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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4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전투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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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24 (후한말-삼국시대 주요 전투 3)

두바퀴인생 2010. 3. 6. 18:12

 

 

중국의 역사 24 (후한말 -삼국시대 주요 전투 3)

 

 

 

서촉 공방전은 212~213년까지 유비 제갈량, 방통 등과 함께 기틀을 마련하고자 익주를 공격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유비는 익주 태수 유장을 무찌르고 항복을 받아내 익주를 손에 넣고 기틀을 마련한다.

 

삼국지연의의 묘사

 

원인

211년 조조 동관 전투에서 마초를 무찌르자 위험을 느낀 한중 태수 장로가 익주를 손에 넣으려고 익주 태수 유장을 공격한다. 이에 유장은 부하 장송을 보내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장송은 유비에게 익주를 다스리라고 한다. 그리고 장송은 유비를 끌어드리기 위한 계책을 세운다.

 

유비는 방통, 황충, 위연 등 부하 장수와 병사 5만 명을 이끌고 익주로 향하고 유장은 성도에서 360리 떨어진 부성에서 유비를 마중나온다. 하지만 유비와 유장의 친선 관계도 잠시 유비와 유장의 관계가 악화되고 장송이 유비를 도우는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자 유비와 유장은 전쟁을 시작한다.

 

부수관 전투

유장 유비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군량을 보내달라는 유비의 요청을 형식적으로만 응하고 오히려 부수관의 수비를 다져놓는다. 이것이 유비의 분노를 사 유비는 방통에게 부수관 공략을 명하고 서천 정벌에 나선다. 방통은 계책을 써서 형주로 돌아간다는 핑계로 부수관의 장수들을 성 밖에 끌어내 생포하고 유장의 명을 받아 유비를 암살하려했던 장수 양회 고패를 처형한다. 이렇게 쉽게 부수관을 함락시켜 결국 아군과 적군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부수관을 점령한다.

 

낙성 전투

부수관은 점령한 유비군은 다음 익주의 요충지 낙성을 공격한다. 이에 유장은 유괴, 냉포, 등현, 장임 4장수에게 낙성을 지키도록 했다.유장은 영채를 두 곳에 세워 유비를 막으려하고 유비는 황충과 위연 두 장수에게 영채를 공격하라 명한다. 하지만 그날 밤 위연이 황충보다 먼저 등현과 냉포의 영채를 공격하고 위연은 적들에게 발각되어 공격을 당한다.

 

유장의 부하 등현 위연을 죽이려 하지만 황충의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이에 놀란 유장은 아들 유순과 지원군을 보냈고, 냉포가 낮은 땅의 진채를 세운 유비군을 강물로 막아 쓸어버리려는 작전을 세웠으나 팽성이라는 선비에 의해 발각되어 위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낙성 공략 전 제갈량이 불길한 천문을 읽고 방통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방통을 이를 무시한다. 방통은 백마를 타고 낙봉파라는 계곡을 지나다가 유장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백마라 눈에 더욱 띄워 집중 공격을 받고 전사한다.

 

이에 유비는 제갈량에게 구원을 청하고 제갈량은 형주 관우에게 맡기고 장비와 함께 출병한다. 장비는 파군 전투에서 엄안을 항복시키고 엄안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여러 성들을 항복시킨다. 그러나 한편 유비는 낙성 공격 중 적들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하지만 장비의 도움으로 벗어난다. 장비는 황충과 위연도 구해내고 이어 제갈량과 조운까지 합류하자 다시 공격 준비를 한다. 제갈량은 먼저 유장의 장수 장임을 사로잡기 위해 장임을 강 넌거로 유인한 뒤 다리를 끊어 적군의 퇴로를 막는다.

 

퇴로가 막힌 장임은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낙성으로 곧장 진격한다. 낙성을 지키던 유장의 부하 유괴는 부하 장익에게 살해당하고 장익은 성문을 열려 유비군에게 항복하여 낙성을 함락시킨다.

 

파군 전투

유비의 구원 요청을 받은 제갈량 장비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파군을 공략하게 한다. 당시 파군 태수 엄안은 익주의 노장으로 장비를 지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성 밖으로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 이에 장비는 계책을 써서 밤에 몰래 군사를 후퇴시키고 엄안을 끌어내 사로잡는다. 장비는 사로잡힌 엄안을 설득하여 투항하게 하고 곧장 낙성으로 간다.

 

가맹관 전투

213년 유비 낙성에 이어 유장이 피신한 성도로 가는 관문인 면죽관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결국 유장 한중 태수 장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장로는 의탁하고 있던 마초에게 군사 2만 명을 내주어 유비를 무찌르게 한다. 마초 가맹관으로 향하자 유비는 서둘러 부하 위연에게 군사 500명을 주어 가맹관으로 향할 것을 지시하고 유비와 장비도 뒤따라 가맹관으로 향한다.

 

가맹관 근처에서 위연 마초의 사촌 마대와 승부를 겨루지만 무승부로 끝나고 다음 날 장비 마대를 물리치고 마초와 승부를 겨룬다. 하지만 둘의 승부는 100합이 지나도 나지 않고 제갈량이 도착해 마초를 유비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장로의 참모 양송에게 뇌물을 써서 장로 마초의 사이를 갈라놓는 데 성공한다. 마초는 한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장로는 동생 장위를 시켜 중요한 길목을 막아 마초의 입성을 거부한다. 진퇴양난에 빠진 마초는 결국 유비에게 투항한다.

 

마초 성도로 피신한 유장에게 항복으로 요구하고 결국 유장은 유비에게 항복을 하고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는다.

 

 

한중 공방전 215년 조조 유비를 공격할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한중 태수 장로를 공격해 승리한 전투이다. 하지만 후에 유비 한중 전투에서 조조를 무찔러 허사로 끝났다.

 

삼국지 연의의 묘사

 

양평관 전투
날짜 215년
장소 한나라 한중 양평관
결과 조조의 승리
교전국
조조 장로
지휘관
조조
장합
하후연
장위
양앙
양임

양평관 전투

한중을 공격한 조조는 먼저 한중의 관문 양평관을 노리고 장로는 동생 장위를 시켜 조조에 맞서게 하지만 조조의 맹장들의 활약으로 한중군의 기습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장위는 부하 양앙, 양임과 함께 양평관을 지키고 조조는 50일이 지나자 철수를 한다. 이에 양앙이 조조군을 뒤쫓지만 조조의 부하 장합에게 목이 베이고 양임 역시 하후연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에 장위는 곧바로 양평관을 버리고 달아나고 조조군은 손쉽게 양평관을 함락시킨다.

