성원덕대효황제 왕연희(景宗 睿文広武明聖元徳大孝皇帝 王延羲, 재위 : 939년 ~ 944년)
  7. 은제 왕연정(殷帝 王延政, 재위 : 943년 ~ 945년)

 

형남(荊南 907년~963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중 하나로 호북성을 지배하던 국가였다. 약소국이었으나 교역의 중계지로써 번영을 누렸다. 남평(南平) 혹은 북초(北楚)라고도 한다.

 

시조 고계흥은 섬주쇄석(陝州碎石;지금의 하남성 섬현)사람으로 변주(汴州;현재의 카이펑)의 상인의 집사였다가 주전충의 군에 투신하여 그의 신임을 얻어 부장으로서 주전충을 따라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고계흥은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가 되었다. 부임한 고계흥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땅의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그후 주전충이 사망하자 형주(荊州;현재 호북성 강릉), 귀주(歸州), 협주(峽州; 의창(宜昌)의 3주를 차지하여 독립했다.

 

그후 후량이 후당에게 멸망당하자 후당에게 신하를 자청해 925년 남평왕(南平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당이 전촉을 공격하려 할 때 고계흥은 자신이 촉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구상을 막아버리는 일이었기에 후당과 연을 끊고 동쪽의 의 신하를 자청했다.

 

다음해 926년 고계흥이 죽자 장남 고종회(高從誨)가 뒤를 계승하여 형남절도사가 되었다. 고종회는 다시 후당을 섬겼고, 934년에 남평왕이 되었다. 그뒤에 주변의 오, , 남한, 후촉 등 모든 나라에 대해 신하를 자청하여 평화를 유지하려고 부심했다. 형남이 차지했던 형주(荊州)는 중국에서도 말 그대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종회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교묘한 정략으로 각국의 세력완충지대로써 이땅의 중요성을 여러나라에 인식시켜 약소국인 것을 역이용하여 평화를 이루어내고, 거대한 교역중계지점으로 형남을 번영시켰다.

 

고종회는 948년에 죽고, 고종회의 3남 고보융(高保融)이 뒤를 이었다. 그때 중원은 후당이 멸망한 후 후진, 후한, 후주의 순서대로 정권이 교체되고 있었다. 고보융은 후주에 대해 신하를 자청하였고, 954년 남평왕에 봉해졌다. 그후 후주의 세종(世宗;시영)에 의한 통일사업이 시작되고 후당이 남당을 공격하려고 할때 고보융도 동조하여 병사를 보냈다. 그다음 후주에서 송나라로 선양이 이루어지자, 송나라에도 신하를 자청했다.

 

고보융은 960년에 죽고, 고종회의 10남 고보욱(高保勗)이 형남절도사의 지위를 이었다(왕위를 얻지 않은 것을 국주라고 부른다). 고보욱은 무의미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향락을 즐겼기 때문에 민심이 떠났다. 고보욱은 962년에 죽고, 고보융의 장남 고계충(高繼沖)이 형남절도사의 지위를 이어받았다.(고보욱과 같다) 그후 송나라 태조가 통일사업을 개시하자, 가장 약소하지만 중요한 요충을 차지하던 형남이 최초의 목표가 되었다. 고계충은 [남쪽의 초나라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라는 송나라측의 요구에 굴복하여 통과를 허락했으나, 송나라군은 영내을 통과하던 중 형남에 대해서도 항복을 요구하여 963년 형남은 멸망했다. 고계충은 그후 카이펑으로 옮겨져, 송나라의 절도사로서 천수를 누리다 973년에 죽었다.

 

이에 관련하여 만사휴의(萬事休矣)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고종회가 고보욱을 너무나 아껴 고보욱이 안하무인이 되었던 일을 주위 사람들이 탄식했다는 말에서 나온 고사성어이다.(출전은 [송사형남고씨세가](宋史荊南高氏世家))

역대 군주

  1. 무신왕 고계흥(武信王 高季興, 재위 : 907년 ~ 928년)
  2. 문헌왕 고종회(文献王 高從誨, 재위 : 928년 ~ 948년)
  3. 정의왕 고보융(貞懿王 高保融, 재위 : 948년 ~ 960년)
  4. 고보욱(高保勗, 재위 : 960년 ~ 962년)
  5. 고계충(高繼沖, 재위 : 962년 ~ 963년)

 

(楚, 907년~951년)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중 하나로 지금의 호남성, 광서치운족자치구을 지배했던 나라로서 의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시조 마은(馬殷)은 목공(木工)이란 신분에서 시작해 하남의 군웅 진종권(秦宗權)의 무장 손유(孫儒)을 따라 회하(淮河)의 주변을 전전하였고, 손유의 사후 담주(潭州;현재의 장사시)에 들어가 호남일대에 세력을 얻어 896년 호남절도사가 되었다. 그후 광서방면에도 세력을 뻗쳐, 907년 주전충에 의해 후량이 건국되자, 후량에 입조하여 초왕에 봉해졌다. 그후 후량이 후당에게 멸망당하자 후당에 입조하여 역대의 왕들은 모두 중원의 오대왕조에게 신하로써 복종하였다.

