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26 (삼국시대 2 : 위나라) 본문
중국의 역사 26 (삼국시대 2 : 위나라)
위.촉.오 삼국의 명멸
이 시대의 역사서로 대표적인 것은 이십오사의 하나인 진수의 《삼국지》가 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는 이 시대를 다룬 대표적인 문학 작품이다.
한이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기다. 허나 삼국지의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왕조 400년 동안 이어져온 유교적 관념을 가진 사회에서 나타나기 힘든 점들을 볼 수 있다. 저자는 그 원인을 「삼국지」자체가 이미 사실대로의 기록하는 전통을 벗어나 낭만적인 기술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 본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한마디로 과거의 전통이 무너지고 아직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지지 않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기간은 3세기 반이나 되는 긴 시기였다. 이시기를 혹자는 5호가 중국을 어지럽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이나 그 주변의 자잘한 이야기만 가지고 그 시대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거시적 입장에서 중국의 첫 제국인 진 한은 사회적 성숙을 감당하는 법률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두 번째 제국인 수 당시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위진남북조 시대라는 장기적인 분열기는 결국 변화된 사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과거 제1제국의 모든 법률과 제도를 다 쓸어서 용광로에 넣고, 변화된 사회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법률과 제도를 마련하는 역사상 꼭 필요했던 시기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대변동 시기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위진남북조 369년간은 진 한이라는 400년간의 통일제국시대와 수 당이라는 장기간의 통일제국을 이어주는 시대였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진한시대와 수당시대 사이에서 전 시대의 잔재를 녹이고, 이후의 시기를 준비한 시기였다. 저자는 진 한이라는 통일체제가 무너진 이유를 변화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한 진한시대의 법제들 들어 설명했고 이로 인해 위진남북조라는 긴 분열의 시기가 존재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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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魏, 220년~265년)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 하나로 삼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천부적인 전략과 재능을 가진 조조는 삼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당대의 숙적 원소와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원 일대를 평정하여 최강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중국 대륙이 삼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의 영토가 당시 중국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병력과 인구 면에서도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역사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위나라는 220년(황초 원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265년(진시 원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6년간에 걸친 왕조로, 실제 건국은 조조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다
189년(중평 6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이 그를 따른다. 191년(초평 2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靑州兵)’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求賢令)’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통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창으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허창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魏公), 216년에 위왕(魏王)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환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5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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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고황제 (高皇帝) (위 문제 추숭) |
조등(曹騰) | - | - |
- | - | 태황제 (太皇帝) (위 문제 추숭) |
조숭(曹嵩) | - | - |
- | 위 태조 (魏太祖) (위 무조<魏武祖>) |
무황제 (武皇帝) (위 문제 추숭) |
조조(曹操) | - | - |
제1대 | 위 세조 (魏世祖) (위 고조<魏高祖>, 위 태종<魏太宗>) |
문황제 (文皇帝) |
조비(曹丕) | 황초(黃初) 220년 ~ 226년 | 220년 ~ 226년 |
제2대 | 위 열조 (魏烈祖) |
명황제 (明皇帝) |
조예(曹叡) | 태화(太和) 227년 ~ 233년 청룡(靑龍) 233년 ~ 237년 경초(景初) 237년 ~ 239년 |
226년 ~ 239년 |
제3대 | - | 애황제 (哀皇帝) (소황제<少皇帝>, 제왕<齊王>) |
조방(曹芳) | 정시(正始) 240년 ~ 249년 가평(嘉平) 249년 ~ 254년 |
239년 ~ 254년 |
제4대 | - | 폐황제 (廢皇帝) (고귀향공<高貴鄕公>) |
