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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1 (남북조 시대:북위) 본문
중국의 역사 41 (남북조 시대 : 북위)
북위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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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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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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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북위(北魏 ; 386년 ~ 534년)는 중국 남북조시대 선비족(鮮卑) 탁발부(拓跋部)에 의해 화북에 건국된 왕조이다. 국호가 위나라 였기에 전국시대 위(魏)나라와 삼국시대 조조의 위(魏)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불리고 있다. 기타 후위(後魏), 원(元)씨가 지배하였다 하여 원위(元魏), 대위(代魏)란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261년 탁발부의 탁발역휘(拓跋力徽)는 조조의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는데, 이것이 훗날 위나라을 국호로 정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서진은 이들 세력을 이용해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산서북부의 땅을 주어 살게했다.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변의 보위(保衛)를 도모하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 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오호십육국 시대에 군장(君長)인 탁발의로(拓跋猗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전진에게 멸망당했다.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 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 후의 道武帝)는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그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년). 이어 내몽골의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허베이(河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도무제는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족을 토벌하여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 하에 두고, 중국으로 진출을 개시해 허베이 성 일대를 영유하고 있던 후연을 공격해 397년 수도 중산(中山)을 함락하고 후연을 멸망시켜, 중원에 안주했다. 398년 수도를 평성(平城)으로 옮기고, 그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강제이주시켰다.
도무제는 중국 전통의 국가체제를 채용하여 탁발부 밑에 있던 여러 부족을 해산시키고, 족장이하 부족민은 모두 중국의 호적에 편입시켜 한족과 혼합시켰다. 더불어 한족 출신의 명족(名族) 인재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나라를 공격해 하남을 빼앗고, 이어 태무제(太武帝)는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켜,439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세는 크게 울려퍼졌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태무제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또한 남조 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고, 이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 교단을 확립하고, 한인 관료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번째) 이 시기에 선비족의 한인 동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6대 효문제(孝文帝)의 시기 풍태후(馮太后)가 섭정할 때 유교적인 예법을 채용하고, 균전제을 시행하면서 삼장제을 확립했다. 풍태후의 사후, 친정을 개시한 효문제는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는 선비족의 복장과 언어를 금지하고, 성씨도 중국풍으로 바꿔 탁발씨를 원씨(元氏)로 고치고, 선비족과 한족 명족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한족 문화와 동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북위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일면 지금까지 내려온 선비족 고유의 소박한 상무정신은 사치와 문약으로 바뀌게 되었다.
효문제 사후 어린 효명제(孝明帝)을 대신해 섭정한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혀, 국내에 도적이 봉기하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정책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은 523년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6진은 원래 북위의 수도 평성을 지키던 6곳의 군사기지로 이곳엔 왕실 계통의 유력자들이 머물면서 국경을 지켰기에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급진적인 한화정책과 수도의 이전으로 인해 대우가 소홀해지면서 그 불만이 누적되어 6진의 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후계자를 세우지만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산시 성 삭현지방의 흉노족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 태후와 후계자를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 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하음의 변, 河陰의 變)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晋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고환은 이주씨 일당을 각지에서 격파하여 정권은 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효무제는 이번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 낙양을 탈출해 장안(長安)으로 도망쳐 우문태(宇文泰)에게 의지하자, 고환은 효정제(孝靜帝)를 옹립하고 534년 수도를 업으로 옮겼다. 같은 해 우문태는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文帝)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동위, 서위라 부른다.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어,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이 재상이 되어 550년 효정제로부터 제위을 빼앗아 북제(北齊)을 건국했다. 서위에서도 주권은 우문씨가 차지하여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556년 공제(恭帝)을 폐위하고 다음 해 북주를 건국하니 이로써 동서 양위는 멸망했다.