 

이것은 군사적으로 동쪽의 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였고, 경제적으로는 특산품인 차의 교역로을 차단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시 차는 전국에서 수요가 있었고, 북쪽의 거란 등도 귀중한 비타민의 원천으로 차를 원했다. 또한 차 이외에도 목화나 비단등의 산업을 진흥시켜, 호남-광서의 경제를 크게 육성하였다.

 

930년 마은이 죽자, 그의 20명 이상의 아들 사이에서 계승권 다툼이 일어났다. 결국 차남 마희성(馬希聲)이 즉위했으나 원래부터 암우(暗愚)하다는 말이 있었고, 그 평판대로 내정을 소홀히하고, 사치를 부리다 타국의 책략에 휘말려 신하를 죽이는 등의 악정을 펼쳤다.

 

932년 마희성이 죽고 마은의 5남 마희범(馬希範)이 뒤를 계승했다. 마희범은 마은이 싫어하던 후당에 입조하여 초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의 사치는 형을 넘어서 술자리를 좋아해, 재정을 악화시켰다.

 

947년 마희범이 죽고 마은의 15번째 아들 마희광(馬希廣)이 제위를 이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배다른 형인 마희악(馬希萼)은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남당의 지원을 얻어 담주의 마희광을 공격했다. 950년 마희악의 군대는 담주를 함락하고 마희광을 살해하여 마희악이 초왕이 되었다. 그러나 마희악도 동생 마희숭(馬希崇)에게 배신당해 유폐되어 마희숭이 권력을 장악했다. 마희숭은 영내의 안정에 실패했고, 일련의 혼란을 호기로 본 남당은 초나라에 침공하여 951년 장사를 함락하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마희악은 남당의 수도 금릉으로 끌려가 이곳에서 죽었다. 마희숭은 남당을 섬기는 절도사가 되었고, 남당이 후주의 공격을 받은 뒤에는 후주에게 보호를 받아 후주로부터 장군직을 하사받았다.

 

그후 마희악의 무장이었던 주행봉(周行逢)이 남당의 지배를 물리치고, 956년 다시 호남을 제압했으나, 962년 아들 주보권(周保權)이 뒤를 이어받지 못하고,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다음 해 북쪽의 송나라에게 병합되었다.

 

앞서 이야기한것처럼 초나라는 차를 중심으로 교역을 벌여 번영한 상업국가였다. 차의 매매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었고, 견직물 생산을 장려하였기 때문에 납세를 비단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독자적으로 국내에서만 통용된 화폐였던 연전(鉛錢)을 만들었고, 외국 화폐를 갖고 있는것을 금지하는등, 자산의 집중을 노렸다.

역대 군주

  1. 무목왕 마은(武穆王 馬殷, 재위 : 907년 - 930년)
  2. 형양왕 마희성(衡陽王 馬希聲, 재위 : 930년 - 932년)
  3. 문소왕 마희범(文昭王 馬希範, 재위 : 932년 - 947년)
  4. 폐왕 마희광(廢王 馬希廣, 재위 : 947년 - 950년)
  5. 공효왕 마희악(恭孝王 馬希萼, 재위 : 950년 - 951년)
  6. 폐왕 마희숭(廢王 馬希崇, 재위 : 951년)

 

(吳 902년~937년)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중 하나로써 당나라 절도사 양행밀이 양쯔 강 하류 금릉(金陵;현재의 난징)을 중심으로 강소성, 안휘성, 강서성을 지배했던 나라이다.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이변(李昪)에 의해 제위를 찬탈당해 남당이 대신 들어서게 되었다.

 

창시자 양행밀은 여주 합비(廬州合肥;현재 안휘성 합비시)사람으로 당나라 말기 혼란속에 처음엔 도둑이었다가 군에 들어가 세력을 규합하여 고향 노주를 점령하자 당나라는 회유책을 써서 그를 노주자사에 임명하였다. 그후 양행밀은 주위지역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892년 양저우(揚州)을 점령하여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가 되었다.