조모(曹髦) | 정원(正元) 254년 ~ 256년 감로(甘露) 256년 ~ 260년 |
254년 ~ 260년 |
제5대 | - | 원황제 (元皇帝) (진류왕<陳留王>) |
조환(曹奐) | 경원(景元) 260년 ~ 264년 함희(咸熙) 264년 ~ 265년 |
260년 ~ 265년 |
연대표
서력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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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년 | 조조 태어남. |
189년 | 조조, 향리에서 동탁 토벌을 위한 의병을 모집함. |
192년 | 연주목으로 영입되어 정예군 청주병을 조직함. |
196년 | 헌제를 봉대하고 허창으로 천도함. 둔전제 실시. |
200년 | 백마, 관도에서 원소군을 무찌름. |
207년 | 오환을 정복하여 평정. |
210년 | 구현령과 술지령 공포. |
213년 | 조조, 위공이 됨. |
215년 | 조조의 딸, 헌제의 황후로 세워짐. 한중을 평정. |
216년 | 조조, 위왕이 됨. |
219년 | 조조, 한중을 잃음. 손권과 연합, 관우를 격파함. |
220년 | 조조 서거. 조비, 문제에 오름. 후한 황조 멸망. |
226년 | 조비 붕어. 조예 즉위. |
234년 |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제갈량과 대치. |
237년 | 요동의 공손연이 반기를 듦. |
238년 | 사마의, 공손연의 난을 진압. |
239년 | 조예 붕어. 조방 즉위. |
249년 | 사마의,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당을 처형함. |
251년 | 왕릉의 사마의 타도 계획 실패.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뒤를 이음. |
254년 | 사마사 주살 계획 실패. 조방이 폐위되고 조모가 옹립됨. |
255년 | 사마사가 죽고 동생 사마소가 뒤를 이음. |
257년 | 제갈탄이 오나라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나 다음해 진압됨. |
260년 | 조모가 사마소를 토벌하려다가 살해됨. 조환 즉위. |
263년 | 사마소, 상국지공이 됨. 촉나라 정복. |
264년 | 사마소, 진왕이 됨. |
265년 |
사마소, 죽음. 사마염이 뒤를 이음. 위 황조가 망하고 진 황조 성립. |
조조(曹操, 155년 ~ 220년 1월 23일)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역신(逆臣)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시대를 선도한 영웅이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생애
출생
조조는 패국 초현 사람으로 환관 조등의 양자인 조숭의 아들이다. 조조는 얼굴이 약간 여우처럼 생겼다고 기록되어있고, 《삼국지》〈무제기〉에 따르면, 전한 시대 유방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의 자손인 조등은 환제 때 중상시를 맡았다. 이에 대해 《후한서》〈조등전〉에 조참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조참 후예설을 위의 선양을 윤색하고 조씨 가문을 격상시키려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조등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따르면, 조숭이 하후씨이며 하후돈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환관의 손자라는 콤플렉스가 나중에 조조의 인물상이나 생활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은 길리(吉利), 또다른 이름으로 아만(阿瞞)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묘한 꾀와 기지를 발휘하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소년 시절 매 날리기, 사냥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조조를 보고 숙부가 종종 조숭에게 충고하곤 했다. 어느 날 조조가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듯한 시늉을 했다. 숙부가 조조에게 묻자 “마비증상이 갑자기 왔습니다”라고 답했고 숙부는 이 일을 조숭에게 알렸다. 조숭이 이를 놀라 듣고 조조를 불렀는데 조조는 태연하게 “원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라고 답해 이후 아버지는 숙부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조조는 원소와 일찍이 장난꾸러기 친구 사이였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은 갓 결혼한 신부를 훔치러 갔다. 일이 실패하여 추적자를 따돌리면서 도망하던 도중, 원소는 그만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원소가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조조는 대뜸 범인이 여기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소가 기겁하여 통증도 잊고 얼른 가시덤불 속에서 나와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처럼 품행이 불량한 모습을 보고 누구도 조조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양나라의 교현과 남양의 하옹은 조조를 남다른 인물로 평가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교현의 권유로 허소와 깊은 친교를 갖는다. 어느 날 허소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물었는데, 허소는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也)’(《삼국지》 배송지주)으로 평가했다(한편, 후한서 허소전에는 조조를 ‘태평시대의 도적, 난세의 영웅(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으로 평가한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조조는 20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되고 낙양북부위에 임명된다. 그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던 건석이라는 환관의 숙부가 금지된 야간 외출을 하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법을 어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이어서 그는 돈구(頓丘)의 현령, 의랑(議郞) 등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다.
