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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4 (수나라)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중국의 역사 44 (수나라)

두바퀴인생 2010. 3. 25. 06:05

 

 

 

중국의 역사 44 (수나라)

 

 

수나라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隋, 581년 ~ 618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서진이 멸망한 후 분열되었던 중국을 약 300년만에 재통일한 왕조이다. 그러나 2대 황제 양제 때 폭정(暴政)으로 인해 멸망하고, 그후 약간의 혼란기를 거쳐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 하였다. 수도는 대흥성(大興城: 현재의 시안(長安))이었다.

 

양씨는 북위(北魏)초기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하였고, 양견(楊堅)의 아버지 양충(楊忠)에 이르게 되었다. 무천진은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을 북쪽의 유연(柔然)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던 군사기지중 하나였다. 북위 황실인 탁발씨(拓跋氏)를 원씨(元氏)로 바꾸는 등 선비풍(鮮卑風)의 이름을 중국풍으로 고치는 정책이 진행되었으나, 북주시대에 이르러 이에 반발하여 이것을 다시 선비풍으로 고쳤다. 이때 한인이었던 양씨도 보육여(普六茹)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보육여는 선비어로 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실제 양씨는 선비족 출신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기에, 본래 성씨가 보육여라 생각되어, 북위의 한화정책시에 내려진 성씨가 양씨라는 견해도 있다.

 

수나라 건국

양견의 부친 양충은 북위가 서위(西魏), 동위(東魏)로 분열될 때(후에 각각 북주(北周), 북제(北斉)로 교체되었다.) 우문태(宇文泰)를 따라 서위을 건국하는 데 공헌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수국공(随国公)의 지위를 얻었다. 568년 양충이 죽자, 양견이 대장군-수국공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북주의 무제(武帝)는 숙적 북제를 멸망시키고, 뒤이어 남쪽의 (陳)을 멸망시키기에 앞서 북쪽의 돌궐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중 576년에 병사(病死)했다.

 

무제의 뒤를 계승한 선제(宣帝)는 기괴한 인물로 5명의 황후를 가졌다. 그중 한명이 양견의 장녀였던 여화(麗華)였고, 여화는 우문 (宇文闡)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후에 정제(静帝)였다.

 

선제의 기행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재위 8개월 만에 퇴위하며 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를 칭하며 정무를 내팽개쳤기에 정제의 뒤를 보살피던 양견에 대한 성망(聲望)을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580년 선제가 죽자 양견은 섭정으로써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무천진 군벌내 실력자들은 양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규모로 일어난 것이 위지동(尉遅迴)에 의한 것으로 한때 양견이 장악한 관중지역 이외 모든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으나, 양견은 교묘하게 이것을 각개격파하여 북주내에서 패권을 확고히 다졌다.

 

그해말에 수국공에서 수왕(隋王)의 자리에 오른 뒤, 이윽고 다음해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양견은 제위에 오른 뒤 문제(文帝)라는 시호를 사용하였다.

 

중국 통일

이미 북주 무제에 의해 중국 통일에 대한 진행이 이루어진적이 있었으나, 신중한 문제 양견은 세밀하게 준비를 진행해 나아갔다.

 

 

즉 북쪽의 돌궐에 대해선 장성(長城)을 복구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그리고 회하(淮河)와 장강(長江)을 연결하는 한구(邗溝)를 개착(開鑿)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뒤, 곧이어 남조(南朝) (梁)으로부터 분열되어, 북조(北朝)의 괴뢰정권이라 할 수 있던 후량(後梁)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588년 문제는 기어코 진나라에 대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楊廣; 후에 양제(煬帝))이었고, 51만 8천이라는 과장되었다고 생각되는 대군 앞에 다음해 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은 손쉽게 함락되어, 진나라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우물에 숨어 있다가 사로잡혔다. 이로써 서진 멸망 이후, 혹은 더 넓게 보면 184년 황건적의 난 때부터로 보면 약 405년이라는 기나긴 분열시대가 종결되었던 것이다.

 

개황의 치(開皇之治)

문제는 즉위한 직후부터 내정면에서 다음과 같이 개혁을 진행해 나아갔다.

 

《주례》(周禮)와 선비 회복정책을 진행하던 북주의 노선을 중지하고, 북제의 제도를 참조하여 개혁을 진행해 나아갔다. 581년 새로운 율령인 개황율령(開皇律令)을 제정하였는데, 이 율령에서는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법을 간소화시켜 알기 쉽게 고친것으로 후에 당의 율령도 또한 이 개황율령을 답습한 것이었다.

 

관리제도도 대개혁을 시행해, 최고기관으로써 상서성(尚書省), 문하성(門下省), 내사성(内史省;당나라의 중서성(中書省)의 3성을 설치하고, 상서성 아래에 문서행정기관인 6부(六部), 말하자면 인사담당인 이부((吏部), 재정담당인 도지부(度支部), 의례(儀禮)담당인 예부(禮部), 군사담당인 병부(兵部), 법무담당인 도관부(都官部), 토목담당인 공부(工部) 등 6개였다. 그 아래에 실무기관인 9사(寺), 또 이것을 별도로 감찰하고 감독하는 기관인 어사태(御史台)를 설치했다.

 

지방에 대해서도 이때까지 쓰여오던 주(州)->군(郡)->현(縣)이란 구분을 없애고, 주->현이란 2단계로 재편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치적중 가장 뛰어난 것이라 칭해지는것이 있었으니 바로 과거(科挙;정식으로는 공거(貢挙)의 실행이었다.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때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에 의해 관리 임명권이 귀족세력의 손에 있었다. 과거는 지방호족의 세습적인 임관이 아니고, 실력시험의 결과로 관리의 임용을 결정한다는 매우 개방적인 수단으로 이것을 이용하여 관리 임명권을 황제의 손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이점도 노렸다.