 

남정성 전투
날짜 215년
장소 한나라 한중 남정성
결과 조조의 승리
교전국
조조 장로
지휘관
조조
서황
하후연
허저
가후
장로
장위
양송
방덕

남정성 전투

양평관을 함락시킨 조조군은 곧바로 남정성으로 진군하고 장로 마초의 부하였던 방덕을 불러 맞서게 한다. 방덕은 조조의 장수 하후연, 서황, 허저 등을 무찌르고 조조는 방덕을 자기 편으로 만들게 하고 싶어한다. 이에 조조의 모사 가후가 계책을 내고 다음 날 조조군의 영채를 습격한 방덕은 가후의 계략으로 크게 패해 성 안으로 후퇴하고 가후는 장로의 모사 양송에게 많은 재물을 보낸다. 뇌물을 받은 양송은 장로에게 방덕을 모함하고 방덕은 조조와 맞서 싸우다가 조조에게 투항하고 만다. 결국 장로 장위, 양송 등은 군사를 이끌고 다른 성으로 후퇴하고 식량 창고는 불태우지 않아 조조가 장로에 대한 나라의 충성심을 알게 한다.

 

파중성 전투
날짜 215년
장소 한나라 한중 파중성
결과 조조의 승리
교전국
조조 장로
지휘관
조조 장로
장위
양송

파중성 전투

조조는 방덕을 얻고 다시 장로를 공격한다. 뇌물을 받은 양송은 조조에게 성 안에서 지원한다는 밀서를 보내고 성 앞에 나온 장로와 장위 형제는 조조군의 공격을 받는다. 장위 허저에게 목이 베이고 동생 장위가 죽자 장로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양송이 성문을 막아 결국 조조에게 항복한다. 이에 조조는 장로에 대한 나라의 충성심을 알고 장로를 진남장군에 봉하고 항복한 양송을 처형한다. 그리고 한중은 조조에 의해 평정된다.

 

 

번성(磻城)전투 219년에 있었던 유비 조조, 손권 형주를 두고 싸운 전투로 유비의 의형제 관우가 나섰으나 손권의 함정에 빠져 크게 패해 형주를 잃고 처형당했다.

 

배경

유비 212년~213년 서촉 공방전에서 익주 태수 유장을 무찌르고 익주 형주 두 지역을 차지한다. 이에 조조 215년 한중 공방전을 벌여 한중 장로를 토벌하고 한중을 손에 넣지만 219년 유비와의 한중 전투에서 크게 패해 한중을 잃고 유비는 한중 왕에 오른다. 이에 조조 손권과 동맹을 맺고 관우가 지키는 형주를 친다.

 

 

번성 전투
날짜 219년
장소 한나라 형주 번성
결과 여몽승리
교전국
조조
손권
유비
지휘관
서황
우금
방덕
여몽
육손
번장
마충
관우
관평
요화
왕보
조루
미방
부사인
병력
조조 3만

 

 

번성 전투

손권은 유비로부터 형주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지만 거절 당하자 조조와 동맹을 형주를 치기로 한다. 이에 유비의 군사 제갈량 관우에게 먼저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치라고 한다. 결국 조인은 밀려 번성으로 쫓겨들어가 구원병을 요청한다. 이 때 서황이 관우에게 싸움을 걸어 일기토를 벌이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구원병 방덕

조조(曹操)는 형주를 어떻게든 확보하여 유비 손권(孫權)을 치려고 먼저 관우(關羽)가 있는 형주부터 치려고 했다. 그리하여 조조는 우금(宇禁)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방덕(邦德)을 부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옛 방덕의 주인인 마초와 그의 형 방유가 서천에서 유비를 돕다고 하여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지만 방덕 조조 앞에서 머리를 바닥에 치면서 충성심을 나타낸다. 방덕 관우가 100합에 달하는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방덕이 화살을 쏴 관우를 쓰러뜨리나 공을 노린 우금의 명령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우금 번성 북쪽으로 올라갔으나 관우의 수공으로 크게 패배하고 방덕은 끝까지 싸웠으나 결국 포로가 되고 만다. 같이 포로가 된 우금은 목숨을 구걸하고 방덕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참수된다.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우금은 조조 사후 조비에게 크게 조롱을 당하게 된다.

 

오의 공격

방덕이 패하자 조조는 손권을 시켜 형주를 치기로 하고 서황에게 5만 군사를 주어 번성의 조인을 돕게 한다. 그리고 오에서는 손권이 부하 여몽을 보내고 여몽 밑에 있던 육손이 계략을 내어 여몽이 병이 들자 자리를 대신 맡고 후임으로 육손을 내세운다. 육손은 관우에게 자신이 별 보잘것 없는 인물이라 스스로 인정하였으므로 관우를 방심하게 한다. 그리고 여몽은 몰래 형주 강기슭 20리마다 설치된 봉화대를 제거하기 위해 부하들을 보내 봉화대를 지키던 촉의 군사들을 죽이고 봉화대를 점령한다. 관우는 번성에서 다시 서황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관우가 다친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데다가 번성에서 나온 조인의 협공으로 크게 패해 양양으로 후퇴한다.

 

빼앗긴 형주

한편 여몽과 육손은 관우가 번성으로 공격을 집중한 사이에 군사들을 시켜 제사를 지내러 온 백성으로 위장한 뒤 형주성을 함락시키고 뒤이어 공안을 지키던 공안 태수 부사인을 함락시킨다. 또한 남군을 지키던 남군 태수 미방에게 부사인을 보내 설득하면서 남군 또한 함락된다. 이 소식을 들은 관우는 근처 맥성으로 후퇴한다.