 

이윽고 장강을 아우르는 중류지역을 제압하여 일대세력권을 쌓았다. 그후 남하하는 주전충(이때는 아직 후량을 건국하지 않았다)과 다툼을 벌였고, 회하(淮河)의 경계선을 확보하여 절강성을 근거지로 삼았던 오월 소주(蘇州)을 둘러싼 쟁탈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소주는 오월의 것이 되었다. 그래도 강대한 세력을 지녔기에 902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오왕에 봉해졌다. 양행밀은 자립은 했어도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신하로써의 입장을 관철하여 죽을때까지 당나라의 원호(元號)을 사용하였다.

 

양행밀의 힘의 원천은 도적무리들과 당나라의 잔존병을 모아서 편성한 흑운도(黑雲都)라고 불리는 친위군단에 있었다. 이 군대는 전신을 검은 갑옷으로 무장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양행밀은 이들을 데리고 반대세력을 무찔렀으나 너무 이 군단을 의지한 결과 흑운도의 지휘관이었던 서온(徐溫)과 장호(張顥)가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905년 양행밀이 죽자 장남 양악(楊渥)이 옹립되었다. 그 시기 강서번진을 파괴하고 영역을 남쪽까지 확대해서 에게서 악주(鄂州;현재의 무한), 악주(岳州;현재의 악양)를 빼앗아 오의 최대판도을 이룩했다. 그러나 양악은 완전히 괴뢰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그는 괴뢰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 908년 암살당하고, 동생 양융연(楊隆演;본명은 양위(楊渭)이다)이 새로운 괴뢰황제로 옹립되었다.

 

그해 서온은 장호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918년 양융연을 오국왕으로 삼고, 자신은 태사(太師)가 되었다. 다음해 양융연이 죽자 동생 양부(楊溥)를 옹립하고 선양에 대한 준비에 들어갔으나, 927년 서온은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후 서온의 권력을 물려받은 양자 서지고(후에 이변)는 양부를 황제의 자리에 올린뒤, 937년 선양을 받아 제(齊)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제나라는 국호를 고쳐 당나라(남당)이라고 하였다.

역대 군주

  1. 무충왕 양행밀(武忠王 楊行密, 재위 : 902년 ~ 905년)
  2. 경왕 양악(景王 楊渥, 재위 : 905년 ~ 908년) 양행밀의 장남.
  3. 선왕 양융연(宣王 楊隆演, 재위 : 908년 ~ 920년) 양행밀의 차남.
  4. 예제 양부(睿帝 楊溥, 재위 : 920년 ~ 937년) 양행밀의 4남.
  • 양행밀은 예제(睿帝)에 의해 태조 무제(太祖 武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 양악은 예제에 의해 열조 경제(烈祖 景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 양융연은 예제에 의해 고조선제(高祖 宣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남당(南唐 937년~975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중 하나로 의 실권자였던 서지고(후에 이변(李昪))가 제위를 찬탈하여 세운 국가이다. 수도는 금릉(金陵;현재의 난징)이고, 국호는 (唐)이었으나 당나라 라고 불린 기타 정권들과 구별하기 위해 특별히 이 나라 이름은 남당이라고 불렀다.

 

10국중 가장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였으나, 화북의 후주 송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다만 문화, 경제적으로는 크게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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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는 승상 서온의 사후, 그의 양자였던 서지고가 태위, 중서령이 되어 정치실권을 장악했다. 931년 금릉에 주둔하면서 아들 서경통(徐景通; 후에 남당의 2대 군주)을 오나라의 수도였던 강도(江都)에 보내 정치를 맡겼다. 서지고는 933년 제왕(齊王)을 칭하고 난뒤 937년 10월 오나라의 황제였던 예제(睿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齊)라고 하였다.

 

서지고는 양자가 되기전 성씨가 당나라의 역대 황제의 성씨와 같은 이(李)씨였다. 그 때문에 938년 서지고는 자신의 성씨인 이씨로 돌아가고 자신을 당나라 황족 이각(李恪)의 후예라면서 국호를 으로 변경하였다. 이름 또한 지고에서 변(昪)으로 바꾸었다.

 

이변은 대외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내정에 전념하여 국력을 증강하였다. 예를 들자면, 주변국인 오월에서 대화재가 발생해 궁정과 창고, 군대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시기, 신하들은 오월이 약해진 바로 지금이 공격할 기회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이변은 이 진언을 무시하고, 오히려 오월에게 화재에 관련한 위로의 사자를 보내었다.

