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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7 (오호 십육국 시대 6 : 남량,북량) 본문
중국의 역사 37 (오호 십육국 시대 6 : 남량, 북량)
나라명 | 시조 | 존속 기간 | 민족 |
---|---|---|---|
전량 | 장궤 | 301년 - 376년 | 한족 |
전조 | 유연 | 304년 - 329년 | 흉노 |
성한 | 이특 | 304년 - 347년 | 파촉 |
후조 | 석륵 | 319년 - 351년 | 갈족 |
모용황 | 337년 - 370년 | 선비 | |
전진 | 부견 | 351년 - 394년 | 저족 |
후연 | 모용수 | 384년 - 409년 | 선비 |
후진 | 요장 | 384년 - 417년 | 강족 |
서진 | 걸복국인 | 385년 - 431년 | 선비 |
후량 | 여광 | 389년 - 403년 | 저족 |
남량 | 독발오고 | 397년 - 414년 | 선비 |
북량 | 저거몽손 | 397년 - 439년 | 노수호 |
남연 | 모용덕 | 400년 - 410년 | 선비 |
서량 | 이고 | 400년 - 421년 | 한족 |
하 | 혁련발발 | 407년 - 431년 | 흉노 |
북연 | 풍발 | 409년 - 436년 | 한족 |
나라명 | 시조 | 존속 기간 | 민족 |
---|---|---|---|
구지 | 양무소 | 296년 - 506년 | 저족 |
대 | 탁발의로 | 315년 - 376년 | 선비 |
염위 | 염민 | 350년 - 352년 | 한족 |
서연 | 모용홍 | 384년 - 394년 | 선비 |
적위 | 적요 | 388년 - 392년 | 정령 |
후촉 | 초종 | 405년 - 413년 | 한족 |
우문부 | 우문막규 | 302년 - 344년 | 선비 |
단부 | 단일육권 | 310년 - 357년 | 선비 |
남량
남량(南涼, 397년 ~ 414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 독발부(禿髪部)의 독발오고(禿髮烏孤)가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양(凉)이지만 같은 국호를 가진 국가가 많기 때문에 남량이라 부른다. 남량의 독발씨는 탁발씨(拓跋氏)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이 나라를 탁발량국(拓跋涼國)이라고도 부른다.
선비족 독발부는 대대로 양주(凉州) 남부(칭하이 성 북동부)에 거주하던 부족이었다. 380년대에 후량(後凉)이 건국되었는데, 전량(前凉)의 장씨(張氏) 왕가 출신이었던 장대예(張大豫)가 후량에 맞서 난을 일으켰다. 독발부의 수장 독발사복건(禿髪思復鞬)은 장대예를 지원하여 후량과 싸웠으나 387년에 장대예의 난이 진압되자 독발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394년에 독발사복건이 죽자 장자 독발오고가 뒤를 이었는데, 독발오고는 후량에 복속하여 관군대장군·하서선비대도통(冠軍大將軍·河西鮮卑大都統)에 임명되었다. 395년에는 칭하이 성의 황수(湟水)유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선비족 을불부(乙弗部), 절굴부(折掘部)를 무너뜨리고 염천보(廉川堡)를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 396년에 후량의 여광이 대량천왕(大凉天王)에 즉위하자 독발오고는 이에 반발해 후량의 관직을 받지않고 독립하였다.
397년 독발오고는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고 후량을 공격하여 금성(金城)을 점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남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남량을 건국한 독발오고는 후량의 내전에 개입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398년에는 무위왕(武威王)을 자칭하였고, 399년에는 수도를 낙도(樂都 : 칭하이 성 러두 현)로 옮겼다. 독발오고가 죽자 동생 독발이녹고가 뒤를 이어 무위왕에 즉위하였다.
독발이녹고는 후량과 대립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401년에는 황제를 자칭하려다 그만두고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하였다. 같은 해 후진(後秦)이 후량을 공격하였는데, 후진의 세력을 두려워한 독발이녹고는 영토인 광무(廣武)를 포기하고 철수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복속을 표명하였다. 후량이 후진에 복속하자 독발이녹고도 후진의 작위를 받아 광무공(廣武公)에 책봉되었다. 후진군이 물러가자 독발이녹고는 북량, 후량 등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402년에 독발이녹고가 죽자 동생 독발녹단이 뒤를 이었다.