 

이렇게 문제에 의해 정비된 여러 제도는 거의 대부분이 후에 당나라가 물려받아, 당나라 300년의 역사를 지탱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치세를 그 원호(元號)에 의거해 개황의 치 라고 불렀다.

 

양제의 치세

문제의 황후였던 독고황후는 매우 강한 성격의 여성으로 문제에게 [자신 이외의 여성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라고 서약을 맺게 하였다. 이것은 당시 황제로써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거기에 독고황후는 문제 주위를 엄격하게 감시하여 문제가 어떤 여성을 가까이 하는지를 경계하였다.

 

문제와 독고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양용(楊勇)이 처음엔 황태자가 되었으나, 양용은 놀기를 좋아하고, 여색을 즐겼기에, 검소함을 즐기는 문제, 정조를 중시한 황후 양쪽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그를 대신해 양친의 기분에 맞게 비위를 맞춘 차남 양광이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604년 문제가 황태자로 책봉한 양광은 문제의 후궁 겁탈 문제로 미움을 받자 문제를 시해하고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양제였다. 양제는 즉위 후 즉시 동생들을 계략으로 하나하나 살해하여 라이벌을 없앴다. 이 때문에 문제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밀리에 부쳤으나 양제의 모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생겨났다.

 

양제는 검소함을 즐기던 문제와는 대조적으로 사치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기피하던 대규모의 토목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진행하여 완성시켰다. 주요한 것으로는 수도 대흥성 건설과 대운하(大運河)를 대폭으로 연장하여 하북에서 강남에까지 서로 연결하게 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문제가 1차 30만 대군으로 원정하였다가 전멸하고 실패한  고구려 원정을 3번에 걸쳐 실시하였으나, 이 역시 모두 실패로 끝났다.

 

여러차례 진행된 대규모 토목과 고구려 원정 등 군사행동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제2차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일어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반란이 확대되었다. 양제 자신은 순례행차중에 강도(江都)에 머물면서 반란진압 지휘를 맡았으나, 이미 반란은 전국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수나라 멸망

반란이 확대되면서 패권을 잡으려는 군웅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양현감의 참모를 맡았던 이밀(李密)은 북주 8주국(八柱國) 이필(李弼)의 손자로써 관롱귀족집단(関隴貴族集団)중에서도 상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양현감의 전사후 낙구창(洛口倉)이란 수나라의 거대 식량저장기지를 손안에 넣는 데 성공하여 대규모의 백성을 모았다.

 

이밀과 격렬하게 항쟁한 사람은 서역출신으로 수나라 장군을 지냈던 왕세충(王世充)이었다. 고구려 원정군에서 탈주하여 같은 탈주병들을 모아서 하북에서 세력을 키운 인물은 두건덕이 있다. 그리고 수나라의 태원(太原)태수로 있던 이연(李淵;후에 당나라 고조)은 대흥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 대왕(代王) 양유(楊侑;공제유(恭帝侑)를 옹립했다.

 

잇달은 패전 보고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술에 취해 듣지 않다가, 618년 이에 불만을 품은 근위군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근위군단은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주도하에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옹립하고 북쪽으로 귀환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도중에 두건덕의 군에게 대패하여 소멸하였다.

 

양제의 죽음을 들은 이연은 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한다. 같은 시기 양제의 죽음을 알게되어 618년 낙양에 있던 월왕(越王) 양동(楊동)은 신하들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나, 619년 왕세충에게 찬탈되어 수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양제의 양(煬)의 한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한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수나라 멸망 연도에 대해서

이 기사에 따르면 수나라 멸망 연도는 619년이라 할 수 있으나, 문헌에 따르면 수나라 멸망은 618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수나라 멸망 시점을 어느 시기로 보는냐에 따라 다르다. 당나라가 편찬한 정사인 《수서》 등에서는 당나라가 수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시점인 2번째 설을 취했으나, 이 문장에는 3번째 설을 취했다.

  • 양제의 죽음 (618년)
  • 공제유가 이연에게 선양(618년)
  • 공제동이 왕세충에게 선양(619년)

 

역대 황제

수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수 태조
(隋太祖)
(수 문제 추숭)
무원황제
(武元皇帝)
양충(楊忠) - -
제1대 수 고조
(隋高祖)
문황제
(文皇帝)
양견(楊堅) 개황(開皇) 581년 ~ 600년
인수(仁壽) 601년 ~ 604년
581년 ~ 604년
제2대 수 세조
(隋世祖)
양황제
(煬皇帝)
(명황제<明皇帝>,
민황제<閔皇帝>)
양광(楊廣) 대업(大業) 605년 ~ 618년 604년 ~ 618년
- 수 세종
(隋世宗)
(수 황태주 추숭)
효성황제
(孝成皇帝)
(원덕태자<元德太子>)
양소(楊昭) - -
제3대 - 공황제
(恭皇帝)
양유(楊侑) 의녕(義寧) 617년 ~ 618년 617년 ~ 618년
비정통 - -
(황태주<皇泰主>,
공황제<恭皇帝>,
월왕<越王>)
양동(楊侗) 황태(皇泰) 618년 ~ 619년 618년 ~ 619년
비정통 - -
(진왕<秦王>)
양호(楊浩) - 618년

 
 

양충(楊忠, 507년 ~ 568년)은 중국 섬서(陝西) 화음(華陰)사람으로 남북조 시대 북조인 서위 북주의 대신으로 수 문제 양견의 부친이다. 12대장군 중 한 사람으로서, 대사공과 수국공(隨國公) 작위를 받았으며, 아들인 양견이 수나라를 건국하자, 태조 무원황제(太祖 武元皇帝)에 추존되었다.