 

이변의 사후, 아들 이경(앞에 얘기했던 서경통)이 뒤를 계승하였다. 이경은 아버지와는 달리 대외확장정책을 펼쳤다. 현재의 복건성에 할거하던 에서는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항쟁이 되풀이 되었기에 국정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경은 이 틈을 노려 945년 민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복주(福州)를 공격했으나 오월의 전홍좌(錢弘佐)에게 패배했다.

 

현재 호남성에 할거하던 에서도 후계자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950년 당시 초왕이었던 마희광(馬希廣)의 형 마희악(馬希萼)이 남당과 손을 잡고 마희광을 살해했다. 마희악은 초왕이 되어 남당의 신하로 자처했다. 그러나 다음해 951년 마희악이 부하에게 쫓겨나자 남당은 군사를 보내 초나라를 병합했다.

 

이 때 남당은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보자면 강소성, 강서성, 안휘성, 호북성, 호남성, 복건성을 차지해 40년 역사중에 가장 판도가 넓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화북에서 일어난 후주의 세종(世宗;시영)은 중국 통일을 목표로 남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남당과 후주는 회하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회하는 큰 강이었기 때문에 후주군이 회하를 넘어 남당을 공격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다만 겨울철에는 회하의 수위가 낮아져 건너기가 쉬웠다.

 

그런 이유로 후주가 남당을 공격하려면 겨울철외에는 없었다. 남당도 이를 알고 있어서 겨울철에는 회하의 강주변에 군대를 배치시켰다. 그러나 후주가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남당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이 제도를 그만두었다.

 

955년 11월 세종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당을 침공해 정양(正陽;현재의 안휘성 봉양현)에서 남당군을 크게 격파하고 수주성(壽州城)을 포위했다. 거기에 조광윤에게 명하여 저주(滁州)를 점령하게 했다. 956년 남당은 수주성에 구원군을 보냈으나 세종이 직접 이끄는 후주군에게 자금산(紫金山;수주성 동북쪽)에서 패퇴하고, 수주성은 후주에게 점령되었다. 이것으로 호주(濠州), 사주(泗州), 양주(揚州), 태주(泰州)가 후주에게로 넘어갔다.

 

이쯤부터 남당의 군대는 전의를 크게 잃고 말았다. 예를 들면 태주자사(泰州刺史)는 적앞에서 도망을 쳤고, 기주(蘄州)에서는 자사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그 부하는 후주에게 항복하는 일도 발생했다. 957년 초주(楚州)를 후주에게 빼앗기자 양군은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당은 이미 후주의 적수가 아니었기에 장강에서의 수군끼리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사태가 여기까지에 이르자 이경은 후주에 대해 복속할것을 맹세했다. 후주의 세종은 이를 승낙하고, 강화를 맺고 군대를 철군시켰다. 이 강화조약에 체결된 조건은 다음과 같다.

  • 회하 이남, 장강 이북의 땅은 후주에게 할양한다.
  • 남당은 후주의 신하로써 섬긴다.
    • 남당의 군주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할 수 없고, 국주란 칭호를 사용한다.
    • 남당 독자의 연호를 금지하고, 후주의 연호를 사용한다.
  • 이경은 이름을 이경(李景)으로 고친다.(경이란 문자가 후주 황족이 사용하는것이기에 이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헌데, 후주에서는 세종이 죽자 겨우 7살된 아들 공제가 즉위했다. 조광윤은 이 기회를 틈타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어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남당은 이것에 대해 지금까지 후주를 섬겼던 것과 같이 송나라를 섬기는것을 계속했다. 연호도 송나라의 것을 사용하였으나, 이경은 송나라가 강력해지는것을 두려워해 961년 수도를 남창으로 천도하였다. 옛 수도인 금릉은 태자 이욱이 수비를 하였다. 그해 이경이 죽자, 이욱이 금릉에서 즉위했다. 이일로 수도는 다시 금릉이 되었다. 이욱은 송나라 태조(조광윤)에게 이경을 황제로써 제사지낼 수 있기를 요청하였다. 태조는 이를 허락하였고, 태조는 황제로써 예우를 해주었다.

 

송나라 태조는 중국 통일을 목표로 각국을 여러 이유를 들어 공격해 멸망시켰다. 남당의 남쪽에 있던 남한 971년 송나라에게 멸망당하자 남당은 더욱더 송나라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국이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그때까지는 중서성, 문하성이라고 본래는 중앙정부가 사용하던 관청의 이름을 계속 사용하였으나, 이것을 좌내사부(左内史府), 우내사부(右內史府)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또한 왕의 작위를 모두 공(公)으로 변경하였다.

