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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2 (오호 십육국 시대 1 :전량,전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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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32 (오호 십육국 시대 1 :전량,전조)

두바퀴인생 2010. 3. 13. 05:54

 

 

중국의 역사 32(오호 십육국 시대 1 : 전량,전조)

 

 

 

오호 십육국 시대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는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5개의 비한족을 비롯한 16개의 국가가 회수(淮水) 북부에 여러 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조(前趙)가 건국된 304년부터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명칭의 유래

5호(五胡)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 등 다섯가지의 오랑캐(胡:비한족을 격하시켜 부르는 말)를 가리키는 말인데, 갈족은 흉노의 일파로서 따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갈족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을 건국한 것이나 선비족에서 탁발부(拓跋部), 모용부(慕容部), 독발부(禿髮部), 걸복부(乞伏部)가 각자 독립적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을 생각하면, 이들 북방 민족의 구체적 수를 헤아리는 데 별 의미가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5라는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에 결부되어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오호는 “비한족계 여러 민족”이란 말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16국이란 말은 북위 말엽의 사관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하였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다.

 

변천 과정

유라시아를 호령한 강력한 제국이었던 흉노제국은 중국 황제들의 적절한 견제책에 의해 서흉노, 북흉노, 남흉노로 분열되었고, 결국 끝까지 국가의 형태를 유지한 세력은 한(漢) 제국의 영향력하에 있던 남흉노였다. 그들은 황하 만곡의 오르도스 초원근방에서 중국의 번병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4세기 로마제국의 외곽에 존재했던 게르만의 수령들이 했던 역할들과 매우 유사하다.

서진 말기에 일어난 황위 계승 다툼은 엄청난 규모의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진은 황족을 왕으로 봉하며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그 결과 황위 계승권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왕이 여럿 존재하였다. 8명의 왕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를 벌인 이 내란을 팔왕의 난이라 부른다. 팔왕의 난은 306년에 끝났지만, 이로 인하여 서진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고, 8왕의 난 당시 왕족들이 전투를 위해 중국 내지에 정착해 살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함으로써 이들의 입지는 매우 커지게 되었다.

 

후한 말엽이었던 3세기 초 남흉노의 선우였던 호주천은 만리장성 내의 중국영토인 평양(平陽)으로 내려와 거점으로 삼고, 군웅들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던 중국 본토의 상황을 틈타 한(漢) 제국의 황족인 유(劉)씨를 칭하고[ 흉노의 선우중에는 한 황실의 공주와 혼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호주천은 이를 빌미로 유(劉)씨를 칭하는 것이다], 황실의 정통성을 표방했다.

4세기초 산서의 태원에서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흉노의 선우는 ‘유연(劉淵)’이라는 한(漢)의 황족 이름을 가진 인물이었다. 304년 서진(西晉)의 황제 혜제(慧帝 290~306)는 유연을 오부선우(五部單于)로 책봉하녔다.

 

이때 흉노족의 유연(劉淵)은 서진의 쇠퇴를 호기로 삼아 304년 병주(并州 ; 지금의 산서성)에서 자립해 한(漢)을 세웠다. 같은해 사천(四川)에서도 이웅(李雄)이 자립하여 성한(成漢)을 건국하였다. 감숙(甘肅) 지방에서도 서진의 양주자사였던 장궤(張軌)가 독립적인 정권{전량(前凉)}을 세웠으며 탁발부는 (代)를 건국하였다.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유연은 갈족 출신의 석륵과 한인 출신 장군 왕미(王彌)를 시켜 병주 일대를 공략하고, 308년 황제를 칭했으나, 310년에 죽고 아들 유화(劉和)가 이를 계승하였다. 유화는 인망이 없어 동생 유총(劉聰)이 제위를 찬탈했다. 유총은 311년에 낙양(洛陽)을 함락하고 서진 회제(懷帝)를 붙잡았다. 이것을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후 장안에서 민제(愍帝)가 옹립되었으나, 316년에 유총에게 패하여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에 서진의 왕족이었던 사마예가 남쪽의 건업(建業)에서 진을 재흥시키니 이 나라를 동진(東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은 유총 사후 후계자 쟁탈전에서 유요(劉曜)가 승리하여 즉위하였으며 국호를 조(趙)로 고쳤다. 그러나 하북 정벌에 나섰던 석륵이 자립하여 하북·하남·산동을 장악하여 낙양을 경계로 유요 정권과 화북을 양분하게 되었다. 석륵 또한 국호를 조(趙)라고 하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 유요 정권은 전조, 석륵 정권은 후조(後趙)라고 불렀다. 328년 유요가 낙양을 탈환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석륵의 조카 석호(石虎)에게 대패하여 포로가 된 뒤 살해당하니, 전조는 국력이 쇠퇴하여 후조에게 멸망하였다.

 

화북 대부분을 장악한 후조에서는 333년 석륵이 죽고 석홍(石弘)이 즉위했으나 석호가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했다. 석호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석호는 수도를 업(鄴)으로 옮겼고, 이 시기가 후조의 최전성기였다.



5호 16국 시대

석륵의 후계자인 석호(石虎, 334~349)는 말 그대로 인간백정이요, 잔인한 짐승이었다. 그의 잔인성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아들의 앞에서 자신이 총애했던 손자와 며느리를 산채로 찢어죽였고, 아들역시 잔인하게 죽였다. 자신의 가장 예쁜 첩을 불에 구워서 내오게 하였고, 이유없는 살인을 즐기던 변태적 살인마였다. 이런 인물이 열렬한 불교의 신봉자이자 보호자였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석호는 오늘날까지 회자될만한 괴이한 미친 짓을 계속 했지만, 그의 치세에 후조의 영역은 섬서와 산서, 호북, 산동, 호남, 강서 북부와 안휘성까지 확대되에 북으로는 선비계 유목민인 탁발의 영역과 경계를 이루었고, 남으로는 동진을 심하게 압박하였다.

