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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5 (오호 십육국 시대 4 : 후연,후진) 본문
중국의 역사 35 (오호 십육국 시대 4 : 후연,후진)
나라명 | 시조 | 존속 기간 | 민족 |
---|---|---|---|
전량 | 장궤 | 301년 - 376년 | 한족 |
전조 | 유연 | 304년 - 329년 | 흉노 |
성한 | 이특 | 304년 - 347년 | 파촉 |
후조 | 석륵 | 319년 - 351년 | 갈족 |
모용황 | 337년 - 370년 | 선비 | |
전진 | 부견 | 351년 - 394년 | 저족 |
후연 | 모용수 | 384년 - 409년 | 선비 |
후진 | 요장 | 384년 - 417년 | 강족 |
서진 | 걸복국인 | 385년 - 431년 | 선비 |
후량 | 여광 | 389년 - 403년 | 저족 |
남량 | 독발오고 | 397년 - 414년 | 선비 |
북량 | 저거몽손 | 397년 - 439년 | 노수호 |
남연 | 모용덕 | 400년 - 410년 | 선비 |
서량 | 이고 | 400년 - 421년 | 한족 |
하 | 혁련발발 | 407년 - 431년 | 흉노 |
북연 | 풍발 | 409년 - 436년 | 한족 |
나라명 | 시조 | 존속 기간 | 민족 |
---|---|---|---|
구지 | 양무소 | 296년 - 506년 | 저족 |
대 | 탁발의로 | 315년 - 376년 | 선비 |
염위 | 염민 | 350년 - 352년 | 한족 |
서연 | 모용홍 | 384년 - 394년 | 선비 |
적위 | 적요 | 388년 - 392년 | 정령 |
후촉 | 초종 | 405년 - 413년 | 한족 |
우문부 | 우문막규 | 302년 - 344년 | 선비 |
단부 | 단일육권 | 310년 - 357년 | 선비 |
후연
후연(後燕, 384년~407년)은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연(燕)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4개나 되기 때문에, 제일 두번째로 건국된 이 나라를 후연이라고 부르며 구별하였다.
모용황이 창업한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전진(前秦, 351~394년)의 부견(苻堅)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모용수는 이를 기회로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부견을 설득하여 곁을 떠나 하북의 업(鄴)으로 들어갔다. 이때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낙양(洛陽) 근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위해 출진하였다. 성을 나선 모용수는 부견이 반란을 감시를 위해 수행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았으며 항복한 적빈의 군대도 흡수하였다.
384년 정월에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수는 전진의 부비(苻丕)가 지키는 업을 놓고 1년 동안 공방전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하북성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385년에 부비가 업을 버리자 업을 점령하여 하북을 평정하였으며 386년에 중산(中山)에 수도를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후 후연 정권은 392년에 정령족의 적위(翟魏), 394년에 서연(西燕)을 멸망시켰으며 산동 지역의 동진(東晉) 세력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하였다. 한편 북방의 선비족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하여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발규의 북위(北魏)가 성장하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395년에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에서 대패하였으며, 이듬해 2차 정벌을 하였으나 도중에 병사하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慕容寶)는 즉위하자마자 무리하게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심을 잃었으며, 396년 8월에 북위의 침공을 받았다. 후연군은 북위의 침입에 거점에서 농성하며 맞섰으나 농성이 길어지자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수도 중산을 유지할 수 없었던 모용보는 중산을 버리고 요서의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버려진 중산에서는 모용상(慕容詳), 모용린(慕容麟)이 차례로 황제를 자칭하기도 하였으나 곧 함락되었으며 업을 지키던 모용덕(慕容德)은 중산 함락 직후인 398년에 황하 남쪽의 활대(滑臺)로 이동하여 남연(南燕)을 건국하였다. 한편 용성의 모용보는 398년에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진격하던 도중 군대 내부에서 모반이 일어나 쫒겨났으며, 각지를 떠돌다가 끝내 반란군의 지도자 난한(蘭汗)에게 살해되었다.
난한은 창려왕(昌黎王)을 자칭하며 후연을 다스렸으나 곧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慕容盛)에게 살해되었고, 모용성이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모용성은 종친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공포정치를 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모반 사건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40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新城)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1년에 모반으로 모용성이 죽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慕容熙)가 즉위하였다.