 

이와 같이 남당은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송나라는 남당을 공격할만한 대의명분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974년 태조가 이욱에게 입궐하라는 명령을 내렸을때 이욱은 병이나서 움직이지 못했다. 태조는 이를 구실로 삼아 조빈(曹彬), 반미(潘美)에게 명령을 내려 남당을 침공했다. 975년 송나라군은 금릉을 포위했다.

 

태조는 "백성들에게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공격을 하지 않고, 위신(威信)을 이용하여 성을 함락시키겠다"라고 말하였기에 공격은 하지 않고, 포위를 계속하며 남당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이욱은 군대를 돌려보내기 위하여 서현(徐鉉)을 사자로 보냈다. 서현은

"이욱에겐 죄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공격하는 것에는 대의명분이 없습니다. 이욱은 작았기에 큰것을 섬겼고,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나 잘못은 없으니 이만 공격을 중지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에 대해 태조는

"그렇다면 그대가 말 한 것처럼 한다면 아버지와 아들을 2개의 집안으로 나누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도 좋은가?"

라고 답했다. 서현은 이것에 대해 반론할 수가 없었다. 서현은 다시 한번 태조를 만나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태조는 노여워하며

"이 이상 말하기도 싫다. 아직도 무슨 죄가 필요한것인가? 다만 천하는 한 집안이다. 잠자려는 시기에 다른이가 끼어들어 잠을 자고 있다면 이것을 용서하겠는가, 아니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답했다. 이 서슬퍼런 말에 두려움을 느낀 서현은 아무말도 못하고 물러났다.

 

금릉 포위는 10개월간 계속되었고, 기어코 이욱은 항복하고 이로써 남당은 3대로써 멸망하였다. 이욱은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으로 옮겨져 위명후(違命侯)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의 시대에는 농서공(隴西公)이 되었다. 978년에 죽었는데, 태종에게 암살당했다는 말도 있다.

 

오대십국 시대 화북에서는 이민족의 침입이 있어 전란이 잇달았다. 그 때문에 화북에서 살았던 문인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남당도 이런 문인들을 받아들여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경, 이욱이란 2명의 남당 군주는 남당 이주(南唐二主)라고 칭해지면서 사(詞, 한시에서 쓰여지던 시의 일종으로 절을 따라 노래를 불렀다)의 명인으로써 알려져 있다. 거기에 이욱은 중국문학사상 최고의 사의 작자로 알려져 있다.

 

회화방면에서는 징심당지(澄心堂紙)라고 알려진 최고의 종이가 개발되어, 기교(技巧)를 굳힐 수 있는 벼루가 만들어졌다. 이 시대 이전에는 벼루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나, 벼루가 예술품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남당문화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산수화(山水画)의 명화가로 알려진 동원(董源)도 이 나라를 섬겼다. 서현, 한희재(韓煕載)등도 명문가(名文家)로 알려져 있다.

 

남당은 강남지방을 안정적으로 지배하여 이 땅을 개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후에 남송시대에 이 지역은 대 곡창지대가 되었는데, 바로 이 시기부터 개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회남에서 제염(製鹽)사업을 진행하여 국가의 재정은 윤택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동전(銅錢)을 사용하였으나, 남당은 964년부터 철전(鐵錢)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철전을 가치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가치있는 동전만을 사용하였기에 매매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결국 철전과 동전은 등가(等價)를 매겨, 실제 상업상의 사용에서는 철전 10개에 동전 1개의 가치로 등급을 매겨 운용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도 이것을 인정하고 철전 10개에 동전 1개로 가치를 매겼다고 한다.

역대 군주

  1. 이변(李昪, 烈祖 光文粛武孝高皇帝, 재위 : 937년 ~ 943년
  2. 이경(李景, 元宗 明道崇徳文宣孝皇帝, 재위 : 943년 ~ 961년)
  3. 이욱(李煜, 後主 재위 : 961년 ~ 975년)

 

남한(南漢, 909년 ~ 971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로, 당나라 멸망 후 지금의 광둥 성 광시 지역을 지배한 나라이다.

 

건국자 유은(劉隱)의 선조는 후난성에 있다가 조부의 대에 복건으로 이주하여 남해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 지역의 유력자가 되었다. 아버지 유겸(劉謙)때 광주(廣州)로 옮겨 황소의 난때 공적을 세우고, 봉주(封州(광동)자사가 되었다. 유은의 선조는 아랍계라는 설도 있다.