독발녹단은 양왕(凉王)에 즉위하고 후량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후량이 후진에 나라를 넘기자 독발녹단도 후진에 복속하였다. 이후 독발녹단은 북량과 대립하였는데, 406년에 북량을 공격하여 노략질한 공물을 후진에 바치고 그 대가로 고장의 영유권을 얻었다. 독발녹단은 고장을 강제로 점령하고 양주의 중심지를 장악하였으며 수도를 고장으로 옮기고 408년에는 다시 양왕을 자칭하였다. 독발녹단의 양주 경영은 북량, 하(夏), 후진 등의 침입 및 내부 반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결국 410년에 본거지인 영남(嶺南)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고장을 포기하고 다시 낙도로 수도를 옮겼다.
낙도 천도 이후에도 독발녹단은 북량과 계속해서 대립하였는데 매번 북량에게 패배하여 아들을 인질로 바쳐야만 했다. 또한 서진(西秦)의 침략도 받았다. 414년에 서쪽의 속령 을불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독발녹단은 출정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독발녹단이 수도를 비운 사이 서진이 쳐들어와 수도가 함락되었고 남량은 멸망하였다.
남량은 3대 18년에 멸망한 단명한 지방정권이었지만,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거점을 청해성지구에 두었고, 이 땅의 개발에 나서서 이후 청해 실크로드의 개통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남량 정권하에서는 법현이 이 길을 중간까지 이용하였다. 독발녹단의 아들 독발파강은 후에 북위에 항복하였는데, 독발씨는 탁발씨와 같은 씨족이었기에 원씨를 내려주고, 일족을 매우 중용하였다. 한편 독발녹단의 동생 독발변니가 남량 멸망 후 티베트로 도망쳐 토번을 건국했다는 전설도 있다.
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1대 | 열조(烈祖) | 무왕(武王) | 독발오고(禿髪烏孤) | 태초(太初) 397년 ~ 399년 | 397년 ~ 399년 |
2대 | - | 강왕(康王) | 독발이녹고(禿髪利鹿孤) | 건화(建和) 400년 ~ 402년 | 399년 ~ 402년 |
3대 | - | 경왕(景王) | 독발욕단(禿髪傉檀) | 홍창(弘昌) 402년 ~ 404년 가평(嘉平) 408년 ~ 414년 |
402년 ~ 414년 |
독발오고(禿髮烏孤, ? ~ 399년, 재위:397년 ~ 399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남량(南凉)의 초대 군주이다.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무왕(武王)이다.
독발오고는 선비족 독발부 출신으로 아버지는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이다. 독발부는 대대로 양주(凉州) 남부(칭하이 성 북동부)에서 거주하였는데 380년대에 후량(後凉)이 건국되자 이에 대항하였다. 당시 양주에는 전량(前凉)의 장씨(張氏) 왕가 출신이었던 장대예(張大豫)가 후량에 맞서 난을 일으켰는데 독발부는 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387년에 장대예의 난이 진압되자 독발부는 세력이 약화되었다. 394년에 독발사복건이 죽자 독발오고가 독발부의 수장이 되었다.
독발오고는 후량의 작위를 받아 관군대장군·하서선비대도통(冠軍大將軍·河西鮮卑大都統)에 임명되었다. 395년에는 칭하이 성의 황수(湟水)유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선비족 을불부(乙弗部), 절굴부(折掘部)를 무너뜨리고 염천보(廉川堡)를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 396년에 후량의 여광이 대량천왕(大凉天王)에 즉위하자 독발오고는 이에 반발해 후량의 관직을 받지않고 독립하였다. 397년, 독발오고는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고 후량을 공격하여 금성(金城)을 점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남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이 무렵 후량의 양주에서는 반란이 잇따라 북량(北凉)이 건국되고 수도 고장(姑臧)에서는 곽논(郭黁)이 봉기하는 등 극심한 혼란 상태에 있었다. 독발오고는 곽논의 봉기에 호응하여 원군을 파견하였으며, 398년에는 서평(西平) 지역의 강족 양기(梁饑)를 격파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12월에는 무위왕(武威王)을 자칭하였다. 399년, 독발오고는 수도를 낙도(樂都;현재 청해성 낙도현)로 옮기고 후량과 대립하였다. 6월, 독발오고는 술에 취해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 ? ~ 402년, 재위:399년 ~ 402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남량(南凉)의 제2대 군주이다. 시호는 강왕(康王)이다.