 

좁혀지는 포위망

형주성에서 머물던 여몽은 백성들을 잘 보살펴 민심을 얻는 계책을 쓴다. 그리고 형주에서 데려온 병사들의 가족들을 이용해 관우의 병사들을 차례로 탈영시킨다. 이에 관우는 부하 요화를 보내 형주 북쪽 상용을 지키는 상용 태수 유봉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유봉은 맹달의 설득으로 구원병을 거절하고 결국 요화는 성도로 간다. 결국 상용에서의 지원이 실패하고 손권은 제갈근을 다시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요구하지만 관우는 거절한다. 그리고 서천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고 부하 왕보에게 맥성을 맡긴 뒤 장남 관평과 부하 조루 등과 함께 서천으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관우의 최후

서천의 샛길을 통해 탈출을 하던 관우는 맨 먼저 오의 장수 주연과 맞닥뜨리고 격렬한 전투 끝에 주연을 퇴각시키지만 이 과정에서 충성스런 부하 조루를 잃는다. 그리고 탈출 도중 여몽의 계략을 차례로 병사들을 잃고 결국 오의 장수 마충과 번장의 협공으로 마충과 번장에게 잡힌다. 손권은 관우를 설득하지만 관우는 끝까지 거절하고 결국 장남 관평과 함께 처형된다. 번장은 관우를 죽인 것과 하후상을 무찌른 것 등을 아주 크게 인정받아 우장군까지 승진했으며 미방은 오나라로 투항하고 나서 오나라의 장수로서 아주 융숭하고 행복하게 천수를 모두 누렸다.

 

영향

관우의 사망이 원인이 되어 유비는 이릉 대전을 일으켰으나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전투였으므로 유비는 거의 빈털털이가 되다시피할 정도로 패배했으며 유비가 아끼는 장군 황충과 유비를 도와주러 달려온 남만의 사마가가 이릉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유비는 몸져눕고 숨을 거둔다.

 

 

이릉 대전, 또는 효정 전투(猇亭之戰)는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손권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유비는 육손의 화공(火攻)과 뒤이은 공격에 의해 참패하고 백제성까지 물러났다. 이로 인해 실의에 빠진 유비는 223년 사망한다.

 

배경

적벽 대전 후, 손권은 유비에게 형주를 임대했다. 215년 익주 점령 후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의 세 군을 손권에게 반환했으나 강릉, 무릉, 영릉을 비롯한 형주 중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되돌려주지 않았다.

 

219년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관우가 북상해 를 공격하자 손권은 이를 되돌려받지 못한 나머지 지역을 되찾기에 좋은 기회로 보고 관우가 부재중인 유비령 형주를 은밀히 습격해 점령했다. 임지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되돌린 관우는 위군과 오군에게 협공받아 결국 패전, 마충에게 생포된 후 손권에게 처형되었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제갈량, 조운을 비롯한 다수의 중신들은 보복전을 일으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유비는 장비와 회견한 후 오를 직접 공격하기로 뜻을 굳혔다. 전쟁 준비가 한창이던 때, 장비는 범강 장달에게 암살당하고, 이들은 장비의 목을 가지고 손권에게로 달아나 유비의 손권에 대한 적의는 더욱 강해졌다. 관우를 처형한 이후부터 유비의 침공을 예상해온 손권은 의 황제가 된 조비에게 형식적으로 신종하며 촉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이 즈음 손권은 조비로부터 정식으로 오왕(吳王)으로 책봉되었다.

 

221년 여름, 후한이 멸망하자 제위에 오른 유비는 승상 제갈량을 수도인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주둔시켜 후방을 맡긴 후 직접 수만 병력을 인솔하여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이릉 대전
Hubei-S334-Changjiang-4872.jpg
현재의 이링 구(夷陵區)의 장강 연안
날짜 221년 여름 - 222년 여름
장소 형주 서부의 이릉, 효정, 장강삼협
결과 촉한군의 대패
교전국
촉한
지휘관
유비
풍습
황권
손권
육손
병력
4만명 이상 5만여명
피해 상황
수만 명이 전사하거나 항복, 군세가 괴멸함 기록 없음

 

 

 

전쟁의 경과

유비는 오반, 풍습 등을 선봉으로 삼아 형주로 진격을 시작해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이 지키는 무성(巫城)과 자귀성(秭帰城)을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자귀에 본영을 설치한 유비는 오반, 진식 등에게 먼저 수군을 이끌고 이릉으로 나아가게 했다. 손권으로부터 전군을 위임받은 육손이 이들을 상대하는 동안 유비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육로로 진군할 생각이었으나 육손이 이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에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222년 봄부터 유비는 다시 공세를 폈다. 황권은 형주로 더욱 깊숙히 쳐들어가면 전세가 불리해질 경우 후퇴하기가 어려울 것을 우려해 유비에게 전선 지휘를 자신에게 맡기고 후방에 머무르도록 권하였으나 유비는 이를 기각하고 황권에게 수군을 이끌고 장강 북안을 따라 계속해서 하류로 내려가도록 한 후 자신은 이도(夷道)를 따라 진군해 손환을 이릉성으로 몰아넣고 성을 포위했다. 손환이 육손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육손은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부장들에게 "내게 촉군을 물리칠 계략이 있으니 참으라"고 말하며 구원 요청을 묵살했다. 이 시점, 육손은 촉군에게 점차 밀려 삼협 내의 모든 거점을 잃고 후방인 강릉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고, 많은 장수들은 육손의 군사적 재능을 불신해 육손은 부하 장수들에게 손권에게서 받은 검을 내보이며 권위를 세워야 할 정도였다.

