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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2 (북조:동위,서위,북제,북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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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2 (북조:동위,서위,북제,북주)

두바퀴인생 2010. 3. 23. 05:45

 

 

중국의 역사 42 (북조 :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동위

 

동위(東魏, 534년 ~ 550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가 분열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북위의 낙양(洛陽)부터 동쪽 지역을 영토로 갖고 있다. 국호는 위나라이지만, 같은 북위에서 분열한 서위(西魏)와 구분하기 위해 동위란 호칭을 사용한다.

 

534년 대승상 고환(高歡)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북위의 효무제(孝武帝)는 낙양에서 도망쳐 관중의 장안(長安)으로 도망쳐 우문태(宇文泰)에게 보호를 받았다. 고환은 곧이어 업(鄴)에서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였다. 이로써 동위가 건국하게 되었다. 한편 우문태와 효무제는 서로 사이가 나빠져, 효무제를 독살한 우문태는 문제를 옹립하고 이것이 바로 서위가 되었다.

 

동위는 고환의 전횡이 계속되면서 효정제는 고씨일족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국력은 서위에 비해 우세했지만 여러 차례 군사적 패배를 겪었다. 547년 고환이 죽자 장남 고징(高澄)이 대승상의 지위을 물려받았다.

 

이윽고 후경(後景)이 남조 (梁)나라에 항복해 동위를 배신하자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또한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고, 후경을 고립상태로 몰아넣었다.

 

549년 고징은 상국(相國)에서 올라 제나라 왕에 봉해졌다. 고징은 주벽에 의한 포악한 행동을 자주 해서, 난경(蘭京)에게 살해되었다. 고환의 차남 고양(高洋)이 상국-제왕을 물려받아 550년 효정제로부터 선양을 받고 북제를 건국하면서 동위는 여기서 멸망하게 된다.

 

역대 황제

동위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문헌황제
(文獻皇帝)
(동위 효정제 추숭)
원역(元懌) - -
- - 문선황제
(文宣皇帝)
(동위 효정제 추숭)
원단(元亶) - -
제1대 - 효정황제
(孝靜皇帝)
원선견(元善見) 천평(天平) 534년 ~ 537년
원상(元象) 538년 ~ 539년
흥화(興和) 539년 ~ 542년
무정(武定) 543년 ~ 550년
534년 ~ 550년

 

 

효정제(孝靜帝, 원선견, 524년 ~ 551년)은 동위의 황제(재위:534년 ~ 550년). 성은 원(元), 이름는 선견(善見). 북위 효문제의 증손으로, 조부는 원역(元懌, 효문제 넷째아들). 원단(元亶)의 적자로서 태어난다.

 

효무제가 달아나자 고환은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고 534년 수도를 업(鄴)으로 옮겼다. 이로써 동위가 건국하게 되었다.

같은 해 우문태와 효무제는 서로 사이가 나빠져 우문태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文帝)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동위, 서위라 부른다.

 

동위는 고환의 전횡이 계속되면서 효정제는 고씨일족의 꼭두깍시에 불과했다.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어,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이 재상이 되어 550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북제(北齊)을 건국했다.

 

 

 

서위

 

서위(西魏 535년 ~ 556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가 분열하여 건국한 나라이다. 관중지방(關中;현재 섬서성(陝西省))을 중심으로 영토를 가지고 있다. 국호는 위나라지만 같은 북위로부터 분열된 동위와 구별하기 위해 서위라고 부른다.

 

534년 대승상 고환(高歡)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북위의 효무제(孝武帝)는 낙양에서 도망쳐 관중으로 가서 우문태(宇文泰)에게 보호를 받았다. 황제가 없어진 고환은 곧이어 업(鄴)에서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였다. 이로써 동위가 건국하게 되었다. 한편 효무제를 보호하던 우문태는 효무제와 서로 사이가 나빠져,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니 이것이 바로 서위가 되었다.

 

서위는 우문태가 실권을 장악하여 황제는 우문태의 꼭두각시였다. 국력은 동위에 비해 떨어졌지만 군사적으로 여러차례 동위를 압도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남조 (梁)나라가 후경(後景)의 난에 의해 혼란해진 사이를 틈타 사천지방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다. 공제(恭帝)때 강릉(江陵)을 함락하여 양나라의 원제(元帝)을 자살하게 했다. 양나라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찬(蕭餐)을 보호하여 강릉으로 복귀시켜 자살한 원제를 대신해 양나라의 주인으로 삼으니 이것이 후량(後梁)이었다. 우문태의 사후 뒤를 계승한 우문각(宇文覺)은 556년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를 건국하였다. 이로써 서위는 멸망하였다.