황건적의 난에서 서주 공략까지
184년 조조가 30살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제남국 재상으로 승진, 거기에서 그는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돌연 사퇴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금성의 한수와 변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수도 방위를 위해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임명된다. 그 무렵 영제가 죽고 대장군 하진과 원소는 환관 주살을 계획한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동탁 등 각지의 제후를 소집하여 황태후에게 압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후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일이 탄로나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조조가 예상한 대로 동탁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사이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되고 만다. 또한 환관들도 원소에게 모두 주멸되고, 이 와중에 실권은 동탁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성을 탈출했다. 이때 조조가 왕윤에게 빌린 칠보검으로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지연의》에는 이 때 도망을 치다가 아버지의 친구인 여백사를 죽인다고 나온다.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분무장군을 맡는다. 그런데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제후들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손견이 선두에 나서 화웅을 전사시키는 등 동탁을 후퇴하게 만들지만 동탁을 추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냉소적이고 반대했다. 그러나 조조는 혼자 결단하여 하후돈 등을 대동하고 동탁을 추격했지만, 변수에서 동탁의 부하 서영에게 패하고 만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돈이 난전끝에 서영의 목을 기어이 베고 만다고 기록되어 있다.)조조는 제후들이 주둔한 산조로 돌아오지만 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군사를 움직이지 않자 결국 연합군은 와해되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조조는 무형의 자산을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인망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패할 것을 뻔히 알고도 불구하고 오직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뛰어들었다.'라는 이미지가 조조에게 강렬하게 박혀 조조의 밑으로 들어오는 인재들이 우후죽순같이 많아지게 된다.
191년(초평 2년) 조조는 동군에 침공한 흑산적을 연주 전투에서 토벌해 원소로부터 동군 태수로 임명된다. 192년 4월,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된다. 같은 해 청주의 황건적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하자 군대를 이끌고 격파한다. 황건적이 항복하자 조조는 이들을 자기의 세력으로 영입하고,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불렀다. 이때부터 유능한 인재가 그에게 부하로 들어오게 된다.
같은 시기에 원소와 원술은 사이가 나빠진다. 원소는 형주의 유표와 연합하고, 원술은 유주의 공손찬과 서주의 도겸과 손을 잡는다. 조조는 유표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의 군대를 격파하고 있었는데, 그때 도겸이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해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 살해한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흥평 원년)에 걸쳐 2차례 도겸 정벌에 나서 서주에서 무차별 살육을 자행했다.
《후한서》에는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도 가차없이 도살하였다. 이 때문에 사수(泗水)는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라는 처절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악역으로 묘사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에 영입한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메뚜기의 피해로 굶주림에 허덕이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허창으로 옮긴다. 그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조지와 한호(《진서》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하여, 허도(허창)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이때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겨 조조 밑으로 도망온다. 부하 정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제거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지금은 영웅의 마음을 붙들 시기” 라며 유비를 잘 대우한다.
관도대전부터 삼국정립까지
197년 조조는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張繡)를 항복시키지만 나중에 그는 조조를 배신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과 부하 전위가 전사한다. 이 때 조조는 맏아들 조앙의 죽음보다도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했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198년 조조는 장수,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고, 하비에서는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한다. 다음해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굴복시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술 토벌에 유비를 파견한 일이 문제가 된다. 유비는 하비에서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살해했다. 그러나 200년에 조조가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를 항복시켰다. 유비는 원소 밑으로 도망치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원소와 천하 패권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진다. 여기에서 조조는 원소의 부하인 맹장 안량과 문추를 물리치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끈다. 그러나 관도에서 대치가 길어지자 아군의 식량이 고갈되고 그 대담한 조조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순욱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상담을 구했는데, 순욱은 격려의 답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의 부하 허유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식량기지를 습격하기를 진언하여 형세는 역전,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 몰수한 전리품 중에서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던 조조의 부하의 편지가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는
“ |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해서 나 자신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 ” |
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이때 조조는 군사를 몰아 장성을 넘어 모돈(冒頓 또는 묵돌)을 죽였다고 한다. 모돈은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174년까지 흉노의 선우(대족장)를 지냈던 사람으로 조조와는 4백년 가까이 시차가 있는 인물이다. 조조의 모돈 살해는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꾸며낸 이야기다.
