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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9 (삼국시대 : 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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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9 (삼국시대 : 오)

두바퀴인생 2010. 3. 9. 05:49

 

 

 

중국의 역사 29 (삼국시대 : 오)
 

 

 

(吳, 229년 ~ 280년)또는 동오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의 하나로 친자 3대에 걸쳐 구축되었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인재를 갖추었으며 적극적으로 군사 침공을 하지는 않고 방어에 충실하였으며, 상황에 따라 촉한, 와 화평을 맺는 유연한 외교술을 펼쳤다. 위촉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되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고 가장 나중에 멸망하였다. 손견 견의 맹활약으로 강동에 기반을 잡았고 수성의 달인인 손권을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마지막 황제인 손호가 진 사마염에게 항복함으로써 삼국 시대는 그 끝을 맺는다.

 

연혁

오나라는 229년(황룡 원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280년(천기 4년) 진에 항복하기까지 4대 52년에 걸친 왕조다. 오나라의 손권은 위의 조조, 촉한 유비와 비교하면 이미 손견과 손책이 쌓아올린 기반이 있어 처음부터 혜택받은 인물이었다. 오나라의 시조가 되는 손견은 일찍이 이 지방에서 이름을 떨친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의 자손이며, 17살 때 해적을 퇴치해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중앙 정부에서 관리가 되어 각지의 반란 진압을 맡고, 반동탁 연합군에도 가세하지만 192년(초평 3년) 유표를 토벌하던 중에 허무하게 죽고 만다. 당시 손견은 일개 태수에 불과해 손견이 죽은 다음에는 영지와 병사 모두 근처의 원술에게 흡수되고 만다. 그렇지만 전장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움으로써 세상에 손씨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황개, 정보, 주치 등과 같은 신하는 계속해서 맏아들 손책을 받들게 되었다.

 

손책은 실질적인 오나라의 창업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원술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후 독립해 강동에 기반을 쌓고, 친구 주유와 협력해 세력을 확대해 갔다. 손책은 성격이 활발하고 기꺼이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였으므로 그 당시 장소, 장굉, 태사자, 여몽, 주태, 장흠 등과 같은 문무 관리가 수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손책도 200년(건안 5년) 허공 밑에 있던 객의 손에 의해 26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손책은 임종을 맞을 때 동생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군세를 이끌고 싸우는 것이라면 내가 더 낫다. 그러나 현자를 발탁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일은 네가 더 낫다”라고 유언한다. 그리고 내정에는 장소, 군사에는 주유를 각각 보좌역으로 선정해 손책의 유언대로 오나라가 운영되어갔다.

 

이리하여 겨우 19살 때 손권은 오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흔히 정권 교체기에는 휘하의 신하가 무더기로 퇴출당하는게 일반적이었지만, 손권은 손책의 신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중요 인물인 주유가 솔선수범해 손권에게 충성을 바친 것도 이유였지만, 역시 젊은 손권이 위업을 이룰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손권의 치세에는 노숙, 제갈근, 감녕, 서성 등의 인재들도 가세하였다. 208년 유비와 연합해 천하 통일을 노리는 조조의 야망을 적벽에서 분쇄하였다. 그 뒤 유비와 형주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219년에는 관우를 공격해 형주를 평정하였다. 그 사이 조조에게 순응해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221년 촉한이 오나라를 침공하자 육손을 파견해 이를 저지하지만, 다음해에는 유비와 화해해 국교를 수복했다. 권모술수가 팽배한 당시의 난세에서 손권의 이러한 유연한 외교술은 오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229년 손권은 마침내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오나라는 또한 해상 무역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후계자 선정 실패로 오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태자 손등이 손권 재위 중에 죽자 손권은 손화를 새로운 태자로 내세우지만, 동시에 동생 손패도 아껴 노왕으로 봉하고 태자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그래서 신하들도 손화파와 손패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게 된다.

 

당시 승상인 육손이 “적자와 서자 사이에는 마땅히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간언하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 오히려 손패파의 참언을 믿어 육손은 유형에 처해지고 곧이어 분사하고 만다. 이 권력 투쟁에서 유능한 신하 수십 명이 방출되거나 처형되었다.

 

250년 손권은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내쫓고, 동시에 태자로 즉위하려고 한 손패에게 자결을 명해 결국 막내아들인 손량을 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2년 후 손권은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손량을 남기고 죽고 만다.

 

그후 손량의 치세에 정권을 장악한 제갈각 손준에게 살해되었고, 손준은 오의 실권을 쥐었다. 손준이 죽자 그 권세는 손준의 종제 손침에게 넘어갔다. 258년 손량은 실권을 장악한 손침을 주살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손침은 손량을 내쫓고 폐제의 형이며 손권의 여섯째 아들 손휴를 황제로 옹립하니 곧 오 경제(景帝)다. 경제는 손침의 쿠데타를 알고 그를 체포해 처형한다.

 

264년 경제가 죽고 때마침 촉한의 멸망과도 겹쳤기 때문에 이 기회에 훌륭한 황제를 세워 거국일치로 오나라를 융성시키려 했다. 이때 지목된 사람이 바로 앞서 태자에서 폐위된 손화의 아들 손호다. 그런데 다음 황제가 된 손호는 성질이 포악하고 오만방자해 대사면을 연발하는 한편, 손휴의 아들 4명을 체포해 위로 2명을 죽였다. 더구나 연회 자리에서 신하들을 취하게 만들어 허튼 언동을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안면을 벗겨내거나 눈을 도려내는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또 환관 금혼을 총애하고, 백성들을 가혹한 노역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민심은 급속도로 나빠져갔다. 280년 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호는 어이없이 그대로 항복하여, 중국대륙은 통일되어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역대 황제

손오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 - 효의왕
(孝懿王)
(오 대제 추숭)
손종(孫鍾) - -
- 오 시조
(吳始祖)
(오 대제 추숭)
무열황제
(武烈皇帝)
손견(孫堅) - -
- - 장사환왕
(長沙桓王)
(오 대제 추숭)
손책(孫策) - -
- - 오왕
(吳王)
손권(孫權) 황무(黃武) 222년 ~ 229년 220년 ~ 229년
제1대 오 태조
(吳太祖)
대황제
(大皇帝)
손권(孫權) 황룡(黃龍) 229년 ~ 231년
가화(嘉禾) 232년 ~ 238년
적오(赤烏) 238년 ~ 251년
태원(太元) 251년 ~ 252년
신봉(神鳳) 252년
229년 ~ 252년
제2대 - 폐황제
(廢皇帝)
(회계왕<會稽王>)
손량(孫亮) 건흥(建興) 252년 ~ 253년
오봉(五鳳) 254년 ~ 256년
태평(太平) 256년 ~ 258년
252년 ~ 258년
제3대 - 경황제
(景皇帝)
손휴(孫休) 영안(永安) 258년 ~ 264년 258년 ~ 264년
- - 소헌문황제
(昭獻文皇帝)
(오 말제 추숭)
손화(孫和) - -
제4대 - 말황제
(末皇帝)
(귀명후<歸命侯>)
손호(孫皓) 원흥(元興) 264년 ~ 265년
감로(甘露) 265년 ~ 266년
보정(寶鼎) 266년 ~ 269년
건형(建衡) 269년 ~ 271년
봉황(鳳凰) 272년 ~ 274년
천책(天冊) 275년 ~ 276년
천새(天璽) 276년
천기(天紀) 277년 ~ 280년
264년 ~ 280년

연표

서력 사건
156년 손견 태어남.
184년 손견, 황건적을 토벌함.
190년 손견,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
192년 손견, 유표 공격 중 전사. 아들 손책이 뒤를 이음.
194년 손책, 원술 밑에 몸을 의지함.
197년 손책,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절교.
200년 손책,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음. 동생 손권이 뒤를 이음.
208년 손권, 유비와 합심해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
209년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음.
213년 조조와 유수에서 전투를 벌임.
215년 합비에서 장료의 기습을 받아 대패.
217년 손권, 조조와 화전함.
219년 손권,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평정.
221년 손권, 오왕으로 봉해짐.
222년 촉한과 국교 수복.
223년 위나라와 국교 단절.
228년 육손, 석정에서 조휴를 격파.
229년 손권, 황제를 칭함.
241년 태자 손등이 죽음. 손화를 태자로 책봉.
250년 태자 손화를 폐하고, 손량을 태자로 책봉.
252년 손권 붕어. 손량 즉위.
257년 제갈탄의 반란에 원군을 보내나, 진압됨.
258년 손량 폐위. 손휴 즉위.
264년 손휴 붕어. 손호 즉위.
280년

진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

 

 

 

 

 

손견(孫堅, 156년 ~ 192년 1월 7일)은 중국 후한 말의 장수이자 오군 부춘현 출신이다. 는 문대(文臺)이며, 손책, 손권의 아버지이다.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 춘추 시대의 명장 손자의 후손일 것이라고도 하며 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기도 하다.

 

생애

17세 때, 전강에서 약탈을 일삼던 도적 한 명을 죽여 유명해졌다. 회계에서 허창이 일어나 스스로 양명황제라 칭하자, 손견은 군사마로서 정병을 모아 주·군의 군사와 함께 허창을 토벌했다. 이로 인해 염독승이 되었고, 다시 우이승, 하비승이 되었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회계 사람으로 중랑장인 주준이 표를 올려 좌군사마로 삼아 참전해 주준과 함께 분투하였으며, 반란이 끝나자 별부사마를 제수받았다. 변장, 한수가 양주에서 난을 일으키고 중랑장 동탁이 토벌하지 못하여 사공 장온이 거기장군이 되어 이를 토벌할 때, 장온이 토벌군에 참여하게 했다. 동탁이 새로이 상관이 된 장온에게 불순히 대했으므로, 손견은 동탁이 무례하며, 출전하였으나 공적은 없고, 오만하니, 지금 군율을 물어 죽이지 않으시면 형벌이 어그러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장온은 동탁과 이민족들과의 관계를 들어 거절했으며, 훗날 동탁이 집권한 후 장살당했다.

 

장사에서 구성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 23일 만에 진압하여(연의에서는 50일이라 한다.) 장사태수 겸 오정후로 승진하였다.

