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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7 (삼국시대: 위나라 주요 인물) 본문
중국의 역사 27 (삼국시대 : 위나라 주요 인물)
하후돈(夏侯惇, ? ~ 220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으로, 자는 원양(元讓)이다. 조조의 거병에 참여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 도중 한쪽 눈에 화살이 박히자, 그 화살을 뽑아 눈알을 삼켰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초한지에 등장하는 유방의 부하 하후영의 후손이다.
생애
패국 초현에서 태어났으며 전한 명장 하후영의 후예로, 조조의 아버지 조숭의 조카, 즉 조조의 사촌형제라는 설이 있다. (조숭의 집안은 본래 하후씨로 환관인 조등의 양자가 되었다.)
등용
14살 때 자신의 스승을 모욕한 사람을 때려 죽이는 등 성품이 격렬한 사람으로 단번에 유명해졌다. 190년 조조가 행분무장군이 되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진류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 동생인 하후연과 함께 동참하여 조조를 따랐고, 194년(흥평 원년)에 조조가 서주로 원정을 떠난 틈에 여포가 연주를 빼앗았을 때도 순욱, 정욱과 함께 견성에 있던 조조의 가족을 지키며 연주의 거점을 사수했다.
청주병
조조가 청주 황건적 토벌 당시 생포된 황건적을 훈련시켜 청주병이라는 유명한 외인부대를 만들고 이를 하후돈에게 지휘하게 했는데, 하후돈은 동생 하후연과 조조의 동생 조인보다 리더십이 좀 떨어져 청주병 관리를 소홀히 했다. 이 때문에 청주병들이 민간인을 약탈, 우금이 이를 엄히 처벌하여 청주병들은 하후돈에게 거짓말을 하고 우금과 하후돈은 서로 싸워 결국 다 이긴 싸움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하후돈은 청주병을 통솔하는 계율이 어지럽다 하여 조조에게 크게 꾸중들었다.
맹하후
198년(건안 3년)에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오자 하후돈도 여포 토벌에 나섰는데, 교전 중에 적장 조성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잃고 만다. 왼쪽 눈에 화살이 꽂힌 하후돈은 화살과 함께 눈알을 빼낸 뒤 ‘이 눈은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니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눈을 집어삼키고, 적장 조성을 향해 돌진해 그를 죽였다고 한다. 이 때 조조 진영에는 하후돈과 하후연 두 장군이 있었는데, 군사들은 이 때부터 하후돈을 ‘盲夏侯’로 불렀다. 그런데 본인은 이것을 싫어해서 거울을 볼 때마다 화를 내며 땅에 거울을 내던졌다고 한다. 후손들에게 애꾸 장수로 유명해진 건 물론이다.
그 뒤
여포군을 격파한 후 조조 암살 계획에 가담한 유비를 격파하고, 하비의 관우를 공격하는 데 선봉을 섰다. 마침내 관우가 유비의 소재를 알고 유비에게 돌아가려고 다섯 관문의 장수를 물리쳤으므로, 그를 추격하려고 나서지만 장료가 설득하여 겨우 마음을 돌렸다.
조조의 하북 평정 때에는 후방 부대를 맡고, 업 함락 후에는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법령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판단으로 행정을 관장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그 후에도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조조에게 깊은 신임을 받아, 조조와 같은 마차에 타고 침실까지 출입해도 된다고 허락받는다{훗날, 한중전(鷄肋)에서도 조조의 침실에 출입하여 전위의 호위를 칭찬하였다}.
관도 전투에서는 조조가 오소를 습격하고 있을 무렵 본진을 지키며 원소군을 격퇴시키지만, 후일 산야 공격에서는 박망파에서 제갈량에게 화공을 당해 완패했다. 그 후로는 적벽 전투에서 패배하고, 양양을 수비할 때 자군의 병부로 잘못 알고 제갈량에게 성을 내주게 된다. 또한 관로로부터 ‘오는 봄 허도에서 화재가 일어난다’는 예언을 들은 조조가 하후돈에게 순찰을 돌도록 명령하고, 방화를 사전에 방지하여 경기, 위황의 반란을 진압했다.
사망
220년(건안 25년) 정월에 조조가 죽은 뒤 후계자 조비가 위왕이 되자, 하후돈은 최고위 장군인 대장군(大將軍)이 되었지만 몇개월 후 위무황제의 뒤를 따르듯 병사했다.
하후연(夏侯淵, ? ~ 219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의 무장으로, 자는 묘재(妙才)이다. 무예가 뛰어나 전장에서 위용을 떨쳐 조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하후연의 아내는 조조의 친척이라고 한다.
패국 초현 출신으로, 하후돈의 사촌동생이다. 조조가 고향에 있을 무렵, 현령을 어긴 사건을 일으키는데 하후연이 대신해 벌을 받고 나중에 조조에게 구출된다. 조조를 따라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장안으로 천도하는 동탁을 추격해 이각의 군사와 싸우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만다. 그리고 패주하는 조조와 조홍을 습격하려는 서영의 군대를 맞아 함께 막아낸다.
그후 조조가 거병하자 하후연은 별부사마(別部司馬)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관도 전투에서 원소를 격파한 후 연주, 예주, 서주의 군량미를 관리하며 식량이 부족했던 조조군에게 차질 없이 양곡을 수송하여 조조군의 세력을 회복시켰다.
또한 창희의 모반과 황건적 서화, 사마구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공을 세워 209년(건안 14년) 행령군(行領軍)으로 승진했다. 기습공격이 장기였던 하후연은 언제나 적이 예상치 못했을 때 공격했기 때문에 ‘하후연은 사흘에 5백 리, 엿새에 1천 리를 간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손권 정벌에서 돌아온 후, 조조는 하후연에게 여러 장수를 지휘하도록 했다. 태원군의 도적을 토벌할 때는 서황을 지휘해 두목 상요를 죽이고, 212년 장안에 주둔해 남산의 도적을 토벌할 때에는 주령과 노소 등을 지휘하여 적을 항복시켰다. 또한 한수와 마초의 잔당 양흥을 토벌해 박창정후에 봉해진다. 후일 봉기한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러 갔지만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마초에게 패했기 때문에 퇴각하고 만다. 적벽 전투에서는 하얀 깃발의 우군을 이끌었으며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하였다.
214년 조구와 윤봉 등이 마초를 살해하려고 모의하고,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했고, 조구 등은 마초를 속여 강서 공격에 나서게 만든 후, 마초의 처자를 살해하고 그를 한중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마초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기산을 포위하고, 하후연은 강서 등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때 여러 장수가 조조의 지시를 기다리려고 했지만 하후연은 조조의 재가를 받았을 때는 이미 늦는다며, 출진하여 마초를 격파한다. 그 기세로 많은 강족을 토벌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이러한 공로로 가절(假節)에 임명되었고, 216년에 영읍이 합계 8백 호에 이르게 된다.
장안으로 귀환한 후 하후연이 하변에 있던 무도군의 강족을 공격해 곡물 10만 석을 몰수하자, 조조는 이후 강족을 만날 때는 언제나 하후연을 위협 수단으로 삼게 된다. 장로가 항복하고 한중이 평정되자 한중의 수비를 맡고, 도성으로 돌아간 조조는 그를 정서장군으로 임명했다. 218년 유비가 양평관에 포진하자 여러 장수를 이끌고 이를 저지하며 서로 대치하였다. 다음해 정월 유비는 하후연의 진지를 밤에 습격해 불을 질렀다. 동쪽 수비를 장합에게 맡기고, 자신은 남쪽 수비에 나섰는데 장합이 패배했으므로 자기 병사를 반으로 나누어 그를 구원하러 보냈다. 그래서 유비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정군산에서 황충에게 패해 죽었다고도 한다.
순욱(荀彧, 163년~212년)은 중국 후한말기 조조를 섬겼던 정치가이자 군사이다. 자(字)는 문약(文若)이다. 시호는 경(敬). 당시 조조의 최고 책사로 조조의 곁에서 수많은 헌책을 내서 조조의 패업의 기초를 만들었다. 형제로는 형 순연(荀衍), 동생 순심(荀諶)이 있고, 자식으로는 순운(荀惲), 7촌 조카로는 순유(荀攸)가 있었다.
생애
영천군(潁川郡) 영음(穎陰;현재 하남성 허창)사람으로 조부 순숙(荀淑)은 순자 11세손 이라고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고,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양기(梁冀)일족을 비판하여 매우 명성이 높아져 [신군](神君)이라 불렸다. 순숙이 죽은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의 사당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순곤(荀緄)은 상서(尙書)에서 제남상(濟南相)이 되었다. 또 숙부 순상(荀爽)은 동탁의 곁에서 사공(司空)이 되었다.
순욱 자신도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며, 위장부(偉丈夫)이기도 하여, 젊을 적부터 하옹으로부터 [왕좌의 재주를 가졌다]라고 칭찬받았다. 왕을 보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는 의미로 예를 들어, 관중의 경우, 주군을 섬기면서 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하옹은 젊을적 조조의 재능을 간파해, 후에 순유와 함께 동탁 암살계획을 계획한 인물이다.
순욱이 4살때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당형(唐衡)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었다. 청류파(清流派) 명사였던 순씨의 자제가 환관일족과 맺어지는것에 대해 비판을 받지만, 당시 4살의 순욱이 혼인을 받아들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당형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인다.
189년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제위에 올리던 때, 효렴에 추천되어 수궁령(守宮令)이 되었으나, 반동탁 연합이 결성되던 시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기주목(冀州牧) 한복의 초빙을 받아 기주로 피난했다.
그런데, 순욱이 기주에 도착할때쯤 기주는 원소(袁紹)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원소는 순욱을 크게 예우하였으나, 순욱은 원소가 대업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뿌리치고, 조조에게로 왔다. 순욱을 맞이한 조조는 [나의 자방(子房)이 왔구나!]라고 크게 기뻐했다. 실제 관료의 추천으로 곽가, 사마랑등 인재발굴에서 힘을 발휘했다.
그후 조조의 곁에서 정치와 전략 양쪽을 넘나들며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194년 조조는 서주의 도겸을 공격할때, 순욱은 정욱과 더불어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兗州)의 수비를 담당하였으나,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키자, 연주는 대부분이 여포의 손에 넘어갔다. 순욱이 지키는 성에 [여포가 조조의 원군으로 왔으니 성문을 열어라]라는 사자가 왔는데, 순욱은 이미 모반을 간파하고, 하후돈에게 사자를 보내 합류하고 조조진영에 남겨진 3개의 성을 조조의 귀환때까지 사수했다. 만약 이때 이 3개의 성도 빼앗겼다면 조조군은 완전히 의지할곳 없는 군대가 되어 얼마안가 사라져 버려 역사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귀환한 조조는 근거지를 빼앗기지 않은것에 감사하고 서주를 다시 공격하려고 했으나, 순욱은 [고조 광무제께서 천하를 얻은 것은 자신의 근거지였던 관중, 하내를 확실하게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즉 주공의 근거지인 연주를 확실하게 다스리는것이 먼저입니다]라고 조언하였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여포와 대결하여 그를 격파하고 연주를 평정하였다.
196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순욱은 조조에게 헌제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하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헌제를 허창(許昌)으로 맞이하였다. 이 공적으로 인해 조조는 대장군이 되었고, 순욱은 시중(侍中), 상서령[8](尚書令)이 되었다. 헌제를 맞이한 것으로 인해 조조는 도의적으로 크나큰 방패를 얻어 이후 정치와 전략 양쪽에서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조조는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200년 관도 전투에 이르러, 공융이 원소군의 강력함을 이야기하자 순욱은 원소군에 있었던 경험에서 그들의 약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실제 관도 전투에서 순욱이 이야기한 대로 진행되었다. 순욱은 관도 전투에서 본거지의 수비를 맡았는데, 조조가 전쟁도중 약세라고 느껴, 돌아가는것이 어떻겠냐고 그에게 문의할때가 있었다. 순욱은 이것에 반대하고 조조를 격려했다. 또 조조가 원소에게 일단 승리한 후에 원소와의 결전은 중지하고 남쪽의 유표와 싸우려고 하자, 순욱은 "원소가 남은 무리를 수습하고 빈틈을 이용한다면 공은 성공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이 진언에 따라 조조는 황하를 두고 원소와의 대치를 계속했고, 원소가 죽은 뒤 원소의 세력이 내분에 빠지자 이 틈을 공격하여 하북의 대부분을 세력권에 넣을 수 있었다.