모용희는 사치를 일삼고 폭정을 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또한 402년, 404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 일대를 모두 상실하고 수도까지 위협받았다. 이에 모용희는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무리한 작전으로 희생만 컸을 뿐 모두 실패하였다. 407년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가 살해되고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慕容雲 : 고운高雲)이 옹립됨으로써 후연은 멸망하고 북연(北燕)이 성립되었다.
일부에서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 정권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후연의 멸망은 고운의 사망 이후이다.
역대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 연왕 (燕王) |
모용수(慕容垂) | 연원(燕元) 384년 ~ 386년 | 384년 ~ 386년 | |
1대 | 세조 (世祖) |
성무제 (成武帝) |
모용수(慕容垂) | 건흥(建興) 386년 ~ 396년 | 386년 ~ 396년 |
2대 | 열종 (烈宗) |
혜민제 (惠愍帝) |
모용보(慕容寶) | 영강(永康) 396년 ~ 398년 | 396년 ~ 398년 |
- | 창려왕 (昌黎王) 찬탈 군주 |
난한(蘭汗) | 청룡(靑龍) 398년 | 398년 | |
3대 | 중종 (中宗) |
소무제 (昭武帝) |
모용성(慕容盛) | 건평(建平) 398년 장락(長樂) 399년 ~ 401년 |
398년 ~ 401년 |
4대 | - | 소문제 (昭文帝) |
모용희(慕容熙) | 광시(光始) 401년 ~ 406년 건시(建始) 407년 |
401년 ~ 407년 |
모용수(慕容垂, 326년 ~ 396년, 재위 : 384년 ~ 396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초대 황제. 자는 도명(道明),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무제(成武帝)이다.
즉위 이전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의 다섯째 아들로 모친은 단씨(段氏)이며 원래 이름은 모용패(慕容覇)이다. 326년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용황의 총애를 받았다. 모용황은 모용패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태자 모용준(慕容俊)보다 모용패를 더 총애하였고, 이로 인해 모용준은 모용패를 시기하였다. 모용준이 즉위한 이후 모용패는 견제를 받아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하고 많은 제한을 받았다. 모용패는 낙마하여 앞니가 부러지게 되자 이를 핑계로 이름을 수(垂)로 바꾸기도 하였다. 모용수의 부인은 단씨(段氏)였는데, 모용준의 황후인 가족혼씨(可足渾氏)와 불화가 있어 누명을 쓰고 죽었다. 황후는 동생을 모용수의 부인으로 삼았으나 사이가 좋지 않아 모용수를 더욱 미워하였다.
360년, 모용준이 죽자 모용위(慕容暐)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뒤를 이었으며, 모용수의 형 모용각(慕容恪)이 정권을 잡았다. 모용수는 모용각에게 협력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모용각이 367년에 죽자 모용수는 권력자 모용평(慕容評)의 시기를 받아 다시 견제를 받게 되었다. 369년,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으로 쳐들어오자, 모용수는 북벌군을 물리치는 1등 공신이 되었다. 이에 모용수의 세력을 두려워한 모용평과 태후 가족혼씨는 모용수의 암살을 모의하였으며, 이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전연을 탈출하여 전진(前秦)으로 망명하였다.
370년에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수는 전연의 귀족들을 회유하는 한편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383년에 부견(苻堅)이 비수대전(淝水大戰)을 일으키자 모용수는 군단을 이끌고 형주(荊州) 지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부견이 비수에서 패전하자 대부분의 군대가 와해되었으나 모용수의 부대만 온전히 퇴각에 성공하였다. 부견은 모용수의 보호를 받으며 퇴각하였다. 모용수는 부견이 몰락한 것을 깨닫고 독립할 것을 꾀하였는데, 부견을 설득하여 업(鄴)에서 북방을 방어하도록 허락받아 부견의 곁을 떠났다.
업에는 부견의 아들 부비(苻丕)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수는 모반을 계획하였다. 이때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낙양 근방에서 모반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명받아 업에서 출진하였다. 모용수는 감시역으로 파견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으는 한편 적빈의 군대까지 흡수하여 강력한 세력을 키웠다.
