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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4 (오호 십육국 시대 3 : (전연,전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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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4 (오호 십육국 시대 3 : (전연,전진)

두바퀴인생 2010. 3. 15. 05:17

 

 

중국의 역사  34 (오호 십육국 시대 3 : 전연,전진)

 

 

 

 

오호십육국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전량 장궤 301년 - 376년 한족
전조 유연 304년 - 329년 흉노
성한 이특 304년 - 347년 파촉
후조 석륵 319년 - 351년 갈족

전연

모용황 337년 - 370년 선비
전진 부견 351년 - 394년 저족
후연 모용수 384년 - 409년 선비
후진 요장 384년 - 417년 강족
서진 걸복국인 385년 - 431년 선비
후량 여광 389년 - 403년 저족
남량 독발오고 397년 - 414년 선비
북량 저거몽손 397년 - 439년 노수호
남연 모용덕 400년 - 410년 선비
서량 이고 400년 - 421년 한족
혁련발발 407년 - 431년 흉노
북연 풍발 409년 - 436년 한족


오호십육국 이외의 국가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구지 양무소 296년 - 506년 저족
탁발의로 315년 - 376년 선비
염위 염민 350년 - 352년 한족
서연 모용홍 384년 - 394년 선비
적위 적요 388년 - 392년 정령
후촉 초종 405년 - 413년 한족
우문부 우문막규 302년 - 344년 선비
단부 단일육권 310년 - 357년 선비

 

 

 

 

 

 

전연

 

전연(前燕 337년~370년)은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황(慕容皝)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국호는 (燕)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4개나 되기 때문에, 제일 첫번째로 건국된 이 나라를 전연이라고 부르며 구별하였다.

 

역사

선비족 모용부(慕容部)는 요서 일대를 근거지로 살던 부족으로 서진(西晉)에 복종하면서 선비의 다른 부족과 항쟁을 벌였다.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慕容廆)는 307년부터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고 자립하였다. 모용외는 혼란에 빠진 서진의 유민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강화하였으며, 319년 서진의 동이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를 물리치면서 요동(遼東) 지방의 패권을 획득하였다.

 

333년에 모용외의 뒤를 이은 모용황(慕容皝)은 내분을 진압하고 337년에 연왕(燕王)을 자칭하니 이것이 전연의 건국이다. 338년에는 단부(段部)를 공격하였으며, 후조(後趙)의 침입을 물리쳤다. 이후 후조와 대립하는 한편 고구려(高句麗), 선비족 우문부(宇文部) 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341년에는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에 수도를 정했다.

 

348년모용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용준(慕容儁)은 후조 멸망의 혼란을 틈타 350년에 유주(幽州) 일대를 점령하고 기주(冀州)를 공격하였다. 352년에는 염위(冉魏)를 멸망시키고 하북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황제에 즉위하였다. 353년에는 업(鄴)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화북의 동쪽 지역을 장악하였다.

 

360년, 모용준의 뒤를 이어 모용위(慕容暐)가 즉위하였다. 모용위는 나이가 어려 백부인 모용각(慕容恪)이 섭정하였는데, 모용각의 섭정 기간에는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367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慕容評)이 실권을 잡고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 전연의 국력은 쇠퇴하였다. 369년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연을 공격하였는데 전진(前秦)의 구원군과 모용수(慕容垂)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모용평은 모용수의 전공을 두려워하여 모용수를 죽이려고 하였고, 모용수는 전진(前秦)으로 망명하였다.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의 침입을 받아 항복함으로써 전연은 3대 33년만에 멸망하였다.