모사자귀제도
북위에선 외척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실시한 모사자귀제도라는 잔혹한 제도를 실시했다. 이것은 후궁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생모를 죽이고, 아이는 따로 키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역대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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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헌명황제 (獻明皇帝) (북위 도무제 추숭) |
탁발식(拓跋寔) | - | - |
제1대 | 북위 태조 (北魏太祖) (북위 열조<北魏烈祖>) |
도무황제 (道武皇帝) |
탁발규(拓跋珪) | 등국(登國) 386년 ~ 396년 황시(皇始) 396년 ~ 398년 천흥(天興) 398년 ~ 404년 천사(天賜) 404년 ~ 409년 |
386년 ~ 409년 |
제2대 | 북위 태종 (北魏太宗) |
명원황제 (明元皇帝) |
탁발사(拓跋嗣) | 영흥(永興) 409년 ~ 413년 신서(神瑞) 414년 ~ 416년 태상(泰常) 416년 ~ 423년 |
409년 ~ 423년 |
제3대 | 북위 세조 (北魏世祖) |
태무황제 (太武皇帝) |
탁발도(拓跋燾) | 시광(始光) 424년 ~ 428년 신가(神麚) 428년 ~ 431년 연화(延和) 432년 ~ 435년 태연(太延) 435년 ~ 440년 태평진군(太平眞君) 440년 ~ 451년 정평(正平) 451년 ~ 452년 |
423년 ~ 452년 |
임시 | 북위 은종 (北魏隱宗) |
경수황제 (敬壽皇帝) (남안왕<南安王>) |
탁발여(拓跋余) | 승평(承平) 452년 | 452년 |
- | 북위 공종 (北魏恭宗) (북위 문성제 추숭) |
경목황제 (景穆皇帝) |
탁발황(拓跋晃) | - | - |
제4대 | 북위 고종 (北魏高宗) |
문성황제 (文成皇帝) |
탁발준(拓跋浚) | 흥안(興安) 452년 ~ 454년 흥광(興光) 454년 ~ 455년 태안(太安) 455년 ~ 459년 화평(和平) 460년 ~ 465년 |
452년 ~ 465년 |
제5대 | 북위 현조 (北魏顯祖) |
헌문황제 (獻文皇帝) |
탁발홍(拓跋弘) | 천안(天安) 466년 ~ 467년 황흥(皇興) 467년 ~ 471년 |
465년 ~ 471년 |
제6대 | 북위 고조 (北魏高祖) |
효문황제 (孝文皇帝) |
원굉(元宏) | 연흥(延興) 471년 ~ 476년 승명(承明) 476년 태화(太和) 477년 ~ 499년 |
471년 ~ 499년 |
제7대 | 북위 세종 (北魏世宗) |
선무황제 (宣武皇帝) |
원각(元恪) | 경명(景明) 500년 ~ 504년 정시(正始) 504년 ~ 508년 영평(永平) 508년 ~ 512년 연창(延昌) 512년 ~ 515년 |
499년 ~ 515년 |
제8대 | 북위 숙종 (北魏肅宗) |
효명황제 (孝明皇帝) |
원후(元詡) | 희평(熙平) 516년 ~ 518년 신귀(神龜) 518년 ~ 520년 정광(正光) 520년 ~ 525년 효창(孝昌) 525년 ~ 528년 무태(武泰) 528년 |
515년 ~ 528년 |
임시 | - | 소공황제 (少恭皇帝) |
원쇠(元釗) | - | 528년 |
- | 북위 숙조 (北魏肅祖) (북위 효장제 추숭) |
문목황제 (文穆皇帝) |
원협(元勰) | - | - |
- | - | 효선황제 (孝宣皇帝) (북위 효장제 추숭) |
원소(元劭) | - | - |
제9대 | 북위 경종 (北魏敬宗) |
효장황제 (孝莊皇帝) (무회황제<武懷皇帝>) |
원자유(元子攸) | 건의(建義) 528년 영안(永安) 528년 ~ 530년 |
528년 ~ 530년 |
제10대 | - | 폐황제 (廢皇帝) (장광경왕<長廣敬王>) |
원엽(元曄) | 건명(建明) 530년 ~ 531년 | 530년 ~ 531년 |
제11대 | - | 절민황제 (節閔皇帝) (광릉왕<廣陵王>) |
원공(元恭) | 보태(普泰) 531년 ~ 532년 | 531년 ~ 532년 |
제12대 | - | 폐황제 (廢皇帝) (안정순문왕<安定順文王>) |
원랑(元朗) | 중흥(中興) 531년 ~ 532년 | 531년 ~ 532년 |
- | - | 무목황제 (武穆皇帝) (북위 효무제 추숭) |
원회(元懷) | - | - |
제13대 | - | 효무황제 (孝武皇帝) (출황제<出皇帝>) |
원수(元脩) | 태창(太昌) 532년 영흥(永興) 532년 영희(永熙) 532년 ~ 534년 |
531년 ~ 534년 |
중국 남북조 시대의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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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 | 북위 · 동위 · 서위 · 북제 · 북주 |
남조 | 송 · 제 · 양 · 진 |
선비족
선비(중국어: 鮮卑, 병음: Xianbei, 기원전 1세기 - 6세기)는 현재 만주에서 기원하는 초기 몽골족의 일파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남하하여 중국에 북위 등의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는 선비를 섭신(涉臣)이라고 기재했다.