349년 석호가 죽자 그의 광대한 제국은 그의 후계자들과 장군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이런 거대한 혼란속에 등장한 세력은 요동지역에 내려와 있던 선비일파의 모용씨족이었다. 이들의 수장이었던 모용준(募容儁)은 352년에 하북 전체와 산동, 산서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하북의 업(鄴, 현재의 창덕)에 수도를 정하고, 국호를 전연(前燕)이라 칭한 모용일가는 366년에 회수 북부와 낙양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석호의 수하에 부홍(苻洪)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부홍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많으나, 대체적으로 탕구트(티벳, 저족)나 몽골계통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350년 장안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부홍은 국호를 전진(前秦)이라 하였다. 그의 손자인 부견(苻堅)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군주였다. 그는 왕맹(王猛)과 같은 한족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불교와 농경을 크게 장려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후 모용일가의 전연(前燕)을 공격하여 낙양과 태원을 빼앗고, 370년 수도인 업(鄴)을 공략하여 전연을 영토를 모두 병합하고, 진정한 북중국의 주인이 된다. 376년에는 감숙에 위치한 전량(前凉)을 함락시키고, 철륵과 탁발을 쳐서 내몽골까지 장악한다. 382년에는 부장 여광을 서역으로 보내어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켰고, 신속을 거부한 쿠차를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349년에 석호가 죽자 석륵의 양자 석민(石閔)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즉위하였다. 석민은 이후 본래 성인 염씨(冉氏)로 돌아가고 염위(冉魏)를 세웠다. (염위는 워낙 단명한 왕조라 16국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후조는 351년에 염위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염위는 이민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였고 다수의 한인이 갈족을 상대로 대량의 학살을 벌였다.

 

한편, 337년 요서(遼西)에 근거지를 둔 모용부가 모용황(慕容皝)을 중심으로 전연(前燕)을 세우고, 349년 이후 후조 멸망의 혼란을 틈타 중원에 진출하였다. 전연은 352년에 염위를 멸망시켰으며, 같은 시기 섬서(陝西) 지방에서 저족의 부건(苻健)이 장안에서 전진(前秦)을 건국(350년)하였다.

 

화북이 혼란해지자 동진의 실권자 환온(桓溫)은 347년, 성한을 멸망시켜 촉(蜀) 지역을 장악하고 북벌을 감행하여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전진의 국력이 증가해 360년에는 화북을 전연과 양분하였다. 부건의 뒤를 계승한 부견(苻堅)은 뛰어난 인물로 한인 왕맹(王猛)을 등용해 국력을 키우며 대대적인 정벌로 각 나라를 정벌해 376년 화북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동진 정벌을 계획하여 100만이라 부르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가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군에게 대패한다.

 

 



부견의 동진 침공



비수 전투

북중국의 모든 이민족 왕조를 복속시키고, 실크로드의 지배권까지 장악한 부견은 이민족 왕조 최초로 전중국의 제패를 노리고 있었다. 383년 대군을 이끌고 동진으로 출정한 부견은 회수를 따라 진군하는 도중 벌어진 비수(淝水)전투에서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 치명적인 패배로 부견에 복종하고 있던 여러 장군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모용수의 반란은 부견의 전진(前秦)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진의 국력은 단번에 쇠퇴하고, 각 민족이 제각기 독립하기 시작했다. 하북·하남·산동 일대에는 후연(後燕)이 건국되고, 병주에는 대(代 ; 북위(北魏))와 서연(西燕)이 세워졌다. 섬서에는 후진(後秦)과 서진(西秦)이 생겼고, 감숙에는 후량(後凉)이 태어났다. 그 외에도 감숙 지방에는 여러 민족에 의해 약소국가들이 할거하였다.

 

산동과 하북을 차지한 모용수는 371년 후연(後燕)을 건국하였고, 모용일가의 또 다른 일족은 산서지방에 서연(西燕)을 건국하나 394년 모용수에 의해 합병된다. 섬서로 쫓겨난 부견은 한때 그의 부장이었던 요장(姚萇)에게 붙잡혀 처형되었고, 요장은 그곳에서 후진(後秦)을 세웠다. 감숙에서는 역시 부견의 부장이었던 여광이 후량(後凉)을 건국하였고, 부견의 신하였던 걸복국인(乞伏國仁)도 난주(蘭州)를 중심으로 서진(西秦)을 세웠다.
 

이들 가운데 모용수(慕容垂)의 후연과 요장(姚萇)의 후진이 가장 강력했다. 후연은 서연을 멸망시키고, 후진은 전진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대하였고 다시 화북을 동서로 양분하였으나, 탁발부의 북위와 흉노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건국한 하(夏)가 이들을 누르고 강대해졌다. 395년에 북위에 패배한 후연은 남연(南燕)과 북연(北燕)으로 분열되었고, 대부분의 영토를 북위에게 빼앗겼다. 후진 또한 하에게 공격을 당해 영토를 빼앗기다가 417년 동진의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다. 유유는 410년에 남연도 멸망시켰고, 그 공적으로 선양을 받아 (宋)을 건국한다.

 

하는 유유가 물러간 뒤 장안을 탈취해 북위와 함께 화북을 양분했으나, 427년 북위에게 패한 뒤 쇠퇴를 거듭하다 431년에 멸망당하고, 북위는 436년에 북연을, 439년 북량(北凉)을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니 이로써 오호십육국시대는 끝나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시작되게 되었다.