 

역대 황제

서위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문경황제
(文景皇帝)
(서위 문제 추숭)
원유(元愉) - -
제1대 - 문황제
(文皇帝)
원보거(元寶炬) 대통(大統) 535년 ~ 551년 535년 ~ 551년
제2대 - 폐황제
(廢皇帝)
원흠(元欽) - 551년 ~ 554년
제3대 - 공황제
(恭皇帝)
원곽(元廓) - 554년 ~ 556년

 

 

북제

 

북제(北齊, 550년 ~ 577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한족화한 선비족 고씨(高氏)에 의해 건국한 왕조이다. 국호는 제이지만 남조의 와 구별하기 위해 북제라고 불리었다.

 

창시자인 고환은 북위 6진의 난에 가담하여 선비족의 부족중 해(奚)족의 족장 이주영(爾朱榮)에게 귀순하여 커다란 명성을 날렸다. 이주영이 국정을 농단하다 효장제(孝莊帝)원자유(元子攸)에게 살해당하자 자립하여 이주씨 일족을 멸망시켰다. 효무제(孝武帝) 원수(元脩)를 옹립하고 승상이 되어 북위의 실권을 장악해 권력을 휘둘렀다.

후에 효무제는 그를 피해 서쪽의 군벌 우문태(宇文泰)를 의지했다. 이윽고 고환은 효정제(孝靜帝)원선견(元善見)을 옹립하고 수도를 업으로 옮겨 동위을 건국하여 서위와 다투었다. 547년 고환이 죽자 그의 아들 고징이 지위를 계승하자 그 직후 하남의 태수였던 후경이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을 갖고 남조 나라에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후경과 양나라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양나라가 동위와 수교를 맺자 위기에 몰린 후경은 난을 일으켜 양나라을 멸망시켰다.

 

후경의 모반을 꺾어버린 고징이었으나, 주벽에 의한 포악한 행동으로 550년 양나라로부터 투항한 난경에 의해 살해되었다. 고징의 동생 고양이 뒤를 계승하여 난을 수습하고 그 여세를 몰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당시 화북은 군사력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고, 경제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북제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돌궐과 결탁해 거란을 제압하고 북주군을 여러번 격퇴하였다.

 

고씨 가문은 주벽, 기행이 많아 피를 부르는 사건이 많은 반면, 대부분 우수한 군사적 재능을 타고 났기에 사천성을 병합하여 경제력을 강화한 북주에 대해 항상 군사적 우위를 지켰으나, 후주 고위(高緯)는 소인배를 신임하여 그들의 참언으로 인해 북제의 군사력을 지탱하던 곡률광, 난릉왕등의 명장들을 처형하는등의 실정을 거듭하다가, 577년 북주에게 멸망당했다.

 

역대 황제

북제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문목황제
(文穆皇帝)
(북제 문선제 추숭)
고수(高樹) - -
- 북제 고조
(北齊高祖)
(북제 태조<北齊太祖>,
북제 문선제 추숭)
신무황제
(神武皇帝)
(헌무황제<獻武皇帝>)
고환(高歡) - -
- 북제 세종
(北齊世宗)
(북제 문선제 추숭)
문양황제
(文襄皇帝)
고징(高澄) - -
제1대 북제 현조
(北齊顯祖)
(북제 위종<北齊威宗>)
문선황제
(文宣皇帝)
(경열황제<景烈皇帝>)
고양(高洋) 천보(天保) 550년 ~ 559년 550년 ~ 559년
제2대 - 폐황제
(廢皇帝)
(제남민도왕<濟南閔悼王>)
고은(高殷) 건명(乾明) 560년 559년 ~ 560년
제3대 북제 숙종
(北齊肅宗)
효소황제
(孝昭皇帝)
고연(高演) 황건(皇建) 560년 ~ 561년 560년 ~ 561년
제4대 북제 세조
(北齊世祖)
무성황제
(武成皇帝)
고담(高湛) 태녕(太寧) 561년 ~ 562년
하청(河淸) 562년 ~ 565년
562년 ~ 565년
제5대 - 안황제
(安皇帝)
(후주<後主>)
고위(高緯) 천통(天統) 565년 ~ 569년
무평(武平) 570년 ~ 576년
융화(隆化) 576년
565년 ~ 576년
비정통 - -
(안덕왕(安德王>)
고연종(高延宗) 덕창(德昌) 576년 576년
제6대 - 순황제
(順皇帝)
(유주<幼主>)
고항(高恒) 승광(承光) 577년 577년

 

고징(高澄, 521년 ~ 549년)은 오호십육국시대 동위의 실권자. 후에 북제의 고양이 세종 문양제(世宗 文襄帝)로 추증한다.