전한 시대동안 한무제가 위청을 보내 허타오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다. (기원전 127년)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동안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고 동부지역은 선비족이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에게 굴복한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그들은 동호(東胡)족의 북쪽 일파이며 동호족의 남쪽 일파는 우환이다. 언어학적으로는 몽골어계통이라는 설이 강하지만 투르크계, 몽골계, 퉁구스계와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 선비족의 흥성은 1세기 흉노족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한다. 87년과 93년에 선비족은 흉노족의 두 선우를 처단하였다.
기원전 시기에는 대흥안령산맥 기슭에서 목축, 수렵을 생업으로 하는, 흉노에 복속했었다. 그 후 흉노가 북과 남으로 분열하자 전한에도 결합되는 부족이 나와 반독립상태가 되었다.
1세기가 되자 북흉노가 후한과의 항쟁을 계속하는 사이에 힘을 모아 북흉노를 몽골고원으로부터 서쪽으로 내쫓았다. 2세기 반경 단석괴(壇石槐)가 등장하여 부족의 통합에 성공하여 강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석괴의 사후 다시 분열되었다.
후한이 망하고 서진(西晋)의 황족 중에 8왕의 난이 일어나자 선비족은 용병으로서 서서히 중국 내부에 이주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에 들어서자 흉노의 유연(劉淵)이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전조(前趙)를 세우자 선비족도 이를 따라 중국에 나라를 세웠다. 이 즈음의 선비는 여섯 부족이 각각 강하게 되었다. 각 부족은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이 외에 모용부로부터 나와 서천한 토욕혼(吐谷渾)도 선비계인데 현지의 강인(羌人)도 융합하였다.
탁발부의 북위(北魏)는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여 이 이후는 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그 후 수의 양견(楊堅)에 의하여 중국이 되었으나 양견은 우문부가 세운 북주(北周)의 외척이고 자신도 선비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동일하게 선비족시기 다얀씨(大野氏, 대야씨)인 북주(北周)의 귀족이었던 당의 이연(李淵)도 또 선비 출신일 가능성이 주장되고 있다.
북위의 한족화 정책으로 선비족은 한족에 동화되었다.
도무제 탁발규(道武帝 拓跋珪, 371년 ~ 409년)는 오호십육국시대 북위의 건국자, 초대 황제(재위 386년 ~ 409년). 묘호는 태조(太祖). 할아버지는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며, 아버지는 탁발식(拓跋寔)이다.
도무제는 전진이 비수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쇠퇴한 시기를 틈타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이후 1년후 국호를 위나라로 정했다.
도무제는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족을 토벌하여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하에 두고, 중국으로 진출을 개시해 하북성 일대를 영유하고 있던 후연을 공격해 397년 수도 중산(中山)을 함락하고 후연을 멸망시키고, 중원에 안주했다.
398년 수도를 평성(平城)으로 옮기고, 그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강제이주시켰다.
도무제는 중국 전통의 국가체제을 채용하여 탁발부 밑에 있던 여러 부족을 해산시키고, 족장이하 부족민은 모두 중국의 호적에 편입시켜 한족과 혼합시켰다. 더불어 한족 출신의 명족(名族)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명원제 탁발사(明元帝 拓跋嗣, 391년 ~ 423년)는 북위의 제2대 황제(재위:409년 ~ 423년)이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391년, 탁발규(도무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유귀인(劉貴人)은 탁발사가 태자 되기 전, 북위의 관습에 따라 도무제에게 자살을 명령받았다. 이것을 안 탁발사는 한탄해 슬퍼해, 도무제에 반발한 적이 있었다.
409년, 아버지 도무제가 이복동생 탁발소(拓跋紹, 둘째 아들)에 의해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탁발소를 토벌해 즉위한다.
전란에 항상 치세를 보내, 423년, 송과의 전쟁 중에 사망했다.
