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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8 (삼국시대:촉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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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8 (삼국시대:촉한)

두바퀴인생 2010. 3. 8. 06:08

 

 

중국의 역사 28 (삼국시대 : 촉한)
 
 
 

촉한(蜀漢, 221년~263년)

 

중국 삼국시대 221년 유비가 지금의 쓰촨 성 지역에 세운 나라이다. 한 황실의 후예가 세운 마지막 한나라이기에 계한(季漢)으로도 불린다. 220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조비 헌제(獻帝)를 내쫓고 제위를 찬탈하자, 당시 익주(益州)와 한중(漢中)을 점거하고 있던 유비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역사적으로 “촉한”이라 불린다). 수도는 성도(成都)이다.

 

유비 사후 진지·황호와 같은 간신의 발호와 무리한 북벌로 점점 쇠망의 길을 걷다가, 263년 의 대대적인 정벌로  263년 창업 42년망에 멸망하고 만다.

 

중국 삼국시대에 정립(鼎立) 상태에 있던 한 나라(220∼263)로서 전한(前漢) 경제(景帝)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 현덕(玄德) 유비(劉備)가 촉(蜀:四川省)에다 창건하였다. 정식 명칭은 한(漢) 혹은 계한(季漢)이라고도 하며, 촉(蜀)·촉한으로 통칭한다. 후한(後漢) 말 황건적(黃巾賊)의 대반란이 일어나 후한의 권위가 무너지자 군웅할거의 정세는 결정적이 되었다. 이에 유비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조조()와 서주목() 도겸()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196년 원술()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下?)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에서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 유표()에게로 가서 객장()이 되었다.
 

그 후 유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종(琮)이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자, 제갈량(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천하 '3분의 계(計)'를 세우고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赤壁)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형주의 목사가 되었다. 즉, 208년 후베이성[湖北省] 자위현[嘉魚縣]의 북동, 양쯔강[揚子江] 남안에 있는 적벽에서 한 전투에서 조조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 적벽에서 오·촉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오나라 황개(黃蓋)의 화공계(火攻計)로 전선(戰船)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고 화북으로 후퇴했다. 이리하여 양쯔강[揚子江] 중류 유역을 거의 장악하자, 익주(益州:成都) 목사 유장(劉璋)을 공략하여 스스로 익주 목사가 된 뒤 219년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칭하였다.

 

다음해 조비(曹丕)가 한제(漢帝)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221년 유비도 또한 제위에 올라 수도를 청두[成都]로 정하고, 고조(高祖) 이하의 종묘를 세워 한(漢)의 정통성을 명백히 하였다.

 

다음해 손권도 연호(年號)를 세웠으므로 바야흐로 3국 정립의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를 둘러싼 촉한·오(吳)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유비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를 쳤으나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후사를 위임받은 제갈량은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잘 보좌하여, 오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고 산업을 장려, 민력을 기른 후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를 토벌하여 이를 개발하는 등 국력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중원(中原)을 회복하고자 자주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갈량은 234년 우장위안[五丈原]에서 대전 중 병사하였다. 그후 장완(蔣琬)·비위(費褘)·강유(姜維) 등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해마다 일어난 위(魏)와의 전쟁 때문에 환관 황호(黃晧)의 전횡까지 겹쳐, 국력이 쇠퇴하여 263년 위군의 대공격에 유선이 항복함으로써 촉한은 2대 42년만에 멸망하였다.

 
 

 

 

 

 

 역대 황제

촉한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한 열조
(漢烈祖)
소열황제
(昭烈皇帝)
(촉 선주<蜀先主>)
유비(劉備) 장무(章武) 221년 ~ 223년 221년 ~ 223년
제2대 - 효회황제
(孝懷皇帝)
(촉 후주<蜀後主>,
안락사공<安樂思公>)
유선(劉禪) 건흥(建興) 223년 ~ 237년
연희(延熙) 238년 ~ 257년
경요(景耀) 258년 ~ 263년
염흥(炎興) 263년
223년 ~ 263년

연표

서력 사건
161년 유비 태어남.
184년 유비, 황건적의 난 진압에 사설 군대를 이끌고 활약함.
194년 유비, 예주자사에 임명. 도겸 사후 서주목을 겸임함.
196년 유비, 원술 토벌 중에 여포에게 서주를 습격당함.
198년 유비, 조조와 협력해 여포를 멸함.
199년 유비, 조조의 명으로 원술을 멸하지만, 조조에게 반기를 듦.
200년 유비, 조조에게 패해 원소 밑으로 들어감.
201년 유비,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해 유표 밑으로 들어감.
208년 유비, 제갈량을 군사로 영입함. 적벽대전 승리.
209년 유비, 형주목이 되어 손권의 누이(손상향)와 결혼함.
214년 유비, 익주를 평정함.
219년 유비, 한중왕을 칭함.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김. 관우,손권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함.
221년 유비, 촉한 황조를 세우고 황제에 즉위함. 장비 범강,장달에게 살해당함.
222년 유비, 이릉에서 동오와의 전투에 대패. 오나라와 국교 수복.
223년 유비 붕어. 유선 즉위.
225년 제갈량, 남만 정벌.
227년 제갈량, 출사표를 올리고 한중으로 진군.
228년 촉군이 가정에서 위군에게 패함.
229년 조운 사망. 제갈량, 무도·음평 2군을 평정함.
234년 제갈량, 사마의와 대치 도중에 사망. 군 퇴각.
244년 비의, 위 조상의 촉 침공을 격퇴함.
249년 강유, 옹주를 침공하지만 위군에게 격퇴됨.
256년 강유, 위를 침공하지만 위군에게 격퇴됨.
263년 위의 침공을 받아 유선은 위나라 등애에게 항복. 촉한 멸망.
264년 종회와 강유가 촉한 부활을 위해 성도에서 쿠데타하지만 실패. 강유와 종회 참살.
반란 직후 유선, 안락공으로 봉해져 낙양으로 압송.
271년

유선 사망.

 

유비(劉備, 161년 ~ 223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221년 ~ 223년)로, 는 현덕(玄德),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다. 묘호는 열조(烈祖)라 하지만 이는 사후에 사가에서 추존한 것이므로 정식 묘호가 아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의 흔한 군웅들과 달리 뚜렷한 기반이 없이 짚신 장수로 출발한 유비였지만 한고조의 풍도를 가지고 관우, 제갈량 등 같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당대의 패자였던 조조와 끝까지 맞써 제국 촉한을 건국하였다.

 

유비

 

생애 (후한 말)

 

출생

유비는 탁군 탁현 출신으로, '후한의 왕손'으로 기록되었으며,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5길이 넘는 뽕나무가 있어 가마 덮개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비도 이 나무에 올라가 놀면서 “나도 이러한 덮개가 달린 가마(황제의 가마)를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숙부 유자경은 "함부로 말하지 마라. 구족이 멸한다."고 주의를 시켰다고 한다. 15살 때 유학해 노식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때 공손찬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그다지 독서를 좋아하지 않아 개를 좋아하고 놀러다니거나 음악을 듣는 데에 몰두했다. 말수가 적고,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적의 난때 장각은 청주,유주,서주,이주,양주,연주,여주,형주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혼란한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관우 장비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깊은 관계가 《삼국지연의》의 첫 부분에 나오는 ‘도원결의(桃園結義)’의 전설을 낳게 된다. 유비의 무기는 2개의 검으로 이름이 쌍곡(고)검이였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첫째부인이 '부용낭자'라 하며 부용을 3번째 만나던날 어떤 마을 근처에서 하룻밤 묶고 가려니 깜깜한 밤 부용낭자를 만나게 되었다. 칙사독우가 그 마을에 나타나서 부용한테 주책 스러운 짓을 하려다 유비에게 들켜 결국 칙사독우를 살해한 후 유회라는 상인한테 부용을 맡기고 떠난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영제 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황건적을 토벌하여 그 공적으로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었다. 독우가 공무 때문에 안희로 왔을 때 유비가 독우에게 만나기를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이에 곧바로 독우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곤장을 들고 200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수를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말뚝에 묶은 다음 관직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적혀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독우가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자 장비는 독우의 숙소로 쳐들어가 그를 포박한 다음 200회나 매질을 하였고, 유비는 이를 제지하고 관직을 그만둔 것으로 묘사한다. 얼마 후 유비는 단양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도위 관구의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다시 관직을 버린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하나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동탁 토벌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묘사한다.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청주 자사 전해와 함께 기주목 원소와 싸웠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평원상으로 임명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는다. 이때부터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 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196년(건안(建安) 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과 대치하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수장인 조표가 배신하여 여포를 불러들였고,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비가 취한후 여포의 장인인 조표가 충고하자, 조표에게 매질을 했기 때문에 그가 원한을 품고 여포를 불러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내고 유비는 소패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패로 돌아온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생각해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하후돈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는 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진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여 사로잡고 여포를 참수한다.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許都)로 귀환해 좌장군에 임명되고 조조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 유비가 왔을 때 조조의 참모 정욱 등은 “유비는 남을 섬길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한 뒤 그를 죽일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 헌제의 숙부인 거기장군 동승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칙을 받고,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똑같이 기술된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빙자해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난다. 그리고 원술을 멸한 후 유비는 하비를 점거하고 서주차사 차주를 죽인 후 관우를 남겨 하비를 수비하게 한 뒤 소패로 돌아온다. 이때 군현들 다수가 조조를 배반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명에 이르렀다고 정사에 기술되어 있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을 원소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때 조조는 왕충과 유대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나 패배하게 된다.