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호응하여, 자신에게 무례한 형주자사 왕예를 죽이고 남양태수 장자를 연회에서 사로잡아 참수하며 노양에 이르러 원술을 만났다. 원술이 표를 올려 파로장군을 대행하게 하고 예주자사로 삼았다. 양동에서 동탁의 대군을 만나 겨우 달아났다. 다시 병사를 수습하여, 양인에서 동탁군을 크게 무찌르고, 동탁의 도독 화웅 등을 베었다. 동탁군은 손견을 꺼려 화친을 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손견은 대곡으로 진군하니 낙읍이 90리 거리였다. 동탁은 수도인 낙양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도주하게 된다. 연의에 기술된 바에 의하면 이때 동탁의 참모 이유는 그냥 도망치치 말고 낙양에 불을 지르라고 조언했고 이는 바로 채택되었다.

《삼국지》 주석 《오서》에 따르면,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할 때, 손견은 불타는 낙양성의 화재를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낙양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 손견은 낙양 궁전인 건장전 근처 우물가에서 궁녀의 시체를 끌어올려 황실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전국옥새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를 삼국지에 주석으로 채록한 배송지는 '어찌 손견과 같이 충의로운 사람이 한 왕조의 신기를 얻어서 숨겨두겠는가.'라며 부정한다. 《삼국지》 주석 《산양공재기》에서는 이 옥새를 원술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원술은 유표와 대립하게 되어 손견에게 유표를 치라고 요청한다. 이를 받아들여 유표가 파견한 황조를 무찌르고 양양성을 포위했으나, 순시 도중 황조의 군사에게 화살을 맞아 죽었다. 다만 《영웅기》에서는 유표의 장수 여공을 치다가 여공 군이 쏟아부은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7세였다. 손견의 전사 후, 조카 손분이 손견의 무리를 거느리고 원술에게 의탁했다. 만화 창천항로에는 당시 아직 군사적 경험이 별로 없었던 손책을 장수로서 훈련시키기 위해 유표를 공략했다고 주장한다.

차남 손권이 오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자 '시조 무열황제(始祖 武烈皇帝)'에 추존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손견

손견은 반동탁 연합군에서 선봉장으로 나섰지만 화웅에게 시종일관 고전했고 그 화웅을 병졸인 관우가 처단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또한 손견이 옥새를 발견하여 이를 이용하여 황위를 찬탈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유표가 황족의 이름으로 손견을 처단했다고 나오는데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이외에도 손견은 원술 밑으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인물평

손견은 불의를 보면 절대 참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손견은 어느 무리에 있든, 어떠한 직책을 갖고 있든 구분없이 무조건 솔선수범하여 자신이 이끄는 군대에서는 항상 그 스스로가 선봉장이 되었다. 무예가 굉장히 뛰어나 17살때 이미 도적들을 소탕하고 그 중 1명을 사살했다. 손견은 무예가 뛰어난 것 외에도 수하와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여 동탁이 낙양에 불을 질렀을 때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화재를 진압하는 등 낙양재건에 최선을 다했고 한(漢) 황조에 충성을 다했다. 다만 손견은 솔선수범이 지나쳐 항상 적들의 표적이 되기 쉬웠고 이 때문에 유표를 공략할 때 맨 앞에서 병력을 지휘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손견을 섬긴 사람들

손견의 친족관계

 

 

손책(孫策, 175년 ~ 200년 4월)은 가 백부(伯符)로 중국 후한 말의 군웅이다. 손견의 장남이자 대제 손권의 형이다.

 

생애초반

《삼국지》손파로토역전에 따르면, 손견이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손책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여강군 서현-에 살면서 주유와 함께 벗이 되었고, 사대부를 모아 합하여 장강과 회하 사이의 인심을 얻었다. 손견이 죽자 곡아-오군 곡아현-에 장사지내고, 강을 건너 강도-광릉군 강도현-에 살았다. 그러나 서주목 도겸의 꺼림을 받았으므로 어머니를 모시고 곡아로 옮기고, 외숙 단양태수 오경에게 나아가 수백 명의 군사를 모았다. 흥평 원년(194년), 원술을 따랐다. 원술은 손책을 기이히 여기고 옛 손견의 부곡을 손책에게 돌려 주었다. 당시 태부 마일제가 절을 가지고 관동을 안정시키고자 수춘에 있었는데, 손책을 예로써 부르고 표를 올려 회의교위로 임명했다. 원술의 대장 장훈 교유가 손책에게 마음을 기울여 공경했고, 원술도 손책 같은 자식이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으리라며 탄식했다.

 

원술은 처음에는 손책을 구강태수로 임명하고자 했으나, 진기로 바꾸었다. 여강태수 육강은 일찍이 손책이 만나고자 했을 때 주부로 대신 만나게 했으므로 손책의 원한을 샀고, 육강이 원술의 군량 요구를 묵살하자 원술은 손책에게 육강을 치면 여강태수를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손책이 육강을 무찌르자 유훈으로 여강태수를 삼았으므로, 손책은 실망했다.

 

강동 정벌

손책은 원술의 휘하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수하들과 함께 모의, 손견이 낙양에서 얻었던 옥새를 원술에게 헌상하는 대신 군사를 빌렸다. 손책은 이 군대로 양저우에 근거하던 왕랑(王朗) · 엄백호(嚴白虎) · 유요(劉繇) 등을 공격하여 강남을 평정하였다. 젊은 시절, 이와 같은 손책의 용맹은 중국역사상 무예가 가장 뛰어났던 항우와 비교하여 그를 소패왕(小覇王)이라 불리게 하였다. 유요를 치는 과정에서 유요 휘하의 맹장인 태사자(太史慈)와 수차례 싸워 결국 손책이 사로잡아 휘하에 두었다. 이 때 태사자는 유요의 잔병을 모으고 돌아오겠다며 진지를 떠나자 손책의 수하들은 태사자의 이런 결정을 허락한 손책을 나무랐다. 그러나 손책은 태사자를 끝까지 믿었고, 태사자는 잔병들을 모아 돌아왔다. 이처럼 손책은 무재와 지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람을 믿을 줄 알았다. 하지만 손책은 양주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원술의 명을 받아 육강(陸康)을 토벌하였기 때문에 강동의 명사층과 대립이 있었지만 손권의 중재로 손책의 딸이 육강사후 육씨문중을 이끌던 육손(陸遜)에게 시집가서 일단락 되었다.[1]손책이 양주를 평정한 후, 원술이 손책에게 받은 옥새를 이용하여 제위에 오르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성(成)을 건국하자, 조조(曹操)는 손책의 원술 제위 등극 반대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 하여 그를 오후(吳侯)에 봉하고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손책의 동생 손광과 조조 아우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말년

그러나 손책이 조조에게 대사마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이를 이행하기에는 조조 자신의 작위도 너무 낮아서[2] 불가능했던 조조가 거절하여, 두 세력의 사이는 냉소적으로 변하였다. 200년 조조와 원소(袁紹)가 관도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許)를 기습, 헌제(獻帝)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허공이라는 자를 붙잡았다. 허공은 손책을 맹렬하게 비난하며 손책을 잡아 죽여서 없애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헌제에게 보내다가 손책에게 잡혔는데 손책의 불같은 성격에 허공이 용서받을 리가 없었다. 결국 허공은 참수당했으며 이에 앙심을 품은 허공의 식객들은 어느 날 손책이 홀로 사냥을 나갔을 때 습격했으나 모두 손책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때 손책은 기습을 당한 탓에 중상을 당했고 생명이 위독했다. 뒤늦게 달려온 정보가 손책을 진중으로 데리고 가 치료하도록 조치를 취해서 손책은 일단 생명은 건졌다. 그러나 호랑이같은 손책의 성격으로 인해 허공의 식객들에게 기습당한 것에 대한 분을 못참고 흥분하다가 봉합한 상처가 모두 터져 죽었다.

사후, 손권이 제위에 오르자 장사환왕(長沙桓王)으로 추증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손책

삼국지연의》에서 손책은 양주의 도사 우길의 도술이 망령된 것이라 하여 우길을 죽였고, 우길의 혼령이 손책을 괴롭히다가 결국 손책이 사냥 중 허공의 식객에게 공격받아 중상을 입은 후 우길의 망령에 시달려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인물평

삼국지에서 손책하면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불린다. 손견이 사망했을 무렵 손책에게는 친구 주유와 아버지를 따르던 가신 몇 명만 있을 뿐이였으며 이 상태에서 뿔뿔이 흩어질 빌미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책은 아버지의 가신들을 단결시켜 자신을 따르게 하는데에 성공했으며 심지어는 손견 사후 손책이 잠깐 원술에게 의탁했을 때 원술의 부하들마저 손책을 존경하게 할 정도였다. 신뢰를 소중히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믿으며 또한 그 자신 역시 다른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성격을 지녔다. 또한 손책은 무예 또한 중국 역사상 최강의 용맹을 지녔다는 항우와 비견될 정도로 대단했으며 유요와의 결전에서 유요의 부하 우미를 옆구리의 힘만으로 허리를 부러뜨릴 정도로 괴력을 지녔다. 손책의 능력은 전반적으로 그 아버지인 손견을 빼닮았으며 그 무예는 손견의 자녀들 중 최강이였으며 한당, 황개 등 손견의 무예로 이름있는 부장들보다 용맹이 더 뛰어났다. 이 때문에 손견은 손책을 유난히 아꼈다. 다만 손책의 성격적 결함이 있다면 손책은 한 번 화가 나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이 난폭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며 그의 죽음 역시 중상을 입은 후 요양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흥분해서 상처가 크게 벌어진 탓이였다.

 

 

 

손권(孫權, 182년 음력 5월 18일 ~ 252년 음력 4월 16일)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는 중모(仲謀),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손견의 둘째 아들로 손책의 동생. 200년, 형 손책이 급사하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을 다스렸다. 수성(守成)의 명수로 평가되고 있다.

 

손권

 

 

생애

손권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손견은 갓 태어난 그의 풍모를 보고 고귀한 위치에 오를 상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어머니 오부인은 손책을 낳을 때 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손권을 낳을 때는 태양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각각 꾸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손견은 “달과 태양은 음과 양의 정수로 최고위의 상징이므로, 우리 자손은 번영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라고 예견했다.

 

192년(초평 3년) 아버지 손견이 전사하고 원술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던 손책이 강동에서 궐기하자, 손권은 형을 따라 각지를 전전하였다. 손권은 명랑하고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으면서 동시에 결단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손책은 책략을 세울 때 항상 손권과 상의하였고, 그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여 손책 자신도 그에게 못 미친다고 말했다.

