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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9 (오호 십육국 시대 8 : 하,북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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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9 (오호 십육국 시대 8 : 하,북연)

두바퀴인생 2010. 3. 20. 05:51

 

 

중국의 역사  39 (오호 십육국 시대 8 : 하, 북연)

 

 

 

 

오호십육국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전량 장궤 301년 - 376년 한족
전조 유연 304년 - 329년 흉노
성한 이특 304년 - 347년 파촉
후조 석륵 319년 - 351년 갈족

전연

모용황 337년 - 370년 선비
전진 부견 351년 - 394년 저족
후연 모용수 384년 - 409년 선비
후진 요장 384년 - 417년 강족
서진 걸복국인 385년 - 431년 선비
후량 여광 389년 - 403년 저족
남량 독발오고 397년 - 414년 선비
북량 저거몽손 397년 - 439년 노수호
남연 모용덕 400년 - 410년 선비
서량 이고 400년 - 421년 한족
혁련발발 407년 - 431년 흉노
북연 풍발 409년 - 436년 한족


오호십육국 이외의 국가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구지 양무소 296년 - 506년 저족
탁발의로 315년 - 376년 선비
염위 염민 350년 - 352년 한족
서연 모용홍 384년 - 394년 선비
적위 적요 388년 - 392년 정령
후촉 초종 405년 - 413년 한족
우문부 우문막규 302년 - 344년 선비
단부 단일육권 310년 - 357년 선비

 

 

 

 

 

 

(夏, 407년 ~ 431년)는 오호십육국시대 남흉노(南匈奴)의 후예인 혁련발발(赫連勃勃)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역사상 마지막으로 선우(單于)를 칭했던 흉노 국가이다. 흉노의 선조가 고대 하나라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바탕으로 하여 하를 국호로 정하였다.

 

철불부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이래 남흉노의 철불부(鐵弗部)는 오르도스에서 일대 세력을 구축하였다. 철불부의 선조는 삼국 시대 흉노의 선우였던 어부라(於夫羅)의 조카뻘인 철불 우현왕(右賢王) 거비(去卑)로 조조(曹操)의 신임을 받아 남흉노를 관할하였으며 한나라의 유씨(劉氏) 성을 사용하였다. 310년, 거비의 손자 유호(劉虎)가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部)에게 본거지인 산서 일대를 빼앗기고 오르도스 지방으로 옮겨와 할거하면서 전조(前趙), 후조(後趙), 전진(前秦)에게 차례로 협력하였다. 유호의 손자 유위진(劉衛辰)의 대에 다시 탁발부에 패하여 오르도스를 상실하고 전진의 영내로 이주하였다. 376년, 유위진은 전진의 탁발부 토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오르도스로 다시 이주하였으며 탁발부, 유연(柔然)을 복속시켰다.

 

386년, 탁발부가 다시 성장하여 대(代 ; 후에 북위{北魏}로 국호를 바꿈)를 건국하고 391년에 북위의 원정군에 유위해가 살해당하면서 철불부는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劉勃勃)은 오르도스 서남쪽의 고평(高平)까지 도망쳤으나, 그후에도 북위의 토벌군이 여러차례 공격해 와 유랑 끝에 후진(後秦)에 몸을 의탁하였다. 후진은 북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유발발을 오르도스에 배치하였다.

 

407년 유발발은 옛 철불부 및 선비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후진에게서 독립하고 대선우-대하천왕(大單于大夏天王)이라 자칭하여 하를 건국하였다. 하는 오르도스 전역을 평정하였으며, 413년에는 본래 흉노의 성씨인 혁련씨로 성을 바꾸고 통만성(統萬城)을 축성하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중원의 강국이었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414년에는 북연(北燕)과 동맹을 맺고 북위를 공격하여 415년까지 산서(山西) 일대를 점령하였다. 한편 415년에는 북량(北凉)과 동맹하여 후진 및 서진(西秦)과 대립하였다. 417년, 관중(關中)의 후진이 동진(東晉)의 유유(劉裕)에 의해 멸망당하자, 하나라 군은 남하하여 동진의 후방 수비대를 격파하고 418년, 장안(長安) 등 관중의 여러 성을 점령했다. 혁련발발은 제위에 올라 통만성을 수도로 하고, 장안을 남도(南都)로 정하였으며 419년에 진흥(眞興)이라 개원하였다. 하나라의 영역은 관중, 오르도스, 산서 남부에 이르렀고, 토욕혼(吐谷渾), 북량(北凉)을 복속시켜, 화북 서쪽에서 대세력을 구축하였다. 424년 혁련발발은 장안에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차남 황태자 혁련괴(赫連璝)를 폐하고 사남 혁련윤(赫連倫)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혁련괴는 장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통만성을 공격하였다. 혁련괴는 혁련윤을 살해하였으나 삼남 혁련창(赫連昌)에게 패하여 죽었으며 이에 혁련발발은 혁련창을 태자로 삼았다. 425년 혁련발발이 죽고 혁련창이 즉위하였다.