원소 토벌 이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조조는 208년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르고 3공의 지위를 없앴으며 이미 대장군이 되어 있었기에 '대장군 대승상'(大將軍 大丞相)으로서 공식적으로 후한 조정의 정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고, 형주의 유종을 항복시켜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대패하여 조조는 가까스로 도망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도망치는 도중에 3번이나 유비를 바보라고 비웃으며 “나라면 여기에 복병을 놓겠다”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조운, 장비, 관우에게 차례로 습격당한다. 이후 중국 대륙은 위, 촉, 오 삼국의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완전한 통일의 꿈이 멀어지지만 조조의 우세한 세력 기반은 변하지 않았다.
삼국 정립과 조조의 죽음
210년에 조조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공포한다. “구현령”이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술지령”에서는 수여받은 4현 3만 호 가운데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하고, 제위 찬탈 등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제도다.
213년 위공(魏公)으로 책봉되었고,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지면서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졌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였으나 황제가 되지는 않고 죽을 때까지 위왕으로 남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판도 만만찮다. 조조의 위공 취임을 반대한 순욱에게 자살을 명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자는 비록 공로자라고 할지라도 가차없이 처분했다는 것이다.
211년 마초와 한수 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군대가 먼저 강을 건너 세력이 약해진 틈에 마초에게 습격당하여 위기에 빠졌지만 다행히 허저의 도움으로 구조된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결국 가후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가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한다. 212년 오나라 정벌에 나서고 다음해 유수구에서 격파한다. 이때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를 토벌, 215년에는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키는 등 매년 지칠 줄 모르고 전투를 벌였다.
217년에는 손권과 다시 싸우고 219년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기지만, 대신 손권과 연대해 형주의 관우를 멸한다.
관우가 죽은 이듬해, 220년 1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향년 66살의 나이로 서거했다.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건시전을 지을 때 탁용사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 조비가 위왕에 오르자 조비는 아버지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하였다가,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고 즉위하자 다시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로 추증하였다.
한편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던 조조는 훗날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당대의 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한다.
조조의 무덤 진위여부 논란
문물국이 허난성 안양 현 안펑 향 시가오쉐촌에 있는 동한시대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중국 학계의 따르면 무덤의 크기는 지하 15m에 위치한 이 무덤은 갑자(甲字)형태의 구조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진 내부 묘도(墓道)를 따라 내려가면 앞뒤에 규모가 큰 쌍실(雙室)과 4개의 측실(側室)을 갖추고 있었으며 길이 39.5m, 넓이 9.8m에 전체 면적이 740㎡로, 그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고 한다. 그동안 수차례 도굴됐음에도 이 무덤에서는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 200여 점이 출토됐으며 조조가 사용하던 창과 조조가 사용하던 돌베개등의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한 남성과 여성 2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는데 이 남성의 유골은 사망 당시 60세 전후였던 것으로 감정됐다. 이는 조조가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유골이 조조의 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성급한 결론과 "위무왕"이라고 새겨진 두 비석은 현장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공안국이 도굴꾼들을 체포해 압수한 과정에서 가짜가 만들어질 가능성 있는 등 의문을 제기하였다.