 

 200년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고, 유비는 또다시 패배하여 원소 밑으로 몸을 의지한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고 업에서 2백리 떨어진 곳까지 가 유비를 만나는 등 유비를 대단히 환영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를 붙잡고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온다. 그리고 조조와 원소가 패권을 다투는 관도 전투가 시작되자, 유비는 여남에서 조조를 배반하여 원소에 호응한 황건적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주변을 침범하지만 조조군에게 패해 원소 진영으로 돌아간다. 전풍이 유비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 원소에게 유비를 죽일것을 진언했지만 원소는 이 진언을 기각하고 유비를 그대로 뒀다.

 

그 후 유비는 관우가 조조의 휘하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자 관우는 유비의 가족들과 같이 유비에게로 돌아왔다. 유비는 원소 밑을 벗어나려고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와 협공하도록 진언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명의 병사를 이끌어 여남에 진을 치고, 조조는 채양을 시켜 공격하지만 채양은 패배하고 전사한다. 조조는 원소를 격파한 후 몸소 남하해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비는 유표 밑에 몸을 의지한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받았고,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이후 형주의 호걸 중에 선주에게 귀부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자, 유표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은밀히 제어하였다.

 

정사의 주석에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비가 주연 석상에서, 변소에 가서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떠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아 벌써 허벅지에 살이 붙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탄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유명한 ‘비육지탄(脾肉之嘆)’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량, 채모 등이 연회를 이용해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로를 타고 힘을 내라며 다그치자 놀랍게도 3길이나 뛰어올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적벽의 싸움에서 삼국정립까지

한편 조조는 하후돈 우금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명을 내렸는데, 유비가 박망 지역에서 이를 막아낸다. 유비는 자기 진영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것처럼 꾸미고 복병을 써서 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208년 유표가 죽자 후계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했다. 제갈량은 “유종을 없애고 형주를 지배해야 한다”라고 진언했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때 유종의 측근과 형주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 하루에 겨우 10리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먼저 행군하여 강릉을 지켜야 한다”라고 진언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가 기병 5천 명을 급파했기 때문에 유비는 당양의 장판교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유비는 유표의 큰아들 유기가 있는 하구로 도망쳤다. 그후 유비는 손권과 동맹을 맺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상향과 결혼시켜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썼다.

 

211년 익주목 유장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은 법정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촉의 지형, 병기, 인마의 적고 많음 등의 정보와 지도를 제공한 장송의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다. 드디어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맞이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예교위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출어 인심 장악에 힘썼다.

 

211년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장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했다. 때마침 장송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는데, 형 장숙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된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장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는 양희, 고패를 참살한다. 유비는 지름길로 관중에 이르러서, 여려 장수들과 군사와 처자들을 인질로 잡고, 병사를 이끌고 황충, 탁응 등과 함께 진격해 부성에 도착하여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이 유귀·냉포·장임·등현 등을 보내 부성에서 유비를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되어 패하여, 퇴각하여 면죽을 보전했다.

 

유장이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통솔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대는 더욱 강해지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해 군 아래의 현들을 항복시켰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百帝)성과 강주, 강양을 평정하였으며,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그리고 유비가 진군하여 낙성을 포위하는데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고, 공격당한지도 또 1년이 되었다.

 

214년 낙성이 격파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목을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켜 촉한의 기반을 구축했다.

 

215년 유비는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와 장비를 시켜 무도의 하변을 취하게 하고 그곳 이민족들과 연계하여 무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조조가 조홍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 하후연을 패퇴시켰다. 이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한중을 끝까지 사수하며 상용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위왕에 오른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한편 형주에 있던 관우는 의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다가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전사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만다.

 

촉한 성립과 유비의 죽음

220년(황초 원년)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이때 촉한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헌제 살해 소식은 물론 그릇된 소문이었지만, 이것이 유비가 제위에 오르는 명분이 되었으므로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가 되었다. 연호 장무(章武)로 하고, 유선 황태자로 세웠다.

 

이때 《삼국지연의》에서는 모든 신하가 칭제를 간하고 유비가 그것을 사양하였다고 나온다. 《삼국지》에서는 대부분의 신하가 간하고 유비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몇몇 신하가 반대한다. 특히 전부사마 비시는 상소를 올려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 고조께서는 초와 약정을 맺어 진나라를 격파시킨 사람을 왕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앞으로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비시전). 이에 유비는 비시를 좌천한다.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해한 것에 분노하여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었고,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조운과 제갈량이 이를 말렸지만 유비는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장비는 부하였던 범강 장달에게 살해된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을 보내여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하게 하여 이릉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으로 추정하여 볼 때 당시 유비가 이끌었던 촉한의 군세는 4만 ~ 8만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의 연합군(총합 10~12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촉군은 장수 풍습(馮習)이 무현에서 이이 등을 공격해 격파하고, 주태의 군대를 몰아세우는 등 초반 오군과의 전투에서 선전하였으나 손권이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한 후 전투의 양상은 달라지게 된다. 육손은, 오반을 선봉으로 내세워서 유인한 후 복병 8천으로 공격하려는 유비의 계책을 간파하였고 지구전을 통해 유비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았으며 촉군과의 대치 국면을 유지한다.

 

6월, 육손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가지게 하여 화공을 통해 유비군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추어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곳의 진영을 격파한 후, 마인산에 포진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 공격해 유비군의 진영을 붕괴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죽은 군사가 8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8월, 유비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으로 돌아온다. 겨울 10월, 손권은 유비가 백제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고 유비는 이를 허락하여 태중대부 종위를 보내어 답례하였다.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한 화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서거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유비의 후손들은?

263년 촉한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劉禪)과 그의 일곱 후손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옯겨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을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들은 절멸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羞)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은 성한을 공략,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은 유비의 증손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을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평가

나관중의 촉한 중심주의로 인해 유비는 오랫동안 정의의 사자이자, 한 황실 정통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유비의 명성과 인덕의 경우는 정사의 여러 기술에서도 기술된 바가 있다. 연의에서는 당시 민중의 성군상과 유교적인 영웅을 묘사하기 위해 본인의 능력보단 그릇과 덕,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강조하여 묘사한 바가 있고 현대에 들어 유비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일부 학자들에게 무능한 군주였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유비와 그의 부하들과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었던 면이 있으며 살아서 치뤘던 대부분의 전투의 지휘와 정책의 시행은 유비 그 자신이 총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진수의 평은 다음과 같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 무제(조조)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진수의 평을 볼 때 진수는 유비를 조조와 함께 묶어 평가하고 있는데 진수의 조조에 대한 평가를 보면, 조조는 한신과 백기라는 중국역사상 기권간략의 대명사인 두 명장에 이름을 견줄 정도로 동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진수가 기권간략면에서도 최고라는 전제를 내린 조조와 대등한 관계로서 평가, 비교하고 있는 군웅은 유비뿐인 만큼,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진수의 평에서 유비의 역량은 조조에 미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있으나 진수가 유비를 조조에 떨어지는 무능력한 인물로 보고 있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이 군주의 그릇과 풍도를 평할때 유비를 가장 전설적이었던 군주인 한고조와 역량을 견줄 정도로 유비의 역량을 동시대 인물 중에서 최고로 친 것이다.

 

유비의 수하장수

 

유비의 친족 관계

유비의 가계도

전한 경제─중산정왕 유승----------동군범령 유웅─유홍─소열제 유비
                                                           ┠────유선
                                                        소열황후
                                                           ┠───┬유영
                                                        목황후     └유리

 

 

유선(劉禪, 207년 ~ 271년)은 촉한의 제2대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223년 ~ 263년)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 조위 정통론(위나라의 군주에게만 제(帝)의 표기)의 입장에서 전 황제인 선주(先主) 유비와 구별하여 유선을 후주(後主)라고 지칭했기에 후주로도 불린다. 는 공사(公嗣).

 

유비의 적장남이자 감부인의 소생이며, 아명은 아두(阿斗)였다. 조운이 당양 장판파에서 업고 달리던 아두가 곧 그다.

 

17세에 유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고, 유비의 탁고 유지를 받든 승상 제갈량에게 내정과 외정을 총괄케 하고, 신료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제갈량 사후, 장완, 비위, 강유 등에게 국정을 맡기고 정치에 관여를 거의 하지 않으며, 말년에 권신 진지와 환관 황호를 총애하였다. 재위 40년 째인 263년에 등애의 기습 공격으로 수도인 성도(成都)가 위태로워지자, 그해 겨울에 에 항복하였다. 이후 종회와 강유가 촉 회복 운동, 즉 위나라에 대한 반란을 꾀하다가 토벌된 뒤, 낙양에 압송되어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졌다. 아명인 아두는 바보의 대명사로 부른다.