 

308년 흉노의 일파였던 유연(劉淵)이 전조(前趙)를 건국하면서 시작된 북중국의 유목제국의 전국시대는 북위(北魏)의 탁발도가 감숙의 북량(北涼)을 정복한 439년 까지 130여년간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북방의 초원민족들이 북중국을 향해 남하했고, 수많은 유목왕조들이 건국과 멸망을 되풀이 하였으며, 많은 민족들이 한화되거나 멸망하였다. 이 시기를 통해, 중국 북방에 난립하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은 몇 개의 강인하고, 유력한 민족으로 재편성 되었으며, 이후 나타나는 유목제국들은 더욱 체계적이고 강력한 제국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사회

 

민족 융합설

화하족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민족적 자아의식은 없었다. 한대에 이르러 중원의 사람들이 국가 강역 내 일개 공동 민족이며, 그 외 지역의 민족은 오랑캐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한족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생겨났다.

 

중국 사학자들은, 오호십육국시대는, 중국의 북방 민족이 중원으로 대량 유입된 시기로서, 이후 중국 역사에서 볼 수 없는 대규모의 민족 융합이 일어난 시기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동북쪽에는 오래된 유목 민족 두 개가 존재하였다: 흉노족과 동호족이 그것이다. 흉노족의 한 갈래는 한대 유럽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갈래(갈(羯) 포함)는 오호십육국 시기 철저하게 한족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회 발전

중국 북방 유목 민족이 중국 중원으로 진출한 시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 당시 수 년간 이어진 전란 때문이었다. 익주(益州) 사천(四川) 지방, 전량의 하서주랑, 전연의 요하 유역으로는 대량의 중원 난민이 이주해왔다. 실크로드가 이어진 하서의 고장(姑臧) 지방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요국가

오호십육국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전량 장궤 301년 - 376년 한족
전조 유연 304년 - 329년 흉노
성한 이특 304년 - 347년 파촉
후조 석륵 319년 - 351년 갈족

전연

모용황 337년 - 370년 선비
전진 부견 351년 - 394년 저족
후연 모용수 384년 - 409년 선비
후진 요장 384년 - 417년 강족
서진 걸복국인 385년 - 431년 선비
후량 여광 389년 - 403년 저족
남량 독발오고 397년 - 414년 선비
북량 저거몽손 397년 - 439년 노수호
남연 모용덕 400년 - 410년 선비
서량 이고 400년 - 421년 한족
혁련발발 407년 - 431년 흉노
북연 풍발 409년 - 436년 한족


오호십육국 이외의 국가
나라명 시조 존속 기간 민족
구지 양무소 296년 - 506년 저족
탁발의로 315년 - 376년 선비
염위 염민 350년 - 352년 한족
서연 모용홍 384년 - 394년 선비
적위 적요 388년 - 392년 정령
후촉 초종 405년 - 413년 한족
우문부 우문막규 302년 - 344년 선비
단부 단일육권 310년 - 357년 선비

 

 

 

전량

 

전량(前涼 301년~373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한족 출신의 장궤(張軌)가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凉)이지만 같은 국호를 가진 국가가 많기 때문에 전량이라 불린다.

 

장궤는 서진(西晉)의 관료로 상서랑(尙書郞), 산기상시(散騎常侍) 등의 중직을 역임했다.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장궤는 중앙 조정의 한계를 깨닫고 301년에 호강교위·양주자사(護羌校尉, 涼州刺史)를 자청해 양주(涼州 : 간쑤 성 중서부)에 부임하였다. 이후 양주의 선비족을 토벌하고 반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장궤는 양주를 장악한 이후에도 서진의 신하로서 자처하였다.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고 장안이 전조(前趙)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원군을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에 따라 서진에서는 장궤를 서평군공(西平郡公)에 임명하였다.

 

314년에 장궤가 죽자 아들 장식(張寔)이 뒤를 이어 양주자사, 서평공이 되었다. 장식 역시 서진의 신하로 자처하였으며, 317년에 서진이 멸망하고 사마예(司馬睿)가 동진(東晉)을 건국하자 다시 동진에 복종하였다. 다만 동진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고 서진의 건흥(建興)을 계속 사용하였다. 320년 유홍(劉弘)이 종교 반란을 일으켜 장식이 진압하였으나, 유홍의 신자인 염섭(閻涉)에 의해 암살당했다.

 

장식의 동생 장무(張茂)가 동진의 허가를 구하지 않고 사사로이 즉위하였다. 보통 이때부터 전량 정권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장무는 동진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하였다. 전조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의 소유권을 두고 대립하였다. 323년 전조의 유요(劉曜)가 28만의 대군을 이끌고 전량을 침공하자 장무는 항복하여 전조에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전조는 장무를 양왕(涼王)에 봉했다. 장무는 324년에 병사하고, 그 뒤를 장식의 아들 장준(張駿)이 계승했다.

 

장준은 전조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남쪽의 성한(成漢)과 왕성하게 교류하고 전조로부터 독립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329년, 전조는 후조에게 멸망하였으며, 후조는 장준에게 관직을 수여하려 했으나, 장준은 이를 거부하였다. 또한 귀자(龜玆), 선선(鄯善) 등 서역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 농서(隴西) 지역을 경영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 양왕을 자칭하기도 하였다.

 

346년 장준이 죽고, 차남 장중화(張重華)가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후조의 석호(石虎)가 대군을 동원하여 쳐들어와 진주 지역을 상실하였으나 사애(謝艾)를 등용하여 후조의 침입을 막는데는 성공하였다. 이후 후조가 멸망하고 관중(關中) 지역에서 전진(前秦)이 세력을 확대하자 장중화는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였다. 353년에는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353년 장중화가 죽자 아들 장요령(張耀靈)이 뒤를 이었으나 장요령의 후견인인 숙부 장조(張祚)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354년 장조는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화평(和平)으로 정하였다. 장조는 사애를 살해하고, 폭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으며, 355년에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張瓘)이 반정을 일으켜 장조를 살해하고 장중화의 서자였던 장현정(張玄靚)을 옹립하였다.

