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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3 (오호 십육국 시대 : 성한,후조) 본문
중국의 역사 33 (오호 십육국 시대 2 : 성한,후조)
주요국가
나라명 | 시조 | 존속 기간 | 민족 |
---|---|---|---|
전량 | 장궤 | 301년 - 376년 | 한족 |
전조 | 유연 | 304년 - 329년 | 흉노 |
성한 | 이특 | 304년 - 347년 | 파촉 |
후조 | 석륵 | 319년 - 351년 | 갈족 |
모용황 | 337년 - 370년 | 선비 | |
전진 | 부견 | 351년 - 394년 | 저족 |
후연 | 모용수 | 384년 - 409년 | 선비 |
후진 | 요장 | 384년 - 417년 | 강족 |
서진 | 걸복국인 | 385년 - 431년 | 선비 |
후량 | 여광 | 389년 - 403년 | 저족 |
남량 | 독발오고 | 397년 - 414년 | 선비 |
북량 | 저거몽손 | 397년 - 439년 | 노수호 |
남연 | 모용덕 | 400년 - 410년 | 선비 |
서량 | 이고 | 400년 - 421년 | 한족 |
하 | 혁련발발 | 407년 - 431년 | 흉노 |
북연 | 풍발 | 409년 - 436년 | 한족 |
나라명 | 시조 | 존속 기간 | 민족 |
---|---|---|---|
구지 | 양무소 | 296년 - 506년 | 저족 |
대 | 탁발의로 | 315년 - 376년 | 선비 |
염위 | 염민 | 350년 - 352년 | 한족 |
서연 | 모용홍 | 384년 - 394년 | 선비 |
적위 | 적요 | 388년 - 392년 | 정령 |
후촉 | 초종 | 405년 - 413년 | 한족 |
우문부 | 우문막규 | 302년 - 344년 | 선비 |
단부 | 단일육권 | 310년 - 357년 | 선비 |
성한
성한(成漢, 304년~347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티베트계 저족(氐族)의 일파였던 파저족(巴氐族)의 이웅(李雄)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서진(西晉) 말인 304년에 건국되어 국호를 성(成)이라 하였는데 338년에 이수(李壽)가 국호를 한(漢)으로 고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를 합하여 성한(成漢)이라 한다. 전촉(前蜀) 혹은 성촉(成蜀)이라고도 부른다.
298년에 이특(李特)이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 6군(郡)의 유민들을 이끌고 촉(蜀)에 들어왔다. 303년에 성도(成都)의 일부를 장악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곧 전사하였고, 뒤를 이어 이류(李流)·이웅이 무리를 이끌어 12월에 성도를 함락하고 익주를 장악하였다. 304년 10월, 이웅은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성도왕(成都王)에 즉위하였으며 306년 6월에는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정하였다.
이웅은 현자 범장생(范長生)을 승상으로 삼고 법을 간소화하고 현명한 정치를 펼쳐 30년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안정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후계자로 형의 아들인 이반(李班)을 정하여 아들들의 불만을 샀다. 334년에 이웅이 죽고 이반이 즉위하자 곧 이웅의 아들인 이월(李越)·이기(李期)가 반정을 일으켜 이반을 죽이고 이기가 즉위하였다.
이기는 폭정을 펼쳐 성의 국력은 쇠퇴하였다. 이기의 숙부 이수(李壽)는 이기의 폭정으로 위협을 받아 338년에 반정을 일으켜 이기를 폐위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수는 자신의 봉국명에 따라 국호를 한(漢)으로 고쳤다. 이수의 치세에도 사치를 일삼고 폭정을 펼쳐 성한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으며, 343년에 뒤를 이은 이세(李勢)도 폭정을 일삼았다.
347년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에 의해 5대 34년만에 멸망하였다.
역대황제일람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시조 (始祖) |
경제 (景帝) |
이특(李特) | 건초(建初) 303년 ~ 304년 | 303년 | |
- | 진문왕 (秦文王) |
이류(李流) | " | 303년 ~ 304년 | |
- | 성도왕 (成都王) |
이웅(李雄) | 건흥(建興) 304년 ~ 306년 | 304년 ~ 306년 | |
1대 | 태종 (太宗) |
무황제 (武皇帝) |
이웅(李雄) | 안평(晏平) 306년 ~ 310년 옥형(玉衡) 311년 ~ 334년 |
306년 ~ 334년 |
2대 | - | 애황제 (哀皇帝) |
이반(李班) | - | 334년 |
3대 | - | 폐제 (廢帝) {유공(幽公)} |
이기(李期) | 옥항(玉恒) 335년 ~ 338년 | 334년 ~ 338년 |
4대 | 중종 (中宗) |
소문황제 (昭文皇帝) |
이수(李壽) | 한흥(漢興) 338년 ~ 343년 | 338년 ~ 343년 |
5대 | - | - | 이세(李勢) | 태화(太和) 344년 ~ 346년 가녕(嘉寧) 346년 ~ 347년 |
343년 ~ 347년 |
- 중종 소문제가 338년에 국호을 성(成)에서 한(漢)으로 변경하였다.
