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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4 (수나라) 본문
중국의 역사 44 (수나라)
수나라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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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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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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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수(隋, 581년 ~ 618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서진이 멸망한 후 분열되었던 중국을 약 300년만에 재통일한 왕조이다. 그러나 2대 황제 양제 때 폭정(暴政)으로 인해 멸망하고, 그후 약간의 혼란기를 거쳐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 하였다. 수도는 대흥성(大興城: 현재의 시안(長安))이었다.
양씨는 북위(北魏)초기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하였고, 양견(楊堅)의 아버지 양충(楊忠)에 이르게 되었다. 무천진은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을 북쪽의 유연(柔然)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던 군사기지중 하나였다. 북위 황실인 탁발씨(拓跋氏)를 원씨(元氏)로 바꾸는 등 선비풍(鮮卑風)의 이름을 중국풍으로 고치는 정책이 진행되었으나, 북주시대에 이르러 이에 반발하여 이것을 다시 선비풍으로 고쳤다. 이때 한인이었던 양씨도 보육여(普六茹)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보육여는 선비어로 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실제 양씨는 선비족 출신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기에, 본래 성씨가 보육여라 생각되어, 북위의 한화정책시에 내려진 성씨가 양씨라는 견해도 있다.
수나라 건국
양견의 부친 양충은 북위가 서위(西魏), 동위(東魏)로 분열될 때(후에 각각 북주(北周), 북제(北斉)로 교체되었다.) 우문태(宇文泰)를 따라 서위을 건국하는 데 공헌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수국공(随国公)의 지위를 얻었다. 568년 양충이 죽자, 양견이 대장군-수국공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북주의 무제(武帝)는 숙적 북제를 멸망시키고, 뒤이어 남쪽의 진(陳)을 멸망시키기에 앞서 북쪽의 돌궐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중 576년에 병사(病死)했다.
무제의 뒤를 계승한 선제(宣帝)는 기괴한 인물로 5명의 황후를 가졌다. 그중 한명이 양견의 장녀였던 여화(麗華)였고, 여화는 우문 (宇文闡)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후에 정제(静帝)였다.
선제의 기행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재위 8개월 만에 퇴위하며 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를 칭하며 정무를 내팽개쳤기에 정제의 뒤를 보살피던 양견에 대한 성망(聲望)을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580년 선제가 죽자 양견은 섭정으로써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무천진 군벌내 실력자들은 양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규모로 일어난 것이 위지동(尉遅迴)에 의한 것으로 한때 양견이 장악한 관중지역 이외 모든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으나, 양견은 교묘하게 이것을 각개격파하여 북주내에서 패권을 확고히 다졌다.
그해말에 수국공에서 수왕(隋王)의 자리에 오른 뒤, 이윽고 다음해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양견은 제위에 오른 뒤 문제(文帝)라는 시호를 사용하였다.
중국 통일
이미 북주 무제에 의해 중국 통일에 대한 진행이 이루어진적이 있었으나, 신중한 문제 양견은 세밀하게 준비를 진행해 나아갔다.
즉 북쪽의 돌궐에 대해선 장성(長城)을 복구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그리고 회하(淮河)와 장강(長江)을 연결하는 한구(邗溝)를 개착(開鑿)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뒤, 곧이어 남조(南朝) 양(梁)으로부터 분열되어, 북조(北朝)의 괴뢰정권이라 할 수 있던 후량(後梁)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588년 문제는 기어코 진나라에 대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楊廣; 후에 양제(煬帝))이었고, 51만 8천이라는 과장되었다고 생각되는 대군 앞에 다음해 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은 손쉽게 함락되어, 진나라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우물에 숨어 있다가 사로잡혔다. 이로써 서진 멸망 이후, 혹은 더 넓게 보면 184년 황건적의 난 때부터로 보면 약 405년이라는 기나긴 분열시대가 종결되었던 것이다.
개황의 치(開皇之治)
문제는 즉위한 직후부터 내정면에서 다음과 같이 개혁을 진행해 나아갔다.
《주례》(周禮)와 선비 회복정책을 진행하던 북주의 노선을 중지하고, 북제의 제도를 참조하여 개혁을 진행해 나아갔다. 581년 새로운 율령인 개황율령(開皇律令)을 제정하였는데, 이 율령에서는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법을 간소화시켜 알기 쉽게 고친것으로 후에 당의 율령도 또한 이 개황율령을 답습한 것이었다.
관리제도도 대개혁을 시행해, 최고기관으로써 상서성(尚書省), 문하성(門下省), 내사성(内史省;당나라의 중서성(中書省)의 3성을 설치하고, 상서성 아래에 문서행정기관인 6부(六部), 말하자면 인사담당인 이부((吏部), 재정담당인 도지부(度支部), 의례(儀禮)담당인 예부(禮部), 군사담당인 병부(兵部), 법무담당인 도관부(都官部), 토목담당인 공부(工部) 등 6개였다. 그 아래에 실무기관인 9사(寺), 또 이것을 별도로 감찰하고 감독하는 기관인 어사태(御史台)를 설치했다.
지방에 대해서도 이때까지 쓰여오던 주(州)->군(郡)->현(縣)이란 구분을 없애고, 주->현이란 2단계로 재편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치적중 가장 뛰어난 것이라 칭해지는것이 있었으니 바로 과거(科挙;정식으로는 공거(貢挙)의 실행이었다.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때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에 의해 관리 임명권이 귀족세력의 손에 있었다. 과거는 지방호족의 세습적인 임관이 아니고, 실력시험의 결과로 관리의 임용을 결정한다는 매우 개방적인 수단으로 이것을 이용하여 관리 임명권을 황제의 손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이점도 노렸다.