 

장관은 정권을 전횡하여 송혼(宋混)에게 살해되었으며, 송혼이 죽자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송징(宋澄), 장옹(張邕) 등도 차례로 살해되었다. 363년에 장준의 막내아들 장천석(張天錫)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량은 전진에 복속하였으며, 363년에 장천석이 장현정을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장천석은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세력확대를 꾀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371년에 다시 전진에 복속하였다. 이후 주색에 빠진 장천석은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후계자 문제로 국내가 혼란에 빠졌다. 이를 틈타 부견(苻堅)은 요장(姚萇)을 보내 전량을 멸망시켰다.(376년)

 

역대군주일람

전량 군주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1대 태조
(太祖)
무왕
(武王)
장궤(張軌) - 301년 ~ 314년
2대 고조
(高祖)
명왕
(明王)
장식(張寔) 영안(永安) 314년 ~ 320년 314년 ~ 320년
3대 태종
(太宗)
성왕
(成王)
장무(張茂) 영원(永元) 320년 ~ 324년 320년 ~ 324년
4대 세조
(世祖)
문왕
(文王)
장준(張駿) 태원(太元) 324년 ~ 346년 324년 ~ 346년
5대 세종
(世宗)
명왕
(明王)
장중화(張重華) 영락(永樂) 346년 ~ 353년 346년 ~ 353년
6대 - 애공
(哀公)
장요령(張耀靈) - 353년
7대 - 위왕
(威王)
장조(張祚) 화평(和平) 354년 ~ 355년 354년 ~ 355년
8대 - 충왕
(沖王)
장현정(張玄靚) 태시(太始) 355년 ~ 363년 355년 ~ 363년
9대 - 도공
(悼公)
장천석(張天錫) 태청(太淸) 363년 ~ 376년 363년 ~ 376년

 

 

장궤(張軌, 255년 ~ 314년, 재위 : 301년 ~ 314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초대 왕이다. 자는 사언(士彦),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왕(武王)이다.

 

장궤는 전한(前漢)의 개국공신 장이(張耳)의 후손으로 서진(西晉)에서 관직에 나가 상서랑(尙書郞), 산기상시(散騎常侍) 등 중직을 역임했다. 301년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장궤는 중앙 조정의 한계를 깨닫고 양주(凉州 : 간쑤 성 중서부)에 부임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호강교위·양주자사(護羌校尉, 涼州刺史)에 임명되어 현지의 선비족을 토벌하고 양주 지역을 제패하고 반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장궤는 양주를 장악한 이후에도 서진의 신하로서 자처하였다.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고 장안이 전조(前趙)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원군을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에 따라 서진에서는 장궤를 서평군공(西平郡公)에 임명하였다.

 

314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무공(武公)이었으나 354년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무왕(武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장식(張寔, 271년 ~ 320년, 재위 : 314년 ~ 320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2대 국왕이다. 자는 안손(安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명왕(明王)이다.

 

장식은 271년 장궤(張軌)의 아들로 태어났다. 314년에 장궤가 병으로 양주자사(凉州刺史)의 직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 장궤가 죽자 서평공(西平公)의 작위도 이었다. 장안의 서진(西晉) 정부에 계속 복종하며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나 317년 전조(前趙)에 의해 서진이 멸망하는 것을 막는데는 실패하였다. 이후 강남에서 동진(東晉)이 부활하자 이에 계속 복종하는 한편,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에서 전조에 맞서는 사마보(司馬保)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사마보의 군대가 양주로 들어서는 것은 거부하였다. 동진이 부활하여 복속하기는 하였으나 동진의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진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서진 민제(愍帝)의 연호인 건흥(建興)을 계속 이어서 사용하였다.

 

320년 유홍(劉弘)이 종교반란을 일으키자 장식은 반란을 수습하였으나 유홍의 신자인 염섭(閻涉)에 의해 암살당했다. 시호는 소공(昭公), 동진 원제(元帝)는 원공(元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명왕(明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장무(張茂, 277년 ~ 324년, 재위 : 320년 ~ 324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3대 국왕이다. 자는 성손(成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성왕(成王)이다.

 

장무는 277년 장궤(張軌)의 아들로 태어났다. 320년 장식(張寔)이 염섭(閻涉)에게 살해되자 장식의 아들 장준(張駿)이 어렸기 때문에 주위의 추대를 받아 장무가 양주자사·서평공(凉州刺史, 西平公)에 즉위하였다. 일반적으로 장무가 사사로이 자사 직위를 계승한 이 사건부터 전량이 독립적인 정권으로 성립하였다고 본다. 322년에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를 공격하여 경영하려 하였으나 323년 전조(前趙) 유요(劉曜)의 공격을 받았다. 장무는 이에 대항하다가 항복하여 복종하기로 하였다. 유요는 전량의 국력을 인정하여 장무를 양왕(凉王)에 책봉하여 번국이 되었다.

 

324년에 병사하였다. 시호는 성공(成公)이었으나 354년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성왕(成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장준(張駿, 307년 ~ 346년, 재위 : 324년 ~ 346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량(前凉)의 제4대 국왕이다. 자는 공정(公庭),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문왕(文王)이다.

 

장준은 장식(張寔)의 아들로 307년에 태어났다. 320년에 장식이 죽었을 때 장준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장무(張茂)가 대신 즉위하였다. 324년에 장무가 병사하자 장준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전량은 이 당시 전조(前趙)에 번국이 되어 있었는데, 전조가 후조(後趙)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쇠약해지자 장준은 327년에 전조로부터 독립하였다. 전조가 후조에 의해 멸망하자 장준은 330년부터 하남(河南 : 간쑤 성 동부)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후조의 복속 요구에도 불응하였다. 장준은 동진에 복속되어 있음을 표방하였는데 내부적으로는 왕을 칭하였다. 동진(東晉)과 통교하기 위해 성한(成漢)에 접촉하기도 하였으며 334년에는 동진에서 장준을 대장군·도독섬서, 옹, 진, 양주제군사(大將軍, 都督陝西, 雍, 秦, 凉州諸軍事)에 임명하였다.