 

역대황제일람

전연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고조
(高祖)
선무제
(宣武帝)

경소제 추증
모용외(慕容廆) - -
1대 태조
(太祖)
연왕
(燕王)

{문명제}
(文明帝)
경소제 추증
모용황(慕容皝) - 337년 ~ 348년
- 연왕
(燕王)
모용준(慕容儁) - 348년 ~ 352년
2대 열조
(烈祖)
경소제
(景昭帝)
모용준(慕容儁) 원새(元璽) 352년 ~ 357년
광수(光壽) 357년 ~ 360년
352년 ~ 360년
3대 - 유제
(幽帝)

남연(南燕)
헌무제 추증
모용위(慕容暐) 건희(建熙) 360년 ~ 370년 360년 ~ 370년


 

 

모용외(慕容廆, 269년 ~ 333년)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수장으로 훗날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이다. 전연이 건국된 이후 고조(高祖) 선무제(宣武帝)로 추존되었다.

 

모용외는 269년 모용부의 대인(大人)인 모용섭귀(慕容涉歸)의 아들로 태어났다. 283년에 모용섭귀가 죽자 그의 동생 모용내(慕容耐)가 정권을 장악하고 모용외를 죽이려 하였으나 모용외가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285년에 모용내가 국인(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모용외는 선비족의 우문부(宇文部: 선비족 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격하려 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진과 적대하게 된 모용외는 유주(幽州) 일대를 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서진 무제(武帝)는 모용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또한 부여(扶餘)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依慮)를 자살하게 하였다. 서진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였으며, 모용외는 289년에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우문부, 단부(段部:선비족 일파)의 침입을 피해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다시 본거지를 극성(棘城)으로 옮겼다.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였으며, 혼란에 빠진 서진에서 유민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이에 서진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유민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유민들이 듣지 않자 모용외가 억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18년에 우문부, 단부, 고구려(高句麗)를 끌어들여 모용외를 협공하게 하였는데 모용외는 삼국의 군사를 이간질시켜 위기를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최비는 모용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국 319년에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320년 동진(東晉)은 모용외를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로 삼았으며, 이후 모용외는 동진에 충성하여 후조(後趙)와 대립하였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하였다.325년에는 후조에 복속하였던 우문부가 석륵(石勒)의 명령에 따라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333년에 사망하였다.

 

 

모용황(慕容皝, 297년 ~ 348년 재위: 337년 ~ 348년)은 오호십육국시대 전연(前燕)의 초대 왕이다. 시호는 문명왕(文明王)이었으나, 모용준(慕容儁)이 황제에 즉위한 후 태조(太祖) 문명제(文明帝)로 추존되었다.

 

모용황은 모용외(慕容廆)의 적장자로, 32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333년에 모용외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모용부의 대인(大人)이 되었다. 그러나 서형(序兄)인 모용한(慕容翰)과 동생 모용인(慕容仁)과 대립하여 내란이 발생하여 모용부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모용인은 반란을 일으켜 요동(遼東)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모용한은 서쪽의 단부(段部: 선비족 일파)로 망명하였다가 단부의 군대를 안내하여 모용황을 공격하였다. 한때 모용황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모용한이 모용부가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철군함으로써 살아남았다. 336년, 모용황은 모용인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모용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337년, 모용황은 동진(東晉)에 대한 종속적 관계를 끊고,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황은 단부와 대립하였는데 후조(後趙)와 동맹을 맺고 338년에 단부를 협공하였다. 모용황은 협공으로 혼란에 빠진 단부를 공격하여 민호와 가축을 약탈한 후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이로 인해 후조의 석호(石虎)는 전연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리하여 단부를 멸망시킨 후조는 전연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후조의 침입으로 한때 수도인 극성(棘城)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모용황은 농성전 끝에 후조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반격하여 영토를 일부 확장하였다. 이후 후조의 유주(幽州)를 계속 공격하여 약탈전을 벌였다. 340년에는 다시 후조가 대군을 이끌고 전연을 위협하였으나 모용황은 후조의 전선을 우회하여 계(薊)를 습격, 크게 승리하였다. 342년에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고구려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344년에는 우문부(宇文部: 선비족 일파)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모용황은 한족의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한화(漢化) 정책을 취하였으며 농경을 장려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348년에 수렵 도중에 낙마하여 머리를 다쳤으며,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다.