203년 이때까지의 공적으로 만세정후(萬歳亭侯)에 봉해지고, 그후에도 봉록이 증가했다. 이때부터 조조는 서서히 찬탈의사를 비추기 시작했고, 위공(魏公)의 지위를 욕심내어 구석(九錫)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졌던 순욱은 이에 맹렬히 반대하였고, 그 일로 조조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212년 조조의 손권정벌에 따라 함께 출정하여 시중(侍中)ㆍ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고, 그 후 조조와의 우려속에 진중에서 병이 나 서거했다. 항년 50세였다. 그의 죽음에는 의혹이 많아 자살했다는 말도 있다. 어떤 식으로라도 그의 죽음의 배경에 조조와의 불화가 있었다는것은 확인할 수 있다. 일설에는 조조가 순욱에게 빈 그릇을 보냈는데, 조조의 뜻을 간파한 순욱이 독주를 마시고 자살했다는 일화도 있다. (빈 그릇은 당신과 나는 빈 그릇처럼 단지 겉으로만 예의를 차릴 뿐이라는뜻.)순욱이 죽은 다음해 조조는 위공이 되었다.
장남 순휘가 조조의 3남인 조식과 친하여 조비가 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친교를 끊지않고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에 조비가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비의 누이 안양공주가 순휘의 아내가 된 일도 있어, 조비는 역시 순씨를 특별히 총애했다고 [위지] 순욱전에서 적혀 있다.
평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그와 연장자인 조카 순유, 그리고 모사 가후, 이 3사람을 같은 권에 넣었다.(삼국지 위서 10권). 진수의 순욱에 대한 평가는 순욱은 청아한 풍모와 왕좌의 풍격, 그리고 선견지명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뜻을 달성하는 것에는 뛰어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국지에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당시 난세를 평화로 이끌었던 조조에게 협력한 것밖에는 없었다. 이일로 인해 한나라는 살아나지 못했지만, 백성들은 구할 수 있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배송지는 가후를 싫어하여 순욱이란 인물을 가후등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또 범엽은 순욱을 후한왕조에게 순사한 충신으로 평가하여 삼국지에 전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후한서 순욱전을 집필하였다.
가후(賈詡, 147년 ~ 223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모신(謨臣)이다. 자는 문화(文和)이다.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출신이다. 권모술수와 정치에 능하였고, 특히 장수의 모사로 있을 때는 조조를 수차례 패배시키고 죽음의 궁지까지 몰아넣기도 하였다. 후에 주군인 장수와 함께 조조에게 귀순하고 조조의 휘하에서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이간계를 써서 한수와 마초를 격파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조비를 도와 즉위시켰으며 후일 관직은 태위(太尉)까지 올랐으며 천수를 누렸다.
생애
정사 《삼국지》에서는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책사로, 많은 인물을 섬겼으나 가는 곳마다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고, 다만 염충이라는 인물만 “장량과 진평(모두 한 고조의 모신)과 같은 기략이 있다.”라고 평가한다. 처음에는 효렴으로 추천되어 조정 관직에 취임했으나,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저족 반란군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때 자신을 그 지방에서 권위가 있는 장군의 친척이라고 속이자, 이에 겁을 먹은 반란군이 석방해주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탁이 장안에서 권세를 장악하고 있을 무렵, 동탁의 부하이자 사위인 우보의 참모였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되자 동탁의 부하 이각, 곽사, 장제 등이 동요하여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으나, 가후는 그들을 설득하고 단결시켜 장안을 습격하고 여포를 추방했다. 이 때문에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로부터 다시 화를 초래한 자로 미움을 사서 여러 군데에서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가후는 이 공적으로 높은 관직에 취임하려 하지 않고, 관리 선발 임무를 맡아 많은 유명인을 등용하여 조정의 정치체제 개선에 애썼다. 하지만 이것이 도리어 이각 등에게는 거북한 상대로 여겨져 동향 출신인 단외 밑에 몸을 의지하는데, 단외가 자신을 두려워하자 그의 곁을 떠나 장수 밑으로 들어간다. 이때 가족은 단외가 있는 곳에 남아 있었는데, 가후는 “단외는 나를 경계하고 있으니 내가 떠나면 즐거워할 것이며, 밖에서 강력한 지원자와 결합할 것을 기대하고 가족을 후하게 대우해줄 것이다” 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대로였다.
이 무렵 장수는 조조와 항전하고 있었는데, 가후의 의견을 듣지 않았을 때는 패배하고, 가후의 계략을 이용했을 때는 승리했다. 조조의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였는데, 조조는 이 전투에서 맏아들 조앙을 잃게 된다. 그 후 조조가 거짓으로 성곽 서북쪽을 공격해 세력이 약해진 동남쪽을 공격하려 하자, 가후는 역으로 복병을 놓아 조조를 유인하려 체포하려고 하는 등 허허실실 전략을 구사했다.
나중에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할 때 두 사람은 장수와 가후를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각각 사람을 보내왔다. 이때 가후는 “원소는 형제 원술조차 신뢰하지 않고, 세력도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를 가벼이 보고 중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조는 천자(天子)를 받들고 있고, 세력이 열세이므로 자기 편이 늘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개인적인 원한 등은 문제 삼지 않고 우리들을 중용할 것이 틀림없다.” 라고 장수에게 진언해 조조에게 붙을 것을 권한다. 조조는 그들의 귀순을 기뻐하고, 가후의 손을 잡고 “나에게 천하 사람들의 신뢰를 가져다준 사람이 바로 그대다” 라고 말하며 그를 집금오에 임명했다.
조조를 받들게 된 가후는 수많은 책략을 내놓았다. 관도 전투에서는 결전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조조에게 결단을 촉구하여 승리로 이끌고, 서량에서 마초와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그들에게 이간책을 쓰기 위해 일부러 군데군데 글자를 지워버린 편지를 한수에게 보내, 마초를 의심하게 하여 사이를 벌려놓고, 통제가 안되는 곳을 습격해 토벌에 성공한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 관해서도 조비와 조식 사이에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조비는 자기 입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가후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구했다. 가후는 누구를 대하든 겸허하게 행동하고, 태자로서 성실히 임할 것을 조언했다. 또한 조조도 은밀히 상담했는데, 가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원소와 유표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여, 맏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사례를 들어 태자의 지위를 확정시켰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에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 조용히 생활하고, 사적인 교제를 절대 하지 않고, 자녀들의 결혼 상대도 명문 집안 출신을 고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비가 문제로 즉위하자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이후 천수를 다하고 77살에 사망했으며, 숙후(肅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평가
주자학이 흥성하기 전에는 “한 번도 실패한 계책을 내지 않았다.”라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주자학이 성립한 뒤로는 그가 여러 차례 주군을 바꾼 행위 등을 거론하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곽가(郭嘉, 170년 - 207년)의 자는 봉효(奉孝)다. 영천(潁川) 양척(陽戚) 출신. 위나라(魏)의 모사. 조조(曹操)가 가장 아끼던 일급참모로 관직은 군제주(軍祭酒)였으며 시호는 정후(貞侯)였다. 곽혁(郭奕)의 아버지이자 곽심(郭深), 곽상(郭敞)의 조부이며, 곽엽(郭猟)의 고조부이다.
생애
곽가는 어릴적부터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에 뛰어났다고 한다. 20살이 되자, 이름과 경력을 숨기고, 천하의 영걸들과 교제를 맺고 속세에서는 떨어진 생활을 보냈다. 곽가는 원소(袁紹)를 만났으나, 원소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여겨 그를 떠났다. 그후 순욱(荀彧)이 조조에게 희지재(戯志才)의 후임자로 곽가를 추천했다. 곽가는 조조를 만나 서로 천하에 대한 일에 의견을 나누었다.
조조는 "나의 대업을 이룰자는 이 사람밖에는 없다"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한편 곽가도 물러나면서 "진정 나의 주군이다"라고 말하며 기뻐했다. 이때부터 조조의 군사(軍師;관직은 군제주)로써 섬기면서 수차례 조언을 하였다.
조조가 원소를 공격하려던 시기 곽가와 상담을 했다. 그때 곽가는 조조에게 "주공에게는 10가지 승리의 요인이 있으며, 원소에게는 10가지 패배의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道), 의(義), 치(治), 도(度), 모(謀), 덕(徳), 인(仁), 명(明), 문(文), 무(武)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원소의 북진에 앞서 여포(呂布)를 격파하라고 진언하였다.
여포 토벌에서는 순유(荀攸)와 더불어 퇴각하려던 조조에게 추격을 진언하여 여포를 붙잡았다. 조조가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대치할 때 손책(孫策)이 허도(許都;조조의 본거지)를 급습하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으나, 곽가는 손책이 필부에 의해 암살당할 것이라 예측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손책은 허공의 식객들에게 암살당한다.
원소 사후 조조는 여양에서 원소의 후계자 원상(袁尙)과 싸운다. 조조는 수개월 간의 싸움 끝에 원상군을 밀어냈으나, 거듭 진군하다가 원상의 역공을 받아 패하기에 이른다. 계속 공격해 원상을 무너뜨리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곽가는 원상의 승계에 불만을 가진 원담(袁譚)과 원상의 대립을 기대하고 변화를 엿보아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 진언했다. 결과적으로 원담은 원상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조조에게 항복해 오게 되었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원상을 무너뜨리고 기주를 평정했다.
이후, 세력을 잃은 원상은 오환(烏丸)으로 망명했으며 오환의 지원을 받아 재기를 노리며 국경지역을 거듭 침공하며 반란을 사주해 조조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더 이상 피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조조가 오환의 원정을 논의했을 때 대부분의 신하들은 원상은 망명한 포로에 불과하니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단지 유표(劉表)만은 유비(劉備)를 이용해 허도를 습격할 것이니 이를 염려하며 유표를 먼저 쳐야 한다고 말했으나 곽가는 유표는 의심이 많아 유비를 중용하지 않을 것이니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살아생전 신망이 원소의 후계자 원상이 다시 한번 옛 원소의 구신들에게 내응을 사주하며 오환족과 함께 대대적인 침공을 결행했을 경우 유주는 물론 청주와 기주도 원상이 되찾게 될 것이라 유세했다. 결과적으로 조조가 오환을 공격하는 동안 유표는 이 움직이지 않는다.
조조는 원정에 나서, 역현(易縣)에 도달하자 곽가가 한가지 계책을 진언했다.
[병사는 신속(神速)을 요구합니다. 지금 천리밖에 있는 적을 습격하려는데, 치중(輜重)이 많아 유리한 지역에 빨리 도착하는것이 어렵습니다. 거기에 그들이 이것을 듣게된다면 필히 방비를 튼튼하여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지금 바로 치중을 남기고, 경기병을 야간행군을 시켜, 그들의 의표를 찔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조는 그의 계책을 채용하여 오환을 격파하여 무찔렀고, 원상등은 요동까지 도망치게 되었다. 곽가는 사물을 주의깊게 살피는 데 뛰어나, 적절한 혜안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조에게서 "봉효만이 나의 참뜻을 이해하고 있다"라고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오환 정벌이 끝나 유성(柳城)에서 귀환하던 도중 풍토병에 걸려 병을 치료하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조조는 곽가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고, 순유 및 다른 이들을 향해 말하였다.
"그대들은 모두 나와 동년배이다. 곽가만이 매우 젊었다. 천하가 태평한 시기가 오면 후사를 그에게 맡기려 했었는데…"라고 한탄하였다. 그러고는 헌제에게 상주하여 곽가의 식읍을 800호를 더해 모두 1,000호가 되게 하였다. 정후(貞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208년 적벽 대전에서 패배할 때 조조는 "봉효가 살아있었더라면...."이라고 말하여, 만약 곽가가 살아 있었다면 적벽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예전에 진군(陳羣)은 곽가가 품행을 다스리지 않는것에 대해 여러 번 탄핵하였다. 그러나 곽가는 개의치 않았고, 조조에게 여러 번 중용되었다. 조조는 곽가의 재능을 사랑하는 한편, 공정하며 인물감정에 뛰어났던 진군도 중용하였다. 조조의 인재를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담긴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 평가
삼국지연의에도 정사와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통찰력을 지닌 군사로써 묘사되었다. 조조를 섬기게된 경위에 대해서는 순욱이 정욱을 추천하였고, 정욱이 곽가를 추천하는 형식이었다. 곽가 자신도 유엽을 추천하였다. 또한 유비가 여포에게 패해 조조를 의지하려 할때, 주위에서 유비를 죽여 후환을 없애자고 했는데 곽가는 조조에게 유비를 받아들여 천하에 주공의 덕을 보여야 한다고 반대했다. 또한 요동으로 도망간 원상 형제의 최후를 예측한 것도 곽가의 공으로 되어 있다.