 

547년 고환이 죽자 그의 아들 고징이 대승상의 지위를 계승하자 그 직후 하남의 태수였던 후경이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갖고 남조 양나라에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윽고 후경(後景)이 남조 양(梁)나라에 항복해 동위를 배신하자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양나라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또한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고, 후경을 고립 상태로 몰아 넣었다. 후경은 난을 일으켜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549년 고징은 상국(相國)에서 올라 제나라 왕에 봉해졌다. 후경의 모반을 꺾어버린 고징이었으나, 주벽에 의한 포악한 행동을 자주 해서, 난경(蘭京)에게 살해되었다.

 

고환의 차남이며 고징의 동생 고양(高洋)이 상국-제왕을 물려받아 난을 수습하고 그 여세를 몰아 550년 효정제로부터 선양을 받고 북제를 건국하면서 동위는 여기서 멸망하게 된다.

 

고양(高洋, 529년 ~ 559년, 재위:550년 - 559년)은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의 초대 황제. 묘호는 현조(顯祖), 고조(高祖)이며, 시호는 문선제(文宣帝)이다.

 

그는 고환의 차남으로 그는 형 고징의 뒤를 계승하여 난을 수습하고 그 여세를 몰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당시 화북은 군사력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고, 경제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북제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돌궐과 결탁해 거란을 제압하고 북주군을 여러 번 격퇴하였다. 처음에는 고조(高祖)라는 묘호를 올렸다.

 

고담(高湛, 537년 ~ 568년, 재위:561년 ~ 565년)은,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무성제(武成帝)이다. 고환의 9남으로, 생모는 누비(婁妃). 형제로는 고징, 고양, 고연등이 있었다.

 

538년, 장광군공(長廣郡公)에 봉해졌다. 550년, 북제가 건국되면서, 장광왕(長廣王)이 되었다. 서경령이 되어, 곧 사도를 겸했다. 559년, 문선제가 사망해, 고은(高殷)이 즉위 하면서, 태위가 되었다. 560년, 대사마·병주자사가 되고, 효소제(孝昭帝)의 정권 탈취에 협력해, 태부가 되었다. 561년 11월, 효소제가 죽자 제위에 올라 진양의 남궁에서 즉위 했다.564년, 그러나, 제위에 오른 다음은 호화롭게 지네고, 백성을 오로지에 부역에 몰고, 폭군의 전형적인 형태가 되었다. 565년 4월, 아들인 고위에 제위를 양보해, 태상황제로서 정무를 보았다. 568년 12월, 업궁의 건수당에서 사망했다.

 

고장공(高長恭)이나 곡률광(斛律光)이라고 하는 명장등이 건재했지만, 화사개(和士開)등의 간신을 임용해 그 전횡을 허락했다. 이것이 북제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북주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북주(北周, 556년~581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당시 선비족 우문씨(宇文氏)가 건국한 왕조이다. 국호는 "주(周)"였지만 기원전 11세기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서 "북주"라고 부른다.

 

실질적인 창시자 우문태(宇文泰)는 북위 6진의 난에 참가한 뒤 하발악(賀拔岳)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하발악이 죽자 그가 가지고 있던 기반을 계승한 뒤 관중 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이에 효무제(孝武帝)가 북위의 재상 고환(高歡)으로부터 도망쳐 그에게로 왔다. 그 후 고환이 동위를 건국하자 우문태도 사이가 나빠진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文帝)을 옹립하니 이것이 서위가 되었다. 그 후, 우문태는 서위의 대재상으로까지 승진했다.

 

우문태의 사후, 대재상을 물려받은 우문각(宇文覺)은 557년 서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를 건국했으나, 실권은 우문태의 조카였던 우문호(宇文護)가 쥐고 있었다. 우문호는 초대 효민제부터 3대 무제까지 세우며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우문호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제(武帝)가 우문호를 주살하고, 577년 고씨가 세운 북제을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 했다. 또한 무제는 폐불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을 제2차 삼무일종의 폐불이라고 부른다.

 

4대 선제는 온갖 포악무도한 짓을 자행했기 때문에,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에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수국공 양견의 힘이 강해졌으며 선제가 죽자 양견은 아예 외척이라는 명목으로 섭정이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실권이 사라지게 되었다. 581년 5대 정제는 양견에게 선양하니 수나라가 세워지고, 북주는 멸망하게 되었다. 북주의 황족인 우문씨는 전 황제 정제를 포함한 다수가 양견에 의해 모두 학살 당해 단절되었다고 전해진다.