 

 

모용준(慕容儁, 319년 ~ 360년, 재위: 348년 ~ 360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연(前燕)의 제2대 군주이다.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경소제(景昭帝)이다.

 

모용준은 319년, 모용황(慕容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37년에 모용황이 전연을 건국하고 연왕(燕王)에 즉위하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348년, 모용황이 죽자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하였다.

 

349년, 동진(東晉)은 모용준을 사지절·시중·대도독·독하북제군사·유평이주목·대장군·대선우·연왕(使持節、侍中、大都督、督河北諸軍事、幽、平二州牧、大將軍、大單于、燕王)에 책봉하여 정식으로 연왕이 되었다. 같은 해, 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준은 후조를 정벌하기 위해 준비하여 350년에 출정하였다. 계(薊 : 베이징)를 점령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고 기주(冀州 : 허베이 성 중남부)를 공격하였다. 당시 후조와 염위(冉魏)가 전쟁 중이었는데, 모용준은 이 전쟁에 개입하여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351년에 후조가 멸망하고 352년에 염위도 쇠약해지자 모용준은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염위의 황제 염민(冉閔)을 격파·포획하고 뒤이어 염위를 멸망시켰다.

 

화북의 동부 일대를 차지한 모용준은 352년에 황제에 즉위하고 동진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산둥 성, 산시 성, 허난 성 지역을 점령하고 전진(前秦), 동진과 대립하였다. 357년에는 업(鄴)으로 천도하였다. 360년 정월에 병사하였다.

 

 

모용위(慕容暐, 350년 ~ 384년, 재위: 360년 ~ 370년)는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연(前燕)의 제3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이다. 시호는 유제(幽帝)이다.

 

모용위는 모용준(慕容儁)의 셋째 아들로 350년에 태어났다. 형인 모용엽(慕容曄)이 죽었기 때문에 357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360년에 모용준이 죽자 황제에 즉위하였다. 모용위가 어렸기 때문에 국정은 모용준의 동생인 모용각(慕容恪)이 이끌었는데, 모용각은 선정을 베풀어 전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362년 동진(東晉)의 낙양을 공격하여 365년에 함락하였으며 하남 지역을 점령하였다. 376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慕容評)이 다시 국정을 맡았다. 모용평은 부패하여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여 전연의 국력은 쇠약해졌다.

 

369년에 동진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근방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모용평은 전진(前秦)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모용수(慕容垂)를 보내 북벌군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북벌군을 격파한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한 모용평은 태후 가족혼씨(可足渾氏)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하려 모의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한편 전진의 부견(苻堅)은 구원군을 파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하였다. 370년 왕맹(王猛)이 이끄는 전진군은 업을 함락하여 전연을 멸망시켰으며, 모용위는 장안으로 끌려와 신흥후(新興侯)에 임명되었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 때 모용위는 모용수를 따라 운성(鄖城)에 주둔하였는데, 부견이 패배하자 도망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384년에 부견의 암살을 모의하였다고 하여 살해되었다. 400년 모용덕(慕容德)이 모용위에게 시호를 올려 유제(幽帝)라고 하였다.

 

 

 

 

 

 

전진

 

전진(前秦 351년~394년)은 오호십육국시대 티베트계 저족(氐族)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국호는 (秦)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국명의 나라가 많기 때문에 가장 먼저 건국된 이 나라를전진이라 구별하여 부른다.

 

역사

간쑤성(甘肅省) 일대에 거주하던 저족은 오호십육국시대 초기에는 포홍(蒲洪)을 지도자로 하여 전조(前趙) 및 후조(後趙)의 용병으로 각지를 전전하였다. 특히 후조에 의해 하북성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349년, 후조의 황제 석호(石虎)가 죽자 포홍은 350년에 자립하여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성을 고쳐 부(苻)로 하였다. 관중(關中)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던 부홍은 부하에게 살해되고 부건(苻健)이 뒤를 이었다. 부건은 왕호를 폐하고 동진(東晉)에 신속하여 관중의 군벌 두홍(杜洪)을 방심시키고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351년에 전진을 건국하였다.