 

426년, 혁련창은 서진을 공격하여 수도 포한(枹罕)을 함락하고 서평(西平)까지 진격하였으나, 본국이 비어있는 틈을 타 쳐들어온 북위에게 관중의 여러 성을 빼앗겼다. 427년에는 북위의 2차 원정군이 수도 통만성을 함락시켰다. 혁련창은 통만성을 탈출해 안정(安定)을 수도로 삼아 저항을 계속했으나, 각지에서 북위에게 패배하였으며 428년 혁련창은 북위군에 사로잡혔다.

 

혁련창의 동생 혁련정(赫連定)은 평량(平涼)으로 도망쳐 대선우에 즉위하고, 각지의 패잔병을 규합해 관중을 회복하고 통만성을 제외한 오르도스 여러 성을 탈환하였다. 430년, 혁련정은 (宋)과 동맹을 맺고 통만성 탈환에 나섰으나, 북위는 3차 원정군을 파견해 이를 격파하고 평량까지 함락시켰다. 하는 다시 와해되어 혁련정은 패잔병을 이끌고 상규(上邽)로 도망쳐서 수도로 삼았다. 431년 1월, 혁련정은 재기를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여 남안(南安)의 서진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이어서 전군을 이끌고 북량 원정에 나섰다. 6월, 하군은 황하을 건너는 도중 복속했던 토욕혼에게 습격을 받아 괴멸당하고, 혁련정도 사로잡혀 하는 멸망했다. 혁련정은 432년, 혁련창은 434년 북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역대 군주

철불부 군주 일람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1대 - - 유거비(劉去卑) 미상
2대 - 원제
(元帝)
추존
유고승원(劉誥升爰) 272년 ~ 309년
3대 - 경제
(景帝)
추존
유호(劉虎) 309년 ~ 341년
4대 - 선제
(宣帝)
추존
유무항(劉務恒) 341년 ~ 356년
5대 - - 유알루두(劉閼陋頭) 356년 ~ 358년
6대 - 유실물기(劉悉勿祈) 358년 ~ 359년
7대 태조
(太祖)
환제
(桓帝)
추존
유위진(劉衛辰) 359년 ~ 391년
하 군주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1대 세조
(世祖)
무열제
(武烈帝)
혁련발발(赫連勃勃) 용승(龍昇) 407년 ~ 413년
봉상(鳳祥) 413년 ~ 418년
창무(昌武) 418년 ~ 419년
진흥(眞興) 419년 ~ 425년
407년 ~ 425년
2대 - - 혁련창(赫連昌) 승광(承光) 425년 ~ 428년 425년 ~ 428년
3대 - - 혁련정(赫連定) 승광(勝光) 428년 ~ 431년 428년 ~ 431년

하나라의 문물

현존하는 하나라의 문물로써는 통만성 유적지, 대래성(代來城) 유적지, 태하진흥전(太夏眞興錢)(419년), 전구묘지(田口墓誌)(420년), 대하석마(大夏石馬)(424년), 시문조상(施文造像)(429년), 기년문서로써 돈황, 투르판 문서 수점이 있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것 중에는 대하용작도(大夏龍雀刀)(413년) 및 통만성 남비 (統万城南碑頌)(419년)등이 알려져 있다.

 

 

혁련발발(赫連勃勃, 381년 ~ 425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하나라의 창건자(재위:407년 ~ 425년).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 한나라식의 이름은 유발발(劉勃勃)이라고도 불린다.

 

거비의 후예이자 옛 철불부의 지도자인 유발발은 아버지 유위진(劉衛辰)이 죽자 오르도스 서남쪽 고평(高平)까지 도망쳤으나, 그후에도 북위의 토벌군이 여러차례 공격해 와 유랑끝에 후진에 몸을 의탁했다. 후진은 북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유발발을 오르도스에 배치했다.