이특(李特, ? ~ 303년)은, 오호 십육국 시대 파저족(巴氐族) 출신의 무장으로 성한(成漢)을 건국한 이웅(李雄)의 아버지이다. 자는 현림(玄林), 이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어 묘호를 시조(始祖), 시호를 경제(景帝)라고 하였다.
이특은 파저족 출신으로 무용으로 이름난 명사였다. 298년, 옹주(雍州 : 간쑤 성 동부) 지역에 기근이 들어 천수(天水) 등 6개 군에서 많은 유랑민이 발생하였다. 이들 유랑민은 이특·이상 형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한중(漢中)으로 이동하였는데, 서진(西晉) 정부가 이들 유민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이특은 지방관에게 뇌물을 써서 이를 무마하고 촉(蜀)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300년, 서진의 익주자사(益州刺史) 조흠(趙廞)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협력하여 조흠이 익주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301년에 조흠이 이특 형제의 힘을 두려워하여 이특의 형인 이상을 주살하고 이특도 죽이려 하였다. 이에 이특은 반격하여 성도(成都)를 점령하고 조흠을 죽였다. 이때 서진의 나상(羅尚)이 이끄는 토벌군이 근접해 오자, 이특은 나상에게 성도를 넘겨주고 항복하였다. 이 공적에 의해 이특은 선위장군에 임명되고, 장락향후(長樂郷侯)에 봉해졌다.
이후 나상은 이특을 따르는 유민들을 해산시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고, 이특은 유민들로부터 추대받아 거병하였다. 이특은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을 자칭하고, 촉의 백성들에게 간략한 법령을 약속하고 재화를 베풀며 인재를 선발했다. 302년에는 대장군·익주목(大將軍益州牧)을 자칭하였다. 303년 정월, 이특은 성도의 소성(小城)을 함락하고 나상의 군대를 태성(太城)에 고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연호를 독자적으로 정하여 독립적인 세력임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성도 함락 이후 이특은 방심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였으며, 이로 인해 2월에 기습해온 나상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류(李流, 248년 ~ 303년)는, 오호 십육국 시대 파저족(巴氐族) 출신의 무장으로 성한(成漢)을 건국한 이웅(李雄)의 숙부이다. 자는 현통(玄通), 이웅에 의해 추존되어 시호를 진문왕(秦文王)이라 하였다.
이류는 파저족 출신으로 이특의 동생이다. 이특과 함께 유랑민을 이끌고 촉(蜀)으로 이주하였다. 이특과 함께 거병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303년 2월, 이특이 나상(羅尙)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자 뒤를 이어 군대를 이끌었다. 한때 나상의 군대에 압도되어 항복을 생각하였으나 조카 이웅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이웅이 군사를 이끌어 나상의 군대에 맞서고 익주(益州)의 현자 범장생(范長生)이 식량을 원조하여 주자 기세를 만회하여 나상의 군대를 압박하였다.
9월에 병에 걸려 이웅에게 후사를 맡기고 사망하였다.
이웅(李雄, 274년 ~ 334년, 재위:304년 ~ 334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성한(成漢)의 초대 황제이다. 자는 중준(仲儁)이고,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무제(武帝)이다.
이웅은 파저족(巴氐族) 출신의 무장 이특(李特)의 셋째 아들로 274년 출생하였다. 이특이 301년에 거병하자 그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303년 2월, 이특이 전사하자 뒤를 이은 이류(李流)의 밑에서 활약하였다. 서진(西晉)의 나상(羅尙)의 군대가 맹공을 가해 이류는 항복하려 하였으나 이웅이 반대하여 항복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군대를 이끌고 분투하여 나상의 군대를 압도하게 되었다. 9월에 이류가 병사하자 뒤를 이어 대장군·익주목(大將軍益州牧)을 자칭하였다.
윤12월, 이웅은 나상을 물리치고 성도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익주 지역을 장악하였다. 익주의 현자 범장생(范長生)을 영입하려 하였으나 범장생이 거절하여 실패하였다. 304년 10월, 이웅은 여러 부하들의 추대로 성도왕(成都王)에 즉위하고 연호를 고쳐 건흥(建興)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를 성한이 건국된 기점으로 본다. 306년 3월에는 범장생이 이웅에게 투신하였고 이웅은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았다. 6월에 이르러 이웅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이웅의 치세에는 범장생 등에 의해 법을 간소화하고 현명한 정치를 펼쳐 30년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안정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정실 황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하여 후궁 소생의 아들 10여 명만 두었으며, 일찍 죽은 형의 아들 이반(李班)을 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일부 종실들 사이에 반발이 있었다.