352년에 황제에 즉위한 부건은 두홍의 잔당이나 동진의 북벌군과 싸우면서 점차 관중을 평정해 나갔으며 354년에 환온(桓溫)의 북벌군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하였다. 355년에 부건이 죽고 아들 부생(苻生)이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부생은 폭정을 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부생의 치세 동안 전량(前凉)이 신속하고 강족의 요양(姚襄)을 물리치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357년에 부홍의 손자 부견(苻堅)이 반정을 일으켜 부생을 폐위하고 천왕에 즉위하였다.

 

부견은 한족 왕맹(王猛)을 중용하여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였다.왕맹은 부견의 총애를 등에 업고 법을 엄하게 적용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전진의 국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366년부터 적극적으로 외정에 나선 부견은 전연(前燕)을 침공한 환온의 북벌군을 물리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370년에는 전연을 멸망시키고 화북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373년에 동진의 사천(四川) 지방을 정복하고 376년에는 전량과 (代)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화북을 통일할 무렵 재상 왕맹이 죽었고, 이후 부견은 무리한 전쟁을 거듭하고 사치를 일삼았다. 또한 이상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펼쳐 수도인 장안 인근에 선비족 강족을 이주시키고 화북 곳곳의 거점에 지배민족인 저족을 이주시켜 지배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378년에는 동진의 양양(襄陽)을 점령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 통일을 목표로 여광(呂光)에게 서역을 정벌을 명하는 한편 동진 토벌을 위해 96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였다. 부견의 원정군은 동진의 국경 전체에 걸쳐서 공격해 들어갔으나 부견이 직접 참여한 비수(淝水) 방면의 전선에서 배반으로 인해 크게 패배하여 전군이 패주하였다. (비수대전(淝水大戰)) 비수의 패전으로 전진은 혼란에 빠졌으며 하북에서는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관중에서는 요장(姚萇)의 후진(後秦), 걸복국인(乞伏國仁)의 서진(西秦), 여광의 후량(後凉), 모용홍(慕容泓)의 서연(西燕) 등이 건국되었다. 부견은 모용홍, 모용충의 서연의 공격을 받아 장안을 버리고 도주하였으며, 요장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385년)

 

부견의 서장자 부비(苻丕)는 업에서 모용수의 공격을 받아 1년여 동안 농성을 벌이다 탈출하여 진양(晉陽)에 이르렀는데,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진양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부비는 부견의 복수를 위해 후진을 공격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386년, 모용영(慕容永)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동진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농서 지역의 전진 세력을 이끌던 부등(苻登)은 부비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황제에 즉위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후진을 공격하였다. 부등과 관중 일대의 전진계 군벌들과 제휴하여 후진의 요장을 수 년 동안 공격하였는데 389년에 본거지를 기습당해 세력이 쇠퇴하였다. 이후 393년, 후진의 요장이 죽자 부등은 후진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요흥(姚興)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여 살해되었으며 태자 부숭(苻崇)이 황중(湟中)으로 도망쳐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서진의 공격을 받아 부숭은 살해되었고 이로써 전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역대황제일람

전진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태조
(太祖)
삼진왕
(三秦王)

무혜제
(武惠帝)
경명제 추증
부홍(苻洪) - 350년
- 삼진왕
(三秦王)
부건(苻健) - 350년
- 대진왕
(大秦王)
부건(苻健) 황시(皇始) 351년 ~ 355년 351년 ~ 352년
1대 고조
(高祖)
경명제
(景明帝)
부건(苻健) " 352년 ~ 355년
2대 - 폐제
(廢帝)