 

장준은 서역의 귀자(龜玆), 선선(鄯善) 등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에 두었으며 농서(隴西) 지역을 경영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또한 관중(關中)으로 진출할 뜻을 가지고 동진에 협공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세력을 바탕으로 345년에는 영토를 나누어 양주, 하주(河州), 사주(沙州)를 설치하고 대도독·대장군·가량왕(大都督、大將軍、假涼王)을 자칭하였다.

 

346년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공(文公), 동진 목제(穆帝)는 충성공(忠成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문왕(文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장중화(張重華, 330년 ~ 353년, 재위 : 346년 ~ 353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5대의 국왕이다. 자는 태림(泰臨),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명왕(明王)이다.

 

장중화는 330년 장준(張駿)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46년에 장준이 죽자 16세의 나이로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한 직후 후조(後趙)가 침공해와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 지역을 빼앗기고 양주(凉州 : 간쑤 성 중서부)를 방어하였다. 이때 장중화는 사애(謝艾)를 등용하여 후조의 대군을 막도록 하였으며, 사애는 5차에 걸친 후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황하 이남 지역은 모두 후조에 복속되었다. 후조가 멸망하고 관중(關中) 지역에서 전진(前秦)이 세력을 확대하자 장중화는 353년에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353년 말에 장중화는 병에 걸렸고, 어린 아들 장요령(張耀靈)을 세자로 삼았다. 당시 사애는 참소를 받아 주천(酒泉) 태수로 좌천되어 있었는데, 장중화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사애에게 정치를 보필하도록 하였으나 장조(張祚)가 유언을 감추고 발표하지 않았다. 시호는 환공(桓公), 동진 목제(穆帝)는 경열공(敬烈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 장조(張祚)가 추존하여 명왕(明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장요령(張耀靈, 343년 ~ 355년, 재위 : 353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6대의 국왕이다. 시호는 애공(哀公)이다.

 

장요령은 장중화(張重華)의 아들로 343년에 태어났다. 353년에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10세의 장요령이 태자가 되었으며 곧이어 장중화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장중화의 서형(序兄)인 장조(張祚)가 장중화의 유언을 조작하여 후견인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장조는 곧 장요령을 폐위하여 양녕후(凉寧候)로 삼았다. 355년에 장관(張瓘)이 장요령을 복위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장조는 장요령을 살해하여 모래 구덩이에 매장하였다. 시호는 애공(哀公)이라 하였다.

 

 

장조(張祚, ? ~ 355년, 재위 : 353년 ~ 355년)는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7대의 국왕이다. 폐위당하여 시호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위왕(威王)이라 부른다.

 

장조는 장준(張駿)의 서자(序子)로 장중화(張重華)의 형이었다. 장중화가 353년에 병에 걸리자 장요령(張耀靈)을 태자로 삼고 장조를 후견인으로 삼았다. 장중화는 죽기 직전 유언으로 사애(謝艾)에게 후사를 부탁하였으나 장조는 유언을 조작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장조는 곧이어 장요령을 폐위하여 양녕후(凉寧候)로 삼고 스스로 양공(凉公)에 즉위하였다.

 

354년에 황제를 자칭하고 사연호(私年號)를 제정하였으며 선대 군주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간언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처형한 장조는 음행과 폭정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진(前秦)을 공격하자 전량의 진주자사(秦州刺史) 왕탁(王擢)이 환온의 북벌을 장조에게 알렸다. 이에 장조는 왕탁이 배반할 것을 두려워하여 암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으며 환온이 돌아가자 군사를 파견하여 왕탁을 공격하였다. 패배한 왕탁은 전진으로 도망쳐 항복하였다.

 

355년, 장조는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張瓘)을 몰아내려 하였으며 이에 장관은 반란을 일으켜 장요령을 복위시키려 하였다. 장조는 장요령을 살해하였다. 장관의 군대가 수도 고장(姑臧)에 육박하자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나 성은 함락되었으며 장조는 같은 편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장현정(張玄靚, 350년 ~ 363년, 재위 : 355년 ~ 363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8대 국왕이다. 시호는 충공(冲公)이다.

 

장현정은 장중화(張重華)의 서자로 장요령(張耀靈)의 동생이다. 354년 장조(張祚)에 의해 양무후(凉武侯)에 책봉되었으며, 장조가 살해되자 송혼(宋混)·장거(張琚) 등이 장현정을 서평공(西平公)에 추대하였다. 또한 장조가 사용한 연호 화평(和平)을 폐지하고 다시 건흥(建興) 43년으로 돌아갔다. 뒤이어 수도 고장(姑臧)에 들어온 장관(張瓘)은 장현정을 양왕(凉王)에 추대하고 자신은 국정을 전횡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엄(李儼) 등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356년에는 전진(前秦)에 복속하여 속국이 되었다.

 

장관은 폭정을 행하였기 때문에 359년에 송혼에게 살해되었으며 뒤이어 송혼이 정권을 잡았다. 송혼은 장현정에게 양왕의 칭호를 버리게 하고 양주목(凉州牧)을 자칭하게 하였다. 361년에 송혼이 병사하자 송혼의 동생 송징(宋澄)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곧 살해되었으며 장옹(張邕)이 정권을 잡았다. 장옹은 포악하였기 때문에 또 반정이 일어나 장옹은 자살하였으며 장천석(張天錫)이 정권을 잡았다. 장천석은 동진(東晉)의 연호 승평(升平)을 받들어 사용하였다. 363년에 장흠(張欽)이 장천석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장천석은 장현정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시호는 충공(沖公), 동진 효무제(孝武帝)는 경도공(敬悼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장천석(張天錫, 346년 ~ 398년, 재위 : 363년 ~ 376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9대이자 마지막 국왕이다. 시호는 도공(掉公)이다.