334년에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반(李班, 288년 ~ 334년, 재위:334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성한(成漢)의 2대 황제이다. 자는 세문(世文)이고, 시호는 여태자(戾太子)·애제(哀帝)이다.
이반은 이탕(李蕩)의 아들로, 이탕은 이웅의 맏형이었다. 이탕이 성한의 건국 과정에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반은 이웅이 거두어서 키웠다. 이웅은 정실 황후 임씨(任氏)에게 이반을 아들처럼 키우도록 하였으며, 이반이 가문의 적통이었기 때문에 이반을 태자로 삼았다. 324년에 여러 신하들이 이반 대신에 이웅의 자식들을 계승자로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나 이웅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반은 천성이 겸손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웅은 이런 이반을 총애하여 정사에 자주 참여하게 하였다.
334년 6월, 이웅이 병에 걸리자 효성이 지극한 이반은 이웅을 정성으로 돌보았다. 곧 이웅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모든 국사를 건녕왕(建寧王) 이수(李壽)에게 맡겨 둔 채 자신은 상례(喪禮)만 치렀다. 이에 이웅의 아들들은 이반이 친형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시기하여 모반을 꾸몄다. 이반의 동생 이오(李玝)가 모반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경고하였으나 이반은 장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경고를 무시하였다. 이월(李越)과 이기(李期)는 10월 1일 밤에 이반이 빈소를 지키고 있는 틈을 타서 이반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였다.
이기는 이반에게 여태자(戾太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338년에 이수가 애황제(哀皇帝)라고 시호를 고쳤다.
이기(李期, 312년 ~ 338년, 재위:334년 ~ 338년)는 오호십육국 시대 성한(成漢)의 3대 황제이다. 자는 세운(世運)이고, 시호는 유공(幽公)이다.
이기는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이다.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였다.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기는 자파 세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상벌을 가볍게 여겨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국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즉위 초에 이기는 명망이 높았던 대장군 이수(李壽)를 경계하여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아 북쪽 변경으로 쫒아내었으며, 폭정을 자행하여 신하들이 두려워 하였다.
338년에 이수가 모반을 획책하자 이를 경계하여 첩자를 파견하고 이수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에 이수가 거병하여 성도(成都)로 접근하였으나 이기는 대비를 하지 않아 결국 성도가 함락되었다. 처음에 이수는 이기의 황위를 존중하여 이기의 도당을 처형하는 것도 이기에게 표문을 올리고 행하였으나 곧 태후 임씨(任氏)의 명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였다. 공도현공(邛都縣公)에 봉해진 이기는 5월에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이수(李壽, 300년 ~ 343년, 재위 : 338년 ~ 343년)는, 오호 십육국 시대 성한(成漢)의 4대 황제이다. 자는 무고(武考),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소문제(昭文帝)이다.
이수는 이특(李特)의 동생 이양(李驤)의 아들로 300년에 태어났다. 이웅(李雄)의 치세에 장군으로 여러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하여 명망을 쌓았다. 333년에 영주(寧州)를 평정하여, 건녕왕(建寧王)에 봉해졌다. 334년에 이웅이 병에 걸리자 이웅은 이수를 보좌역으로 임명하였으며, 이웅이 죽고 이반(李班)이 즉위하자 이반을 대신하여 정치를 돌보았다.
10월에 이월(李越)·이기(李期)가 이반을 죽이고 이기를 즉위시키자 이수는 대도독(大都督)의 직위를 추가로 부여받고 한왕(漢王)으로 이봉되었다. 이때 조카인 이시(李始)가 이수를 부추겨 모반을 꾸미다가 이수가 말을 듣지 않자 이수를 이기에게 거짓으로 참소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참소를 듣지 않고 이수에게 이오(李玝)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수가 이오를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자 이수를 양주(梁州)의 자사로 삼고 부(涪)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기가 폭정을 일삼자 이수는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변란을 핑계로 입조하지 않았다. 이수는 재야의 명사 공장(龔壯)을 찾아가 안전할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이에 공장은 반정을 일으켜 이기를 몰아내고 동진(東晉)에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이수는 모반을 계획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기가 동정을 염탐하고 이수의 동생 이유(李攸)를 살해하였다. 이에 이수는 이수를 잡을 것을 명하는 이기의 밀조를 위조하여 부하들을 선동하고 거병하여 성도를 공격하였다.(338년) 이에 대비하지 않고 있던 이기는 성도를 함락당하고 황궁에 유폐되었으며 이수에게 사신을 보내 조정을 꾀하였다. 이수는 이기에게 이기의 도당인 이월 등을 죽일 것을 상신하여 이기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태후 임씨(任氏)의 명령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였다.