평가
인물평
'대기 만성' 조조는 군사, 학문, 무예, 내정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엔터테인먼트쪽으로도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또한 통솔력도 굉장하고 수하를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바로 '능력'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는 크게 인정해줬다. 호거아에게는 단지 '힘이 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커다란 금괴를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이에 서황, 장료등이 감동받아 조조를 극진하게 섬기게 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가 한(漢)황실 종친의 성씨인 유(劉)씨의 성이 아닌 환관 조등(曹騰)의 성씨인 조(曹)씨의 성을 지닌 것이 조조 본인에게도, 한 황조에도 불행이었다. 조조는 황제로서의 자질면에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났지만 한 황실종친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중국 전체를 다스릴 수 없었고 후일 나관중에 의해 저평가되는 빌미마저 제공했다. 하지만 조조는 그 나관중마저 감동시킨 일화를 만드는데 그것이 반동탁연합군이 와해되고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갈 때 극소수의 병력으로 죽을 것을 알고도 헌제를 동탁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서영에게 패배한 것이다. 나관중조차 이에 감동받아 비록 조조를 이를 갈며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삼국지연의에서조차 조조의 부장인 하후돈이 조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동탁의 지시를 받은 서영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묘사해줬다.
동시대의 평가
동시대 사람 중 유명한 두 사람은 조조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했는데, 양국(梁國) 사람인 교현은 그를 두고 난세의 영웅, 치세의 간적으로 평가했지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는 그를 두고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간웅으로 평가했다.
후세의 평가
진수가 《삼국지》〈위서〉 무제기에서 평하기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처해 사람을 등용했다는 뜻이다.
소설에서의 평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악인(惡人)의 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관중은 조조를 당대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조조에 대한 반감이 들어 있는 전승과 민간 설화 등을 이용하고, 촉한의 인사들을 대부분 우국지사와 충의지사로 묘사함으로써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조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삼국지연의》 내에서 자아내고 있다. 또한 조조를 악인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때로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묘사도 쓰고 있다.하지만 이문열이 평역한 《삼국지》(민음사)에 나오는 조조는 자신을 위해 죽은 군인들을 위해서 그 가족들에게 밭을 줌으로써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하는 훌륭한 지도자로 묘사되며,실제로 조조가 자신의 말에 의하여 보리를 밟을때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하려다가 다른 부하들의 간언에 따라서 자신의 목을 머리카락으로 대신하여서 병사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지를 아니하고 또한 군법을 두려워하였다. 다른 전승에서는 조조는 법을 모범적으로 지키는 지도자로 묘사된다. 당시 군인들이 술에 취하면 이성을 잃고 말을 탄채 밭에 뛰어들어 민중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는데, 조조는 이를 엄격하게 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조가 그만 술에 취해서 법을 어기고 말았다. 술에서 깬 그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서 자신의 목을 치도록 명령했는데, 신하들이 간청하여 말의 목을 베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를 본 군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어느 누구도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조의 수하장수
조조의 친족 관계
아들과 손자, 증손자
- 조앙(풍민왕) 유부인 소생으로 정실 정부인의 양자
- 조삭(상상왕) 유부인 소생으로 정실 정부인의 양자
- 조비(세조 문황제) 변황후 소생
- 조창(임성위왕) 변황후 소생
- 조식(진사왕) 변황후 소생
- 조웅(소회왕) 변황후 소생
- 조표(초왕) 손희 소생
- 조충(등애왕) 환부인 소생
- 조우(연왕) 환부인 소생
- 조환(원황제)
- 조림(패목왕) 두부인 소생
- 조곤(중산공왕) 두부인 소생
- 조거(팽성왕) 환부인 소생
- 조구(범양민왕) 윤부인 소생
- 조상(임성위공자) 손희 소생
- 조근(강상공자) 손희 소생
- 조현(제양회왕) 진부인 소생
- 조준(진류공왕) 진부인 소생
- 조간(조왕) 왕소의 소생
- 조승(의성상공자) 이부인 소생
- 조정(미대공자) 이부인 소생
- 조경(영상공자) 이부인 소생
- 조균(번안왕) 주부인 소생
- 조휘(동평영왕) 송부인 소생
- 조무(낙릉왕) 조희 소생
딸
가까운 친족
기타
위세조 문황제 조비(魏世祖文皇帝曹丕, 187년 ~ 226년)는 조조의 셋째 아들이며,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로 자는 자환(子桓). 그는 줄곧 조조의 첫째 아들로 불리는데, 원래는 셋째 아들이다. 조조의 첫째 아들은 조앙이며 둘째 아들은 조앙의 동복 아우인 조삭인데, 모두 일찍 죽어서 셋째 아들인 그가 첫째 아들로서 행세했기 때문이다.