 

북주는 주례에 기초해서 관제와 부병제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대총재, 대사도, 대종백, 대사마, 대사구, 대사공의 6관의 관제는 3성 6부라고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유교 경전에 있는 주례에 기초한 관제을 사용하고, 옛 주나라의 국호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주는 북위 효문제 이래의 한화정책을 반대하고, 선비족 고유의 풍습으로 회귀함을 표방하였다.

 

북주는 군의 요직으로 8주국 - 12대장군을 배치했는데, 이들 20명은 우문태의 출신지인 무천진(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에 있던 북위의 군사기지) 출신자가 많았다. 이들 밑에 24개부을 설치해, 이들 24군단이 부병제 군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군사 제도는 수나라 양씨가 12대장군이었고 당나라 이씨가 8주국의 가문이었던 이유도 있어서 그대로 수나라, 당나라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왕조의 의례 등을 선비족풍으로 행했고, 공용어도 한어가 아닌 선비어를 사용했으며 성씨도 원래의 선비족 성씨인 탁발씨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행했다. 거기에 영내의 한인들에 대해서도 선비풍의 성씨로 고칠것을 강요했다.

 

역대 황제

북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덕황제
(德皇帝)
(북주 명제 추숭)
우문굉(宇文肱) - -
- 북주 태조
(北周太祖)
(북주 명제 추숭)
문황제
(文皇帝)
우문태(宇文泰) - -
제1대 - 효민황제
(孝閔皇帝)
우문각(宇文覺) - 557년
- - 천왕
(天王)
우문육(宇文毓) - 557년 ~ 559년
제2대 북주 세종
(北周世宗)
명황제
(明皇帝)
우문육(宇文毓) 무성(武成) 559년 ~ 560년 559년 ~ 560년
제3대 북주 고조
(北周高祖)
무황제
(武皇帝)
우문옹(宇文邕) 보정(保定) 561년 ~ 565년
천화(天和) 566년 ~ 572년
건덕(建德) 572년 ~ 577년
선정(宣政) 578년
560년 ~ 578년
제4대 - 선황제
(宣皇帝)
우문윤(宇文贇) 대성(大成) 579년 578년 ~ 579년
제5대 - 정황제
(靜皇帝)
우문연(宇文衍) 대상(大象) 579년 ~ 580년
대정(大定) 581년
579년 ~ 581년

 

우문태(宇文泰, 507년 ~ 556년)는 북위, 서위의 정치가. 북주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서, 559년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제(文帝)로 추증되었다.

 

우문태는 선비족으로 출신지는 무천진(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던 북위의 군사기지)으로 처음 북위 6진의 난에 참가하였다가 하발악(賀拔岳)에게 귀순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하발악의 사후, 하발악이 가지고 있던 기반으로 관중지방에서 세력을 과시했다.

 

534년 북위의 효무제가 북위의 대승상 고환(高歡)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후 관중의 장안(長安)으로 도망쳐 당시 관서 대도독이었던 우문태의 보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여 고환은 업(鄴)에서 북위 효정제(孝靜帝)을 새로 옹립하여 동위가 되었고, 우문태가 문제를 옹립하여 서위가 되었다. 이 때, 우문태는 서위의 대재상으로 승진했다.

 

우문태는 새롭게 24군제를 창시했는데, 이 제도는 군의 조직을 주국 → 대장군 → 개부(開府)의 계열로 내려오게 한뒤, 그 정점에 우문태가 있게 한 것이다. 이 제도는 후에 부병제(府兵制)의 근간이 되었다.

 

서위는 우문태가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황제는 우문태의 꼭두각시였다. 그래서 비록 국력은 동위에 비해 떨어졌지만 그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여러차례 동위를 압도하는 전과를 올릴 수가 있었다.

 

553년, 남조 양나라가 후경(後景)의 난에 의해 혼란해진 사이를 틈타 사천지방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강릉(江陵)을 함락하여 양나라의 원제(元帝)을 자살하게 한 뒤, 양나라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찬(蕭餐)을 보호하고 강릉으로 복귀시켜 주인으로 삼았다. 이 나라가 바로 후량(後梁)이었으며, 이를 통해 남조에 타격을 주는 데도 성공한다.

 

우문태의 사후 대재상을 물려받은 우문각(宇文覺)은 556년 서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주을 건국했다.