 

407년 유발발은 옛 철불부 및 선비 여러 부족을 규합한 뒤 후진에게서 독립하여 대선우(大単于), 대하천왕(大夏天王)이라 칭하고 용승(龍昇)으로 건원(建元)하였다. 이것이 대하국의 건국이다. 그 해 하나라는 오르도스 전역을 평정하였으며, 유발발도 본래 흉노의 성씨인 혁련씨로 개명하였다. 또한 견고한 통만성(統萬城)을 축성하여 세력을 키웠다. 당시 중원의 지배적 세력이었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414년 북연과 동맹을 맺어 견제케 하고, 그해부터 다음해까지 산서 일대을 공략하였다.

 

417년 관중의 후진이 동진의 유유에 의해 멸망당하자, 418년 하나라 군은 남하하여 동진의 후방 수비대를 격파하고 장안 등 관중 여러성을 점령했다. 그해 혁련발발은 제위에 올라 419년 진흥(眞興)이라 개원하고 통만성을 수도로 정한뒤 귀환했다. 하나라의 영역은 관중, 오르도스, 산서 남부에 이르렀고, 토번, 북량을 복속시켜, 화북 서쪽에서 대세력을 쌓았다.

 

424년 장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내란상태가 되고, 425년 혁련발발이 죽자 하나라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혁련발발의 아들 혁련창이 2대 대선우가 되었다.

 

 

혁련창(赫連昌, ? ~ 434년)은, 오호십육국시대 하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425년 ~ 428년). 북위에 패배하여 비호하(庇護下)에서 회계왕(会稽王)이 되어(재위:428년 ~ 430년), 그 다음에 진왕(秦王)이 된다(재위:430년 ~ 434년). 혁련발발의 3남이다.

 

425년 혁련발발이 죽자 하나라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혁련발발의 아들이자 2대 대선우가 된 혁련창은 이듬해 2개의 길로 5만 병력을 보내 서진을 공격하여 수도 포한(枹罕)을 함락하고 서평(西平)까지 도달했으나, 북위는 이 기회를 틈타 하나라에 대한 제1차 원정군을 보내 관중 여러 성을 점령했다.

 

427년 북위는 제2차 원정군을 파견해 수도 통만성을 함락시켰다. 혁련창은 통만성을 탈출해 안정(安定)을 수도로 삼아 저항을 계속했으나, 각지에서 북위에게 패배해 정권은 와해되었다.

 

428년 혁련창은 북위에게 사로잡혔다. 혁련창의 동생 혁련정이 도망에 앞서 평량(平涼)에서 대선우에 즉위하였다. 혁련창은 434년 북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혁련정(赫連定, ? ~ 432년)은, 오호 십육국 시대 의 제3대 황제(재위:428년 ~ 431년). 혁련발발의 5남이다.

 

혁련창의 동생 혁련정은 도망에 앞서 평량(平涼)에서 대선우에 즉위하고, 그해 각지의 패잔병을 규합해 북위에게서 관중 전역 및 통만성을 제외한 오르도스 여러 성을 탈환했다.

 

430년 남조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혁련정은 통만성 탈환에 나섰으나, 북위는 제3차 원정군을 파견해 기어코 수도 평량마자도 함락시켰다. 하나라는 또 한번 와해되고, 혁련정은 패잔병을 이끌고 상邽으로 도망쳐,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431년 1월 혁련정은 재기를 노리고 서쪽으로 나아가 남안(南安)의 서진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이어서 전군을 이끌고 북량 원정에 나섰다. 6월 하나라 군은 황하를 건너는 도중 복속했던 토번군에게 습격을 받아 괴멸당하고, 혁련정도 사로잡혀 하나라는 멸망했다. 혁련정은 432년 북위에의해 처형되었다.

 

 

북연

 

북연(北燕 407년~436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고구려 왕족 출신의 고운(高雲)이 후연(後燕)의 왕위를 찬탈하고 건국한 국가이다.

 

선비족(鮮卑族)이 건국한 후연의 군주 모용희(慕容熙)는 폭군이었다. 407년, 모용희의 황후가 사망하자 모용희는 신하들에게 큰소리로 곡하도록 명령하고 소리가 크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였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선비족화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馮跋)은 모용보(慕容寶)의 양자 모용운(慕容雲)을 설득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한다.