 

양충은 북위시절 이주영의 친족 이주도율(爾朱度律)의 휘하에서 군을 이끌었다. 같은 동기로는 북위가 서위, 동위로 분열할때 함께 서위에 가담해 서위의 실력자가 된 독고신(獨孤信)이 있다.

 

우문태(宇文泰)을 따라 서위을 건국하는 데 공헌하여 서위의 승상 우문태에게 중용되어 공을 세워 거기대장군이 되었다.

 

북주 건국후 양충은 원수로 임명되어 양찬, 이목, 왕걸, 전홍, 모용연등의 10여명의 대장을 이끌고 북제를 공격하여 20여 개 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돌궐 10만 대군이 진양(晉陽)에 쳐들어오자 맞아 싸워 격퇴했다. 공적을 인정받아 12대장군 수국공(随國公)에 봉해졌다.

 

568년 양충은 병으로 쓰러져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낫지 못하고 병사했다. 향년 62세였다. 양충이 죽자, 양견이 대장군-수국공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수문제 양견(隋文帝 楊堅, 541년: 서위 대통(大統) 7년 ~ 604년: 인수(仁壽) 4년)은 중국 의 초대 황제로서, 400여 년의 중국 대륙의 혼란기에 종지부를 찍은 명군이다.

 
수 문제
수 문제
수나라의 초대 황제
재위 581년 ~ 604년
황후 문헌황후
부친 무원제
모친 무원황후
다음 황제 양제

 

 

초기 생애

양견은 서위의 수국공(隨國公)이자, 대사공인 양충과 여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홍농의 화음 출신이고, 스스로 후한 태위 양진의 14세손이라 칭했다. 16세 때, 2살 연하인 대장군 독고신의 딸, 독고가라와 결혼했는데 이가 훗날 여장부라 일컬어지는 독고황후이다.

 

양견은 북주 무제 우문옹에게 수주(隨州) 자사라는 벼슬을 하사받았고, 나중에 아버지 양충이 죽자 아버지의 수국공 직위도 계승했다. 573년에는 큰딸을 북주의 황태자 우문윤에게 시집보냈고, 표기대장군과 대흥군공 같은 벼슬도 받아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578년에는 우문윤이 황제가 되자, 황장(皇丈)으로서 양견의 실권은 더 커졌고, 이듬해에 자신의 외손자인 우문연이 정제로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승상이 되었으며, 그 다음 해인 580년에는 수왕(隋王)에 책봉되었다.

 

581년, 북주 정제 우문연은 외조부인 양견에게 선양을 하였고, 양견은 이리하여 황제의 위에 오른다. 이가 수의 초대 황제인 문제이며, 연호는 개황(開皇), 국호를 대수(大隋)라 했다. 수도를 장안으로 삼고, 대흥성(大興城)이라 했다.

 

개황의 치

양견은 황제가 되자마자, 적극적으로 통일 사업을 서둘렀다. 당시 남조의 (陳)의 황제 진숙보는 사치와 방종에 놀아 간신들의 참소만 들어 나라가 크게 피폐해져 있었다. 양견은 차남 양광에게 군사를 내주어 진을 공격하라 명했고, 589년에 수의 대군이 몰려온다고 우물 속에 숨은 진숙보를 잡아서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달성하였다.

 

안으로는 세금을 적게 걷어 백성들의 고통을 걷어줬으며, 대운하 공사를 시작했으나, 백성들의 불만이 많아 그 공사를 중단시켰다. 과거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제했으며, 백성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지급하는 균전제를 실시하였다. 양견 자신 역시, 궁정의 소비를 줄이고 근검절약했다.

 

이리하여, 국고는 풍족했으며, 백성들의 삶도 한결 여유로워졌다고 한다. 또한, 양견은 개황율령을 발표하여 제도를 정비했으며, 관제 또한 정비를 하여, 훗날 당나라 율령의 기초가 되었다.

 

밖으로는 돌궐을 강과 유, 두 방법으로 압박하였고, 고구려에도 30만의 원정군을 보냈으나, 모조리 전멸하였다.

 

황태자 책봉 문제

문제 양견은 처음에는 자신의 장남, 양용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양용은 여색에 빠져, 사치스런 생활을 즐겨 행실이 문란했다고 한다. 거기다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수수방관하자, 평소 양용을 싫어했던 독고황후는 양견에게 태자를 바꾸라 주청했고, 600년에 양용은 황태자에서 폐위되었고, 차남 양광이 황태자에 올랐다.

 

그러나, 602년에 독고황후가 죽자, 양견은 다시 양용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당시 양광을 받쳐주던 세력인 양소 우문술 등이 극구 만류하자 양견은 일단 이를 유보하였다.

 

비극적인 최후

604년에 양견은 병이 매우 위중해 있었다. 양광은 조정의 수장인 상서우복야 양소와 부황 시해 작전을 모의하였고, 이 와중에 자신이 사모하던 과거 진의 공주 선화부인 진씨를 범하려 했다. 선화부인 진씨는 양견의 후궁이었는데,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후궁을 범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양견은 노발대발하여 양광을 불러들였고 폐황태자인 양용을 다시 황태자에 앉힌다는 교서를 내렸으나, 그날 밤에 양견은 양광의 심복이자 자신의 근위장 장형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 때, 양견의 나이 64세였다. 폐황태자 양용 역시, 양광의 근위장인 우문지급에게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며, 능호는 태릉(太陵)이다.