 

 

우문각(宇文覺, 542년 ~ 557년)은 중국 남북조시대 북주의 초대 황제(재위:557년). 시호는 효민제(孝閔帝)이다. 우문태의 셋째 아들이다. 북주의 창시자로 여겨지지만, 우문호의 괴뢰군주로서의 존재였다.

 

556년, 우문태 사후 우문호(宇文護)가 실권을 장악하고 우문각(宇文覺)은 대재상을 물려받았다.557년, 서위의 황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고 북주를 건국한다. 그 해에 조정을 장악한 우문호를 제거하고자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우문호에게 시해된다.

 

우문육(宇文毓, 534년 ~ 560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주의 제 2대 황제(재위:557년 ~ 560년).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시호는 명제(明帝)이다. 우문태의 서장자로, 아명은 통만돌(統萬突)로 불리지만, 이것은 영희 3년(534년), 우문태가 하주의 통만성에 머물었을 때에 출생 했던 것에 유래한다. 그는 효민제를 시해한 우문호가 세웠다. 그렇지만 그 역시 우문호가 독살한다.

 

 

우문옹(宇文邕, 543년 ~ 578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주의 제 3대 황제(재위:560년 ~ 578년)로, 묘호는 고조(高祖)이며, 시호는 무제(武帝)이다.

 

560년, 명제를 시해한 우문호에 의해 황제로 등극했다. 그러나 나중에 우문호를 제거한 뒤 572년 친정을 시작한 무제는 거대한 권력, 재산, 토지를 소유한 도교 불교를 탄압해 재산을 몰수하고, 일반 승려와 도사를 병사로 강제 징병했다.

 

한편으로 유교, 불교, 도교를 모아 3교의 연구기관으로 통도관을 설치해 우수한 승려나 도사을 학사로서 수용하여 폐불을 단행하였다. 이를 종교계에서는 2번째 '삼무일종의 폐불'이라고 한다.

 

무제는 575년 북제를 공격해서 577년 북제를 멸망시킨 뒤,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남조)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578년 병사했다.

 

 

우문윤(宇文贇, 559년 ~ 580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주의 제4대 황제(재위:578년 ~ 579년). 무제의 장남이자, 정제의 아버지이다. 시호는 선황제(宣皇帝).

 

황태자였지만, 주위로부터 그 자질이 의문시되고 있고, 부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 성장했다. 그 내용은 지팡이로 격렬하게 구타하는 등 어려운 것으로, 부친이 요절했을 때에 지팡이의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그 죽음이 너무 늦다고 한탄했다고 사서에 남아 있다.즉위 후 우선 착수한 것이, 황실과 군부의 중진으로 북제 공략의 공적자인 제왕 헌(齊王憲)의 주살이다. 무제시대의 옛 신하를 숙청해, 대규모 궁전을 축조 하는 등 사치를 다해 무제가 예상한 대로 어리석은 군주로서의 시정이 개시된다.

 

579년, 7세의 아들 우문연에 양위. 스스로는 천원황제로 자칭해, 천원황후(天元皇帝, 양황후), 천황후(天皇后), 천우황후(天右皇后), 천좌황후(天左皇后), 천중대황후(天中大皇后)의 5명을 맞아들이고, 주색에 매달렸다가 그 다음 해에 사망했다.

 

주색 유흥이기 때문에 정치를 황후의 부친인 양견에게 위임 해, 양견의 전제를 불렀던 것이 북주의 멸망의 요인이 된다.

 

우문연(宇文衍(후에 우문천(宇文闡)으로 개명), 573년 ~ 581년)은 남북조 시대 북주의 제5대 황제(재위:579년 ~ 581년). 시호는 정제(静帝)이다.

 

573년 2월, 장안의 동궁에서 태어났다. 579년 1월, 노왕(魯王)으로 봉해졌다. 그 다음에 황태자가 되었다. 2월, 아버지 선제로부터 불과 7세에 양위 되었다. 선제가 천원황제(天元皇帝)를 칭했기 때문에, 정제는 정양궁(正陽宮)을 칭했다. 어렸기 때문에, 양황후의 아버지인 승상 수국공의 양견(楊堅)이 보필 했다.

 

선제시대에 이미 약체화 하고 있던 북주이지만, 정제의 시대에는 신주자사 이혜(申州刺史 李慧)와 황족 소국공 우문주(邵國公 宇文冑)등이 군사를 일으켜서, 국내에 혼란을 가져왔다.

 

사태를 수습할 수 없는 정제는, 581년 2월에 수왕(隋王) 양견에게 제위를 선양 해, 북주는 멸망 했다. 퇴위 후의 정제는 개국공(介國公)에 봉해졌지만, 5월에 양견에 의해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