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30 (서진시대) 본문
중국의 역사 30 (서진(西晉)시대)
서진시대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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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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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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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은 촉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중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건국했다. 건국 초기 무제 사마염은 안정적인 정치로 새로운 나라의 기반을 다져나갔으나, 말년에 사치에 빠져 온나라가 향락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국정의 문란이 더해가던 혜제 때에 이르러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들이 팔왕의 난을 일으켜 국운이 기우고 만다. 무려 16년 동안 팔왕의 난이 중국을 휩쓸고 있던 중에, 중국 내륙에 이미 정착해있던 많은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영가의 난을 초래하게 되었고 서진은 흉노의 유연이 세운 한나라에 건국 4대 52년만에 멸망했다. 황실의 일족인 사마예가 당시 건업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중원의 호족과 강남 토착 호족들의 추대에 힙입어 317년 동진을 세워 진나라의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역대 황제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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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 고조 (晉高祖) (서진 무제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사마의(司馬懿) | - | - |
- | 진 세종 (晉世宗) (서진 무제 추숭) |
경황제 (景皇帝) |
사마사(司馬師) | - | - |
- | 진 태조 (晉太祖) (서진 무제 추숭) |
문황제 (文皇帝) |
사마소(司馬昭) | - | - |
제1대 | 진 세조 (晉世祖) |
무황제 (武皇帝) |
사마염(司馬炎) | 태시(泰始) 265년 ~ 274년 함녕(咸寧) 275년 ~ 279년 태강(太康) 280년 ~ 290년 태희(太熙) 290년 |
265년 ~ 290년 |
제2대 | - | 효혜황제 (孝惠皇帝) |
사마충(司馬衷) | 영희(永熙) 290년 영평(永平) 291년 원강(元康) 291년 ~ 299년 영강(永康) 300년 ~ 301년 영녕(永寧) 301년 ~ 302년 태안(太安) 303년 ~ 304년 영안(永安) 304년 건무(建武) 304년 영흥(永興) 304년 ~ 306년 광희(光熙) 306년 |
290년 ~ 306년 |
제3대 | - | 효회황제 (孝懷皇帝) |
사마치(司馬熾) | 영가(永嘉) 307년 ~ 312년 | 306년 ~ 312년 |
제4대 | - | 효민황제 (孝愍皇帝) |
사마업(司馬鄴) | 건흥(建興) 313년 ~ 317년 | 313년 ~ 317년 |
사마의(司馬懿, Sīmǎ Yì, 179년~251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이며, 그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자는 중달(仲達)이며,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선황제(宣皇帝)이다.
위나라·촉나라·오나라로 중국이 솥발처럼 나누어진 삼국 시대에, 사마의는 위나라의 군대를 이끌어 그의 최대의 라이벌인 제갈량(諸葛亮)과의 치열한 지략싸움 끝에 결국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냈다. 위 명제 조예가 죽은 이후 대장군 조상(曹爽)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승상(丞相)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그의 손아귀에 넣었다. 위나라 조정 내의 사마(司馬) 가문의 영향력이 지대해졌고 이것이 이후 진나라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그는 상국(相國)이 되었고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해졌다. 사후 그의 손자인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했을 때 선제(宣帝)로 추증되었다.
후한이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개막됐던 삼국지의 무대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천하통일을 위해 수많은 피를 뿌렸으나 결국 천하는 사마의를 통해 등장한 사마씨(司馬氏)의 품으로 돌아갔다.
생애
사마의는 하내(河內)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그 선조는 고양제(전욱 고양씨)의 자손인 중려(重黎)로부터 나왔다. 아버지는 경조윤을 지낸 사마방(司馬防)으로, 사마의는 그의 둘째 아들이다. 형은 사마랑(司馬朗)이며, 셋째 아우는 사마부(司馬孚)이다. 사마의는 유년기 때부터 총명하여 대략(大略)을 지녔고, 식견이 넓었고 유학의 가르침을 가슴깊이 간직했다(伏膺儒教)고 한다. 후한 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늘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최염(崔琰)은 사마랑에게 말하길, “당신의 동생(사마의)은 총명·성실하고 결단력 있고 영특하니 그대보다 낫다”고 했다.