 

유겸이 사망한 후 그 지위를 이어받아 자사가 된 유은은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광동,광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904년 정해군절도사가 되었다. 그후 광동 전지역과 광서의 일부를 지배하고, 당나라 멸망과 더불어 자립할 준비를 하였다. 거기에 남해교역으로 얻은 이익을 토대로 광동, 광서에 세력을 넓혀 반독립 세력화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중원의 세력이었던 후량 909년 그를 남평왕(南平王)에, 911년 남해왕(南海王)에 임명했다. 유은은 남해왕에 임명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뒤를 계승한 동생 유엄(劉龑)은 917년 황제를 칭하고 완전히 독립했다. 국호는 처음엔 대월(大越)이라고 했으나, 918년 전한,후한을 건국한 유씨(劉氏)와 같은 성씨라고 하면서 한(漢)이라고 고쳤다. 남한의 이름은 다른 정권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가가 명명한 것이다.

 

남한의 정치는 전란의 시대에서 압도적으로 군인주도의 정치가 이루어졌던 오대십국 시대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문관이 주도하는 정치가 이루어졌다. 지방관은 전부 문관이어야 한다는것이 원칙이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나라 시대 중앙에서 권력다툼에서 패한 관료들의 좌천지역으로 선택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었고, 거기에 그대로 이곳에 눌러앉아 정착한 이들도 많아, 이런 사람들이 남한세력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유은 자신도 이러한 문관의 참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 지역을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남해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 궁정은 크게 윤택하였다.

 

그러나 942년 유엄의 사후 계승권 다툼으로 인해 혼란이 일어났다. 즉 유엄의 3남 유분(劉玢:본명은 유홍도(劉弘度))이 뒤를 잇자, 그를 동생 유성(劉晟:본명은 유홍희(劉弘熙))이 살해하고, 자신이 즉위했다.

 

유성은 제위를 다투던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고 제위를 안정시킨 뒤, 이윽고 북쪽의 초나라의 내란을 틈타 출병하여 영토를 빼앗았다. 그러나 원정의 성공 후 자만한 유성은 동생들의 아내를 후궁으로 들이는등 품행이 불량한 행동을 일삼고, 이윽고 정치를 환관에게 맡기면서 내부는 부패하였다.

 

유성은 958년에 죽고, 장남 유창(劉鋹:본명은 유계흥(劉繼興))이 계승했으나, 유창은 의심이 매우 강해 문관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모두 환관으로 메우면서 유창의 조정은 거의 환관이 독점하는 일이 벌어졌다. 유창은 등용하려는 인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거세를 해야만 등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태로 민심은 떠나고, 971년 송나라의 침공에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유창은 재물을 갖고 도망치려 했으나 신임하던 환관에 의해 붙잡혀 송나라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의 영토도 송나라에 병합되었다. 유창을 시작으로 일족은 카이펑으로 옮겨져, 왕족으로서 대우를 받았다. 유창은 송나라의 좌천우위대장군(左千牛衛大將軍)이 되었고, 사후에는 남월왕(南越王)에 추봉되었다.

역대 군주

  1. 열조 유은(烈祖劉隠, 874년 - 911년)
  2. 고조 유엄(高祖 劉龑, 재위 : 917년 - 942년)
  3. 상제 유분(殤帝 劉玢, 원래의 이름은 홍도, 재위 : 942년 - 943년)
  4. 중종 유성(中宗 劉晟, 원래의 이름은 홍희, 재위 : 943년 - 958년)
  5. 후주 유창(後主 劉鋹, 원래의 이름은 계흥, 재위 : 958년 - 971년)

 

북한(北漢, 951년 ~ 979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로, 현재 산시 성(山西省) 북부을 지배한 나라이다.

 

창시자 유숭(劉崇)은 후한의 창시자 유지원(劉知遠)의 동생이었다. 후한 2대 황제 은제(隱帝)가 휘하 무장 곽위(郭威)에게 살해당하자, 유숭은 임지였던 태원에서 자립하려는 자세을 보였으나, 곽위에 의해 자신의 아들인 유빈(劉贇)이 새로운 황제로 옹립되었기에 자립은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후 곽위가 유빈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후주을 건국하자 후한을 북쪽에서 재흥시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되었지만 단독으로 후주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유숭은 북쪽의 요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후 요나라의 위성국가로써 요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후주와 대립했다. 954년 후주의 곽위가 죽고 시영(柴榮)이 즉위하자, 그 사이을 노리고 다음해 대군을 남하시켜 택주(澤州) 고평(高平;지금의 산서성 진성현(晋城縣)에서 격돌했다. 처음엔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으나, 후주의 장군 조광윤(趙匡胤)의 분전으로 패배하여 태원으로 후퇴하였고, 얼마안가 유숭은 사망했다.

 

차남 유균(劉鈞)이 뒤를 이어,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내정에 힘을 기울였으나, 시영에게 957년 영토를 빼앗겼다. 그후 후주에서는 조광윤에게 선양이 이루어져, 송나라가 탄생하였고, 이 송나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아 국내는 혼란상태에 빠졌다.