태무제 탁발도(太武帝 拓跋燾, 408년 ~ 452년)는 북위의 제3대 황제(재위 : 423년 ~ 452년)이다.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그는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켜, 439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세는 크게 울려퍼졌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태무제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또한 남조 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고, 이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교단을 확립하고, 한인 관료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번째) 이 시기에 선비족의 한인동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최호는 한인 관료를 다수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하였으나, 강제적인 한족화는 선비족의 반감을 사서 450년에 주살되었다. 그후 북위에서 태무제가 암살당해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것이 문명황후(文明皇后)였다. 문명황후는 4대 문성제(文成帝)의 황후이자 5대 헌문제(獻文帝)의 적모(嫡母)로 466년 헌문제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문성제 탁발준(文成帝 拓跋濬, 440년 ~ 465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의 제4대 황제(재위:452년 ~ 465년).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452년, 종애(宗愛)가 문성제의 조부 태무제를 시해해, 다음에 황후 영으로, 황족인 동평림왕 탁발한(東平林王 拓跋翰, 탁발황의 이복동생)을 살해했다. 종애는, 문성제의 계부(막내 숙부)의 남안왕 탁발여(南安王 拓跋余)를 옹립 했다. 하지만, 8개월 후에는 탁발여도 종애에 배신하고, 친정(親政)할 수 있도록, 종애의 주살을 상의하였다. 그것이 민감하게 해, 선수를 친 종애에 의해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에 대해서, 서경의 육려 동림낭중(근위 단장) 유니(劉尼) 전중상서 원하(源賀)가 일어서, 종애를 살해해, 황태자 탁발황의 장남 탁발준을 옹립 했다.
즉위 후는 백성의 경제력 휴양을 옳다고 해, 개간 식산을 장려했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해, 사문의 담요에 명해 운강석굴의 축조를 시작했다. 담요5굴이라고 말해지는 거대한 불상중, 최대의 제20굴의 불상은 도무제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 여겨져 이하, 명원제·태무제·경목제·문성제의 모습을 본떴다고 여겨진다.(「황제즉여래」의 사상의 시작) 또, 담요의 상주에 의해 승려기호나 불도호를 마련했다.
헌문제 탁발홍(献文帝 拓跋弘, 454년 ~ 476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의 제5대 황제(재위:465년 - 471년). 묘호는 현조(顯祖). 문성제의 장남이다.
456년에 태자 되어 465년에 즉위 했다. 치세 초기는 어렸기 때문에, 승상 을혼(乙渾)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지만, 계모 풍태후(馮太后, 문명황후(文明皇后))가 을혼을 살해하여 칭제를 실시했다.
469년에 장남 탁발굉(효문제)을 태자로 정해, 친정을 개시한다. 삼등 구품의 제를 규정 국내의 통치를 정비해, 다음의 효문제의 전성기의 주춧돌을 쌓아 올렸다.
471년에는 양위 하여, 태상황제를 자칭 했다.
효문제 원굉(孝文帝 元宏, 467년 ~ 499년, 재위:471년 ~ 499년)은, 북위의 제6대 황제. 성은 탁발(拓跋), 후에 성을 고쳐서 원(元)씨로 바꾼다. 묘호는 고조(高祖)이다.
그의 시기 풍태후(馮太后)의 섭정때 유교적인 예법을 채용하고, 균전제을 시행하면서 삼장제를 확립했다. 490년 문명태황태후가 죽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었다.
493년 효문제는 수도를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 후 대대적인 한족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선비족의 복장과 언어를 금지하고, 황실의 성씨을 원씨(元氏)로 고치고,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모방한 북조 귀족제도을 만들었다. 선비족과 한족명족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한족 문화와 동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북위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일면 지금까지 내려온 선비족 고유의 소박한 상무정신은 사치와 문약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효문제의 시기에 모두 진압되었다.
하지만 효문제의 사후 반발이 더 거세져 어린 효명제(孝明帝)을 대신해 섭정한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혀, 국내에 도적이 봉기하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정책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은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북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진은 예전 수도 평성 주변을 방위하던 6곳의 군사 주둔지였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선비족의 유력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매우 중요시 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수도를 천도한 뒤 대우가 나빠지면서 주둔 군인의 불만이 쌓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육진의 난(六鎭之亂)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말기 523년에 발생한 반란을 말한다. 6진은 회삭진(懐朔鎮)・무천진(武川鎮)・무명진(撫冥鎮)・유현진(柔玄鎮)・옥야진(沃野鎮)・회황진(懐荒鎮) 등의 6곳으로 북위의 북쪽 국경지대에 설치된 기지을 말한다.