 

후연 시기, 연나라는 고구려(高句麗)와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408년,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으며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하였다. 409년, 고운은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하였다.

 

풍발은 고운이 암살되고 일어난 혼란을 평정하고 스스로 뒤를 이어 천왕에 즉위하였다. 풍발은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화친하고 화북의 강자로 등장한 북위(北魏)와 대립하였다. 430년에 풍발의 뒤를 이어 동생 풍홍(馮弘)이 즉위하였다.

 

당시의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웠다. 이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자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북연은 멸망하였다. 한편 풍홍은 고구려에서 438년에 살해되었다.

 

랴오닝 성 북요시 서관영자에서 북연의 재상 풍소불(馮素弗)의 분묘(墳墓)가 발굴되었으나 명문은 없다.

역대 군주

북연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1대 - 혜의제
(惠懿帝)
고운(高雲) 정시(正始) 407년 ~ 409년 407년 ~ 409년
2대 태조
(太祖)
문성제
(文成帝)
풍발(馮跋) 태평(太平) 409년 ~ 430년 409년 ~ 430년
3대 - 소성제
(昭成帝)
풍홍(馮弘) 태흥(太興) 431년 ~ 436년 430년 ~ 436년

 

 

고운(高雲: ? ~ 409년)은 북연(北燕)의 혜의제(惠懿帝)이다. 고국원왕 때 고구려가 후연(後燕)에 패배하여 붙잡혀 온 고구려 왕족 고화(高和)의 손자이며, 자(字)는 자우(子雨)이다.

 

황제가 되기까지의 생애

후연 2대 혜민제(惠閔帝) 모용보(慕容寶:재위 396 ~ 397)가 태자로 있었을 때, 고운은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보가 등극한 후 시어랑(侍御郞) 벼슬을 받았으나 병으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물러났다. 그는 397년, 모용보의 서자 모용회(慕容會)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공격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 공으로 인해 모용보의 양자가 되고 석양공(夕陽公)이 되는 한편 모용씨를 하사받았는데, 이후 모용운(慕容雲)이라는 이름을 썼다.그는 생각이 깊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북연의 두번째 황제가 되는 풍발(馮跋)과 두터운 친교를 쌓게 된다.

 

후연 4대 소문제(昭文帝) 모용희(慕容熙:재위 401 ~ 407)는 성격이 광폭한 폭군이었다. 407년 황후인 부(苻)씨가 죽자 신하들에게 큰소리로 곡하게 한 다음 크게 울지 않는 자들을 처벌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 풍발은 고운을 추대할 거사계획을 알리고 황제가 되도록 부추겼다. 고운은 썩 내켜하지 않았으나 풍발 등이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모용희가 황후의 장례식 때 상여를 몸소 메고 성 밖으로 나간 것을 틈타 성문을 닫고 모용희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백성들의 동조를 얻은 후 모용희가 수도인 용성(龍城)에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모용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재위 중의 활동

고운은 음력 4월에 황제로 즉위하였고 자신의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씨로 되돌렸다. 스스로를 천왕(天王)으로 칭하고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으나 오늘날은 모용씨가 지배하던 시기와 구분하여 모용희가 지배하던 때까지를 후연(後燕), 고운의 등극 이후를 북연(北燕)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푸니 고운도 북연의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이에 답례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운이 고구려 왕족 혈통이라는 것에 주목하여 광개토대왕이 두 나라의 연대를 강화하고 고구려에 이득이 되는 상황을 만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재위 3년째인 409년 겨울, 고운은 총신(寵臣)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을 처단하고 고운의 뒤를 이어 즉위한 풍발이 혜의황제(惠懿皇帝)라는 시호(諡號)가 올렸다.

 

 

풍발(馮跋, ? ~ 430년)은 중국의 오호 십육국 시대 북연의 제 2대 황제(재위:409년 ~ 430년). 자는 문기(文起).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성제(文成帝).

 

후연의 장군으로 409년 후연황제 모용희을 폐위하고 북연을 건국하였다. 처음엔 고구려(高句麗) 출신의 고운(高雲/高云)을 왕위에 옹립하였으나, 고운이 측근에게 살해당하자 이를 수습한 뒤 스스로 천왕(天王)으로 등극했다.