 

968년 유균이 죽자 유숭의 손자이며, 유균의 양자였던 유계은(劉繼恩)이 옹립되었으나 곧 살해당하고, 같은 유숭의 손자이자 유균의 양자였던 유계원(劉繼元)이 제위에 올랐다. 유계원은 환관에게 정치를 맡기고, 제위의 라이벌이었던 혈족을 살해하는등 정치를 혼란시켰다가 979년 송나라 태종의 친정군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여 북한은 멸망했다. 이로써 송나라에 의해 중국통일이 완성되었다. 그후 유계원은 송나라에서 팽성공(彭城公)이 되어 천수를 살다 죽었다.

역대 황제

묘호 시호 본명 생몰년 재위 연호
세조(世祖) 신무제(神武帝) 유숭(劉崇)
뒤에 유민(劉旻)으로 고침.
895년 ~ 954년 951년 ~ 954년 건우(乾祐, 951년 ~ 954년)
예종(睿宗) 효화제(孝和帝) 유균(劉鈞)
유승균(劉承鈞)이라고도 함.
926년 ~ 968년 954년 ~ 968년 건우(乾祐, 954년 ~ 957년
천회(天會, 957년 ~ 968년)
소주(少主) 소평제(少平帝)) 유계은(劉繼恩)  ? ~ 968년 968년 천회(天會)
영무제(英武帝) 유계원(劉繼元)  ? ~ 991년? 968년 ~ 982년 천회(天會) 968년 ~ 974년
광운(廣運) 974년 ~ 982년

 

 

전촉(前蜀 907년~925년)은 중국의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로 성도를 중심으로 한 사천성을 지배하던 나라로 절도사였던 왕건이 건국하였다.

 

창시자 왕건은 허주 무양(許州舞陽;현재의 하남성 무양현)사람으로 황소의 난 평정에 가담하여 공적을 세웠다. 그후 당나라의 실력자였던 환관 전령자(田令孜)의 양자가 되어, 희종(僖宗)이 촉(사천)으로 피신해 왔을때 도운 일이 계기가 되어 벽주(璧州;사천성 통강)자사(刺史)가 되었다.

 

888년 영평절도사(永平節度使)가 되었고, 891년에는 성도에 있던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인 진경선(陳敬瑄)과 양부 전령자를 살해하고 성도를 장악했다. 그다음 검남서천번진(劍南西川藩鎭)을 파괴하여 사천성 전지역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901년에는 봉상(鳳翔)의 이무정(기왕(岐王))으로부터 한중을 빼앗았다. 이로 인해 903년 당나로부터 촉왕의 지위를 하사받았고, 이후 907년 후량에 의해 당나라가 멸망하자 황제를 칭했다.

 

촉은 천연의 요해에 위치했기에 주변으로부터의 침공위험이 적었고, 소금과 철등 자원과 물자가 풍부하여 예로부터 [천부](天府)라고 불리었다. 그래서 중원의 전란을 피해 많은 문인, 승려, 백성들이 평화로운 촉으로 몰려들어왔다. 왕건도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를 보호하여 목판인쇄을 통해 유교, 불교의 경전 출판과 이 땅에서 나는 견직물같은 특산품 생산사업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침공의 위험성이 희박한 것 때문에 군대의 눈은 내부의 감시로 향해져, 심사단(尋事團)이라 불리는 비밀경찰을 만들어 불평분자들을 압박하고 살해했다.

 

918년 왕건이 죽자 왕건의 아들과 양자 사이에서 계승권 다툼이 일어나 최종적으로 왕건의 막내아들 왕연(王衍)이 뒤를 계승했다. 왕연은 촉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사치에 몰두하고, 정치는 환관에게 일임하여 백성들을 쥐어짰다. 이로 인해 민심은 급속도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925년 후당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자들이 없어, 간단하게 멸망당했다. 왕연은 장안으로 호송도중 살해되었다.

전촉 멸망후 무장 맹지상이 이 땅의 통치를 후당으로부터 일임받았으나 후에 독립하여 후촉을 건국하였다.

 

전촉이 보호했던 문인(文人)으로서 저명한 인물은 당나라 말기 대표적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위장(韋荘)과 후에 북송의 화단(画壇)에 영향을 끼친 궁정화가 황전(黄筌), 서(書)와 그림에 뛰어났던 선월대사(禅月大師) 관휴(貫休)등이 있다.