북위는 처음엔 자신들과 같은 북방의 이민족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수도 평성의 가까운 거리에 생명선을 긋고 북쪽의 수비를 중요시하며 요새를 쌓았다. 처음엔 선비족이나 흉노족의 유력 호족을 선택해 6진을 대표하는 북쪽을 경비하는 영민으로 이주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당연히 영민들은 댓가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의해 수도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이때부터 북쪽의 영민은 서서히 냉대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본래 명족출신이었던 그들을 [부호](府戶)라는 출세를 더이상 바라볼 수 없게 차단되는 호에 편제하고, 중앙으로부터 서임된 장관인 도대장(都大将)에게 착취당하는 몸이 되자 일거에 불평불만이 증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속에 축척된 불만이 폭발한 것은 523년 옥야진 백성의 거병이었다. 파육한발릉(破六韓抜陵)이 수령(首領)인 반란병들은 수비대장을 살해하였고, 이들의 움직임에 홀려 기타 여러 진들에도 전염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반란자체는 530년 장군 이주영이 진압했으나, 그 후 북위에 대한 양(남조)나라 군대의 침공이 있었고, 또한 국내는 정권을 장악한 이주씨 일파의 전횡이 일어나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여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6진의 유력자중에 6진의 난을 거쳐 북위의 멸망과정에서 권력중추에 올라선 자들도 있었다. 회삭진 출신으로 동위의 실권을 장악하여 북제의 기초를 닦았던 고환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또한 무천진 출신의 유력자는 무천진 군벌로 불리며 서위부터 북주, 수, 당나라까지 이르는 변천과정에서 각 왕조의 핵심적인 권력집단으로 군림하였다. 북주의 우문태, 수나라의 양견, 당나라의 이연등은 각 왕조의 창시자이며 무천진의 유력자 일족 출신이었다.
선무제 원각(宣武帝 元恪, 483년 ~ 515년, 재위:499년 ~ 515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의 제7대 황제. 묘호 세종(世宗)이며. 제7대 황제 효문제의 차남이다.
황태자였던 맏형 원순(元恂)은, 아버지 효문제가 추진하는 한화 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모의했다. 황태자의 자리를 폐위당하고, 아버지 효문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혹은 자살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원각이 대신 황태자가 되었다. 499년에 효문제의 죽음으로 따라 17세에 즉위 했다. 초기에는 종실에서 숙부의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헌문제의 둘째 아들로 효문제의 둘째동생), 서경령의 왕숙등의 보좌를 받았다고 한다.
재위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북방에서는 유연에 대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불교 신자였다. 점차 불교 신앙에 빠졌다.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다.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고 한다. 508년에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와 같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 낙양 교외에 매장해졌다.
효명제 원후(孝明帝 元詡, 510년 ~ 528년, 재위:515년 - 528년)은, 북위의 제8대 황제이다. 제7대 황제 선무제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호충화이다. 묘호는 숙종(肅宗).
어린 효명제(孝明帝)을 대신해 섭정한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혀, 국내에 도적이 봉기하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 정책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은 523년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6진은 원래 북위의 수도 평성을 지키던 6곳의 군사기지로 이곳엔 왕실 계통의 유력자들이 머물면서 국경을 지켰기에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급진적인 한화 정책과 수도의 이전으로 인해 대우가 소홀해 지면서 그 불만이 누적되어 6진의 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후계자를 세우지만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산서성 삭현 지방의 흉노족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 태후와 후계자를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하음의 변(河陰의 變)
효장제 원자유(孝莊帝 元子攸, 507년 ~ 530년, 재위: 528년 ~ 530년)는, 북위의 제9대 황제. 제6대 황제 효문제의 조카. 아버지는 팽성왕(효문제의 이복 막내 아우)으로, 팽성왕의 셋째아들. 어머니는 이부인(李夫人)이다. 묘호는 경종(敬宗)이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후계자를 세웠다. 그러나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산서성 삭현지방의 흉노족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 태후와 후계자를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하음의 변(河陰의 變)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晋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효장제 원자유(孝莊帝 元子攸, 507년 ~ 530년, 재위: 528년 ~ 530년)는, 북위의 제9대 황제. 제6대 황제 효문제의 조카. 아버지는 팽성왕(효문제의 이복 막내 아우)으로, 팽성왕의 셋째아들. 어머니는 이부인(李夫人)이다. 묘호는 경종(敬宗)이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후계자를 세웠다. 그러나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산서성 삭현지방의 흉노족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 태후와 후계자를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하음의 변(河陰의 變)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晋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절민제 원공(節閔帝 元恭, 498년? ~ 532년, 재위:531년 ~ 532년)은, 북위의 제11대 황제이다.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晋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효무제 원수(孝武帝 元脩, 510년 ~ 534년, 재위:532년 ~ 534년)은, 북위의 제13대(최후)의 황제. 자는 효칙(孝則). 제7대 황제 선무제의 조카.「북사」에서는 시호는 효무제(孝武帝)이지만, 「위서」에서는 출제(出帝)로 하고 있다.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晉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고환은 이주씨 일당을 각지에서 격파하여 정권은 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효무제는 이번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 낙양을 탈출해 장안(長安)으로 도망쳐 우문태(宇文泰)에게 의지하자, 고환은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고 534년 수도를 업으로 옮겼다. 같은 해 우문태는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文帝)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고환(高歡, 496년 ~ 547년)은 중국의 북조 북제의 기초를 쌓아 올린 인물. 자신은 제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인 고양(문선제)이 북제를 건국한 후에, 묘호를 고조(高祖), 시호를 신무제(神武帝)로 추증되었다.
