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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43 (남조:송,제,양,진)

두바퀴인생 2010. 3. 24. 05:11

 

 

중국의 역사 43 (남조 : 송, 제, 양, 진)

 

 

 

 

 

 

(宋, 420년 ~ 479년)은 남북조 시대 강남에서 건국된 남조 첫번째 왕조이다.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통일 황조 송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창시자의 성씨를 따라 유송(劉宋)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彭城)의 하급군인 이었던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황제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다. 이때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등의 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백적은 유랑자의 신분증명서를 말한다.)의 구별 철폐을 추진했다. 이로써 토착민과 유랑자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목표로 하였다. 무제는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등 경제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만에 죽었다. 후사를 한문(寒門)출신의 서희지(徐羲之), 전량(傳亮), 단도성(檀道成),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을 즉위시켰다.

 

문제는 왕홍(王弘), 왕화(王華), 은중심(殷仲甚)등의 귀족을 존중하고 문치를 내세운 30년간의 치세는 "원가의 치"라 불릴정도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문제는 수재의 직을 기한을 두어 지방을 안정화 시키고, 430년 전서법(錢署法)을 두어 4주전(鑄錢)을 주조하여 일시에 화폐 경제를 부흥시켰다. 438년 유학,현학,문학,사학의 4학을 연구하는 시설을 만들어 동진의 유민 도잠과 사령운, 안연지등이 시문세계에서 활약했고, 토번과 하서왕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430년, 450년 2번에 걸쳐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에게 패배하여 회북(淮北)을 빼앗긴 것으로 인해 군사비가 증가하고, 태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송나라는 급속히 쇠퇴했다. 아버지를 암살한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효무제(孝武帝)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가면서, 형주,양주,강주의 군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대사를 파견하여 조세의 독촉을 진행하고, 사족과 공상, 잡호와의 통혼을 금하고 사문에게 왕자를 배알하게 하는등 중앙집권화를 그린 정치를 추진했다.

 

전폐제(前廢帝)는 남조의 대표적인 포악한 황제로 숙부 유욱(劉彧)에게 암살당했다. 유욱은 명제(明帝)가 되었으나 전폐제의 동생 유자훈(劉子勳)이 반항을 하자, 심유지(沈攸之)을 보내 그를 죽였다. 명제는 채흥종(蔡興宗)등의 귀족의 말을 듣고 학관을 설치했으나 난의 평정후 독단정치를 펼치며, 사치와 미신을 좋아해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명제 이후 폐제가 제위하였으나 숙부 유휴범(劉休範)이 한문출신의 권력자들의 전횡에 분노해 병사를 일으켜 건강을 위협하자, 무장 소도성이 난을 평정하고 포악한 군주 폐제를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하였다. 심유지, 유겸, 원찬등이 의병을 모아 공격했으나 패퇴하자, 소도성은 병마의 모든 권한을 쥐었고, 기어코 479년 순제(順帝)로부터 소도성(蕭道成)이 선양을 받으면서 나라를 건국한다. 이로써 송나라는 멸망했다.

 

역대 황제 일람

유송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효목황제
(孝穆皇帝)
(송 무제 추숭)
유교(劉翹) - -
제1대 송 고조
(宋高祖)
무황제
(武皇帝)
유유(劉裕) 영초(永初) 420년 ~ 422년 420년 ~ 422년
제2대 - 소황제
(少皇帝)
(영양왕<營陽王>)
유의부(劉義符) 경평(景平) 423년 ~ 424년 422년 ~ 424년
제3대 송 태조
(宋太祖)
(송 중종<宋中宗>)
문황제
(文皇帝)
(경황제<景皇帝>)
유의륭(劉義隆) 원가(元嘉) 424년 ~ 453년 424년 ~ 453년
비정통 - -
(원흉<元凶>)
유소(劉劭) 태초(太初) 453년 453년
제4대 송 세조
(宋世祖)
효무황제
(孝武皇帝)
유준(劉駿) 효건(孝建) 454년 ~ 456년
대명(大明) 457년 ~ 464년
453년 ~ 464년
제5대 - 폐황제
(廢皇帝)
유자업(劉子業) 영광(永光) 465년
경화(景和) 465년
464년 ~ 465년
제6대 송 태종
(宋太宗)
명황제
(明皇帝)
유욱(劉彧) 태시(泰始) 465년 ~ 471년
태예(泰豫) 472년
465년 ~ 472년
제7대 - 폐황제
(廢皇帝)
(창오왕<蒼梧王>)
유욱(劉昱) 원휘(元徽) 473년 ~ 477년 472년 ~ 477년
제8대 - 순황제
(順皇帝)
유준(劉準) 승명(昇明) 477년 ~ 479년 477년 ~ 479년

