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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6 (오호 십육국 시대 5 : 서진,후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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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6 (오호 십육국 시대 5 : 서진,후량)

두바퀴인생 2010. 3. 17. 05:05

 

 

중국의 역사  36 (오호 십육국 시대 5 : 서진, 후량)

 

 

 

 

오호십육국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전량 장궤 301년 - 376년 한족
전조 유연 304년 - 329년 흉노
성한 이특 304년 - 347년 파촉
후조 석륵 319년 - 351년 갈족

전연

모용황 337년 - 370년 선비
전진 부견 351년 - 394년 저족
후연 모용수 384년 - 409년 선비
후진 요장 384년 - 417년 강족
서진 걸복국인 385년 - 431년 선비
후량 여광 389년 - 403년 저족
남량 독발오고 397년 - 414년 선비
북량 저거몽손 397년 - 439년 노수호
남연 모용덕 400년 - 410년 선비
서량 이고 400년 - 421년 한족
혁련발발 407년 - 431년 흉노
북연 풍발 409년 - 436년 한족


오호십육국 이외의 국가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구지 양무소 296년 - 506년 저족
탁발의로 315년 - 376년 선비
염위 염민 350년 - 352년 한족
서연 모용홍 384년 - 394년 선비
적위 적요 388년 - 392년 정령
후촉 초종 405년 - 413년 한족
우문부 우문막규 302년 - 344년 선비
단부 단일육권 310년 - 357년 선비

 

 

 

 

 

서진

 

서진(西秦, 385년 ~ 400년, 409년 ~ 431년)은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 걸복부(乞伏部)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세운 국가이다. 본래 국호는 (秦)이지만 같은 국명을 가진 국가가 많았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하여 서진이라 부른다.

 

걸복국인은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부하로 남선우(南單于)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이 벌어지기 직전 농서(隴西)에서 걸복국인의 숙부 걸복보퇴(乞伏步頹)가 모반하였다. 이에 부견은 걸복국인을 토벌대로 파견하였는데 걸복보퇴는 오히려 걸복국인을 환영하며 맞이하였다. 비수대전의 패배로 전진의 국력이 쇠퇴하자 걸북국인은 농서 인근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385년, 부견이 요장(姚萇)에게 살해되자 걸복국인은 대선우(大單于)를 자칭하고 용사성(勇士城)에 수도를 정하여 독립 정권을 세웠다.

 

388년에 걸복국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걸복건귀(乞伏乾歸)는 수도를 금성(金城)으로 옮겼으며 389년에는 전진의 부등(苻登)에게 금성왕(金城王)으로 책봉되었다. 394년, 부등이 후진(後秦)에게 패배하여 서진에 원군을 요청하여 이에 응해 출병하기도 하였으며 부등이 전사한 후 그 뒤를 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苻崇)이 즉위하자 10월에 이를 압박하여 부숭을 몰아냈다. 부숭은 후구지(後仇池)의 양정(楊定)에게 망명하여 연합군을 형성 서진을 공격하였으나 걸복건귀는 이를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키고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후 서성(西城)으로 천도하였다가 다시 원천(苑川)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400년에 후진에게 패배하여 서진은 일단 멸망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南凉)으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후진에 망명하여 후진의 장수가 되었다. 401년에는 걸복부의 수장으로 서진 시절의 수도였던 원천에 부임하여 농서 일대를 다시 공략하였다. 409년에 이르러 후진이 쇠퇴하면서 걸복건귀는 도견산(度堅山)에서 다시 서진을 건국하였다. 걸복건귀는 410년에 다시 원천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국내 정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412년에 걸복국인의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에게 살해되었다.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乞伏熾磐)은 걸복공부를 죽이고 뒤를 이어 하남왕(河南王)을 자칭했다. 414년에는 남량을 멸망시키고 진왕(秦王)을 자칭하였으며 북량(北凉)과 대립하였다. 428년에 걸복치반이 병사하자 아들 걸복모말(乞伏暮末)이 뒤를 이었다. 걸복모말의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하였으며 430년, 북량의 위협때문에 북위(北魏)로 귀순하려 하였으나 (夏)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431년, 하의 혁련정(赫連定)에게 4대 46년만에 멸망당했다.

