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38 (오호 십육국 시대 7 : 냠연,서량)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중국의 역사 38 (오호 십육국 시대 7 : 냠연,서량)

두바퀴인생 2010. 3. 19. 04:58

 

 

 

중국의 역사  38 (오호 십육국 시대 7 : 남연, 서량)

 

 

 

 

오호십육국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전량 장궤 301년 - 376년 한족
전조 유연 304년 - 329년 흉노
성한 이특 304년 - 347년 파촉
후조 석륵 319년 - 351년 갈족

전연

모용황 337년 - 370년 선비
전진 부견 351년 - 394년 저족
후연 모용수 384년 - 409년 선비
후진 요장 384년 - 417년 강족
서진 걸복국인 385년 - 431년 선비
후량 여광 389년 - 403년 저족
남량 독발오고 397년 - 414년 선비
북량 저거몽손 397년 - 439년 노수호
남연 모용덕 400년 - 410년 선비
서량 이고 400년 - 421년 한족
혁련발발 407년 - 431년 흉노
북연 풍발 409년 - 436년 한족


오호십육국 이외의 국가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구지 양무소 296년 - 506년 저족
탁발의로 315년 - 376년 선비
염위 염민 350년 - 352년 한족
서연 모용홍 384년 - 394년 선비
적위 적요 388년 - 392년 정령
후촉 초종 405년 - 413년 한족
우문부 우문막규 302년 - 344년 선비
단부 단일육권 310년 - 357년 선비

 

 

 

 

남연

 

남연(南燕 398년~410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모용덕(慕容徳)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국호는 (燕)으로 후연(後燕)에서 분리 독립하여 건국되었다. 같은 시대에 국호를 연으로 하는 국가가 5개가 존재하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하여 남연이라 부른다.

 

396년 말부터 북위(北魏)가 후연을 침공하여 하북 일대가 북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모용덕은 후연의 승상·령기주목(丞相·領冀州牧)에 임명되어 업에서 장기간 농성을 하였다. 그러나 397년에 후연의 수도 중산(中山)이 함락되고 모용린(慕容麟)이 중산에서 도망쳐 오자, 모용덕은 북위의 위협을 느끼고 활대(滑臺)로 근거지를 옮겼다. 398년, 모용덕은 활대에서 연왕(燕王)을 자칭하였으니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남연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모용덕은 활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하였으나 399년에 수하에 있던 망명세력 부광(苻廣)이 반란을 일으키고 뒤이어 활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북위에 항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근거지를 잃은 모용덕은 수하들의 건의에 따라 남하하여 연주(兗州) 북부를 장악하였다. 399년 말에는 동쪽의 청주(靑州)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 벽려혼(壁閭渾)을 쳐서 무너뜨리고 광고(廣固)를 수도로 정하였다.

 

400년, 모용덕은 광고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고쳐 모용비덕(慕容備德)이라 하였다. 모용덕은 청주와 연주 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내치를 다졌고, 동진(東晉)이 환현(桓玄)의 찬탈로 인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장쑤 성 일대를 점령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용덕은 황제에 즉위하고 얼마 있지 않아 장액(張掖)에 두고 온 가족들이 몰살당한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으로 병에 걸렸다. 나이가 많았던 모용덕은 계속 병이 재발하였고 이로 인해 남연은 동진 정벌을 여러 차례 추진하였으나 번번히 무산되었다.

 

405년에 모용덕은 형 모용납(慕容納)의 유복자가 장안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았다. 장안에 거주하고 있던 모용납의 아들 모용초(慕容超)는 사신을 따라 단신으로 광고를 찾아왔고 모용덕은 조카임을 확인하자 매우 기뻐하며 모용초를 태자로 삼았다. 모용초는 남연으로 찾아오는 과정에서 남연의 대신 모용법(慕容法) 등과 알력을 가졌다. 모용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으며 모용초가 뒤를 이었다.

 

모용초는 남연의 옛 신하들과 대립하여 친우인 공손오루(工孫五樓)를 중용하여 측근 정치를 펼쳤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모용법, 모용종(慕容鐘), 단굉(段宏) 등은 406년에 모반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고 이들은 모두 북위에 항복하였다. 모용초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사치와 폭정을 일삼았다. 모용초의 생모 단씨(段氏)와 부인 호연씨(呼延氏) 후진(後秦)에 머물고 있었는데 모용초는 407년에 이들의 송환을 후진의 군주 요흥(姚興)에게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요흥은 이들을 송환하는 대가로 남연이 후진에 신속하고 태악(太樂)을 바치도록 하였고, 모용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후진에 신속하였다.

 

409년, 모용초는 후진에 바쳐 없어진 태악을 다시 구하기 위해 동진을 공격하여 악공과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이에 동진은 유유(劉裕)가 북벌군을 일으켜 남연을 침공하였다. 모용초는 험한 곳을 지키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유유의 북벌군을 영내로 끌어들여 단기 결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여 모용초는 수도 광고(廣固)에서 6개월 여를 농성하였다. 410년에 성이 함락되어 남연은 멸망하였다.