 

황후와 후궁

  • 문헌황후 독고씨 (文獻皇后 獨孤氏)
  • 선화부인 진씨 (宣華夫人陳氏)
  • 용화부인 채씨 (容華夫人蔡氏)
  • 자귀빈 (姿貴嬪)
  • 위지녀 (尉支女)

아들들

  1. 방릉왕 폐황태자 양용 <房陵王廢皇太子楊勇>
  2. 진왕 양광 (수 양제) <晉王 楊廣>
  3. 진왕 양준 <秦王楊俊>
  4. 촉왕 양수 <蜀王楊秀>
  5. 한왕 양량 <漢王楊諒>

딸들

  1. 낙평공주 (북주 선제의 황후)
  2. 난능공주
  3. 광평공주
  4. 의성공주
 
 

수 양제 양광(隋煬帝 楊廣, 569년: 북주 천화(天和) 4년 ~ 618년: 의녕(義寧) 2년 3월 11일)은 중국 의 제2대 황제이며, 수 문제 양견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문헌황후 독고씨이다. 본래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명황제(明皇帝)이나 당(唐)에서 올린 시호인 양제로 불린다. 진 시황제보다도 성격이 더 포악하고 무자비하여 중국의 여러 황제 중 가장 폭군으로 손꼽히는 황제이기도 하다.

 

 
수 양제
수 양제
수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 604년 ~ 617년
황후 양민황후
부황 문제
모후 문헌황후
이전 황제 문제
다음 황제 공제

 

초기 생애

개황 원년인 581년, 아버지 양견이 자신의 조카인 북주 정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라 수를 세웠는데, 그때 진왕(晉王)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남조의 진(陳)을 토벌하는 데 매우 크게 활약했으며, 589년에 진을 멸망시킴으로써, 부황에게 태위의 작위를 받았다. 양광은 양주총관을 맡아서, 598년 2월, 고구려 영양왕이 수나라 침공을 알고 조양에 대해서 선제 공격을 가하자, 순마라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양광은 후방에서 아우 한왕 양량을 도왔으나, 전염병과 폭염에 의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30만 스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에 전멸하고 말았다. 이에 부황 양견이 크게 분노하여 두 자식들인 양광과 양량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모후인 독고황후가 말렸다고 한다.

 

부황 시해

600년에 강남에서 일어난 고지혜의 난을 물리친 양광은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던 형 태자 양용을 부황이 폐위시키지, 수의 황태자에 올랐다. 이는 독고황후의 덕인데, 독고황후는 평소 매우 금욕적이고, 질투가 심한 사람이었다.

 

태자인 양용은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방종과 사치에 놀아나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눈밖에 났다. 이에 비해 양광은 청렴하게 살고, 의관도 누추하게 입었으며 여자를 탐하지 않아 어머니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태자 책봉식 때, 식이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엄청난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어났다 한다. 이 때문에 양광의 태자 책봉으로 수나라가 기울어져 결국 멸망하기에 이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태자에 오른 그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나, 602년 8월에 어머니 독고황후가 죽자, 큰 버팀목을 잃고 금욕적인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으나,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무서운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계책을 쓴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렇게 양광은 더욱더 야심을 보여 아버지의 황위를 노렸고, 더군다나 양광은 평소 사모했던 부황의 후궁, 선화부인 진씨를 범하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양견은 당시 병이 위중했다. 하지만 자신의 후궁을 범하려 한 아들을 문책하려 했으나, 그것을 안 양광은 상서우복야 월국공 양소와 결탁하고, 시종무관장 장형, 장군 우문술 등을 대동하여 그날 밤에 장안 인수궁 대보전에서 아버지를 시해하였으며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장 우문지급을 보내 죽여 버렸다. 뒤이어 양광은 그토록 사모하던 선화부인 진씨를 강제로 범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패륜행위를 행한 양광은 곧 제위에 오르니, 그가 수의 제2대 황제인 양제이다.

 

폭정의 시작

수양제 양광은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켰다. 만리장성을 새로이 쌓게 하였으며,  아버지 양견이 중단시킨 대운하 공사를 재개시켰다. 이 대운하는 탁군에서 항주까지 잇는 대공사였다. 이에 백성들이 대규모로 노역에 동원되자 불만을 컸다 하며, 그것도 모자라 양광은 수도 장안 대신, 낙양에 동경(東京)을 쌓게 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운하는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를 연결시켜서, 남북 융합에 크게 이바지했다.

 

유례없는 폭정

양광은 낙양에 동경을 쌓는 데 매월 2백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희귀한 석재와 목재를 수집하여 낙양으로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낙양의 서쪽에 서원(西苑)이라는 큰 정원을 건설하였고, 그 크기가 1.3 헥타르나 되었다. 그 안에 바다를 건설하고, 3개의 인공 섬을 지었으며, 여러 정자와 누각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바다의 북쪽에는 용린거라는 수로를 만들어서 물이 바다로 흘러서 들어가게 만들었고, 그 물줄기를 따라 16개의 정원을 또 만들었다. 정원에는 각종 희귀 동물을 사육하여 양광이 즐기도록 했고, 밤에는 미녀들과 같이 어마어마한 연회를 베풀었다.

 

양광은 대운하를 건설할 때, 40여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 느릅나무를 심었다. 대운하 건설에는 자그마치 1억 5천만 명이나 동원되었고, 심지어는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양광은 관리 책임자와 인부 5만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극악무도함을 보였다.