 

촉한의 멸망과 유선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선이 말년에 권신 진지와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나라를 망쳤다고 전해 온다.

 

하지만 《삼국지》〈위서〉 삼소제기에 따르면, 촉한의 멸망 원인은 다른 데 있다. 263년 을 정벌할 때 위나라 황제의 조서에서 이르기를, “촉은 작은 나라로, 영토가 좁고 백성 수가 적음에도 강유는 군대를 혹사하여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다. 지난해에 강유가 전쟁에서 진 뒤, 답중에서 둔전을 하며 수많은 강인(羌人)을 핍박하고 끊임없이 일을 시켜 백성이 명령을 견디지 못했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선이 환관에게 미혹되거나 실정했다는 말은 일절 없으며, 촉한을 치려 한 까닭이 황제 유선이 못나서가 아니라 강유에게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250년대 말까지는 황호의 발호를 동윤을 비롯한 다른 신하들이 막고 있었기에 그다지 문제가 있지도 않았고, 유선 또한 황호보다는 다른 신하를 더 믿었다.

 

그러나 뜻밖에 262년 10월에 출병했던 강유는 패한 뒤 성도 검각(위가 촉한을 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에 머물지 않고, 검각 북서쪽에 있는 답중으로 가서 주둔한다(위의 〈위서〉 삼소제기 참조). 그러자 위나라 황제는 “촉이 의지하는 이는 강유뿐인데, 그가 본거지를 떠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절반의 힘으로 두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위서〉 삼소제기)라고 말하며 공격을 명한다. 263년 5월에 시작한 전쟁이 11월에 끝나고 만다(〈위서〉 삼소제기, 〈촉서〉 후주전).

 

허나 그렇다 하여 유선의 말년의 정치적 실정은 결코 가볍게 넘겨선 안되는 문제이다.엄연히 유선은 촉한의 군주였기 때문이다. 강유의 북벌이 실패한 원인 중엔 유선이 황호의 말에 놀아난 점도 있다. 그리고 위와 촉의 국력차이를 생각하면 짧은 기간이라도 군주가 실정을 거듭하면 충분히 멸망으로 이어 질 수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기에 촉에 멸망에 대한 유선의 책임 또 한 크다고 할 것이다.

 

결국 촉한의 멸망은 위와의 국력차이, 황호의 발호와 유선의 정치적 무능력 여부, 그리고 촉한의 주력군의 사령관이던 강유의 전략적 실패등 복합적인 요인이 어우러져 발생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사망과 그 이후

유선은 271년 낙양에서 사망하였으며, 안락사공(安樂思公)에 봉해졌다. 유선이 지니고 있었던 안락공 지위는 위나라 시대에 이어 서진 왕조에 이르기까지 자손에게 승계되다가, 서진 말기 일어난 영가의 난 때에 후손들이 모두 죽거나 흩어지면서 중단되었다. 서진 왕조가 몰락한 직후 시작된 오호십육국 시대에 한(漢;훗날 전조)을 세운 흉노 출신의 유연은 자신이 한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유선에게 효회황제(孝懷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평가와 논란

유선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대상이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촉서〉 후주전에서 이르기를, “유선은 현명한 승상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지만, 환관에 미혹됐을 때는 우매한 군주였다. 이것은 마치 흰실이 일정한 색깔이 없이 물감에 따라 달라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진서(晉書)》에서는 “제나라 환공에 다음가는 현명한 군주”라는 문장이 있으며, 왕은(王隱)도 《촉기(蜀記)》에서 “유선은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왕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제환공은 밑에 훌륭한 신하가 있으면 명군, 없으면 암군이라는 의미로서 쓰이고 있다.

 

삼국지》 <위서> 육개전에 의하면, 육개는 촉한의 멸망 원인에 대해 '군주는 사치스럽게 하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다. 그 때문에 진에 토벌되었다.' 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자치통감》 에서도 사마사는 '촉한이 의지하는 사람은 강유뿐이니 강유를 묶어둔다면 유선의 아둔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촉정을 계획했다.

 

 

 

제갈량(諸葛亮, 181년 ~ 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다. 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복룡(伏龍)이다.

 

 

제갈량
Zhuge Liang.jpg
출생 181년
낭야
사망 234년
오장원
사인 병사
국적 촉한
별명 자는 공명
학력 사마휘에게서 사사
직업 군사(軍師)
종교 도교
배우자 황씨 부인
자녀 제갈첨
부모 부친은 낭야군 지방관 제갈규
친척 형 제갈근, 동생 제갈균

 

 

생애

제갈량의 생애는 크게 형주 시절, 입촉과 유비가 죽기 전,그리고 유선대에 이르러 남정과 북벌을 할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출생과 형주 시절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형은 제갈근(諸葛謹)이고, 친동생은 제갈균(諸葛均)이라고 한다.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로 온 제갈량은 스스로 농사를 하고,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당시 형주는 난세를 피해 온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다.

 

당시 유비도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삼고의 예를 하여 결국 제갈량을 영입하게 된다. 이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안을 한 계책이 그 유명한 '천하삼분지계'이다.

 

하지만 원소를 정벌하고 남하하는 조조에게 맞설 수 없던 유비로서는 남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제갈량은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이 되었다. 손권은 제갈량의 요청에 응해 유비와 동맹을 맺었으며,적벽에서 조조를 격파한다.(적벽대전) 209년 겨울의 일이다.

 

연의에서와 달리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나와있지 않으나, 《선주전》에서는 조조를 적벽에서 격파하고 남군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양공재기》또한 화용까지 유비가 조조를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본다면, 이때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참모로서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시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음을 들어 삼국지연의에서와 같은 그러한 활약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후 유비의 형남 4군 정벌에서도 제갈량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기록은 안 나와있으나, 군사중랑장이 되어 내정에 힘썼다는 기록을 본다면, 내정에서의 수완은 이미 유비 군 내에서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무후사(武侯祠)

 

입촉 및 유비 사망 전까지

214년 연의에서는 방통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사에서는 유비와 방통이 부수관에서 성도로 향할때에 형주에서 호응하여 서쪽으로 진군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유장이 항복한 후에는 '군사장군'에 임명이 되는데, 제갈량은 이후 유비가 황제가 되어 승상이 되기 전까지 이 직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위나라에서 한중 공방전을 치르기 전까지 제갈량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점 등을 들어 제갈량이 입촉 당시 혹은 유비가 죽기 전까지 중용이 안되었다고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가후전에서는 이미 조조가 한중을 공략하기 전에 제갈량의 정치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는 점, 또한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까지 좌장군이었지만 황충은 한중전 당시 하후연을 전사시켜 좌장군보다 높은 정서장군이 되었다는 점에서, 군사장군이라는 직위도 유비가 임시로 만들긴 했으나 그 권한이 상당했으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만드는 등 익주의 구조조정에 노력했다.

 

유비와 조조의 일생일대의 격전이었던 한중 공방전 역시 연의에서는 신산귀모의 지략을 펼쳐서 조조를 격파한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으나 실제 유비를 수행한 참모는 법정, 황권이며 이때 제갈량은 성도에서 유비를 위해 군사물자를 조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승자(위/진)의 입장에서 쓰여지는 것이니 정사라고 해서 모두 사실로 믿을 수도 없을 뿐더러 병참 또한 전쟁에 중요하므로 제갈량이 중용되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에도 계속 군사장군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황제가 된 후에는 조정의 수장인 승상(丞相)이 된다.

223년 유비가 백제성에서 붕어할 때에는 이엄과 함께 탁고를 받는다.

 

남정

유비(선주)가 죽고 유선(후주)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에도, 그리고 죽기 전까지 줄곧 제갈량은 승상으로 14년 간이나 있었다.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 고정, 주포 등이 손권으로부터 암약을 받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으므로, 제갈량은 225년 봄에 남정을 개시하여 그 해 가을에 반란을 평정한다.

 

올돌골이나 목록대왕 등의 일화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맹획은 실존인물로 남중 반란은 유언과 유장 부자 때의 중앙 통제에서 벗어난 남부 지역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반란이며 유비가 한중을 정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당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엄에게 평정됐고, 유비 사후 손권의 사주로 일어난 반란은 제갈량이 그 유명한 칠종칠금 일화를 남기며 평정하였다. 나중에 또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지나친 법치주의에 대한 불만이었기 때문에 역시나 금방 평정되었다.

 

북벌

227년 제갈량은 유비에게 부탁받은 후사를 실현하려고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출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은 원문 350자로, 이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이다. 이는 제갈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황제에 대한 여러 가지 훈계를 적어넣은 명문이다.

 

228년 봄 제갈량이 기산을 침공하자 남안과 천수, 안정 3군이 호응하고 강유가 제갈량에게 귀순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마속이 제갈량의 지시에 어긋난 행동을 해 장합에게 대패, 마속을 처형하고(읍참마속 또는 휘루참마속)(삼국지연의)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면서 승상의 사무를 대행한다. 같은해 겨울 제갈량은 다시 위나라를 침공해 진창을 포위하지만, 학소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식량이 다 떨어져 귀환했다. 이때 추격해온 왕쌍을 물리친다.