이수는 동진에 항복할 것을 권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국호를 자신의 봉국에 따라 한(漢)으로 고쳤다. 또한 이웅의 후손들을 주살하여 왕권을 공고히 하였으며 동진을 공격하였다. 후조(後趙)의 석호(石虎)와 동진에 대한 협공을 계획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후조에서 귀환한 신하들이 후조의 수도 업(鄴)이 위엄있고 화려하다고 칭찬하고, 석호가 공포정치로 국가를 통제하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에 이수도 석호를 따라 성도에 사치스러운 궁궐을 조영하고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로 인해 성한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간언하는 채흥(蔡興)·이억(李嶷) 등의 신하들도 살해당하였다.
343년에 병사하였다. 안창릉(安昌陵)에 매장되었다.
이세(李勢, ? ~ 361년, 재위 : 343년 ~ 347년)는, 오호 십육국 시대 성한(成漢)의 마지막 황제이다. 나라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하였다. 역사가들은 흔히 성한 후주(後主)라고 부른다.
이세는 이수(李壽)의 맏아들로 343년에 이수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이광(李廣)이 황태제(皇太弟)가 되기를 원하였다. 이에 345년에 마당(馬當)·해사명(解思明) 등이 이광을 황태제로 삼기를 권하였으나 이세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는 마당 등이 이광과 모의하였을 것이라 의심하고 이들을 잡아 죽이고 이광을 체포하여 작위를 깎았다. 이에 이광은 자살하였다. 346년에는 이혁(李奕)이 모반을 일으켜 성도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전사하였으며, 촉의 산악 지대에 살던 요족(獠族)이 평지로 이주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세는 교만하고 음란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고 궁중에 틀어박혀 중요 신료들을 만나지 않았다. 또한 아첨하는 근신들을 총애하고 형벌을 사사롭게 실시하는 등 폭정을 펼쳤다.
346년 11월,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침입하였다. 이세는 환온의 침략에 맞서 347년 2월에 대군을 편성하여 맞서게 하였다. 제장들은 요충지를 점거하고 방어 작전을 펼칠 것을 권하였으나 전장군(前將軍) 이잠견(李昝堅)은 정면 승부를 위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환온은 팽모(彭模)에서 군사를 추스려 주력을 이끌고 성도로 진격하였으며, 길이 엇갈린 것을 깨달은 성한군은 다시 환온의 뒤를 쫓았으나 동진군이 성도 근방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와해되었다. 이세는 남은 군대를 동원하여 동진군을 공격하여 한때 승세를 잡았으나 곧 반격을 당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밤을 틈타 성도를 탈출한 이세는 곧 항복하였다.
항복한 이세는 건강(建康)으로 보내져 귀의후(歸義侯)에 봉해졌으며, 361년까지 동진에서 살다가 사망하였다.
후조
후조(後趙 319년~351년)는 오호십육국 시대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국호는 원래 조(趙)이지만, 같은 시대 유연(劉淵)에 의해 건국된 같은 이름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유연의 조를 전조(前趙{혹은 조한趙漢})라 하고, 석륵의 조를 후조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또는 석씨의 왕조이기 때문에 석조(石趙)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
후조의 시조 석륵은 원래 유연의 휘하에서 활약한 장수였다. 312년에 석륵은 양국(襄國 : 허베이 성 형태)을 중심으로 하북 일대에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319년에는 조왕(趙王)에 즉위하여 완전히 독립하여 국가를 건국하였다. 후조와 전조는 화북을 양분하여 서로 대립하였으며, 후조는 주로 낙양 동쪽 지역을 장악하였다. 325년에 전조의 군대를 격파하여 낙양 동쪽 지역에서의 패권을 확보하였으며, 그 결과 동진(東晉)으로부터 회하(淮河) 이북의 영토를 대부분 빼앗아 장악하였다. 328년에는 낙양에서 전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전조의 황제 유요를 포로로 잡았으며, 329년에는 석호(石虎)를 파견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 2월, 석륵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였으며 9월에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333년, 석륵이 죽자 중산왕(中山王) 석호(石虎)가 권력을 잡고 태자 석홍(石弘)을 즉위시켰다. 석홍의 전횡에 반발하여 장안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석호는 334년에 석홍을 폐위시키고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을 자처하며 후조를 섭정하여 다스렸다. 석호는 수도를 업(鄴)으로 옮기고 불교를 진흥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무리한 토목 공사와 대외 원정을 실시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338년에는 단부(段部)를 멸망시키고, 339년에는 동진을 공격하여 장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340년, 342년에는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여 가혹한 징병과 징발을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346년에는 전량(前凉)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348년에 후계자 문제로 인해 대규모 숙청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서쪽으로 유배되었던 10만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후계자 문제와 반란으로 인해 석호는 크게 쇠약해졌으며, 349년에 황제에 즉위한 석호는 곧 사망하였다. 석호가 죽자 11세의 어린 석세(石世)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곧 반정이 일어나 석준(石遵)이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인해 동진군이 공격해 오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쿠데타 과정에서 석호의 양자 석민(石閔)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이를 숙청하려던 석준은 석민의 공격을 받고 폐위·살해되었다. 석민은 석감(石鑒)을 황제에 옹립하고 후조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350년, 석민은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염위(冉魏)를 건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석민은 후조의 주요민족이던 갈족을 학살하였다. 양국에서 석지(石祗)가 일시적으로 후조를 부활시켰으나 351년에 부하의 반란으로 살해되어 후조는 멸망하였다.
