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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3월 (병들어 가는 나라,미쳐가는 사회)

두바퀴인생 2010. 3. 16. 06:16

 

 

우면산의 3월 (병들어 가는 나라, 미쳐가는 사회)

 

 

 

 

 

 

 

 

 

 

이념과 정치.사회

이념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타인과 어울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 세상과 사회가 어떤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적절한지, 또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 맺으며 공존할지 등에 관해 개개인이 갖는 신념과 가치관을 조합한 것이 한 사회의 이념이다. 의식을 하든 못 하든 일상의 크고 작은 의사결정과 행동은 개인의 생각과 판단을 기초로 하는 것이며, 한 사회의 정책과 제도에는 이념이 배태(胚胎)되어 있다. 즉, 신념이나 이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질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이념논쟁이 빈번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이 문제라기보다는, 이념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의견이 문제다. 즉, 합리성과 이성적 판단을 가장한 사이비 이념과, 진보와 보수 혹은 좌와 우의 대립 구조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을 적군과 아군으로 나누는 흑백이념이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것이다. 4대강 문제, 세종시 문제, 낙태문제, 진보와 보수 문제 등 흑백논리와 찬성과 반대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어떤 사안이 불거지면 서로 대화를 통해 갈등관계를 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무조건 강요하려는 나쁜 습성은 우리들이 자라면서 가정과 학교교육에서 비롯된 잘못된 것임은 누구나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본능과 느낌만 판치는 '동물의 왕국'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은 건강한 이성과 신념을, 그리고 사회는 성숙한 이념을 가져야 한다. 이념을 외면하거나 이념논쟁을 피하기보다는 건강한 상식과 건전한 이성을 바탕으로 진짜 논쟁이 펼쳐지는 정치.사회가 바람직할 것이다.

 

탈북자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책, 납북어부, 국군 포로는 현재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제주 4.3사건 후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도민들은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서해교전 후 개죽음 취급을 당한 한 해군 전사자 부인이 한국을 떠났고, 씨랜드 화재 참사에서 아들을 잃은 부부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고, 건국 후 현재까지 해외 입양된 17만명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모습에 정체성을 상실하고 갈등을 빗고 있으며 자신을 버린 대한민국을 저주하고 있다. 성숙하지 못한 정치 집단들이 벌이는 이념과 사상의 편향성, 내부 권력지향적인 정치 시스템, 자국민의 안전과 인권을 위해서는 무감각한 정부, 이러한 정부와 정치 시스템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 현실이다.

 

 

 

 

 

 

 

 

한국 사회의 포퓰리즘

 

군중은 다수인 만큼 그 위력은 참으로 크다. 그래서 군중의 여론에 무작정 편승해 따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을 포퓰리즘(populism)이라 한다.

한국 사회가 최근 포퓰리즘 논란에 휩싸여 있다. 정치권의 무상급식 문제와 사형제 집행 논란이 그렇다. 살인 피의자 김길태의 얼굴 공개 찬반 논쟁도 마찬가지다. 김길태를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눔이라고들 야단이다. 잡혀가는 와중에 김길태 뒤통수를 친 사람도 있다. 언론은 연일 길길태 사건 보도에 열을 올리고,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모처럼 마음이 맞아 성폭행범에 대해 전자팔찌 소급 적용 문제로, 범죄 전문가들은 김길태의 범죄심리에 대하여, 경찰은 살인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 찿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고, 전국의 시민들은 성폭행범에 대한 분노에, 동네 아줌마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렵게 살고 있는 옥탑 단칸방이 범죄의 사각지대로 부상하자 옥탑방에 사는 사람들은 없는 것도 억울한데 범죄 용의자 취급을 받을 모양이다.


이런 포퓰리즘은 예수의 시대에도 나타난다. 그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명확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했다고 예수에게 전한다. 그러자 예수는 군중들에 외친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죄를 떠나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죄란 선과 종이 한장 차이며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선악의 싹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성야수(性野獸)가 먹잇감을 노리며 활개치는 세상. 맘 놓고 딸을 키우지 못하는 세상. 범인은 잡혔지만 그 인면수심의 극악무도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2006년 2월 용산 미연(11)양, 2007년 3월 제주 지승(9)양, 같은 해 12월 안양 예슬(8) 혜진(10)양 성추행 살해사건에 이어 2008년 12월 여덟 살 ‘나영이’를 성폭행해 영구장애를 입힌 ‘조두순 사건’…. 최근 몇 년 사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 아동 대상 성범죄다. 그런데 또다시 어린 생명을 처참하게 앗아간 흉악범죄가 발생했으니. 그 책임은 바로 이 사회다.