 

풍발은 용성(龍城, 현재의 랴오닝 성 차오양)을 수도로 삼고, 요서 지방을 영유했다. 430년 동생인 풍홍이 뒤를 이었다.

 

 

풍홍(馮弘, ? ~ 430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북연의 제 3대(마지막) 황제(재위:430년 ~ 435년). 자는 문통(文通). 시호는 소성제(昭成帝).

 

430년 풍발(馮弘)이 병사하자 풍발의 아우 풍홍과 아들 풍익이 왕위 다툼을 벌였고, 결국 풍홍이 조카인 풍익과 그 형제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다. 풍홍은 화북을 통일한 북위(北魏)의 압박을 받아 436년 고구려(高句麗)에 망명을 요청하였다. 풍홍으로부터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고구려 장수왕은 장수 갈로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내주어 북연의 밀사 양이와 함께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이 자신을 맞이하려 하자 풍홍은 도성인 화룡성에 남아있던 백성들을 동쪽의 고구려 땅으로 이주시키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 자신도 고구려 땅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자 438년 음력 3월,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平郭)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北豐)에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잡았다. 그러자 풍홍은 분개하여 남조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풍홍의 요청을 받은 송의 유유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이 송으로 가는 것이 고구려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장수 손수 고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손수 고구(高仇)는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여 명을 참살했다.

 

하지만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풍홍의 군사를 쳐 왕백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사신 편에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이상 오호 십육국 시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종합

 

중국의 오호 십육국 시대는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처럼 풍운의 시대였다. 춘추전국시대가 한족끼리 쟁탈전이었다면 오호 십육국 시대는 흉노, 갈, 저, 파, 강, 선비, 한족 등이 서로 투쟁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흉노를 포함한 많은 소수 민족들이 용병으로 사용되면서 세력을 키우게 되면 반란으로 나라를 뒤집거나 한 지역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거나 교대로 중원을 점령하면서 벌인 처참한 살륙전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같은 부족간에도 황제 자리를 놓고 피나는 권력투쟁이 전개되었고 그로인해 나라는 20~30년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민족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비참한 경우도 많았고 백성과 신하를 개미 죽이 듯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족과 동화되어 갔으며 자연적으로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민족 혼합이 이루어졌다. 

 

오호십육국 (五胡十六國)

4세기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중국 북부에서 흥망한 국가군(國家群) 또는 그 시대. 5호란 흉노(匈奴), 갈(흉노의 별종)·저(티베트계)·강(羌;티베트계)·선비(鮮卑;투르크계 설이 강함)를 가리키는데, 이들이 중국 북부에 16개의 왕조를 세웠으므로 5호 16국이라 한다. 16국 가운데에는 한인(漢人)의 나라도 포함된다.


5호시대의 대세

흉노의 유연(劉淵)이 자신을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파만(巴蠻)의 이웅(李雄)도 자신을 성도왕(成都王)이라 칭함으로써 304년, 5호16국시대가 시작되었다. 한(漢)나라는 311년에 뤄양[洛陽(낙양)]을 함락시켜 회제(懷帝)를 사로잡고(永嘉의 亂), 316년에는 장안(長安)을 함락시켜 민제(愍帝)를 사로잡아 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조(趙;前趙)라 하였다. 그 뒤로는 남방에 동진(東晉)이 있고 화북(華北)에는 5호제국의 패권다툼이 계속되었는데, 5호의 패권다툼 과정에서는 동·서 양대 세력이 대립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즉 전조에 대해서는 전에 유연의 무장(武將)이었던 석륵(石勒)이 세운 후조(後趙)가 양국(襄國)에 도읍을 두고 전조를 정복하여 화북을 통일하였으나, 후조도 내부분열로 멸망하였다. 이후 업에 세워진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과 장안에 세워진 전진(前秦)이 대치하였는데, 5호 제일의 명군으로 평가되는 부견 통치하의 전진이 전연을 쓰러뜨리고, 뒤이어 대(代)·전량(前凉) 2국도 멸망시킴으로써 376년에 화북의 통일에 성공하였고, 서역(西城)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중국통일을 꾀하여 동진을 원정하다가 383년 비수의 싸움에서 패하자 전진 지배하의 각 종족은 일제히 독립하여, 400년에는 9국이 분립하는 극도의 분열상태를 나타냈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을 이룬 것은 전연의 계보인 후연(後燕)과 장안에 성립된 후진(後秦)이었는데, 옛날의 대국 후신인 북위(北魏)가 후연을 중원(中原)에서 몰아내고 439년에 화북 통일에 성공함으로써 5호 16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로는 동진 대신에 420년 강남에 성립된 송(宋)나라와 북위가 대치하는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5호시대의 배경