역대황제일람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 조왕 (趙王) |
석륵(石勒) | 태화(太和) 328년 ~ 330년 | 319년 ~ 329년 | |
1대 | 고조 (高祖) |
명황제 (明皇帝) |
석륵(石勒) | 건평(建平) 330년 ~ 333년 | 330년 ~ 333년 |
2대 | - | 폐제 (廢帝) 해양왕 (海陽王) |
석홍(石弘) | 연희(延熙) 334년 | 333년 ~ 334년 |
3대 | 태조 (太祖) |
무황제 (武皇帝) |
석호(石虎) | 건무(建武) 335년 ~ 348년 태녕(太寧) 349년 |
334년 ~ 349년 |
4대 | - | 폐제 (廢帝) 초왕 (譙王) |
석세(石世) | - | 349년 |
5대 | - | 폐제 (廢帝) 팽성왕 (彭城王) |
석준(石遵) | - | 349년 |
6대 | - | 폐제 (廢帝) 의양왕 (義陽王) |
석감(石鑒) | 청룡(靑龍) 350년 | 349년 ~ 350년 |
7대 | - | 신흥왕 (新興王) |
석지(石祗) | 영녕(永寧) 350년 ~ 351년 | 350년 ~ 351년 |
석륵(石勒, 274년 ~ 333년, 재위: 319년 ~ 333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창건자이다. 흉노(匈奴)의 하위 부족인 갈족(羯族) 출신으로 전조(前趙)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독립하여 후조를 건국하였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명제(明帝)이다.
건국 이전
석륵은 상당군(上黨郡 : 산시 성 유사) 출신으로 갈족 소부락의 수령 주갈주(周曷硃)의 아들이다. 태안 연간(302년 ~ 303년)에 기근이 들어 부족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석륵도 떠돌아 다니다가 서진(西晉)의 동영공 사마등에게 사로잡혀 산동 지역의 사환에게 노예로 팔렸다. 그러나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노예에서 해방되고 근방의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석륵은 목장 주인 급상(汲桑)과 함께 도적이 되었으며 팔왕의 난에 참여하여 용병으로도 활약하였다. 이때 급상은 석륵에게 성과 이름을 지어주었다.
용병으로 활약하다가 패배하고 군사력과 근거지를 상실하자, 석륵은 307년에 한(漢)의 유연(劉淵)에게 항복하였다. 유연의 휘하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석륵은 독자적인 병력을 이끄는 군단의 수장으로 출세하였으며, 유연이 사망한 후 유총(劉聰)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석륵은 하북 및 하남 지역을 휩쓸고 다녔으며, 310년에는 한수를 건너 장강 유역까지 진격하였다. 311년, 낙양 공략(영가의 난)에 참가하여 도망치던 왕연(王衍)의 무리 10만을 격파하고 유요(劉曜), 왕미(王彌) 등과 함께 낙양을 함락시켰다. 낙양 함락 이후에도 황하 이남에서 약탈전을 지속하였으며, 석륵을 죽이고 군대를 탈취하려고 모의하던 왕미를 속여 죽이고 오히려 왕미의 군대를 흡수하였다.
석륵은 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으나 식견은 뛰어나고 인재를 모으는 것을 좋아하였다. 309년에는 하북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선비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이라는 부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등용한 장빈(張賓)은 석륵의 1등 참모로 활약하였다. 312년, 석륵은 수춘(壽春)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장마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 이때 장빈은 석륵에게 약탈전을 그만두고 기주(冀州 : 하북성 중남부) 지역에 거점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석륵은 이를 따라 양국(襄國 : 허베이 성 형태시)을 수도로 하여 하북 일대에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316년에는 세력권 안으로 쳐들어온 병주(幷州 : 산시 성)의 유곤을 격파하고 병주 북부 일대를 차지하였다.
318년에 한(漢)의 황제 유총이 사망한 후, 반란이 일어나 황제 유찬(劉粲)이 죽고 병주 중남부 일대를 반란군이 점거하였다. 석륵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한 유요의 명을 받아 조공(趙公)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석륵의 군대에 패배한 반란군이 유요에게 항복하자 석륵은 분노하여 수도 평양(平陽)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이후 유요와 화친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유요는 사신을 죽여버렸으며, 석륵은 유요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세력이 되었다.