 

229년 제갈량은 또다시 위나라의 영토를 침공해 곽회를 격파하고 무도와 음평을 평정하여 그 공로로 승상에 복직했다.

231년에도 기산을 침공하여 상규에서 사마의와 싸워 대파시킨다. 그러나 식량이 다하여 퇴각했고, 그때 추격한 장합을 목문에서 사살시킨다.

 

234년 제갈량은 10만 대군을 일일이 통솔해 오장원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사마의와 대치했다. 제갈량은 손수레(목우 유마)를 사용해 식량을 수송하고, 식량 공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병사를 나누어 둔전시킨다. 사마의와 대치한 지 100일이 넘어 그해 8월 병으로 쓰러져 진중에서 54살의 나이에 죽는다. 유언대로 한중의 정군산에 매장되는데, 청렴하고 축재를 하지 않아 집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제갈량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북두를 향해 기도한 뒤 7일 간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수명이 12년 간 연장된다는 의식을 행했지만, 6일째 되는 날 위나라군이 침공한 사실을 알리려고 달려온 위연이 등을 밟아 불이 꺼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평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제갈량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을 내고,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영토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형벌과 정치는 엄격했는데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상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년 군세를 동원하면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건대 임기응변의 군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서》〈진수전〉에 따르면, 진수의 부친이 제갈량으로부터 형벌을 당했고 진수 자신 또한 아들인 제갈첨으로부터 가벼이 여김을 받아서 혹평을 한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진수의 아버지가 진식이라는 설 역시, 진식이 한중공방전 당시 마명각도를 끊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 유비의 동오 수복전 당시 수군을 지휘했다는 점, 제갈량의 3차 북벌 당시 무도 등을 공략했다는 점을 살펴본다면 잘못된 것이다. 진수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기록조차 없으며, 마속이 패배했을 당시 곤형(머리를 깎는 형벌)을 당했다는 기록뿐이므로, 일개 부대를 통솔할 정도의 연륜을 가진 무장이 마속의 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리는 없으며, 또한 패전의 책임을 입은 장수가 3차 북벌 때 군대를 통솔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제정했다는 점, 그리고 신상필벌이 명확했음에 제갈량은 정치를 철저하게 법가술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재를 기용할 때에는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기용했다는 점에서 유학을 경시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다섯차례의 북벌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여 그에게 임기응변의 장략이 부족했다는 평가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 반론이 존재한다. 제갈량은 1차 북벌 당시 조운의 군대를 의군으로 하여 위군 장수 조진의 군대를 유인하였고, 3차 북벌도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으며, 4차 북벌에서는 상규에서 사마의의 주력과 싸워서 승리하였다는 점을 살펴본다면, 군사적 재능이 낮다고 평가될 수는 없다. 오히려 제갈량은 위군과 평야에서 전투를 벌여서 승리를 하기를 원했으나 위군의 대 제갈량 전략은 견벽거수(벽을 맞대고 수비만 한다)였음도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이 낮다는 점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제갈량과 강유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북벌을 진행한 탓에 촉한의 국력은 점점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했으며 촉한 멸망의 빌미를 제공했다. 위군의 견벽거수 역시 이 점을 노린 것이였다. 또한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동남풍을 불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연의에 의한 허구일 뿐이며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적벽대전과 관련된 모든 계략은 주유의 머리에서 나왔다.

 

자오곡 계책을 통해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깎아내리고 위연의 군사적 재능을 높히는 경우가 있는데, 위연이 청한 군사 5천과 보급병 5천으로는 거성인 장안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는 점, 군사적인 재능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조조의 부마인 하후무가 도주를 안할 수도 있다는 점 등에서 자오곡 계책은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의 1차 북벌도 내용면에서는 조운과 등지로 하여금 의군을 이끌고 조진을 막으면서 제갈량 자신은 기산으로 출병했으므로 자오곡 계책과 별반 다를바가 없다 하겠다.

 

제갈량의 북벌 의도도 위국을 멸하는 것이 당연한 목표였겠지만, 실제로 우선적인 목표는 옹양주를 점령하여 국력의 신장을 꾀하고 중원 진출을 수월하게 한다는 평가가 타당하다. 《위서》《진태전》에 그 기록이 나온다.

 

일화

  • 키는 8척에 풍모가 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친형인 제갈근은 말처럼 머리가 길고 못생겼다고 묘사되어 있으므로 이 사실은 신빙성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 제갈량의 용모에 대해 백옥같은 피부에 흰 학창의와 백우선을 가진 모습이 신선과 같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제갈량은 깡마른 체구에 피부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같았으나 눈빛에 힘이 있으며 기품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 제갈량의 아내인 황씨는 '황두흑색(노란 머리, 흑색 피부)'에 키가 8척이나 되어 여자로서의 매력이 부족하였다고 전해진다.
  • 제갈량이 유비에게 먼저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긴하지만, 제갈량은 그의 출사표에서 삼고의 예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 제갈량을 영입하자 관우와 장비는 불만을 품었는데, 유비가 그들에게 '(나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수어지교)'이라고 하여 그들의 불만이 없어졌다고 한다.
  • 출사표에서 제갈량이 직접 언급한 뽕나무와 척박한 토지는 제갈량이 청빈했음을 알려주는 일화라기보다는 '그정도의 땅이 있으니 자손들이 먹고살기에는 충분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 익주에 있을 때 제방을 쌓았는데 '제갈제'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화정(火井)을 순시하자 그 후 불길이 더 거세졌다는 일화도 있다.
  • 만두
제갈량이 운남 지역을 정벌하고 오는 길에 노수에서 심한 풍랑을 만난다. 맹획이 풍습에 따라 마흔아홉의 사람의 머리로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고 하자 제갈량이 사람 머리 모양의 밀가루로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가 있다.
제갈노(諸葛弩)는 열 개의 화살을 연속해서 발사할 수 있는 연발식 연노이다. 제갈량이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출처는 <삼국지연의>뿐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제갈노는 명나라 때 개량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갈량에 대한 중국인의 애정표시로 볼 수 있다.
  • 군율에 있어서는 굉장히 냉혹했다. 유비가 그렇게 아끼던 인재이자 자신의 친구인 마량의 동생 마속조차도 가정 전투의 책임을 물어 참수시켰을 정도였다. 때문에 아무리 아끼는 인재라도 원칙에 어긋나면 처벌한다는 의미로서 읍참마속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제갈량의 수하장수

제갈량의 친족 관계

출사표

 <출사표〉(出師表)는 원래 신하가 적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황제에게 올리던 표문(表文)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중국 삼국 시대촉한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제갈량의 출사표로는 〈전출사표〉와 〈후출사표〉, 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았다는 이가 없다 할 정도로 빼어난 문장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그 당시의 죽은 선제 소열제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 담겨 있는 글로 오늘날까지 크게 칭송받고 있다.

전출사표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220~280년)에 당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184~234)이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북벌을 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이다. 흔히 출사표라 하면 전출사표를 말하는 것이고,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전해지며 그 원문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후출사표

중국 삼국시대에 당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184~234)이 당시 위(魏)나라와의 1차 북벌에서 실패한 후, 전세를 재정비한 후에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올린 두번째 상소문이다. 1차 북벌 이전에도 제갈량은 후주에게 출사표를 올린 적이 있기 때문에 후세에선 이 출사표를 후출사표라 부른다. 내용이 전출사표와 더불어 매끄러우나 후세 사람의 윤색이라는 평이 있고 조작된 것이라는 평이 있다.

 

 

전출사표(前出師表)
저자: 제갈량
중국 삼국 시대(三國時代, 220~280년)에 당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이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북벌을 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 흔히 출사표라 하면 전출사표를 말하는 것이고,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전해지며 그 원문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출사표에서 인용.

 

신 승상 무향후 제갈량은 아뢰옵니다.

 

선황제 폐하(열조 소열제 유비)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하오나 폐하(후주 유선)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충언에 귀를 크게 여시어 선황제의 유덕을 빛내시오며, 충의 지사들의 의기를 드넓게 일으켜 주시옵소서. 스스로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셔서 그릇된 비유를 들어 대의를 잃으셔서는 아니되오며, 충성스레 간하는 길을 막지 마시옵소서.

 

또한, 궁중과 부중이 일치 단결하여 잘한 일에 상을 주고 잘못된 일에 벌을 줌에 다름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만일 간악한 짓을 범하여 죄 지은 자와 충량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각 부서에 맡겨 상벌을 의논하시어 폐하의 공평함과 명명백백한 다스림을 더욱 빛나게 하시고, 사사로움에 치우치셔서 안팎으로 법을 달리하는 일이 없게 하시옵소서.

 

시중 곽유지와 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황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사오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물어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장군 향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은지라 지난날 선황제께서 향총을 시험삼아 쓰신 뒤 유능하다 말씀하시었고,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그를 도독으로 천거했사오니, 아둔한 신의 생각으로는 군중의 대소사는 향총에게 물어 결정하시면 반드시 군사들 사이에서 화목할 것이오며,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모두 적재적소에서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다할 것이옵니다.