16국 이외에도 단명으로 끝난 서연(西燕)·위(魏)나 북위의 전신인 대(代)와 같은 나라들이 있었고, 또 정령(丁零)의 적씨(翟氏) 등의 소정권도 있었으므로 이 시대는 정치적 분열을 제일의 특색으로 한다. 그러나 5호만이 이를 야기한 것은 아니다. 후한(後漢) 말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 즉 2세기 말부터 삼국분립 등 이미 분열의 양상은 깊었는데, 이는 호족세력의 신장이라는 중국사회 내부의 변화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배경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5호의 봉기를 촉발시킨 요인은 8왕의 난에 의한 진(晉)의 중앙정부 약화였으며, 더욱이 8왕들은 이민족의 무력까지 끌어들여 서로 싸웠던 것이다. 또 5호 여러 부족의 대부분은 한(漢)나라 이후에 중국의 이민족 정복으로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온 존재이다. 1세기에 후한에 항복하여 장성 남변에 살고 있던 남흉노는 3세기에는 산시성[山西省(산서성)] 전역에 분포하였고, 서방의 저·강도 후한의 토벌을 받아 간쑤[甘肅(감숙)]·산시[陝西(섬서)]에 옮겨져 있었다. 더욱이 이들 부족은 한인(漢人)의 압박을 받고 예속적 지위에 있었으므로, 봉기는 그러한 상황에서의 자립성 회복의 시도였다. 이와 같이 중국 사회의 내부적·대외적 발전이 초래한 모순이 5호시대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호족(胡族)에 의한 지배

이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색은 호족에 의한 한족 지배의 성립에 있다. 지배종족을 중심으로 한 비한족(非漢族;호족)이 유목시대의 부족제를 유지하면서 조직화되어 군사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핵심을 형성하였다. 군사를 분장(分掌)하는 것은 대개 종실(宗室)의 일원인 제왕(諸王)이었다. 한편, 한족에 대해서는 대개의 경우, 진(秦)·한 이래의 군현제(郡縣制)를 적용하여 관료를 통하여서 지배했으니 한족과 호족으로 형태를 달리한 이중지배체제가 실시된 셈이며, 그 전체를 통치한 것이 황제 또는 천자였다(왕 또는 공의 칭호로 머문 나라도 있다). 또한 호족을 통치하는 칭호로서 전조·후조 등에서는 대선우(大單于)가 있었는데, 전연에서는 제호(帝號)를 취함과 동시에 폐지되는 등 그 존폐는 일정하지 않았고, 또 여기에 취임한 자가 황태자 등 차기의 황제 후보자였던 데서 볼 수 있듯이 황제보다 하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의 체제는 군사를 분장하는 제왕의 내부항쟁으로 동요되기 쉬웠고, 5호의 여러 나라는 대부분 단명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5호의 제국은 한인통치의 필요상 한인 호족(豪族)을 지방관이나 장군에 임명하여 그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한인 지식인을 등용하였다. 후조의 석륵이 설치한 군자영(君子營)은 특히 유명하여 명신 장빈(張賓)이 나왔으며 전진의 제패에는 한인 출신의 명재상 왕맹(王猛)의 공이 컸다. 또 5호 여러 나라에서는 정복지역의 백성이나 병사를 수도 주변으로 이주시켜 그들의 지배를 굳히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많이 취하였다. 5호의 여러 군주는 일반적으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후조는 승려 불도징(佛圖澄)에게 대한 것같이 고승이 지닌 신이적(神異的) 능력의 이용, 또는 인심수습을 꾀함으로써 불교의 성행을 가져왔다. 둔황[敦煌(돈황)]의 석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전진의 통치 때부터였다. 군주의 보호를 받는 승려로는 그 밖에 전진의 도안(道安), 후진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유명하며, 특히 구마라습의 역경사업은 귀중하다. 5호시대는 정치적 분열과 호족(胡族)이라는 새로운 세력과 함께 수(隋)·당(唐)으로 이어지는 과도적 시대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 : 야후 백과사전

 

 이어서 남북조 시대로 넘어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