201년에 사마의는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되었다. 조조가 사공이었을 때 사마의를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조조가 승상이 되었을 때 사마의를 다시 불렀는데 거절한다면 가두겠다는 엄포를 놓았고 사마의는 이를 두려워해 문학연에 취임했다. 조조의 아들 조비와 교제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郎), 의랑(議郎), 승상 동조속(丞相 東曹屬), 그 뒤에는 주부(主簿)로 전임했다.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 속에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리 신임하지 않았다. 조조는 사마의가 낭고상(狼顧相)이란 소문을 듣고 사마의를 오게 하여 고개를 돌려보게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얼굴이 똑바로 뒤를 향했다. 또 조조는 세 마리의 말이 한 구유(槽:조씨의 曹와 음이 같다)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어 이를 매우 언짢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세 말은 훗날 위나라를 멸망의 길로 들게 하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조는 조비에게 “사마의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항상 경계할 것을 충고했다. 조비는 사마의와 평시 도움을 주고 받았었는데 조조의 말을 듣고 이 때문에 그를 멀리하였다. 사마의는 조조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하급 관리의 직무를 밤을 새며 보고 가축을 기르는 하찮은 일까지도 기꺼이 함으로써 조조를 안심시켰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토벌했을 때 사마의는 유비가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익주를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결국 익주의 민심을 달래고 군을 정비한 유비가 한중과 동천(東川) 일대를 점령하여 조조에게 큰 우환을 안겨다 주었다. 우금과 방덕 등이 관우에게 대패하고 관우의 기세가 중원에까지 뻗치자, 조조는 하북으로의 천도를 검토했다. 이 때 사마의는 “천도한다면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니 인근의 백성들이 크게 불안해 할 것입니다. 손권과 유비는 겉으론 친밀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손권을 달래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면 번성의 포위는 자연히 풀릴 것입니다”라고 건의했고 조조는 이를 따랐다. 결국 손권은 여몽으로 하여금 형주를 쳤고 결국 관우의 목을 베었다.
조비가 후한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위나라의 황제가 되었을 때,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 224년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가절(假節)로 전임되어 급사중(給事中)과 녹상서사(錄尚書事)의 벼슬이 더해졌다. 조비의 사마의에 대한 신뢰는 매우 두터웠는데 사마의에게 이르길, “짐이 동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서쪽을 맡고, 짐이 서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동쪽을 맡으시오”라고 했다. 조비가 죽을 때 사마의, 조진(曹眞), 진군(陳群) 등을 불렀고 황태자 조예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길, “이 세 명의 신하와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조예가 황제에 올랐으나 조예는 사마의를 신임하지 않았다. 당시 사마의는 옹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아챈 촉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은 참군 마속(馬謖)의 의견을 받아들여 거짓 방을 장안과 낙양에 뿌렸고 이것을 본 조예는 대노하여 사마의의 군영으로 가서 사마의를 파면, 낙향시켜 버린다.
하지만, 맹달의 모반으로 사마의는 다시 돌아오게 된다.
230년, 사마의는 태위에 임명되고 대도독, 가황월의 벼슬이 더해졌다. 그 해에 조진과 더불어 촉한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했다. 231년 제갈량이 천수를 공격했을 때 사마의는 조예의 명을 받아 장안에 주둔해 옹주와 양주의 군사를 총괄했다. 이후 역사상 유명한 제갈량과의 대결을 벌인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장장 7년 동안 6차례에 걸쳐 행해지는데, 1차 북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마의가 나섰고 총지휘한 것은 2번이다. 첫 대결은 231년으로, 조진이 죽은 뒤 촉군의 약점이 식량 보급에 있음을 간파한 사마의가 지구책을 쓰고 그 전략이 효과를 발휘해 촉한군이 퇴각하자 뒤를 쫓다가 장합이 전사한다.