만총(滿寵, 170년? ~ 242년)은 중국 삼국시대의 위의 신료이다. 자는 백녕(伯寧)이다. 삼국 시대의 제후들 가운데 위를 건국한 조조의 휘하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한 모사이나 무관으로서의 능력도 있던 사람으로 알려진다.
생애
산양군(山陽郡) 창읍(昌邑) 출신으로 18세에 군의 독우에 임명되었다가 고평현령 대행을 맡았다. 192년 유엽(劉曄)의 천거로 조조에게 발탁되었다. 196년 양봉 휘하의 서황(徐晃)을 설득, 끌여들었고 조조가 헌제를 영접해서 허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허도령(許都令)에 임명되었다. 만총은 서황과는 죽마고우 사이이다. 조홍의 빈객이 죄를 범하자 투옥시켰다. 조홍이 사정하나 들어주지 않고 조홍이 조조에게 다시 사정하는 것을 알아챈 만총은 그를 죽여버렸다. 199년 여남태수에 임명되자 친 원소(袁紹)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였다. 208년 형주를 정벌하고 당양에 주둔했으나 손권(孫權)이 계속 국경을 침범해오자 여남태수에 임명되었다. 관우가 양양성(襄陽城)을 공격해오자 양양성 싸움에서 조인(曹仁)과 함께 물리쳐 칭찬을 받았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을 선포하자 공격하려는 조조를 설득시켜 사마의의 의견을 따르도록 권하고 조인의 참모가 되어 번성에 임한다. 관우의 공격에 조인이 도망가려하자 조인을 설득하여 끝까지 번성을 지키게 하여 성공했다. 조비가 조조의 뒤를 이은 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한 후 전장군(前將軍)에 임명되었었고 220년 오(吳)를 격파하고 신야에 주둔했으며 228년에는 예주 자사를 겸했다. 230년 오의 손포가 항복한다는 서신을 들고오자 거짓을 밝혀내고 그의 기습을 방어하였다. 234년 합비로 쳐들어온 제갈근을 기습해 성공을 거두고 신성에서 손권군의 공격을 방어했다. 242년 사망했다. 벼슬은 태위(太尉), 시호는 경후(景候)에 추증되었다. (* '말(言)의 만총'이란 말이 있었다)
사마사(司馬師, 208년 ~ 255년)는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의 대신이다. 자는 자원(子元)이며 위 상국 사마의(司馬懿)의 장남이자 진왕 사마소의 형이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경황제(景皇帝)이다.
생애
약관의 나이때부터 같은 세대 인물이자 처남인 하후 현과 더불어 이름을 날렸다. 사마사가 젊은 시절부터 아우 사마소와 함께 아버지 사마의를 따라 행군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촉의 제갈량의 북벌과 요동 서부의 패자였던 공손씨 연나라의 군주 공손연과의 대전에서도 활약하였다고『삼국지연의』에서는 기술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249년, 아버지 사마의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장군 조상을 제거하려 하자 아버지를 따라 출병, 조상과 그 일족을 제거하였다. 이른바 고평릉의 쿠데타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씨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51년에 사마의가 죽자, 사마사는 당시 황제인 조방에게 대장군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후 아버지보다도 더 많은 권세를 누렸고 그 권력은 황제를 이미 뛰어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방이 이풍, 장즙, 하후현 등과 사마사 제거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자 사마사는 조방을 제왕으로 강등, 폐위시키고 고귀향공 조모를 모셔와 새 황제에 앉혔다.
255년에 관구검(毋丘儉)이 문흠 등과 더불어 황제 폐위에 대한 죄를 묻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사마사는 직접 출병하였다가 자신의 왼쪽 눈에 큰 통증이 생겼고 문흠을 추격하기 위해 파견한 자신의 군대를 문흠의 아들인 문앙 혼자서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파하자 눈 위의 혹이 악화되어 얼마 뒤 진중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훗날 조카 사마염이 황제에 오르자 세종 경황제에 추증되었다.
사마소(司馬昭, 211년-265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대신 사마의의 둘째 아들로 자는 자상(子尙)또는 자상(子上)이며, 진 무제 사마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다.
생애
형 사마사가 죽자 전권을 장악했으며, 이 과정에서 전부터 사마소가 가충을 보내 조모의 죽임을 벼르고 있던 차에, 더욱 큰 위협을 느낀 당시 위의 천자 조모는 사병 300명을 풀어 사마소를 죽일 계책을 펼친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사마소는 조모의 계략을 무마시키고 이를 빌미로 그를 폐위시켰다. 그 후 조환을 앞세워 위의 천자로 옹립하므로서 사실상 사마소는 위의 모든 전권을 잡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전권을 토대로 자신 스스로를 진왕(晋王)에 봉한다. 그 후 대륙의 통일을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 이 때 강유에게 의지하며,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는 촉나라가 환관 황호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자, 곧바로 그는 당대 위의 노장 등애와 젊은 장수 종회에게 명해 촉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결국 등애가 촉의 험난한 산세를 타넘어, 정면길을 택했던 종회보다 더 빠른 시간에 촉나라를 항복시키며 그가 내린 토벌령을 수행하게된다. 이후 그는 결국 잡혀온 촉의 후주 유선의 마음과 인물됨을 시험하기 위해 술자리를 강요하여 자리를 갖게되는데 그를 시험키위해 면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 |
자상 : 당신은 촉의 황제요. 촉을 세운 유비의 아들이니라, 그런데 촉이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슬프지 아니합니까? 후주 : 즐기느라 촉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樂不思蜀) 자상 : (웃으며)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로 촉이 그립지 않습니까? 후주 : (그제서야 장소의 간언을 들으며) 그립습니다. 선주의 무덤이 있는 서쪽만 봐도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자상 : (신하의 간언을 듣고 말한 후주를 눈치채고) 누가 이야기 해주었소? 후주 : 신하가 얘기 해주었습니다. |
” |
이를 들은 사마소는 후주 유선을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건들지 아니하고, 그를 안락공에 명하며 편히 쉬게 해준다. 후에 후계자로 형에게 입양시킨 아들 사마유를 자신을 이을 정권자로 지명하려고 했으나 가충의 반대로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되는데,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할 땐 벌써 중풍을 맞고 쓰러져 겨우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에 사마소는 얼마 가지못해 죽게된다.
사마의(司馬懿, Sīmǎ Yì, 179년~251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이며, 그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자는 중달(仲達)이며,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선황제(宣皇帝)이다.
위나라·촉나라·오나라로 중국이 솥발처럼 나누어진 삼국 시대에, 사마의는 위나라의 군대를 이끌어 그의 최대의 라이벌인 제갈량(諸葛亮)과의 치열한 지략싸움 끝에 결국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냈다. 위 명제 조예가 죽은 이후 대장군 조상(曹爽)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승상(丞相)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그의 손아귀에 넣었다. 위나라 조정 내의 사마(司馬) 가문의 영향력이 지대해졌고 이것이 이후 진나라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그는 상국(相國)이 되었고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해졌다. 사후 그의 손자인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했을 때 선제(宣帝)로 추증되었다.
후한이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개막됐던 삼국지의 무대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천하통일을 위해 수많은 피를 뿌렸으나 결국 천하는 사마의를 통해 등장한 사마씨(司馬氏)의 품으로 돌아갔다.
생애
사마의는 하내(河內)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그 선조는 고양제(전욱 고양씨)의 자손인 중려(重黎)로부터 나왔다. 아버지는 경조윤을 지낸 사마방(司馬防)으로, 사마의는 그의 둘째 아들이다. 형은 사마랑(司馬朗)이며, 셋째 아우는 사마부(司馬孚)이다. 사마의는 유년기 때부터 총명하여 대략(大略)을 지녔고, 식견이 넓었고 유학의 가르침을 가슴깊이 간직했다(伏膺儒教)고 한다. 후한 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늘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최염(崔琰)은 사마랑에게 말하길, “당신의 동생(사마의)은 총명·성실하고 결단력 있고 영특하니 그대보다 낫다”고 했다.
201년에 사마의는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되었다. 조조가 사공이었을 때 사마의를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조조가 승상이 되었을 때 사마의를 다시 불렀는데 거절한다면 가두겠다는 엄포를 놓았고 사마의는 이를 두려워해 문학연에 취임했다. 조조의 아들 조비와 교제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郎), 의랑(議郎), 승상 동조속(丞相 東曹屬), 그 뒤에는 주부(主簿)로 전임했다.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 속에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리 신임하지 않았다. 조조는 사마의가 낭고상(狼顧相)이란 소문을 듣고 사마의를 오게 하여 고개를 돌려보게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얼굴이 똑바로 뒤를 향했다. 또 조조는 세 마리의 말이 한 구유(槽:조씨의 曹와 음이 같다)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어 이를 매우 언짢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세 말은 훗날 위나라를 멸망의 길로 들게 하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조는 조비에게 “사마의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항상 경계할 것을 충고했다. 조비는 사마의와 평시 도움을 주고 받았었는데 조조의 말을 듣고 이 때문에 그를 멀리하였다. 사마의는 조조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하급 관리의 직무를 밤을 새며 보고 가축을 기르는 하찮은 일까지도 기꺼이 함으로써 조조를 안심시켰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토벌했을 때 사마의는 유비가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익주를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결국 익주의 민심을 달래고 군을 정비한 유비가 한중과 동천(東川) 일대를 점령하여 조조에게 큰 우환을 안겨다주었다. 우금과 방덕 등이 관우에게 대패하고 관우의 기세가 중원에까지 뻗치자, 조조는 하북으로의 천도를 검토했다. 이 때 사마의는 “천도한다면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니 인근의 백성들이 크게 불안해 할 것입니다. 손권과 유비는 겉으론 친밀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손권을 달래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면 번성의 포위는 자연히 풀릴 것입니다”라고 건의했고 조조는 이를 따랐다. 결국 손권은 여몽으로 하여금 형주를 쳤고 결국 관우의 목을 베었다.
조비가 후한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위나라의 황제가 되었을 때,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 224년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가절(假節)로 전임되어 급사중(給事中)과 녹상서사(錄尚書事)의 벼슬이 더해졌다. 조비의 사마의에 대한 신뢰는 매우 두터웠는데 사마의에게 이르길, “짐이 동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서쪽을 맡고, 짐이 서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동쪽을 맡으시오”라고 했다. 조비가 죽을 때 사마의, 조진(曹眞), 진군(陳群) 등을 불렀고 황태자 조예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길, “이 세 명의 신하와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조예가 황제에 올랐으나
조예는 사마의를 신임하지 않았다. 당시 사마의는 옹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아챈 촉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은 참군 마속(馬謖)의 의견을 받아들여 거짓 방을 장안과 낙양에 뿌렸고 이것을 본 조예는 대노하여 사마의의 군영으로 가서 사마의를 파면, 낙향시켜 버린다.
하지만, 맹달의 모반으로 사마의는 다시 돌아오게 된다.
230년, 사마의는 태위에 임명되고 대도독, 가황월의 벼슬이 더해졌다. 그 해에 조진과 더불어 촉한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했다. 231년 제갈량이 천수를 공격했을 때 사마의는 조예의 명을 받아 장안에 주둔해 옹주와 양주의 군사를 총괄했다. 이후 역사상 유명한 제갈량과의 대결을 벌인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장장 7년 동안 6차례에 걸쳐 행해지는데, 1차 북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마의가 나섰고 총지휘한 것은 2번이다. 첫 대결은 231년으로, 조진이 죽은 뒤 촉군의 약점이 식량 보급에 있음을 간파한 사마의가 지구책을 쓰고 그 전략이 효과를 발휘해 촉한군이 퇴각하자 뒤를 쫓다가 장합이 전사한다.
두번째 대결은 234년, 제갈량은 장기전을 예상해 3년에 걸쳐 준비하는데, 오장원으로 출진한 제갈량에 대해 사마의는 또다시 지구전을 펼쳤다. 제갈량은 부인용 머리 장식과 여러 장신구들을 사마의에게 보내며 비웃었지만 사마의는 도발임을 눈치채고 편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지고 온 사자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다. 이때 사마의는 수시로 촉한군의 진영을 염탐해 제갈량이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안 사마의가 즉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제갈량의 목상을 보고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하고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
촉한군이 퇴각한 뒤 진영을 살펴본 사마의는 제갈량을 ‘천하의 귀재’라고 평가했다.