 

유비는 승세를 타고 효정으로 진군하면서 마량(馬良)을 만족(蠻族)에게 보내어 이들을 회유했고, 여기에 사마가(沙摩柯) 등이 호응해 오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육손이 요새화한 진영에서 수비로 일관하며 촉군의 도발에도 응하지 않자 전선은 교착되었고 촉군의 사기도 점차 떨어졌다. 이 때, 유비는 전선 주변부에 50여 개의 진을 세워 두고 유사시에는 서로 지원하게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조비는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 많은 진영들을 세워두고 전쟁을 하려는 것인가? 유비는 반드시 패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릉 전투

222년 6월, 육손은 촉군의 강약을 시험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으로 촉군 진영을 공격하도록 했다. 공격에 나섰던 오군은 촉군의 반격을 받고 몹시 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육손은 여러 진영에 분산된 촉군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계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무렵, 유비가 이끄는 촉군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비교적 시원한 숲으로 진영을 옮긴 상태였는데, 이를 탐지한 육손은 대대적인 화공으로 촉군을 공격했다. 이를 위해 육손은 수군을 적진으로 급파하는 한편 육상에서도 전군을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촉군 진영들의 주변에 불을 놓은 후 맹공을 가했다. 수많은 진영들이 동시에 화공과 기습을 받는 사태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던 촉군 진영들은 혼란에 빠졌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각개격파식으로 무너졌다. 전황이 위급해지고 진영들이 서로 도울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유비 역시 본진을 포기하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수군은 육상군의 대패로 인해 수십여 진영이 삽시간에 함락당하자 퇴로가 끊겨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도 오군의 추격을 뿌리칠 방법이 없게 되었으므로 지휘관인 황권은 위에 항복하고 오군은 수많은 군선과 병기를 노획했다. 이 때 40여 채 이상의 촉군 진영들이 오군의 손에 떨어졌고, 유비는 효정과 이릉에서 퇴각한 후 다시 진을 세우고 패잔병을 수습해 오군에게 대항해 보려 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 이 시도 역시 오군의 공격으로 인해 무산되어 유비는 백제성까지 후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일련의 전투에서 촉한은 풍습, 부동, 장남, 왕보, 마량 등 다수의 무장들과 수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전후

이릉 전투의 대패 이후 촉한은 멸망할 때까지 형주로 다시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게 되었다. 유비는 의형제들의 죽음과 패전으로 인한 자책감과 슬픔, 허탈함이 겹쳐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번민하다가 223년,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백제성에서 사망했다. 한편 오군이 역으로 촉을 침공할 것으로 예상한 조비는 손권과의 우호를 일방적으로 깨고 조인, 조휴, 조진, 하후상 등에게 명령해 오를 침공하도록 하였으나, 촉군을 대파한 뒤 본국으로 되돌아와 이미 위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던 오군에게 오히려 역습당해 패배, 후에 손권이 촉과 제휴하는 데에만 일조하게 되었다. 이릉 전투로 확정된 오와 촉 양국의 경계는 이후 263년 촉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이릉 전투

연의에서는 유비 장비의 죽음 후 75만의 대군을 일으켜 를 공격한다. 서전에서 관우의 차남 관흥과 장비의 장남 장포가 유비 앞에서 의형제지간이 되고 이 둘은 손환의 부하 장수로 나오는 이이, 담웅, 사정 등을 죽이고 촉군의 승리에 기여한다. 이로 인해 손환은 이릉성에서 3천 명의 병력으로 농성하게 되고, 뒤이어 오군 본대를 이끌고 출전한 용장 한당, 주태 역시 촉군에게 패배하여 오는 수세에 몰린다. 병을 앓는 와중에도 참전한 감녕은 후퇴하던 중 만왕 사마가의 화살에 맞아 숨지고, 관우를 사로잡고 청룡도를 받았던 반장은 관흥에게 쫓기다가 관우의 망령을 보고 놀란 사이에 관흥에게 죽임을 당한다. 미방은 촉군의 연전연승으로 인해 불안해 하다가 반장의 부장으로 실제로 관우를 포박했던 마충을 암살한 후 그의 목을 가지고 촉군 진영으로 가 유비에게 항복해 용서를 받으려다가 분노한 유비에게 처형된다. 위기를 느낀 손권은 범강 장달을 죽여 유비와의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으나 유비는 이를 거부하고 손권과의 결전에 임한다. 이 와중에 노장 황충은 자신의 정정함을 과시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으로 오군을 공격했다가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손권이 유비를 막을 인물을 찾자 감택 육손을 추천하여 육손은 대도독이 되어 곧바로 전선으로 부임,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부하 장수들을 제지하며 촉군과는 대치만 하다가 222년 여름에 유비가 진영을 숲 속으로 옮긴 것을 노려 화공을 가해 촉군을 완파한다. 이후 촉군을 추격하던 육손은 어복포(魚腹浦)에서 제갈량의 석진(石陣)에 갇혀 익사할 운명이 되었으나,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나타나 도와줌으로서 살아나게 된다. 한편 다른 길로 유비를 쫓던 주연은 추격 도중 조운의 구원군과 맞닥뜨려 조운에게 죽임을 당한다.

 

양군의 전력

육손전(陸遜傳)에는 이 전투에 참가한 오군의 병력이 5만 명, 촉군은 "대군"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위서 문제기(魏書 文帝記)의 주(註)에 나오는 222년 2월 8일자 손권의 상소문에 의하면 「유비는 4만 병력과 2천-3천 군마를 이끌고 자귀를 출발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선주전(先主傳)에는 「222년 정월, 유비는 자귀에 주둔하고, 오반과 진식 등은 수군을 이끌고 이릉에 진을 쳤다」, 「2월에 선주(先主)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자귀를 떠나 효정으로 진격하였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촉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오주전((吳主傳)에는 「죽거나 투항한 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고 적혀 있고 육손전에도 촉군 전사자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유엽전(劉曄傳)의 주에는 「육의(陸議, 육손)의 군사는 8만여 명을 죽였다」라고 나와 있으나 이 8만여 명은 오나라를 공격하는 데 동참한 만족의 민간인들도 포함한 수치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촉군이 오군을 상회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확증은 되지 않는다. 참고로 자치통감은 촉군의 전력을 4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갈량의 북벌

 

북벌
날짜 228년-234년
장소 지금의 중국 간쑤 성, 산시 성 일대
결과 위나라의 전략적 승리이자 촉나라의 전략적 승리. 그러나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촉의 패배.
교전국
촉나라 위나라
지휘관
제갈량 사마의
조진

 

제갈량의 북벌(諸葛亮 - 北伐)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이 추진한 군사 정책이다.

촉한은 후한(後漢)을 계승한 왕조이기 때문에 후한을 무너뜨린 위나라(魏)를 정벌해야 한다는 유비의 사명을 제갈량이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시행되었다.