 

전한 황조가 흥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멀리했기 때문이오며, 후한 황조가 무너진 것은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 때문이오니, 선황제 폐하께서는 생전에 신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일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셨사옵니다. 시중과 상서, 장사와 참군 등은 모두 곧고 밝은 자들로 죽기로써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킬 신하들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두시고 믿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머지않아 한실은 다시 융성할 것이옵니다.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로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황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그후 한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에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해온 지 어언 스무해 하고도 한해가 지났사옵니다.

 

선황제 폐하께옵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한 것을 아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탁고의 대사를 맡기셨사옵니다. 신은 선황제의 유지를 받은 이래 조석으로 근심하며 혹시나 그 부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여 선황제의 밝으신 뜻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끝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었사옵니다. 이제 남방은 평정되었고 인마와 병기와 갑옷 역시 넉넉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평정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대한 황실을 다시 일으켜 옛 황도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선황제 폐하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드리는 신의 직분이옵니다. 손익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 드릴 일은 이제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몫이옵니다.

 

원컨대 폐하께옵서는 신에게 흉악무도한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킬 일을 명하시고, 만일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엄히 다스리시어 선황제 폐하의 영전에 고하시옵소서. 또한 한실을 바로 일으키는 데 충언이 올라오지 아니하거든 곽유지, 비의, 동윤의 허물을 책망하시어 그 태만함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옵소서. 폐하께옵서도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옳고 바른 방도를 취하시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살펴 들으시어 선황제 폐하께옵서 남기신 뜻을 좇으시옵소서.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을 올리여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관우(關羽, 162년 ~ 219년)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수장(壽長) 또는 장생(長生)이라는 를 썼으나 나중에 운장(雲長)으로 바꿨다. 유비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관우의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힌다. 의리의 화신으로 민담이나 전승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되어 관제묘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관우
162년 ~ 219년
GuanYu-ZhouCang.jpg
별명 미염공
태어난 곳 하동군 해현
죽은 곳 맥성
최종 계급 5호장군 전장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
박망파 전투
적벽 대전
기타 이력 관성제군

 

생애

 

생애 초반

정사에는 관우가 태어난 날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관제지(關帝志)≫ 등의 기록들과 민간에 전해지는 여러 가지 설들을 종합하자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0년)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우는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와 함께 나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관중 저 삼국지연의에서는 유관장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게다가 키가 9척(약207센티미터), 수염 길이가 2자(=2척, 약60센티미터)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다만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때의 무기는 아니고(한나라 때에는 언월도가 아예 없었으며, 또한 (언)월도는 북방 민족의 무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미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 밑에서 평원상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의 허락을 받아 화웅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에게 죽임을 당했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관도 대전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한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 삼국지연의는 관우가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삼국지에는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의 책략에 빠진 문추를 서황(徐晃)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쫓지 말라”라고 하며 조용히 보내준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이때 관우는 여포가 소지하고 있던 적토마를 조조에게서 물려받았다. 하지만 말(馬)의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허구이다. 만약 관우가 적토를 타고 다녔다면 여포가 타고 다닌 적토의 2세 내지는 3세에 해당되며 그 적토 본마(本馬)는 아닌 것이다.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과 문추를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오관참육장의 설화는 허구이다.

 

유비와의 재회

관우는 유비와 다시 만나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지한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 평정에 착수하자 관우는 수백 척의 군선을 모아 하구로 향해 오나라의 손권과 연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 대전에서 대승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쳐라”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고 하나 정사엔 화용도에 관한 내용이 없다. 정사에서는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촉한의 인물들이 적벽대전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적벽대전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 역시 한당 황개이며 관우, 장비 등은 아니다.

 

적벽 대전 이후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켰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관우와 노숙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하였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 관우의 초인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일화가 삼국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식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각색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가 방덕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말년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허도를 떠나는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 장제 등이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건의를 듣고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키려 해서 사신으로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을 관우에게 보냈지만 관우는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으로 온 제갈근에게 욕설과 협박을 하는 등의 무례함을 범하였다. 관우의 번 성 포위 작전 때 손권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자 손권을 오소리에 비유하며 모욕하였기에 손권은 관우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관우의 무례함이 극에 달하는 행동으로 인해 분개하던 손권은 조조와의 요청을 수락하고 관우에게 기습을 감행하여 강릉을 점령하였다. 손권은 관우를 공격하였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참수하니 향년 58세였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마자 관흥의 후손들은 이 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인민군의 편이 되어 참전했다.

 

평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를 평하길, “관우는 만 명을 대적할 만한 용맹한 장수이며 조조에게 보답을 하는 등 국사(國士)의 풍격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냉정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으로 결국에는 실패하였다”라고 했다. 또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은 관우는 거만하여서 유비가 오호대장군의 으뜸으로 세울 때 황충을 "황충같이 늙어빠진 장수가 어찌 저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비난하였는데, 육손은 이 점을 이용하여 관우를 벨 수 있었다.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

공자의 묘를 문묘(文墓)라고 하듯이, 관우의 묘를 무묘(武墓)라고도 하여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으며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무신(武神)으로 받들어지고,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동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관우와 적토마

적토마가 관우와 일생을 함께하였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관우가 적토마를 물려받았을 때에는 이미 십여 세에 이르른 적토마는 "늙은 말"이었고, 관우가 죽을 때에는 태어난 지 삼십 년이 넘는, 인간으로 치면 180세가 넘는 말이기에 살아 있기는 힘들다.

이것은 관우를 치료한 화타 이야기 만큼이나 유명하지만, 관우를 치료한 의원이 화타가 아니듯이, 관우와 일생을 함께한 말이 적토마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관우가 생포당했을 때 적토마는 붙잡혀있다가 슬피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하는 것으로 미뤄보면 관우의 적토마는 여포의 적토마가 아닌 여포의 적토마의 2세일 가능성이 높다. 조조가 여포로부터 적토마를 몰수한 후 교배시켜 얻은 여러 마리의 적토마 2세중 한 마리를 관우에게 하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역대 시호

한편,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는 충의의 화신인 관우는 무조건적 충성의 좋은 본보기였기에 관우를 우대하고 여러 시호를 봉했다. 그 종류는 아래와 같다.

나라 황제 연대 봉호
북송 송 휘종 숭녕원년(1102년 충혜공(忠惠公)
북송 송 휘종 숭녕3년(1104년 숭녕진군(崇寧眞君)
북송 송 휘종 대관2년(1107년 무안왕(武安王)
북송 송 휘종 선화5년(1123년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남송 송 고종 건염2년 (1128년 壯繆義勇武安王
남송 송 효종 순희14년(1187년 壯繆義勇武安英濟王
원 태정제 천력8년(1335년 顯靈義勇武安英濟王
명 신종 만력42년(1613년 單刀伏魔、神威遠鎭天尊關聖帝君
명 의종 숭정3년(1630년 眞元顯應昭明翼漢天尊
청 세조 순치9년(1652년 忠義神武關聖大帝
청 세종 옹정3년(1725년 三代公爵、聖曾祖、光昭公、聖祖、裕昌公、聖考、成忠公
청 고종 건륭원년(1736년 山西關夫子
청 고종 건륭31년(1767년 靈佑二字 추가
청 인종 가경18년(1813년 仁勇二字 추가
청 선종 도광8년(1828년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
 

장비(張飛, 167년 ~ 221년)는 중국 삼국시대의 맹장으로 촉한의 건국 공신이다. 는 익덕(益德)이다.

 

유비, 관우와 함께 황건적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기지를 발휘해서 조조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 정벌시, 엄안을 회유하여 파촉 정벌의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 태수 자리에 올랐고 한중 정벌에서 위나라의 장합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를 위해 출정하는 도중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되었다.

 

장남 장포는 장비보다 일찍 요절했고, 차남 장소가 가계를 이었다. 장비의 장녀와 차녀는 모두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포가 촉한을 위해 활약하고,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다.

 

 

장비
167년 ~ 221년
ZhangFei.jpg
별명 연인
태어난 곳 탁현 누상촌
죽은 곳 청두
최종 계급 거기장군 사예교위 서향후
주요 참전
전투/전쟁
장판파 전투
적벽 대전
기타 이력 파서 태수

 

 

생애

 

생애 초반

연인(燕人) 장비는 원래 성주의 부장으로서 성이 황건적에게 함락되고 난 후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된 무사였다. 또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결의형제를 맺어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여림의 관공연보에 의하면 유비는 관우보다 한 살 어리고 장비는 유비보다 네 살 연하(165년 출생)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비는 용맹하고 과격한 성격이고, 성격이 매우 급했으며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즐겼다. 후에 황건적 토벌에서 부장 등무를 토벌하는데, 유비의 스승 노식이 환관의 참언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호송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호송병을 죽이고 노식을 구하려고 했지만 유비에게 제지당한다. 또한 황건적의 수령 장각에게 패한 동탁을 구해주지만 유비를 경멸하자 장비는 이에 분노해 동탁을 살해하려고 했다. 이때도 유비가 그를 제지했다. 마침내 황건적 토벌의 공로로 유비는 안희현의 현위에 임명된다.