 

손권은 겨우 15살에 양선현의 수장이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추천을 받아 봉의교위대행이라는 직무를 맡게 된다. 199년(건안 4년) 손권은 손책을 따라 노강태수 유훈을 쳐서 격파하고, 더욱 진군해 사선에서 황조를 격파했다. 그러나 200년에 손책은 허공 휘하의 자객에게 습격당해 26살에 단명하고 만다. 손책은 후사를 19살의 손권에게 부탁했다. 손권은 형의 죽음을 슬퍼해 울음을 그치지 않았는데, 손책의 장사(長史)였던 장소는 그를 격려해 상복을 벗게 하고 말에 태워 진영을 시찰하도록 했다. 훗날 손권은 손견을 무열황제에 추증했지만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추증했다.

 

당시 오나라가 지배하던 지역은 회계, 오군, 단양, 예장, 노릉 등이었지만 그들 군에서도 험준한 오지까지는 복종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군신 관계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아 항상 사태를 주시하면서 주군을 물갈이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주유와 장소는 손권이 장차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고 예견하고 정성을 다해 그를 섬긴다. 그리고 장소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주유, 정보, 여범 등을 군사지휘관에 임명하며, 노숙 제갈근 등 우수한 인재를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그들을 각지에 파견해 불복종 지역을 토벌할 것을 명했다. 조조는 손책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손권을 공격하려 했지만, 오나라의 사자로 허도에 머물고 있던 장굉은 오히려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며 조조를 설득했다. 그래서 조조는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시켰다.

 

202년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자식을 인질로 보내도록 요구했다. 손권은 주유와 어머니 오씨 부인과 상의한 뒤, 결국 인질을 보내지 않았다. 같은 해 오씨 부인이 서거했다.

 

203년 손권은 황조를 토벌하러 나서 그 수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거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사이에 산악지대의 불복종민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회군해 진압하였다. 207년에도 황조를 공격해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왔다. 208년 봄, 손권은 또다시 황조를 공격했다. 황조는 수군으로 손권의 침공을 저지하려 했지만 여몽에게 격파되었다. 그리고 능통, 동습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공격했기 때문에 거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황조는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손권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손권은 이 과정에서 황조의 부장이였던 감녕도 얻게 된다.

 

같은해 형주목 유표가 죽자 조조는 형주를 침공하고, 유표의 후계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한다. 남쪽으로 도망온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사자로 보냈다. 손권은 개전과 항복을 놓고 결단하지 못했는데, 제갈량에게 설득당해 유비와 동맹을 체결하여 조조와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 무렵 조조로부터 “이번에 수군 80만의 군세를 정비하여 그대와 오나라 지역에서 사냥을 하고 싶다”라는 편지가 당도했다. 군신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토벌하겠다는 조조의 최후통첩으로 알고 두려워했다. 장소 등이 항복을 주장하며 신료들 간에 논의가 길어지자 손권도 차츰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전파 주유의 한마디로 개전을 결의, 손권은 책상 모서리를 칼로 자르며 “앞으로 항복을 입에 담는 자는 이 책상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며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전황은 조조 진영에서 역병이 돌고 황개의 거짓항복이 조조에게 통해서 싸움이 우세하게 전개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을 완전히 격파하였다.

 

209년 주유는 1년간의 공방 끝에 조인을 남군에서 퇴각시켜 그 지역을 평정했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임명하고 좌장군 유비가 형주목을 맡아 공안에 근거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손권은 점차 유비의 세력이 확대되어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여동생을 유비와 혼인시켜 우호관계를 깊게 하였다.  211년에는 자신의 본거지를 말릉으로 옮기고, 다음해 건업으로 개명했다.

 

213년 조조가 유수를 침공하자, 손권은 이를 저지하며 1개월 넘게 서로 대치하였다. 당시 손권은 몸소 배에 올라타 조조의 진영을 시찰하러 나섰다고 한다. 손권의 시찰단은 무기나 대오 등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히 정돈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조조는 “자식을 낳는다면 손권과 같은 자를 원한다”라고 칭찬하며 군사를 퇴각시켰다고 한다.

 

214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형주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양주를 손에 넣으면 돌려주겠노라 답한다. 이에 화가 난 손권은 여몽을 파견해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무력으로 탈취해 형주를 지키는 관우와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조조가 한중을 침공해 왔으므로 유비는 익주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손권과 화해하였다. 이리하여 형주를 동서로 분할해 동쪽을 손권이, 서쪽을 유비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후 손권은 합비를 10만 군세로 포위했는데,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장료에게 기습당했다. 손권의 군사는 뿔뿔이 흩어지지만, 능통의 분전으로 겨우 궁지에서 벗어났다.

 

217년 손권은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는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의 불화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219년 관우는 조인이 지키는 양양을 포위했다. 구원에 나선 우금마저 패하고 투항하여 조조가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이때 손권이 충성의 증거로 관우를 치겠다고 조조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리하여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쳐 형주를 평정하고 그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220년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 헌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문제)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촉한의 유비도 제위에 올랐다. 손권은 계속하여 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춰 문제로부터 오왕으로 봉해진다. 같은 해 7월,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권은 육손을 총지휘관에 임명해 방어케 하였다. 그리고 이 틈에 위나라로부터 침략 받지 않도록 자주 사자를 파견했다. 이때 문제가 상아, 진주, 공작 등 귀한 진상품만을 헌상할 것을 요구하자 가신들이 일제히 분개하며 거절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손권은 “백성들의 목숨이 나 한 사람의 결단에 달려 있다”라며 이를 물리치고 바라는 물품을 모두 보내줬다고 한다. 222년(황초 3년) 육손이 화공으로 유비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위나라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문제가 손권의 자식을 조정 관직에 취임시켜주겠다는 명분으로 인질을 요구했고, 손권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나라는 오나라를 침공하고, 오나라는 촉한에 사자를 파견해 다시 우호관계를 수복하였다. 229년(황룡 원년) 손권은 여러 신하들의 권고로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때 손견을 무열황제로 추존하면서 堅과 같았던 甄의 발음을 바꿔버린다. (견씨 참조)

 

233년 요동의 공손연이 사자를 파견해 손권에게 번국의 예를 갖추었다. 손권은 답례로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금은보화를 공손연에게 보내도록 하고 배를 타고 요동으로 향했다. 승상 고옹 등은 아직 공손연이 신뢰할 만한 인물인지 알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손권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자를 파견했다. 과연 공손연은 손권의 사자를 죽여 그 목을 위나라로 보내고, 오나라의 군대와 재물을 탈취했다. 손권은 격노하며 공손연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겨우 제지된다.

 

그리고 241년 황태자 손등이 죽자 후계 선정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손권은 처음에는 손화를 다음 황태자로 삼았지만, 손패도 아껴 그를 노왕에 봉하고 황태자와 동등하게 대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분열되었다.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된 육손은 “적자와 서자의 대우에는 차별을 두어야 한다”라고 자주 상소했다. 그래서 손패파에게 죄가 날조되어 유형에 처해지고 만다. 손권이 문책 사자를 보내 추궁했으므로 육손은 분을 이기지 못해 죽게 된다. 그래서 후계 싸움은 더욱 격화되어갔다.

 

250년 손권은 양쪽 모두 벌하는 형식으로 손화를 황태자에서 폐하고, 손패에게는 자결을 명한 뒤 그 일당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막내 손량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손화 폐위를 간언한 신하 수십 명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손권은 252년 4월, 제갈각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71살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평가

삼국시대의 대부분의 영웅호걸들이 영토 확장을 꿈꾸었던 점과 비교해보면 손권은 평화주의적이었으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방어를 성공적으로 해낸 인물이다. 그러나 진무가 전사하자 진무의 아내에게 자결을 명령하고 이복동생 손랑이 군용자재를 화재로 소실시키자 손가의 성씨를 박탈하는 등 냉혹한 모습도 눈에 띈다.

손권의 수하장수

손권의 친족 관계

 
 

손량(孫亮, 243년 ~ 260년, 재위 251년 ~ 260년)은 의 제2대 황제로, 손권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반부인(潘夫人)이다. 는 자명(子明).

 

손량은 손권의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에 손권에게 총애를 받았고, 황태자 싸움으로 인해 삼남 손화와 사남 손패가 쫓겨나거나 죽어 곧바로 태자에 봉해졌다. 이듬해(251년), 손권이 붕어하자, 9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제갈각이 전권을 위임받았으나, 253년에 손준이 그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했다. 손준은 256년에 죽었고, 그의 사촌동생 손침이 뒤를 이어 나랏일을 전단했다. 16세인 258년, 외척인 전씨 가문과 함께 손침 살해를 도모하였으나 발각, 회계왕으로 봉해지며 쫓겨났고, 그의 형인 손휴가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다른 곳으로 이송되던 중에 자살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총명한 판결을 내리는 등 명군의 면모를 보였으며, 의 실권자 사마소를 대항해 반기를 든 제갈탄을 도와주기도 했다.

 
 
 

오 경황제 손휴(吳 景皇帝 孫休, 235년~264년, 재위 258년~264년)는 의 제3대 황제로, 는 자열(子烈)이다. 손권의 여섯번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희황후 왕씨(敬憘皇后 王氏)이다.

 

즉위 전

252년 정월, 형 오 문제 화가 남양왕에 임명되고, 손분이 제왕에 임명될 때, 낭야왕(琅琊王)의 작위를 받고 호림에 거주했다. 폐제가 즉위한 후, 제갈각이 왕자들을 강가의 요충지에 두지 않고자 하여 손휴를 단양군에 옮겼다. 그러나 단양 태수 이형의 침해를 받았으므로 글을 올려 다른 군으로 옮기기를 구해, 조서로써 회계로 옮겼다.

 

즉위 후

태평 3년(서기 258년) 10월, 손침은 폐제를 쫓아내고, 10월 18일에 낭야왕을 제위에 올렸다. 경제는 즉위 후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영안으로 고쳤다. 이후, 손오의 황제로서는 유일하게 재위 기간에 연호를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또 손침을 승상·대장군에 임명하고, 손침의 네 동생을, 얼마 지나지 않아 손화의 세 아들을 모두 후로 삼았다. 손침과 그 네 아우의 권력이 심히 커 군주를 흔들 지경이었으므로, 경제는 두려워하여 자주 상을 주었다. 오래지 않아 손침이 역모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므로, 12월 8일에 경제는 심복인 좌장군 장포와 모의하여 손침을 주살하고 그 삼족을 멸했다.