생애
조비는 조조와 원래 측실이었던 황후 변씨 사이에 출생한 서자였다. 태어날 때 하늘에 푸른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후광처럼 머리 위를 감쌌다고 한다. 또한 본인의 저서인 전론(典論)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조조의 영재교육을 받고 6살 때 궁술을 마쳐 좌우 어느 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쏠 줄 알았으며 8살 때는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 검술도 좋아해 여러 스승에게 사사받고 모든 검법을 숙달했고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이미 8살에 붓을 들면 그대로 훌륭한 문장이 되고, 고금의 경서와 그 주석, 제자백가 등에 완전히 통달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조조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다. 측실 유씨 부인이 낳았으나 본래 정실인 정씨 부인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嫡子)로 입적된 장남 조앙은 197년(건안 2년)에 장수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역시 적자로 입적된 차남 조삭은 조앙이 죽기 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변씨 부인이 정실이 되었으므로 조비의 후계 지위는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환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조충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조조는 처음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충도 208년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204년 아버지의 큰 경쟁 상대였던 원소의 세력을 공격하는데 종군한다. 거기서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의 아내인 견씨를 약탈하여 처로 삼았고 견씨는 이듬해 조예를 낳는다. 211년 조비는 오관중랑장 겸 부승상으로 오르지만, 조조는 다섯번째 아들 조식의 재능을 아꼈으므로 아직도 후계자가 결정되지 못한다. 하지만 조식이 술로 인해 조조의 노여움을 사고 총애를 잃자 마침내 217년 그의 31살 때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조비는 220년 정월 조조의 죽음으로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조조의 지위를 승계한 그 해에, 결국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랐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리하여 조비는 황제로 즉위하고,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를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 이후 조비는 냉혹한 인사를 단행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우에게 항복했던 우금이 돌아오자 선친인 조조의 무덤지기로 임명했다. 조조의 묘지 담벼락에는 희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다름 아닌 관우가 방덕과 우금을 생포해 놓은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방덕은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 관우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관우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지만 우금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굴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울면서 관우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우금은 분통이 터져 죽었다. 조창의 경우 역시 병력을 남김없이 몰수하고 내쫓아버렸다.
조비는 황제 즉위 후 국력 증강에 노력하면서 사마의를 중용한다. 사마의는 제갈량과 호각을 이룰 정도로 뛰어난 인재이긴 하지만 그 야심이 컸기 때문에 일찌기 조조는 사마의가 뛰어난 인재인 것을 알고도 중용하지 않았다. 조비의 사마의 중용은 훗날 자신의 후손이 사마의의 후손에게 선양하게 되는 기인이 된다.
조비는 대외적으로는 순종의 뜻을 밝힌 손권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오왕으로 책봉했으나, 손권이 태자를 인질로 바치기를 거절하자 대군을 동원해 2차례에 걸쳐 손권을 공격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내치 면에서는 유학을 장려하며 도덕성의 향상을 기치로 삼았으나 스스로는 이와 반하는 폐륜적 행위를 거듭 자행했으며, 결과적으로도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즉위 직후에 시행했던 구품관인법의 제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해 수많은 폐단을 낳았다.