여왕
(厲王)
부생(苻生) 수광(壽光)355년 ~ 357년 355년 ~ 357년
3대 세조
(世祖)
선소제
(宣昭帝)
부견(苻堅) 영흥(永興) 357년 ~ 359년
감로(甘露) 359년 ~ 364년
건원(建元) 365년 ~ 385년
357년 ~ 385년
4대 - 애평제
(哀平帝)
부비(苻丕) 태안(太安) 385년 ~ 386년 385년 ~ 386년
5대 - 고제
(高帝)
부등(苻登) 태초(太初) 386년 ~ 394년 386년 ~ 394년
6대 - - 부숭(苻崇) 연초(延初) 394년 394년

 

 

부홍(苻洪, 284년 ~ 350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저족(氐族)의 수장으로 훗날 전진(前秦)을 세운 부건(苻健)의 아버지이다. 전진이 건국된 이후 태조(太祖) 무혜제(武惠帝)로 추존되었다.

 

부홍은 저족 출신으로 약양(略陽)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성은 포씨(蒲氏)이다. 영가의 난이 일어났을 무렵에 저족 무리의 수장으로 부족을 이끌며 호저교위·진주자사·약양공(護氐校尉秦州刺史略陽公)을 자칭하였다. 310년 전조(前趙)의 유연(劉淵)이 포홍에게 관작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유요(劉曜)가 관중(關中)을 장악한 이후 전조에 복속하였으며 329년에 전조가 멸망하자 후조(後趙)에 복속되었다. 333년, 석생(石生)의 반란에 참여하여 석호(石虎)에 맞섰으나 패배한 후 다시 석호에게 복속하였는데, 석호는 저족과 강족(羌族) 10여 만 호를 관동(關東)으로 이주시켰다. 포홍은 저족을 이끌고 방두(枋頭 : 허난 성 준현)에 주둔하였다. 석호의 치하에서 포홍은 장군으로 활약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염민(冉閔)의 참소를 받기도 했다.

 

349년, 포홍 등의 장수들은 장안(長安) 방면의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그 사이에 석호가 죽고 석세(石世)가 즉위하였다. 포홍 등은 돌아오는 길에 석준(石遵)을 만나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종용하여 석준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염민이 다시 포홍을 참소하였기 때문에 포홍은 불만을 품고 방두를 점거한 채로 동진(東晉)에 투항하여 관작을 받았다. 후조가 후계자 분쟁을 일이키며 혼란에 빠지자 포홍을 비롯하여 각지의 군벌들이 자립하였는데, 포홍과 요익중(姚弋仲)이 모두 고향인 관중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요익중은 포홍을 습격하였으나 패배하였으며, 승리한 포홍은 350년에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며 성을 고쳐 부씨(苻氏)로 하였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참인 "草付應王"을 따른 것으로 草(艸)와 付를 합쳐 苻를 성으로 삼았다.

 

부홍은 관중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였으나 부하 마추(麻秋)에게 피습당하였다. 부홍은 아들 부건에게 관중으로 들어가라는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저족(氐)은 지금의 칭하이 성(靑海) 주변에 거주하였던 민족이다. 기원전 2세기경 칭하이 지역에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다. 근처에는 강족(羌)이 있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에 흉노, 선비, , 과 함께 중국의 영내로 진출하여, 성한, 전진, 후량 등의 나라를 건국하였다. 그 중에 부견이 세운 전진은 화북을 통일하기도 했으나 394년 멸망하였다.

 

 

부건(苻健, 317년 ~ 355년, 재위 : 351년 ~ 355년)은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초대 황제이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경명제(景明帝)이다.

 

부건은 부홍(苻洪)의 셋째 아들로 317년에 태어났다. 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부건의 형을 죽였기 때문에 350년에 부홍이 죽자 부건이 뒤를 이었다. 부건은 관중(關中)을 지배하던 두홍(杜洪)을 방심시키기 위해 삼진왕(三秦王)의 칭호를 버리고 동진(東晉)의 관작을 받았으며 주둔지에서 보리를 파종하였다. 두홍은 이러한 부건의 책략에 속아 방비를 하지 않았으며, 부건은 이를 틈타 장안을 점령하였다.