후일 사마의는 그 아들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성공, 위나라의 조씨 정권을 탈취하여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 손자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국호를 진으로 고쳤다
서서(徐庶, ? ~ 234년[1])는 중국 후한 말 ~ 위(魏)의 정치가로, 자는 원직(元直)이며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 사람이다. 본래 이름은 서복(徐福)이었다.
생애
이름 | 서서(徐庶) |
---|---|
시대 | 후한 ~ 삼국 시대 |
생몰 | ? ~ 청룡 2년(234년)[1] |
자 | 원직(元直) |
본관 · 출신 | 예주 영천군 |
관직 | 우중랑장(右中郞將) · 어사중승(御史中丞)〔위〕 |
작위 | |
소속 | 유비 → 조조 → 조비 → 조예 |
그의 집안은 한미한 가문(單家)이었다.
격검(擊檢)의 명수였으며, 의협심이 강하여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다가 관원에게 붙잡혔다.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났고, 이후 칼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이때 동향인 석도(石韜)와 교제하였다.
중평(中平) 연간에 전란을 피하여 석도와 함께 형주(荊州)로 갔고, 사마휘(司馬徽)의 밑에서 학문을 익혔다. 이때 제갈량(諸葛亮) · 맹건(孟建)과 교제하였다.
서서 · 맹건 · 석도는 학문을 깊이 이해하려 하였으나, 제갈량은 요점을 익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서서 · 맹건 · 석도는 임관하면 자사(刺史)나 태수(太守) 정도는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나, 자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때 즈음에 유비(劉備)는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는 유비를 만났고, 유비는 그를 유능한 자라고 생각하였다. 서서는 제갈량을 천거하였고, 유비가 자신이 제갈량을 데려오도록 하자 "저는 그를 만날 수는 있지만, 데려오지는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고사하였다. 이로써 유비가 직접 가 제갈량을 데려왔다.
이후 유비는 조조(曹操)에게 패하였고, 이때 서서의 모친이 조조군의 포로가 되었다. 서서는 유비에 작별 인사를 하고 조조에게 갔고, 위(魏) 건국 후에는 우중랑장(右中郞將) · 어사중승(御史中丞)까지 승진하였으며 석도는 태수와 전농교위(典農校尉)를 역임하였다. 맹건은 정동장군(征東將軍) · 양주자사(凉州刺史)에 임명되었다.
훗날 제갈량은 북벌(北伐)을 할 때, 서서와 석도의 관직을 듣고는 "위에는 인재가 얼마나 많기에 그들이 중용받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말하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청룡(靑龍) 2년(234년), 서서는 팽성(彭城)에서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서서는 어사중승 재임 시에도 서복이라 하였기 때문에, 말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순욱(荀彧, 163년~212년)은 중국 후한말기 조조를 섬겼던 정치가이자 군사이다. 자(字)는 문약(文若)이다. 시호는 경(敬). 당시 조조의 최고 책사로 조조의 곁에서 수많은 헌책을 내서 조조의 패업의 기초를 만들었다. 형제로는 형 순연(荀衍), 동생 순심(荀諶)이 있고, 자식으로는 순운(荀惲), 7촌 조카로는 순유(荀攸)가 있었다.
생애
영천군(潁川郡) 영음(穎陰;현재 하남성 허창)사람으로 조부 순숙(荀淑)은 순자 11세손 이라고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고,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양기(梁冀)일족을 비판하여 매우 명성이 높아져 [신군](神君)이라 불렸다. 순숙이 죽은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의 사당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순곤(荀緄)은 상서(尙書)에서 제남상(濟南相)이 되었다. 또 숙부 순상(荀爽)은 동탁의 곁에서 사공(司空)이 되었다.
순욱 자신도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며, 위장부(偉丈夫)이기도 하여, 젊을 적부터 하옹으로부터 [왕좌의 재주를 가졌다]라고 칭찬받았다. 왕을 보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는 의미로 예를 들어, 관중의 경우, 주군을 섬기면서 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하옹은 젊을적 조조의 재능을 간파해, 후에 순유와 함께 동탁 암살계획을 계획한 인물이다.
순욱이 4살때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당형(唐衡)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었다. 청류파(清流派) 명사였던 순씨의 자제가 환관일족과 맺어지는것에 대해 비판을 받지만, 당시 4살의 순욱이 혼인을 받아들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당형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보인다.
189년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제위에 올리던 때, 효렴에 추천되어 수궁령(守宮令)이 되었으나, 반동탁 연합이 결성되던 시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기주목(冀州牧) 한복의 초빙을 받아 기주로 피난했다.
그런데, 순욱이 기주에 도착할때쯤 기주는 원소(袁紹)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원소는 순욱을 크게 예우하였으나, 순욱은 원소가 대업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뿌리치고, 조조에게로 왔다. 순욱을 맞이한 조조는 [나의 자방(子房)이 왔구나!]라고 크게 기뻐했다. 실제 관료의 추천으로 곽가, 사마랑등 인재발굴에서 힘을 발휘했다.
그후 조조의 곁에서 정치와 전략 양쪽을 넘나들며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194년 조조는 서주의 도겸을 공격할때, 순욱은 정욱과 더불어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兗州)의 수비를 담당하였으나,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키자, 연주는 대부분이 여포의 손에 넘어갔다. 순욱이 지키는 성에 [여포가 조조의 원군으로 왔으니 성문을 열어라]라는 사자가 왔는데, 순욱은 이미 모반을 간파하고, 하후돈에게 사자를 보내 합류하고 조조진영에 남겨진 3개의 성을 조조의 귀환때까지 사수했다. 만약 이때 이 3개의 성도 빼앗겼다면 조조군은 완전히 의지할곳 없는 군대가 되어 얼마안가 사라져 버려 역사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귀환한 조조는 근거지를 빼앗기지 않은것에 감사하고 서주를 다시 공격하려고 했으나, 순욱은 [고조 광무제께서 천하를 얻은 것은 자신의 근거지였던 관중, 하내를 확실하게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즉 주공의 근거지인 연주를 확실하게 다스리는것이 먼저입니다]라고 조언하였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여포와 대결하여 그를 격파하고 연주를 평정하였다.
196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순욱은 조조에게 헌제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하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헌제를 허창(許昌)으로 맞이하였다. 이 공적으로 인해 조조는 대장군이 되었고, 순욱은 시중(侍中), 상서령[8](尚書令)이 되었다. 헌제를 맞이한 것으로 인해 조조는 도의적으로 크나큰 방패를 얻어 이후 정치와 전략 양쪽에서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조조는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200년 관도 전투에 이르러, 공융이 원소군의 강력함을 이야기하자 순욱은 원소군에 있었던 경험에서 그들의 약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실제 관도 전투에서 순욱이 이야기한 대로 진행되었다. 순욱은 관도 전투에서 본거지의 수비를 맡았는데, 조조가 전쟁도중 약세라고 느껴, 돌아가는것이 어떻겠냐고 그에게 문의할때가 있었다. 순욱은 이것에 반대하고 조조를 격려했다. 또 조조가 원소에게 일단 승리한 후에 원소와의 결전은 중지하고 남쪽의 유표와 싸우려고 하자, 순욱은 "원소가 남은 무리를 수습하고 빈틈을 이용한다면 공은 성공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이 진언에 따라 조조는 황하를 두고 원소와의 대치를 계속했고, 원소가 죽은 뒤 원소의 세력이 내분에 빠지자 이 틈을 공격하여 하북의 대부분을 세력권에 넣을 수 있었다.
203년 이때까지의 공적으로 만세정후(萬歳亭侯)에 봉해지고, 그후에도 봉록이 증가했다. 이때부터 조조는 서서히 찬탈의사를 비추기 시작했고, 위공(魏公)의 지위를 욕심내어 구석(九錫)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졌던 순욱은 이에 맹렬히 반대하였고, 그 일로 조조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212년 조조의 손권정벌에 따라 함께 출정하여 시중(侍中)ㆍ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고, 그 후 조조와의 우려속에 진중에서 병이 나 서거했다. 항년 50세였다. 그의 죽음에는 의혹이 많아 자살했다는 말도 있다. 어떤 식으로라도 그의 죽음의 배경에 조조와의 불화가 있었다는것은 확인할 수 있다. 일설에는 조조가 순욱에게 빈 그릇을 보냈는데, 조조의 뜻을 간파한 순욱이 독주를 마시고 자살했다는 일화도 있다. (빈 그릇은 당신과 나는 빈 그릇처럼 단지 겉으로만 예의를 차릴 뿐이라는뜻.)순욱이 죽은 다음해 조조는 위공이 되었다.
장남 순휘가 조조의 3남인 조식과 친하여 조비가 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친교를 끊지않고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에 조비가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비의 누이 안양공주가 순휘의 아내가 된 일도 있어, 조비는 역시 순씨를 특별히 총애했다고 [위지] 순욱전에서 적혀 있다.
평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그와 연장자인 조카 순유, 그리고 모사 가후, 이 3사람을 같은 권에 넣었다.(삼국지 위서 10권). 진수의 순욱에 대한 평가는 순욱은 청아한 풍모와 왕좌의 풍격, 그리고 선견지명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뜻을 달성하는 것에는 뛰어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국지에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당시 난세를 평화로 이끌었던 조조에게 협력한 것밖에는 없었다. 이일로 인해 한나라는 살아나지 못했지만, 백성들은 구할 수 있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배송지는 가후를 싫어하여 순욱이란 인물을 가후등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또 범엽은 순욱을 후한 왕조에게 순사한 충신으로 평가하여 삼국지에 전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후한서 순욱전을 집필하였다.
순유(荀攸, 157년 ~ 214년)는 후한 말기 군웅 조조를 섬겼던 군사(軍師)로, 자(字)는 공달(公達)이다. 같이 조조를 섬겼던 순욱의 조카로, 순담(荀曇)의 손자이고, 순이(荀彝)의 아들이자, 순집(荀緝), 순적(荀適)의 아버지이다. 시호는 경후(敬侯).
생애
처음엔 동탁의 신하로써 그를 섬겼으나, 동탁의 전횡을 보고 분노하여 동탁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감옥에 투옥돼 사형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동탁이 왕윤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후 할거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자신이 원하던 촉군태수(蜀郡太守)가 되려 했으나, 유언이 이미 교통로를 끊어버렸기에 형주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헌제를 자신의 본거지로 맞이한 조조에게서 편지가 와서, 군사로써 그를 섬기게 되었다.
여포토벌, 관도 전투등 조조의 중요한 전투 대부분에 군사로써 종군하여 조조에게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하였다. 또 실제 전투에서도 관도 전투의 전초전인 백마 전투에서는 원소군의 기병대장 문추를 죽이는 공적을 세웠다. 그 때문에 곽가 사후에는 조조의 최측근으로써 항상 곁에 있었고 그 신임이 특히 두터웠다고 한다.
적벽 전투에서도 순유는 적이 화공을 준비하려는 책략을 알아채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라고 조언하였으나, 이미 승리를 자신하던 조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사태는 순유가 걱정한 대로 화공에 의해 조조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214년 조조의 오토벌에 종군하던 시기 병으로 인해 쓰러져 얼마안가 진중(陣中)에서 사망했다. 경후(敬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조는 순유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순유는 조조의 패업을 지탱했던 명군사였다. 조조 최측근이면서도 사치를 부리는 일도 없었고, 언제나 겸손하고 친절하여 친구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종요와는 절친하여 순유가 죽을때, 남겨진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종요에게 맡기겠다고 유언하였다. 허나 아들 2명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순유의 집안은 한미해졌다. 이후 순집(荀緝)의 아들인 순표(荀彪)가 성인이 된후 다시 순유의 가문을 부흥시켰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순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214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오르는것을 반대하여 이것이 조조의 노여움을 사서 순유는 얼마안가 충격으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사(正史)에서는 조조가 왕이 되는것을 찬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욱(程昱, 141년 ~ 220년)은 조조의 모사로, 자는 중덕(仲德)이다. 본명은 정립(程立)이었으나, 해를 받드는 꿈을 꾸고 정욱(程昱)으로 개명하였다. 관직은 위위에 올랐으며, 순욱(荀彧)의 천거로 조조(曹操)를 따라 여러 차례 종군하여 좋은 계책을 많이 헌납하였다. 유비(劉備) 휘하에 있던 서서(徐庶)를 꿰어내기 위해 거짓 편지를 쓰기도 했다. 연주를 빼앗겨 의기소침해진 조조를 격려해 창정 싸움에서 '십면 매복의 계'를 사용하여 원소(袁紹)를 쳐부수는 등 순욱과 같이 조조를 보좌했다. 권모술수에 능했고, 사태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220년에 병사했다.