 

유유(劉裕, 363년 ~ 422년)은, 중국 남조의 송의 초대 황제(재위:420년 ~ 422년). 자는 덕여(徳輿).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제(武帝). 다른 송나라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서, 유유의 건국한 송나라은 후세의 역사가에 의해 유송(劉宋)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彭城)의 하급군인 이었던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의 황제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다. 이때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등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백적은 유랑자의 신분증명서를 말한다.)의 구별 철폐를 추진했다. 이로써 토착민과 유랑자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목표로 하였다. 무제는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 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만에 죽었다. 그는 후사를 한문(寒門)출신의 서희지(徐羲之), 전량(傳亮), 단도성(檀道成),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을 즉위시켰다.

 

유의륭(劉義隆, 407년 ~ 453년)은, 중국의 남북조 시대의 의 제3대 황제(재위:424년 ~ 453년).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문제(文帝). 초대 황제 유유의 셋째 아들로, 제2대 황제 소제(유의부)의 남동생에 해당된다.

 

무제 유유는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만에 죽었다. 후사를 한문(寒門)출신의 서희지(徐羲之), 전량(傳亮), 단도성(檀道成),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을 즉위시켰다.

 

왕홍(王弘), 왕화(王華), 은중심(殷仲甚)등의 귀족을 존중하고 문치를 내세운 30년간의 치세는 "원가의 치"라 불릴 정도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문제는 수재의 직을 기한을 두어 지방을 안정화 시키고, 430년 전서법(錢署法)을 두어 4주전(鑄錢)을 주조하여 일시에 화폐 경제를 부흥시켰다. 438년 유학,현학,문학,사학의 4학을 연구하는 시설을 만들어 동진의 유민 도잠과 사령운, 안연지등이 시문세계에서 활약했고, 토번과 하서왕 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430년,450년 2번에 걸쳐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에게 패배하여 회북(淮北)을 빼앗긴 것으로 인해 군사비가 증가하고, 태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송나라는 급속히 쇠퇴했다. 효무제(孝武帝)는 아버지를 암살한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다.

 

유준(劉駿, 430년 ~ 464년)은, 중국 남조의 의 제4대 황제(재위:453년 ~ 464년). 자는 휴용(休龍), 아명은 도민(道民),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효무제(孝武帝). 제3대 황제 문제 유의륭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암살한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효무제(孝武帝)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가면서, 형주,양주,강주의 군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대사를 파견하여 조세의 독촉을 진행하고, 사족과 공상, 잡호와의 통혼을 금하고 사문에게 왕자를 배알하게 하는 등 중앙 집권화를 그린 정치를 추진했다.

 

유욱(劉彧, 439년 ~ 472년)은, 중국 남조의 의 제6대 황제(재위:465년 ~ 472년). 자는 휴병(休炳).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명제(明帝). 제3대 황제 문제 유의륭의 열한번째 아들이자, 전폐제의 숙부였다.

 

전폐제(前廢帝,유자업)는 남조의 대표적인 포악한 황제로 숙부 유욱(劉彧)에게 암살당했다. 유욱은 명제(明帝)가 되었으나 전폐제의 동생 유자훈(劉子勳)이 반항을 하자, 심유지(沈攸之)을 보내 그를 죽였다. 명제는 채흥종(蔡興宗)등의 귀족의 말을 듣고 학관을 설치했으나 난의 평정후 독단정치를 펼치며, 사치와 미신을 좋아해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명제 이후 폐제(유욱, 다른 이름)가 제위하였으나 숙부 유휴범(劉休範)이 한문출신의 권력자들의 전횡에 분노해 병사를 일으켜 건강을 위협하자, 무장 소도성이 난을 평정하고 포악한 군주 폐제를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하였다. 심유지, 유겸, 원찬등이 의병을 모아 공격했으나 패퇴하자, 소도성은 병마의 모든 권한을 쥐었고, 기어코 479년 순제(順帝)로부터 소도성(蕭道成)이 선양을 받으면서 제나라를 건국한다. 이로써 송나라는 멸망했다.

 

 

 

(齊 479년 ~ 502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서 건국된 남조(南朝)의 2번째 왕조이다. 북조(北朝)의 북제(北齊)와 춘추시대 와 구별하기 위해 남제(南齊) 혹은 창시자 소도성(蕭道成)의 성씨를 따라 소제(蕭齊)라고 부르기도 한다.