치세
384년 1월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이후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포위하고 1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부비의 수비가 견고하여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385년 8월에 부비가 업에서 빠져나가자 업을 점령하였고 황하 이북 일대를 대부분 점령하였다. 386년 1월에는 황제에 즉위, 수도를 중산(中山;지금의 하북성 정주)에 정하고 내정을 정비하였다. 392년에는 정령족 적교(翟釗)의 적위(翟魏)를 멸망시켰고, 394년에는 서연(西燕)을 멸망시켜 화북 일대를 평정하였다. 동진과는 주로 산동 지방에서 충돌하였는데, 394년 이후 동진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한편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한 모용수는 탁발규를 지원하여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발규의 북위가 성장하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395년에 태자 모용보(慕容寶)를 보내 북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에게 대패하여 군대가 학살되었고, 이에 모용수는 396년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시 북위를 정벌하였다. 평성(平城)을 점령하고 북위에 큰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한 모용수는 전해에 참합피에서 학살당한 군대의 해골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다. 이로 인해 북위 정벌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돌아오던 도중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모용보(慕容寶, 355년 ~ 398년, 재위 : 396년 ~ 398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2대 황제이다. 자는 도우(道祐), 묘호는 열종(烈宗), 시호는 혜민제(惠愍帝)이다.
모용수(慕容垂)의 넷째 아들로 모친은 단씨(段氏)이다. 369년에 모용수가 전진(前秦)으로 망명하고 전진에서 생활하는 동안 모용수의 아들들이 죽었기 때문에 모용보가 세자가 되었다. 부견(苻堅)의 궁정에서 전진 태자의 말을 씻기는 직책을 맡았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패전하자 모용수가 거병하는 것을 도왔으며 38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모용보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395년에 북위(北魏)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복수전을 치르던 도중 모용수가 396년 4월에 진중에서 병사하여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황제에 즉위한 모용보는 배다른 동생인 모용륭(慕容隆), 모용농(慕容農) 등의 보좌를 받으며 치세를 시작하였다. 즉위하자마자 호구 조사와 개혁을 실시하여 민심을 잃었으며 11세의 어린 아들 모용책(慕容策)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 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 8월에 북위가 침공을 개시하여 하북 일대를 석권하자 모용보는 중산, 업, 신도 등의 거점을 중심으로 농성을 시작하였다. 397년에 탁발규가 신도를 함락하자 모용보는 반격을 개시하여 북위군과 호타수에서 맞붙었으나 대패하여 다시 중산에서 농성하였다. 3월에 대장군 모용린(慕容麟)이 모용보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려다가 실패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모용보는 모용린이 유주의 군대를 탈취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산을 버리고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용성으로 이동하던 도중 서장자 모용회(慕容會)의 군대를 만나 호위를 받았는데, 모용회가 모반을 일으켜 모용륭이 죽고 모용보와 모용농은 용성으로 도망쳤다. 모용회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모용보는 용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추스렸다. 397년 말에 북위의 군대가 약화되고 업을 지키는 모용덕(慕容德)이 남쪽으로 되돌아 올 것을 주청하는 표문이 올라오자 모용보는 대군을 동원하여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꾀하였다. 398년 봄, 모용보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작전을 수립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끈 채 갈팡질팡하였으며, 이로 인해 불만을 품은 군대가 모반을 일으켰다. 모용보는 모용농, 모용성(慕容盛)과 함께 용성으로 도망쳤는데, 모용농이 배반하여 용성은 함락되고 모용보, 모용성은 성을 탈출하였다.
탈출한 모용보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남연(南燕)의 모용덕에게 가서 유세하였는데 거절당했다. 이에 모용보는 다시 용성으로 이동하였는데, 반란군을 이끌던 당숙 난한(蘭汗)이 모용보를 속임수로 성에 끌어들여 살해하였다. 난한은 모용보에게 영제(靈帝)라고 시호를 올렸으며, 후에 모용성이 난한을 축출한 뒤에 묘호를 열종, 시호를 혜민제라 하였다.
모용성(慕容盛, 373년 ~ 401년, 재위 : 398년 ~ 401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3대 군주이다. 자는 도운(道運),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소무제(昭武帝)이다.