역대 황제

서진 군주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1대 열조(烈祖) 선열왕(宣烈王) 걸복국인(乞伏國仁) 건의(建義) 385년 ~ 388년 385년 ~ 388년
2대 고조(高祖) 무원왕(武元王) 걸복건귀(乞伏乾歸) 태초(太初) 388년 ~ 400년
경시(更始) 409년 ~ 412년
388년 ~ 400년, 409년 ~ 412년
{400년 ~ 409년 동안 후진(後秦)에 복속됨}
3대 태조(太祖) 문소왕(文昭王) 걸복치반(乞伏熾磐) 영강(永康) 412년 ~ 419년
건홍(建弘) 420년 ~ 428년
412년 ~ 428년
4대 - 여무왕(厲武王) 걸복모말(乞伏暮末) 영홍(永弘) 428년 ~ 431년 428년 ~ 431년

 

 

걸복국인(乞伏國人, ? ~ 388년, 재위 : 385년 ~ 388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서진(西秦)의 초대 군주이다.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선렬왕(宣烈王)이다.

 

걸복국인은 선비족 걸복부(乞伏部) 출신으로 농서(隴西) 지방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그의 아버지 걸복사민(乞伏司繁)은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 의해 남선우(南單于)로 임명되었고, 376년에 아버지가 죽자 걸복국인이 그 지위를 계승하였다. 383년에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걸복국인은 선봉장이 되어 종군하였는데 출정하기 직전 숙부인 걸복보퇴가 농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견은 걸복국인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는데, 걸복보퇴는 걸복국인의 토벌군을 맞아들여 걸복국인을 수장으로 추대하였다. 부견이 비수에서 대패하자 걸복국인은 농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385년, 걸복국인은 대도독·대장군·대선우·영진하이주목(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領秦河二州牧)을 자칭하고 건의(建義)로 개원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서진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용사성(勇士城)에 수도를 두고 12개 군을 설치하여 농서군 일대에서 할거하였다. 걸복국인은 농서 일대의 흉노, 강족 등과 대립하면서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다. 387년에는 부등(苻登)의 세력에 가담하여 원천왕(苑川王)에 책봉되었다. 388년 6월에 사망하였다.

 

 

걸복건귀(乞伏乾歸, ? ~ 412년, 재위 : 388년 ~ 400년, 409년 ~ 412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서진(西秦)의 제2대 군주이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원왕(武元王)이다.

 

걸복건귀는 선비족 걸복부 출신으로 걸복국인의 동생이다. 걸복국인이 서진을 건국하자 걸복건귀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다. 388년에 걸복국인이 죽자 그 아들 걸복공부(乞伏公府)가 어렸기 때문에 걸복건귀가 대신 뒤를 이었다. 걸복건귀는 대도독·대장군·대선우·하남왕(大都督, 大將軍, 大單于, 河南王)을 자칭하고 금성(金城, 간쑤 성 란저우 시)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에는 전진(前秦)의 부등(苻登)에 의해 금성왕(金城王)에 책봉되었다.

 

농서(隴西) 일대에서 할거하던 걸복건귀는 394년에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면서 양왕(梁王)에 책봉하자 1만의 기병을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부등은 전사하였고 걸복건귀는 회군하였다. 곧이어 황중(湟中)에서 부숭(苻崇)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숭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을 점거하였다. 이에 부숭은 구지(仇池)의 양정(楊定)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걸복건귀는 이를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켰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을 자칭하였다.

 

걸복건귀는 서성(西城, 간쑤 성 징위안 현)으로 천도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여 토욕혼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후량(後凉)의 공격을 받아 397년에 금성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400년에는 원천(院川)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후진(後秦)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대패하였으며, 서진은 멸망하였다.

 

걸복건귀는 남량(南凉)으로 망명하였으나 재기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였다. 후진의 요흥(姚興)은 걸복건귀를 귀의후(歸義侯)에 책봉하였으며, 401년에는 옛 본거지였던 원천에 진수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후진의 장군으로 걸복건귀는 후량 공략, 토욕혼 공략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걸복건귀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요흥은 걸복건귀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주객상서(主客尙書)로 삼았다. 걸복부는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대신 통솔하였다.