 

송나라 말기 시조 소도성은 난릉(蘭陵)출신의 하급병사 신분으로 서서히 출세하여 송나라 왕실의 유휴범(劉休範)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뒤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479년 순제(順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482년 고제(高帝)는 즉위 3년만에 죽고, 아들 무제(武帝)가 즉위했다. 2대 무제(武帝)는 아들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을 상류로 보내 송나라 효무제이래 실시했던 태사(台使)파견을 중지했다. 태사는 조세대납 지역에 대해 중앙에서 그 감시를 위해 내려보내는 관리였으나 부정부패가 심했고, 명문출신의 지방관과 대립하여 악평이 많았다.

 

무제는 또한 교적관(校籍官)을 시켜 호적을 조사하고 정리하였다. 수년에 걸친 토지조사 및 호적조사로 부정부패때문에 토지를 빼앗기고 국경근처에서 떠돌던 많은 백성들이 호적에 복귀하였다. 무제는 중서사인 채법량, 여문도을 시작으로 한문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을 제압했다. 이로 인해 귀족의 지지는 잃어버렸으나, 치세 전반에 걸쳐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도시가 번영하였다는 평이 전해졌다.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리며 11년간 계속된 뒤 2명의 어린 군주들의 짦은 재위을 거쳐 명제가 즉위했다.

 

명제는 남조 특유의 전제군주로 자신의 아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고제, 무제의 아들 20여명을 살해했다. 또한 종실제왕이 파견나간 곳에 주사(主師)을 파견하여 때때로 입조시켜 주의 일을 보고하게 했다. 그때문에 [여러 주의 일은 주사에게 듣고, 자사에게는 듣지 않는다]라는 평을 받으며, 귀족, 관인들의 지지는 사라졌다.

 

6대 폐제(廢帝) 소보권(蕭寶券;동혼후(東昏侯)은 황족에 그치지않고 관료, 민중을 마구 죽이고, 궁전에선 과다한 사치을 하여 정치를 매우 어지렵혔다. 종족중 한사람인 소연(蕭衍)은 형이 동혼후에게 살해당한 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병력을 일으켜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和帝)를 옹립했으나 다음해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나라를 건국했다.

 

당시 제나라 문화의 중심은 무제의 둘째 아들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의 저택이었다. 그의 저택에 있던 서쪽처소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였기에 이들 대표적인 8명을 가리켜 경릉8우(竟陵八友)라고 불렀다. 소연도 그중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역대황제일람

남제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선황제
(宣皇帝)
(제 고제 추숭)
소승지(蕭承之) - -
제1대 제 태조
(齊太祖)
고황제
(高皇帝)
소도성(蕭道成) 건원(建元) 479년 ~ 482년 479년 ~ 482년
제2대 제 세조
(齊世祖)
무황제
(武皇帝)
소색(蕭賾) 영명(永明) 483년 ~ 493년 482년 ~ 493년
- 제 세종
(齊世宗)
(제 울림왕 추숭)
문황제
(文皇帝)
소장무(蕭長懋) - -
제3대 - 폐황제
(廢皇帝)
(울림왕<鬱林王>)
소소업(蕭昭業) 융창(隆昌) 494년 493년 ~ 494년
제4대 - 폐황제
(廢皇帝)
(해릉공왕<海陵恭王>)
소소문(蕭昭文) 연흥(延興) 494년 494년
- - 경황제
(景皇帝)
(제 명제 추숭)
소도생(蕭道生) - -
제5대 제 고종
(齊高宗)
명황제
(明皇帝)
소란(蕭鸞) 건무(建武) 494년 ~ 498년
영태(永泰) 498년
494년 ~ 498년
제6대 - 폐황제
(廢皇帝)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卷) 영원(永元) 499년 ~ 501년 498년 ~ 501년
제7대 - 화황제
(和皇帝)
소보융(蕭寶融) 중흥(中興) 501년 ~ 502년 501년 ~ 502년

 

소승지(萧承之 384년 ~ 447년 중국 남조송(南朝宋)의 귀족이며 남제 태조 소도성의 아버지이다. 자(字)는 사백(嗣伯) 중국 남송(南宋) 남개릉(南蓋陵), 개릉현(蓋陵縣) 출신.

 

430년 우장군 도언지(到彦之)와 함께 5호 16국이 난립하는 북방을 정벌하는 북벌원정에 참여하였으나 대패하였다.