 

양광은 길이 2백척에 높이 4층이나 되는 용주(龍舟)를 타고, 거기에 황후와 후궁, 대소신료, 승려, 도사 등은 그 뒤를 잇는 화려한 배들에 탔는데 그 길이가 무려 2백여 리에 달했다. 또한, 운하 5백 리 이내에서 사는 백성들은 양광에게 음식을 갖다 바쳐야 했는데, 배가 떠날 때가 되면, 이 음식들을 그냥 구덩이에 묻고 가버렸다.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가산을 탕진하였다. 배는 백성들이 끌고 다녔는데, 그 인부들이 무려 8만여명이나 되었다.

 

양광은 북방에도 유람을 떠나 태행산에 굴을 뚫었는데, 이 때 근처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굴을 뚫고 대로를 건설하였다. 백만여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20일 만에 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또한, 양광은 건축가에게 이동식 궁전을 지으라 했는데, 관풍행전(觀風行殿)이라 했다. 이 궁전을 언제든지 조립과 해체가 가능했으며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전해진다.

 

극심한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은 "토목공사나 전쟁 (고구려 원정 등)에 동원되어 죽느니 불구로 산다 해도 노역이나 징집은 면하고 싶다"라고 하여 스스로 팔이나 다리를 잘라서 "복수복족 (福手福足)"이란 말이 생겨났다.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은 노역이나 징집에서 면제되기 때문이다.

 

무리했던 고구려 원정

대외적으로도 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북방에서 중국을 넘보는 돌궐 토욕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여 영토는 넓어졌다. 그러나 양광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아버지 양견이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612년에 동북부에서 세력이 커지고 있는 고구려에 대해 아버지 양견 때 1차 원정에서 실패한 것을 빌미로 113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고구려 원정을 지휘했다.

 

고구려 원정 전에, 양광은 대규모 전함을 건설케 했는데, 거기서 물 안에서 작업해서 구더기가 생겨 죽은 자가 열 명중 서너 명이었나 되었으며, 그 선박의 행렬은 1천여리가 넘었다 한다.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서 죽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을지문덕 장군이 지구전을 펴면서 수나라 군대의 보급로가 신장되기를 기다리면서 남으로 철수하다가 반격을 개시하여,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강을 건너던 수나라 선봉대 30만 군사를 물 속에 수장시켜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2700명 뿐이었다고 한다.

 

이에, 양광은 군사를 철수시키고, 613년에 다시 침범하였으나 예부 상서 양현감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돌려 회군하였다. 2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타격은 컸다. 그 후로도 한번 더 고구려 침공에 군사를 보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고구려 전쟁

 

수나라 고구려 원정 과정과 결과

수나라는 수 양제는 아버지 수 문제를 살해하고 활제에 오르는  반정, 그리고 아버지 후궁을 탐하여 차지하는 주색잡기와 방탕한 생활, 신하와 백성에 대한 무자비한 폭정, 만리장성 및 대운하 등 무리한 토목 공사를 벌이면서도 영토 확장 정책을 추구함에 따라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데, 그 중 수나라 멸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바로 고구려 침공이다.

 

수나라의 야망을 미리 눈치 챈 고구려 영양왕은 수나라 침공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고 수나라는 양견이 먼저 30만 대군으로 1차 침공전을 벌이게 되는데, 고구려의 강이식 장군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그후 수 양견이 아들 양제에게 살해되고 황위를 계승한 양제에 의해 100만 대군이 동원되어 침공하는 등  4차에 걸친 고구려 침공 전쟁에서 결국 완전히 패배함으로써 국력이 기울게 되었다. 그후 수나라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3대 38년만에 멸망하고 반란군 중 이연이 모든 반란군을 제압하고 당나라를 세우게 된다

 

 

고구려 영양왕의 강병책과 수나라 침공

고구려 영양왕은 평원왕의 맏아들이자 평원왕의 첫째 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원'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평원왕 7년인 56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90년 10월에 평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6대 왕에 올랐다.

 

영양왕이 즉위했을 때 중국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북주의 외척이었던 양견은 북주의 왕실을 폐하고 581년에 수나라를 건국했으며, 그 후로 꾸준히 세력을 팽창하여 8년 뒤인 589년에 강남 동쪽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주변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지속함에 따라 고구려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나라는 네 번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고,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맞서 전면전을 펼친다.

 

수나라 왕 양견은 수차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고 영양왕도 수의 장안에 사신을 보내 그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였다. 마침내 양견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비밀리에 수륙군 30만을 동원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598년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영주 총관이 있던 조양을 선제공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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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선제 공격,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족이 포함된 1만명의 병력으로 여하 서쪽의 영주총관(조양) 선제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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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침입과 고구려의 선전

 

제1차 침입 : 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대활약과 수나라 30만 대군의 전멸

 

고구려군이 말갈군 1만 명으로 요서를 선제 공격하자, 수나라 영주 총관 위충이 수성전을 펼치며 양견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양견은 그해 6월에 한 왕 양과 왕세적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수륙군 3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도록 했다.

 

30만 대군을 이끈 수나라 원수는 한 왕 양과 왕세적이었다. 이들 30만 대군은 좌.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육로로 요수(난하)를 건너 고구려로 향하고, 우군은 산동의 동래(지금의 봉래) 항구에 집결하여 해로를 통해 고구려로 향했다.