 

409년에 걸복건귀는 요흥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였으며 본거지를 원천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견산(度堅山)에 근거를 두고 진왕(秦王)에 즉위하여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41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였으나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뒤 걸복건귀는 걸복공부에게 살해되었다.

 

 

걸복치반(乞伏熾磐, ? ~ 428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서진의 제3대의 국왕(재위 : 412년 ~ 428년).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소왕(文昭王). 서진의 제2대 왕 걸복건귀의 아들이다.

 

402년 10월 남량에 몸을 의탁한 옛 서진의 태자 걸복직반이 도망치자, 독발구단은 그의 처자도 풀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409년 재흥한 서진이 그해 걸복직반을 대장으로 남량에 공격해 들어와 홍지영남(洪池嶺南)지방을 약탈했다.

 

414년 4월 독발욕단은 붕괴일보직전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전에 배반했던 청해호 부근의 결간부, 을불부에 대해 직접 기병 7천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이 기회를 틈타 서진의 걸복직반이 낙도에 공격해 들어와 역으로 남량의 수도 낙도는 함락되었다. 남량 지배하의 3군도 모두 서진에게 항복하여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원정군도 6월에 서진에 항복했다. 이로써 남량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해 독발구단은 독살당했다.

 

428년 병사하자 그의 아들 걸복모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걸복모말(乞伏暮末, ? ~ 431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서진의 제 4대의 국왕(재위:428년 ~ 431년). 시호는 여무왕(厲武王). 걸복치반의 차남이다.

 

건홍 9년(428년)에 걸복치반의 사후, 진왕의 지위를 계승, 연호는 영홍으로 개원했다. 사서에 의하면 재위 기간중은 제멋대로하게 사형을 실시해 민심이 배반 했다고 전한다. 영홍 3년(430년), 북량의 강대화에 압박받은 모말은 북위에의 귀순을 획책 하지만 하나라에 저지되고 있다.

 

영홍 4년(431년), 하나라에 의한 서진 도성 남안(南安)의 공격을 하자 모말은 항복, 서진은 멸망 했다. 모말은 멀지 않아 하나라 혁련정에 의해 살해되었다.

 

 

후량

 

후량(後涼 386년~403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저족(氐族) 여광(呂光)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원래 국명은 (凉)이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아 후량이라 구분하여 부른다.

 

후량의 건국자 여광은 저족 출신으로 전진(前秦)의 장군이었다. 383년, 여광은 부견(苻堅)의 명을 받아 서역 원정을 떠났다. 1월부터 원정길을 시작하여 하서(河西) 회랑을 진군, 384년 7월 귀현(亀玆)을 정벌하고 서역 대부분을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때 여광은 서역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이 당시 전진의 부견은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패배하여 몰락하고 전진은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혼란으로 인해 교통이 두절되어 여광은 이 소식을 알지 못하였다. 서역 평정 이후에 부견의 명령이 오지 않자 불안을 느낀 여광은 휘하 장병 및 구마라습의 희망에 따라 정벌을 멈추고 385년, 본국으로 귀환을 시작하였다. 양주(凉州)에 도착한 여광은 전진의 양주자사 양희를 격파하고 양주를 장악하였으며 사실상의 자립 정권을 세웠다.

 

386년 9월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부견에게 시호를 올리고 연호를 고쳤다. 뒤이어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였으니, 일반적으로 이 시기부터 후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이 당시 양주에서는 전량(前凉)왕실의 후예인 장대예(張大豫)가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이 반란으로 여광은 서역과 교통이 단절되어 큰 곤란을 겪었다. 여광은 387년 말에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으며 389년에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였다. 양주 일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킨 여광은 걸복부의 서진(西秦)과 대립하였다. 396년에는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을 자칭하였다.

 

397년, 여광은 서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 시)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독발부 독발오고가 거병하여 금성을 점령하였고, 뒤이어 단업(段業), 저거몽손(沮渠夢遜)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였으며 수도 고장(姑臧 : 간쑤 성 우웨이 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결과 독발오고는 남량(南凉)을 건국하였고, 단업은 북량(北凉)을 건국하여 양주는 분열되었다. 여광은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을 정벌하지는 못하였다.