 

11월 21일, 한 집안에서 다섯 사람이나 세 사람이 부역에 징집되었을 경우 한 사람을 남겨 조세와 군역을 면제케 하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또 자신이 즉위할 때 맞아들인 신하들의 등급을 하나씩 올렸다. 손침을 주살하고서는, 학교를 세우고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며, 관리와 관리의 자제들을 교육시켜 시험을 보게 하고 등급을 매겨 상을 주게 하는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260년(영안 3년), 가을에 도위 엄밀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리당을 만들었다. 여러 신하들은 많은 공을 들여도 이룰 수 있는 보장이 없다고 했지만, 태상·위장군 복양흥만이 만들 수 있다고 하여 병사와 백성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비용은 헤아릴 수 없었고, 병사들이 죽거나 도망하거나 혹은 스스로 적살(賊殺)하여 백성들은 매우 원망했다.

 

262년(영안 5년), 8월 16일에 부인 주씨를 황후로 세웠고, 19일에 아들 손완을 태자로 세웠다. 10월, 위장군 복양흥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장포에게는 궁궐의 부서를 맡기고 복양흥은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정무에서 옮겨 학문에 힘쓰고자 했다. 그리하여 박사좨주 위요, 박사 성충과 토론하고자 했으나, 위요와 성충이 자신의 과실을 드러낼 것을 꺼린 장포가 황당한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경제는 장포의 잘못을 지적하고 장포를 원망했으나, 장포가 사죄하고 장포의 의심을 사는 것을 꺼려 결국 이 일을 작파하고 위요와 성충을 궁으로 들이지 않았다.

 

263년(영안 6년), 오의 우방 촉한이 위의 침공을 받자 구원병을 내어 수춘과 면중으로 진격했으나, 촉한은 멸망했다.

264년(영안 7년), 촉한이 망하였으므로 장수들을 보내어 촉으로 쳐들어가, 파동 수비대장 나헌을 공격했다.

 

264년 7월,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손화의 아들이며 손휴의 조카인 오정후 손호가 즉위하였다. 태자 손완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손호가 대신 뒤를 이었다. 이후 손완은 예장왕에 봉해졌으나, 손호가 손완을 포함한 손휴의 아들을 모두 죽였다.

 

가족 관계

  • 경황후(景皇后) 주씨(朱氏) (황후): 주거의 딸
  • 손완(孫?) (장남) (이름 글자는 비 우(雨)머리에 홑 단(單)자가 합해진 형태로, 경제가 아들의 이름으로 쓰고자 특별히 만든 글자다.)
 

손화(孫和, 224년 ~ 253년)는 삼국시대 동오의 초대 황제인 손권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자효(子孝)이다. 어머니는 낭야 사람 대의황후(大懿皇后) 왕씨(王氏)다. 동복 아우로는 손패가 있다.

 

그의 형인 손등 손려가 요절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손권이 손화와 손패의 황태자와 번왕의 구별을 없앴으므로, 오나라의 신료들이 손화파와 손패파로 갈라서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손권에게 손화의 황태자 지위를 공고히 할 것을 간언하였으나, 손권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후에 손권은 손패를 죽이고 손화를 황태자에서 쫓아내고, 남양왕(南陽王)으로 임명하여, 장사로 귀양보냈다. 이후 손량 시대에, 정권을 잡은 제갈각이 손화의 정비 장씨의 외숙이었고, 민간에는 제갈각이 손화를 맞아들이려 한다는 말이 있었다. 손준 제갈각을 암살한 후, 이 때문에 손준은 손화의 인수를 빼앗고, 신도로 보내어, 사사했다. 향년 30세였다.

 

그의 아들 손호가 손휴 대에 오정후에 봉해지고, 손휴 사후 황제에 오른다. 손호가 황제에 즉위한 후, 문황제(文皇帝)로 추증된다.

 
 

손호(孫皓, 242년 ~ 284년)는 오나라 최후의 황제로 는 원종(元宗)이다. 별칭으로 팽조(彭祖)가 있다. 손권(孫權)의 셋째 아들인 손화(孫和)의 아들이다.

 

손화가 죽임을 당한 후, 손휴가 황제에 즉위하자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264년, 손휴가 급서하자 연장자이며 총명한 손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 선정을 베풀었으나, 건업(建業)에서 무창(武昌)으로 천도를 하고 주색을 일삼는 등 폭정을 일삼았고, 충신들과 손휴의 아들들을 죽였다. 교주에서 일어난 곽마의 반란과 손호의 주변에 있던 암신들에 의해 국력이 쇠퇴해진 때에 를 대신해 일어난 진나라의 대공세로 진나라에 항복한다. 항복 후, 사마염에 의해 귀명후(歸命侯)에 봉해졌고, 284년에 진의 수도 낙양(洛陽)에서 사망한다.

 

그의 무덤 옆에는 후일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이 묻혔다고 한다.

 
 
 

 

 

 

감녕(甘寧, ? ~ 약 222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이다. 는 흥패(興覇)이다. 오나라 수군의 핵심으로 적벽대전에서 크게 활약해 강좌호신(江左虎臣)이라 불렸다.

 
감녕

 

 

생애

 

금범적

파군(巴郡) 임강(臨江)현 출신. 《삼국지연의》에서는 해적 출신으로 나온다. 젊은 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해서 동네 무뢰한들을 이끌고 지역 자경단과 같은 행동을 해 범죄 사건 등이 일어나면 범인 체포와 처벌을 행했다. 또한 조정의 관리라도 자신들을 존중하고 후하게 대접하는 자와는 함께 즐기고,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부하들을 시켜 혼내주는 등 방약무인으로 날뛰었다. 이런 행위를 20여년 간 지속했다.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손에는 활 등을 들고, 허리에는 방울을 달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방울 소리만 듣고도 그들이 찾아온 것을 알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다.

 

《삼국지》유언전에 인용된 《영웅기》에 '형주 별가 유합(劉闔), 유장의 장수 심미(沈彌), 누발(婁發), 감녕(甘寧)이 반하여 유장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형주로 달아났다.'는 기술이 있어, 이 감녕이 본문의 감녕과 동일인물이라면 감녕은 익주에 있을 시절 잠깐이나마 유장을 섬긴 것이다.

 

갱생

그러다 우연히 옛 현자가 지은 서적을 읽고 감화를 받아 마음을 고쳐먹고 큰 뜻을 품은 뒤 부하들을 데리고 유표를 따른다. 그러나 문치주의를 중시했던 유표는 감녕을 잘 대우해주지 못했고 감녕 또한 이상주의만으로는 난세를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해 황조 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황조도 감녕을 예우해주지 않았다. 손권이 공격해왔을 때 감녕이 손권의 부하 능조를 사살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황조의 부하 소비는 자주 황조에게 감녕을 중용하도록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는 감녕을 오나라로 보내주었다.

 

오나라에 등용되다

손권 밑으로 들어간 감녕은 주유 여몽의 추천으로 특별 대우를 받게 된다. 감녕이 손견의 원수인 황조 토벌을 진언하자, 손권은 그에게 전군의 지휘를 맡겨 황조를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동시에 강하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런데 소비가 체포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감녕이 손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루에 머리를 쳐서 피를 흘리며 소비의 구명을 호소해 옛 은덕에 보답했다.

 

그 후로도 감녕은 담력과 기지를 이용해 뛰어난 군사 능력을 발휘하였다. 적벽 전투에서는 조조군에게 첩자를 보내 가짜 정보를 들려준다. 적벽 전투가 끝나고 남군의 조인과 싸울 때 감녕은 성을 탈취하지만 곧바로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감녕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훗날, 손권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탈취한 일로 노숙 관우와 익양에서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를 수행했다. 당시 관우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그 중 정예 5천을 가려내어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겠다고 했다. 감녕은 당시 병사 3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병사 5백을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말해 노숙이 가려 뽑은 병사 1천을 받아 그 날 밤 가니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유수에서 조조의 40만 대군과 대치할 때에는 부하 가운데 용감한 병사 100명 정도를 선발해 조조군에 기습을 가해 혼란을 일으킨 후 크게 승리하는데, 전투 전에 병사들을 격려하고 일일이 술잔을 따라 돌렸다. 이처럼 그는 유능한 인물을 존중하고 병사들을 아꼈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위해 기꺼이 싸웠다고 한다. 손권은 “조조에게는 장료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다” 고 그를 칭찬하였다.

감녕은 동료인 능통과 자주 불화를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능통의 아버지인 능조를 감녕이 전사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능조는 감녕이 사살한 것이 아니라 감녕과의 난전 중에 빗나간 화살이 능조의 머리를 관통하여 능조가 전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감녕에 대한 능통의 증오심 때문에 두 사람은 전장에서 공로 다툼을 벌였고 손권이 이를 중재해 화해시키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하지만 합비전투에서 능통이 손권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악진을 만나 고전하여 죽게 될 위기에 몰리자 감녕이 악진을 물리치고 능통을 구출해주어 능통은 감녕과 화해한다.

 

이릉 전투 때 감녕은 이미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으며 이릉전투가 발발하면서 사망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감녕

감녕은 머리에 촉한 사마가가 쏜 화살에 맞고 부지구의 큰 나무 밑에서 죽고, 이때 나무에 있던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그의 시신을 에워싸고 지켜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각색일 뿐 정사에는 사마가가 감녕을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

그 뒤 감녕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고,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고깃덩어리를 던지면 까마귀가 공중에서 받아먹는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감택(闞澤, 174년 ~ 243년)은 중국 삼국시대 (吳) 왕조의 문신이다. 자는 덕윤(德潤)이고 회계(會稽) 산음(山陰) 출신.

말솜씨가 뛰어나 적벽대전(赤壁大戰)때 황개 고육지계(苦肉之計) 밀서를 조조에게 전달하여 계략을 성공시킨다. 또 유비의 침공에 대비하여 육손을 대도독으로 천거하였다. 관직은 태자태부(太子太傅) 도향후(都鄕侯)에 이르렀다.

 
 
 

고옹(顧雍, 168년 ~ 243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두번째 승상이며,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으로서 는 원탄(元歎)이다.