 

하지만 한 왕 양과 왕세적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요하 근처에 도착하자 장마가 시작되었다. 그바람에 군량미 수송이 뒤따르지 못하게 되자 진군 속도가 늦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전진을 포기해야 했다. 더구나 전염병이 돌아 매일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한편 우군은 주나후가 이끌고 대선단을 형성하여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에 진입한 후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평양성에 당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미 수나라 수군이 이동할 강 주변에 매복하여 대기하다가 수나라 군대 배가 상류로 진입할 무렵 강이식 장군의 급습으로 군량선이 모두 수장되고 총력전을 펼친 끝에 수나라 병력들도 대부분 수장되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과<대동운해>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 때의 일을 사뭇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수서>를 인용한 <삼국사기>는 수나라 군대가 장마와 발해의 풍랑을 만나 수장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신채호는 당시 병마원수를 맡고 있던 강이식 장군의 5만 병력에 수나라 군대가 격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그 내용은 이렇다.

 

"영양대왕이 (수 문제로 부터) 모욕적인 글을 받고 대노하여 군신들을 모아놓고 회답할 문자를 보내려 하더니, 강이식이 가로되, '이 같은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할 글이라' 하고 적을 칠 것을 주장하니, 대왕이 이를 기꺼이 좇아 병마원수로 삼았다. 그로 하여금 정병 5만을 발하여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의 병력 1만으로 요서를 침요하여 수나라 병력을 꾀어내고, 거란병 수 천으로 바다를 건너 산동지역을 치게 하니, 이에 양구의 제1회 전쟁이 개시되니라."

 

이 때 강이식 장군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병력의 군량선을 격파하고, 길목을 지키다가 적군을 기습하여 격멸시킨다. 이 때문에 수나라 군대는 군량이 떨어져 허기에 허덕였고, 설상가상으로 장마로 인해 기아와 질병이 겹쳐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된다. 강마다 설치한 목교도 홍수로 인해 파손되고 지원부대가 따르지도 못하자 후퇴로도 막혀 진퇴양란의 지경에 빠지면서 고구려군의 역공에 대부분의 병력을 상실하고 퇴각하게 된다.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의 영정을 모신 봉산사

 

현재 강이식 장군은 진주 강씨의 시조이고, 그의 무덤이 옛 고구려 땅 심양현 원수림에 있다고 전한다. 때문에 강이식은 가공의 인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신채효의 기록을 터무니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인용한 <서곽잡록>과 <대동운해>가 전하지 않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이처럼 수나라 제1차 침입은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퇴각하게 된다. 이 일로 수나라 군대는 급속하게 약화되고 고구려의 화친 제의로 한 동안 평화가 지속된다.

 

결국 수나라는 <수서> 기록에는 장마로 인해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퇴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는 수나라 30만 대군이 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전술에 말려 병력 대부분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30만 대군을 잃은 수나라 양견은 분노로 치를 떨며 출전 장수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는 등 다시금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중신들의 긴곡한 만류로 일시 중단하게 된다.

 

영양왕은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이에 양견은 분노를 감추고 고구려의 화친제의를 일단 받아 들인다. 그때 백제 사신이 도착하여 수나라에 자신들이 고구려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으니 향도 노릇을 하겠다며 다시금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백제의 제의는 수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곧바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한동안 한반도에서 수세로만 일관하던 고구려가 공세로 나선점은 곧 백제와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면서 백제와 신라는 긴장하게 된다.

 

영양왕은 한반도 변경에 대한 군사력을 과시하여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후미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수나라에 대한 전면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영양왕의 세력과시는 비단  병력면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역사를 정리하여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정신적 역량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600년 1월에 태학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옛 역사서들을 요약하여 <신집>5권을 편찬토록 하였다. 고구려는 건국초기에 이미 <유기>라는 이름으로 역사서를 정리하여 1백 권의 책으로 묶은 바 있는데, <신집>은 <유기>와 그 이후 편찬된 역사서들을 정리하고 수정한 것이었다.

 

영양왕은 603년에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의 진평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한수를 건너와 고구려군에 대항하였고, 이 때문에 고구려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 이후에도 고구려는 607년 5월에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항복을 얻어내지 못하였고, 다만 백성 3천을 포로로 잡아 고구려에 안치했다. 

 

 

제2차 침입, 수나라 100만 대군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그 무렵 수나라는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양견은 자신의 둘째 아들 양광과 정치적 마찰을 빚는 바람에 조정이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 604년 7월 양광이 그의 부왕 양견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양광은 양견보다 더 야심찬 인물이었다. 그는 전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낙양을 새로운 중심지로 건설하고 낙양과 탁군(북경)을 잇는 대수로를 건설했다. 또 607년 양광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돌궐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고구려의 사신이 돌궐에 와 있었다. 양광은 고구려 사신에게 다시금 조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양광의 요구를 묵살했다. 양광은 북쪽의 돌궐을 압박하여 돌궐 왕이 장안에 입조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륙 안에서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 나라는 오로지 고구려 뿐이었다.

 