동위의 실권자였으며, 북제(北齊)의 사실상의 건국자이다. 발해군(渤海郡) 군수(郡蓨)-현재 하북 경현(景縣)-사람으로, 그 근방에 있던 회삭진(懷朔鎭: 北魏六鎭의 하나, 歸綏 북서부)에 있던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북위 말에 육진(六鎭)의 난에 가담했으나, 나중에 항복하여 이주영(爾朱榮)의 부장(部將)이 되었으며, 그가 죽고 난 후에는 하북(河北)로 나와 발해군의 호족(豪族) 고건(高乾) 등과 손을 잡고 자립하였다. 이주(爾朱) 씨 일족의 내분을 틈타 그들의 근거지인 산서를 차지하였으며, 효무제(孝武帝)를 세워 북위의 실권을 쥐었다. 그러나 효무제가 장안(長安)의 우문태(宇文泰)에게 가서 의탁하자, 동위의 효정제(孝靜帝)를 세워 업(鄴)으로 천도해, 동위의 실권자가 되었다.
북위가 동서로 분열되자 동위(東魏)의 효정제의 궁정에서 승상을 지냈다. 고환은 북위의 화화정책(華化政策)에 불만을 가진 군벌(軍閥)을 기반으로 태행산맥 동쪽의 산동, 하북을 지배하였고, 서위(西魏)의 우문태와 대립하였다.
고환은 하루는 아들들의 재주를 시험할 목적으로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는 어지럽게 뒤엉킨 삼실 한뭉치씩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풀도록 하였다. 고환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한올 한올씩 뽑아내느라 진땀을 흘렸으나, 둘째 아들인 고양(高洋)은 칼 한자루를 들고 와 삼실을 베어버리며 어지러운 것은 베어 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고환은 고양이 장차 큰일을 할 인물이라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고양은 뒤에 효정제를 몰아내고 북제의 문선제(文宣帝)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백성들을 탄압하는 폭군이 되었다.
우문태(宇文泰, 507년 ~ 556년)는 북위, 서위의 정치가. 북주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서, 559년에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제(文帝)로 추증되었다.
우문태는 선비족으로 출신지는 무천진(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던 북위의 군사기지)이다. 우문태는 처음 북위 6진의 난에 참가하였다가 하발악(賀拔岳)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하발악의 사후, 하발악이 가지고 있던 기반으로 관중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534년 북위의 대승상 고환(高歡)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북위의 효무제(孝武帝)는 관중의 장안(長安)으로 도망쳐 당시 관서 대도독이었던 우문태의 보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여 고환은 업(鄴)에서 북위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여 동위가 되었고, 우문태가 문제를 옹립하여 서위가 되었다. 이 때, 우문태는 서위의 대재상으로 승진했다.
우문태는 새롭게 24군제를 창시했는데, 이 제도는 군의 조직을 주국 → 대장군 → 개부(開府)의 계열로 내려오게 한뒤, 그 정점에 우문태가 있게 한 것이다. 이 제도는 후에 부병제(府兵制)의 근간이 되었다.
서위는 우문태가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황제는 우문태의 꼭두각시였다. 그래서 비록 국력은 동위에 비해 떨어졌지만 그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여러차례 동위를 압도하는 전과를 올릴 수가 있었다.
553년, 남조 양나라가 후경(後景)의 난에 의해 혼란해진 사이를 틈타 사천지방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강릉(江陵)을 함락하여 양나라의 원제(元帝)을 자살하게 한 뒤, 양나라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찬(蕭餐)을 보호하고 강릉으로 복귀시켜 주인으로 삼았다. 이 나라가 바로 후량(後梁)이었으며, 이를 통해 남조에 타격을 주는 데도 성공한다.
우문태의 사후 대재상을 물려받은 우문각(宇文覺)은 556년 서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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