433년 한중태수로 부임하였다. 그뒤 다시 조정에 돌아와 둔기교위(屯騎校尉)직에 임명되었고 송 문제에 의해 청주(青州) 자사직에 임명됐다. 그뒤 남태산태수(南泰山太守)를 거쳐 진흥현5등남작(晋興縣五等男爵)의 작위와 식읍 340호를 받았다. 447년에 죽자 남송 조정에서는 금자광록대부 좌산기상시를 추서하였고, 장남 소도성 남제를 창업하면서 선황제(宣皇帝)에 추존되고 묘호는 만안릉(萬安陵)으로 격상되었다.

 

소도성(蕭道成, 427년 ~ 482년)은 중국의 남조 남제의 초대 황제(재위:479년 ~ 482년). 자는 소백(紹伯).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제(高帝). 송의 창오왕(蒼梧王)을 살해하여, 스스로 옹립한 순제에게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유송의 창시자 유유와 함께 군사에서 공적을 세우며 등장한 이가 소도성(蕭道成)이었다.

 

유송 말기 시조 소도성은 난릉(蘭陵)출신의 하급병사 신분으로 서서히 출세하여 유송 왕실의 유휴범(劉休範)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 뒤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명제의 뒤를 폐제 욱을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한 후 479년 순제(順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482년 고제(高帝)는 즉위 3년만에 죽고, 아들 무제(武帝)가 즉위했다.

 

소색(蕭賾, 440년 ~ 493년)은, 남북조 시대 남제의 제 2대 황제(재위:482년 ~ 493년). 자는 선원(宣遠). 아명은 용아(龍兒).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무제(武帝). 고제 소도성의 장남이다.

 

482년 고제(高帝) 소도성은 즉위 3년만에 죽고, 아들 무제(武帝)가 즉위했다.소도성의 뒤를 계승한 2대 무제는 여러 번 북위을 공격했으나 패배로 끝났다. 2대 무제(武帝)는 아들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을 상류로 보내 송나라 효무제이래 실시했던 태사(台使)파견을 중지했다. 태사는 조세대납 지역에 대해 중앙에서 그 감시를 위해 내려보내는 관리였으나 부정부패가 심했고, 명문출신의 지방관과 대립하여 악평이 많았다.

 

무제는 또한 교적관(校籍官)을 시켜 호적을 조사하고 정리하였다. 수년에 걸친 토지 조사 및 호적조사로 부정부패 때문에 토지를 빼앗기고 국경 근처에서 떠돌던 많은 백성들이 호적에 복귀하였다. 무제는 중서사인 채법량, 여문도를 시작으로 한족 문인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을 제압했다. 이로 인해 귀족의 지지는 잃어버렸으나, 치세 전반에 걸쳐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도시가 번영하였다는 평이 전해졌다.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렸으나 무제 사후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져 11년간 계속된 뒤 2명의 어린 군주들의 짦은 재위을 거쳐 명제가 즉위했다. 그 사이 북위에게 산동을 포함한 회하 이북을 빼앗기고 말았다.

 

소란(蕭鸞, 452년 ~ 498년)은, 중국의 남북조 시대 남제의 제5대 황제(재위:494년 ~ 498년). 자는 경서(景栖). 아명은 현도(玄度).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명제(明帝). 제2대 황제 무제의 사촌동생이다.

 

제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리며 11년간 계속된 뒤 2명의 어린 군주들의 짦은 재위을 거쳐 명제가 즉위했다.

명제는 남조 특유의 전제군주로 자신의 아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고제, 무제의 아들 20여 명을 살해했다. 또한 종실 제왕이 파견나간 곳에 주사(主師)을 파견하여 때때로 입조시켜 주의 일을 보고하게 했다. 그 때문에 [여러 주의 일은 주사에게 듣고, 자사에게는 듣지 않는다]라는 평을 받으며, 귀족, 관인들의 지지는 사라졌다.

 

6대 폐제(廢帝) 소보권(蕭寶券;동혼후(東昏侯)은 황족에 그치지 않고 관료, 민중을 마구 죽이고, 궁전에선 과다한 사치을 하여 정치를 매우 어지렵혔다. 종족중 한사람인 소연(蕭衍)은 형이 동혼후에게 살해당한 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병력을 일으켜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和帝)를 옹립했으나 다음해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했다.


 

제 동혼후(齊東昏侯) 483-501. 소보권(蕭寶卷). 남조(南朝) 제나라의 황제. 본명은 명현(明賢)인제, 명제(明帝)의 정치를 보좌하게 된 뒤부터 보권으로 개명했다. 자는 지장(智藏)이다. 명제의 둘째 아들이다.