 

351년 정월에 부건은 진(秦)을 건국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하였으며, 352년에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두홍의 잔당을 토벌하고, 전량(前凉), 동진의 사마훈(司馬勳) 등과 싸우면서 관중을 경영하였다. 한편 은호(殷浩)의 북벌군이 사주(司州 : 허난 성 중부)로 침공해오자 이에 맞서 승상 부웅(苻雄)을 파견하여 물리쳤으나 겨울에는 허창을 빼앗겼다. 353년에 장안에서 장우(張遇)의 모반이 일어나 진압하였으나 다시 각지에서 모반이 일어났다. 부건은 부웅 등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354년에 환온(桓溫)의 북벌군이 쳐들어와 부건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환온은 주력군을 장안으로 보내 부건을 묶어두는 한편 사마훈을 파견하여 장안 서쪽의 비어있는 땅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부건은 청야작전을 펼쳐 환온군의 보급을 곤란하게 만드는 한편 부웅에게 7천의 기병을 주어 사마훈을 요격하게 하였다. 환온은 장안 바로 근처까지 진군하였다가 보급 문제로 철군하였으며, 사마훈은 부웅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한중(漢中)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위기를 넘긴 부건은 8월에 관중을 평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355년에 태자 부장(苻萇)이 죽자 부생(苻生)을 태자로 삼았다. 6월, 부건이 병에 걸려 앓아 눕자 부건이 죽은 것으로 착각한 부청(苻菁) 등이 모반하였는데, 부건은 직접 출정하여 이 반란을 진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부생(苻生, 335년 ~ 357년, 재위 : 355년 ~ 357년)은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제2대 황제이다. 시호는 여왕(厲王)이다.

 

부생은 부건(苻健)의 셋째 아들로 335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한 쪽 눈이 불구였고, 성정이 포악하여 조부 부홍(苻洪)에게 미움을 받았다. 354년에 형 부장(苻萇)이 전쟁에서 얻은 상처로 사망하자 전진의 태자 자리가 비게 되었다. 부건은 당시 유행하던 도참인 '오양삼안(五羊三眼 : 양 세 마리에 눈 다섯 개)'을 따라 애꾸눈인 부생을 태자로 삼았다.

 

355년에 부건이 죽자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부생은 잔혹한 폭정을 일삼았다. 사람을 예사로 죽이고 공신들을 마음대로 처형하였다. 355년, 전량(前凉)이 전진에 속국이 되었으며, 357년에는 강족 요양(姚襄)의 침공을 막아 요양을 전사시켰고 항복해 온 요장(姚萇)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 부견(苻堅)이 반정을 일으켜 부생을 살해하고 시호를 여왕으로 하였다.

 

 

부견(苻堅, 337년 ~ 385년, 재위 : 357년 ~ 385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3대 황제이다. 자(字)는 영고(永固) 혹은 문옥(文玉),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선소제(宣昭帝)이다.

 