양광은 누차에 걸쳐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하였고, 고구려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양광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대군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수나라의 침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고구려는 608년 2월에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고구려 땅에 억류하였다. 그해 4월에는 우면산성을 빼앗아 신라의 북진을 차단했다. 그 후 고구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한강) 이북 영토 중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고구려가 한반도 지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 양광은 고구려 침공준비를 완료하고 611년 4월에 군사를 난하(당시 요수) 건너편의 탁군에 집결시킨 뒤 612년 정월에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총 113만 3800명이었고 전군을 다시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었다. 좌군과 우군은 다시 각각 12군으로 편성되어, 총 24개군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고구려의 장안성이었으며,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평양성을 함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수서>는 수나라 군대의 출정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아장 각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으며, 이는 다시 4단으로 분리되어 각 단마다 편장 1명을 두었다. 또한 단의 갑옷과 투구 끈과 깃발의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출정시키고,상호 거리가 40리 되게 하였고, 각 군영은 연속적으로 출발하여 40일 만에 출발이 종료되었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60리에 뻗쳤다. 왕의 진영에는 12위,3대,9시가 있었는데 내외, 전후,좌우 6군을 나누어 배속해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뻗혔다. 근고 이래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성대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출정한 수나라 군대는 좌.우군이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 고구려를 공략하였는데, 양광의 직할부대가 포함된 좌군이 요수를 건너 육로로 평양성으로 향하였고, 우군은 산동반도의 동래로 가서 배를 이용하여 요동반도의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양광의 본대는 요수를 건너기 위해 부교를 가설했다. 그러나 부교의 길이가 짧아 건너편에 닿지 못하자 다시 부교를 더 구축하여 연결하려는 찰라,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기습전을 펼쳤다.

 

고구려군의 급습을 받은 수나라 군대의 피해는 컸다. 하지만 양광은 좀더 강폭이 좁은 곳을 선택하여 부교를 가설토록 하였다. 부교를 가설하여 다시금 도하를 시도하여 요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부교가 완성되어 수나라 대군이 밀려오자 고구려군이 대적하였으나 1만 여명의 피해를 입고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요동성에 집결하여 수성전을 펼쳤다. 이후 요동성의 고구려군과 요동성을 포위한 수나라 대군간에 일진일퇴가 계속되고 있었다.

 

수 개월 동안 요동성은 무너지지 않고 선전하였는데, 양광은 노발대발하여 수하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래도 요동성이 무너지지 않자 양광은 인근의 육합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육합성도 수나라 대군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이무렵 산동의 동래에 집결한 우군은 비로소 선단을 완성하여 발해로 배를 띄웠다. 수나라 우군의 조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선단을 지휘하여 발해를 건너 강을 타고 평양성으로 향했다. 그들은 어느듯 평양성 60리까지 진군하였고, 이를 발견한 고구려군이 공격하였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내호아는 더욱 기세등등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군했다. 그것이 고구려군의 계략인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자신의 군대가 고구려군에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시기였다. 잠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에 의해 도주로가 차단되고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내호아는 그의 부하 대부분을 잃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수나라 수군 우익위 대장군 주법상의 군대가 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바다로 달아났다.

 

발해에서 고구려군이 대승을 거두고 있는 사이 육지에서는 을지문덕이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끄는 30만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 30만 대군은 이미 요수를 건너 남방과 북방으로 우회하여 평양성을 공략하고자 했는데, 을지문덕은 그들의 전략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우중문과 우문술의 진영을 찿아갔다.

 

을지문덕은 영양왕의 밀명을 받고 거짓으로 항복을 청했다. 이 때문에 수나라 선봉대 30만을 이끌고 있던  두 장수는 갑작스런 고구려군의 항복소식에 어리둥절 했다. 그들은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은 보면 무조건 죽이라는 지시를 양광으로부터 받고 있었으나 항복을 하기 위해 찿아온 을지문덕을 선뜻 죽일 수가 없었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붙잡으려 했으나 위무사로 나와 있던 수나라 상서 우승 유사룡이 만류하는 바람에 놓아주곤 말았다. 그런데 막상 을지문덕이 자기 진영을 떠나자 우문중은 생각이 바뀌어 군사를 이끌고 을지문덕을 추격한다.

 

이 과정에서 우문술과 우중문은 서로 의견이 달라 마찰을 빚었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야 한다고 했으나 우중문은 추격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중문은 어떻게던지 양광에게 승전보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양광이 우중문을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술은 우중문에게 밀려 을지문덕 추격전에 동참하게 된다.

 

그들은 압록수(지금의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곱번이나 고구려군과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을지문덕의 계략이었다.  을지문덕은 자신을 놓아준 우중문이 반드시 후회하고 추격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곳곳에 고구려군을 매복하였다가 싸우다가 도망하는 척하여 내륙 깊숙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끌여들였다.

 

을지문덕의 계략을 알리 없는 우중문과 우문술은 어느듯 살수를 건넜다. 그리고 평양성을 30리 두고 진을 쳤다. 이 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사람을 보내 시를 한 편 전달했는데, 흔히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로 일려진 이 시의 문구는 아래와 같다.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에 이르렀다.

 전장에 이겨 그 공이 높으니

 족함을 알고 돌아가는 것이 어떠리"

 

이 시를 보낸 후에 을지문덕은 다시 우문술에게 부하를 시켜 거짓으로 항복을 청하고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왕을 모시고 예방하겠다.' 고 하였다. 그러자 우문술은 수하 병력이 피로에 지쳐 더 이상 진군할 수가 없으며, 설사 진군하여 평양성에 당도한다 해도 쉽게 평양성을 함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회군을 시작했다.

 

우문술이 회군을 시작하자 그때부터 고구려군은 파상적인 작전을 펼치며 사방에서 수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우문술은 부하들을 재촉하여 어느듯 살수에 이러렀다. 그들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갑자기 살수의 물이 불어나면서 급류로 변하였고 강을 건너던 수나라 병사들은 대부분 수장되고 있을 즈음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미쳐 건너지 못한 수나라 군사를 공격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하기에 바빴고 고구려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우문술의 30만 5천 대군은 대부분 전멸하고 2천 7백 명만 겨우 살아 도주하였다. 이로써 수나라 선봉부대는 완전히 괴멸되고 말았다. 