고옹의 이름에 대해서는, 채옹에게서 학문을 배운 것과 관련한 일화가 전해진다. 고옹이 채옹에게서 학문을 빨리 익혔으므로, 채옹은 고옹을 높이 평가하여 고옹에게 자기 이름을 주었다. 그래서 고옹의 이름이 '옹(雍)'인 것이다.  옹(雍)과 옹(邕)은 그 뜻이 통한다. 고옹의 자 원탄은, 채옹이 감탄한 바를 말한 것이 자가 된 것이다.

 

생애

고옹은 일찍이 채옹(蔡邕)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여러 곳을 다스리면서 항상 치적이 있어서 손권 회계의 태수로 있을 때, 그를 회계군의 승(丞)으로 임명하여 태수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 뒤 좌사마를 거쳐 대리봉상(大理奉常) 겸 상서령으로 임명되고 또 양수향후(陽遂鄕侯)로 봉해졌다. 225년(황무 4년), 태상으로 바뀌어 임명되었고, 예릉후(醴陵侯)로 승진하여 봉해졌으며, 손소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고, 상서의 일을 총괄했다.

 

고옹은 항상 민간에서 의견을 구했으며, 당시 정무에 맞는 것이 있으면 비밀리에 보고했다. 만약 이것이 쓰이면 공을 임금에게 돌렸고, 쓰이지 않으면 끝내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손권은 고옹을 중시했다. 일찍이 손권이 정치의 득실을 자문하자, 장소는 법령이 너무 많고 자세하며 형벌이 지나치게 무거우므로 이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손권은 묵묵히 있다가 고옹을 돌아보고 의견을 구하자, 고옹은 장소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손권은 이에 옥사와 송사에 대해 의논하고, 형벌을 줄였다.

 

교사 여일이 득세하여 많은 사람들의 작은 결점을 고발하여 대신들을 비방하고 무고한 자를 참소하였는데, 고옹도 이에 걸려들어 견책을 당했다. 여일은 고옹에게 죄를 주고, 반준을 후임 승상으로 올릴 생각이었으나, 황문시랑 사굉이 여일에게 반준이 여일에게 품은 적의를 알렸으므로, 고옹은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여일이 권세를 잃고 그 행악이 드러나 죄인이 되자, 고옹이 여일의 죄를 물었다. 고옹은 온화한 말로 그 사안을 물었고, 옥에서 나올 때에도 여일에게 물었다. “그대의 마음 속에는 말하고 싶은 것이 없소?”상서랑 회서가 여일을 면전에서 꾸짖자, 고옹은 회서를 꾸짖었다.

 

승상으로 임명된 지 19년이 지난 적오 6년(243)에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숙후(肅侯)라고 했다.

 

성격

고옹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고 말이 적었던 데다가 항상 주장이 곧고 고집이 있었다. 또한 관리를 선발하여 임용할 때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임무를 맡겼고 자신의 감정에 좌우되는 일이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술을 마시다 실수하면 고옹이 반드시 보게 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그가 있을 때는 술을 마실 때조차 즐기지를 못하고 항상 두려워 했다고 한다.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세력가인 손권의 참모이다. 는 자경(子敬)이다. 임회(臨淮) 동성(東城) 출신.

 

생애

어릴적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와 함께 살았다. 가문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 부호가 되었다. 그는 돈을 풀어 인재들과 교제를 쌓았으며, 원술을 섬기다가 그의 됨됨이를 알고 100여명의 소년들을 이끌고 거소로 거주하였다. 거소에 거주 중에 주유와 친분을 쌓아, 주유가 손권에게 추천하여 중용되었다. 208년 조조가 하북에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승리하고, 하북을 평정하여 유종에 형주마저 점령하니 조조는 강동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에 손권에 신하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여 오나라의 평화를 지키자고 주장하였으나, 노숙은 홀로 유비와 결탁하여 형주를 점령, 조조와 항전하자고 주장하였다. 노숙은 당양으로 가서 유비와 동맹을 맺고, 주유의 활약으로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대패한다. 210년 주유를 이어 강동에 군권을 거느리게 되었다. 217년 여몽을 후임으로 선정하고 병사하였다. 노숙은 손권에게 천하삼분지계를 건의하였으며, 사람됨이 온화하였다.

 
 
 

능통(凌統, 189년 ~ 237년?)은 중국 삼국시대의 인물이다. 는 공적(公績)이다. 능조(凌操)의 아들.

 

아버지 능조는 오나라 손책 손권을 2대에 이어 시중을 들었다. 그런데 203년 능조가 황조(黄祖)를 공격했을 때, 당시 황조의 부하인 감녕(甘寧)의 군대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지에 의하면 감녕이 잘못 쏜 화살에 능조가 맞고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그 후에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손권으로부터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되었다.

 

그뒤 감녕이 손권의 부하가 된 후에 동료인 여몽이 오의 무장들을 모으고 연회를 열었을 때 능통은 칼춤을 추면서 아버지의 원수인 감녕을 죽이려고 했지만, 여몽이 그 자리를 방해하게 돼서 결국 감녕을 죽이지 못하게 되었다.

 

208년 손권이 다시 황조토벌을 개시했을 때 적군 장수 장석(張碩)을 죽인 공을 높게 사서, 승열도위(承烈都尉)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합비(合肥)를 공격했을 때 장료에게 반격을 당해 생명이 위험했던 주군·손권을 결사적으로 지키는 등 공적을 올리고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 이때 능통은 장료와 겨루던 도중 조진의 화살에 맞고 낙마하여 악진의 표적이 되었다. 악진은 능통을 죽이기 위해 창을 휘둘렀는데 그 창을 막은 다른 창이 있었다. 다름아닌 감녕의 창이였다. 이 전투에서 감녕은 낙마한 능통을 구출하여 능통은 감녕과 화해했다.

 

합비를 공격한 손권이 적군에게 고립되 절체절명에 빠졌을때, 능통은 부하 300기를 이끌어서 적진으로 침투했다. 장렬한 사투끝에 손권의 구출에 성공했다. 전신에 상처를 입어 빈사 상태인 능통에게 손권은 스스로의 의복을 입히고 극진하게 간호를 시켰다. 다시 회복한 능통은 자신을 따라 온 부하가 전원 전사했던 것에 낙심했지만, 손권은 「죽은 사람은 더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공적이 있다. 그래서 충분하다.」라고 위로했다. (오서·능통전)

 

삼국지연의》에서의 서술에 따르면 그 후, 유수구 전투에서 원수인 감녕이 궁지에 빠졌을때 구해준것을 계기로 아버지의 원한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서 감녕과 단단한 친교를 묶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삼국지》(정사)에서는 그러한 내용은 없고, 군대 임무를 받아 근무하는 곳(임지,任地)이 감녕과 같이 된 곳은 없었다. (다만, 전쟁에서는 몇번이나 같이 작전 행동을 한 적이 있다.)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삼국지》오서 능통전에서는 49세에 죽었다고 서술한다. 이 기록과, 아버지 능조가 전사했을 때의 기록으로 추론하면, 죽은 해는 237년이다. 《삼국지》오서〈낙통전〉에서 서술된 점과 오나라와 관우와의 싸움이나 이릉 전투에서 참가하고 있지 않는 것 등에서, 능통전의 '49세'를 '29세'의 오기로 보고, 217년에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마충(205년 ~ 249년) 오나라의 장수이다. 마대의아들마초의 조카로 기록되어있다. 249년 병으로 죽는다. 벼슬로는 중의참사,편장군이있다

 
 
 

서성(徐盛, ?~?)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군이며, 는 문향(文嚮)이다. 원래는 산동 낭야(瑯耶) 사람이지만 전란을 피해 오군(吳郡)으로 이주했다.

 

손권에게 등용되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된 후, 병사 5백을 받고 시상현장을 맡아 황조(黄祖)의 아들 황역(黃射)이 이끄는 수천 군사의 공격을 물리쳤다. 손권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교위(校尉), 무호현령으로 임명했다. 또 임성 남쪽의 산월을 친 공로로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213년 1월 조조가 유수구(濡須口)에 쳐들어왔을 때 폭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군을 향해 돌격하여 손권의 칭찬을 받았으며, 221년 7월 유비가 형주를 공격해 왔을 때 육손(陸遜)의 지휘를 받으며 이릉(夷陵)에서 촉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유비가 백제성(白帝城)으로 달아나자 손권에게 유비를 계속 뒤쫓을 것을 청했으나, 육손이 조비(曹丕)의 침공을 대비하여 군사를 물렸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그 해에 위나라에서 태상(太常) 형정(邢貞)이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책봉하기 위해 오나라에 왔는데, 처음 왔을 때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서성은 분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렸다. 형정은 이 일을 전해 듣고 오나라의 복종이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222년 9월에는 오를 공격해온 조휴(曹休)의 군사들을 상대로 분투하여 공을 세웠다. 이 싸움 후 손권은 서성을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임명하고 무호후(蕪湖侯)로 봉했다.

 

224년 8월 조비가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키자, 서성은 나무에 갈대를 입혀 성과 누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전함을 많이 띄워 위군을 속이고자 하였다. 얼마 후 도착한 조비는 오군이 쌓은 성벽이 수백 리나 이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철수했다. 이를 위성계(僞城計 - 거짓 성벽)이라 한다.

 

서성은 황무(黃武: 222년~229년) 연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있을 뿐 정확한 사망시기는 알 수 없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서성

손권에게 등용된 것으로 나오기는 하나 적벽 대전 때 동남풍을 비는 제갈량(諸葛亮)을 죽이려고 하는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후 남군 공격, 합비 전투, 형주 점령, 이릉 전투 등 여러 전장에서 활약한다. 연의에서는 정봉(丁奉)과 같이 나올 때가 많다.

228년 주방(周魴)이 조휴를 속여 석정(石亭)으로 끌어들였을 때 서성이 위군을 무찌르는 데 공헌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석정 전투에 관련된 사서 기록에는 서성이 참전했다는 말은 없다.

 
 
 

여몽(呂蒙, 178년 ~ 219년)은 가 자명(子明)으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이다. 손권의 참모였던 노숙은 본래 전형적 무인이었던 그에게 학문을 익힐것을 권하였고 학문을 익힌 후 달라진 여몽을 본 노숙이 놀랐다고 하는 괄목상대라는 고사성어와 관우를 사로잡은 것으로 유명하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혼에 씌여 죽은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는 병사하였다.