 

서주에 거처할 무렵

이윽고 도겸이 죽자 유비가 잠시 서주를 맡게 되고, 조조에게 패한 여포가 유비를 찾아와 의지하려 들었다. 또한 조조의 군사 순욱이 내건 ‘두 호랑이가 서로 먹이를 다투게 하는 계략’으로 황제로부터 여포 토벌의 밀칙을 받자 유비는 이 계략을 간파하고 장비를 제지했다.

 

이번에는 순욱에게 ‘호랑이를 몰아내고 이리를 잡는 계략’에 걸려 유비는 원술 토벌의 조칙을 받는다. 연의에 따르면 유비가 출정하고, 장비는 금주 서약을 하고 서주를 지키는데, 그래도 술을 끊을 수 없어 조표에게 술을 강요하며 매질했기 때문에 조표의 원한을 산다. 이에 조표는 밤중에 여포를 불러들였다. 장비는 조표를 죽이지만 유비의 처자를 구하지 못한 채 혼자 달아났다. 장비는 책임을 지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유비가 제지하자 흐느끼면서 포기한다. 그 후 유비와 여포는 화해하지만 장비가 산적으로 변장해 여포의 군마를 탈취하자 분노한 여포에게 공격당한다. 유비 일행은 조조에게 몸을 의지하고 조조와 공동으로 여포를 격퇴하였다.

 

조표는 이미 여포와 작당한 상태로 유비가 원술을 치러 갔을 때 빼앗은 것으로 장비가 술주정으로 인한 폭력이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관도대전 당시의 장비

그러나 조조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유비는 패배하여 관우, 장비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장비는 망탕산에서 무사히 탈출해 고성현령을 쫓아내고 그 곳에 독자 세력을 구축해 눌러앉았다. 이 무렵 장비는 나무를 하러 간 어떤 아낙 한 명을 강제로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는데 이 여자가 하후패의 여동생인 하후씨이다. 이윽고 조조 밑을 떠난 관우가 만나러오자 장비는 배신자라고 말하며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관우는 자기를 추격해온 채양을 토벌한 것으로, 겨우 장비를 납득시켰다.

 

제갈량을 만난 이후

그후 형주의 유표 밑에서 몸을 의지할 때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만나게 되는데, 동행한 장비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에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했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는데, 조조는 이를 추격해 당양의 장판에서 따라잡았다. 유비는 장비에게 20기병을 지휘해 배후를 막아내도록 했다. 장비는 강 근처 숲에 말 20마리를 묶어놓은 후 말의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서 먼지가 많이 일어나게 하여 복병이 많은 것으로 위장했다. 위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장비는 강에 있는 다리 위에 단기로 서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장팔사모를 치켜들며 “내가 바로 장비이다! 덤벼라!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 하고 호령했다. 감히 누구도 접근하지 못해 유비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 이는 경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판교의 금강역사’라는 유명한 장면이다. 이 때 장비의 고함소리에 하후패의 말이 놀라서 발버둥치는 바람에 하후패는 낙마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패가 훗날 촉한에 귀순하여 촉한을 위해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하후패가 낙마한 것이 아닌 하후걸(夏侯傑)이라는 가상의 장수가 낙마한 것으로 묘사했다.

 

삼국정립

그 후 적벽 전투의 승리를 거쳐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자, 장비는 의도태수(宜都太守)·정로장군(征虜將軍)에 임명되고 이후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전임되었다. 유비가 장로 토벌을 위해 익주로 들어갔을 때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때 장비가 조운과 함께 유선을 다시 데려왔다. 곧이어 유비가 유장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방통이 전사하는 등 궁지에 빠지자,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구원에 나서서 서로 분담하여 군현을 평정했다.

 

그는 강주에 도착해 유장의 부하였던 파서태수 엄안을 격파하려고 욕을 퍼부었으나 엄안이 그에 대한 반응이 없자 장비는 샛길을 만들아 파서를 두고 돌아가려고 하는 줄 안 엄안은 성밖으로 나오나 장비는 그 뒤에 매복하여 엄안을 생포한다. 장비는 엄안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자 이에 감탄하고 그를 용서해 후하게 대접한다. 이리하여 통과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어 성도에서 유비와 합류, 익주가 평정되자 보상금을 하사받고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승진한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하후연 장합을 한중에 주둔시켜 종종 파(巴)의 경계선을 침공했다. 장비는 유비의 명을 받아 탕거로 진군, 위나라의 장합과 50일이 넘도록 서로 대치했다. 장비는 정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에게 공격을 감행해 와구에서 격파하고, 장합은 겨우 부하 10여 명 남짓 데리고 사잇길을 따라 달아났다.

 

219년(건안 24년) 유비가 한중을 평정하고 한중왕에 오르자 장비는 우장군 가절에 임명된다. 또한 관우, 조운, 마초, 황충과 더불어 오호대장군의 반열에 올랐으며 나아가 221년(장무 원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장비는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하고 사례교위(司隷校尉)를 겸임해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진다.

 

말년

그러나 관우가 죽은 뒤에는 매일 큰소리로 울고, 기분을 달래려고 술을 마시고서는 취해 난폭해지는데, 부하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비는 이를 염려하여 언제나 장비를 훈계하였다고 한다.

 

유비가 오나라 토벌에 나서자 장비는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장비는 부장인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당했다. 범강과 장달이 장비를 죽인 것은 장비의 가혹행위와 무리한 요구(3일 안에 군복 10만벌 확보)가 그 원인이였다.

 

후에 장비는 환후(桓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사 에서의 장비

여타의 많은 게임이나 만화, 민간 여담에서의 장비의 무도하고 과감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사에서는 이러한 이미지나 성격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많은 무인들이 문맹들이 많았던것을 감안한다면 정사의 역자 진수에 따르면 장비는 시서화와 풍류에 능하였다고 기록한다.

연의의 단순하여 보이는 장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적으로 장군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선주가 강남을 평정하고 난 뒤, 장비를 의도태수(宜都太守)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했으며, 후에 자릴 옮겨 남군(南郡)에 있었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 도리어 유장을 공격했는데, 장비와 제갈량 등은 강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군대를) 나누어 군현을 평정하였다."


"장비가 정예병 1만 여명을 거느리고, 다른 길로 나가 장합의 군대를 쳐서 전투가 벌여졌는데, 산길은 좁아서 전후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니,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하였다. 장합은 말을 버리고 산길을 따라, 오직 휘하의 10여 명과 같이 샛길을 따라 퇴각하여, 군대를 이끌고 남정(南鄭)으로 돌아가니, 파군 지역이 안정되었다. "

 

"강주(江州)에 이르러 유장의 장수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을 격파하고 엄안을 사로잡았다."

 

이 와같이 정사에서의 장비는 수많은 역전의 맹장들을 차례로 굴복 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널리 알려진 단순 위맹한 장비의 이미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할것이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장비

연의를 보면 장비 익덕은 본래 술과 고기를 파는 상인이었는데, 황건적의 난때 장각은 청주,유주,서주,이주,양주,연주,여주,형주등 중국영토를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우를 만나서 형제 처럼 지내다가 몇년뒤 유비를 만나게 된다. 유비는 탁현 마을이라는 곳에 물건을 팔려고 장비와 함께 배를 타고 나서는 순간 마을이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떄 유비,관우,장비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장비는 무기로 장팔사모(丈八蛇矛, 팔 척짜리(18자)사모)를 썼다고 하는데, 창두가 뱀처럼 구불구불했고 길이가 1장 8척(3m 60cm)이었다 한다. 사모(蛇矛)가 처음 등장한 때가 동진(東晉) 이후이므로 장팔사모 역시 실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또한 터무니 없는 길이를 볼 때 당시 사람들의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 책에서 성주가 준 자신의 동생 인육을 먹고 죄책감에 휩싸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비는 유비가 현령이 되자 순시하러 온 독우가 뇌물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자 장비가 분노하여 독우를 기둥에 묶고 매질을 하였다. 유비는 장비를 제지하고 현위를 사직하고 도망가게 된다. 그러나 《삼국지》에서는 오히려 유비가 독우를 매질했다고 되어 있다. 그 후 동탁과의 싸움에서 장비는 여포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공손찬을 돕고, 여포와 필마단기로 싸운다. 관우와 유비까지 가세하자 여포는 패주한다. 그 후에는 유비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밑을 떠돌면서 그들을 군사 면에서 돕는다. 정사에서는 공손찬이 동탁과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 객장이었던 유비와 관우, 장비도 동탁과의 싸움에는 나서지 않았다. 여포와의 대결은 관우와 장비의 무용을 보여주기 위한 허구이다.

 

또한 장비는 여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유비가 이를 말리고 관우가 장비를 데리고 나갔다고 기술되어 있다.

 

원술을 토벌할 때 원술 휘하의 맹장 기령을 토벌한다. 그 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조조가 파견한 유대와 왕충과 대치한다. 장비는 일부러 술에 취해 한 병사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 병사를 유대에게 투항하게 만들어 장비가 야습한다는 사실을 밀고시킨다. 유대는 진지를 비우고 복병을 준비하지만 장비가 의표를 찔러 바깥쪽에서 공격, 유대를 생포했다.

 

장판교에서 장비는 다리 위에서 말 위에 홀로 우뚝 버티고 서서 조조군을 퇴각시킨다. 또한 이 때 장비에 호통소리에 낙마한 장수는 하후걸(夏侯傑)이라는 가공의 장수이다.