두번째 대결은 234년, 제갈량은 장기전을 예상해 3년에 걸쳐 준비하는데, 오장원으로 출진한 제갈량에 대해 사마의는 또다시 지구전을 펼쳤다. 제갈량은 부인용 머리 장식과 여러 장신구들을 사마의에게 보내며 비웃었지만 사마의는 도발임을 눈치채고 편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지고 온 사자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다. 이때 사마의는 수시로 촉한군의 진영을 염탐해 제갈량이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안 사마의가 즉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제갈량의 목상을 보고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하고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
촉한군이 퇴각한 뒤 진영을 살펴본 사마의는 제갈량을 ‘천하의 귀재’라고 평가했다.
후일 사마의는 그 아들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성공, 위나라의 조씨 정권을 탈취하여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 손자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국호를 진으로 고쳤다.
사마의의 친족 관계
사마사(司馬師, 208년 ~ 255년)는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의 대신이다. 자는 자원(子元)이며 위 상국 사마의(司馬懿)의 장남이자 진왕 사마소의 형이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경황제(景皇帝)이다.
생애
약관의 나이때부터 같은 세대 인물이자 처남인 하후 현과 더불어 이름을 날렸다. 사마사가 젊은 시절부터 아우 사마소와 함께 아버지 사마의를 따라 행군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촉의 제갈량의 북벌과 요동 서부의 패자였던 공손씨 연나라의 군주 공손연과의 대전에서도 활약하였다고『삼국지연의』에서는 기술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249년, 아버지 사마의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장군 조상을 제거하려 하자 아버지를 따라 출병, 조상과 그 일족을 제거하였다. 이른바 고평릉의 쿠데타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씨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51년에 사마의가 죽자, 사마사는 당시 황제인 조방에게 대장군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후 아버지보다도 더 많은 권세를 누렸고 그 권력은 황제를 이미 뛰어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방이 이풍, 장즙, 하후현 등과 사마사 제거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자 사마사는 조방을 제왕으로 강등, 폐위시키고 고귀향공 조모를 모셔와 새 황제에 앉혔다.
255년에 관구검(毋丘儉)이 문흠 등과 더불어 황제 폐위에 대한 죄를 묻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사마사는 직접 출병하였다가 자신의 왼쪽 눈에 큰 통증이 생겼고 문흠을 추격하기 위해 파견한 자신의 군대를 문흠의 아들인 문앙 혼자서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파하자 눈 위의 혹이 악화되어 얼마 뒤 진중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훗날 조카 사마염이 황제에 오르자 세종 경황제에 추증되었다.
사마소(司馬昭, 211년-265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대신 사마의의 둘째 아들로 자는 자상(子尙)또는 자상(子上)이며, 진 무제 사마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다.
생애
형 사마사가 죽자 전권을 장악했으며, 이 과정에서 전부터 사마소가 가충을 보내 조모의 죽임을 벼르고 있던 차에, 더욱 큰 위협을 느낀 당시 위의 천자 조모는 사병 300명을 풀어 사마소를 죽일 계책을 펼친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사마소는 조모의 계략을 무마시키고 이를 빌미로 그를 폐위시켰다. 그 후 조환을 앞세워 위의 천자로 옹립하므로서 사실상 사마소는 위의 모든 전권을 잡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전권을 토대로 자신 스스로를 진왕(晋王)에 봉한다. 그 후 대륙의 통일을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 이 때 강유에게 의지하며,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는 촉나라가 환관 황호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자, 곧바로 그는 당대 위의 노장 등애와 젊은 장수 종회에게 명해 촉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결국 등애가 촉의 험난한 산세를 타넘어, 정면길을 택했던 종회보다 더 빠른 시간에 촉나라를 항복시키며 그가 내린 토벌령을 수행하게된다. 이후 그는 결국 잡혀온 촉의 후주 유선의 마음과 인물됨을 시험하기 위해 술자리를 강요하여 자리를 갖게되는데 그를 시험키위해 면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 |
자상 : 당신은 촉의 황제요. 촉을 세운 유비의 아들이니라, 그런데 촉이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슬프지 아니합니까? 후주 : 즐기느라 촉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樂不思蜀) 자상 : (웃으며)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로 촉이 그립지 않습니까? 후주 : (그제서야 장소의 간언을 들으며) 그립습니다. 선주의 무덤이 있는 서쪽만 봐도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자상 : (신하의 간언을 듣고 말한 후주를 눈치채고) 누가 이야기 해주었소? 후주 : 신하가 얘기 해주었습니다. |
” |
이를 들은 사마소는 후주 유선을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건들지 아니하고, 그를 안락공에 명하며 편히 쉬게 해준다. 후에 후계자로 형에게 입양시킨 아들 사마유를 자신을 이을 정권자로 지명하려고 했으나 가충의 반대로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되는데,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할 땐 벌써 중풍을 맞고 쓰러져 겨우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에 사마소는 얼마 가지못해 죽게된다.