 

여남군 출신. 매형이 손책(孫策)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젊은 나이로 손책을 섬기게 되었다. 200년, 손책이 죽은 후 그 동생인 손권(孫権)역시 섬겼다. 여몽은 용장으로서 그 무용으로 손권에게 수많은 공훈을 세웠으며, 황조(黄祖)와의 전투에서는 적의 도독인 진취(陳就)를 직접 베었다. 그리고 208년 적벽(赤壁)의 전투와 강릉(江陵)의 전투에서도 공훈을 세워 편장군 심양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여몽은 황조(黄祖) 토벌을 시작으로 적벽(赤壁)의 싸움, 그 후의 주유(周瑜)의 형주(荊州)를 어우르는 일련의 싸움에서 대장을 맡아 전공을 올리는 활약을 했으나, 교양적인 면모는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주군인 손권에게서 교양의 중요성을 훈계받은 후에 학문에 길을 세웠다. 강표전(江表伝)에 의하면, 손권으로부터 “특별히 박사가 될 필요까지는 없고, 그저 과거의 일을 많이 알고 있었으면 한다.”라고 들었다고 하나, 여몽은 결국 유학자로서 성공할 정도로 많은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그 후, 노숙(魯粛)의 후임으로써 형주를 임명받은 여몽에게 노숙(魯粛)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을 때, 면학에 심취해있던 여몽은 무엇이든 막힘 없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노숙(魯粛)은 여몽을 ‘오나라의 아몽에 비할 수 없다’ (아몽은 어릴적의 여몽을 부르는 말)라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여몽은 ‘사(士)는 3일만 떨어져 있어도 주목하며 상대하게 된다.’고 말했다 (매일매일 공부하는 자는 삼일만 만나지 않아도 크게 변화하여 있다라는 의미로, 상대를 볼때 선입관에 빠져서 대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하는 의미).

 

손권(孫権)은 성인이며 학문에 심취한 장군으로서 여몽과 장흠(蒋欽)을 들었다. 또한, 진보가 없는 인물을 ‘오나라의 아몽’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여몽은 대국인 위(魏)나라를 공격하여도 효과가 적을것을 염두에 두어, 촉(蜀)이 체결을 무시하고 점거하고 있는 형주(荊州) 남부의 전역을 되돌려 받은후, 그곳을 발판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19년, 형주를 지키고 있는 촉의 명장 관우(関羽)와 대항하던 중 병에 걸리게 된다. 후임으로써 명장 육손(陸遜)을 임명하여, 관우 휘하의 미방(麋芳)을 배반시켰다. 그리하여 관우의 퇴로를 끊어버리고, 12월 겨울에 당양현(当陽県)의 남쪽에 있는 장향(臨沮)에서 관우를 포획, 임저(臨沮)에서 그의 아들 관평(関平)과 함께 처형했다. 이로써, 여몽은 관우를 쓰러뜨리고 형주를 되찾은 큰 공훈을 얻었다.

 

그러나 이전부터 병이 낫지 않았던 여몽은 결국 사망하게된다. 향년 42세 때다. 그 사후에 차남인 여패(呂覇)가 뒤를 이어 떠나고, 직후 남은 두명의 형제역시 차례대로 세상을 떠났다.

 

진수는 여몽을 평가하면서 용맹하면서도 지략에 능하였으니, 무장으로써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평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여몽

삼국지연의에서, 10월 14일에 관우를 쓰러뜨리고, 12월 17일에 관우의 망령이 나타나 여몽의 멱살을 잡으며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말한뒤 “나는 관우다”라고 외치자,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를 뿜어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인기 높은 관우를 죽였기 때문에, 후세에 촉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창작물에서 악역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 '오하아몽', '괄목상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육손(陸遜, 183년 - 245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모신(謨臣)이다. 는 백언(伯言)이며 손책의 사위이다. 촉한 위나라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하여 오나라를 지켜냈으며, 관우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유비의 복수를 실패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인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강동 지역을 다스려온 호족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큰아버지인 여강태수 육강(陸康)에게 양육되었다. 그러나 육강이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원술과 대적하게 되자 육강은 일족을 육손에게 맡기고 오나라로 피신시킨다. 오나라에서 육손은 관직으로 진출하여 현의 관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등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또 오나라는 당시 이민족의 숱한 습격으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는데, 육손은 주민들 가운데 지원병을 모집해 쳐들어오는 이민족을 하나하나 격파하고, 투항하는 자는 자기 군세에 가담시켰다. 육손의 그러한 활동에 주목하던 손권은 그에게 형 손책의 딸을 시집보내어 친분 관계를 맺고 종종 정치적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였다. 육손의 ‘이민족을 하나둘씩 평정하여 그 가운데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은 손권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 실행을 육손에게 맡겼다. 그래서 각지의 이민족은 육손에 의해 점차 토벌되어 정예병으로 흡수되었다.

 

오나라와 촉한 간에 형주를 둘러싼 대립이 일어나고 있던 도중 전선 사령관이었던 여몽이 병에 걸려 귀환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육손은 여몽이 전선을 이탈하면 조만간 그를 경계해 북쪽으로의 진격을 망설였던 관우가 필시 방심하여 올 것이라 여기고, 여몽을 자기 진영으로 불러들여 관우가 방심한 틈을 노려 형주를 빼앗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여몽은 오나라로 돌아와 손권에게 그 점을 진언하고, 자기 대신 형주 수비를 맡을 사람으로 육손을 추천하였다.

 

여몽의 후임이 된 육손은 관우에게 매우 겸손한 내용의 서신을 보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안심하고 위나라를 침공한 관우는 여몽의 계략에 허를 찔러 패배하고 사로잡혀 처형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오나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전군의 지휘권을 맡겨 촉한의 침공을 막게 하였다. 양군은 이릉에서 대치하였는데, 육손은 전군에게 수비를 단단히 하고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린다. 그 때문에 육손을 향해 겁쟁이라며 불평하는 병사들이 많자 육손은 손권이 친히 내린 보검을 뽑아들고 “지금은 한 치의 땅이라도 취할 수 있다면 어떤 욕됨이라도 참아야 할 때다! 그대들은 각처의 요지를 지키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라! 만약 함부로 움직인다면 군령을 어긴 죄로 처형할 것이다” 하고 꾸짖어 그들을 통제하였다. 마침내 오랜 대치상태로 촉한군이 기강히 해이해지자 육손은 즉시 화공을 가하여 격파하였다.

 

유비가 죽자 오나라와 촉한은 다시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위나라에 대항하게 된다. 손권은 옥새를 육손에게 맡기고 외교 문서를 모두 그에게 회람시켜 문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정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군사 면에서도 육손은 오나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어 위나라가 종종 오나라를 침공해오지만 그 때마다 육손의 천재적인 전략으로 패주시켰다.

 

그 후 육손은 오나라의 최고사령관으로 승진하고, 그를 비롯한 신료들의 맹활약으로 마침내 손권은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244년(적오 7년) 육손은 고옹의 뒤를 이어 승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억울하게도 제위 후계자 문제로 손권에게 아무 이유 없이 누명으로 문책을 당했으며, 이듬해 63살의 나이로 화병으로 분사했다.

 
 
 

육적(陸績, ?-?)은 중국 삼국 시대 오나라의 관료·학자로, 오군 오현 사람이며 자는 공기(公紀)다.

 

회귤 고사

육적이 6살 때, 구강에서 원술을 뵈었다. 원술이 귤을 내왔는데, 육적은 그 중 셋을 품었다. 육적이 떠날 때, 원술에게 배례를 하다 귤을 땅에 떨어트렸다. 원술이 “육랑은 손님으로 왔으면서 왜 귤을 품었지?”라고 묻자, 육적은 “돌아가서 어머니께 드리고자 하였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원술은 이 대답을 듣고 기이히 여겼다.

 

이 이야기는 진수가 지은 역사서 《삼국지》에 있는 바인데, 원나라 곽거경이 지은 《이십사효》에도 수록되어, 훗날 “회귤고사”“육적회귤”“회귤”이라 하여 지극한 효성을 일컬을 때 인용되었다.

 

동오의 선비

손책은 오군에 있으면서, 장소, 장굉, 진송(秦松)을 상빈으로 모셨다. 이들은 사해가 아직 태평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무력으로써 다스려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육적은 나이가 어렸는데, 멀리서 크게 외쳐 관이오의 패업과 공자의 말을 들어, 이들이 덕이 아닌 무력에 의한 통치만을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여 장소 등을 놀라게 했다.

 

육적은 용모가 웅장하고 박학다식하여, 천문, 역법, 산술 등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번은 옛날부터 명성이 있었고, 방통은 형주의 유명한 선비인데, 모두 육적과 친교를 맺었다. 방통이 주유의 상여를 운구해 오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창문에서 육적, 고소, 전종과 함께 모였다. 방통은 이 세 사람을 평하였는데, 육적에 대해서는 “굼뜬 말이라 할 만하니 매우 빠른 발의 힘이 있다.”고 평했다. 육적은 고소와 함께 “천하가 태평해지면 경과 더불어 사해의 선비들을 헤아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방출, 저술, 죽음

손권이 정사를 통괄하게 되자 육적을 초빙하여 주조연으로 삼았으나, 직선적인 태도로 인해 꺼림을 받게 되어 울림태수로 전임되고, 편장군을 더하여 병사 2천 명을 받았다. 육적은 다리에 병이 있었고, 선비로서 학문에 뜻이 있었으므로, 병사를 거느리고 싸우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육적은 군무 중에서도 저술을 폐하지 않아, 《혼천도》를 짓고, 《주역》에 주를 달고, 《태현》을 풀이했는데, 모두 세상에 남았다.

 

육적은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사를 지었다. “한의 지사 육적은 어려서는 《시경》, 《상서》를 익혔고, 장성해서는 《예기》, 《주역》을 익혔으나, 명을 받아 남정하던 중, 질병에 걸려 위독해졌구나! 내가 만난 수명은 길지 못하니, 오호라, 세상과 격리됨이 슬프구나!”또 가로되, “지금부터 60년이 지나면, 수레는 궤를 같이하고, 글은 문자를 같이할 것인데, 이를 보지 못하니 원통하구나!”육적은 32세에 죽었다.

 

인물평

  • 진수의 평: 진수는 육적을 높게 평가하여, “양웅의 《태현》에 대한 육적의 공적은 중니(공자)의 《춘추》에 대한 좌구명의 공적이나 노담(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장주의 공헌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고, 손권의 인사에 대해서는 “이처럼 귀중한 인재에게 남월을 지키게 한 것은, 또한 인재를 해친 것이 아닌가!”라고 평했다.
  • 방통의 평: 위의 동오의 선비 문단 참조.