역대 군주

남연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연왕
(燕王)
모용덕(慕容德) - 398년 ~ 400년
1대 세종
(世宗)
헌무제
(獻武帝)
모용덕(慕容德) 건평(建平) 400년 ~ 405년 400년 ~ 405년
2대 - - 모용초(慕容超) 태상(太上) 405년 ~ 410년 405년 ~ 410년

 

 

 

 

 

 

서량

 

서량(西涼, 400년 ~ 421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한족인 이고(李暠)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397년 후량(後凉)의 건강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북량(北凉)을 건국했다. 398년 단업은 돈황(敦煌)을 장악하자 돈황태수 맹민(孟敏)을 사주자사(沙州刺史)에 임명하고 동시에 한인 호족의 지지가 두터운 이고를 교곡현령(效穀縣令)으로 임명했다. 얼마후 맹민이 병사하자, 한인 호족의 추대로 이고가 돈황태수가 되었다. 400년, 북량의 진창태수(晋昌太守) 당요(唐瑤)가 모반을 일으키고, 이고를 대장군·양공·진량이주목·호강교위(大将軍涼公秦涼二州牧護羌校尉)로 추대하면서 서량이 건국되었다. 이고는 북량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침공을 막는 한편 농경, 양잠 및 서역과의 교역을 장려하여 서량을 안정된 국가로 성장시켰다. 또한 한족사회의 전통에 충실하여 학교를 짓어 유교을 진흥시켜, 한족문화의 보호에 노력했다.

 

417년에 이고가 병사하고 이흠(李歆)이 뒤를 이었으나,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였고, 신하에게 냉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인망이 없었다. 또한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고 420년 7월, 북량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오히려 저거몽손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서량은 여기서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420년 10월, 이흠의 동생인 관군후(冠軍侯) 이순(李恂)은 돈황으로 도망쳐 양주자사를 자칭하여 다시 서량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421년 저거몽손이 돈황을 점령하여 서량은 완전히 멸망했다.

역대 군주

서량 군주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1대 태조 무소왕
(武昭王)
이고(李暠) 경자(庚子) 400년 ~ 404년
건초(建初) 405년 ~ 417년
400년 ~ 417년
2대 - - 이흠(李歆) 가흥(嘉興) 417년 ~ 420년 417년 ~ 420년
3대 - - 이순(李恂) 영건(永建) 420년 ~ 421년 420년 ~ 421년

 

 

이고(李暠, 351년 ~ 417년, 재위:400년 ~ 417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서량의 시조. 자는 현성(玄盛),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소왕(武昭王) 또는 흥성황제(興聖皇帝)라고도 불린다. 농서군의 명문 호족 이감(李弇)의 서손으로, 이창(李昶, 자는 중견(中堅))의 서자중 막내이다. 조부 이감은 서진 혹은 전연의 양주자사·무위장군·천수군 태수를 맡아 안세정후(安世亭侯)에 봉해져서 이고의 대까지 세습되었다.

 

후량 말기 397년에 후량의 건강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북량을 건국했다. 398년 단업이 곽황(敦煌)을 지배하자 곽황의 태수 맹민(孟敏)을 사주자사(沙州刺史)에 임명하고, 동시에 한인 호족의 지지가 두터운 이고를 그의 휘하 교곡현령(效穀県令)으로 임명했다. 얼마안가 맹민이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한인 호족으로부터 추대을 받아 이고가 곽황태수가 되었다.

 

400년 북량의 진창(晋昌)태수 당요(唐瑤)가 모반을 일으키고, 이고를 대장군(大将軍)-양공(涼公)-진량2주목(秦涼二州牧)-호강교위(護羌校尉)로 추대하면서 서량이 건국되었다. 이고는 즉위 후 흉노가 건국한 북량 저거몽손의 침공을 막는 한편 농경, 양잠 및 서역과의 교역을 장려하여 서량을 안정된 국가로 성장시켰다. 또한 한족사회의 전통에 충실하여 학교를 지어 유교을 진흥시켜, 한족문화의 보호에 노력했다.

 

그러나 이고는 417년에 병으로 죽자 아들 후주(後主) 이흠이 뒤를 계승하였다.

 

당나라 왕조의 황실 이씨는 그의 자손을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나라 때 성립된 진서에서는 휘을 피하고 "이현성"이라고 기술하였다. 허나, 당나라의 이씨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비계의 대부분이 한족화된 씨족이었기에 이고와는 혈연 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설에서는 이고의 자손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뒤, 어떤 일이 특별한 계기가 되어 서량 이씨는 북위의 비호을 받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신당서에 의하면 후세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인 이백은 이고의 9대째 직계라고도 한다.

 

 

이흠(李歆, ? ~ 420년)은, 오호 십육국 시대 서량의 제2대 황제(재위:417년 ~ 420년). 이흠의 대에 서량은 멸망했기 때문에 시호·묘호는 주어지지 않고 후주(後主)로 불린다. 자는 사업(士業).

 

이고는 417년에 병으로 죽자 아들 후주(後主) 이흠이 뒤를 계승했으나, 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무능하며, 신하에게 냉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인망이 없었다. 또한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여 420년 북량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오히려 저거몽손에게 대패하여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그후 후주의 동생이었던 관군후(冠軍侯) 이순이 곽황으로 도망쳐 양주자사가 되었으나, 그도 421년에 북량의 저거몽손의 공격을 받아 죽게되어, 서량은 3대 21년만에 완전히 멸망했다. 아들 이중이(李重耳)는 당 고조의 6대조였다.

 

 

이순 : 생략 (자료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