치세
319년 11월, 석륵은 조왕(趙王)에 즉위하여 조나라를 건국하였다. 장안의 유요도 국호를 조(趙)로 바꾸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하여 구분한다. 건국 이후 석륵은 주변 지역을 평정하는 데 주력하여 청주(靑州 : 산둥 성 동부), 연주(兗州 : 산둥 성 서부) 등을 점령하였다.
324년부터 전조와 후조는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325년, 후조의 병주가 유요의 전조에게 항복하였으며, 동진(東晉)의 사주(司州 : 허난성 중남부)도 유요에게 투항하여,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이 포위되게 되었다. 석륵은 석호(石虎)를 구원군으로 보내어 전조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하였다. 전조의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하였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였다. 이로 인해 병주, 사주 일대를 후조가 모두 장악하였으며 화북의 동진 세력도 크게 위축되어 후조는 회수(淮水) 이북을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328년, 후조의 석호는 병주 지역에 남아있던 전조의 거점을 공격하였다. 유요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며, 석호는 크게 패배하여 낙양 일대를 유요가 포위하였다. 낙양 포위는 3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며, 석륵은 구원군을 이끌고 낙양의 유요를 공격하였다. 유요는 반격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여 석륵의 구원군이 근접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포위를 풀고 낙양 서쪽에 포진하였다. 12월 5일, 석륵은 유요의 군대를 공격하였으며, 유요가 술에 취한 채로 지휘하였기 때문에 석륵은 크게 승리하고 유요도 포로로 잡았다. 석륵은 유요를 처형하였으며, 329년에는 상규(上邽 : 간쑤 성 천수)로 도망쳐 있던 전조의 잔당도 토벌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 2월, 석륵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였으며, 뒤이어 9월에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333년, 석륵이 병으로 몸져 눕자,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석호는 궁궐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렸다. 7월에 석륵이 사망하자 석호는 석륵의 시신을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게 하였다.
석홍(石弘, 313년 ~ 334년, 재위 : 333년 ~ 334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2대 황제이다. 친족 석호(石虎)에 의해 폐위되어 묘호와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폐위된 후 해양왕(海陽王)에 봉해졌다.
석홍은 석륵(石勒)의 차남으로, 330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학문에 뛰어나 국가를 안정시킬 인재로 인정받았으나 심약하고 군사적 재능이 떨어졌다고 평가되었다. 당시 후조의 중산왕(中山王) 석호는 강대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석륵과 후조의 대신들은 석홍이 석호를 통제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석호의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에 석호를 견제하지는 못하였다.
333년에 석륵이 병환으로 몸져 눕자, 석호는 궁궐을 장악하고 조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등 전횡을 부렸다. 그리고 7월에 석륵이 사망하자 석호는 석홍을 황제에 즉위시켰다. 석홍은 석호에게 황위를 양보하려 하였으나 석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석홍을 제위에 올려 놓고 실권은 자신이 장악하였다. 여러 왕으로 책봉되어 있던 석륵의 자식들은 모두 폐위되거나 거세되고, 석호의 자식들이 왕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석호는 이를 모두 격파하였다.
334년 4월, 석홍은 석호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석호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다시 조정 대신들이 선위할 것을 권하자, 석호는 석홍을 폐위시키고 자신은 천왕(天王)의 지위에 올라 섭정하였다. 폐위된 석홍은 해양왕에 봉해졌으며, 숭훈궁(崇訓宮)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당하였다.
석호 (石虎, 295년 ~ 349년, 재위:334년 - 349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3대의 황제이다. 자는 계룡(季龍),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제(武帝)이다.
즉위 이전
석호는 석륵(石勒)의 조카로 29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멱(寇覓)이며, 석륵의 아버지 주갈주(周曷硃)가 석호를 아들로 삼았다.그래서 석호와 석륵이 형제로 기록되기도 한다. 태안(太安) 연간(302년 ~ 303년)에 기근이 들어 갈족(羯族)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석륵과 헤어져 석륵의 모친과 함께 살았다. 311년, 병주(幷州)의 유곤(劉琨)이 석륵의 모친과 석호를 찾아 석륵에게 송환하면서 서진(西晉)으로 망명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석륵은 석호와 모친을 거두고 망명 제의는 거절하였다.
석호는 천성이 잔인하고 무도하여 석륵의 군중에서도 많은 무리를 일으켰다. 이에 석륵은 석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모친이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석호가 장성하여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석륵은 석호를 장군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석호는 석륵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319년에 석륵이 후조를 건국하자 중산공(中山公)에 책봉되었고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325년에 전조(前趙)의 군대가 낙양(洛陽)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며, 328년에는 전조의 병주 거점을 공략하였다. 329년에는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진주(秦州)를 공략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에 석륵이 황제에 즉위하자 중산왕(中山王)에 책봉되었으며, 후조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석륵과 신하들이 경계하였다.