 

《삼국지연의》의 기술

삼국지연의에서는 제43회에서 제갈공명이 동오를 찾아와 선비들과 논쟁을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설종이 공명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공명의 대응에 부끄러워하자, 육적은 조조는 전한의 공신인 조참의 후예이지만 유비는 황실 후예라는 것도 별 근거가 없고, 고작 돗자리나 짚신을 짜던 사람인데, 어떻게 조조와 함께 설 수 있겠냐고 공격했다. 공명은 유비가 황실의 후예임은 황실이 인증한 바며, 조조가 조참의 후예라면 지금 조조가 황제를 끼고 전횡을 부리는 것은 한실에는 역적이고 조씨 가문에는 패륜아가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 전한의 고조 유방은 고작 정장의 지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유비가 돗자리나 짚신을 짜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답했다. 육적은 말문이 막혀 답하지 못했다. 회귤 고사는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다만 공명은 자신을 공격하는 육적에게 대답할 때 육적을 가리켜 “공은 원술 앞에서 귤을 품었던 육랑”이라고 일컬었다.

 
 
 

장소(張昭, 156년 ~ 236년)는 중국 삼국시대 의 문관이다. 는 자포(子布)로 팽성(彭成) 출신. 손책의 유명을 받들어 손권을 보좌하여 보오장군(輔吳將軍), 누후(樓侯)에 책봉되었다. 시호는 문후(文侯).

 

출사 전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예서에 뛰어났다. 낭야 사람 조욱, 동해 사람 왕랑과 함께 명성을 날리고 친교를 맺었다. 약관의 나이에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서주자사 도겸이 무재로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도겸은 자신을 가벼이 여겼다고 여겨 잡아들였다. 조욱이 힘을 다해 구출하여 석방되었다.

 

손책 시절

후한 말, 세상이 어지러워,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 양주로 옮겼다. 손책이 창업하자 장사(長史), 무군중랑장(撫軍中郞將)이 되었고 문무의 일을 그에게 물어서 처리할만큼 정치에 능하엿다. 손책은 임종 직전에 장소에게 아우 손권을 부탁했다.

 

손권의 계승을 주도하다

손책이 죽은 후, 여러 관료들을 이끌고 뒤를 이은 손권을 보좌했다. 손권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주공의 아들 백금이 주공이 세운 상례를 따르지 않은 고사를 들어 상복을 바꿔입고 군대를 순시하게 하니, 이런 후에 사람들은 마음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았다. 당시 손권에게 의탁하고 있는 선비들은 자신의 안위에 따라 머물 곳을 결정하였으므로 스스로 신하로 여기지 않았는데, 장소와 주유 등은 손권이 함께 대업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마음을 맡기고 손권에게 복종했다. 또 손권의 장사가 되었고, 맡은 바는 이전과 같았다.

 

유비가 손권으로 거기장군을 대행하게 했을 때, 장소는 군사가 되었다.

황초 2년(221년), 위나라에서 사자 형정을 보내어 손권을 오왕에 봉했다. 형정이 궁궐 문에 들어서고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으므로, 장소는 형정의 무례함을 꾸짖고 협박하여 형정은 수레에서 곧 내렸다. 장소는 수원장군에 임명되었고, 유권후에 봉해졌다.

《삼국지》장엄정감설전에 따르면, 엄준을 천거한 이가 바로 장소였다.

 

잦은 간언, 갈등

손권은 항상 사냥을 하였으며, 언제나 말을 타고 호랑이를 쏘았는데, 호랑이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 말안장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장소는 안색이 바뀌어 앞으로 나아가 이런 일을 그만두도록 간하였다. 손권은 이것은 그만두었으나, 특별히 호랑이 사냥용 수레를 만들어 사방을 막고 덮개는 두지 않으면서, 수레 안에서 호랑이를 쏘았다. 때때로 미친 짐승이 수레를 범하기도 했으나, 손권은 매양 이를 쳐버리며 즐거워했다. 비록 장소가 간언하여 쟁론했으나, 손권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손권이 무창에 있을 때, 조대에 나가 크게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신하들에게 술을 주고 취하여 대에서 떨어지도록 즐기고자 하였다. 장소는 정색하고 말을 하지 않고 좌중을 나갔다. 손권이 사람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자신은 그저 즐기고자 할 뿐이라고 하였는데, 장소는 옛 은의 주왕이 질펀하게 술을 마실 때에도 즐기고자 할 뿐이었고, 이를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손권은 부끄럽게 여기고, 주연을 파했다.

 

당초, 손권이 승상을 두었을 때, 중의는 장소를 승상으로 삼는 데 있었으나, 손권은 손소를 승상으로 삼았다. 손소가 죽은 후, 백관들은 다시 장소를 추대했으나, 손권은 장소의 성정이 강직하므로 마뜩찮게 여기고 고옹을 승상으로 삼았다.

 

손권이 제위에 오르자, 장소는 늙고 병들었으므로 관위와 통수권을 내놓고 물러났다. 손권은 장소를 보오장군으로 임명하고, 대우를 삼사에 버금가게 했으며, 고쳐 누후에 임명하고, 식읍은 1만 호로 정했다.

 

공손연이 오의 번국이 되기를 청하자, 손권은 사신 장미와 허안을 요동에 보내 공손연을 연왕에 임명하려 했다. 당시 군신들의 논의는 반대였는데, 장소 역시 이것은 공손연의 본심이 아니라 하여 간언했다. 손권과 장소의 논쟁은 더욱 깊어졌고, 손권은 감당하지 못해 칼을 만지며 장소를 협박했다. 장소는 자기 말이 쓰이지 않을 줄 알면서도 옛날 오태부인의 조명을 받았기에 항상 충성을 다했다며 울었고, 손권은 칼을 던지고 장소와 함께 울었으나, 결국 장미와 허안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장소는 분히 여겨 병을 칭탈하여 조회에 나오지 않았고, 손권도 이를 한하여 장소 집 문을 흙으로 막았다. 과연 공손연은 장미와 허안을 죽였다. 손권은 여러 번 장소를 위로하고 사과했지만, 장소는 완고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손권이 이로 인해 궁궐 문을 나와 문 앞에서 장소를 불렀지만, 장소는 질병이 중하다며 사양했다. 손권은 문에 불을 질러 장소를 협박했으나, 장소는 다시 방문마저 닫았다. 손권은 사람들을 시켜 불을 끄고, 문 밖에서 오래 있었다. 장소의 여러 아들들이 함께 장소를 붙들어 일으켜, 손권은 장소를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왔고, 심히 자신을 꾸짖었다. 장소는 부득이하여 이후 조회에 참석했다. 《삼국지》시의호종전에서는 이 때 호종의 힘이 있었기에 손권과 장소가 화합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장소는 용모가 당당하고, 근엄하며, 위풍이 있었으므로, 손권은 항상 가로되“나는 장공과 함께 말하면, 감히 망언을 못 하오.”라 했다. 모든 나라가 그를 꺼렸다.

 

죽음

장소는 가화 5년(236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조문했으며, 시호를 내려 문후라 했다.

 

학자의 면모

출사하기 전, 백후 자안에게 《좌씨춘추》를 배웠다. 왕랑과 함께 옛 군주들의 휘사(諱事)를 논했는데, 진림 등이 모두 일컬어 좋다고 했다. 손권이 제위에 오르고 은퇴하였을 때, 집에서는 일이 없어 《춘추좌전해》와 《논어주》를 지었다. 손권이 일찍이 위위 엄준에게 어렸을 적에 외운 책을 암송하고 있는지 묻자, 엄준은 호경의 〈중니거〉를 외웠다. 장소는 “엄준은 비루한 서생입니다. 신이 폐하를 위해 외우기를 청합니다.”라 하고, 〈군자지자 상〉을 외었다. 모두 장소가 외운 바를 알고 있다고 여겼다.

 
 

장승(張承, 178년~244년)은 중국 삼국 시대 손오의 관료로, 자는 중사(仲嗣)다. 손오의 대신 장소의 장남이다.

 

어려서부터 재능과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고, 제갈근, 보즐, 엄준과 함께 좋은 친교를 맺었다. 태조가 표기장군이 되었을 때, 부름을 받아 서조연이 되었고, 외방으로 나가 장사 서부도위가 되었다. 산적을 토벌하여 정병 1만 5천 명을 얻었다. 후에 유수 도독, 분위장군이 되었고, 도향후에 봉해져 부곡 5천 명을 거느렸다. 가화 3년(234년), 태조의 명을 받아 손소 등과 함께 광릉, 회양으로 진군했다. 태조는 위 명제가 곧 오지는 못하리라고 여겼는데, 명제가 스스로 출격하였으므로 태조는 물러났고, 손소 등도 공격을 멈췄다.

장승은 사람됨이 장중하고[壯] 굳세며[毅] 충직하며[忠讜], 능히 인물을 살펴 알 수 있었다. 국사(國士)가 되어 위위에까지 오른 팽성 사람 채관, 예장 태수가 된 사경을 한미하고 어릴 때 발탁했다. 또 제갈각이 어렸을 때, 무리가 그 영재를 기이히 여겼지만, 장승은 종국에 제갈씨를 패하게 할 자는 원손(제갈각의 자)이라 했다.

 

자신을 진보케 하는 데 힘썼고, 친구들에게 정성을 다했으므로, 무릇 현인들 중 방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67세로 적오 7년(244년)에 죽었다. 시호를 내려 정후라 했다.

 

당초, 아내를 잃었을 때, 장소는 제갈근의 딸을 구했다. 장승은 제갈근과 좋은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워했으나, 태조가 권하여 마침내 제갈근의 사위가 되었다. 장승은 제갈근보다 겨우 네 살 어릴 뿐이다. 딸을 낳아, 태조는 아들 문제를 위해 그녀를 맞이했다. 태조는 자주 명령을 내려 문제가 장승을 공경하여 사위의 예를 행하게 했다.

 

능통이 죽었을 때,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장승을 시켜 능통을 위해 명뢰를 짓게 했다. 노숙의 유복자 노숙이 장성해지자, 장승은 나중에 결국 노숙이 유수독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인물평

진수는 “장승과 고소는 마음을 비운 인격자로서 인물을 좋아하고 숭상했다.”고 평한다. 영천 사람 주소가 책을 지어서 보즐과 엄준을 칭찬하는 글 중에서 “고예장(고소)·제갈사군(제갈근)·보승상(보즐)·엄위위(엄준)·장분위 같이 완미함을 이룬 자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또 “멀리서 보면 엄숙하고, 가까이서 보면 온화하다.”라 했다.