 

제갈량의 제1차 북벌
날짜 227년~228년
장소 위나라 남안, 천수, 안정, 가정 일대
결과 전략적으로는 위나라의 승리
교전국
촉나라 위나라
서강병
지휘관
제갈량
조운
마속
관흥
장포
등지
맹달
위연
왕평
사마의
하후무
조진
한덕
곽회
강유
최량
양릉
마준
월길
병력
10만 명 30만 명
서강병 25만 명
총병력 55만 명

제1차 북벌

226년 위나라에서 초대 황제 조비가 사망하고 22세의 젊은 황제 조예가 즉위한다.

 

사마의 서량 자사로 떠나자 제갈량은 부하 마속을 시켜 사마의가 역모를 꾸민다는 거짓 방을 붙여 사마의를 물러나게 만드는 계책을 편다. 사마의 조예의 명령으로 물러나자 227년에 제갈량은 유선(劉鮮)에게 출사표(出事表)를 상주하여, 북벌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이후 전쟁 준비에 들어가고, 228년에 제갈량은 기산으로 제1차 북벌을 개시했다.

 

이에 위나라에서는 하후연의 아들이자 조조의 사위인 하후무를 대도독으로 삼아 내보낸다. 하후무는 부하 한덕을 선봉으로 삼고 조운과 대치한다. 한덕은 네 아들들을 내보내 조운과 맞서 싸우게 하지만 조운은 한덕의 네 아들의 목을 모두 벤다.

 

전투에 크게 패해 남안성으로 달아난 하후무는 10일 넘도록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도록 하였다. 시간이 급박하게 되자 제갈량은 부하 등지에게 배서를 시켜 근처에 있는 안정 태수 최량에게 거짓 교서를 보내게 한다. 남안성으로 구원병을 보내러 가던 최량은 관흥과 장포의 기습으로 크게 패해 사로잡히고 안정성은 위연의 손에 넘어간다.

 

제갈량에게 자신의 양아버지의 조카이자 남안 태수 양릉을 설득해 데려오라고 지시해 풀어난 최량은 양릉을 만나 제갈량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이미 발각당해 최량 양릉 모두 관흥과 장포에게 죽고 하후무는 달아나다가 촉장 왕평에게 사로잡힌다.

 

제갈량은 등지에게 명령해 천수성을 공격하라고 명해 배서를 시켜 천수 태수 마준에게 똑같이 교서를 보내지만 마준의 부하로 있던 강유가 이를 이미 알아차리고 기습을 해 공명은 크게 패한다. 강유의 능력을 탐낸 제갈량은 계책을 세우고 위연을 시켜 강유의 모친이 있는 기현성을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강유를 설득하라고 명령해 하후무를 풀어주고 제갈량은 부하들을 시켜 하후무에게 강유가 배신을 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기현성을 위연에게 빼앗기고 떠돌던 강유는 제갈량에게 귀순하고 친분이 있던 마준의 부하 양서 윤상을 귀순시켜 천수성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

 

하후무와 마준이 도망가자 조예 왕랑의 추천으로 대장군 조진에게 20만 군사를 주어 제갈량을 막으려 하지만 크게 패하고 조진 서강병의 왕 월길의 25만 대군을 끌어들어 촉군을 막으려 하지만 제갈량의 계책으로 서강병도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조예는 사마의를 다시 불러들인다. 한편 제갈량은 옹주 양주 지방을 대부분 수복하였고 곧이어 부하 이풍에게서 옛 촉의 사람이었던 신성 태수 맹달이 낙양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전한다. 맹달은 금성 태수 신의 신탐을 설득하지만 신의가 배신하면서 맹달의 음모는 발각되고 결국 사마의와 서황이 신성을 공격하고 신탐 신의 형제에 의해 맹달은 결국 목이 베어진다.

 

맹달이 죽자 제갈량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마속 왕평을 보냈으나, 가정에서 마속이 그릇된 군사 행동을 하여 패하였고, 제갈량은 군대를 철수한다. 위의 장수 곽회와 부장 만정의 군대는 조운의 군대를 추격했으나, 조운의 활약으로 추격이 저지되었다.

 

촉한으로 돌아온 제갈량은 마속을 참수하고(읍참마속<泣斬馬謖>,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 유선에게 상주하여 자신의 직위를 우장군으로 낮추었다. 그러나 승상의 직무는 계속 행했다.

 

 

제갈량의 제2차 북벌
날짜 228년
장소 위나라 진창, 기산 일대
결과 전략적으로는 위나라의 승리
교전국
촉나라 위나라
지휘관
제갈량
강유
관흥
장포
위연
사웅
공기
조진
왕쌍
비요
학소
손례
병력
15만 명 30만 명

제2차 북벌

228년 위나라 오나라를 공격하다가 석정 전투에서 크게 패해 힘이 약해진다. 이 틈을 노려 제갈량이 2차 북벌을 계획하지만 그 전에 촉나라의 마지막 오호대장군이던 조운이 사망하고 만다.

 

제갈량은 황제 유선에게 후출사표를 올려 2차 북벌을 개시한다. 제갈량이 군사를 일으키자 소식은 조예에게로 전해져 조예는 대장군 조진과 부하 왕쌍을 내보낸다. 제갈량은 진창성을 목표로 삼아 공격하지만 진창성의 장수 학소의 격렬한 저항을 20일 동안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고 동쪽에서 조진 왕쌍이 이끄는 구원군이 온다. 이에 촉나라의 장수 사웅 공기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막으려 했으나 사웅과 공기 모두 왕쌍에 의해 죽고 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이에 강유가 조진에게 거짓으로 항복을 하고 조진은 부하 비요에게 5만 군사를 주어 촉군을 습격하려 하지만 강유의 함정에 빠져 크게 패하고 비요는 자살한다. 이에 조진의 부하 손례가 함정을 파려는 작전을 세우지만 제갈량의 기습으로 손례는 크게 패하고 만다. 하지만 촉군 역시 군량 부족으로 인해 후퇴하고 제갈량은 위군 쫓아올 것을 대비해 계책을 세운다.

예상대로 조진의 부장 왕쌍이 촉군을 추격했으나 촉의 장수 위연에 의해 목이 베이고 만다.

 

제갈량의 제3차 북벌
날짜 229년
장소 위나라 진창, 음평, 무도
결과 전술적으로는 촉나라의 승리
교전국
촉나라 위나라
지휘관
제갈량
관흥
장포
강유
위연
사마의
장합
곽회
손례
학소
병력
10만 명 15만 명

제3차 북벌

제2차 북벌의 실패 후 229년 제갈량은 진창성의 장수 학소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제갈량 위연 강유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진창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관흥, 장포와 함께 진창성을 몰래 기습 공격한다. 학소는 결국 병으로 죽고 진창성은 함락된다.