독발이녹고는 선비족 독발부 출신으로 아버지는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이며 독발오고(禿髮烏孤)의 동생이다. 독발이녹고는 독발오고가 남량을 건국한 뒤에 표기대장군·서평공(驃騎大將軍·西平公)에 임명되어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399년에 독발오고가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즉위하고 서평(西平)으로 천도하였다.
독발이녹고는 후량과 대립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한편 서진(西秦)이 멸망하고 서진왕 걸복건귀 일족이 도망쳐오자 이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걸복건귀는 독발이녹고를 배반하고 모반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후진(後秦)으로 도망쳤고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은 남량에 인질로 남았다. 독발이녹고는 401년에 황제를 칭하려 하였으나 부하들의 설득으로 그만두었으며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하였다.
401년 가을, 후진이 후량을 공격하였는데, 독발이녹고는 후진의 군대를 피해 광무(廣武)에서 철수하였으며 후진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표명하였다. 독발이녹고의 휘하에 있던 강기(姜紀), 양환(楊桓) 등은 독발이녹고를 떠나 후진에 투항하기도 하였다. 후량이 후진에 항복하고 후진군이 철수하자 북량(北凉)의 저거몽손은 남량에 복속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에 독발이녹고는 북량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며 저거몽손의 동생 저거나(沮渠拏)를 인질로 받아 북량을 복속시켰다. 또한 독발녹단을 보내 후량을 공격하는 등 북량 및 후량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402년 3월, 독발이녹고는 병에 걸려 동생인 독발녹단에게 후사를 맡기고 사망하였다.
독발녹단(禿髮傉檀, 365년 ~ 415년, 재위:402년 ~ 414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남량(南涼)의 제3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이다. 시호는 경왕(景王)이다.
독발녹단은 선비족 독발부 출신으로 아버지는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이며 독발오고(禿髮烏孤),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의 동생이다. 독발사복건은 독발녹단의 재능을 높이 사서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였고, 독발오고와 독발이녹고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형제 상속을 하여 독발녹단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하였다. 독발오고 치세에는 거기대장군·광무공(車騎大將軍·廣武公)에 임명되었고, 독발이녹고 때에는 도독중외제군사·양주목·녹상서사(都督中外諸軍事·涼州牧·録尚書事)를 역임하였으며 군사와 나라의 모든 대사를 통괄하였다.
402년에 독발오고가 병으로 죽자 독발녹단이 왕위에 올라 양왕(凉王)을 자칭하고 낙도(樂都 : 칭하이 성 러두 현)로 천도하였다. 독발녹단은 독발이녹고의 정책을 이어받아 후량(後凉)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는데, 403년에 후량이 후진(後秦)에 나라를 넘기게 되자 독발녹단도 후진에 명목상으로 복속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독발녹단을 광무공(廣武公)에 봉하였고 독발녹단은 402년에 연호를 폐하였다.
독발녹단은 북량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는데, 406년에는 북량을 공격하여 약탈한 말과 양을 후진에 바쳤다. 요흥은 이러한 독발녹단의 공물을 치하하고 그를 고장(姑臧)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독발녹단은 고장을 강제로 점령하여 후진의 양주 경영을 종식시켰으며, 뒤이어 고장으로 수도를 옮겼다. 408년에는 양왕(凉王)을 자칭하고 연호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07년에 하(夏)의 혁련발발이 독발녹단과 혼인 동맹을 청하였는데, 독발녹단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혁련발발은 남량을 공격하여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고, 독발녹단은 무리해서 반격에 나섰다가 대패하였다. 이 패배로 인해 고장 인근의 민심이 동요하였으며 반란이 잇따랐다. 408년에는 남량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후진군이 쳐들어왔으며, 독발녹단은 큰 피해를 입고 간신히 격퇴하였다.
한편 독발녹단은 북량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독발녹단의 북량 정벌은 항상 실패하였으며, 매번 반격을 받아 수도 고장을 위협당하였다. 410년에도 북량에 크게 패배하여 고장을 포위당했고 독발녹단은 아들을 인질로 보내 포위를 풀었다. 이때 독발부의 본거지였던 영남(嶺南)에서 절굴기진(折掘奇鎮)이 반란을 일으켰고 본거지를 상실할 위기에 독발녹단은 수도를 낙도로 다시 옮겼다. 고장은 반란이 일어났고 411년에 북량이 고장을 점령하였다. 이후에도 독발녹단은 계속해서 북량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공격 역시 계속해서 실패하였으며, 항상 반격을 받아 낙도를 포위당했다. 독발녹단은 매번 아들을 인질로 보내 포위를 풀었으나 곧이어 다시 북량을 공격하였다가 포위당하기를 반복하였다. 또한 서진(西秦)과도 대립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다.