 

장천석은 장준(張駿)의 막내 아들로 346년에 태어났다. 354년에 형 장조(張祚)에 의해 장녕후(長寧侯)에 책봉되었으며, 361년에는 중령군(中領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이 정권을 장악한 장옹이 포악하였기 때문에 장천석은 반정을 일으켜 장옹을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았다. 363년에 장흠(張欽)이 장천석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장천석은 장현정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장천석은 366년 전진(前秦)으로부터 독립하고 동진(東晉)의 종주권을 받들었다. 또한 세력 확대를 시도하여 367년, 반독립적인 세력인 이엄(李儼)이 다스리는 농서(隴西) 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엄이 전진에 항복하였기 때문에 전진의 구원군과 싸워 패배하였으며, 왕맹(王猛)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환하였다.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이 371년에 전량을 공격해오자 장천석은 전진에 복속하여 속국이 되었다. 장천석은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후계자 문제로 전량 국정이 혼란에 빠졌다. 이에 376년, 부견은 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장천석과 전량 왕족들은 포로로 장안에 끌려갔다. 장천석은 귀의후(歸義侯)에 봉해졌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에 참전했던 장천석은 전진군이 패주하는 틈을 타서 동진에 항복하였으며 동진 조정은 장천석을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였다. 동진에서 살다가 398년에 사망하였으며 도공(掉公)이라 시호를 받았다.

 

 

 

전조

 

전조(前趙 304년~329년)는 오호십육국시대 유연(劉淵)이 건국한 나라이다. 처음 국호는 한(漢)이었으나 후에 조(趙)로 변경하였다. 같은 시대 석륵(石勒)이 같은 이름의 조(趙)를 세웠기에 유연의 조를 전조, 석륵의 조를 후조(後趙)라고 구별지어 부르게 되었다.

 

역사

후한(後漢)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匈奴)와 선비족(鮮卑族) 등 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가 대거 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정착하여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번병(番兵)의 역할을 하였다. 3세기 말, 팔왕의 난 이 일어나 서진(西晉)이 혼란에 빠지고, 남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은 서진 황족의 권력쟁탈에 용병으로 개입하면서 독립을 모의하게 되었다.

 

업의 사마영(司馬穎)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유연은 사마영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사마영을 속이고 업에서 빠져나와 흉노의 거주지인 병주(并州)로 향했다. 병주의 이석(離石)에서 거병한 유연은 304년 10월에 한(漢)을 건국하였다. 유연은 아들 유총(劉聰)과 친족인 유요(劉曜), 갈족(羯族)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 중남부를 점령하고 서진의 수도 낙양을 압박하였다. 308년에 유연은 황제에 즉위하고 다음해에 수도를 평양(平陽 : 산시 성 임분)으로 옮겼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楚王)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회제(懷帝)를 사로잡았다.(영가(永嘉)의 난) 장안(長安)에서 민제(愍帝)가 즉위하여 저항하였으나 유총은 316년,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도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유연의 아들이자 황위계승자인 유총(劉聰)은 서진의 황제들에게는 악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311년 그는 중국의 수도인 낙양을 점령하고, 황궁을 불태웠으며 당시 황제였던 회제(懷帝 306~313)를 붙잡았다. 그리고 장안까지 습격하여 그곳 인구의 태반을 학살해 버린다. 유총에게 잡힌 회제는 313년 처형되기 전까지 태원으로 끌려가 유총의 시종(;;;)으로 일해야 했다.

서진의 황위를 계승한 민제(愍帝)는 불타버린 낙양을 떠나 장안으로 천도를 했다. 그러나 316년 유총은 다시 장안으로 쇄도하여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다. 다시금 황제를 끌고 태원으로 돌아온 유총은 중국의 황제로 하여금 자신의 연회에서 술잔을 씻도록(;;;) 시켰으며 318년 그마저 처형해 버린다. 이후 남은 서진의 황족들과 그의 중신들은 흉노에 대한 자주적 방위를 포기하고 양쯔강 너머 남쪽으로 달아나 남경에서 동진(東晉)을 건국한다.

북중국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제국의 두 수도인 장안과 낙양의 지배자가 된 유총은 자신의 조상들이 이루지 못한 중국대륙으로의 입성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 중국의 천자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선사했으며, 북중국을 정복한 전조의 황제 유총이 죽은 이후, 북중국은 5호 16국의 극심한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18년 서진을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정복한 유총이 숨을 거둔다. 유총의 유능한 부관이었던 석륵(石勒)은 하북 남부에서 궐기하여 독립된 세력을 갖게 된다. 329년 석륵은 결국 전조(前趙)를 폐하고 후조(後趙)를 세우게 된다. 석륵은 흉노 유목민 출신답게 문맹이었으나 중국의 문화를 크게 선호하고, 특히 중국 고전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오스트로고트의 수장이었던 테오도릭(Theodoric)이 로마 문화와 학자들을 대한 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유총의 치세에 한은 화북 일대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유요는 장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옹주(雍州 : 산시 성(陝西省) 중남부)·진주(秦州 : 간쑤 성(甘肅省) 동부)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석륵은 하북(河北)과 병주 북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유총의 치세에 유요와 석륵이 점령한 지방은 사실상 독립적인 군벌화되었다.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인 유찬(劉粲)이 뒤를 계승했으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장안의 유요와 하북의 석륵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하였으며, 유요는 죽은 유찬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趙公)에 봉하였다. 12월에 석륵이 평양을 점령하여 반란을 제압하였으나 319년에 유요가 석륵을 공격함으로써 유요와 석륵의 두 군벌은 공식적으로 결별하였다. 유요는 국호를 (趙)로 고치고 모돈 선우의 후계자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으며, 석륵은 11월에 양국(襄国;현재의 하북성 형대邢台)에서 조왕으로 즉위하였다.(후조) 유요는 저·강족, 구지(仇池), 전량(前凉) 등을 공격하여 복속시켰으며, 325년에 낙양 근방에서 후조와 대결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전량이 독립하고 구지의 저항이 계속되어 전조의 국력은 계속 약화되었으며, 328년 겨울, 낙양에서 후조와 전투를 치른 끝에 유요가 석륵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아들 유희(劉煕)가 상규(上邽 : 간쑤 성 천수)에서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329년 석호(石虎)가 유희를 사로잡고 전조를 멸망시켰다.