모용성은 모용보(慕容寶)의 서장자로 모친은 정씨(丁氏)이다. 어린 시절부터 모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전진(前秦)의 장안에서 출생하여 비수대전이 벌어졌을 무렵 장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385년, 장안이 서연(西燕)에 의해 포위되자 부견(苻堅)은 장안 성내의 모용씨들을 학살하였는데 모용성은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모용성은 서연의 모용충(慕容沖)을 의지하여 386년에 병주까지 이동하였으며 12월 경에 서연의 진중을 탈출하여 387년에 후연의 모용수(慕容垂)에게 귀환하였다. 모용성은 장락왕(長樂王)에 책봉되었다.
398년, 용성에서 모반이 일어나 반란군에게 함락되자 모용성은 모용보와 함께 탈출하여 각지를 떠돌았다. 모용보가 난한(蘭汗)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던 모용성은 결국 이탈하였고, 모용보가 난한에게 살해되자 모용성은 복수를 위해 난한에게 거짓 항복하였다. 난한은 모용성이 자신의 사위였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측근으로 삼았다. 모용성은 난한의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고 모용기(慕容奇)의 반란을 사주하였다. 모용기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의 지휘권 문제로 난제(蘭堤)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고 돌아온 난목(蘭穆)을 모용성이 살해, 난한도 군대에 의해 주살되어 난한의 찬탈은 종식되었다. 모용성은 황제로 즉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책봉명인 장락왕을 자칭하며 후연의 황제를 대행하였다.
모용성은 치세 내내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많은 공신과 종친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폭정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모용성은 398년 말에 황제에 즉위하고 건평으로 개원하였으나 이듬해 정월에 다시 서민천왕(序民天王)으로 칭호를 깎았다. 40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2개 성을 함락하고 70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였다. 401년 8월, 용성 내부에서 일어난 모반의 와중에 패잔병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였다.
모용희(慕容熙, 385년 ~ 407년, 재위 : 401년 ~ 407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마지막 군주이다. 자는 도문(道文), 시호는 소문제(昭文帝)이다.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아들로 모친은 귀빈 단씨(段氏)이다. 모용수의 말년에 태어나 총애를 받았으며 하간왕(河間王)에 책봉되었다. 398년에 용성에서 모반이 일어나 모용보(慕容寶)가 죽고 난한(蘭汗)이 권력을 잡았는데 모용희는 나이가 어려서 주살되지 않았다. 곧이어 모용성(慕容盛)이 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모용희는 하간공(河間公)에 책봉되었다. 400년에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종군하여 큰 전공을 세웠으며 용맹함이 모용수에 버금간다고 평가되었다. 401년에 반란이 일어나 모용성이 난 중에 죽자 태후 정씨(丁氏)에 의해 후연의 군주로 옹립되었다.
모용희는 왕후 부씨(苻氏)를 총애하여 부씨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는데, 부씨의 사치를 위해 각종 토목공사를 남발하여 국력을 낭비하였다.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숙군성(宿軍城), 연군(燕郡) 등을 공격당하고 요동 일대를 빼앗겼다. 405년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요동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한 모용희는 요동성을 거의 함락할 뻔 하였으나 성에 자신과 왕후가 최초로 입성하기 위해 공격을 늦추게 하였다가 패퇴하였다. 405년 말에는 거란을 공격하러 출정하였다가 목표를 변경, 치중도 버리고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07년, 왕후 부씨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빠져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고 공신들을 순장하려 하였다. 무덤이 완성되자 모용희는 부씨의 상여를 직접 메고 장례를 위해 용성을 나섰는데, 이때를 틈타 풍발(馮跋)이 모반을 일으켜 모용운(慕容雲)을 추대하였다. 모반 소식을 들은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군대가 흩어지면서 모용희도 사로잡혀서 처형되었다.
후진
후진(後秦 384년~417년)은 오호 십육국 시대 강족 요장(姚萇)이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진(秦)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여럿이므로 이 나라는 후진이라 구분하여 부른다. 건국자의 성을 따서 요진(姚秦)이라고도 한다.