414년, 칭하이 호 서쪽의 을불부(乙弗部)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독발녹단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였는데, 수도가 비어있는 틈을 타서 서진이 쳐들어와 나라를 모두 잃었다. 독발녹단은 을불부를 근거로 하여 재기하려 하였으나 동요한 군대가 와해되어 결국 실패하고 서진에 항복하였다. 415년에 걸복치반에 의해 독살되었다. 걸복치반은 독발녹단에게 경왕(景王)이라 시호를 내렸다.
대부분의 사료에는 독발녹단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위서(魏書)》에는 독발귀단(禿拔劌檀)으로 나타나고 있다.
북량(北涼, 397년 ~ 439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간쑤성(甘肅省)에서 건국된 나라이다. 초대 왕은 단업(段業)이지만, 실질적인 창업자는 흉노계(匈奴系) 노수호족(盧水胡族)의 저거몽손(沮渠蒙遜)이다.
저거몽손은 후량(後凉)의 무장으로 397년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사촌 형제인 저거남성(沮渠男成)과 힘을 합쳐 건강(建康)의 태수인 단업을 건강공(建康公)으로 추대하였으며 저거몽손은 장액(張掖)의 태수로 임명되고 저거남성은 보국장군(輔國將軍)이 되었다. 단업은 399년에 국호를 양(凉)으로 정하고 양왕(凉王)을 자칭하였다. 단업은 북량의 명목상의 군주였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저거남성·저거몽손이 쥐고 있었다. 이를 두려워한 단업은 401년 5월, 저거남성을 모살하였으며 저거몽손은 반란을 일으켜 단업을 살해하고 장액공(張掖公)을 자칭하였다.
저거몽손은 남량(南凉)과 손을 잡고 후량을 압박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이후 남량과 대립하였다. 411년, 저거몽손은 남량의 주요 거점인 고장(姑臧)을 점령하여 남량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412년에는 고장으로 천도하여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하였다. 414년 이후 남량을 멸망시킨 서진(西秦)과 대립하는 한편 서량(西凉)과도 대립하여 421년에 서량을 멸망시키고 돈황(敦煌) 일대를 장악하였다. 저거몽손은 서진과 맞서기 위해 하(夏), 북위(北魏)와 연합하는 한편 동진(東晉), 송(宋)에도 복종하여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431년 서진과 하가 멸망하고 북위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북위에 인질을 보내고 양왕(凉王)으로 임명되었다. 433년 저거몽손이 병사하고 아들 저거목건(沮渠牧犍)이 뒤를 이었다.
저거목건(沮渠牧犍)은 하서왕을 자칭하고 문치(文治)을 펼쳤으나, 439년에 북위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북량의 멸망으로 오호십육국 시대는 끝나게 된다.
북량 멸망 후, 목건의 동생 저거무휘(沮渠無諱)가 주천(酒泉)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쪽으로 천도하여 고창(高昌)에서 자립하여 송으로부터 하서왕(河西王)에 봉해졌으나 460년, 유연(柔然)의 공격을 받아 2대 만에 멸망하였다.
역대 군주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1대 | - | 문왕(文王) | 단업(段業) | 신새(神璽) 397년 ~ 399년 천새(天璽) 399년 ~ 401년 |
397년 ~ 401년 |
2대 | 태조(太祖) | 무선왕(武宣王) | 저거몽손(沮渠蒙遜) | 영안(永安) 401년 ~ 412년 현시(玄始) 412년 ~ 428년 승현(承玄) 428년 ~ 431년 의화(義和) 431년 ~ 433년 |
401년 ~ 433년 |
3대 | - | 애왕(哀王) | 저거목건(沮渠牧犍) | 영화(永和) 433년 ~ 439년 | 433년 ~ 439년 |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1대 | - | 척왕(拓王) | 저거무휘(沮渠無諱) | 승평(承平) 443년 ~ 460년 | 443년 ~ 444년 |
2대 | 무척왕(武拓王) | 저거안주(沮渠安周) | " | 444년 ~ 460년 |
단업(段業, ? ~ 401년, 재위:397년 ~ 386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북량(北凉)의 초대 군주이다. 시호는 전하지 않는다.