국회는 공범이나 다름없다. 조두순 사건 이후 발의된 성범죄 관련 법안이 20여건이다. 그 중 국회를 통과한 건 하나뿐이다. 사회적 이슈가 발생해 비판여론이 고조되면 호들갑을 떨다가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된다. 지난해 하반기엔 ‘세종시 정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달 안에 관련법을 처리한다지만 알 수 없다. 법안을 둘러싸고 정치권 내 시각 차가 있는 데다 전국동시지방선거마저 코앞에 다가왔으니 여론이 수그러들면 어물쩍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자발찌법 소급 적용에 대해 말들이 많다. 현행법상 전자발찌가 2008년 9월 이전 기소된 성범죄자에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론자들은 형벌불소급 원칙, 신체의 자유 침해라며 위헌 주장을 편다. 그러나 지금은 법리만을 앞세울 때가 아니다. 지난해 성폭행 피해 아동(12세 이하)은 1017건으로 하루 3명꼴이다. 오늘 이 순간에도 범죄가 발생한다. 재범률도 높다. 특히 아동성범죄자 재범률은 50%를 넘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700만 아동의 부모들은 1년 365일 내내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재범률이 0.19%에 불과할 정도로 범죄 예방에 효과적인 전자발찌는 사회 방어를 위한 사후 관리 차원으로 인식하고 과거 범죄자에게도 적용되는 게 마땅하다.

성범죄자 신상공개도 실질적으로 확대돼야 한다. 올해부터 시행 중인 보건복지가족부 ‘성범죄자 알림e’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공개 대상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올 1월 1일 이후 성범죄를 저지른 자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화학적 거세 요법’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화학적 호르몬 주입을 통해 성적 욕구를 감소시키는 이 약물요법은 다수의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다. 인권침해 논란이 거세지만 피해자와 가족들의 삶을 황폐화시킨 야수들이다. 성범죄는 절도나 강도 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혼을 파괴하는 반인륜적·반사회적 흉악범죄다.

 

 

 


 

사형이 만사가 아니다

 

경찰에서 김길태 살인 증거가 나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써 사형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사형폐지를 주장하며 사형은 안된다는 사람들...지금 우리나라는 흑과 백의 이중 논리로 모든 사안이 갈등관계가 증폭되고 있다. 자신들의 논리만 내세우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상대방의 이야기는 들을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꼴이다. 교육열이 높은 우리 국민들이라 모두 참으로 똑똑하다. 그래서 국민들이 대략 어리숙해야지 너무 똑똑하면 정치하기가 힘들다고 누군가 말한게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김길태의 살인 증거나 나타나 대법원까지 가서 사형이 확정되어 사형시킨다고 하자. 그런다고 다음에 김길태 같은 범죄인이 다시는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전자팔찌를 채우던, 화학적 거세를 하던, 격리 수용을 하던 지금같은 우리 사회에서 제2의 김길태,조두순,강호순같은 성폭력 살인범은 우리나라의 현재 사회와 같이 병든 사회에서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나라에 반정을 일으키다 실패하면 중국에서는 9족을 멸하였고 조선에서는 3족을 멸하였다. 그래도 반정은 계속 나타났다.  그래서 이 사회는 아무리 강력한 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의 기본적인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욕망을 제한하게 되면 참지 못하고 반항하게 되는 본성이 있다. 

 

김길태의 생활기록부를 보면 중1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으며 활달하게 운동도 잘하고 맡은 일도 잘 처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중2 때부터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면이 보인다고 하였고, 중3 땐 아예 성격에 대해 신중한 가치판단이 요구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김길태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사람들 보기가 싫어졌고 세상도 싫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막나가기 시작하였고 지능지수 검사할 때도 막 해버리니깐 86이 나왔디고 한다. 하지만 자신은 바보가 아니며 단지 세상이 싫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미혼모의 영아를 유기해야 하는 사회, 부모없이 자라는 친구에게 조롱하는 사회, 출생비밀을 알고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 힘든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1993년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때려치고 덕포동 옥탑방에 틀어박혀 간혹 옥상 난간에 기대 담배 피우는 게 유일한 낙이었고 그 후 폭행 혐의로 96년 소년원엘 들어갔고 이듬해엔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를 건드리다가 잡혀 3년 징역을 살았다. 그렇게 저렇게 11년을 교도소에서 썩었고 인생의 3분의 1을 감방에서는 가급적 혼자 우두커니 있었고 누군가 자기를 건들면 폭발해서 7번씩이나 징계를 먹곤 했다.