부견은 부건(苻健)의 동생 부웅(苻雄)의 아들로 337년에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명민하여 부홍(苻洪)의 총애를 받았으며, 등에 '草付應王'이라는 붉은 글씨가 써 있어 부홍은 이를 보고 성을 부씨(苻氏)로 고치기도 했다. 354년에 부웅이 전사하자 부견이 동해왕(東海王)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357년 왕맹(王猛)을 만나 등용하였으며, 왕맹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부생(苻生)을 폐위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 부견은 왕맹을 중용하여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였다. 왕맹은 부견의 총애를 등에 업고 법을 엄하게 적용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전진의 국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366년 동진(東晉)의 형주(荊州)를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농서(隴西)를 정벌하는 등 적극적인 외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367년 말에 전진의 왕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위기에 빠졌으나 부견은 왕맹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관중을 통일하였다. 369년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前燕)을 공격하자 전연에서 구원군을 청하였다. 이에 부견은 왕맹의 진언을 따라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북벌군에 타격을 받은 전연이 쇠약해지자 부견은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준비하였다. 전연의 왕족 모용수(慕容垂)가 망명을 해 오자 이를 받아들였으며 369년 말에 전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370년에 왕맹이 전연을 멸망시키자 부견은 왕맹을 사지절·도독관동육주제군사에 임명하여 전연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다. 372년에는 왕맹을 승상으로 삼아 국정 전반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왕맹의 보좌 아래 전진의 국력은 크게 성장하였다. 373년에는 동진의 양주(梁州 : 산시 성 남부)와 익주(益州 : 쓰촨 성)를 정복하였으며, 전량과 (代) 등의 여러 지방 세력들도 복속하여 번국이 되었다. 376년에는 전량과 대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였다. 동진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고구려와는 우호관계를 맺고 372년에는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375년에 왕맹이 병사한 이후 부견은 사치를 일삼고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여 전진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378년, 동진의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1년 동안의 포위전 끝에 점령하였으며, 회수(淮水) 일대도 침입하였다. 한편 부견은 복속된 세력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한 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따라 장안 인근에는 선비족(鮮卑族)과 강족(羌族)을 이주시켜 살도록 했으며 복속된 세력의 지도자에게 이들을 이끌게 하였다. 또한 관중의 저족을 화북의 여러 곳으로 이주시켜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 통일을 목표로 여광(呂光)에게 서역을 정벌하도록 하는 한편,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96만 명의 대군을 징집하여 동진을 공격하였다. 부견의 원정군은 동진의 국경 전체에 걸쳐서 공격해 들어갔으나 부견이 직접 참여한 비수(淝水) 방면의 전선에서 배반으로 인해 크게 패배하여 전군이 패주하였다. (비수대전(淝水大戰))

 

부견은 모용수가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낙양에 도착하여 병력을 수습하였는데, 모용수는 독립할 생각으로 부견을 설득하여 하북으로 향하였다. 부견이 장안에 도착하였을 때, 관중 지역에서는 부견이 이주시켰던 선비족과 강족들의 지도자인 모용홍(慕容泓), 걸복국인(乞伏國仁)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견은 요장(姚萇)을 파견하여 모용홍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으며,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한 요장도 반란을 일으켰다. 하북 지역에서는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업(鄴)의 부비(苻丕)를 공격하였으며 각지의 군현들은 후연과 전진의 세력 사이에서 이합집산하였다. 이후 요장은 후진(後秦), 걸복국인은 서진(西秦), 모용충(慕容沖)은 서연(西燕), 양정(楊定)은 구지(仇池) 등을 건국하여 화북 각지가 분열되었다. 하남 지역은 동진이 점령해 나갔다. 부견은 주로 서연, 후진 등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며, 385년에 서연이 장안을 함락하자 부견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요장은 부견에게 선양(禪讓)을 요구하였으나 부견이 거부하자 부견을 살해하였다.

 

요장은 부견에게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부비는 세조(世祖) 선소제(宣昭帝)로 추증하였다.

 

 

부비(苻丕, ? ~ 386년, 재위 : 385년 ~ 386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4대 황제이다. 시호는 애평제(哀平帝)이다.