정사에 의하면 동군 동아현 출신이며, 8척 3촌의 키에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조조를 만나기 전에 연주 자사인 유대가 그를 초빙하였지만 계책을 알려주었을 뿐 이에 응하지는 않다가, 조조가 연주에 이르러 그를 초빙하자 그를 섬기게 된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던 때 순욱과 함께 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연주에 모반의 기운이 퍼지면서 남아 있는 성 3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때 그는 여포가 보낸 진궁의 공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면서 조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예전에 그는 순욱에게 꿈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종종 산에 올라 해를 받드는 꿈이었다. 이 당시 순욱이 이 얘기를 조조에게 전해주었고 조조는 그의 이름 '立'자에다 '日'자를 붙여줘 昱으로 개명하게 된다.
이후 연주의 기반이 흔들려 심약해진 조조는 원소에게 가족들을 볼모로 바치며 밑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정욱이 이를 다그쳐 거절시키고 조조를 분발하게 만들었다. 조조에게 귀순한 유비를 미리 처치해 두라고 조언하기도 하는 등 안목있는 계책을 내놓는데, 나중에 조조가 유비에게 서주의 원소를 공격시키게 하면서 병사를 빌려준 데 대해 배반할 것이라고 곽가와 함께 진언했고 이 또한 맞아떨어졌다.
그는 지략 못지않게 담력도 뛰어났는데, 특히 원소가 대군을 끌고 남하할때 정욱은 겨우 7백의 군사로 견성을 지키고 있었다. 조조가 이를 우려해 2천의 군사를 증원해 주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거부했다. 원소가 견성의 병사가 극히 적은 것을 알면 원소로서도 별로 위험할 것이 없으므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지만 수천의 병력이 있다면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공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절대로 원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증원하지 않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 정욱의 주장이었는데, 과연 원소는 견성의 병력이 적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공격하지 않았다.
관도 대전에서 승리한 조조는 이후 여양에서 원담,원상과 싸웠는데 이때 정욱은 도적들을 거두어 수천의 군사를 모았다. 이 공으로 정욱은 분무장군의 지위를 얻는 동시에 안국정후로 봉해졌다.
이후 유비가 오나라로 도망간다는 소식에 다들 손권이 유비를 죽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손권이 유비의 힘을 빌어 조조에게 대항하려 할 것임을 예측하였고 그대로 되었다.
세력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 조조는 그가 연주의 세 성을 지킨 일을 들며 그를 칭찬했다. 정욱은 축하연의 자리에서 '만족할 줄 알고, 욕되지 않았으니 물러나길 원한다'면서 병권을 내놓고 칩거에 들었다. 그 후 조조가 친히 마초를 공격할 때 조비가 남아 지키면서 정욱을 군에 참여토록 했다. 하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토벌하는 도중 천 여명이 항복하였는데, 이를 처형하자는 자들이 많았다. 정욱은 이에 반대하였고, 조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는데, 조조의 의향도 이와 같았다.
정욱은 80세 가까운 나이에 죽었는데, 벼슬이 공(公)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이에 대한 이유를 세설신어(世說新語)라는 책에는 조조가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에 정욱이 자기 출신 현을 약탈하여 3일 분의 식량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인육 말린 것이 섞여 있어 조정의 신망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정욱의 성격이 강직해서 다른 이들과의 교제가 많이 어긋났고 주변에서 그가 모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는 등 정사의 내용을 보면, 그의 출세가 못마땅한 이들에 의해 과거의 저 행적이 그의 공을 깎아내리는 데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럼에도 조조는 그를 무척 신임했고 그도 조조를 위해 계책을 아끼지 않았기에 위나라의 뛰어난 참모로 평가되고 있다.
종요
종회(鍾會, 225년~264년 1월 18일)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이며, 자는 사계(士季)이다. 상국(相國)을 지낸 종요(鍾繇)의 둘째 아들이다.
생애
종회는 열심히 학문을 익혀 아는 것이 많았기에 명성을 얻었다. 촉나라에 항복했던 하후패(夏侯霸)는 강유(姜維)에게 종회가 나중에 정권을 잡을 경우 촉과 오 두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관직에 나아간 후 조모(曹髦)에 의해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으며, 학문에 능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조모와 학문을 논의하기도 했다.
255년에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의 자리에 있었는데, 관구검(毌丘倹)이 사마씨에 대항하여 봉기하자 사마사(司馬師)는 병이 심해졌기 때문에 직접 토벌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종회는 부하(傅嘏)와 함께 사마사가 직접 나서서 진압할 것을 권고하였다.
관구 검의 봉기가 진압된지 얼마 안되어 사마사는 죽고 사마소(司馬昭)가 대장군이 되고 종회는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임명되었는데, 사마소는 종회를 거느리고 다닐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종회가 교만해져 이를 경계하는 부하(傅嘏)의 충고를 받았다.
257년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소의 야심에 반발해 봉기하자, 종회는 사마소를 따라 제갈 탄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이때 오나라에서 제갈탄을 도우러 온 전역(全懌)에게 위나라에 항복했던 전역의 조카 전휘(全輝)와 전의(全儀)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 오나라에서 전역을 죽이려 한다고 전하자 전역은 위나라에 항복했다. 이것은 사마소가 종회의 제안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제갈탄의 봉기가 진압된 후 사마소는 더욱 종회를 아꼈으며 사예교위(司隸校尉)로 승진시켰다. 주위 사람들은 종회를 유방(劉邦)의 참모 장량(張良)에 비유하였다.
종회는 죽림칠현 중 하나인 혜강(嵆康)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혜강이 종회를 거만한 태도로 대하자 앙심을 품고 돌아갔다가 262년에 혜강이 관구검을 도우려 했다고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해 사마소가 촉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자 조정 신하들은 대부분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종회는 사마소의 의견에 찬동했다. 촉나라 정벌이 확정된 후 진서장군(鎭西將軍)이 되었다.
촉나라 정벌
263년 종회는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촉나라를 공격했는데, 제갈량(諸葛亮)의 묘에 제사지낸 후 양평관(陽平關)을 함락시키고 부첨(傅僉)을 죽였다. 옹주자사 제갈서(諸葛緖)가 강유가 검각(劍閣)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지 못한 일을 트집잡아 제갈서의 병사들을 손에 넣을 목적으로 제갈서가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제갈서는 벼슬에서 쫓겨나 죄인이 되었고, 종회는 제갈서가 지휘하던 3만 군사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종회는 촉나라 정벌 과정에서 허저의 아들인 허의를 부하로 두고 있었는데 종회는 허의에게 도로공사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허의가 길을 닦는 과정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종회의 말이 넘어졌고 분노한 종회는 허의가 위나라 개국공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참수해 버린다.
이후 검각으로 진군하여 강유를 공격했으나, 강유가 결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등애(鄧艾)가 험준한 곳을 거쳐 성도(成都)로 진군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았기 때문에, 강유는 종회를 찾아와 항복했다. 종회는 강유를 후하게 대접했으며, 강유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종회는 당시 자신의 부하였던 두예(杜預)에게 하후현(夏候玄)과 제갈탄이 강유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 사마소 봉기
종회는 은밀히 사마소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고 있었고, 강유도 촉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하였기에 종회를 부추겼다. 이 때문에 종회와 강유는 매우 가까워졌다.
이때 등애는 익주를 다스리고 오나라를 정벌할 방안을 담은 글을 사마소에게 올렸으나, 사마소는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부하 위관(衛瓘)과 함께 등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했다. 종회는 다른 사람의 글씨를 모방하는 것에 뛰어났는데, 등애가 조정과 사마소에게 보내는 글을 가로채고 자신이 등애의 글씨를 모방하여 오만불손한 내용으로 고쳐 보냈다. 그리고 사마소가 등애에게 보내는 답장을 자신이 만들어서 보내자, 사마소는 등애를 의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264년 1월에 사마소가 등애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자, 종회는 위관을 보내어 등애 부자를 잡아들였다. 이로써 유일하게 꺼리던 등애가 제거되자 본격적으로 반 사마소 봉기를 일으키기로 하고 강유를 선봉으로 삼아 야곡(斜谷)으로 가게 했으며, 위수(渭水)와 황하를 거쳐 단시일 내에 낙양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마소는 종회 역시 의심했기에 대군을 거느리고 조환(曹奐)과 함께 장안에 주둔하고 이를 종회에게 알렸다. 종회는 자신의 야심이 간파당한 것을 알았으나 최소한 익주에서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부하 관리들을 초청한 다음, 263년 말에 죽은 곽(郭)태후가 자신에게 사마소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그들을 모두 가두었다. 강유가 위나라에서 온 장수들을 모두 죽이라고 건의했으나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종회에 의해 갇혀 있던 호열(胡烈)이 아들 호연(胡淵)에게 편지를 보내 종회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알리자, 호연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18일 호열의 부하들을 이끌고 종회가 있는 곳으로 공격해 왔다. 결국 종회와 강유가 호열의 군사들에게 죽고 반 사마소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종회의 부하였던 향웅(向雄)이 종회를 장사지냈다.
진군(陳羣, ? ~ 238년)은 중국 위나라의 중신으로 자(字)는 장문(長文)이다. 예주(豫州)의 영천군 허창(潁川郡 許昌 : 지금의 허난 성 허창)출신이다. 조부는 후한 말기에 청렴결백으로 이름을 떨친 진식(陳寔)이며, 아버지는 진기(陳紀)이다. 아들로는 진태(陳泰)가 있다. 또한, 위나라의 중신인 순욱(荀彧)의 사위이다. 진군의 가문은 춘추시대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진나라의 왕족의 후손이기도 하다. 진군은 주로 위나라 법제의 정비에 공헌했다.
특히, 그가 주창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은 이후 수나라에서 본격적인 과거가 시행되기 이전까지 각 왕조에서 관료를 뽑는 등용기준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진식에게 장래를 인정받았으며, 오만하기로 이름났던 공융(孔融)과도 친분이 있었다. 한때 예주에 체재하고 있던 유비에게 발탁되어 벼슬을 하기도 했다. 194년, 서주자사 도겸(陶謙)이 죽고 서주를 유비(劉備)가 영유하려고 하자 "남쪽에서 원술(袁術)이, 서쪽에서 여포(呂布)가 서주를 노리고 있으니 위험합니다"라고 주청하며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곧 유비가 여포에게 패하여 영지를 잃게 되자 아버지와 함께 서주에서 피난생활을 보냈다. 4년 뒤인 198년에 조조(曹操)가 여포를 토벌하자 조조에게 등용되어, 그 뒤부터는 서주에서 조조의 한쪽 팔로 활동하던 순욱의 사위가 되는 등 정치 내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214년에는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올랐다.
진군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근엄실직(謹嚴實直)이라는 말이 전하는데, 언제나 공정한 태도로 사태를 판단하였으며 도덕에 벗어난 처사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어렸을 때의 조비(曹丕)는 그의 인품에 경의를 표했으며, 신하가 아닌 친구의 예로 그를 대했다고 한다.
진군은 주로 내정에서 활약하였으며, 특히 법제의 정비에 종사했다. 조조가 육형(肉刑)을 부활시키려고 하였을 때, 부적절한 사형을 줄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종요(鍾繇)와 함께 찬성했다. 그러나, 왕랑(王朗)등의 반대로 인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220년에는 구품관인법을 제정하였다. 이 제도는, 당시 채용관이나 지방호족의 자의성이 짙었던 인재등용을, 법률로서 재정비시켜 이러한 자의성이 개입할 수 없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후한에서 위로 이어지는 역성혁명에 대비하여, 후한의 관료들을 위에 재등용할 때 재분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계산의 목적도 있었다.
얼마 뒤에 조비가 위의 문제(文帝)로 즉위하자, 위제국을 성립시킨 공으로 조비에게 중용되었다. 조비는 태자시절부터 진군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진군을 매우 신뢰했으며, 그런 진군의 벼슬은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여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의 관직을 겸직하게 되었으며, 226년에 조비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조진(曹眞)이나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위의 후일을 당부받기도 했다. 뒤를 이어 즉위한 명제(明帝) 조예(曹叡)때에도 중용되어, 관직이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238년에 세상을 떠났다.
등애(鄧艾, ? ~ 264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군이며, 자는 사재(士載)이다. 촉나라 정벌에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종회(鐘會)의 모함에 의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등애는 부모를 일찍 잃고 여남(汝南)에서 송아지를 길렀다. 관직에 임명된 후 지형을 살피고 그림을 그리면서 군사작전에 적합한지를 연구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이후 상계리(上計吏)를 지낼 때 사마의를 만나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
이후 수춘(壽春)을 시찰하던 등애는 운하를 통해 물을 끌어들일 구상을 하고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사마의에게 바쳤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운하가 완성된 후 수해가 줄고 군사들과 식량을 보내기가 편리해졌다.