 

또 연의에서 적벽 전투에서 익주 평정에 걸쳐 방통이 뇌양현령에 임명되고 매일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장비가 순시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방통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복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장비는 방통을 보러 뇌양현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또 유장을 구원하러 장로가 파견한 마초와 필마단기로 싸우는데 밤이 되도록 화톳불을 켜놓고 싸우지만 끝내 승부가 나지 않았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오나 정사에서는 마초가 장로의 부하 양송의 참언이 계속되며 입지에 위협을 받자 강족들 땅으로 피신했다가 유비에게 투항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파서에서 장합과 대치했을 때, 장비가 또다시 술에 빠지게 되자 유비가 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것을 책략으로 간파하고 진중 위문품으로 맛 좋은 술을 보냈다. 장비는 변함없이 술을 마시고, 기다리다 지쳐 오금이 저린 장합이 야습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모든 병사가 빠져나가 아무도 없었으며, 이 틈에 장비는 장합의 세 성채를 탈취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일화

관우가 고기들은 항아리의 뚜껑을 들어올리고 그 속에 들은 고기를 나누어 주었는데,그 일로 관우와 싸웠다가 유비의 중재로 도원결의를 맺었다. 황건적 토벌 이후 유비가 현령에 부임했을 때,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던 탐관오리 독우를 매질하였다. 장비는 흔히 무식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무예 뿐 아니라 지모로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또한 영웅을 알아보는 안목도 갖추었다. 장판교에서는 흙먼지를 일으키는 계책으로서 필마단기에 호통만으로 조조의 백만대군을 도망가게 만들었다. 유비의 명을 받고 정사를 게을리 하는 방통을 꾸짖으러 갔다가 그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방통을 유비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또한 촉 쟁탈전에서는 엄안을 지모로 사로잡았고 또한 그의 충절과 기상에 감복하여 그를 극진히 대접하여 엄안을 유비에게 투항토록 하였다. 마초와 무예로 3일 밤낮을 겨루었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고 마초의 거짓 퇴각을 눈치채고 거짓 퇴각으로 맞받아쳤다. 또한 한중 쟁탈전에서는 위의 명장 장합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마속(馬謖, 190년 ~ 228년)의 는 유상(幼常)이며, 양양(襄陽) 의성 출신으로 마량의 막내동생이다. 제갈량이 아꼈으나 유비는 죽을 때 언과기실(言過其實)이란 평(評)을 하였다. 관직은 참군(參軍)이었으며 사마의를 거짓소문으로 한때 물러나게 한 적도 있어 공명의 사랑을 받는다. 그 뒤로는 가정(街亭)의 큰 싸움에서 군량의 중요한 보급로인 산을 맡아 보는 중책을 짊어지게 되는데, 마속은 소홀하여 산을 빼앗기고, 촉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갈공명은 패전 지휘자 마속에 그 책임을 물어 결국 목을 치게 된다. 공명(孔明)이 눈물을 머금고 그를 참하는 모습에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말이 나왔다.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사람들은 가정전투에 산을 맡아보는 중책에 대해 경험이 많은 오의(오일), 위연이 추천되기도 했지만 묵살되고 마속이 이를 담당했다고도 한다.

 

 

마초(馬超, 176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벌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는 맹기(孟起)이다. 관우, 장비, 황충, 조운과 더불어 오호대장군으로 불렸다.

 

생애

마초는 176년 태어나 서북 지역에서 독립 세력을 과시한 마등의 아들이다. 192년(초평 3년) 마등과 한수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진입하자 한 왕조는 한수를 진서장군에 임명해 금성으로 귀환시키고 마등을 정서장군에 임명해 미에 주둔시킨다. 그 뒤 마등은 장안을 습격하지만 패배해 양주로 도망갔다. 이것에 대해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복종하는 경우와 반항하는 경우의 이해 득실을 각각 설명했다. 마등은 이에 응하고 아들 마초를 종요 밑으로 보냈다. 그리고 승상이 된 조조는 마초까지 초빙하지만 마초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사례교위 독군종사가 되어 평양현 곽원 고간을 토벌하고 이 때 전장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은 다리를 포대로 싸매고 계속 싸우는 용맹함을 발휘하여 곽원을 격파하자 마초의 부하 방덕이 곽원의 목을 베었다.

 

이윽고 조칙으로 서주자사가 되고 이후 간의대부에 임명된다. 그 뒤 마등은 한수와 사이가 벌어져 마등은 위위로 조정에 소환되고, 동생 마휴 마철도 각기 봉거도위, 기도위에 임명되어 모두 업으로 이주했다. 편장군이 된 마초만 양주에 남아 마등 군영을 장악해 통솔하였다.

 

211년(건안 16년) 마초는 한수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킨 뒤 군대를 이끌고 동관까지 진군한다. 이때 아버지 마등은 마초의 죄에 연좌되어 삼족이 모두 멸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문하시랑 황규와 손을 잡아 조조에 대한 반란을 기도하고, 처형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조와 싸움을 벌인다. 조조는 한수, 마초와 회담하였는데, 마초는 비밀리에 조조를 체포할 생각이었으나 허저가 엄하게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이 《삼국지연의》에서 마초와 허저가 일대일로 격돌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조조가 가후의 계략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를 벌여놓았으므로 둘은 서로 의심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마초는 패하게 된다.

 

패배한 마초는 도주한 후 만족 사람들을 부하로 삼아 조조군의 철수를 노리고 농상의 여러 군현을 제압했다. 양주자사 위강을 살해하고 기성을 거점으로 그 군세를 부하로 흡수했다. 마초는 스스로 정서장군이라 칭하고 병주목을 겸무해 양주의 군사도독이 되었다. 그 무렵 원래 위강의 부하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초가 출진하지만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 틈에 양관 조구 등이 마초의 처자를 살해하고 기성의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으므로 마초는 진퇴양난에 빠져 할 수 없이 한중으로 도주하여, 장로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마초는 장로를 따른 후부터 종종 북쪽으로 진군해 양주 탈환을 노리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장로는 마초가 바라는 대로 군사를 내주었지만, 장로의 장군 양백 등이 마초의 능력을 비난하자 설자리를 잃은 마초는 무도에서 저족이 사는 곳으로 달아났다. 이때 마초는 투병중이라서 장로의 진지에 남아있는 방덕을 버리고 마대 혼자만 데리고 가버렸다. 결국 이게 화근이 되어 방덕은 위에 투항하여 관우와 대적하게 된다.

 

214년 유비가 성도의 유장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밀서를 보내 항복을 알리고 촉한으로 도망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전에 장비와 둘이서 호각지세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이회의 설득으로 유비에게 투항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사자머리 투구와 은으로 만든 갑옷, 하얀색 도포 차림새로 등장해 ‘금(錦)마초’라고 불렸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마초를 등용하자 마초는 군사를 이끌고 성에 도착하였고, 유장도 곧바로 항복하고 만다. 《산양공재기》에서는 유비가 마초를 후하게 대해준 것을 계기로 마초가 유비를 낮추어 부르자 관우와 장비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어느 날 마초와 유비가 만나는 자리에서 유비의 양쪽에 관우와 장비가 칼을 차고 지키는 것을 보고 마초는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이후 태도를 바꾸었다고 한다.

 

유비는 마초를 평서장군에 임명하고 임저를 다스리게 하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도정후에 봉했다. 또 221년(장무 원년) 표기장군으로 승진해 양주목을 겸무하고 태향후라는 작위를 하사받지만, 222년, 47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시호는 위후(威侯)이다.

 

황충(黃忠, ? ~ 220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이며, 는 한승(漢升)이다. 백발의 노장으로 유명하고, 늙은 황충(老黃忠)이라고 하면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되고 있다. 활을 무척 잘 쏘았다고 한다.

 

생애

황충은 남양군 출신으로, 처음에 그는 형주목 유표의 부하로 중랑장에 임명되어 유표의 조카 유반과 함께 장사를 수비했다고 한다.

유표가 죽은 후 혼란스런 틈을 타고 조조가 형주에 침입해 세력을 넓히자, 임시로 비장군의 지위가 주어지고 원직을 겸무하게 된다. 그러나 장사태수 한현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고, 조조 밑에서는 어디까지나 속숙의 포로 장수격이어서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208년(건안 13년) 조조가 적벽 대전에서 패하여 형주에서의 지배력이 약해진 것을 기회로 유비가 형주 남부의 여러 군을 평정하자, 그 때 한현이 황충을 베려 하는 것을 위연이 한현을 죽이고 황충을 구출했다. 그 이후 황충은 신하의 예를 갖추고 유비에게 귀순하였다. 나아가 유비가 촉으로 들어갈 때도 함께 수행, 그 무렵에는 직위를 받아 가맹에서 철수해 유장을 공격하는 등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항상 선두에 서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과감하게 적을 공격해 진지를 무너뜨리는 용맹함은 실로 삼군 가운데 으뜸이었다고 한다. 비록 늙었지만 무장으로서의 실력을 여지없이 보여주었으며, 익주 평정 후 그때까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토로장군에 임명되었다.