진세조 무황제 사마염(晉世祖武皇帝司馬炎, 236년 ~ 290년)은 서진(西晉)의 초대 황제로, 자(字)는 안세(安世)이다.
그의 조부는 위(魏) 왕조의 대신으로 제갈량(諸葛亮)과 결전을 벌이고 노년에는 정권을 잡은 사마의(司馬懿)이며, 백부는 사마사(司馬師), 아버지는 사마소(司馬昭)이다.
건국 이전
사마염의 조부인 사마의가 정적인 조상(曺爽)을 물리침으로써 정권을 획득한 사마씨는 조위(曺魏)의 3대 황제 조방(曹芳)과 4대 황제 조모(曹芼)를 폐립했다. 조위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元帝) 조환(曹奐)의 대에 이르러서는 사마씨의 수장인 사마소가 승상(丞相)에서 진공(晉公)을 거쳐, 진왕(晉王)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사마소에게 황위에 오를 기회는 많이 주어졌으나, 그는 주문왕(周文王)과 조조(曺操)의 선례를 따르고자 황좌에 오르지 않았다.
건국
265년, 사마소가 죽고 진왕직을 승계한 사마염은 위주(魏主) 조환을 겁박하여 선위를 요구했다. 선위받은 이후에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하며, 낙양에서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고 황좌에 오른다. 훗날 사마예가 건업에 건설한 동진과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사마염이 건설한 진을 서진(西晉)이라 부른다.
동오 토벌
280년, 명장 두예와 왕준의 분투로, 오주(吳主) 손호(孫皓)가 다스리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60년의 삼국 정립의 시대의 막을 내린다.
몰락
삼국을 통일한 뒤, 그는 성군(聖君) 노릇을 하며 검소한 생활을 입으로 말하면서도, 말년엔 부패한 정치를 하여, 서진(西晉)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에 사마염의 뒤를 이은 사마충(司馬衷)의 정실 부인이며, 가충의 딸인 가남풍은 정권을 잡고 횡포를 일삼아, 서진 왕조를 몰락하게 했다.
사마염의 혈연관계
친척
외척
인척
진혜제 사마충(晉惠帝 司馬衷, 263년 ~ 306년)은 서진 황조의 제2대 황제로, 자는 정도(正度)이다.
위(魏) 황조의 상국이자 서진의 고조 선황제(高祖宣皇帝)인 사마의(司馬懿)의 증손자이면서,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司馬炎)의 장남이다. 사마염이 290년에 죽자 나이 28세에 즉위하였다.
사마충은 본디 능력이 떨어지고 학문에 뜻이 없어 사마염의 동생이자 사마충의 숙부인 제왕(齊王) 사마유(司馬攸)가 사마충 대신 제위를 이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을 정도였다. 사마염 사후 사마충은 황제에 등극했으나, 황제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해 국정 운영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부인인 가충의 딸 황후 가남풍의 실세만 확대되어 외척의 힘이 거대해졌다. 팔왕의 난까지 벌어져 서진은 통일한지 반세기도 되지 않은 기간에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팔왕의 난(八王之亂)은 중국 서진(西晉)의 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황족들의 대결이 내란으로 번진 것을 말한다. 이 내란의 영향으로 서진은 멸망에 이르렀고, 이후 중국은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무려 약 250년간 전란의 시대를 보내게 된다.
이 전란에 참가한 8명의 왕은 다음과 같다.
-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 선제 사마의의 5남.
-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 무제 사마염의 5남.
-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선제 사마의의 9남.
-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무제 사마염의 조카.
-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 무제 사마염의 16남.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무제 사마염의 6남.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무제 사마염의 6촌.