강족(羌族)은 중국의 서북방에 살던 이민족으로 후한 시대부터 중국으로 이주하여 산시 성(陝西省) 일대에 거주하였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 들어와 요익중(姚弋仲), 요양(姚襄), 요장 등이 족장이 되어 전조(前趙), 후조(後趙), 동진(東晉), 전진(前秦) 등의 용병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하였다. 383년에 전진의 부견(符堅)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화북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였던 요장은 반란군에 패배하였는데,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하여 위수 북방의 말목장으로 도주하여 384년에 대장군·대선우·만년진왕(大將軍大單牛萬年秦王)을 자칭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후진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요장은 관중(關中)의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전진의 부견과 전쟁을 벌였다. 385년에 서연(西燕)에 의해 장안이 함락되자 요장은 장안을 탈출한 부견을 체포하여 살해하였다. 386년에 서연이 장안을 버리고 이동하자 요장은 장안을 점령하였으며 이를 근거지로 하여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때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에서 부등(符登)이 전진의 잔존 세력들을 통합하였으며 이후 부등과 요장은 관중의 패권을 놓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393년 말, 요장이 병사하자 태자였던 요흥(姚興)이 뒤를 이었다. 요흥은 요장의 죽음을 틈타 쳐들어온 부등을 격파하여 살해하여 오랜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후 숙부인 요서(姚緒)와 요석덕(姚碩徳)의 보좌를 받아 관중을 평정하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399년에는 동진을 공격하여 낙양을 점령하고 한수(漢水)와 회수(淮水) 이북의 지역들을 장악하였으며 400년에는 서진(西秦)을 멸망시켰다. 401년에는 후량(後凉)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남량, 북량, 서량을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직후 북위(北魏)와 분쟁이 일어나 402년에는 시벽(柴壁 ; 산시 성 양분현)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양주(凉州 : 간쑤 성 중서부)의 패권을 잃었다. 이후 북위와 중립적인 관계를 회복한 후진은 403년에 다시 양주를 공격하여 후량을 멸망시키고 남량, 북량, 서량을 다시 속국으로 삼았다. 405년에는 후구지를 복속시켰으며 407년에는 남연(南燕)을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405년 말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劉裕)가 한수 유역의 12개 군을 반환하도록 요청하자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승낙하였다. 이듬해에는 남량의 확장에 밀려 양주를 상실하였으며 407년에는 혁련발발(赫連勃勃)의 하(夏)가 자립하여 후진은 오랜 전쟁에 돌입하였다. 후진은 하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였으며 이로 인해 409년에는 서진이 독립하였으며 동진과도 지속적으로 대립하여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414년 이후에는 후계자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 후진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마침내 416년에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요흥은 이 반란을 진압한 직후 사망하였다. 요홍(姚弘)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국내의 혼란은 계속되었으며, 이를 틈타 동진의 유유가 북벌군을 일으켜 쳐들어왔다. 요홍은 북벌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으나 내분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며, 417년에는 장안이 함락되어 3대 33년만에 멸망하였다.
후진의 문물
현존하는 후진의 문물은 초당사(草堂寺), 기공사장별(記功賜将莂;386년)、여헌묘표(呂憲墓表;402년)、여지묘표(呂他墓表;402년)、부씨여정정조상(苻氏女静貞造像;407년)등이 있고, 이 시기 기년문서(紀年文書)로 투르판 문서 1점이 존재한다. 천수의 맥적산 석굴에는 후진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불이 남아있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문물로써 건초자웅도(建初雌雄刀;386년)가 알려져 있다.
역대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시조 (始祖) |
경원제 (景元帝) 무소제 추증 |
요익중(姚弋仲) | - | - | |
- | 위무왕 (魏武王) 무소제 추증 |
요양(姚襄) | - | - | |
- | 진왕 (秦王) |
요장(姚萇) | 백작(白雀) 384년 ~ 386년 | 384년 ~ 386년 | |
1대 | 태조 (太祖) |
무소제 (武昭帝) |
요장(姚萇) | 건초(建初) 386년 ~ 394년 | 386년 ~ 393년 |
2대 | 고조 (高祖) |
문환제 (文桓帝) |
요흥(姚興) | 황초(皇初) 394년 ~ 399년 홍시(弘始) 399년 ~ 416년 |
394년 ~ 416년 |
3대 | - | - | 요홍(姚泓) | 영화(永和) 416년 ~ 417년 | 416년 ~ 417년 |
요익중(姚弋仲, 280년 ~ 352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에 활동한 강족(羌族)의 수장이다. 후에 후진(後秦)을 건국한 요장(姚萇)의 아버지이다. 후진이 건국된 이후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다.