 

명제 건무(建武) 원년(494) 황태자가 되었다. 영태(永泰) 원년(499) 즉위해 세금을 가혹하게 걷고 간신배와 측근들을 가까이하면서 제멋대로 대신 서효사(徐孝嗣)와 심문계(沈文季) 등을 살육했다. 이런 폭정 때문에 민심은 이반되고 국세는 나날이 기울어갔다. 당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 군량은 바닥을 보이고, 덩달아 세금은 가중되었다.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생활은 사치했고, 황음(荒淫)으로 날을 지새웠다. 소연(蕭衍)이 병사를 일으켜 건강(建康)을 포위하자 수비장군 장직(張稷)이 내부에서 호응하여 성은 함락되고 자신은 피살당했다. 3년 동안 재위했고, 화제(和帝)가 즉위하자 동혼후에 추봉되었다.

 

 

 

(梁, 502년 ~ 557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 건국된 남조의 3번째 왕조이다.

 

나라 말기 황제 동혼후는 폭거를 저질러 많은 대신들을 살해하고, 종족(宗族)인 소의(蕭懿)을 살해했다. 옹주자사로써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소연(蕭衍)이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동혼후를 죽이고, 화제(和帝)을 옹립한뒤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그가 바로 남조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은 무제(武帝)였다.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세월이었고,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을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문화을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 전성기를 보내었다. 또한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무제의 장남 황태자 소통(蕭統;소명태자(昭明太子)이 편찬한 《문선(文選)》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었다.

 

그러나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번 투신하는 무모한 행동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럴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퇴위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를까 재임중에 황제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548년 동위(東魏)의 무장이었던 후경(後景)이 투항해 왔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으로 진격해 다음해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혀 쇠약해 죽었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조카들이었기에 서로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않아 무제가 죽는걸 보고만 있었다. 후경은 간문제(簡文帝)을 옹립했다가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蕭繹)은 왕승변(王僧弁)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 소역은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에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원제(元帝)이다. 그러나 이 혼란을 틈타 남정에 나선 서위는 촉(蜀;사천지방)무릉왕(武陵王) (蕭紀)와 원제의 대립을 이용해 촉을 점령했다. 거기에 양양에 주둔하던 악양왕(岳陽王)을 소찬을 이용하여 554년 일거에 강릉을 공략해 원제를 죽이고, 양나라의 백성을 관중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건강의 파괴와 강릉의 함락은 남조 귀족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편 후경 토벌이후 건강에 주둔하던 왕승변은 555년 북제(北齊)의 압력에 정양후(貞陽侯) 소연명(蕭淵明)을 맞이하여 옹립하였으나 진패선(陳覇先)이 이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승변을 죽이고 정양후을 퇴위시킨 뒤, 원제의 아들 진안왕(陳安王) 소방지(蕭方智;경제)을 옹립했다. 그리고 557년 경제는 진패선에게 선양하여 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 한편 양양에 있던 소찬은 서위의 손에 의해 강릉에서 즉위하여 후량(後梁)의 선제(宣帝)가 되었다. 물론 괴뢰정권이었기에 후주(後主) 소종에 이르는 3대까지 이어지다 수나라에 병합된 후 사라졌다.

 

양나라 황제일람

남량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양 태조
(梁太祖)
(양 무제 추숭)
문황제
(文皇帝)
소순지(蕭順之) - -
제1대 양 고조
(梁高祖)
무황제
(武皇帝)
소연(蕭衍) 천감(天監)502년 ~ 519년
보통(普通) 520년 ~ 527년
대통(大通) 527년 ~ 529년
중대통(中大通) 529년 ~ 534년
대동(大同) 535년 ~ 546년
중대동(中大同) 546년 ~ 547년
태청(太淸) 547년 ~ 549년
502년 ~ 549년
비정통 - -
(임하민왕<臨賀岷王>)
소정덕(蕭正德) - 549년
제2대 양 태종
(梁太宗)
간문황제
(簡文皇帝)
소강(蕭綱) 대보(大寶) 550년 ~ 551년 549년 ~ 551년
- 양 고종
(梁高宗)
(양 전폐제 추숭)
소명황제
(昭明皇帝)
소통(蕭統) - -
- - 안황제
(安皇帝)
(양 전폐제 추숭)
소환(蕭歡) - -
제3대 - 폐황제
(廢皇帝)
(예장흥문왕<豫章興文王>)
소동(蕭棟) 천정(天正) 551년 551년
비정통 - -
(무릉인왕<武陵仁王>)
소기(蕭紀) 천정(天正) 552년 552년
제4대 양 세조
(梁世祖)
원황제
(元皇帝)
소역(蕭繹) 승성(承聖) 552년 ~ 555년 552년 ~ 554년
제5대 - 폐황제
(廢皇帝)
(정양민후<貞陽閔侯>)
소연명(蕭淵明) 천성(天成) 555년 555년
제6대 - 경황제
(敬皇帝)
소방지(蕭方智) 소태(紹泰) 555년 ~ 556년
태평(太平) 556년 ~ 557년
555년 ~ 557년
제7대 - -
(영가왕<永嘉王>)
소장(蕭莊) 천계(天啓) 558년 ~ 560년 558년 ~ 560년