평생 무소유를 말하고 맑고 향기롭게 살 것을 설법했던 법정 스님은 김길태를 바라보며 안타깝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스님의 혼백이 다시 꿈속에서 김길태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불법을 설파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더라. 내가 진 말빚만 크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모두 없애라. 사리 같은 거 찾지도 마라. 부끄럽다.”

이렇게 말을 닫은 채 스님은 이렇게 다짐했으리라. “다음 생에서는 내가 길태가 되어 태어나리라.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 길태의 삶을 내가 대신 살리라. 그 길밖에 교화의 길이 없다. 죽인다고 없어지랴, 화학적 거세를 한다고 사라지랴, 감옥에 가둔다고 나아지랴. 높은 경지의 가르침으로도 고행 어린 수행으로도 안 되는 것이니 내가 대신 길태 되어 사는 길뿐. 도리가 없다. 사실 우리 모두는 길 없는 길에서 태어나 저마다 삶의 길을 내야 하는 길태들 아닌가!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내가 길태 되러 가야 하니….”

 

오늘도 종교계 지도자들은 민중들에게 설교,설법을 외치지만 앞에서는 감동하는 척 박수치고 찬송하며 울부짖고 기도하지만 돌아가면 대부분 나무아비타불인 게 사람이다. 재물에 대해, 권력에 대해, 생리적인 욕구해소를 위해, 무관심과 멸시.차별에 대해, 가족과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누가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TV 카메라 앞에서는 예쁜 척, 착한 척,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척, 위선을 떨듯이 사람은 결코 무소유의 마음을 받아 들일 수가 없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누가 모르리오마는 당장의 현실이 세속의 욕망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길태의 후계자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김길태와 같은 범죄는 불평등,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욕구와 욕망이 있다. 인간답게 살고 싶고 남들에게 조롱받는 것을 싫어한다. 남들처럼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호의호식하고 싶어 한다. 평생을 가난하게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없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욕구충족이 우선이지만 가진자들은 더 많은 재화를 축적하고 싶어하고 더 높은 지위를 갈망한다. 억울함이나 피해를 당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복수를 다짐한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TV프로그램에 나오는 미끈하고 잘생긴 여자들이 짧은 치마에 현란하게 몸을 흔들며 춤을 추고 불륜, 혼전임신, 삼각관계, 근친상간 등 저질 막장 드라마나 노골적인 노출로 시청자들을 현혹시키는 여자 연예인들이 나와 벌이는 자극적인  TV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에 넘치는 야동에 보이는 노골적인 성 동영상들이 넘쳐나는데, 그 충동을 억제할 청소년이 어디 있을까?

 

여중생들 사이에 팬픽(fan fic)라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노트 하나에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글 속에서 섹스를 하고 동성애를 즐긴다고 한다. 과거 부모 세대들이 접하였던 빨간책의 내용보다 더 저속하고 리얼한 성적인 용어를 풀어 놓으면서 간접적인 성행위를 즐긴다고 한다. 옛날에는 학교 화장실이나 공중 변소 벽에 성에 대한 저질스런 그림과 낙서들이 난무하였다. 많은 청소년들이 성에 대한 호기심을 화장실에서 즐겼던 것이나 오늘날 청소년들이 팬픽이라는 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간법적으로 해소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청소년들은 몽정을 시작하고 초경을 시작하는 나이에 주변 환경에서 접하는 많은 성적인 노출에 돌파구를 찿지 못하자 집단 성폭행은 물론 혼숙,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 또 학교 졸업식날 옷을 벗기고 갖가지 성적인 폭행을 서슴치 않고 있는 것도 이러한 성적인 충동을 해소할 길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고 나서 경제적인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생리적 충동을 풀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리적 충동을 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난으로 인해 냉대받는 사회에서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허다하다. 공평하지 못한 사회에서 불평과 불만은 증폭될 것이고 신뢰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학교 교육에서 공평하지 못하고 사회 진출에서 공평하지 못하고 승진에서도 공정하지 못하고 결혼도 하기 힘든 사회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기는 힘들다. 오늘도 전국의  PC방에서 게임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어가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오늘도 오락실에서, 경마장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담배연기 자욱한 밀폐된 공간에서 인생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오늘도 취업의 문을 두드리며 대도시 빌딩 숲을 헤메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최고의 실업율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사이버 민중주의