 

399년에 여광은 병으로 태자 여소(呂紹)에게 선위한 후 곧 사망하였다. 여소는 곧 이복형 여찬(呂纂)에게 살해되었고 여찬이 천왕에 즉위하였다. 여찬은 남량과 북량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의 공조 체제로 인해 원정에 나서면 후방을 공격당하여 모두 실패하였다. 또한 주색에 빠진 여찬은 국정을 소홀히하여 후량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401년, 여초(呂超)에게 살해되었고, 여초의 형 여륭(呂隆)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여륭의 치세에서도 후량은 계속 쇠퇴하여 남량과 북량의 침입을 받았으며 후진(後秦)의 침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여륭은 후진에 복속하여 건강공(建康公)에 책봉되었다. 후진의 군대가 물러가자 다시 남량과 북량의 침략이 이어졌고, 여륭은 견디다 못해 403년, 후진에 완전히 항복하여 나라를 넘겼다.

역대 황제

후량 군주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주천공(酒泉公) 여광(呂光) 태안(太安) 386년 ~ 389년 386년 ~ 389년
- 삼하왕(三河王) 여광(呂光) 인가(麟嘉) 389년 ~ 396년 389년 ~ 396년
1대 태조(太祖) 의무제(懿武帝) 여광(呂光) 용비(龍飛) 396년 ~ 399년 396년 ~ 399년
2대 - 은왕(隱王) 여소(呂紹) - 399년
3대 - 영제(靈帝) 여찬(呂纂) 함녕(咸寧) 399년 ~ 401년 399년 ~ 401년
4대 - - 여륭(呂隆) 신정(神鼎) 401년 ~ 403년 401년 ~ 403년

 

 

 

여광(呂光, 338년 ~ 399년, 재위:386년 ~ 399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량(後凉)의 초대 군주이다. 자는 세명(世明),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의무제(懿武帝)이다.

 

여광은 저족(氐族)으로 약양(略陽) 출신이다. 아버지는 여파루(呂婆樓)로 전진(前秦)의 중신이었다. 여광은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활약하였고 383년에는 사지절·도독서역정토제군사(使持節、都督西域征討諸軍事)로 임명되어 서역 원정에 나섰다. 12월에 서역에 도착한 여광은 쿠처(龜玆)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서역 일대를 평정하였다. 서역에는 불승으로 중원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있었는데, 여광은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할 것을 명령받아 구마라습을 모시기도 하였다.

 

이 당시 전진의 부견(苻堅)은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여 몰락하고 있었으나 혼란으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어 여광은 서역 평정 이후에 추가적인 명령을 받지 못하였다. 여광은 서역 일대에서 정착하여 살고자 하였으나 구마라습이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여 385년에 귀향길에 올랐다. 고창(高昌)에 도착한 여광은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희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양주를 장악하였다. 386년 초, 과거 전량(前凉) 왕실의 후예인 장대예(張大豫)가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 반란에는 독발부(禿髮部), 흉노(匈奴) 등이 개입하여 2년 여를 끌었으며 여광은 서역과 교통이 단절되어 큰 곤란을 겪었다.

 

386년 10월,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부견에게 시호를 올렸다. 또한 부견의 계승자를 자처하기 위해 태안(太安)으로 개원하였으며 뒤이어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며 독립 정권을 세웠다. 387년 말에 장대예의 반란을 진압한 여광은 389년에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였고, 396년에는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하였다. 독발부, 흉노 등 양주 일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키고 양주를 평정한 여광은 걸복부(乞伏部)의 서진(西秦)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고, 397년에는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후량에 복속해 있던 독발부의 독발오고(禿髮烏孤)가 거병하여 금성을 점령하였고, 뒤이어 장액(張掖), 건강(建康) 일대에서 단업(段業), 저거몽손(沮渠夢遜)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여 후량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여광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여찬(呂纂)을 파견하였으나,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논(郭黁)이 반란을 일으켜 동원성(東苑城)을 장악하여 여찬을 다시 불러들였다.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은 서평(西平)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양궤(楊軌)의 반란이 일어나고 독발오고가 원군을 보내기도 하여 1년 여를 끌었다. 398년 6월 경에 곽논 등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여 수도는 안정되었으나 지방의 반란은 진압하지 못하고 계속되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여광은 399년에 태자 여소(呂紹)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를 자칭했으며 곧이어 병사하였다.