조모(曹髦)가 등극한 후 방성정후(方城亭侯)에 봉해졌다. 251년에는 조정에 글을 올려 남흉노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255년 관구검(毌丘倹)이 문흠(文欽)과 함께 반 사마씨 봉기를 일으키자, 당시 연주자사였던 등애는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낙가성(樂嘉城)을 점거하여 문흠을 유인했다. 문흠은 자신의 군사가 더 많다고 여기고 낙가성으로 쳐들어왔으나 이미 사마사의 대군이 당도해 있었기에 끝내 패주했다. 등애는 문흠을 끝까지 추격하여 오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반 사마씨 봉기가 진압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안서장군(安西將軍)을 대행하고 방성향후(方城鄕侯)가 되었다.
북벌 방어
249년 강유(姜維)가 국산(麴山)에 성을 쌍고 구안(句安)과 이흠(李歆)에게 지키게 하자, 등애는 곽회(郭淮)의 지시대로 성 부근의 물줄기를 끊어 성 안의 촉군이 항복하게 만들었다. 강유는 요화(廖化)를 보내 등애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조성(洮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등애가 먼저 조성에 도착해 강유가 이끈 촉군을 무찔렀다. 이 공으로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임명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255년 강유가 왕경(王經)을 대패시키고 적도(狄道)를 포위하자, 재빨리 적도로 이동하여 포위가 풀어지게 한 공으로 안서장군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다시 쳐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등애는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가 얼마 후 쳐들어온 강유를 상대로 단곡(段谷)에서 승리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등애를 등후(鄧侯)로 봉하고,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를 겸하게 했다.
이후 강유는 257년과 262년에도 쳐들어왔으나 등애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촉나라 정벌
263년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이었던 등애는 사마소가 촉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정벌이 확정된 후 결국 참전하게 되었다. 등애는 부하 장수들에게 강유를 공격하게 했으나, 제갈서(諸葛緖)가 강유의 계책에 속아 강유가 검각(劍閣)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종회는 이것을 구실삼아 제갈서를 모함하여 벼슬에서 내쫓아 제갈서가 지휘하던 군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등애는 음평(陰平)에서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험준한 지역 7백여 리를 거쳐 강유(江由)에 도착했다. 강유를 지키던 촉나라의 장수 마막(馬邈)은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위군이 나타나자 즉각 항복하였다. 제갈첨(諸葛瞻)이 면죽관(綿竹關)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등애는 장수들을 독려하여 면죽관을 점령하고 제갈첨 부자와 장준(張遵) 등을 죽였다.
등애가 성도로 진군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유선(劉禪)은 초주(譙周)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몸을 묶고 등애의 진영으로 찾아가 항복했다. 이로써 촉나라는 멸망했으며, 조정에서는 등애를 태위(太尉)로 삼고 식읍 2만 호를 내렸다. 등애는 장사들을 조사하여 약탈하는 것이 없게 하고, 항복하는 자를 받아들이고 구업을 회복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아울러 사마소에게 글을 올려 유선을 우대하고 오나라를 정벌할 방안을 건의했다. 사마소가 선뜻 받아들이지 않자 재차 글을 올려 오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등애는 자신의 전공을 뽐내고, 촉한의 사대부들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자못 자랑하였으며 자신을 강유의 위에 두었으므로, 식견있는 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죽음
종회는 부하장수 위관(衛瓘), 호열(胡烈) 등과 함께 등애를 모함하고 등애의 글을 가로채 불손한 내용으로 바꿔 보냈다. 결국 등애를 의심하게 된 사마소는 264년 1월 등애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종회는 위관을 보내 등애를 잡아들이게 했다. 등애는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아들 등충(鄧忠)과 함께 위관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함거에 갇혔다.
종회가 강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다 죽자 등애의 부하들은 등애를 구출하려 했다. 위관은 자신이 종회와 함께 등애를 모함한 것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호군 전속(田續)을 보내 등애 부자를 죽였다. 원래 전속은 강유(江由)에 왔을 때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에 등애가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 위관은 전속에게 옛 일을 설욕할 수 있다고 부추겨 끝내 등애를 죽게 한 것이다.
273년 의랑(議郞) 단작(段灼)과 옛 촉나라의 신하였던 번건(樊建)이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에게 등애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등애의 맏손자 등랑(鄧郞)이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
방덕(龐德, ? ~ 219년)은 후한 말기의 마등, 조조의 무장. 자는 영명(令明). 방회의 아버지, 방유(龐柔)의 사촌동생. 방덕(龐悳)으로도 표기된다.
서량(西凉) 남안군 향도현 출신. 본시 마초(馬超)의 부장으로 동관(潼關)에서 조조와의 싸움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초가 자신을 버리고 마대만을 대동한 채 유비에게 투항하자 장로의 부하로 조조와 싸우지만 항복하여 조조의 상장(上將)이 되었다.
후에 형주 전쟁에서 선봉장으로서 우금과 출전하여 관을 메고 관우와 결사전을 벌여 호각을 이룬다. 그러나 수공을 사용한 관우에게 패하여 참수되었다.
서황(徐晃, ? ~ 227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이다. 자(字)는 공명(公明)이고, 서개(徐蓋)의 아버지이며 서패(徐覇)의 조부이다. 하동군(河東郡) 양현(楊縣;현재 산서성(山西省) 홍동현(洪洞縣) 남부)출신의 사람이다.
처음 이각(李傕)의 부하 양봉(楊奉)을 섬기며, 공적을 세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 서황은 양봉에게 헌제(献帝)을 데리고 낙양(洛陽)으로 돌아갈것을 진언하였고, 양봉은 서황의 생각에 따라 헌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서황은 이 일로 도정후(都亭候)에 봉해지게 된다. 이후 서황의 죽마고우인 만총이 서황에게 다가와서 "조조가 사람됨됨이가 괜찮으니 그를 섬기자"라고 말했는데 서황은 이를 받아들여 조조를 섬기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다. 또한 서황은 양봉에게 조조(曹操)에게 귀순할것을 진언했으나, 양봉이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조와 대립하자 양봉을 떠나 조조에게 귀순했다. 그후 여포(呂布)토벌 및 관도대전(官渡對戰), 마초(馬超)토벌등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다. 특히 관도대전에서는 하후돈의 지휘하에 식량수송차량속에 숨어 있다가 노략질하려고 덤벼든 문추를 기습하여 하후돈과 힘을 합쳐 척살하기도 했다.
219년 조엄(趙儼)과 함께 형주로 가서 번성(樊城)을 포위한 관우(關羽)의 군대를 격퇴하여 조인(曹仁)을 구원하는 활약을 보였다. 조조는 서황을 치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30년이상 병사을 움직였고, 고대의 전투에 뛰어났던 장수를 무수히 많이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적의 포위망을 돌파한 자는 거의 없었다. 거기에 번성이 처한 상황은 연나라가 제나라의 거(莒)와 즉묵(即墨)을 포위했던 때보다 더 곤란한 상황이었다. 장군의 공적은 손무(孫武), 사마양저(司馬穰苴)보다도 뛰어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 전투의 승리를 축하는 연회를 개최할때 조조는 서황에게 술을 권하고 그를 칭송했다. 이때 다른 군대도 집결하였는데, 다수의 군 병졸들은 위치했던 장소을 떠나 매우 어수선했지만, 서황의 군대만은 장병이 정연하게 진형을 갖추고 위치한 장소을 떠나는 이들이 없었다. 이걸 본 조조는 더욱더 서황을 두텁게 신뢰하여 [서황에게는 주아부(周亞夫)의 풍격이 있다]라고 아주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조비가 위나라의 황제가 되자, 서황은 우장군(右將軍)으로 승진하였고, 그후 하후상(夏侯尚)과 함께 상용(上庸)에서 유봉(劉封)을 격파했다. 명제(明帝)의 시기에는 오(呉)의 제갈근(諸葛瑾)을 격퇴하고 식읍 200호를 하사받아 총 3,100호을 가지게 되었다. 227년 병사하였고 시호는 장후(壯侯)이다.
서황은 무공을 세웠음에도 사치를 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부하에게는 아버지같은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인망이 매우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항상 [모든 사람들은 명군을 만날것을 기원하였지만, 나는 행운아이기에 그 명군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공적을 세운것도 이 행운에 답한것에 불과하다. 개인의 공명같은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최후까지 무리를 만드는 일은 없었다.
용병에서는 첩자를 이용하여 정보수집을 중시하고 항상 패전시의 대책을 염두에 두고 전투를 진행해 나가는등 견실한 모습을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 좋은 기회가 보인다면 휘하에게 식사시간도 주지않고 거의 맹렬한 추격에 나서기도 했다. 정사를 토대로 그가 전투에 패배한것은 적벽대전 후의 강릉을 둘러싼 전투와 한중 전투 뿐일정도로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중에 1명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서황
《삼국지연의》에서는 대부(大斧;큰 도끼)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무장으로 등장한다. 관도대전에서는 안량과 문추에게 대항하나 패하여 도망치는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이것은 허구이고 사실 순유의 계략으로 적의 군량수송대를 불태우고 적장인 문추를 격퇴하는 등 그 활약이 제장(諸將) 중 으뜸이었다. 한중전투에서는 무리하게 배수진을 고집하여 부장인 왕평(王平)과 의견이 맞지않아 충돌하고 결과적으로 패하였으나 그 책임을 왕평에게 물어 왕평이 촉나라로 가버렸기에 격노하는(왕평이 서황의 부장이란 이야기는 창작)등 급한 성질의 성격도 보여주지만, 관우와 일대일 결투에서 물러서지 않는등 위나라 굴지의 용장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안량과의 싸움에서 실력부족으로 도망친 것과 예전 촉나라 신하였던 맹달(孟達)이 다시 촉나라로 망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토벌에 나섰다가 맹달이 쏜 화살에 이마를 꿰뚤려 전사하고 말았다는 등의 일화는 모두 허구이며 진수의 정사보다 인물됨의 묘사는 다소 부정적인데, 서황이 여몽과 함께 관우 토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촉나라 지지자였던 나관중에게 앙심을 샀던 것으로 이유를 추측할수 있다.
악진(樂進, ? ~ 218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이다. 자(字)는 문겸(文謙)이며 양평(陽平) 위국(衛國) 출신이다.
담력으로써 조조를 따라 장하리(帳下吏)가 되었다. 출신 군으로 보내져 천여 명을 모병하여, 돌아온 후 군가사마, 함진도위가 되었다. 조조가 여포(呂布), 장초(張超), 교유(橋蕤), 장수, 휴고(眭固), 유비(劉備) 등을 공격할 때 항상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므로 광창정후(廣昌亭侯)로 봉해지고 토구교위(討寇校尉)에 임명되었다. 획가(獲嘉)를 공격했으며, 돌아와 조조를 수행해 관도(官渡)에서 원소를 쳤을 때 순우경(淳于瓊)을 참했다. 또한 원담, 원상을 여양(黎陽)에서 공격할 때 그 대장인 엄경(嚴敬)을 참했고, 행(行, 대리의 의미)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고, 업성 및 남피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206년(건안 11년)에는 절충(折衝)장군에 임명되었다.
고간(高幹), 관승(管承)을 토벌한 뒤 양책(陽翟)에 주둔하여 형주에 대비했으며, 형주를 점령한 후 양양(襄陽)에 주둔했다. 212년,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으며, 임저장(臨沮長) 두보(杜普), 정양장(旌陽長) 양대(梁大)를 모두 격파했다. 그 뒤 합비에서 손권을 정벌했고 가절(假節)이 수여되었다. 이때 악진은 손권을 구출하려는 능통과 겨뤄 능통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갔으나 감녕의 공격을 받고 퇴각했다. 그 후, 악진은 우장군(右將軍)으로 관위가 올랐다.
218년(건안 23년)에 죽었으며, 시호를 위후(威侯)라 했다.
평가
악진은 키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수들 못지않은 용맹을 과시하여 서황, 장합, 우금, 장료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장으로 인정받았다. 진수가 서술한 《삼국지》에서는 이 다섯 사람을 묶어 〈장악우장서전〉으로 분류되어있기도 하다.