 

부비는 부견(苻堅)의 서장자(序長子)로 장락공(長樂公)에 봉해졌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 무렵에 업(鄴)에 주둔하여 하북 일대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견이 비수에서 대패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부비는 모용수(慕容垂)를 시켜서 적빈(翟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부비는 모용수가 모반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견제하도록 부비룡(苻飛龍)을 함께 파견하였으나 모용수는 부비룡을 죽이고 후연(後燕)을 건국하였다.(384년) 부비가 업에서 농성하는 가운데 모용수는 업을 포위하고 하북 각지를 점령하였다. 385년 4월까지 치열하게 농성전을 벌인 부비는 동진(東晉)의 원군에 힘입어 포위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업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가려던 부비는 8월에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양(晉陽)으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부비는 농서(隴西) 지역에서 후진(後秦), 서연(西燕)에 항전하는 세력들을 규합·통제하는 한편 당면한 적인 후연에 맞서서 전쟁을 벌였다. 농서 지역과 부비의 진양은 후진, 서연 등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서의 전진 세력들은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이었다. 386년 8월, 부비는 후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여 진양을 버리고 남하하였는데, 평양(平陽)에서 서연 모용영(慕容永)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였다. 부비는 일족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잔병을 모아 낙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동진의 반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부등(苻登)이 황제에 즉위한 후에 애평제(哀平帝)라고 시호를 올렸다.

 

 

부등(苻登, 343년 ~ 394년, 재위 : 386년 ~ 394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5대 황제이다. 시호는 고제(高帝)이다.

 

부등은 부견(苻堅)의 방계 일족으로 항렬 상 손자에 해당하며 아버지는 부창(苻敞)이다. 아버지 부창이 부생(苻生)에게 살해된 후 부견이 즉위하여 부등의 형인 부동성(苻同成)에게 작위를 잇게 하였다. 부등은 금군을 이끄는 직위에 임명되었으나 부쌍(苻雙)의 난에 연좌되어 좌천되어 적도현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으로 부견이 몰락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부등은 포한(枹罕)에서 저족 군단을 지휘하는 하주자사(河州刺史) 모흥(毛興)에게 몸을 피했다. 모흥은 군대의 지지를 잃어 살해되고 뒤를 이은 위평(衛平)도 경질되자 386년 7월에 부등이 군단의 지휘자로 추대되었다. 부등은 후진(後秦)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진의 황제 부비(苻丕)로부터 남안왕(南安王)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부비가 9월에 전사하고, 11월에 이 소식을 들은 부등은 주위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였다.

 

황제에 즉위한 부등은 각지의 친 전진계 세력들을 포섭하여 후진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후진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초기에는 결사적인 각오로 전쟁에 임하여 후진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389년에 근거지를 급습당하여 황후까지 빼앗길 정도의 큰 피해를 입어 이후 전선이 고착되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후진을 공략하였으나 부하들이 배반하는 일이 속출하여 점차 국력이 피폐해져 갔다. 393년말에 후진의 황제 요장(姚萇)이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후진과 결전을 치르기 위해 출진하였다. 394년에 폐교(廢橋)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부등은 크게 패배하였으며 근거지의 일족들이 패배 소식을 듣고 흩어졌기 때문에 근거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모산(馬毛山)으로 피신하였다. 6월에는 재기를 위해 서진(西秦)의 걸복건귀에게 원군을 청하였으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요흥(姚興)의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되었다. 전투에서 패한 부등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부숭(苻崇)이 황제에 즉위한 후에 묘호를 태종(太宗), 시호를 고제(高帝)로 하였다.

 

 

부숭(苻崇, ? ~ 394년, 재위 : 394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마지막 황제이다. 시호는 없다.

 

부숭은 부등(苻登)의 장자로 388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394년 7월에 부등이 전사하자 황중(湟中)으로 도망쳐 황제에 즉위하고 아들 부선(苻宣)을 태자로 삼았다. 부숭은 서진(西秦)의 걸복건귀에게 의지하여 전진을 부흥시키려 하였으나 10월에 이르러 걸복건귀에게 쫒겨나게 되었다. 이에 부숭은 후구지(後仇池)의 양정(楊定)에게 도망쳤고, 양정의 군대와 힘을 합쳐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부숭과 양정은 걸복건귀에게 살해되었으며, 이로써 전진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