요익중은 남안(南安) 출신으로 강족의 수장이다. 313년에 기근을 피해 동쪽으로 이주하여 옹주(雍州 : 산시 성 중부)에 거주하며 호서강교위·옹주자사·부풍공(護西羌校尉、雍州刺史、扶風公)을 자칭하였다. 전조(前趙)의 유총(劉叢)은 요익중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18년 이후 유요(劉曜)가 장안에 도읍하고 관중을 장악하자 요익중은 강족을 이끌고 전조에 복속하였다. 329년에 후조(後趙)가 전조를 멸망시키고 관중을 장악하자 다시 후조에 복속하였으며, 333년에 후조에서 일어난 반란에 개입하였다가 석호(石虎)에게 패배하자 다시 후조에 복속하였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강족 수십 만 명을 이끌고 관동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요익중은 석호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349년에 관중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병에 걸린 석호가 소극적으로 대처하자 요익중은 석호를 찾아가 그를 꾸짖고 총사령관이 되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하던 도중 석호가 사망하고 후조가 후계자 분쟁에 휩싸이자 요익중은 섭두(灄頭)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염위(冉魏)와 후조의 전쟁에 개입하여 후조를 돕기도 하였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姚襄)을 보내 저족의 포홍(蒲洪)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염위, 후조, 포홍 등의 세력과 대립을 거듭하였다.
351년 요익중은 동진(東晉)에 복속하여 관작을 받고 동진의 영역으로 이동을 계획하였으나 352년에 사망하였다. 요익중의 유골은 후계자 요양이 보관하였는데, 357년에 관중으로 돌아간 이후 부생(苻生)에 의해 왕에 준하는 예로 매장되었다.
요양(姚襄, 331년 ~ 357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강족(羌族)의 수장이다. 후에 후진(後秦)을 건국한 요장(姚萇)의 형이다. 후진이 건국된 이후 위무왕(魏武王)으로 추존되었다.
요양은 요익중(姚弋仲)의 다섯째 아들로 331년에 태어났다. 능력과 인품이 뛰어났기 때문에 주위의 추천을 받아 요익중의 세자(世子)가 되었다. 349년에 후조(後趙)가 혼란에 빠지자 요양은 요익중의 명을 받아 후조와 염위(冉魏)의 분쟁에 개입하고 여러 전쟁에 참여하였다. 352년 요익중이 죽자 요양은 발상하지 않고 동진(東晉)으로 이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동진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살아남았다.
요양은 강족을 이끌고 동진의 초성(譙城)에 주둔하였다. 은호(殷浩)의 북벌에 종군하여 사상(謝尚)을 구원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요양은 동진에 배반할 뜻을 품었으며, 그를 의심하는 은호와 대립하였다. 353년, 은호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선봉이 된 요양은 매복하고 있다가 은호의 본군을 격파하고 회남(淮南) 지역을 약탈·점거하였다. 한때 동진의 수도 건강을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곧 동진 조정에 잘못을 사과하고 표면적으로 복속하였다. 354년에는 전연(前燕)에 복속하였으며, 355년에는 회남을 떠나 허창(許昌)을 점령하고 낙양(洛陽)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356년에 환온(桓溫)이 북벌을 시작하여 요양을 공격하자 요양은 크게 패배하여 병주(幷州 : 산시 성)의 평양(平陽)으로 도망쳤다.
평양에서 과거의 부하 윤적을 만나 그 세력을 합친 요양은 병주의 군벌 장평과 싸워 패배하였으나 곧 장평과 화해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357년, 요양은 전진의 관중을 공격하였다. 관중의 강족이 호응하여 한때 장안을 위협하였으나 곧 토벌군에 패배하고 붙잡혀 살해되었다. 요양 휘하의 강족은 동생 요장이 수습하여 전진에 항복하였다.