333년에 석륵이 병에 걸려 몸져 눕자, 석호는 궁궐을 장악하고 석륵의 병상을 통제하여 국권을 장악하였다. 7월에 석륵이 사망하자, 석호는 태자 석홍(石弘)을 황제에 즉위시켜 꼭두각시 황제로 만들고 실권은 자신이 장악하였다. 또한 석륵의 자손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자손들을 종실왕에 책봉하여 권력을 공고하게 하였다. 석호의 전횡에 반발하여 지방의 석륵계 종실왕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석호가 모두 진압하였다. 이에 334년, 석홍은 석륵에게 선위할 뜻을 비추었고, 처음에는 거절하였던 석호는 다시 조신들이 권하자 석홍을 폐위하고 자신은 섭정의 지위에서 다스릴 것을 천명하였다.
치세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이 되어 후조를 통치하게 된 석호는 양국(襄國)과 업(鄴)에 궁궐을 수축하고 황하에 다리를 놓는 등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소모시켰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다. 한편, 석호는 석륵의 치세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불교를 깊게 믿어 널리 포교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석호의 치세에 불교가 널리 퍼졌다. 335년에는 수도를 업으로 옮겼고 337년에는 섭정을 그만두고 천왕(天王)에 즉위하였다.
석호는 주변의 여러 국가들에 대해서 무리한 원정을 실시하여 영토를 늘리기도 하였으나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338년에 선비족(鮮卑族) 단부(段部)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곧바로 모용부(慕容部)의 전연(前燕)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339년에는 동진(東晉)을 공격하여 수춘(壽春)을 비롯하여 장강 이북을 대부분 점령하였다. 340년에 다시 전연을 공격하기 위하여 징병과 물자 징발을 가혹하게 실시하여 백성들이 많이 피폐해 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한 전쟁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342년에는 동진을 공격하기 위해 다시 가혹한 징병과 징발을 실시하였으나 징조가 좋지 않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346년부터 전량(前凉)을 공격하여 일부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한편 후조는 석호의 아들들이 벌인 후계자 분쟁으로 인해 여러차례 잔혹한 숙청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337년에는 태자 석수(石邃)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여 석수와 그의 자손 수십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였고, 348년에는 태자 석선(石宣)이 석호가 총애하는 아들 석도(石韜)를 살해하자 크게 분노하여 석선과 그의 자손 수십 명을 살해하고 동궁(東宮 : 태자궁)의 수비군 10만 명을 양주(凉州)로 유배시켰다. 이 과정에서 석호가 총애하던 손자가 참혹하게 처형되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석호는 병에 걸려 쇠약해졌다.
이때 양주로 유배된 동궁 수비군 10만 명이 반란을 일으켜 관중을 장악하였다. 반란군은 크게 위세를 떨쳐 한때 업에까지 육박하였으나 요익중(姚弋仲)이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군의 기세에 위축된 석호는 더욱 쇠약해졌다. 석세(石世)가 태자로 책봉되고, 석호는 후계자를 위해 여러 아들들을 요충지의 종실왕으로 삼고 요직에 임명하였다. 349년 정월에 석호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석호는 병으로 몸져 누웠으며, 이때를 틈타 석세의 일파인 장시(張豺) 등은 요직에 있는 석호의 자식들을 숙청하여 석세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 하였다.
석호는 349년 4월에 사망하였다.
당나라(唐) 때 편찬된 《진서(晉書)》는 석호의 이름이 당나라 고조 이연의 부친 이호(李虎)의 휘에 저촉되기 때문에 피휘하여 석호의 자인 계룡으로 표기하였다.
석세 (石世, 339년 ~ 349년, 재위:349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4대의 황제이다.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하였으며 폐위된 후에 초왕(譙王)에 봉해졌다.
석세는 석호(石虎)의 아들로 어머니는 유씨(劉氏)이며 339년에 태어났다. 석호는 348년에 태자 석선(石宣)의 모반을 처단하고 난 후에 장성한 아들을 태자로 삼으면 다시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고 10세의 석세를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장시(張豺), 장거(張舉), 이농(李農) 등을 석세의 측근으로 보필하게 하였다. 349년에 병으로 쇠약해진 석호는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이를 보필하도록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관중(關中 : 산시 성 중부)을 진수하게 하였으며 연왕(燕王) 석빈(石斌)을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석세의 모후 유씨는 석준이나 석빈이 황위를 찬탈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축출하려 하였다. 마침 석호의 병세가 깊어졌기 때문에 유씨는 석빈을 속여 수도 업(鄴)으로 오는 것을 막다가 황명을 위조하여 살해하였으며, 업으로 들어온 석준도 석호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석준이 부임지로 떠나고 난 후 석호가 죽자, 석세가 즉위하였다.