-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 고밀왕 사마태의 차남. 무제 사마염의 6촌.
배경
서진의 초대 황제였던 무제(武帝)의 사망 후, 그의 아들인 혜제(惠帝)가 즉위했다. 하지만 혜제는 암우한 제왕이었기에 정치는 양준(楊駿)과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이 독식하게 되었다. 혜제의 황후였던 가씨(賈氏)는 양씨를 조정에서 추방하고 자신이 실권을 잡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이윽고 가씨는 거대한 무력을 가지고 있던 혜제의 동생 초왕(楚王) 사마위와 협력해 낙양에 있던 양씨를 모두 죽였다.
양씨를 조정에서 추방한 가씨는 정권을 혜제의 대숙부였던 여남왕 사마량에게 맡겼으나, 사마량은 가씨의 의도대로 정권을 운영하지 않았다. 실망한 가씨는 혜제의 밀서를 이용해 사마위가 사마량을 공격하게 만들고, 사마량을 궁지에 몰리게 해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 후 이용가치가 없어진 사마위에게 사마량을 살해한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서 가씨는 자신의 지위를 안정화 시켰다.
혜제는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황태자 사마휼(司馬遹)이 있었다. 가씨는 사마휼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사실 무제는 혜제가 암우한 사실에 실망해서 제위를 양위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손자 사마휼의 재능을 인정해 혜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가씨는 한편 남자로써 만족스럽지 못한 혜제와의 사이를 멀리하고, 낙양의 미소년을 모아 밤마다 자신을 시중들게 하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살해했다.
가씨의 야심을 느낀 사마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했다. 노점을 궁궐에 열 정도로 노력했으나, 가씨에게 모반 의혹을 받고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300년 가씨에 의해 사마휼은 살해당했다. 혜제의 대숙부(사마량의 동생)였던 조왕 사마륜은 혜제의 종제(從弟)인 제왕 사마경과 협력하여 혜제의 칙서를 위조해 궐기했다. 황태자를 살해한 죄를 물어 가씨는 일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301년 사마륜은 혜제를 유폐하고 스스로 즉위했다. 그러나 사마륜과 측근 손수(孫秀)에게 권력이 집중되는것에 불만을 품은 사마경은 혜제의 동생인 장사왕 사마애와 성도왕 사마영 그리고 사마의 조카의 아들이었던 하간왕 사마옹을 낙양에 모이게 해 사마륜을 죽였다.
혜제를 복위시켰던 사마경은 곧 정치실권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혜제의 황태자도 독단으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사마애, 사마영, 사마옹은 다시 궐기하여 사마경을 살해했으나, 사마경의 후임을 누구로 할것인가를 두고 이해관계가 발생했다. 기어코 사마애가 사마영과 사마옹에게 공격당해 죽고 말았다.
이제 사마영이 황태자이자 승상으로서 정치를 맡게 되었으나, 낙양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마영은 사마옹의 부하 장방(張方)에게 낙양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서히 사마영이 승자로서 정치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이에 대해 이번엔 사마씨 일족인 동해왕 사마월과 혜제의 막내동생 예장왕(預章王) 사마직(司馬熾)이 반기를 들었다. 한때 사마영에게 패했던 그였으나 흉노와 선비등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이번엔 사마영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낙양을 수호하던 장방과 사마옹을 공격한 것은 사마월이었고, 사마옹이 강화를 위해 나오자 그를 구속하였다. 기어코 사마영을 살해한 사마월은 306년에 죽은 혜제의 뒤를 이어 사마치를 회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였다. 가씨에 의해 양씨 추방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팔왕의 난은 이로써 종결되었다.
팔왕의 난 이후
팔왕의 난 때 각 왕들은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 주변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족들은 강력하다고 생각하던 서진의 내부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304년 유연의 의해 전조가 건국되면서 중국 전지역을 포함한 거대한 내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이었다.