조비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논공행상을 폈지만, 과거에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자는 육친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후계 경쟁의 쟁탈자였던 조식의 측근들은 조비의 즉위 직후 삼족이 몰살되었으며 조식은 모친 변 태후의 만류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그후 지방으로 쫒겨나 철저한 감시 속에서 다시는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몇 번이나 영지를 옮기면서 쓸쓸히 죽었다. 또 다른 동생인 조창도 비슷하게 취급되었는데, 세설신어에서는 조비에 의한 독살설조차 제기할 정도였다.
일찍이 조비는 당숙뻘인 조홍에게서 무리하게 재물을 빌리려고 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후 조비는 그 때문에 조홍에게 원한을 품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조홍을 내쫓고 조홍의 식객이 범한 죄를 이유로 처형하려고 했다. 이것도 변 태후의 만류로 죽음만은 면했다. 이 밖에도 과거의 원한으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신하들을 처형한 일이 많으며 아내인 견 황후에게는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는 등 치졸한 면이 많이 보인다.
226년(황초 7년), 평소 주색에 빠져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은 조비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아들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 후 조진과 조휴, 사마의, 진군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사망하였다. 그가 제위에 오른 지 7년, 나이 40살 때의 일이었다. 조예는 조비가 사사로운 이유로 피해를 준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어 사면, 복권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조비가 위나라의 황제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촉한에서는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족
황후
아들들
- 황태자 조예(皇太子 曹叡) - 문소황후 소생. 평원왕(平原王)에서 태자로 책봉됨. 열조 명황제(烈祖明皇帝)
- 찬애왕 조협(贊哀王 曹協)
- 북해도왕 조유(北海悼王 曹蕤)
- 동무양회왕 조감(東武陽懷王 曹鑒)
- 동해정왕 조림(東海定王 曹霖) - 조모의 아버지.
- 원성애왕 조예(元城哀王 曹禮)
- 한단회왕 조옹(邯鄲懷王 曹邕)
- 청하도왕 조공(清河悼王 曹貢)
- 광평회왕 조엄(廣平哀王 曹儼)
위열조 명황제 조예(魏烈祖明皇帝曹叡, 204년 ~ 239년 음력 1월 1일)는 위나라(魏)의 초대 황제인 세조 문황제(世祖文皇帝) 조비(曹丕)의 장남이며, 위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자는 원중(元仲). 어머니는 원희의 처였던 견희다.
생애
어렸을 때 총명함으로 조부 조조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정작 아버지 조비에게는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유년 시절에 모후 견희가 조비에게 사사당하는 일을 겪었고, 조비는 더더욱 조예를 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두 부자가 우연히 사냥을 하였는데 조예가 새끼 밴 어미 사슴을 죽이지 않고 살려 조비를 감동시켰고, 이 일로 후계자로 낙점되었다고 한다. 226년, 부친 조비의 고명에 따라 조진(曹眞),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 등의 보좌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학문에 힘쓰며 직접 통치하지 않았으나, 곧 스스로 정치에 나섰다.
촉한이 오와 연합하여 위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사마의 등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친히 전투에 참가하는 등 위나라를 존망 위기에서 구해내어 명군의 면모를 보였으나, 말년에는 궁을 새로 짓고 사치로운 생활을 하는 등 민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많이 하였다. 239년에 조예는 36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어린 양자인 제왕(齊王) 조방이 황위를 계승하였고, 이 때 조씨 일파가 사마씨에게 패하고 말았다. 실권은 사마씨가 장악하게 되고, 서진(晉)왕조의 성립을 초래하게 된다.
위애황제 조방(魏哀皇帝 曹芳, 231년 ~ 274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제3대 황제이다. 자는 난경(蘭卿)이고 다른 시호는 소릉여공(邵陵廬公). 부인으로는 진황후가 있다. 부친이 불분명하다.