황태후(皇太后)가 된 유씨는 석준과 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鑒)을 좌·우승상으로 삼아 회유하려 하였다. 정권을 잡은 장시, 장거, 이농 등은 곧 내분을 일으켰고, 패배한 이농은 광종(廣宗)으로 달아나 유민을 모아 반군을 조직하였다. 이에 장시는 장거를 보내 이농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업을 수비하는 병력이 외부로 돌려졌으며, 이때를 틈타 석준이 일으킨 군대가 업을 접수하였다. 석세는 폐위되어 초왕(譙王)에 봉해졌으며 태후 유씨도 폐위되었다가 곧 살해되었다.
석준 (石遵, ? ~ 349년, 재위:349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5대의 황제이다.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하였다.
석준은 석호(石虎)의 아들로 석호의 치세 때는 팽성왕(彭城王)에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349년에 석호에 의해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으며 관중(關中 : 산시 성 중부)을 진수하도록 명을 받았다. 이에 업(鄴)으로 귀환한 석준은 황후 유씨(劉氏), 장시(張豺) 등의 방해로 석호를 만나보지 못한 채 임지를 향해 떠났다. 곧 석호가 사망하고 석세(石世)가 즉위하였다. 석준은 하내(河內)에서 이 소식을 들었으며, 마침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중이던 포홍(蒲洪), 요익중, 석민(石閔) 등과 이성(李城)에서 조우하였다. 제장들이 석준에게 황위를 빼앗을 것을 권하자 석준은 찬탈을 결심하고 거병하였다.
이때 수도 업의 병력은 이농(李農)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석준은 손쉽게 수도를 장악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석준은 각지의 종실왕들을 위무하고 석민과 이농을 중용하였다. 그러나 석준의 즉위에 반대하여 패왕(沛王) 석충(石沖)이 계(薊)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동진(東晉)이 쳐들어와 서주(徐州 : 장쑤 성 북부)를 위협하였다. 석준은 석민을 파견하여 석충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농을 보내 동진군을 격파하였다. 한편 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가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동진의 양주(梁州)에서 관중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거병하지 못하였다. 이를 틈타 석준은 석포를 체포하고 관중을 안정시켰다.
정세가 안정되자 석준은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다. 석민은 석준의 쿠데타에서 큰 전공을 세운 후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등 전횡을 부렸다. 이로 인해 석준은 여러 종실왕들과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으나 태후 정씨가 반대하여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에 참여하였던 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鑒)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곧 석민이 반정을 일으켜 석감을 옹립하고 석준을 폐위·살해하였다.
석감 (石鑒, ? ~ 350년, 재위:349년 ~ 350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6대의 황제이다.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하였다.
석감은 석호(石虎)의 서자로 의양왕(義陽王)에 책봉되었다. 349년에 석세(石世)가 즉위하자 우승상(右丞相)에 임명되었으며, 석준(石遵)이 즉위하자 시중·태보(侍中·太傅)에 임명되었다. 11월, 석준은 석민(石閔)을 숙청하기 위해 석감을 비롯한 여러 종실왕들을 소집하여 모의하였다. 석감은 이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였으며, 석민은 반정을 일으켜 석준을 폐위·살해하고 석감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석감이 황제에 즉위하기는 하였지만, 후조의 실권은 석민이 쥐고 있었다. 석감은 석민을 대장군, 이농(李農)을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하였다. 석감은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다른 부하에게 누명을 씌워 석민의 보복은 피하였다. 양국(襄國)에서는 신흥왕(新興王) 석지(石祗)가 요익중(姚弋仲), 포홍(蒲洪)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석민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려 하였으며 이를 틈타 석민을 암살하려던 석감은 다시 암살에 실패하였다. 석민은 석감을 유폐하고 수도 업(鄴)의 한족(漢族)을 선동하여 호족(胡族 : 이민족)을 학살하였다.
350년 정월, 석민은 국호를 위(衛)로 고쳤고 각지에서 석민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윤정월에 석민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석감을 폐위·살해하였다.
석지 (石祗, ? ~ 351년, 재위:350년 ~ 351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7대의 황제이다.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하였다.
석지는 석호(石虎)의 서자로 신흥왕(新興王)에 책봉되었다. 349년에 석감(石鑒)이 즉위하고 석민(石閔)이 실권을 장악하자 양국(襄國)에서 요익중(姚弋仲), 포홍(蒲洪)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350년에 석감이 폐위되고 석민(후에 염민冉閔으로 개명)이 염위(冉魏)를 건국하자 석지는 양국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6월에는 염민에 반대하는 여러 이민족 세력을 규합하여 석민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였으며 10월에는 염민에게 수도를 포위당하였다. 석지는 351년에 황제 칭호를 폐지하고 조왕(趙王)을 자칭하며 전연(前燕)에 구원군을 청하였으며 2월에 염민의 포위군을 격파하였다. 부하 유현(劉顯)이 염민에게 매수되어 석지를 살해하였으며, 이로써 후조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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