우금(于禁, ? ~ 221년)은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의 무장으로 자는 문칙(文則)이며 태산군 거평현 사람이다. 조조(曹操)의 부하가 된 뒤 능력을 인정받아 점군사마로 벼슬을 시작해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나중에 관우에게 항복을 구걸한 일로 명성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조조에게 들어온 뒤 능력을 인정받아 점군사마로 임명되었다. 서주 전투에 참여했을 때 구원군의 길을 끊는 임무를 받았으나 도겸을 도우러 온 유비의 장수 장비의 공격을 받아 결국 길을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여포와의 싸움에서도 활약했다. 서기 197년 장수가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후돈이 거느린 청주병들이 약탈을 일삼자 그들을 죽였다. 살아남은 청주병들은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했으나 우금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적을 막을 영채를 쌓았다. 장수군이 쳐들어오자 그들에게 반격해 조조가 장수를 이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그 뒤 서기 208년 하후돈을 따라 박망파 전투에 종군했는데 같이 종군한 이전이 그 곳의 지형을 보고 화공을 일으키기 좋은 지형임을 알고 우금에게 이 사실을 하후돈에게 알리게 했다. 그러나 알린 뒤에는 이미 시기가 늦어 하후돈의 10만 대군은 잿더미로 변했다. 유종이 항복한 뒤 조조의 명령으로 형주 자사 유표의 아들 유종과 유표의 아내이자 유종의 어머니인 채 부인을 제거했다. 그 뒤 적벽 대전에 종군했다. 211년 마초가 아버지 마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을 공격해 함락하고 동관을 함락했다. 그 때 마초와 싸웠으나 패했다. 나중에 조조의 이간계로 사이가 갈라진 한수의 장수인 이감이 마초의 추격 때문에 달아나고 있을 때 마초에게 활을 쏘았으나 마초가 그것을 피해 그 화살이 이감을 맞추었다. 마초가 그에게 덤벼들자 그는 달아났다.
허무하게 무너진 명성
219년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고 명장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포위하자 위기감을 느낀 조조는 우금을 총대장으로 삼고 방덕을 선봉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방덕의 활약으로 전세가 유리했으나 우금은 방덕을 질투해 방덕을 방해했고 나중에 관우의 수공을 당해 패하여 삶의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울면서 애원하며 투항했으나 관우는 그를 죽일 가치조차 없는 인물로 여겨 옥에 가두었다. 나중에 손권이 관우를 평정하자 손권의 도움으로 풀려나 조조에게 돌아갔다. 221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우에게 항복했던 우금은 조비가 즉위하자마자 바로 조비에 의해 보직 해임당하고, 조조의 무덤지기로 임명되었다. 웃기는 것은 조비가 조조의 묘지 담벼락에 희한한 그림을 그렸는데 다름아닌 관우가 방덕과 우금을 생포해 놓은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방덕은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 관우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관우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우금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굴한 모습으로 무릎꿇고 고개숙이고 울면서 관우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우금은 분통이 터져 피를 한사발 토하고 죽었다.
장합(張郃, ? ~ 231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명장이다. 자는 준예(儁乂). 본래 원소(袁紹)의 부장이었다. 조조(曺操)와 원소가 관도에서 전투를 벌일때, 원소가 그에게 소홀히 대접해서 고람(高覽)과 같이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 후 위나라를 위해 수많은 공을 세웠다. 제갈량이 장합을 포위했을 때 포위망에서 벗어나 제갈량이 그를 두려워 했었다. 그러나 사마의의 무리한 계책 때문에 제갈량의 계책에 걸려 화살을 맞고 목문도에서 죽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기주(冀州) 하간군 막현(河間郡 鄚縣)의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황건적의 난에서 반란군 진압의 모병에 응하여 한복(韓馥)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한복의 몰락 후에는 원소(袁紹)을 섬겨 교위(校尉)에 임명되었다. 공손찬(公孫瓉)과의 싸움 등에서 활약한 공적으로 영국중랑장(寧國中郎将)까지 출세하였다.
200년, 관도대전(官渡)의 오소(烏巢) 공방전에서 조조(曹操)의 군세는 강하므로, 오소를 지키는 순우경(淳于瓊)에게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원소에게 진언하였으나, 동료인 곽도(郭圖)는 반대하며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진언하였다. 장합은 조조군의 본진을 간단히 함락시킬 수 없다고 이견을 내었으나, 원소는 경기병만을 오소의 원군으로 보내고, 대군으로 조조군의 본진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원소와 곽도의 예상과는 반대로 오소가 먼저 조조에게 넘어갔다. 순우경이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합은 장합은 고람(高覽) 함께 원소를 배신하여 그를 공격하고 진영을 불태운 뒤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이로 인해 총대장의 생사마저도 불확실해진 원소군은 대혼란에 빠져 사실상 붕괴되었다.
조홍(曹洪)과 순유(荀攸)는 조조에게서 본진의 수비를 임명받아 지키고 있었다. 조홍은 장합의 항복을 괴이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순유는 “장합이 항복하는 것은 자신의 계략이 채택되지 않은 것에 분노해서 항복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장합을 맞이하게 했다. 또한 순우경의 패배가 자신의 잘못이라 느낀 곽도가 “장합은 패배를 기뻐하고, 불손한 말을 내뱉었습니다.”라고 참언을 했기 때문에 장합은 후환이 두려워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설도 있다. 조조는 장합의 항복을 기뻐하고 “오자서(伍子胥)는 자신이 잘못된 군주를 섬긴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에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대가 나에게 항복한 것은 미자계(微子啓)가 은나라을 배신하고 주나라를 섬긴 것과, 한신이 항우을 버리고, 유방을 섬긴 것처럼 올바르고 정당한 행동이다.”라고 극찬하며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도정후(都亭侯)에 임명했다.
그후 조조 휘하의 장군으로서 원상(袁尙)과 원담(袁譚)과의 싸움에서 공적을 쌓았고, 207년 오환(烏丸)과의 전투에서는 장료(張遼)와 더불어 선봉을 맡아, 그 공적으로 평적장군(平狄將軍)에 임명되었고, 이후에도 각지의 전투에 참여했다. 211년부터 마초(馬超)와 한수(韓遂)의 연합군과의 싸움에서도 양추(楊秋)를 항복시키는 등 공적을 세웠다. 215년 장로(張魯)와의 싸움에서도 주령(朱靈)과 함께 저족을 격파하여 본군이 이동할 길을 만들어냈다.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하고, 장합은 하후연(夏侯淵)과 함께 한중의 수비를 맡았다(총대장은 하후연). 장합은 파동(巴東), 파서(巴西)의 두 군을 항복시키고, 그곳 주민을 한중으로 이동시켰지만, 장비에게 격퇴당했다.
219년, 하후연은 유비(劉備)군의 황충(黄忠)에게 쓰러졌다. 총대장을 잃어버린 위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때 하후연의 막료였던 곽회(郭淮)가 “장합 장군은 국가의 명장으로서, 적장인 유비도 두려워 하고 있다. 이 사태는 장합 장군 없이는 타개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전군에게 명령하여 장합을 총대장으로 선별하였다. 장합은 전군을 격려하여 동요을 가라앉히자, 모든 장수도 또한 장합의 명령에 따랐다. 그 후 조조가 직접 한중에 도착하여 유비군과 대치하게 되었지만, 대규모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조조는 한중에서 철수했다. 장합은 한중과 장안(長安)의 중간에 있는 진창(陳倉)에 주둔하였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왕위에 오르자, 좌장군(左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제위에 오르자 막후(鄚侯)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조진(曹眞)과 함께 노수호(盧水胡)와 동강(東羌)을 토벌하고, 오(呉)와의 싸움에서 공적을 세웠다. 조진, 하후상(夏侯尙)들과 함께 오의 강릉(江陵)을 공격할때, 함대를 통솔하여 손성(孫盛)을 격파하고 장강(長江) 중주(中州)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228년의 가정 전투(街亭)에서,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이끄는 북벌군의 선봉대장 마속(馬謖)은 산에 포진하고 요새를 세우지도 않자, 장합은 마속군의 식수로를 끊은후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고, 촉한군은 철수했다. 그리고 촉한군에게 항복한 천수(天水), 남안(南安),안정(安定)의 삼군을 평정하였다. 이 전공으로 식읍이 1,000호 증가하여, 예전것과 합쳐 4,300호가 되었다. 후에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에 임명되었다.
231년,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의 군세가 기산(祁山)에서 전면 철수를 개시할 때, 근처 낙양(略陽)에 있던 사마의(司馬懿)는 장합에게 추격을 명하였다. 《위략》에 따르면, 장합은 “군법에도 적을 포위할 때에도 항상 한쪽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궁지에 빠져 퇴각하는 군대를 추격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발언하였으나 사마의는 듣지 않았다. 별수 없이 출격한 때에, 촉군의 복병에게 공격을 받았다. 교전 중 오른쪽 무릎(《위략》에서는 오른쪽 장딴지)에 화살을 맞아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다. 당시 위의 황제 조예(曹叡; 명제(明帝))는 역전의 노장인 장합의 타계를 깊이 슬퍼하여 장후(蔣侯)란 시호(諡號)를 주었다.
장합은 변화의 법칙을 잘 깨우치고 있었으며, 진영의 통솔에 능하고, 상황이나 지형을 고려하여 계략을 만들곤 하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량 이하의 촉의 장병은 모두 장합을 두려워 하였다 한다. 또한 유학자를 고용하여 큰일이 있을 때마다 동향의 비담(卑湛)을 천거하기도 했다.
장료(張遼, 169년? 170년? 171년? ~ 222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자는 문원(文遠)이며 병주(幷州) 안문군(雁門郡) 음관현(陰館縣) 출신이다. 섭일(聶壹)의 후예로, 성씨가 섭(聶)씨였으나, 섭일이 흉노를 해하려 했었기 때문에 흉노족을 피하여 장씨로 바꾸었다.
젊어서 군리가 되었으며, 병주자사 정원(丁原)이 종사로 삼아 군을 이끌고 수도로 가게 했다. 하진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병사 천 명을 모았다. 돌아왔을 때 하진이 패망하자 군을 이끌고 동탁에 속했다. 동탁이 패망한 후 여포를 좇아 서주까지 갔으며, 노국의 상에 임명되었다. 조조와 유비(劉備)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여포가 패망하자, 노국에 주둔하고 있다가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조조가 원가를 칠 때 종군하여,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기주 조국과 상산군을 공략하고, 여러 산적들과 흑산적 손경의 항복을 받았다. 원담을 칠 때에도 종군하여 원담을 깨트리고,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바닷가 지역을 공략하고, 요동의 도적 유의 등을 깨트리고 업으로 돌아와 탕구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다시 별도로 형주를 공격해 강하군의 여러 현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이 때 도정후에 봉해졌다. 조조를 따라 오환과 손잡은 원상을 쳤는데, 백랑산에서 갑자기 오환과 조우하자 심히 기백을 떨치며 조조에게 싸울 것을 권하고, 조조에게 대장기를 수여받으며 이를 공격해 대파하고 오환의 선우 답돈을 베었다.
건안 13년 겨울, 적벽대전 때, 조조를 모시고 도망치던 도중 이를 추격하던 손권의 부하 황개를 활로 쓰러뜨렸다고 한다. 이후 장료는 오와의 전투, 특히 합비에서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소요진에서는 손권의 10만 대군을 이전·악진과 함께 겨우 800명의 역사로 격퇴시켰다. 이 한 판 싸움에서 손권과 그 수하장수들을 포함해서 어린아이들까지도 ‘장료가 온다’라고 하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나중에 장료는 깊은 병에 들어 죽고 만다.(실제 '울던 아이 장문원 온다는 말에 울음 그친다'라는 속담이 동오에서 유행하였다.)
《삼국지연의》의 장료
여포를 섬기기 전의 행적은 나오지 않으며, 여포가 서주에 있을 때에 사서에서는 노상으로 있어 여포 휘하에서 활약이 보이지 않는 것과 달리 여포를 항상 따라다녔다. 여포가 패망할 때, 장료는 여포와 함께 사로잡히고, 끝까지 발악하는 여포를 꾸짖었다. 조조는 장료도 죽이고자 했으나 관우와 유비의 설득을 받아 장료는 살려서 거두게 된다.
원술을 죽이고 서주에서 자립한 유비를 조조가 쳐 몰아내고 하비성에 남은 관우를 궁지에 몰았을 때, 장료가 나서서 관우를 설득하여 관우가 세 조건을 들어 항복하게 했다. 관우가 유비를 찾아 떠나면서 다섯 관을 뚫고 여섯 장수를 죽이고 마침내 하후돈과 싸우게 되었을 때, 조조의 명을 받고 관우 일행이 안전하게 유비에게 가도록 하여 둘의 싸움을 말렸다.