 

219년 유비가 한중을 공략했을 때에는 정군산에서 하후연을 공격, 솔선해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오로지 적을 공략하여 마침내 정예병을 격파, 대장 하후연까지 죽이고 촉한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공적으로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올랐으며, 같은 해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후장군(後將軍)까지 올라 관내후(關內侯)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다. 이때 관우는 스스로 유비의 가신들 가운데 필두를 지킨다는 특별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황충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것에 내심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제갈량이 유비를 만류했지만, 유비는 황충의 실적을 높이 평가해 그의 진언을 물리쳤다.

 

황충은 그 다음해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후 강후(剛侯)라는 시호가 추층되었다. 황서라는 외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죽어서 후계자는 없다.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황충은 관우가 장사를 공략할 때 그와 대적하였다. 오랜 공방 끝에 황충의 말이 부상을 입어 그가 낙마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기로 마음먹고 그 허를 찌르려 하지 않고, 말에 다시 올라타려는 황충을 도와주었다. 이것에 대해서 황충은 감복하였고, 태수 한현에게 백발백중의 활 솜씨로 관우를 쏘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고뇌하였다. 결국 다음 대결에서는 그의 장기인 활로 관우의 투구만을 쏘아 빚을 갚았다.

 

그 결과 황충은 명령위반죄로 한현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동료 위연이 “장사의 공신을 처형하는 것은 당치 않으며 오히려 태수의 학정이야말로 그 죄를 물어야 한다” 라고 민중을 선도하고 한현을 등진다. 위연은 한현을 살해하고 관우에게 항복해 성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황충은 처형을 면하였다.

 

그 후 황충은 주군 한현에 대한 충성을 지켜 병을 핑계로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있었는데, 유비가 직접 찾아가 앞으로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는 유비의 신망과 인덕을 인정해 저항한 것을 사죄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유비의 촉 공략을 수행했을 때에는 위연이 공을 세우려고 몰래 빠져나간 결과 도리어 위기에 빠진 것을 구하여 아군이 궁지에 빠지는 상황을 미리 막았다. 또 한중 쟁탈전에서는 같은 노익장으로 불리는 엄안과 짝을 이루어 활약한다.

 

222년 이릉 전투에서 황충은 유비가 “노인이 나서봤자 소용없다” 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분기해 적은 군세에도 불구하고 오나라 진지를 공격해 사적을 죽이고 반장과 힘겹게 싸운다. 그리고 주위에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무모하게 적진 깊숙이 침입해 들어가다 어깨에 마충의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유비는 “내가 그런 서운한 말을 해서 그대가 이런 일을 겪고 말았다” 며 사죄하였고, 황충은 유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조운(趙雲, 168년 ~ 229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룡(子龍)이다. 관우, 장비, 황충, 마초와 더불어 오호대장군으로 불렸다.

 

생애

 

생애 초반

조운은 상산군 진정현(常山郡 真定縣) 출신이며, 신장은 8척(약 184cm)에 가깝고, 모습과 얼굴 생김새가 두드러져 근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조운이 유비보다 나이가 더 많았고, 그가 158~159년 쯤에 태어났을 것이라고도 하고 다른 설로 168년설이 유력하긴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가 229년에 병사하였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제갈량의 북벌 당시 나이 일흔의 노장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았을 때, 유비보다 나이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렸을 때 탁현에서 관우가 조운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원래 조운은 원소에게 졸백으로 임관했으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공손찬 밑으로 들어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창술의 명수로 되어 있으며, 처음에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스스로 공손찬 밑으로 달려가고, 문추를 상대하여 공손찬을 궁지에서 구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유비와의 만남

그 무렵 유비 또한 공손찬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공손찬이 원소를 막기 위해 유비를 파견해 전해를 지원하도록 했을 때 조운도 일시적으로 유비의 지휘하에 들어가 종군했다. 이 무렵 조운은 공손찬의 난폭한 성격에 기가 질려 있었고 같이 공손찬의 부하로 있던 유비를 눈여겨 보게 된다. 유비 역시 조운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서로 깊은 유대를 맺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때 조운이 유비의 가신이 되고 싶다는 뜻을 전하지만 유비는 공손찬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다.

 

그 뒤 조운은 형의 장례를 치르러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절대로 당신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유비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는 조운이 공손찬 밑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유비 또한 그것을 깨닫고 마음을 담아 악수를 교환하고 조용히 전송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에게 서주(徐州)를 잃은 느낀 유비가 원소에게 의지하자 조운은 유비를 접견하고 부하로 들어갔다. 이때 삼국지정사에서는‘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라고 되어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당양 장판에서의 활약

201년 조운은 여남(汝南)에서 패배한 유비를 따라 신야(新野)로 가게 되었다. 207년 형주에서는 유표가 죽어 후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그에 편승해 조조가 침공을 시작했다. 유비가 피난길에 당양현 장판에서 조조군의 습격을 받고 도주할 때, 조운은 단기(單騎)로 적군 한가운데로 달려들어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유선과 감부인(甘婦人)을 구출하는 대활약을 펼쳐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승진한다(장판 전투). 이 전투 중에 “조운이 아군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으나 유비는 “조운은 결코 그럴 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 자를 때려 눕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운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라고 하는 자가 미방으로 나오며, 조운이 조조 휘하의 장수 하후은을 죽여 청강검(靑舡劍)을 손에 넣은 후 유선을 가슴에 품고 적군 한가운데에서 분전, 그것을 본 조조가 조운을 어떻게든 생포하라고 지시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용이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삼국 정립

211년(건안 16년) 익주목 유장 법정을 파견해 유비를 맞아들이고 북방의 장로를 공격했다. 그러나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장과 대립하게 되어 가맹관에서 군사를 돌려 유장을 공격하지만, 군사 방통이 전사하는 등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래서 제갈량이 조운, 장비 등과 함께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주변의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은 강양(江陽)을 거쳐 성도로 진군, 성도 포위의 일축을 담당했다. 유장의 항복 후 조운은 익군장군(翊軍將軍)에 임명되었다.

 

219년 한중 전투에서 조운이 조조군의 선봉을 격파하자 조조군은 군세를 강화해 다시 조운의 진영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조운은 문을 활짝 열고, 깃발을 숨기고, 북을 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운의 진영 앞에 도착한 조조군은 그 정적을 보고 복병이 있지 않을까 의심해 머뭇거렸다. 그것을 본 조운이 북을 치고 쇠뇌를 쏘아 적군을 공격하자, 깜짝 놀란 조조군은 북새통이 되었고 많은 병사들은 달아나다가 한수(漢水)에 빠져 익사하는 등 참패를 당했다. 다음날 아침 유비는 몸소 조운의 진영을 방문하고 전날의 전장을 시찰하면서 “조운의 몸은 모두 간(肝)덩어리다”라고 칭찬하였고, 군졸들은 조운을 호위장군(虎威將軍)이라고 불렀다.

 

손권이 형주를 습격해 관우를 살해하자 유비는 크게 노하여 손권을 공격하려 했다. 조운은 “먼저 위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자연히 굴복할 것입니다. (중략) 위나라를 방치하고 먼저 오나라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전투가 일단 시작되면 쉽게 풀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유비를 만류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동쪽으로 진군하고, 조운을 강주에 남겨 후방을 단속하게 했다. 유비가 자귀에서 패배하자 조운은 구원에 나서 영안까지 진군하지만 오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나고 없었다.

 

유비 사후

223년 유선이 즉위하자 중호군(中護軍)·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고, 이후 영창정후(永昌亭侯)·진동장군(鎮東將軍)으로 위임(委任)되었다. 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따라 한중에 주둔하고, 228년 제갈량과 함께 위나라로 출병, 제갈량은 사곡도(斜谷道)를 통과한다고 크게 선전하고, 조운과 등지에게 위나라의 조진을 상대하도록 명령한 다음 그 틈에 기산을 공격했다. 조운의 분견대는 미끼였지만 조진은 제갈량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기곡(箕谷)에 대군을 파병했으므로, 중과부적으로 조운의 군대는 패배했다. 그러나 군병을 잘 수습해 대패를 모면한다. 제 1차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참전했던 제갈량 이하 모든 장수들이 강등되면서 조운은 진군장군(鎮軍将軍)으로 좌천되었다.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장병의 단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묻자, 등지는 “조운 스스로 후방 부대를 맡아 군수 물자를 거의 버리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으므로 장병들은 흐트러짐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고 대답했다. 제갈량은 조운에게 남은 군수품 견사(명주실)를 그의 장병들에게 나눠주게 했지만, 조운은 “전쟁에 진 자가 어찌 하사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군수 물자는 모두 창고에 모아 10월에 겨울 준비 물품으로 하사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해, 규율을 지켜 패전 책임을 분명히 했다. 제갈량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229년 병사, 261년에는 대장군 순평후(大將軍順平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운은 관우나 장비와는 달리 이치에 맞는 행동만 하고 누구에게든 예를 갖춰 대했기 때문에 유비에게도, 제갈량에게도 인정받았다. 실제로 제갈량이 촉한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조운이었으며 조운이 일생을 마감하자 제갈량은 매우 서럽게 통곡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