 

한나라와의 관계

유연은 304년에 자립하여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한(漢)이라고 정하였다. 흉노와 한나라는 기원전 2세기에 형제의 맹약을 하였는데, 유연은 이 형제의 맹세를 근거로 이미 멸망한 형 한나라의 뒤를 이어 동생 흉노가 한나라를 건국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유연은 한 고조(高祖), 후한 광무제(光武帝), 촉한 소열제(昭烈帝) 등을 조상으로 추존하여 제사하였다.

 

유연은 한의 계승자를 자처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왕실의 후예를 간접적으로 살해하였다. 산양공(山陽公)을 계승했던 유추(劉秋)의 죽음으로 인해 후한왕실 직계자손은 끊어지게 되었다. 또한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자손은 성한(成漢)으로 도망친 유현(劉玄)만이 살아 남고 나머지는 영가의 난에 휘말려 살해당하였다.

 

유요는 319년에 장안에서 국호를 조로 고치면서 한의 황제들에게 제사하던 것을 폐지하고 흉노의 선우인 모돈 선우를 모셨다. 이로써 한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던 흉노의 한나라는 사라지고 흉노의 후예를 자처하는 조나라가 성립되었다.

 

유연이 한 왕실의 후예를 자처한 것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유연을 촉한의 후손으로 설정하여 창작된 소설인 《후삼국지》가 일본에서 출판되기도 하였다.

 

역대황제일람

전조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한왕
(漢王)
유연(劉淵) 원희(元熙) 304년 ~ 308년 304년 ~ 308년
1대 고조
(高祖)
태조(太祖)
(유요가 추증)
광문황제
(光文皇帝)
유연(劉淵) 영봉(永鳳) 308년 ~ 309년
하서(河瑞) 309년 ~ 310년
308년 ~ 310년
2대 - 폐제
(廢帝)
유화(劉和) - 310년
3대 열종
(烈宗)
소무황제
(昭武皇帝)
유총(劉聡) 광흥(光興) 310년 ~ 311년
가평(嘉平) 311년 ~ 315년
건원(建元) 315년 ~ 316년
인가(麟嘉) 316년 ~ 318년
310년 ~ 318년
4대 - 은황제
(隱皇帝)
유찬(劉粲) 한창(漢昌) 318년 318년
5대 - - 유요(劉曜) 광초(光初) 318년 ~ 329년 318년 ~ 328년
6대 - - 유희(劉煕) " 328년 ~ 329년

  • 유요가 319년에 국호을 (漢)에서 (趙)로 변경하였다.

 

유연(劉淵, 252년? ~ 310년, 재위 : 304년~310년)은 오호십육국 시대 한(漢;훗날 전조)의 창건자이다. 자(字)는 원해(元海)이고 묘호는 고조(高祖)이며 시호는 광문황제(光文皇帝)이다.

 

생애

신흥(新興;현재의 산서성 흔주{忻州}) 사람이다. 일설에는 서하습성(西河隰城;현재 산서성 분양{汾陽})사람이라고도 한다. 남흉노의 선우였던 어부라(於夫羅)의 손자이며 유표(劉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호연씨(呼延氏)로 원훈(元勳)이었던 대사공 호연익(呼延翼)은 외가의 숙부 사위였기도 했다.

 

위 가평(嘉平) 연간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비범하였고 최유(崔遊)에게 가르침을 받아 한족의 문화에 정통하고 문무을 겸비했다. 삼국 시대말기 인질로써 위나라의 낙양에 들어와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서진(西晉) 초기 유표가 죽자, 뒤를 계승하여 흉노의 좌부수(左部帥)가 되었다. 태강(太康 : 280 ~ 289) 말엽에 서진은 흉노 5부에 도위(都尉)를 설치하였는데 유연은 북부도위가 되었다. 유연은 북부도위로서 정치를 잘해서 5부 전체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양씨가 집권하던 시기에 5부 전체를 통괄하는 5부대도독이 되었다.

 

원강(元康 : 291 ~ 299) 말엽, 팔왕의 난이 격화되자 유연은 업(鄴)에 세력을 두고 있던 성도왕 사마영에 의해 용병으로 고용되어 활동하였다. 304년, 유연의 종조부인 좌현왕 유선(劉宣)은 여러 흉노 유력자들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몰래 전해들은 유연은 사마영을 속이고 업을 빠져나와 유선 등으로부터 대선우의 칭호를 받고, 이석(離石)에서 거병하였다. 뒤이어 좌군성(左國城)으로 옮겨 한왕(漢王)을 칭하고 건원하여 원희(元熙)라고 하였다. (304년 10월)

 

308년 10월에는 황제를 칭하고 영봉으로 개원하였다. 다음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하서라고 개원했다. 낙양공략을 노렸으나, 지반에 이르러 병사했다.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유연이 임종시에 조카 태재(太宰) 유환락(劉歓楽)과 태부(太傅) 유양(劉洋), 태보(太保) 유연년(劉延年)을 불러들여, 자신의 셋째아들이자 대사마(大司馬),대선우,녹상서사(録尚書事)였던 초왕(楚王) 유총과 힘을 합쳐 태자 양왕(梁王) 유화(劉和)를 보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향년 60세였고, 큰뜻을 품었던 관용이 풍부했던 영걸로 알려져 있다.