 

 

여소(呂紹, ? ~ 399년, 재위:399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량(後凉)의 2대 군주이다. 시호는 은왕(隱王)이다.

 

여소는 여광(呂光)의 적장자로 396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399년에 여광은 병이 깊어지자 여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제를 자칭하다가 곧 사망하였다. 여광은 사망할 때 여소에게 배다른 형제인 여찬(呂纂), 여홍(呂弘)과 힘을 합쳐 나라를 다스릴 것을 유언하였다. 여광이 사망하자 여소는 일단 발상을 미루었는데 여찬은 여소의 이런 조치를 무시하고 빈소로 들어가 곡을 하였다. 여소는 여찬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여찬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여찬이 거부하였다. 여초(呂超)는 이러한 여찬의 행위를 우려하여 여소에게 여찬의 병권을 빼앗으라 권하였으나 여소는 따르지 않았다.

 

얼마 후 여홍이 여찬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자 여찬은 여홍과 함께 궁궐로 난입하였다. 여소는 여찬의 반군에 금군이 도주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찬(呂纂, ? ~ 401년, 재위:399년 ~ 401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량(後凉)의 3대 군주이다. 시호는 영제(靈帝)이다.

 

여찬은 여광(呂光)의 아들로 적자 여소(呂紹)의 형이다. 여광 재위 시기에는 태원공(太原公)에 책봉되었고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397년에는 서진(西秦) 정벌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후량에서 반란이 일어나 남량, 북량 등이 건국되자 이에 맞서 전쟁을 지휘하였다.

 

399년, 여광은 병이 깊어지자 여소에게 천왕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제를 자칭하였다. 이때 여찬은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여광은 사망할 때 여소에게 배다른 형제인 여찬(呂纂), 여홍(呂弘)과 힘을 합쳐 나라를 다스릴 것을 유언하였다. 여광이 사망하자 여소는 발상을 미루었는데 여찬은 여소의 이런 조치를 무시하고 빈소로 들어가 곡을 하였다. 여소는 여찬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여찬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여찬이 거부하였다. 얼마 후 여홍이 여찬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자 여찬은 여홍과 함께 궁궐로 난입하여 여소를 살해하고 천왕에 즉위하였다.

 

여찬은 남량, 북량 등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의 공조로 인해 원정을 나가면 후방을 공격당하여 모두 실패하였다. 또한 여찬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여홍을 살해하고 주색에 빠져 내정을 게을리 하여 후량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401년, 여찬의 사촌 여초(呂超)가 여찬의 책망을 받았는데, 여초는 여찬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여찬은 여초 등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에 취한 여찬은 여초에게 살해되었다.

 

 

여륭(呂隆, ? ~ 416년, 재위:401년 ~ 403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량(後凉)의 4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이다. 시호는 없다.

 

여륭은 여광(呂光)의 동생 여보(呂寶) 아들이다. 401년, 여륭의 동생인 여초(呂超)가 군주 여찬(呂纂)을 살해하였는데 여륭은 이를 도왔으며 여초에 의해 추대되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다. 여륭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국정은 동생 안정공(安定公) 여초가 전담하였다. 여륭이 즉위하였을 무렵 후량은 남량, 북량에게 번갈아 공격을 당하였고, 여륭이 권위를 세우기 위해 형벌을 엄하게 하고 신하들을 많이 처형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이반하였다.

 

후량의 국력이 약화되자 후진(後秦)이 침공해와 수도 고장(姑臧)이 포위되었으며, 여륭은 오랜 농성 끝에 9월, 후진에 항복하여 건강공(建康公)에 책봉되었다. 후진군이 물러가자 여륭과 여초는 후진의 수재(守宰)를 공격하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남량, 북량이 다시 공격해와 후진의 국력은 더욱 쇠퇴하였다. 남량, 북량의 침략에 시달리던 여륭은 견디다 못해 403년에 후진에 나라를 완전히 넘기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량은 멸망하였다.

 

여륭은 장안으로 끌려와 산기상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416년에 일어난 요필(姚弼)의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