 

소연(蕭衍, 464년 ~ 549년)은, 중국 남조 의 초대 황제(재위:502년 - 549년). 자는 숙달(叔達).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제(武帝). 남제 황실의 방계에 해당된다. 아버지의 순지(順之)는 남제의 고제 소도성의 사촌동생이다.

 

소제의 6대 폐제(廢帝) 소보권(蕭寶券;동혼후(東昏侯)은 황족에 그치지 않고 관료, 민중을 마구 죽이고, 궁전에선 과다한 사치을 하여 정치를 매우 어지렵혔다. 동혼후는 폭거를 저질러 많은 대신들을 살해하고,종족(宗族)인 소의(蕭懿)을 살해했다. 옹주자사로써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소연(蕭衍)은 형이 동혼후에게 살해당한 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병력을 일으켜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和帝)를 옹립했으나 다음 해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했다.

 

그가 바로 남조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은 무제(武帝)였다.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세월이었고,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을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문화을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 전성기를 보내었다. 또한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무제의 장남 황태자 소통(蕭統;소명태자(昭明太子)이 편찬한 《문선(文選)》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었다.

 

그러나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번 투신하는 무모한 행동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럴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퇴위 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를까 재임 중에 황제를 잃어버리는 일은 얻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548년 동위(東魏)의 무장이었던 후경(後景)이 투항해 왔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으로 진격해 다음 해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혀 쇠약해 죽었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조카들이었기에 서로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않아 무제가 죽는걸 보고만 있었다. 후경은 간문제(簡文帝)을 옹립했다가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蕭繹)은 왕승변(王僧弁)과 진패선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

 

후경의 난(後景-亂)은 548년, 남북조시대 양나라때 후경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547년 동위를 세웠던 고환이 죽고, 그의 아들 고징이 대승상의 지위를 계승하자 당시 하남 13주의 태수였던 후경(後景)은 자신이 가진 군사력 때문에 고징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위를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갖고 남조 양나라에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양나라 무제는 후경의 영지를 접수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동위는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 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양나라 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고징은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고, 후경을 고립 상태로 몰아 넣었다.

 

548년 양나라와 동위의 협상과정에서 동위로 반환될 상황에 놓인 후경은 급박함에 자신의 영지에서 난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자신의 정예병 800여명으로 시작되었으나 강제모병과 해방노예, 양의 귀족제 모순 속에서 생계를 위협받던 농민들을 규합하여 곧 대군을 형성하였다. 이윽고 후경은 양의 수도인 건강으로 진격해 그곳을 포위하였고, 양 무제와 태자는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왕들에게 근왕병을 요청하였으나 서로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결국 다음해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혀 쇠약해 죽게 된다.

건강을 장악한 후경은 간문제(簡文帝)을 옹립했다가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蕭繹)은 왕승변(王僧弁)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

 

 

소통(소명태자, 昭明太子, 501년 ~ 531년)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인물로, 양 무제의 장남이다. 성은 소(蕭), 이름은 통(統)이며, 자는 덕시(德施)이다.

 

아버지 무제가 즉위한 해인 502년 11월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3살에 이미 《논어》와 《효경》을 읽어내고, 5살 때 《오경》을 독파했다고 전해진다. 성인이 된 후에는 국정에 참여하여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보이기도 하였다. 또 문장가로서도 매우 유명하다.

 

그는 3만여권의 장서를 소장하였다고 전해지며, 그로 인해 황태자의 주변에는 항상 유명한 문인들이 모였다. 그는 그 문인들과 함께 여러 유명한 문장을 모은 《문선(文選)》을 편찬하였다.

 

하지만 그는 뱃놀이를 하던 도중 배가 전복되어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고,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훗날 아들 소찬(蕭詧)이 후량(後梁)을 건국하면서 고종(高宗)의 묘호와 소명황제(昭明皇帝)의 시호를 받았다.

 

소역(蕭繹, 508년 ~ 554년)은, 중국의 남조 양나라의 제 4대 황제(재위: 552년 ~ 554년). 자는 세성(世誠), 아명은 칠부(七符). 시호는 원제(元帝). 무제의 일곱째 아들이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은 왕승변(王僧弁)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 소역은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에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원제이다.