 

뒤이어 제갈량은 촉나라와 국경을 접하는 요충지인 무도 음평을 공략하기 위해 강유 왕평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주어 각각 공략을 하게 하고 사마의 곽회 손례에게 지원군을 주어 막게 하였으나 이미 두 곳은 함락되고 곽회와 손례는 크게 패한다. 그러나 곽회와 손례를 뒤쫓던 장포가 벼랑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당하고 성도로 이송된다.

 

사마의는 장합과 함께 다시 공격을 하려 하지만 다시 크게 패하고 만다. 이에 사마의는 방비만 할 뿐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계책을 쓰려 한다. 장합은 다시 촉군을 공격하지만 제갈량의 함정에 빠져 또다시 패하고 만다.

 

그러나 제갈량은 역시 성도에서 장포가 상처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에 걸려 계책을 더 이상 쓰지 못한다. 그 뒤 제갈량은 사마의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한중으로 철수한다.

 

위의 반격
날짜 230년
장소 위나라 기곡, 기산 일대
결과 전술적으로는 촉나라의 승리
교전국
촉나라 위나라
지휘관
제갈량
관흥
위연
진식
등지
사마의
조진
유엽
병력
10만 명 50만 명

위의 반격

230년 위나라의 대장군 조진 사마의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를 침공한다. 그러나 진군 도중 큰비가 내려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철수 과정에서 복병을 두는 문제가 일어나 사마의 기곡에 복병을 두었으나 조진 사곡에 진을 쳤다. 제갈량 위연 진식에게 군사를 내주어 위군을 추격하지 말라고 했으나 위연과 진식은 명을 듣지 않고 기곡으로 갔다가 사마의의 복병으로 대패한다.

 

이에 공명은 방비를 소홀히 한 조진을 기습 공격해 승리를 거두고 조진은 병으로 사망한다. 이에 조예가 사마의에게 조진의 복수를 하라고 명하고 사마의는 제갈량과 진법 싸움을 한다. 사마의가 혼원일기진을 펼치자 제갈량은 팔괘진을 펴 위군을 위협하고 사마의는 부하 대능, 장호, 악침을 시켜 팔괘진을 뚫으려 하지만 크게 패해 사로잡힌 후 돌려보내 진다.

 

전투에서 패하고 사방에서 몰려오자 사마의는 겨우 남쪽을 뚫고 탈출한다. 제갈량은 많은 승리를 거두고 중원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이엄의 부하 구안이 제갈량에게 앙심을 품고 위나라에 항복하는 바람에 회군 명령으로 인해 한중으로 물러난다.

 

제갈량의 제4차 북벌
날짜 231년
장소 촉나라 노성, 검각
결과 전술적으로는 촉나라의 승리
교전국
촉나라 위나라
지휘관
제갈량
양의
관흥
강유
사마의
장합
곽회
손례
병력
10만 명 20만 명

제4차 북벌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북벌을 감행한다. 제갈량은 그 동안 문제가 되었던 군량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서 지방에서 보리를 수확해 조달하기로 한다. 이에 위나라의 사마의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농서를 공격하나 제갈량은 무사히 보리를 수확해 노성으로 운반한다.

 

결국 사마의는 지구전으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옹주 양저우 시양주에서 위나라의 20만 대군이 노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노성의 군사들에게 3달마다 한중으로 귀향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제갈량이 한 번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말하자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위군을 기습 공격으로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오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한다는 이엄의 거짓 상소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촉군은 한중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촉군을 뒤쫓아오는 장합을 활을 쏘아 죽인다.

 

제갈량의 제5차 북벌
날짜 234년
장소 위나라 오장원, 북원, 위수, 기산
결과 전략적으로는 촉나라의 패배
교전국
촉나라 위나라
지휘관
제갈량
강유
마대
위연
양의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곽회
손례
병력
12만 명 30만 명

제5차 북벌

제갈량은 4차 북벌의 실패 후 3년 동안 국력을 키우는 데에 집중하고 북벌을 계획하지만 그 중에 관흥이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준비를 한다.

 

드디어 234년에 제5차 북벌을 감행해 장안에서 위나라의 주력 부대를 무찌르기로 하여 오장원에 진을 친다. 그리고 제갈량은 기산에 본진을, 사곡 검각 사이에 진영을 친다. 한편 사마의 위수 기슭에 진을 치고 곽회 손례에게 북원에 요새를 마련해두고 적의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제갈량은 북원을 공격하는 척하며위수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사마의의 반격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이에 제갈량 비의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손권에게 군사를 일으키라는 전한다. 손권은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의 조예와 격전을 벌였으나 육손이 이끄는 선발대가 위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오군은 철수하고만다. 결국 제갈량은 마지막으로 사마의를 죽이기로 결정해 사마의를 호로곡으로 유인해 화약을 터뜨린다.

 

그러나 때마침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사마의는 호로곡을 무사히 빠져나간다. 한편 제갈량은 지병이 재발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7일 동안 기양법을 한다.

 

하지만 위연의 실수로 6일째 되는 날 등불 하나를 꺼뜨리고 병세가 악화된 제갈량은 다음날 사망한다. 그리고 촉군의 신속히 퇴각을 하는데 퇴각 도중 위연과 양의가 의견차로 갈라서고 강유, 양의, 마대가 위연을 모살한다.

 

양의 역시 성도로 돌아간 후 파직되고 자살한다. 하지만 제갈량의 죽음으로 촉나라는 크게 쇠퇴한다.

연의에서의 북벌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은 6번의 북벌을 행하였다고 나와 있다.