 
 
 

정보(程普) 자(字)는 덕모(德謨)이다 중국 후한 말기의 세력가 손견 휘하의 장수이다. 황개, 한당, 조무 등과 함께 손견의 창업에 조력하였다. 손견이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장이 되었을 때 화웅과 겨루기도 했으며 손견이 죽을 때 손견을 죽인 유표의 부하를 사살하기도 했으며 허공의 식객에게 기습당한 손책을 구출하기도 했다. 적벽대전 때는 주유와 함께 오군을 통솔하며 승리를 이끌어냈다.

 
 
 

제갈근(諸葛謹, 174년 ~ 241년)은 제갈량 제갈균의 형으로, 는 자유(子瑜)이다.

오나라와 촉나라 사이의 외교 교섭에 여러 차례 참여했으며 직위는 대장군 · 좌도호에까지 올랐다.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손권은 유비에게 잘보이기 위해 제갈근이 제갈량의 친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일부러 촉한의 사신으로는 항상 제갈근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관우는 이런 제갈근을 시종일관 무시했고 살해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말같이 길고 못생긴 얼굴 때문에 손권에게 놀림을 당한 적도 있었는데 이를 그의 아들 제갈각이 현명하게 대처하여 그 당나귀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주유(周瑜, Zhou Yu, 175년~210년)는 중국의 후한 말시대의 무장이다. 는 공근(公瑾)이며 외모가 수려하여 미주랑(美周郞)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손책 손권의 휘하에서 제독을 역임했으며 사적으로는 손책의 친구이다.

 

손견이 반동탁의 의별을 두었을 때와 손책이 어머니와 함께 거주지를 서로 옮겼을 때, 동갑인 주유와 친교가 깊어졌다. 두 사람의 우정은 ‘단금’(斷金), 즉 금속을 끊을 정도로 굳은 정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손견이 죽고 난 뒤, 원술에 휘하에 있던 손책이 강동(오)을 평정하면서(194년), 주유도 같이 싸워 공적을 올렸다.

 

그 후, 양주 북부의 환현을 공격했다. 이때, 교공의 두 명의 딸(이교)의 언니 대교를 손책의, 여동생 소교를 주유가 아내로 삼았다. 《삼국지연의》에서 이교는 교현의 딸로 “강동의 이교”라고 알려져 있어 언니는 대교, 여동생은 소교로 불려 절세의 미녀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손책이 급사해서, 남동생인 손권이 오의 후계자가 되었다. 손권의 모친인 오부인은, 주유를 손책과 같이 형으로 모시도록 손권에게 말했고, 주유는 새로운 정권의 여러 가지 사무 처리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당시 여러 장군이나 신하들은 집권한 지 얼마 안된 손권을 얕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때 주유는 스스로 솔선하고 경의를 다했고 신하의 예를 취하고 규범을 나타냈다.

 

적벽 대전

건안 13년(208년) 9월, 하북을 통일한 조조가 군대를 인솔해서 남하한다. 형주를 항복시켜 그 병사를 흡수하면서, 수병과 보병 아울러 80만이라고도 하는 대군이 되었다. 이 사태 당시의 손권 진영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때 주유는 노숙과 함께 의견을 같이 해서 싸움을 주장했다. 주유는 조조군이 가진 많은 불리한 점과 대항하는 자군의 이로운 점 등을 설명해서, 이에 뜻을 얻은 손권은 조조에게 대항하는 일을 결단한다.

 

손권은 3만 군사를 주유 및 정보 등에게 주었고 이때 형주로부터 피해 온 유비와 협력해 조조를 적벽의 땅에서 대치했다. 과연 주유의 예측한 대로, 이때 조조군은 벌써 군대에 전염병 등을 안고 있어서 단 한 번의 교전에서 조조군은 패배하고, 장강 북안에 돌아왔다.

 

그 다음, 주유는 남안에 포진했던, 황개의 화공책을 채용하고, 조조 군함선에 대해 화공을 계획한다. 하지만 주유는 여기에 대해 사항계라는 이중의 계책을 고안해내어 황개로 하여금 조조군에 거짓 투항하게 만들어 조조군 함대 내에서 화공을 실행하도록 계획한다. 이후 투항을 위장해 접근에 성공한 황개가 조조군의 선단에 불을 질렀다. 불은 금세 다른 배에 번져서, 거의 모든 배가 타들었다. 피해가 아주 컸기 때문에 조조군은 마침내 패배했고 조조는 도망쳤다.

 

유비가 주유와 합류해 추적했다. 조조는 조인에게 강릉성(江陵城)의 수비를 악진에게는 양양의 수비를 맡겼고 자신은 북쪽으로 도망쳐 갔다. 대군을 인솔한 원정으로 반드시 전염병을 가질 것이라는 것, 수병 선단을 잘 다루지 못하는 조조군을 간파한 일 등 조조군의 약점을 모두 예측한 주유 승리였다.

 

강릉 전투

208년 12월에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한 주유는 유비와 함께 남군까지 조조를 추격, 이후 강릉에서 조인과 대치한다. 감녕에게 명하여 이릉을 점령하게 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조인과 전투를 치르지만 화살에 맞고 부상당한다. 이 사실을 안 조인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주유를 공격했지만, 주유는 부상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타고 나타나서 조인은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주유는 이 부상이 원인이 되어 일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후 유비군의 관우와 함께 후퇴하는 조인군을 격파, 1년여에 걸친 전투 끝에 강릉을 점령한다.

 

천하 이분지계

강릉을 점령한 주유는 천하이분지계를 실현하기 위해 손권에게 표를 올리고 행장을 꾸리고 파구를 지나던 도중 병사한다. 향년 36세. 주유의 후손으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주윤발의 족보에 의하면 주유는 독화살에 맞고 1년간 병상에서 위독 상태로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초 계획은, 분위장군과 함께 서천을 취하고 장로를 병합, 이후 마초와 호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천은 분위장군에게 수비하게 하고, 양양에서부터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분위장군은 손유라는 것이 대체적인 추측이다.

 

주유의 천하이분지계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제갈량의 삼분지계는 익주와 형주에서 북벌을 한다는 것이었다면, 주유는 익주는 수비하고 형주에서 북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초와 동맹을 맺게 된다면 마초를 통한 서쪽에서의 진군도 기대해볼 수 있어서 제갈량의 삼분지계와 내용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

 

일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술에 많이 취했어도 연주한 음악의 음이 틀리면 그것을 알아채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라고 말을 했다.

 

손권의 가신 중 정보는 손견이 거병할 때부터 손가를 섬겼던, 황개나 한당보다 오래된 가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유보다 연장자이기에 그를 무시했는데, 주유는 오히려 정보에게 성의를 다한 태도를 보였다. 후에 정보는 감복하고 주유와 친해지고 존중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평하기를 주유의 친화력은 “주공근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나는 맛있는 술과 같아서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했다.

 

평가

명문가의 자제답게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당초 적벽대전 전에 주유는 손권에게 5만의 군사를 청했는데, 손권은 3만만을 주었을 뿐이다. 이후 유비와 만나고 유비가 “조조를 격파하기에는 모자라다.”라고 말을 하자 오히려 주유는 “격파하기 충분한 숫자이니 유공께서는 지켜보기만 하십시오.”라고 말을 한 것은 그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일화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가 제갈량을 시기하여 거듭 죽이려고 하나 정사에서의 주유는 제갈량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유비에 대해서는 영웅의 기질이 있으므로 경계를 했다.

 

천하이분지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오국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고, 또한 오국의 총사령관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무장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각설하자면, 오국의 총사령관은 주유, 노숙, 여몽, 육손으로 이어졌는데, 주유는 천하이분지계를 실행시키기 위해 익주로 이동 중 병사를 했다면 노숙은 익주 정벌을 포기하는 대신에 다른 군략으로 재조정하려다가 병사를 했고, 여몽은 공명심에 눈이 멀어 서주가 아닌 형주를 점령하여 결과적으로 촉과 오 모두에게 손해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육손은 오국의 재상이긴 했으나 명문호족인 육가의 후예였기에 조정과 호족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위국으로의 북진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국의 남진에 수성하는 입장에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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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관해서는 삼국지, 삼국지연의 등 수많은 자료들이 있으나 허구와 과장이 많고 서로 다른 정통성 사가들에 의해 촉한의 유방을 정통성으로 보고 위나라의 조조를 간웅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위나라의 조조를 정통성 있는 왕조로 보는 다른 견해도 있어 여러 전투와 인물, 사건들이 편향된 시각으로 과장되고 부풀려져 각색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또 사가들은 자신이 살고 있던 당대의 왕조에 대해서는 객관성을 상실한 체 비교적 관대하게 기술하고 무능한 왕조나 인물도 유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역사의 진실성은 아무도 함부로 장담할 수는 없으나 사가들의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시각도 그들의 기록에 의해 편향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중국의 역사서들은 후세 사가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기록되면서 종합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성서처럼 제자들에 의해서 유대민족의 역사를 그 지역의 다른 나라의 고대 신화나 벽화, 역사, 기록물들이 도용되어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자식들로 그들을 각색하였듯이, 또 예수가 신격화되고 고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민족으로 각색되듯이 부풀려 기록되어 오면서 첨거,수정되오 오면서 오늘날의 성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역사도 주변 민족의 중원 점령. 통치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기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주변국의 우수성이나 전투에서 승리한 내용이나 그들의 처참한 패배는 축소하거나 허위로 기록한 역사서들이 많다. 한무제의 한사군 설치, 오호십육국 시대의 소수민족 중원 침공이나, 글안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렇거니와 고구려의 수.당 전쟁도 축소하여 허위 내용이나 간단한 기록으로만 남겨져 있다.  그래서 위, 촉, 오 삼국의 역사도 이야기거리로는 재미 있을지 몰라도 과장된 점이 많다. 촉한의 경우 2대에 걸쳐 멸망하는 등 전한을 멸망시키고 왕망이 건국한 신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이야기 거리로 소설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정통성 있는 왕조로 치겨세운 것 뿐이다. 삼국시대의 역사에 대해서 그 사실성 여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그 내용을 가감하여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