 

그러나 이 혼란을 틈타 남정에 나선 서위는 촉(蜀, 현재의 쓰촨 성 지역)무릉왕(武陵王) 소기(蕭紀)와 원제의 대립을 이용해 촉을 점령했다. 그리고 양양에 주둔하던 악양왕(岳陽王)을 소찬을 이용하여 554년 일거에 강릉을 공략해 원제를 죽이고, 양나라의 백성을 관중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건강의 파괴와 강릉의 함락은 남조의 귀족사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진

 

(陳 557년~589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 건국된 남조 최후의 왕조이다.

 

진나라를 건국한 진패선(陳覇先)은 미천한 가문의 군인 출신으로 후경(後景)의 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 난을 진압하고, 원제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다. 북제(北齊)에게 동조한 소연명(蕭淵明)을 제위에 올린 동료 왕승변(王僧弁)을 타도하고 경제을 추대하였으나, 이후 경제의 선양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한수(漢水) 유역과 사천성은 서위를 이은 북주에게 빼앗겼고, 거기에 양자강 중하류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사실상 양나라 때에 비해 영토가 크게 축소하여 남조 왕조 중 가장 국력이 약소했다.

 

진패선은 왕승변의 부장과 강남의 토호의 반란을 평정하다 죽고, 형 시흥왕 진도담의 아들 문제가 제위를 물려받아 영주를 확보하고, 북주를 비롯한 북제, 후량과 대치했다. 문제(文帝)는 내정에 전념하여 국내를 안정시켰다.

문제의 아들 임해왕 때 북주, 후량과 내통한 화교의 난을 평정했으나, 실권을 장악한 4대 선제(宣帝)가 그를 폐위하고 즉위하여 국력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575년 명장 오명철(吳明徹)을 시켜 북제를 공격해, 숙적 왕림(王琳)을 죽이고 수양을 빼앗아 강북으로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때 북제를 병합한 북주가 진나라를 공격하려 했지만 정권이 교체되면서 수나라가 이를 대신한다. 수나라 문제는 재빨리 남정을 계획하였고, 그동안 진나라는 후주가 즉위해 사치와 향략을 일삼아 국력이 피폐했다. 수나라는 진왕 양광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하약필, 한금호를 선봉으로 강을 건너 건강을 함락하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400년에 걸쳐 분열되었던 위진남북조시대가 종결되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진나라는 남조 귀족제가 후경의 난을 거치며 해체되어 무제 때 중서통사사인 채경력같은 한문 출신들이 군주의 뜻을 받들어 국정을 담당했다. 후주도 시문경, 심용경 등의 한문 출신을 측근으로 기용했기에, 국가의 주석이었던 무장 노광달, 소마가, 임충 등을 멀리했기에 문무 해체가 된 나라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다만 후주의 시대는 문화가 융성하여 문학에 강총, 서릉 등이 있었고, 불교도 문무 관료에게 신앙받았다. 나라가 멸망할 때 호구 50만, 인구 200만 명이었다. 이후 육조 문화에 근간을 둔 수나라, 당나라의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역대 황제

남진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진 태조
(陳太祖)
(진 무제 추숭)
경황제
(景皇帝)
진문찬(陳文讚) - -
- - 시흥소열왕
(始興昭烈王)
(진 무제 추숭)
진도담(陳道譚) - -
제1대 진 고조
(陳高祖)
무황제
(武皇帝)
진패선(陳覇先) 영정(永定)557년 ~ 559년 557년 ~ 559년
제2대 진 세조
(陳世祖)
문황제
(文皇帝)
진천(陳蒨) 천가(天嘉) 560년 ~ 566년
천강(天康) 566년
559년 ~ 566년
제3대 - 폐황제
(廢皇帝)
(임해왕<臨海王>)
진백종(陳伯宗) 광대(光大) 567년 ~ 568년 566년 ~ 568년
제4대 진 고종
(陳高宗)
효선황제
(孝宣皇帝)
진욱(陳頊) 태건(太建) 569년 ~ 582년 569년 ~ 582년
제5대 - -
(진 후주<陳後主>,
장성양공<長城煬公>)
진숙보(陳叔寶) 지덕(至德) 583년 ~ 586년
정명(禎明) 587년 ~ 589년
582년 ~ 589년

 

 

진패선(陳覇先, 503년 ~ 559년)은 중국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陳)의 초대 황제(재위:557년 ~ 559년). 자는 흥국(興國).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제(武帝). 군인 출신으로 후경의 난을 진압하고, 원제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다.