북벌의 결과

촉한은 삼국 중 가장 국력이 미약했으며 영토 또한 가장 적었다. 특히 북벌의 대상인 위나라는 삼국 중 가장 국력이 강했고 군사력은 대략 다섯배 정도 차이가 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갈량은 수차례 북벌을 감행함으로써 촉한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촉한은 익주라는 불리한 산간지형에 위치했으며 형주 또는 북쪽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위나라에 당할수 밖에 없었다. 북벌은 그런 상황에서의 타개를 위한 촉한의 마지막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차라리 위연의 계책처럼 자오곡으로 습격해서 사마의를 기습하거나 아니면 준비를 철저하게 해서 북벌을 준비했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여러번 북벌을 감행하고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시종일관 수비가 아닌 공세로 일관했다는 것 만으로도 제갈량의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오곡 기습 작전은 촉군에게는 너무도 큰 도박이었다. 사마의가 이끈 위의 군사는 위나라 전력의 일부였다. 사마의는 패배하더라도 전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이끌고 간 촉의 군사는 촉나라 전력의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국의 전력을 걸고 기습 작전을 감행하기에는 실패의 위험이 너무도 컸다. 기습이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만일 기습이 실패한다면 촉나라는 바로 멸명하고 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갈량은 기산을 거점으로 하여 정석대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정전투

 

가정 전투
날짜 228년
장소 촉나라 가정
결과 장합(위나라)의 승리, 이 전투로 인하여 제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마속은 군법 위반으로 처형되었다.
교전국
촉한
위나라
지휘관
제갈량
마속
왕평
조예
조진
장합
피해 상황
명확하지 않음(마속이 이끄는 선봉대 궤멸) 명확하지 않음

 

가정 전투는 촉한의 제1차 북벌 중에 일어난 촉한과 위나라의 전투이다.

 

남안, 천수, 안정 3군의 호응을 받고 진격해 나아가던 촉한 군에 대해, 위나라에서는 명제가 명령하여 조진에게 제군을 지휘하게 하여 미에 주둔케 하고, 장합에게 제갈량을 막게 했다. 당시 숙장인 위연, 오의를 선봉으로 세우는 것이 중론이었으나, 제갈량은 이 전투에서 마속에게 선봉을 맡기고 가정에서 장합과 더불어 싸우게 했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를 어기고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로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부장인 왕평은 산 밑의 성을 점거하고 위나라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를 기각하고 산꼭대기에 진을 쳤다.

 

위나라 장수 장합은 촉한의 마속이 산꼭대기에 진을 쳤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산을 포위한 채 공격하지 않고 내버려 뒀으므로 전투는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전투가 이렇게 진행되면서 마속의 부대는 식수와 식량이 고갈되기 시작했으나 위나라 군대에 포위당한 상태였으므로 보급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사기가 떨어진 촉한의 군대는 장합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에 대패하고 마속이 이끄는 부대는 모조리 궤멸했다.

 

마속이 가정을 잃자, 제갈량은 전진할 곳을 잃어 한중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로써 제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갈량은 패배의 화근이 된 마속을 군법에 회부시켰으며 참수 조치했다. 많은 장수들과 참모들이 마속의 참수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개인의 재능이나 친분보다 군율을 먼저 생각했으므로 마속의 참수를 강행했다. 또 자신도 패배의 책임을 지고 직위를 깎아 승상에서 우장군·승상사가 되었다.

 

 

석정전투

 

석정 전투
날짜 228년
장소 오나라 양주 석정 일대
결과 오나라의 승리
교전국
위나라 오나라
지휘관
사마의
조휴
육손
주방
서성
전종
주환
병력
10만 명 6만 명 초과

 

석정 전투228년 삼국시대위나라오나라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당시 제갈량의 제1차 북벌을 막은 데 성공한 위나라사마의는 양주 도독 조휴로부터 오나라 양주 파양 태수 주방이 위나라를 돕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사마의위나라 황제 명제에게 소식을 알리고 군사를 일으키려 하지만 가규가 반대한다. 명제는 일단 조휴에게 명해 오나라를 치게 하고 사마의를 시켜 조휴를 돕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나라의 함정이었는데 조휴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석정으로 진격한다. 한편 오군 총대장 육손서성을 선봉으로 세워 70만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여 석정 산속에 매복 부대를 배치한다. 그 사이에 주방은 도망가고 조휴는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해 수십 기의 병사만 데리고 겨우 달아난다. 조휴의 소식은 사마의에게 전해져 사마의 역시 철군을 하고 이는 촉나라에도 전해쳐 제갈량이 다시 제2차 북벌을 일으킨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석정 전투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 전투에서 오나라의 장수 정봉이 위나라의 맹장 장료를 화살로 쏘아 죽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촉한이 멸망의 위기에 몰렸을 때 정봉이 자신의 동생인 정봉을 부장으로 삼아 촉한의 구원병으로 출동했지만 촉한의 최전방 수비대장인 마막이 등애가 오자마자 싸우지도 않고 바로 항복하는 바람에 정봉 형제가 이끈 오나라의 구원군이 촉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촉한이 위나라에 항복한 이후였으며 유비제갈량의 도움을 받아 건국한 촉한을 최후까지 도와주려 한 정봉의 은혜를 나관중이 잊지 못한 나머지 정봉에게 장료를 사살했다는 무훈을 덧대어준 것일 뿐이다.

 

 

강유의 북벌

 

강유의 북벌
날짜 249년, 253년, 255년, 262년
장소 철롱산, 옹주
결과 촉군의 모든 북벌 패배, 국력의 소모로 멸망의 원인이 됨
교전국
촉나라 위나라
지휘관
강유
하후패
장완
비의
사마사
사마소
등애
곽회

 

강유의 북벌249년부터 262년까지 촉나라강유가 추진한 군사 정책이다.

 

제갈량이 죽은 뒤 강유가 그 후임을 이어받는다. 강유위나라를 칠 기회를 보다가 위나라에서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있던 조상을 죽이자 그의 친족이던 하후패가 촉에 투항하면서 첫 북벌을 시행한다.

 

하지만 강유는 첫 북벌에서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의 강력한 방어로 물러난다. 강유의 제1차 북벌은 장완과 비의가 주도하여 '장완, 비의의 북벌' 이라고도 불린다. 그 후 253년 다시 강유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사마의의 둘째 아들 사마소가 이끄는 위군을 격파하고 철롱산을 포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곽회가 이끄는 위의 지원군이 와 실패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곽회가 강유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것으로 나온다.