영가의 난(永嘉之亂)은 중국 서진 말기에 이민족에 의해 일어난 반란을 가리키는 말이다. 회제(懐帝)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때 일어났기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혜제(恵帝)의 치세 때 일어난 팔왕의 난(300년)이후 고대부터 중원(中原)이라 불리던 화북(華北)지역은 혼란상태에 빠져 다수의 유민(流氓)이라 불리는 피난민이 각지을 유랑하고 있었고, 예전 한나라 시대 이후 중원에 침입하여 한민족과 함께 살고 있었던 새외민족도 활약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산서성을 중심으로 이주했던 흉노의 족장 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의 휘하에 있었으나 304년 서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좌국성(左國城;현재 산서성 이석현(山西省 離石縣)을 본거지로 삼고, 대선우(大單于)의 지위에 앉았다. 또한 한나라때 내려진 유씨성에 의거해 한왕(漢王)을 칭했다.(이 나라는 후에 조(趙)로 이름을 바꾼다) 그후 산서성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 갈족의 석륵과 한족 유랑민의 우두머리였던 왕미를 휘하에 흡수해 하북성과 산동성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팔왕의 난 후, 진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는 상황에 있었기에 회제와의 관계에서 갈등으로 동해왕이 분사(憤死)하자 일거에 구심력을 잃어버렸다. 311년 석륵군에 의해 진나라군이 대패하여 장병 10여만이 학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낙양에 대군을 보내 함락시키고, 회제를 한나라의 수도 평양(平陽;현재 산서성 임분현 山西省 臨汾縣)으로 연행했다.
회제의 사후 장안에서 민제가 옹립되었으나 이미 실질적인 서진왕조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제도 한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얼마안가 살해되었다. 화북은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영가의 난이었다.
진회제 사마치(晉懷帝 司馬熾, 284년 ~ 313년 3월 14일)은 서진 황조의 제3대 황제이다. 자는 풍도(豊度).
서진의 무황제(武皇帝)인 사마염(司馬炎)의 25번째 아들이다. 290년 사마염이 붕어하기 직전에 예장왕(豫章王)에 봉해졌고, 307년 서진 혜제가 독살당하자 황위에 올랐다. 유총(흉노에 의해 세워진 한나라의 열종 소무제)에 의해 311년 사로잡혔고 313년에 처형되었다.
전조에서의 삶
사마치는 사로잡힌 이후에도 전조(당시 한)의 수도에서 1년 반동안 굴욕적인 삶을 살았다. 312년 유총에 의해 회계공(會稽公)에 봉해졌다. 유총은 한 연회에 사마치를 초대한 이후에, 사마치가 예장왕이던 시절에 서로 만났던 일에 대해 평했다.
- "공이 예장왕이던 때에, 왕제(王濟)와 함께 당신을 뵌 적이 있습니다. 왕제는 나를 칭찬했고, 공은 "당신의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소."라고 했지요. 그리곤 공은 손수 작곡한 음악을 보여주었고, 왕제와 내게 작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는 공을 찬양하는 가사를 썼고, 당신은 정말 좋아했지요. 그리고 화살을 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난 열두 번 명중시켰고, 왕제와 당신은 아홉 번씩 명중시켰죠. 그리고 뽕나무 활과 은 벼루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사마치가 말하길, "어떻게 그것을 잊겠습니까? 후회스러운 것은 용을 미처 몰라뵈었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 칭찬을 들은 유총이 이에 감탄하여 묻길, "일족끼리 살륙을 벌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라고 하자 사마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그건 사람의 의지가 아니고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한나라는 신의 가호를 받으려는 참이었고, 우리 일족은 그래서 한나라를 위해 제거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제의 뜻을 받들어 단합된 상태로 있었다면, 어떻게 주군께서 황제가 되었겠습니까? "
유총은 깊이 감명하였고, 밤새도록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유총은 아끼던 첩을 사마치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 첩은 회계공작부인이 되었다.
죽음
313년, 황실의 새해 맞이 행사에서 유총은 사마치에게 고급 관리용 포도주를 접대하도록 했다. 서진의 관리였던 유민(庾珉)과 왕준(王雋)은 이런 굴욕적인 광경을 보고 감정이 복받쳐올라 크게 울고 말았다. 이것이 유총의 화를 돋궈, 유민과 왕준은 물론 서진 시대의 관리들을 모두 반역 및 서진 장수 유곤(劉琨)에 대한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사형에 처했으며, 사마치도 독살당하였다.