단업은 경조(京兆 : 장안) 출신의 한족(漢族)으로 여광(呂光)의 부하 두진(杜進)의 부하였다. 여광이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명을 받아 서역 정벌에 나서자 두진을 따라 출정하였다. 이후 여광이 후량(後凉)을 건국한 뒤 건강(建康 : 간쑤 성 주취안 시)태수로 임명되었다. 397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후량은 혼란에 빠졌는데, 건강에서는 저거남성(沮渠男成)이 반란을 일으켜 건강을 포위하였다. 저거남성은 농성하고 있는 단업을 추대하여 수장으로 삼고 건강 및 주천(酒泉) 일대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단업은 이를 거부하며 20일 가까이 농성하였으나 구원군이 오지 않자 결국 성문을 열고 저거남성을 받아들여 대도독·용양대장군·양주목·건강공(大都督、龍驤大將軍、涼州牧、建康公)에 추대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북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단업은 저거남성 및 저거남성의 친척 저거몽손(沮渠蒙遜) 등에 의해 추대되어 실질적인 권력은 가지지 못하였으며 저거남성이 보국장군(輔國將軍), 저거몽손이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임명되어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저거몽손 등은 단업의 밑에서 서방을 공략하여 서역 대부분을 영향권에 넣었으며 후량의 장액(張掖)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단업은 장액 점령 직후 독자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다가 크게 패배하기도 하였다. 399년, 단업은 양왕(凉王)을 자칭하였고 후량과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그러나 400년에 돈황(敦煌 : 간쑤 성 둔황 시)에서 이고(李暠)가 반란을 일으켜 서역 대부분을 상실하여 북량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단업은 저거몽손의 힘을 두려워하여 저거몽손을 대신하여 자신의 부하 마권(馬權)을 장액태수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저거몽손의 힘에 밀려 마권을 처형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불만을 품은 저거몽손은 401년, 저거남성을 추대하여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저거남성이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저거몽손은 단업에게 저거남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하였으며 단업은 저거남성을 처형하였다. 저거몽손은 단업이 저거남성을 처형한 것을 빌미로 군중을 선동하였고 군대를 모아 단업을 공격하였다. 패배하여 사로잡힌 단업은 저거몽손에게 살해되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 368년 ~ 433년, 재위:401년 ~ 433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북량의 실질적 건국자. 임송(臨松, 감숙성 장액시) 노수호의 출신. 노수호(盧水胡)는 「진서」재기에서는 흉노의 지파(支族)로 되어 있지만, 그 밖에도 월지설, 독자적인 소수민족설등이 있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선왕(武宣王)이다.
노수호의 족장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재능이 있어, 권모에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량의 왕 여광에게 두려워 했다. 이 때문에 항상 술을 마셔 그들의 눈을 속였다고 한다.
397년, 서진(西秦)토벌의 실패의 책임을 받아들이게 해져 백부 저거라구(沮渠羅仇), 국죽(麹粥)형제가 여광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여광을 규탄하여, 후량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해 군사를 일으킨다. 사촌형제 저거남성(沮渠男成)과 협력하여, 후량의 건강태수인 한족 단업을 건국공으로써 옹립하였다. 이것이 북량의 건국이다.
401년, 저거남성과 단업을 살해, 스스로 양주목 장액공(涼州牧 張掖公)을 칭해 북량의 지배자가 된다.
영역을 서진·남량·서량·후량·후진·하·북위에 둘러싸여 세력 확대는 곤란했지만, 세력이 강한곳은 종속하고, 약한 세력을 토벌하는 교묘한 외교를 전개해 영역을 확대, 421년에 서량을 멸해 돈황을 지배하에 넣어 하서 지방 전역을 지배했다.
서진과 대항하기 위해서 하·북위와 제휴하는 한편, 강남의 동진·송왕조에도 사신을 보내 양주목 하서왕(涼州牧・河西王)에게 봉해졌다. 하지만, 431년 서진·하나라가 멸망 하면서 북위의 세력이 강력해 졌기 때문에, 북위에 인질을 보내 양주목 양왕(涼州牧 涼王)으로 봉해졌다.
433년 병사하여, 향년 66세. 북위는 사절을 파견해, 무선왕으로 추시 했다. 그의 아들 저거목건(沮渠牧犍)이 계승하였다.
저거목건 이하 : 생략(자료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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