권력을 가진 이가 그러지 못한 이의 항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을 때, 사이버 민중주의는 탄생한다. 그리고 사이버 세상의 민중은 ‘적’들의 사생활을 폭로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것이다. 그곳에서 다른 사람을 욕보이게 하는 것은 사생활 폭로를 통한 여론재판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늘날의 사이버 세상이 자신의 삶을 남들에게 전시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선 고전적인 의미의 공사 구분이 허물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적인 생활을 보호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 그것을 드러낸다. 이 욕망은 현실세계의 언론윤리마저 바꾼다. 2PM에서 퇴출된 재범군의 과거 발언이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었을 때, 동아일보 기자는 인터넷문화의 문제에 대해 꼬집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디시인사이드에서 논란이 된 재범군의 발언을 처음으로 기사화한 것도 동아일보 관계사인 동아닷컴이었다.

각 언론사의 연예뉴스를 보면, 남의 사생활을 관람하려는 사이버세상의 욕망을 트래픽으로 잡아내기 위해 이들이 얼마나 이전투구를 벌이는지 여실히 볼 수 있다. 특정한 범죄자에 대한 오늘날 언론의 과잉보도 역시, 이러한 대중적 욕망에 편승하여 다른 정치적 문제들을 덮어두려는 모종의 정치적 의도에서 기획된 것은 아닌가? 이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혹은 언론의 협조 아래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면서, 대중은 그 사생활에 대한 도덕적 판결을 할 ‘권리’를 얻는다.

그것은 엘리트들에 대한 민중의 승리일까? 하지만 이 여론재판에선 엉뚱한 희생자가 생겨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생활을 폭로하는 징벌 방식이 그의 잘못에 비해 과대한 것일 수도 있다. 또 연예인과 달리 정치인들은 이런 식의 공세에 둔감하다는 것도 문제다.

사이버 민중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이 시대의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흐름 안에서도 우리는 그것의 폐해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이버 민중주의가 정치영역에서 그다지 쓸모있는 도구가 아니라면, 시민들이 정치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방법론에 대한 고민도 절실할 것이다.

 

 

 

게임에 미친 사회

 

월 초 인터넷 게임에 너무 몰입한 부부가 PC방에서 밤새 게임을 하다가 갓 태어난 아기를 굶겨 죽였다는 뉴스가 나왔다. 미라 같이 말라있는 아기를 부검해 보니 영양실조였다고 한다. 5개월간 도주했다 붙잡힌 41세인 남편과 25세인 아내는 실제로도 게임을 하다가 만난 사이라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이 게임 안에서 키울 수 있는 캐릭터에는 현실의 아기보다 더 많은 정성을 쏟은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게임을 즐기는 이유로 부부가 이혼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오늘도 골목 빌딩마다 PC방에서 게임에 빠져 학교와 직장,가정,취업을 팽개치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직장도 없고 취업도 안되고 집에서 빈둥거리느니 게임방에서 시간을 소일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다.  장기, 바둑, 당구, 화투, 카지노, 경정, 경마, 경륜, 닭싸움, 개싸움, 소싸움 등이 건전한 놀이문화가 아니라 도박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하나 점점 빠져들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기 쉽다. 집에 가도 잠이 오지 않고 천정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지거나 돈을 잃게 되면 극심한 우울증이 찿아온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강구하고 불법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확천금의 환상이 눈에 선하고 자신을 몰라주는 사회, 불평등한 이 사회,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 아무리 노력해도 희망을 찿을 수 없는 사회, 상대적 빈곤감이 넘치는 사회, 불법과 비리가 난무하는 사회, 법과 도덕이 무너진 사회에서 그래도 자신을 알아주고 반겨주는 곳이 바로 이러한 수렁이다. 