요장(姚萇, 331년 ~ 393년, 재위:384년 ~ 393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후진(後秦)의 초대 황제이다. 자는 경무(景茂),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소황제(武昭皇帝)이다.
요장은 강족의 수장 요익중(姚弋仲)의 24번째 아들이다. 352년, 요익중이 죽자 형인 요양(姚襄)이 뒤를 잇고 동진(東晉)으로 부족을 이끌고 이동하려 했는데,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할 위기에 빠졌다. 요양의 말이 화살에 맞아 죽자 요장은 요양에게 말을 내주고 희생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동진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살아남았다. 이 일로 인하여 요장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요양의 총애를 받았다.
357년에 요양이 전사하자 요장은 부족을 이끌고 전진의 부생(苻生)에게 항복하였다. 부견(苻堅)의 치세에 요장은 강족 부대를 이끌고 익주(益州)를 정복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393년에는 용양장군(龍驤將軍)에 임명되었다.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요장은 촉 방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비수에서 부견의 군사가 와해되자 요장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384년, 모용홍(慕容泓)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장은 부견의 명을 받아 모용홍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는데 사령관 부예(苻睿)가 섣부른 작전을 펼쳐 패배하고 말았다. 이 패전에 대해서 부견이 요장에게 책임을 묻자 요장은 북지(北地)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켜 만년진왕(萬年秦王)을 자칭하며 후진을 건국하였다.
건국 초의 후진은 부견의 공격으로 멸망할 뻔 하기도 하였으나 모용홍이 장안을 공격하여 부견이 퇴각하였기 때문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요장은 부견과 모용홍, 모용충(慕容沖)이 장안을 중심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모용충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385년에 모용충이 장안을 점령하고 부견이 장안을 빠져나오자 요장은 부견을 포로로 잡았다. 요장은 부견에게 선양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부견을 살해하였다. 386년에는 선비족이 떠난 장안을 차지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요장은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 지역의 전진계 세력들을 공략하였는데, 386년 말에 부등(苻登)이 황제에 즉위하여 요장에 대항하였다. 이후 진주와 옹주(雍州 : 산시 성 중부) 일대에서 전진의 부등과 후진의 요장은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389년에는 수도인 안정(安定)을 공격당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으나 대계(大界)에 있던 전진군의 치중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히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에도 전진군이 후진에 대하여 파상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요장은 수비 태세를 굳히면서 세력을 강화시켰다. 393년 12월에 병사하였다.
요흥(姚興, 366년 ~ 416년, 재위:394년 ~ 416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진(後秦)의 제2대 황제이다. 자는 자략(子略),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문환제(文桓帝)이다.
요흥은 요장(姚萇)의 장자로 366년에 태어났다. 요장이 부견(苻堅)의 휘하에서 복무할 때 요흥은 태자의 사인(舍人)이었다. 384년에 요장이 후진을 건국하자 요흥은 장안을 탈출하여 요장에게 왔고 요장은 그를 태자에 책봉하였다. 요장이 전진(前秦)의 부등(苻登)과 전쟁을 벌일 때 요흥은 장안을 지키면서 후방을 안정시켰다.
393년 말, 요장이 병으로 사망하자 요흥은 요장의 상을 숨기고 지방의 동요를 막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얼마 후인 394년, 요장의 사망 소식을 들은 부등은 총력을 기울여 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부등을 물리친 요흥은 요장의 상을 발표하고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즉시 부등을 추격하여 마모산에서 부등을 살해하였다. 요흥은 항상 숙부 요서(姚緖)와 요석덕(姚碩德)의 의견을 따라 정치를 행하여 국내 안정에 노력하였다. 또한 주변 세력에 대해서도 우호관계를 맺어 북위(北魏)·후연(後燕)과 사신을 교환하였다.