 

또 성도의 교외에는 영릉(永陵)이라 불리는 왕건의 묘가 남아있는데, 그중에는 왕건의 관을 둘러싼 24명의 진자(秦者)와 12명의 역사(力士)의 석조(石彫)가 있다. 이 묘는 1942년에 발견되어 현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역대 군주

  1. 고조(高祖, 왕건(王建), 재위 : 903년 ~ 918년)
  2. 후주(後主, 왕연(王衍), 재위 : 918년 ~ 925년)

 

후촉(後蜀 934년~965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중 하나로 전촉의 뒤를 이어 사천성을 지배하던 국가이다. 촉의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후촉이 건국되기 이전 촉지역은 전촉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내부의 부패가 심해 925년 후당의 장종(荘宗;이존욱)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리고나서 이 땅의 통치을 위임받은 이가 후촉의 시조인 맹지상이었다.

 

그후 후당에서는 장종이 살해당하고 명종(明宗;이사원)이 옹립되었다. 명종은 촉에 있던 맹지상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그를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반발한 맹지상은 930년 거병하여 후당군을 촉에서 몰아내고, 932년까지 촉의 전역을 장악했다. 이쯤되자 명종도 맹지상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는것이 어렵다는것을 알고 회유책으로 전환하여 933년 맹지상을 촉왕에 봉하였다. 다음해 명종이 죽자 맹지상도 완전히 자립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나 같은해 사망했다.

 

그후 맹지상의 3남 맹창(孟昶)이 제위를 이었다. 천연의 요해에 있던 촉은 외부의 적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았고, 군대를 내부의 감시로 돌려 권력을 유지했다. 전촉이 발전시켰던 농업, 양잠업을 계속해서 발전 유지시키며, 문인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맹창은 수도 성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몰두하여 성내(중국의 도시는 대체적으로 성채도시였다) 여러곳에 부용화(芙蓉花)을 심어 성도성는 별명이 부용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오대(五代)가 후진에서 후한으로 대체되는 혼란을 틈타 진(秦),계(階), 성(成), 봉(鳳)의 4주(현재의 감숙성 천수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빼앗았다. 그러나 후한에서 후주로 교체되고, 명군 세종(世宗;시영)이 등장하자 955년 사천을 빼앗겨 버렸다.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자 맹창은 북쪽의 북한과 손을 잡고 송나라에 대항했으나, 저항은 수포로 돌아가 965년 송나라에 병합되었다.

 

맹창은 카이펑으로 연행되어,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졌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사후 초왕(楚王)의 칭호가 추봉(追封)되었고, 시호는 공제(恭帝)가 내려졌다.

 

후촉이 멸망한 후 송나라는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촉땅에서 철저한 수탈을 자행하여 대량의 재물을 카이펑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촉지역 사람은 송나라에 대해 강한 원한을 품게되어, 이후 993년~995년에 걸쳐 사천균산 반란이라 불리는 대규모 농민반란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되었다.

 

문화

전촉과 마찬가지로 사천지역은 전란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몰려온 수많은 문인이나 지식인들이 모여, 동쪽의 , 남당과 더불어 오대십국 시대 최고봉의 문화을 활짝 피웠다.

 

후촉의 대표적 문인으로써 화가 황전(黃筌), 시인 모문석(毛文錫), 구양형(歐陽炯)등이 열거할 수 있다.

 

황전은 전촉, 후촉의 2왕조에서 궁정화가로써 일한 인물로 화조화(花鳥畵)가 특기로 훗날 송나라대에는 황조와 남당의 화조화가 서희(徐煕)와 더불어 화조화의 기본이 되었다.

 

모문석과 구양형은 이 시대 일반적이지 않은 장르인 사(詞)가 주요한 작품이었다. 그때까지 시(한시(漢詩))와는 다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노래처럼 읊어지는것이 사(詞)였다. 사(詞)는 그때까지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연애와 성적인것을 소재로 한 작품(염사(艶詞))도 많아 그 시대 의식이 매우 깨어있다는것을 느낄 수 있다.

 

모문석도 황전과 같이 2왕조를 섬긴 인물이었고, 구양형은 후촉의 재상까지 지낸던 인물이었다. 달리 본다면 이러한 문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후촉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시대 시인의 작품은 당나라말기 836년부터 940년까지 각지에 읊어지던 시와 사(詞)을 모아 편찬한 시집 [화간집](花間集)으로 모아지게 되고, 구양형이 서문(序文)을 썼다고 한다.

역대 군주

  1. 고조(高祖, 맹지상(孟知祥), 재위 : 934년)
  2. 후주(後主, 맹창(孟昶), 원래의 이름은 인찬. 재위 : 934년 ~ 96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