청소년들의 게임중독이 독립적 문제라기보다 소아의 주의력결핍장애나 청소년의 우울증상 표현인 경우가 더 많으니 그 부분을 근본 치료해야 게임중독 문제도 해결된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과거와 달리 20, 30대의 어른들이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일상생활에 문제점이 야기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냥 오래된 버릇같이 게임을 하고, 현실의 고단함과 대인관계의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과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가상세계에 몰입하고 있다. 전 같으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친구와 수다를 했다면 이제는 PC방에서 혼자 해결한다. 사이버 친구가 현실의 친구보다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아이템 거래 시장이 연간 1조5000억원이나 되다 보니 하루 종일 게임을 하면 많지는 않지만 돈도 벌 수 있으니 더욱더 어른들도 게임의 세계에 본격 빠져들게 되는 것 같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한 우리나라의 어두운 이면이다. 많은 이들이 10대 시절에 재미로 게임을 시작했다. 이전 세대가 축구나 농구를 하는 시간에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놀았다. 집집마다 인터넷이 깔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가장 편한 방법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이 되었다. 거리마다 돌아보면 빌딩에 당구장이나 기원이 있던 자리는 PC방이 자리 잡고 있다. 사회문화적인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의 행동도 바꿨다. 이제 일부에게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나 여가가 아니라 나쁜 습관이자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었다. “짜증나면 PC방에 가요.” 현실의 삶이 재미없고, 낙이 없고 비관적일수록, 게임의 세계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그들은 얘기한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공하기 어렵고, 불공평해 보이는 현실세계와 달리 게임의 세계는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지위도 올라가고, 존경도 받을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상대적으로 공평한 세계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에 오래 머물게 되고, 현실과 격차는 더 벌어져 어느 순간 돌아갈 엄두가 안 나는 상태가 된다. 너무 멀리 가 버린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로만 여겨지던 게임중독이 바야흐로 어른들 문제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동안 인터넷 세상도 사람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게임중독으로 미쳐가고 있다.
 

 

 

 

 

우리들이 원하는 지도자                                                                                                                                               

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책임은 궁극적으로 국가 지도자에게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지도자는 국민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G20 의장국을 맡고,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들 국민통합의 과제를 이루지 못한다면 사상누각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속 기구로 사회통합위원회를 만든 것도 이같은 인식에 따른 고민의 산물일 것이다. 최근 한 언론사가 정치 리더 34명을 조사한 결과 20명이 2012년 대선의 키워드로 ‘국민통합’을 꼽은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민통합을 이끌어낼 것인가.  세계적 인권운동가로서 만델라가 용서와 화해의 리더십을 보여 준다면, 탁월한 정치가로서 만델라는 국민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희망의 리더십을 선보인다. 영화가 주요 소재로 삼은 럭비월드컵 우승(1995년)이 그것이다. 만델라는 백인의 스포츠인 럭비팀을 해체해야 한다는 동료들을 설득한 뒤 럭비팀 주장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다른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에겐 그런 영감이 필요하네.”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려면 스스로의 기대치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판단한 만델라는 럭비팀의 우승을 통해 갈등과 증오,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던 남아공 국민들을 일으켜 세운다.

만델라가 국민통합의 매개체로 스포츠를 선택한 건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지만 그 방식은 역대 독재자들의 수법인 정치적 선동이 아니라 인간적인 배려였다. 만델라의 진심은 럭비팀 주장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 감동의 체험은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치졸한 복수보다는 연민과 자제력과 관대함이 그들을 놀라게 하는 방법”이라는 만델라의 신념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국민이 스스로 변화의 의지를 갖도록 영감을 주는 지도자.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무기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지도자. 우리는 이런 지도자를 얼마나 갖고 있는가. 현 정부가 추구하는 ‘더 큰 대한민국’의 꿈은 소수의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만의 노력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될 때 더 나은 국가, 더 큰 국가를 이룰 수 있다. 해서 국민 개개인이 능력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영감을 제시할 줄 아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그리고, 전 정권에서 임명됐다는 이유로 문화예술계 기관장들에게 사퇴 압박을 가하다 ‘한 지붕 두 위원장’이라는 낯뜨거운 사태를 초래하는 지도자 대신 “그래도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할 줄 아는 지도자를 갖고 싶다.

 

 

최근의 사설과 칼럼을 종합했다.                                                -서초동 퍼오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