396년에는 옛 전진 세력의 근거지였던 상규(上邽)를 점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동진의 낙양을 공격하였다. 399년에는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는데 이 군사 행동에 한수(漢水)와 회수(淮水) 이북의 군현들이 후진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400년에는 농서를 공격하여 서진(西秦)을 멸망시켰으며 401년에는 후량(後凉)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해부터 북위와 외교 마찰이 생겨 북위의 공격을 받았으며, 402년에는 시벽(柴壁)에서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후 북위와 후진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03년에는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서량(西凉), 북량(北凉), 남량(南凉)을 모두 속국으로 만들었다. 405년에는 구지도 복속시켰다. 한편 장안에는 남연(南燕)의 황제 모용초(慕容超)의 모친과 부인이 살고 있었다. 407년 말, 모용초가 요흥에게 이들을 송환해 줄 것을 요구하자 요흥은 송환의 조건으로 태악(太樂)을 바치고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요흥은 불교에 심취하여 401년 후량에 머물고 있던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하여 장안으로 데려왔다. 요흥은 구마라습을 국사로 삼고 각지에 사원을 건설하였다. 또한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대승정(大僧正)을 임명하기도 하였다.
405년 말, 동진(東晉)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劉裕)가 한수 일대의 12개 군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를 승락하였다. 406년에는 남량에 양주(凉州)의 수도 고장(姑臧)을 빼앗겼으며 사실상 남량, 북량, 서량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407년에는 유발발(劉勃勃)이 반란을 일으켜 하(夏)를 건국하는 등 내분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후진은 하와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계속 쇠퇴하였다. 409년에는 멸망시켰던 걸복부의 서진이 독립하였고 구지도 자립하였다. 410년에는 후촉(後蜀)과 연합하여 동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에 요흥은 413년에 북위와 인척 관계를 맺어 대응하려 하였다.
그러나 요흥이 병으로 쇠약해지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후진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요흥이 총애하던 아들 요필(姚弼)은 권력을 잡으려 414년에 모반을 일으켰으나 요흥이 병에서 회복되자 실패하였다. 그러나 요흥은 요필을 처벌하지 않았고, 415년에 다시 요흥이 병으로 쓰러지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진압되었고 요필은 장안 성내에 유폐되었다. 416년, 요흥의 임종이 가까워오자 요필의 도당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요흥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서 이 반란을 진압하고 요필을 처형하여 후계자 다툼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
요홍(姚泓, 388년 ~ 417년, 재위:416년 ~ 417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진(後秦)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자는 원자(元子), 시호는 없다.
요홍은 요흥(姚興)의 장자로 388년에 태어났다. 394년에 요흥이 황제에 즉위하자 요홍은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요홍은 학문과 시를 좋아하고 불교에 심취하여 나약했기 때문에 요흥의 걱정을 샀다. 또한 동생들이 태자 자리를 넘보기도 하였는데 특히 요흥은 요필(姚弼)을 총애하여 요필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고 이로 인해 요필은 요홍을 몰아내고 태자가 되려 하였다. 요필은 414년에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였으며, 415년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고 유폐되었다. 요홍은 요필에게 자비를 베풀어 요필의 도당들을 대부분 살려주었다. 416년 초, 요흥의 병이 깊어지자 요홍은 요흥을 궁으로 맞아들여 임종을 지키려 하였다. 이에 요필의 도당들은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모반을 일으켰고 궁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요흥이 병을 무릅쓰고 나타나자 반란은 실패하였으며 요필은 처형되었다. 요흥이 다음날 죽자 요홍이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요홍이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진(東晉)의 유유(劉裕)가 북벌군을 일으켜 후진을 공격하였다. 요홍은 이에 대응하여 숙부 요소(姚紹)에게 군권을 맡겼으나 뒤이어 일어난 요의(姚疑)의 반란으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북벌군은 허창을 거쳐 낙양까지 점령하였다. 417년이 되자 하동의 포판과 동관에 병력이 집중된 틈을 타서 안정을 수비하던 요회(姚恢)가 반란을 일으켰다. 요회의 반란은 요소가 동관에서 돌아와 진압하였으나 이 반란으로 인해 후진은 안정을 상실하였다. 유유의 북벌군은 포판과 동관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으며, 요소도 진중에서 분사하여 결국 방어선이 무너졌다. 요홍은 마지막 대군을 이끌고 출진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관을 통해 들어온 북벌군 분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북벌군이 분전하여 요홍은 대패하였으며 뒤이어 위수를 거슬러온 북벌군 별동대에 의해 장안이 함락되어 후진은 멸망하였다.
요홍은 건강으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일설에는 요홍이 처형 직전에 산속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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