이렇게 문제에 의해 정비된 여러 제도는 거의 대부분이 후에 당나라가 물려받아, 당나라 300년의 역사를 지탱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치세를 그 원호(元號)에 의거해 개황의 치 라고 불렀다.
양제의 치세
문제의 황후였던 독고황후는 매우 강한 성격의 여성으로 문제에게 [자신 이외의 여성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라고 서약을 맺게 하였다. 이것은 당시 황제로써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거기에 독고황후는 문제 주위를 엄격하게 감시하여 문제가 어떤 여성을 가까이 하는지를 경계하였다.
문제와 독고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양용(楊勇)이 처음엔 황태자가 되었으나, 양용은 놀기를 좋아하고, 여색을 즐겼기에, 검소함을 즐기는 문제, 정조를 중시한 황후 양쪽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그를 대신해 양친의 기분에 맞게 비위를 맞춘 차남 양광이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604년 문제가 황태자로 책봉한 양광은 문제의 후궁 겁탈 문제로 미움을 받자 문제를 시해하고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양제였다. 양제는 즉위 후 즉시 동생들을 계략으로 하나하나 살해하여 라이벌을 없앴다. 이 때문에 문제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밀리에 부쳤으나 양제의 모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생겨났다.
양제는 검소함을 즐기던 문제와는 대조적으로 사치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기피하던 대규모의 토목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진행하여 완성시켰다. 주요한 것으로는 수도 대흥성 건설과 대운하(大運河)를 대폭으로 연장하여 하북에서 강남에까지 서로 연결하게 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문제가 1차 30만 대군으로 원정하였다가 전멸하고 실패한 고구려 원정을 3번에 걸쳐 실시하였으나, 이 역시 모두 실패로 끝났다.
여러차례 진행된 대규모 토목과 고구려 원정 등 군사행동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제2차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일어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반란이 확대되었다. 양제 자신은 순례행차중에 강도(江都)에 머물면서 반란진압 지휘를 맡았으나, 이미 반란은 전국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반란이 확대되면서 패권을 잡으려는 군웅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양현감의 참모를 맡았던 이밀(李密)은 북주 8주국(八柱國) 이필(李弼)의 손자로써 관롱귀족집단(関隴貴族集団)중에서도 상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양현감의 전사후 낙구창(洛口倉)이란 수나라의 거대 식량저장기지를 손안에 넣는 데 성공하여 대규모의 백성을 모았다.
이밀과 격렬하게 항쟁한 사람은 서역출신으로 수나라 장군을 지냈던 왕세충(王世充)이었다. 고구려 원정군에서 탈주하여 같은 탈주병들을 모아서 하북에서 세력을 키운 인물은 두건덕이 있다. 그리고 수나라의 태원(太原)태수로 있던 이연(李淵;후에 당나라 고조)은 대흥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 대왕(代王) 양유(楊侑;공제유(恭帝侑)를 옹립했다.
잇달은 패전 보고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술에 취해 듣지 않다가, 618년 이에 불만을 품은 근위군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근위군단은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주도하에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옹립하고 북쪽으로 귀환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도중에 두건덕의 군에게 대패하여 소멸하였다.
양제의 죽음을 들은 이연은 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한다. 같은 시기 양제의 죽음을 알게되어 618년 낙양에 있던 월왕(越王) 양동(楊동)은 신하들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나, 619년 왕세충에게 찬탈되어 수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양제의 양(煬)의 한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한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수나라 멸망 연도에 대해서
이 기사에 따르면 수나라 멸망 연도는 619년이라 할 수 있으나, 문헌에 따르면 수나라 멸망은 618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수나라 멸망 시점을 어느 시기로 보는냐에 따라 다르다. 당나라가 편찬한 정사인 《수서》 등에서는 당나라가 수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시점인 2번째 설을 취했으나, 이 문장에는 3번째 설을 취했다.
- 양제의 죽음 (618년)
- 공제유가 이연에게 선양(618년)
- 공제동이 왕세충에게 선양(619년)
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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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 태조 (隋太祖) (수 문제 추숭) |
무원황제 (武元皇帝) |
양충(楊忠) | - | - |
제1대 | 수 고조 (隋高祖) |
문황제 (文皇帝) |
양견(楊堅) | 개황(開皇) 581년 ~ 600년 인수(仁壽) 601년 ~ 604년 |
581년 ~ 604년 |
제2대 | 수 세조 (隋世祖) |
양황제 (煬皇帝) (명황제<明皇帝>, 민황제<閔皇帝>) |
양광(楊廣) | 대업(大業) 605년 ~ 618년 | 604년 ~ 618년 |
- | 수 세종 (隋世宗) (수 황태주 추숭) |
효성황제 (孝成皇帝) (원덕태자<元德太子>) |
양소(楊昭) | - | - |
제3대 | - | 공황제 (恭皇帝) |
양유(楊侑) | 의녕(義寧) 617년 ~ 618년 | 617년 ~ 618년 |
비정통 | - | - (황태주<皇泰主>, 공황제<恭皇帝>, 월왕<越王>) |
양동(楊侗) | 황태(皇泰) 618년 ~ 619년 | 618년 ~ 619년 |
비정통 | - | - (진왕<秦王>) |
양호(楊浩) | - | 6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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