합비 전투에서 태사자가 사인 송과와 함께 모의해서 합비성을 함락시키고자 하는데, 장료는 이 계책을 간파하고 반격하여 성 내에 매복하였다가 난입한 태사자 군을 공격하였다. 태사자는 화살을 맞고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222년에 서성의 위성계에 걸려들어 화공에 크게 당한 조비를 구출하려 하다가 정봉의 화살에 맞고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전위(典韋, ? ~ 197년)는 진류 파병 출신으로 조조 최고의 맹장 중 한 사람이다. 팔의 힘이 무척 뛰어나서 80근이나 되는 쌍철극(雙鐵戟)을 잘쓰며 악래(惡來-중국 고대 은 [殷]나라의 장사)라 불렸다. 하후돈의 천거로 조조를 섬기게 된 전위는 아무도 들어올리지 못하는 아문기를 혼자 한 손으로 들어올려 조조에게 인정받았다.
양읍(襄邑)의 유씨(劉氏)가 수양(수陽)사람 이영(李永)과 원수가 되었는데, 전위가 복수를 하게 되었다. 이영은 예전에 부춘현의 장(長)이었는데, 준비함이 심히 조심스러웠다. 전위가 수레에 닭과 술을 싣고가, 거짓으로 문후를 여쭙고자 하였다. 문이 열리자 비수를 품고 들어가 이영을 죽이고, 아울러 그 아내를 죽이고는 천천히 문을 나와, 수레에 칼과 창(戟)을 싣고 걸어서 떠나갔다. 이영의 거처는 시장과 가까웠는데, 시장 전체가 모두 다 놀랐다. 추격하는 자가 수백이나 되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4~5리를 가다 그 따라오던 자를 만나자 돌이켜 싸워 탈출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호걸들이 그를 알게되었다.
그는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나 197년, 완(宛)성에서 조조의 군세에 잔뜩 겁을 먹은 장수가 항복하게 되는데, 그 후에 경계를 늦춘 조조군의 틈을 탄 장수 · 가후의 모략에 빠진다. 조조의 군세가 크게 불리하여 조조는 경기병을 이끌고 도망쳤고, 전위와 그의 수하들이 접근을 막았다. 수하들은 맹렬히 싸우다 모두 전사하고, 그 홀로 장극으로 조조를 무사히 탈출시키고 난군 중 화살을 맞아 죽는다.
조조가 무음(舞陰)으로 퇴각해 주둔해 있다 전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도중에 상을 치르고 직접 나가서 곡하였고, 양읍(襄邑)에 돌려 보내어 장사지내고, 그의 아들 전만(典滿)을 배수해 낭중(郎中)으로 삼았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조는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을 잃은 것보다 전위를 잃은 슬픔이 더 크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인(曹仁, 168년~223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장군이다. 자는 자효(子孝), 시호는 충후(忠侯). 위의 태조 조조의 사촌동생이다.
궁술, 마술, 수렵을 좋아해서 190년에 조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천명의 군사를 거느려서 조조의 부하로 들어왔다. 그 이후에 조조아래에서 행봉교위(厲鋒校尉)로서 대도겸전, 대원술전, 관도 전투 등에서 활약한다. 209년의 남군 공방전에서는 오의 주유가 인솔하는 6천기의 군대와 싸워서 궁지에 빠진 부장 우금을 구했다. 이후에도 마초 토벌전에 따른다.
218년에 과도한 군대 일이 원인으로 관우와 내통 해서 모반을 일으킨 완의 호족의 후음·위개 등을 방덕과 함께 토벌 해서 남양태수·동리곤과 합류했다. 다음해 219년 정월에 완성을 함락 시키고 후음등을 즉각 처형했다.
그 이후에는 번성을 거점으로 사용하고 관우와의 형주 쟁탈전에서는 유비의 원군 도착까지 적군의 맹공을 막는 등 많은 공적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도정후(都亭侯)에서 안평후(安平侯)로 승격했다.
관우가 오의 군대에 의해 사망하고, 220년 조조가 사망하면서 그 기세를 타서 오에서는 진소가 양양을 빼앗았다. 조인은 조서(詔書)를 받아서 서황 등과 함께 진소를 무찔러서 양양을 탈환했다.
젊은 시절에는 꽤 난폭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소외당하고 상속권을 아우인 조순에게 빼앗기는 등 불운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조조 막하에 들어가서 무장으로서 과거의 행위를 반성하고, 성장한 다음은 엄격하게 법을 준수해서 항상 법과 대조하고 행동을 행하는 등, 위나라의 여러 장군의 견본이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또한 거기장군(車騎将軍)·도독형(都督荊)·양주(揚州)와 익주제군사(益州諸軍事)를 역임했고 한층 더 올라가 진후(陳侯)에 영봉 되었다.
말년인 조비(문제)때의 시대에는 합비에서 오군과 대치해서 대장군(大將軍), 그 다음에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다. 222년, 보병과 기병 수만명을 인솔해서 유수에 진군 했다. 223년 3월, 중주공략의 의도를 숨겨 다른 지점을 공격한다고 선전하는 것으로, 오의 유수독(濡須督)이었던 주환을 속여서 오군을 분산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주환이 자신의 군대를 약하도록 보이게 만들어서 그것에 속아 패배했다.
223년(황초 4년)3월 19일에 55세에 죽어서 충후(忠侯)의 시호가 내려졌다.
조진(曹眞, ?~231년)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 장수로 자는 자단(子丹)이다. 사마의, 조휴와 함께 조예 대의 고명대신으로, 대장군이 되어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는 공적을 세웠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군공이 모두 사마의에게 돌려진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므로, 조조가 애처로이 여겨 자식들과 같이 기르고 조비와 함께 하도록 했다.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자 활을 쏘아 호랑이를 쓰러트린 일이 있었다. 사납고 용맹하여, 조조가 이를 장하게 여겨 호표기를 거느리게 했다. 영구 땅의 반란을 진압하여 영수정후에 봉해졌고, 하변에서 유비의 별장을 격파하여 중견장군에 임명되었다.
조조가 장안으로 오자 이를 수행하여 중령군이 되었고, 219년 하후연이 황충에게 죽자 정촉호군이 되어 서황 등을 지휘하여 고상을 격파했다. 220년,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진서장군, 가절, 옹·양주도독제군사로 임명되었으며, 동향후로 봉해졌다. 주천에서 장진 등이 모반하자 비요를 보내 격파하고 장진 등을 참수했다. 황초 3년(222년), 상군대장군·도독중외제군사, 가절월에 임명되었다. 하후상, 장합 등과 함께 오나라의 강릉을 공격해 우저에서 승리했고, 주연이 지키는 강릉성을 포위하여 성을 맹공격했다. 그러나 6달 동안 공격하고도 주연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제갈근이 대군을 끌고 와 반장 등과 호응하여 진공하자, 이길 수 없게 되었으므로 퇴각했다. 중군대장군에 임명되었고, 급사중이 더해졌다. 황초 7년(226년) 문제가 병이 들자 진군, 사마의 등과 함께 유조를 받아 명제를 보정했다. 227년 명제가 즉위하자 소릉후로 올려 봉해지고,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제갈량의 북벌에 대항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명제는 조진에게는 제군을 지휘해 미에 주둔케 하고, 장합에게는 마속을 격파하게 했다. 조진은 기곡에서 조운, 등지를 격퇴시켰으나, 이는 기산으로 진출한 제갈량이 놓은 미끼였다. 마속이 격파당해 제갈량이 후퇴하자, 조진은 안정에서 모반하여 월지성을 점거한 양조를 쳐 항복을 받고, 촉에 붙은 안정, 남안, 천수 3군을 평정했다. 1차 북벌을 막아낸 후 제갈량이 진창 쪽으로 나아올 것이라 여기고, 학소와 왕생을 파견하여 대비하게 했다. 과연 제갈량은 진창 쪽으로 나아왔으나,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고 학소는 완강하게 버텨내었으며, 조진이 또 비요 등을 원군으로 보냈으므로 제갈량은 후퇴했다. 태화 4년(230년), 대사마로 승진했다. 이 해 황제에게 촉한을 칠 것을 권하여, 8월에 장안을 출발하여 자오도를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큰 비가 30여일 내렸으므로 회군했다.
조진은 일족인 조준(曹遵), 동향 사람 주찬(朱讚)과 함께 조조를 섬겼는데, 둘 다 일찍 죽었다. 조진은 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식읍을 나누어 둘의 아들들에게 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정벌할 때에는 병사들과 노고를 함께하고 상이 부족하면 가산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졸들의 인망을 얻었다. 병이 들어 낙양으로 돌아오자 명제가 친히 찾아가 조진의 병세를 살폈다.
이듬해(231년) 봄 3월, 중병에 빠져 죽었다. 시호를 내려 원후(元侯)라 했으며, 아들 조상이 후사를 이었다. 또 명제는 조서를 내려 조진의 다섯 아들 조희, 조훈, 조칙, 조언, 조애를 모두 열후에 봉했다. 이전에 문제는 조서를 내려 조진의 아우 조빈을 열후에 봉했었다.
조홍(曹洪, 170년 ~ 232년)은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의 장수이다. 자는 자렴(子廉)이다. 조조의 종제(사촌 혹은 육촌)이다.
조홍의 삼촌인 조정이 후한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지라, 조홍은 매우 젊은 나이에 기춘현(蘄春県)의 현령이 되었다. 서기 190년, 조조가 동탁을 치고자 군대를 동원했을 때, 양주자사 진온(陳温)은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진온과 절친한 친구였던 조홍은 함께 조조군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조인과 함께 조조군의 장군이 된다.
형양에서 동탁의 수하 장수 서영에게 패배하여 추격당하자, 말을 잃어버린 조조에게 자신의 말을 내주어 그를 구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동안 장막과 여포가 합심하여 연주를 점령하였을 때 큰 기근이 들었는데, 조홍이 군사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동평(東平), 범(范)을 점거해 양곡을 모아 군에 공급했다. 조조가 여포와의 복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인근 10여개 현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 공적으로 응양교위에 임명되고, 양무중랑장으로 승진했다.
관도 대전에서는 조조가 오소로 출격하였을 때, 본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조조가 오소의 원소군의 보급기지를 불태울때까지 장합과 고람의 공격을 방어했다.
서기 219년, 한중에서 벌어진 유비군과의 전쟁에서 조홍은 음평에 살고 있던 저족의 군대를 합류시켰고. 강단(強端)과 함께 촉한의 장군 오란과 뇌동을 무찌르고 그 둘을 죽였다. 이 전공으로 그는 도호장군에 임명된다.
조비가 즉위한 후, 위장군에 임명되었다 표기장군으로 승진, 또한 아왕후(후에 도양후로 고쳐 봉해진다.)에 봉해져 식읍이 2천 1백호가 되었다.
성격으로 인한 갈등
조홍은 과거의 전공을 그 자신을 치켜세우는 데 쓰곤 했다. 또한, 그는 조진을 과체중이라고 심하게 놀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양부(楊阜)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조홍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재물을 빌리면 절대 갚지 않는 조비의 성격을 일찌감치 파악한 조홍으로서는 조비에게 재물을 빌려줄 수 없었다.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 조비가 조홍에게 돈을 빌리려다 거절당한 이후 둘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결국 조비는 조홍의 식객중 한명이 범죄를 저지른 것을 구실로 조홍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보다못한 변태후가 나서 그를 구명해준 덕에 면직과 봉토가 깎이는 것으로 그치게 되었다.
서기 226년 조비가 41살의 나이로 죽고 조예가 위나라의 황제가 되자, 조홍은 다시 관직을 부여받았다. 조예가 즉위한 후 후장군에 임명되고 낙성후에 봉해져 식읍 1천호를 받았으며, 태화 6년(232년)에 죽었다. 아들인 조복(曺馥)이 후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조홍
연의에서 그는 동관 전투에서 마초와의 동관 전투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조홍은 요새를 떠나지 말고, 어떤 댓가를 치러서라도 10일간 동관을 사수하라는 명을 조조로부터 받는다. 하지만 마초의 9일간의 도발로 인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전투를 벌이나 패배하고, 동관은 함락당하고 만다.
조조는 매우 화가 나 조홍을 참수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참모들의 만류로 명을 거두어들인다. 얼마 후, 조조는 직접 마초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패배하여 마초에게 추격당한다. 조홍은 마초와 수십합을 싸우며 시간을 벌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조조를 구출하였다. 이 사건 이후 조조는 조홍을 용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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