생애
남몰래 조예가 들여온 아들로 어릴 때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조방의 근본은 그 누구도 아는 이가 없다. 양부 조예 사후 9살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기 때문에 곽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고명대신인 조상, 사마의가 정치를 위임받았다. 조상이 사마의에게 패하자 권력은 사마의에게 옮겨졌고, 사마의가 죽고 사마사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외척인 장집과 중서령 이풍, 황문감 소삭, 영녕서령 악돈, 중황문 항종복야 유현, 태상 하후현 등과 함께 사마씨를 토벌하고 황실의 위엄을 높이려 하였으나 사마사에게 발각되어 제왕(齊王)으로 강등되고 쫓겨난다. 진 왕조가 세워진 후에는 소릉공(邵陵公)으로 낮춰진다. 그의 시호는 여(廬), 정식으로는 소릉여공(邵陵廬公)이다.
조방의 출신에 대한 의혹
그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우선 조예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조조의 넷째 아들인 조창의 손자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조씨 일족 중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창의 아들 임성왕 조해가 조방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또한, 조예는 조비의 친자가 아닌 조창(혹은 조식)의 친자라는 설이 있어 조방이 조창의 손자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조방은 조씨가문의 피가 없는 원희의 아들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조예가 탄생한 때가 견희가 조비에게 갔을 때로, 원희와 조비 사이의 기간이기 때문에 조예가 원희의 아들일 수 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조모(曹髦, 241년 ~ 260년)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제4대 황제이다. 조비(曹丕)의 아들이자 조예(曹叡)의 이복 동생인 동해왕(東海王) 조림(曹霖)의 아들로 자는 언사(彥士)이다. 고귀향공(高貴鄕公)이라는 칭호가 있다.
생애
254년, 조방(曹芳)이 폐위되자 위 무제(魏武帝) 조조(曹操)의 아들 조거(曹據)과 함께 황제 후보에 올랐고, 조방보다 족보상 서열이 낮은 조모가 황제에 즉위했다. 총명하고 재능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사마사(司馬師)에 이어 사마소(司馬昭)가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정치에 나서지 못했다. 사마씨의 횡포가 심해지자 제갈량(諸葛亮)의 일족인 사공(司空) 제갈탄(諸葛誕)이 요충지인 수춘(壽春)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의 권신 손침이 이를 지원하는 등 국내외로 혼란이 있었다. 이런 때에 조모는 잠룡시(濳龍詩)를 쓰며 사마씨의 권력을 비판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사마소는 조모에게 가충을 보내 시해하려 하자, 조모는 반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사마소를 공격하나, 생포되어 죽임을 당한다.
위원황제 조환(魏元皇帝 曹奐, 246년 ~ 303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의 최후이자 제5대 황제이다. 자는 경명(景明)으로 초명은 조황(曹璜)이었으나, 이름에 쓰인 ‘황’이라는 글자를 많은 사람들이 쓴다 하여 이름을 ‘환’으로 바꿨다.[1]
그의 아버지는 조조(曹操)의 아홉째 아들 연왕(燕王) 조우(曹宇)로, 조예(曹叡)의 고명대신으로 지목되었으나 물러선 사람이다.
생애
258년 상도향공에 봉해졌는데, 263년 조모(曹髦)가 시해되자 사마소(司馬昭)에 의해 제위에 오르고 이름을 조환으로 개명한다. 그해에 사마소가 등애(鄧艾)와 종회(鍾會)에게 촉한(蜀漢) 정벌을 명했고, 그해에 촉한을 멸망시켰다.
이듬해인 264년, 사마소가 진왕(晉王)에 올라 제위 찬탈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265년 사망했다. 이후 사마소의 장자 사마염이 진왕의 지위를 이어받고 제위를 찬탈하여 진 왕조를 세우고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강등시켰다.
진 왕조하에서의 조환의 삶은 별로 알려져있지 않다. 사마염(진세조 무황제)은 조환에게 황족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으며, 조환의 조상에 대한 황실 제사도 허가했다. 또한 조환이 스스로를 진 황제의 신하로 생각하지 않도록 했다.
조환은 서진 혜제가 집권했던 303년에 사망했고 황제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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