진민제 사마업(晉愍帝 司馬鄴 또는 司馬業, 300년 2월 7일, 318년)은 서진 황조의 제4대 황제이다. 자는 언기(彦旗).
진 무제 사마염의 아들인 사마안(司馬晏)의 아들, 즉 사마염의 손자이다. 전조의 장수 유요에게 항복하였고 당시 전조 황제인 유총에게 곧 처형되었다. 이것으로 서진은 멸망하였지만, 동진 원제 사마예가 강남에 망명 정부를 세워 서진 왕조를 계승하였다.
황위에 오르기까지
사마안의 아들이지만, 삼촌 사마간(司馬柬; 사마업이 태어나기 9년 전인 291년에 죽음)의 양아들이 되었으며 삼촌의 지위도 계승하였다. 313년 진 수도 낙양이 한조(전조)에 함락당하자, 당시 왕자였던 사마업의 삼촌 서진 회제도 사로잡혔다. 그리고 아버지인 사마안도 사망했다. 당시 13세였던 사마업은 도망쳐 밀현(密縣; 현재의 정저우 시)에 다다랐고, 거기서 만난 친척들이자 서진 관리들인 순번(荀藩), 순조(荀組)들에 의해 군주로 받들어졌다. 이듬해, 중앙정부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염정(閻鼎)이 사마업을 관중(關中; 지금의 중국 산시성 위하(渭河) 유역 일대)에 모시려고 시도했으나, 그 과정에서 친척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사마업을 떠났다.
염정과 사마업은 결국 관중에 도착했고, 가아(賈疋) 장군의 지원을 받았다. 가아는 312년에 장안을 손에 넣은 상태였기 때문에, 사마업은 그 곳에 본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312년 가을, 염정과 가아는 사마업을 황태자로 추대했으며,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임시 정부와 서진의 멸망
313년 봄, 당시 한조(전조)의 왕이었던 유총에 의해 서진 회제가 처형되었고 이 소식이 장안까지 닿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 이후 삼촌(회제)에 대한 상을 치루고, 진 민제로서 황위에 올랐다. 그 때 장안의 상태는 총 가구 수가 100호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사용 가능한 마차 역시 넉 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관리들이 사용할 도장과 피복까지 부족한 상황이었다. 군사력 부문은 국윤(麴允)과 삭침(索綝)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민제는 진주(秦州; 지금의 간쑤 성 동부 지역) 에 그때까지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마보(司馬保)를 남양왕(南陽王)에 봉하고, 양쯔강 유역 및 남쪽에 상당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사마예를 낭야왕(琅邪王)에 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마보와 사마예는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314년경, 한조는 장안을 급습했고, 그 공격 자체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는 민제 정권하의 서진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도 힘이 부족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주(涼州; 지금의 간쑤 성 중부, 서부 지역) 태수인 장궤(張軌)가 약간의 군사를 파견하여 장안을 잠시 도왔다. 315년, 사마보는 민제를 돕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삭침 역시 황제가 사마보에게 이용을 당할까 우려되어 황제를 사마보에게 보내지 않았다.
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인 유요가 민제의 영토에 대규모 침공을 해왔으며, 북지(北地; 현재의 산시 성 퉁촨 지역)의 비밀기지가 함락되면서, 관중에 있었던 다른 도시들도 붕괴되었다. 구원군이 두 곳에서 도착했지만, 유요군과 맞서기를 주저했다. 결국 유요는 장안을 포위할 수 있었고, 장안의 식량이 바닥날 즈음, 민제는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 민제는 이후 유요에 의해 전조의 수도인 평양(平陽; 산시 성 린펀 지역)으로 압송되었다.
전조에서의 생활과 죽음
당시 전조의 군주였던 유총은 사마업을 회평후(懷平侯)에 봉했다. 318년 초, 연회에서 유총이 사마업에게 하인 노릇을 시키는 등 굴욕을 주었다. 당시 전조에 대한 여러 봉기가 있었는데, 황태자 유찬을 대신해 진 황제를 다시 옹립하려는 목적이었으므로, 유찬은 사마업의 처형을 건의하였고 유총은 이를 받아들여 사마업을 처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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