 

더해서 이러한 일화가 있다. 종제(従弟)이며 동시에 유연의 처남이었던 호연유(呼延攸)는 숙부이며 악부였던 호연익의 아들이었다. 유연은 그의 무능하고 속물적인 인격을 꺼리고 싫어하여 결코 요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연의 장남인 유화는 숙부 호연유와 사이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숙부 호연유을 재상직에 앉혔다. 유화는 숙부의 조언에 따라 배다른 동생 초왕 유총을 숙청하려는 정책을 실시하다가 파멸을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유연이 현명하다는것이 알려졌고, 호연유는 정치가로써는 무능하다는것이 증명되게 된 것이다.

 

당나라의 이세민의 명에 따라 편찬된 《진서(晋書)》에서는 당나라의 고조 이연의 휘을 피해 "유원해"라고 표기하였다.

후비

  • 무원황후 호연씨(武元皇后呼延氏)
  • 광헌황후 장씨(光献皇后張氏)
  • 선귀비(單貴妃)(선휘{單徽}의 딸)

자녀

  • 양왕(梁王)유화(劉和)(厲王)
  • 모왕(某王)유공(劉恭)
  • 초왕(楚王)유총(劉聡;劉聰) 소무제(昭武帝)
  • 제왕(斉王)유유(劉裕)
  • 노왕(魯王)유륭(劉隆)
  • 북해왕(北海王)유애(劉乂)

 

유총(劉聡, ? ~ 318년, 재위: 310년 ~ 318년)은 오호십육국시대 한(漢, 훗날의 전조)의 열종(烈宗) 소무제(昭武帝)이다.

유연(劉淵)의 아들로, 유연 아래에서 주로 낙양 공략전을 담당하였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유화가 강력한 군권을 가진 유총 등의 동생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기에 유총은 모반을 일으켜 유화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유총은 석륵(石勒), 왕미(王彌)를 파견하여 화북 일대를 초토화시켜 낙양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유요(劉曜), 호연안(呼延晏) 등에게 낙양을 직접 압박하게 하였다.

 

311년 4월, 유총은 서진(西晉)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진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라 부른다. 낙양을 함락시킨 이후 유총은 유요에게 장안에 세워진 서진 민제(愍帝)의 임시정부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석륵, 왕미 등은 화북 일대를 정복하였다. 유총은 낙양 함락 이후 점차 주색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으며 환관이 득세하였다. 312년에는 포로로 끌고 온 서진 회제에게 갖은 모욕을 주다가 살해하였으며,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민제가 포로로 끌려오자 다시 민제를 모욕하다가 317년에 살해하였다. 318년에 병사하였다.

 

 

유요(劉曜, ? ~ 328년, 재위: 318년 ~ 328년)는 오호십육국시대 전조(前趙)의 5대 황제이다. 1대 유연의 족자(族子 : 친척 조카)이다. 다음 대에서 나라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유요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유연이 양자로 삼아 길렀다. 유연이 한나라를 건국한 이후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유연 사후에는 유총(劉總)을 대신하여 311년 낙양을 공략하는 작전에서 한군의 총사령관 급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낙양 함락 이후에 장안까지 진출하였으나 전량(前凉)의 지원을 받은 서진 민제(愍帝)의 세력에게 장안을 빼앗겼다. 이후 주로 진양(晉陽 : 지금의 산시성 타이위안 시)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316년에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를 사로잡았으며, 이후 관중(關中 : 지금의 산시성 중부 일대)을 평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요의 군대는 관중 일대에서 사실상 군벌화되었다.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뒤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유찬의 외척이었던 근준이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평양의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유요는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石勒)을 조공(趙公)으로 임명하여 평양의 근준을 공격하게 하였다. 근준은 석륵에게 패배한 이후 내분으로 살해되었고, 근준의 잔존세력은 평양성과 함께 유요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으며, 근준의 잔당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도망쳤다. 석륵은 평양 함락 이후에 유요와 화친을 제의하였으나 유요는 석륵의 사신을 처형하여 석륵과 유요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유요는 319년에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하였다. 이후 유요는 저·강족을 복속시키고 전량, 구지(仇池)를 공격하였다. 325년, 후조(後趙)의 병주(幷州 : 산시성)가 유요의 전조에게 항복하였으며, 동진(東晉)의 사주(司州 : 허난성 중남부)도 유요에게 투항하자, 유요의 군대는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을 포위하였다. 이에 후조의 석호(石虎)가 구원군으로 와 유요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하였다.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하였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였으며 이로 인해 병주, 사주 일대를 모두 상실하였다. 325년의 이 패전으로 전조의 국력은 쇠퇴하여 전량이 독립하고 구지의 저항이 격화되었다.

 

328년, 후조의 석호가 전조를 공격하니 유요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유요는 낙양을 포위하고 사주 일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낙양 포위가 장기화되자 유요는 긴장이 해이해져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이때 석륵이 반격해오니, 낙양성 서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요는 술에 취한 채 전투에 임하였다가 크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석륵은 유요를 양국(襄國)으로 압송하였다 처형하였다.

 

 

유희(劉熙, ? ~ 329년, 재위 : 328년 ~ 329년)는 오호십육국 시대 전조(前趙)의 6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나라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유희는 유요의 아들로, 유요가 황제에 즉위하자 황태자가 되었다. 유요가 328년 12월에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자 329년 초에 장안을 버리고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남부)의 상규(上邽 : 간쑤 성 천수)로 천도하였다. 8월에는 후조가 점령한 장안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으며, 반격에 나선 후조의 석호에 의해 상규가 점령되고 유희 및 전조의 고관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처형당하였으며 이로써 전조는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