 

255년에 강유는 또 다시 사마사가 죽은 틈을 노려 북벌을 시행하지만 위의 장수 등애의 함정에 빠져 크게 패하고 이 전투에서 하후패까지 전사한다. 강유는 262년에 다시 북벌을 시행해 등애를 몰아부치는 데에 성공하지만 촉나라의 환관 황호가 등애의 뇌물을 받아 군사를 물리라는 상소를 올리자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 후 강유는 답중으로 내려가 군사를 기르며 기회를 보았으나 263년 위군의 공격으로 촉나라가 멸망하자 실패한다.

 

 

위의 촉 정벌

 

위의 촉 정벌
날짜 263년
장소 남정관, 낙성, 양안관, 한성, 면죽관, 검각
결과 촉나라의 멸망
교전국
촉나라
오나라(구원병)
위나라
지휘관
강유
부첨
제갈상
제갈첨
장준
마막
장익
요화
동궐
정봉 (구원병)
정봉 (구원병)
손이 (구원병)
등애
종회
병력
100,000여명 추정 200,000여명 추정

 

위나라의 촉 정벌263년 위나라의 장수 종회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로 진격하여 촉을 멸망시킨 사건이다.

 

당시 촉나라강유의 북벌 실패와 황제 유선의 항락과 사치, 환관 황호의 농간으로 크게 쇠퇴해 있었다. 이를 틈타 위나라의 장수 종회사마소에게 촉나라 정벌을 허락 맡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로 진격했다. 이에 종회의 라이벌 등애도 군사를 이끌고 촉나라 정벌을 했다. 종회는 먼저 남정관낙성 등을 함락시키고 양안관에서 그곳을 지키던 장수 부첨까지 죽였으며, 한성에서는 촉군을 격파했다. 종회는 촉나라의 마지막 남은 장수 강유검각에서 대전투를 벌였으나 강유의 강력한 저항으로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한편 등애는 군사들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는데 강유성에서는 그곳을 지키던 촉의 장수 마막이 지형만 믿고 방심을 하다 위군이 쳐들어오자 항복을 했고 면죽관에서는 제갈량의 아들 제갈상제갈첨, 장비의 손자 장준이 등애에 맞서 강력히 저항을 했으나 전사했다. 한편 제갈첨은 사촌인 오나라의 중신 제갈각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제갈각이 이에 응하였으며 정봉이 제갈각의 의견에 동의하여 스스로 나서서 자신은 위나라가 촉한을 공격하는 데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수춘을 공격했으며 친동생인 정봉손이와 함께 촉한을 도와주기 위한 구원병을 이끌고 성도로 급하게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으나 마막 등 일부 수비대장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바람에 동생 정봉이 촉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촉한은 유선이 항복하여 멸망한 이후였다.

 

강유를 제외한 촉의 모든 군대가 패하자 황제 유선은 결국 항복을 결정하고 등애가 유선의 항복을 받아 성도로 입성한다. 그 후 강유는 장익, 요화, 동궐 등과 함께 위의 장수 종회에게 항복하여 촉나라를 부활시키기 위해 자신이 항복한 종회를 꼬득여서 같이 반 사마소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자결했으며 종회는 잡혀서 처형되었다. 이로서 위가 촉을 무너뜨리고 천하 통일의 기초를 잡았다.


 

진의 오 정벌

진의 오 정벌
날짜 280년
장소 오나라 전역
결과 오나라 멸망, 서진의 천하통일
교전국
서진 오나라
지휘관
두예
왕준
당빈
왕혼
육경
오영
장제
심영
육안
손흠
장상
성기
제갈정
병력
장제, 심영 3만
피해 상황
군사 7800명 전사

 

진의 오 정벌280년 서진사마염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멸망시킨 일로 서진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했다.

 

당시 사마염265년 촉나라를 멸망시킨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 자리에 올라 서진을 세웠다. 그리고 오나라264년에 즉위한 폭군 황제 손호가 다스리고 있었다. 276년 10월에 정남장군 양호가 오나라를 정벌하자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거절되었다. 이에 278년 오나라가 양주 자사 응작을 사령관으로 삼아 환성에 주둔한 오군을 이용해 서진을 공격하려 했으나 도독양주제군사 왕혼의 활약으로 오군 5000명이 전사하고 전선 600척이 격침되는 참패를 겪었다. 그리고 279년 진남대장군 두예와 익주 자사 왕준이 상소를 올려 사마염의 마음을 움직여 280년 오나라를 정벌하라는 사마염의 명령이 떨어져 오나라 정벌군이 편성되었다.

 

사마염은 두예를 대도독을 봉해 강릉을 공격하게 하였고 두예는 강릉독 오연을 죽이고 강릉을 함락시켰으며, 형주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면서 원수와 상수 일대와 광주의 모든 고을이 인수를 바치며 서진에 항복해왔다. 두예는 형주 지역을 평정했고 이 과정에서 파죽지세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한편 익주 자사 왕준당빈과 함께 오나라 단양감 성기를 무찌르고 장강을 따라 진격했다. 이에 오나라는 장강 바닥에 쇠사슬과 쇠송곳을 깔아두어 강을 따라 내려오는 진나라 전함들을 가라앉게 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알아챈 왕준이 큰 뗏목 수십 개를 떠내려 보내 쇠송곳과 쇠사슬을 치우고 진격하였다. 왕준은 이도감 육안, 도독 손흠, 수군도독 육경 등을 죽이고 무창을 함락시켰다. 오나라는 장상을 보내 막게 했으나 오히려 장상은 서진 군대에게 항복했다.

 

또 한편 안동장군 왕혼은 강서를 공격해 오나라는 승상 장제와 좌장군 심영, 제갈정 등에게 3만 군사를 주어 맞서게 했으나 오군은 오히려 장제와 심영은 전사하고 군사 7800명이 전사했다. 다른 전선의 오군들도 격파하고 마침내 왕준이 오나라 수도 건업 석두성 앞까지 진격해 오나라 황제 손호의 항복을 받아 석두성에 입성했다.

 

결과 및 영향

소식은 곧 서진 황제 사마염에게도 전해졌고 오나라 황제 손호는 서진 수도 낙양으로 끌려야 귀명후에 봉해져 죽었다. 이로써 서진의 사마염에 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했다. 이후 잠시 오나라에 항복했던 장수이자 그 당시 최고의 용맹을 지닌 장수인 문앙은 참수당했다.