 

우문술이 패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발해에서 진을 치고 있던 내호아는 즉시 퇴각하였으며 양광은 우문술을 소환하여 쇠사슬로 묶어 장안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수나라 제2차 침입은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제3차 침입, 요동성과 신성의 싸움

 

수나라 제3차 침입은 613년 4월에 있었다.

 

하지만 양광은 패전의 설욕을 버리지 못하고 613년 정월에 다시금 탁군에 군사를 집결시킨 뒤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이 때 양광은 우문술을 다시 대장군에 복직시켜 함께 우군에 편성하여 요동으로 진격하였고, 좌군은 대장군 왕인공으로 하여금 부여를 경유하여 평양성 북쪽에 있는 신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그는 신성을 깨뜨리면 평양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요동성과 신성을 공격하였으나 좀처럼 두 성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양광은 이 광경을 지켜보다 분을 이기지 못하여 1백만 개의 흙포대를 동원하여 요동성 보다 더 높게 흙벽을 쌓도록 하였다. 또한 성벽보다 높은, 바퀴가  여덟 개 달린 수레를 만들어 요동성 안으로 활을 쏘게 하였다.

 

양광의 이같은 방법은 성안의 고구려군을 위축시키기는 하였으나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양광은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음을 알고 계속 진행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수나라 장안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예부상서 양현감이 군량을 수송하다가 농민들의 반기가 확산되는 것을 보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때문에 양광은 그날 밤 즉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그가 돌아간 뒤에 고구려군은 혹 적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섣불리 성문을 열지는 않았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들이 철수했음을 알고 급히 군사를 동원하여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였으나 본대는 이미 사정권을 벗어났으나 후미 수천 명을 살상하는데 그쳤다.

 

제4차 침입, 비사성 싸움과 화친조약

수나라의 제4차 침입은 614년 7월에 시작되었다. 양광은 그해 2월 군사를 징집하여 전쟁 준비를 한 다음, 7월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수나라 선봉장은 내호아였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전진 기지인 비사성을 공략하였고, 고구려군은 유인전을 펼치며 그들을 저지하다가 오히려 패하고 만다. 내호아는 그 기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진군할 계획을 세우는데, 그때 영양왕은 양광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당시 수나라 군사는 전의를 상실한데다가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내정이 어지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양광은 기꺼이 화친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수나라의 제4차 침입은 비사성 싸움을 끝으로 종결되었다.

                                                                            

그 후 양광은 몇 번에 걸쳐 또다시 고구려 침공을 계획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영양왕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와서 자신에게 인사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영양왕은 그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 당시 수나라는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수나라의 내막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양견과 양광이 무려 네 차례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는 바람에 수나라 경제는 피패해졌고, 곳곳에서 반란이 잇따랐던 것이다. 611년에 일어난 왕박의 농민반란, 613년에는 귀족 양현감이 10만 대군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농민군이 합세하자 수나라는 점점 깊은 혼란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농민군은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617년에는 와강채(지금의 하남성 골현)을 점령했으며, 그해 태원의 귀족 이연이 세력을 형성하여 반란군에 합세했다. 결국 618년 봄에 양광은 강도에서 피살되었으며, 이로써 수 왕조는 몰락하고 당나라가 일어섰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국력을 신장시키다가 618년 9월 생을 마감하였다.

 

영양왕은 한 명의 왕후에게서 한 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아들 '환치'에 대해서는 이름만 남아 있다.

 

 

반란과 최후

617년, 수나라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이는 양제 양광이 너무 백성들을 혹사시킨 것도 원인 중 하나지만, 거기에 기근과 수해까지 겹쳐서, 더욱 반란의 규모는 커졌다. 이런 급박한 때에, 양광은 강도(양주)에서 사치와 방종, 여자들을 탐했다. 이 반란은 120여건이나 되었고, 그 규모도 엄청났다. 그리고 이 반란군 중에는, 양광의 이종사촌형인 태원 유수 이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연은 장안으로 들어가, 양광을 태상황으로 만들고, 황태손 양유를 황제로 잇게 했다. 그래도 양광은 반성하지 않고, 사치스런 생활을 계속했다. 의녕 2년인 618년 3월 11일, 양광은 여전히 전란을 외면하고, 강도에서 호화스럽게 생활하다가, 근신이었으며, 고구려의 원정군 사령관인 우문술의 아들, 근위장 우문화급에게 피살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618년 손자 양유도 이연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주고, 이연은 국호를 으로 정했다.

 

이렇게 해서, 수나라는 3대 3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사후 그는 세조 명황제(世祖 明皇帝)로 추증되나, 널리 양제(煬帝)로 불린다. 양제라는 시호는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여기서 '양(煬)'은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그의 묘는 뇌당(雷塘)이라는 곳에 양광지묘(楊廣之墓)로 있고, 황릉으로 불리지 않고 있다.

 

부황 시해에 대한 논란

《수서》에서 부황 시해의 근거로 삼는 사항은 수 문제가 죽을 때 자리를 지켰다는 점이다. 그런데 같은 《수서》임에도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서로 달라서, 곳에 따라서는, 수 문제가 죽을 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선화부인 진씨에 대한 음행에서도 서로 다른 기술이 존재한다.

황후와 후궁

  • 양민황후 소씨 (煬愍皇后 蕭氏)
  • 소빈 (蕭嬪)
  • 오빈 (吳嬪)
  • 건령부인(虔伶夫人)

아들들

  1. 황태자 양소 <皇太子 楊昭>
  2. 제왕 양간 <齊王楊暕>
  3. 조왕 양고 <趙王楊杲>

딸들

  1. 남양공주 <南陽公主>
  2. 약석공주 양씨 <若惜公主楊氏> (당 태종의 후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