 

548년 동위(東魏)의 무장이었던 후경(後景)이 투항해 왔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으로 진격해 다음 해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혀 쇠약해 죽었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조카들이었기에 서로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않아 무제가 죽는걸 보고만 있었다. 후경은 간문제(簡文帝)을 옹립했다가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蕭繹)은 왕승변(王僧弁)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였다. 소역은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에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원제(元帝)이다. 그러나 이 혼란을 틈타 남정에 나선 서위는 촉(蜀;사천지방)무릉왕(武陵王) 소기(蕭紀)와 원제의 대립을 이용해 촉을 점령했다. 거기에 양양에 주둔하던 악양왕(岳陽王)을 소찬을 이용하여 554년 일거에 강릉을 공략해 원제을 죽이고, 양나라의 백성을 관중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건강의 파괴와 강릉의 함락은 남조 귀족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편 후경 토벌 이후 건강에 주둔하던 왕승변은 555년 북제(北齊)의 압력에 정양후(貞陽侯) 소연명(蕭淵明)을 맞이하여 옹립하였으나 진패선(陳覇先)이 이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승변을 죽이고 정양후을 퇴위시킨 뒤, 원제의 아들 진안왕(陳安王) 소방지(蕭方智;경제)을 옹립했다.

 

그는 북제에 동조한 소연명(蕭淵明)을 제위에 올린 동료 왕승변(王僧弁)을 타도하고 경제를 추대하였으나, 이후 경제의 선양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한수 유역과 쓰촨성 서위를 이은 북주에게 빼앗겼고, 거기에 양자강 중하류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사실상 양나라 때에 비해 영토가 크게 축소하여 남조 왕조 중 가장 국력이 약소했다. 이후 왕승변의 부장과 강남의 토호의 반란을 평정하다 죽고, 그의형 시흥왕 진도담의 아들 문제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진천(陳蒨, 522년 ~ 566년) 중국의 남조 의 제2대 황제(재위:559년 ~ 566년. 자는 자화(子華).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문제(文帝). 초대 황제 무제(진패선)의 형 시흥왕 진도담(始興王 陳道談)의 장남이다.

 

진패선은 왕승변의 부장과 강남의 토호의 반란을 평정하다 죽고, 형 시흥왕 진도담의 아들 문제가 제위를 물려받아 영주를 확보하고, 북주를 비롯한 북제, 후량과 대치했다. 문제(文帝)는 내정에 전념하여 국내를 안정시켰다.

문제는 아들 임해왕 진백종에 의해 계승되었다

 

 

진욱(陳頊, 528년 ~ 582년)은 중국의 남조 의 제4대 황제(재위:568년 ~ 582년). 자는 소세(紹世). 아명은 사리(師利).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선제(宣帝). 제2대 황제 문제의 남동생. 아들은 태자 진숙보(후주), 양주자사·시흥왕 진숙릉(始興王 陳叔陵), 상주자사·건안왕 진숙경(建安王 陳叔卿), 표기장군·장사왕 진숙견(長沙王 陳叔堅), 진숙중(陳叔重)등 다수가 있다.

 

그의 형 문제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폐제 백종을 보좌하였다. 문제의 아들 임해왕(폐제 진백종) 때 북주, 후량과 내통한 화교의 난을 평정했으나, 568년 실권을 장악한 진욱 (4대 선제, 宣帝)가 그를 폐위하고 살해한 후 즉위하였다.

 

그후 국력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575년 명장 오명철(吳明徹)을 시켜 북제를 공격해, 숙적 왕림(王琳)을 죽이고 수양을 빼앗아 강북으로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북주의 맹공에 의해 후에 강북 영토를 빼앗겨 실의에 빠져 죽었다.

 

 

진숙보(陳叔寶, 553년 ~ 604년)는, 중국의 남북조 시대 의 제 5대(마지막)의 황제(재위:582년 ~ 589년). 자는 원수(元秀). 진나라의 후주(後主)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군주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진숙보(陳叔寶; 후주)가 즉위하면서 정치를 등한시하고 놀기만 해 통일의 시기가 가까이 왔음을 알린다. 진숙보는 사치와 방종에 놀아 간신들의 참소만 들어 나라가 크게 피폐해져 있었다.

 

그리고 588년 수 문제 양견은 기어코 진나라에 대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楊廣; 후에 양제(煬帝))이었고, 51만 8천이라는 과장되었다고 생각되는 대군 앞에 다음해 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은 손쉽게 함락되어, 진나라 황제 진숙보(陳叔寶)는 우물에 숨어 있다가 사로잡혔다. 양견은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